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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에게 배우는 수행의 지혜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에게 배우는 수행의 지혜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로마 가톨릭 관상의 원조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래 글을 통해 관상의 영성에 대해 살펴보자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에게 배우는 수행의 지혜
기자명 고진석   입력 2012.09.20 
자료출처 https://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86
 
고진석 신부 강의록 전문
버리고 사노라 자부하는 수도자들이 가장 버리기 힘든 게 명예욕이 아닌가 싶습니다. '관상과 실천'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부탁받았을 때도 몰랐습니다. 제가 강의 주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솔직히 고백합니다만 저는 살이 떨릴 정도로 하느님과 깊은 대화도 나누어 본 적도 없고 가슴 아프게 세상 사람들과 울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제 주제도 모르고 덥석 피정 강의를 승낙한 것은 아마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라는 후광을 등에 업고 이름을 날려 보려는 얄팍한 계산이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앞서 간다는 분들이 즐겨 보는 언론매체니 거기에 슬쩍 발이나 담가 놓으면 저 역시 깨인 사람 부류로 보아 주겠거니 생각했습니다.

허나 강의 준비를 위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개최한 강연을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정말 큰일났구나’ 탄식을 했습니다. 강사나 강연들의 수준이 너무 높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나 아렌트도 모르고 시몬느 베이유도 모릅니다. 토마스 머튼, 도로시 데이, 본회퍼 같은 분들도 겨우 이름만 주워 넘길 뿐입니다. 저는 글이고 강의고 간에 어려운 말은 도무지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강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이런 저의 한계를 감안하시고 들으시라는 뜻입니다.

사서오경의 심오한 뜻을 가르치는 대가들이 있다면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깨치게 하는 선생들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너무 큰 기대를 가지지 마시고 저를 훈몽선생 정도로 생각하시고 편한 마음으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다행히 제 강의가 본 게임이 아닙니다. 이번 강의에서 모자란 부분은 오후 한상봉 선생의 강의와 밤에 강의하실 이현주 목사께서 채워 주시기를 믿으며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 고진석 신부
차마 하지 못한 질문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갔다가 고등학교 동창 녀석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모였다 하면 정치와 사회 문제로 열을 올렸던 녀석들이라 금세 토론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한 녀석이 다른 친구의 의견을 듣더니 "근데, 네 의견이 너무 '나이브'한 거 아니야?"라는 말을 뱉었습니다. '의견이 나이브하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이지?'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다 알아들었는지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습니다. 분위기 깨기도 그렇고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묻기도 창피했습니다. 녀석들과 헤어지고 나서도 나이브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나이브의 뜻을 아시나요? 나중에 인터넷에 검색해서 알아보니 우리말이 아니고 영어였습니다. '나이브(naive)하다. 세상 물정을 몰라 천진하고 소박하다.'

아마 관상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가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천이야 누구나 그 뜻을 알겠지만 관상은 알 듯 말 듯 합니다. 우리말에서 보면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재수나 운명을 판단하는 일을 관상(觀相)이라고 하고, 화초 같은 애완물 따위를 보고 즐기는 일도 관상(觀賞)입니다. 옛날에는 천문을 관측하여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일도 관상(觀象)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관상이라는 단어야말로 차마 하지 못하는 질문이 아닐까 합니다. 자주 듣기는 하지만 선뜻 의미는 다가오지 않고, 물어보려니 창피하고, 막상 물어보면 속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는 그런 말일 겁니다.


Contemplatio - Theoria

관상은 볼 관(觀)자에 생각 상(想)자를 씁니다. 그대로 풀어 보면 사물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여 관찰하는 일입니다. 교회 용어를 잘 풀어놓은 가톨릭대사전에서는 관상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마음이 사색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단순하고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응시하는 기도의 경지. 제가 신학교 다닐 적에 어느 교수 신부님은 점쟁이를 연상시키는 관상보다 관조가 더 나은 번역이라고 했습니다. 관조(觀照)는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보는 일입니다.

관상은 라틴어 콘템플라시오(contemplatio)라는 말을 한자를 빌려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함께 또는 같이’라는 뜻을 지닌 cum과 신전을 의미하는 templum이 합쳐진 말이라고 합니다. 로마 시대 제관들은 신의 뜻을 알아내기 위하여 신전에서 새나 짐승의 내장을 갈라 유심히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콘템플라시오는 '어떤 목적을 위해 사물이나 현상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테오레인'(theōrein)에서 나온 '테오리아'(theōria)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이 말은 세상과 우주의 오묘한 이치를 간파하는 깨달음, 곧 진리를 간파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쓰던 이 말을 그리스 교부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그리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빌려 썼습니다. 그분들은 이 철학 용어로 인간의 체험으로 알게 되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속성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테오리아는 하느님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관상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의미가 덧붙여진 말입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관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관상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성찰의 열매이자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관상은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는 순간 인간의 정신과 마음은 평정과 깊은 내적 평화의 상태에 들게 됩니다. 하느님을 찾아 헤매던 인간은 이 상태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맛보기 시작합니다."


반관상(半觀想), 반관상(反觀想)

제가 체험해 보지 못한 터라 똑 부러지게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관상은 하느님에만 홀딱 빠져 다른 데에는 관심이 없는 황홀한 경지라고 이해됩니다. 저도 십여 년 전 비장한 각오로 직장을 버리고 가족을 떠나 수도생활을 시작할 때 이런 체험을 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도 수도생활에 대한 비슷한 동경을 품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세속 일에 기웃거리지 말고 봉쇄 안에서 기도에만 전념하며 그 삶 자체로 교회와 세상에 헌신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한 세상사, 가족사에 끼어들지 않고 하느님만 만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실은 제가 이것에 필이 꽂혔는지 모릅니다. 흥미도 없고 힘에 부친 직장생활과 장남으로 맡아야 할 의무 같은 것이 부담스러웠고, 또한 점점 나를 조여 오던 결혼에 대한 압박감을 피부로 실감하던 시기였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한국에는 봉쇄 남자 수도원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세간 일에 정나미가 떨어져 하느님의 품에서 평화와 안식을 찾고 싶었지만 내심 그렇게 답답하고 엄격한 생활을 해낼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울질을 하던 중에 찾아낸 곳이 '지금 여기'입니다. 강의 전에 수도원을 둘러보셔서 아시겠지만 저희 수도원은 봉쇄관상 수도원도 아니고 사도직활동에 전념하는 수도회도 아닙니다. 닫혀 있는가 하면 열려 있고, 열려 있는가 하면 닫혀 있습니다.

우리끼리는 저희 수도원을 반관상(半觀想) 수도원이라고 합니다. 물론 잘만 살면 관상과 실천이 균형 잡힌 완전한 수도생활이 되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그리 만만한가요. 거의 불가능하지요. 밖으로 싸돌아다니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이건 제가 해 봐서 잘 압니다. 수도원 일과를 쫓아가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개인 명상기도는 고사하고 공동체 전례기도에 참석하기도 버겁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사도직활동마저 하느님의 일이 아니고 개인적인 업무로 전락해 버리는 안타까운 상황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조적으로 반관상(反觀想) 수도원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

전통적으로 교회는 수도생활이나 영성생활에 있어 관상의 우위성을 가르쳤습니다. 그 근거로 루카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제시됩니다(루카 10,38-42 참조). 여기에 나오는 상황은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입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손님이 오면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무슨 대접이라도 더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 우리의 심정입니다. 결국 회포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아쉬워하며 손님을 보내고 맙니다.

우리는 흔히 마르타를 사도직활동이나 실천가의 전형으로 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사소한 일들에 과도하게 신경쓰는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관상가의 전형으로 설정하고 그의 몫이 좋고 실상 필요한 것은 관상생활뿐이라는 이분법 혹은 흑백논리식의 판단을 내립니다. 관상이 영성생활의 본질이고 실천의 동력이 되기는 하지만 일방적으로 실천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 '마리아와 마르타 집의 그리스도'.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
복음에서도 열심히 일한 마르타는 예수님께 타박을 받았고 마리아는 은근히 칭찬을 듣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마르타는 실천가나 사도직 활동가를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이 배가 고픈지 목이 마른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마르타는 자기가 관심을 두고 있는 일, 음식 장만하고 시중드는 일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수고하는지 알아 달라고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를 깨버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귀여겨듣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분의 뜻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마르타는 집안일에 몰두한 지극히 평범한 여인이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 묵상하거나 또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마르타는 관상도 하지 않고 실천도 하지 않는 그냥 방관자로 지내는 그리스도인들의 전형입니다. 오히려 마리아가 나중에 관상가에서 실천가로 변모할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리아에게 결단을 요구할 것입니다. 투신을 위한 결단이죠. 예수님의 말씀이 마리아의 내면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다면 마리아는 주저 없이 현실로 뛰어들어 깨달은 바를 실천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실천을 수반하지 않은 관상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땅에 묻힌 한 달란트처럼 남들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허나 좋은 몫을 받고도 아무것도 벌어들이지 못한 종에게 주님은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마태 25,14-30; 마르 13,34; 루카 19,11-27 참조)


두 가지 오해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오해를 발견합니다. 첫째는 관상과 실천을 단순히 기능적 역할 분담으로 여기는 생각입니다. 마치 관상은 내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맡는 몫이고, 실천은 외향적인 성향을 띠는 사람들의 몫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관상과 실천은 독립된 두 분야가 아니고 영성생활의 두 측면을 반영합니다. 관상의 결핍은 실천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또한 실천의 결여 역시 관상을 핑계 삼아서는 안 됩니다.

둘째는 실천을 단순히 사도직활동이나 봉사활동으로 국한시키는 경향입니다. 실천은 가시적인 업적을 쌓고 우리들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행업이 아닙니다. 관상이야 예나 지금이나 그 의미가 변한 것이 없지만 특별히 실천의 의미는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관상의 열매를 애덕의 실천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사랑의 폭과 깊이만큼 실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은 범위의 일을 포함하며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애덕의 실천을 자선과 사회봉사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적 가치관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모든 시도와 노력들이 실천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수도생활의 본질적 요소

관상과 실천은 원래 영성신학, 특별히 수도신학에서 다루는 주제였습니다. 관상생활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도자들도 평신도와 똑같이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더 철저하게 따라 살겠다는 자신들의 서원을 충실히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일 따름입니다. 수도자들만이 아니라 세례성사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관상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서 실천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하여간 이 신학적 주제가 태동한 수도생활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구체적인 의미와 상관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수도생활은 이미 고대부터 종교를 불문하고 자리잡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수도생활은 독특한 형태의 삶인데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요소는 세상에서 멀어지기(fuga mundi)입니다. 수도자들은 세속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은둔하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세상과 멀어지려는 수도자들의 경향은 의복과 두발 형태 혹은 울타리 안에 있는 거주지 혹은 특별한 입회의식으로 드러납니다.

두 번째 요소는 금욕 수행입니다. 그들의 금욕 수행은 독신생활로 대표되며, 그밖에 가난의 실천 혹은 극도로 절제된 삶은 수행의 기본이 됩니다.

마지막 요소는 신비적 갈망입니다. 절대자의 존재에 대해 깨달으려 하고 그와 통교하고자 하는 갈망은 수도생활의 가장 깊은 토대입니다. 말하자면 관상은 수도생활의 핵심이며, 앞서 말한 두 가지 요소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연원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은 313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종교 관용령'을 반포한 이후에 생겨났습니다. 이 시대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겠다며 사막으로 떠났습니다. 그 이유를 확실히 밝혀내지 못했지만, 학자들은 박해 시대가 끝나고 느슨해지는 교회에 자극과 활력을 주기 위해 내려진 성령의 선물이라고 해석합니다.

수도생활의 뿌리는 세 갈래입니다. 그 첫 뿌리는 성 안토니오(251~356)입니다. 그는 이집트 사막에 홀로 살면서 오로지 기도와 노동에 열중하며 수행했습니다. 그는 은수 생활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고, 수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전통을 세웠습니다.

수도생활의 두 번째 뿌리는 성 파코미오(293~346)입니다. 그 역시 이집트 출신인데, 그는 은수생활을 하다가 코이노니아(Koinonia, 친교)라는 수도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는 수도규칙을 지었으며, 공주(共住)수도생활이라는 수도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수도생활의 세 번째 뿌리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출신인 성 바실리오(329~379)입니다. 그는 극단으로 치닫는 수도생활을 걱정하여, 수도규칙을 짓고 온건하고 사리에 맞는 수도생활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동체를 수도공동체의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대주교였던 그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을 강조하여 수도생활이 교회 안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오른쪽은 에바그리우스의 저서 '프락티코스―수행생활에 관한 가르침'(허성석 옮김, 분도출판사, 2011)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세 줄기로 자라난 수도생활을 이론으로 정리한 이가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345~399)입니다. 그는 345년에 폰투스(Pontus)의 이보라(Ibora)에서 태어났습니다. 교부 바실리우스에게 독서직을 받고 379년에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에게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바실리우스가 죽자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380년 고향을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간 그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여 모든 이단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이 일로 한 때 교만과 애욕의 유혹에 빠진 적도 있었으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383년 이집트로 갔습니다. 니트리아에서 2년 동안 살다가, 더 깊은 사막 켈리아에서 14년 동안 필사가로 일하면서 소량의 빵과 소금과 기름으로 금욕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저작들을 필사하고 문맹자들을 위해 책을 서술했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지식인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지식의 한계를 절감하고 단순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스스로 작은 이가 되려고 노력했고, 그들의 적대감을 침묵으로 인내했습니다. 깊은 학식과 통찰력의 소유자 에바그리우스는 399년, 54세의 나이로 귀천했습니다.


수행과 득도

에바그리우스가 수도생활을 주제로 하여 저술한 책들 중에서 <프락티코스>와 <그노스티코스>와 <켈팔라이아 그노스티카>가 삼부작을 이룹니다. 특별히 <프락티코스>는 수도생활을 시작한 초심자들을 위한 책이고 <그노스티코스>는 관상의 경지에 오른 수도승들을 위한 실천적 조언입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영성생활을 크게 프락티케(pratiké, 수행)와 그노스티케(gnostiké, 관상 · 인식)라는 두 영역으로 구분합니다. 프락티케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불순한 욕망과 감정을 정화하는 영적 투쟁입니다. 수행(修行)이라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그노스티케는 인간의 이성에 쌓인 무지를 걷어 내어 참된 지혜에 도달하는 영적 투쟁입니다. 이를테면 득도(得道), 즉 깨달음입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런 과정을 싸움이라고 했는데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상대하기 어려운 적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욕망을 버리고 자기를 이기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수도자들은 프락티케를 완수하여 그 목표를 도달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노스티케로 나아갑니다.


프락티케―여덟가지 악한 생각과 싸움

프락티케는 어떤 면에서 덕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신앙,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절제, 인내, 경험 등 이 다섯 가지 기본 덕이 프락티케를 구성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프락티케는 주로 로기스모이(logismoi), 곧 '악한 생각들과 싸움'입니다.

에바그리우스는 <프락티코스>에서 여덟 가지 주요 악한 생각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각각에 대한 치료법을 제시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한 생각은 악령을 말합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생각 뒤에는 그에 상응하는 악령이 있다는 옛사람들의 사고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프락티케는 악령과 싸움입니다. 악령들은 나쁜 생각을 이용하여 수도자들을 괴롭히고, 한편 수도자들은 악한 생각과 싸워 그것을 정복함으로써 그 배후에 가려져 있던 참된 덕을 발견합니다. 에바그리우스는 탐식,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 헛된 영광, 교만을 '여덟 가지 악한 생각'으로 꼽았습니다.

에바그리우스가 제시하는 '여덟 가지 악한 생각'은 어느 정도 경험에서 오는 논리적 순서를 따릅니다. 예컨대, 식욕을 채운 사람에게는 음욕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은 채우지 못하는 욕망 때문에 쉽게 슬퍼하거나 분노합니다. 헛된 영광과 교만은 다른 악한 생각과 맞서 승리한 수도자들에게 마지막 위협이 됩니다. 강의 시작에서 다른 욕구보다 명예욕을 버리기 힘들다는 말을 기억하시겠지요.

에바그리우스는 이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방식으로 영적 진보의 순서에 따라 여덟 가지 생각을 나열했을 뿐입니다.


아파테이아―프락티케의 목표, 그노스티케로 들어가는 관문

프락티케의 직접적인 목표는 아파테이아(apatheia)입니다. 아파테이아란 욕정의 부재를 뜻합니다. 이는 수행을 통해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욕정에서 자유로워진 영혼의 내적 평정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무감정, 무감각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아파테이아의 본뜻을 왜곡할 수 있는 부적절한 번역입니다. 아파테이아는 감정이 없는 상태나 감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욕정을 극복한 상태, 더는 욕정으로 동요되지 않는 초연한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의 정신이 일단 아파테이아에 도달하면 본질적인 인식에 다다를 때까지 여러 차원의 인식의 단계를 밟아 갑니다. 이 말은 궁극적인 최상의 깨달음, 즉 하느님을 관조할 때까지 점진적으로 우리의 눈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관상생활의 그리스어는 영지적 삶을 뜻하는 비오스 그노스티코스입니다. 에바그리우스에게 영지적 삶이란 하느님을 아는 삶입니다. 그는 이 삶을 자연에 대한 관상과 하느님에 대한 관상으로 나눕니다. 여기서 관상, 인식, 학문, 영지 등은 모두 그리스어 그노시스를 번역한 것으로 동일한 의미로 알아들으면 됩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인식을 퓌시케(physiké)와 테올로기케(theologiké)라는 두 차원으로 나눕니다. 전자는 보다 낮은 차원의 인식으로, 자연에 대한 관상 혹은 인식(자연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피조물의 창조 이유를 깨닫는 것입니다. 후자는 가장 높은 차원의 인식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관상 혹은 인식(신학)입니다.


관상, 그 다음은?

그노스티케의 단계를 관상이라고 하는 데는 무리가 없겠지만 프락티케의 단계를 실천이라고 해석하기는 애매합니다. 에바그리우스는 프락티케를 개인의 영적 수행을 위한 활동으로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애덕의 실천 혹은 복음 선포의 의미를 갖는 대사회적인 실천으로 확대해 보기는 힘듭니다.

저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수행을 통해 관상에 이르고 관상의 열매로써 실천이 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하느님은 성사나 전례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특별한 하느님 체험이나 깨달음 없이도 현실 참여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준비 없이 참여하는 예식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를 만나며 무엇을 체험할 것인가? 하느님의 말씀을 체득하지 않고 어떻게 그분의 사랑을 선포하며 실천할 것인가? 철저한 자기 성찰이나 내적 반성이 없이 행해지는 실천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과연 그게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행위일까? 관상과 실천 사이에서 많은 물음들이 오고 갑니다.

바른 수행이 참된 관상을 낳고 참된 관상은 투신을 요구합니다. 참된 관상가는 바른 수행자이며 진정한 활동가입니다. 그렇지만 수행과 관상과 실천이 일련의 과정처럼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실천을 해야만 올바른 사랑의 실천이 되겠지만, 사랑의 실체는 실천하면서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천이 역시 수행의 한 부분을 이루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면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겠지만, 제 생각에는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그분의 뜻을 더욱 절절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현실을 간파하는 눈

실천을 통한 관상과 관상의 결실로서 실천. 저는 이 두 가지가 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관상과 실천을 동전의 양면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물론 전자의 경우에는 실천이 곧 수행이어야 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관상이 수행의 결과이어야 합니다.

사실 관상과 실천의 관계는 이론과 실제의 관계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론이라는 영어 theory와 관상이라는 그리스어 theoria를 같이 놓고 보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채실 것입니다. 또한 실천 pratiké과 실제 practice란 단어를 보셔도 압니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사랑과 지식을 몸으로 체화하는 과정이 수행이고 실천입니다. 실천을 통해 관념적인 덕목과 가치들이 현실에 적용되는 지혜로 탈바꿈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론은 결코 실제가 되지 못합니다.

관상은 하느님과 만남 혹은 일치의 체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체험을 통해서 얻는 평화와 안식은 부차적입니다. 관상의 핵심은 분별의 지혜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세상의 어둠과 아픔을 통찰해 내는 시각을 얻지 못한다면, 관상은 자아도취나 황홀경 체험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또한 그분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무엇인지 알아내는 일이 분별입니다.


이 시대의 악령들

에바그리우스는 관상에 이르는 수행을 영적 투쟁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싸움의 상대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악령들을 개인의 내적 차원에서만 해석했지만 우리는 좀 더 사회적 세계적 차원으로 시각을 넓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현실 참여는 악한 개인들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들을 악하게 만들어 놓는 사회구조, 경제질서, 통치체제, 세속적 가치관과 같이 구조적인 세상의 악과 벌이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힘든 이유는 선과 악이 교묘하게 섞여 있거나 악이 선으로 혹은 그 반대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분별의 지혜를 갖추지 못하고 현실에 뛰어드는 일은 그야말로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전쟁판에 뛰어드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악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들도 존재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선인에게 내려 주시는 비를 악인에게도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심을 묵상해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악령이 우리 삶의 자리에서 힘을 쓰지 못하게 쫓아버릴 수는 있습니다. 복음에도 나오지만, 악령들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면 바로 도망가 버립니다. 그래서 악령들을 분별하는 지혜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시대의 악령들을 분별해 내야 합니다. 물질만능주의, 대량소비주의, 성공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 같이 인간을 욕망에 충실한 노예로 만들어 세상을 끔찍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들. 또한 우리 시대의 우상들을 분별해 내야 합니다. 핵발전, 군비경쟁, 민족주의, 국가주의, 개발지상주의 같이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리고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것들.

하느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무엇과 대적해야 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이 악령들을 대적하여 끊임없이 분투하여 줄 것을 당부하며 강의를 마칩니다.

* 일러두기 : 이 강의록은 일일이 근거는 밝히지 못했지만 저의 수련장이었으며 현 화순 분원장인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가 번역한 <수도승 영성사>와 <프락티코스>를 참조하고 또한 척척박사 네이버 형님과 다음 누님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고진석 신부 (이사악,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자료출처 https://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86


 






정태홍목사의 유튜브채널 https://www.youtube.com/user/rptmini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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