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회 총회자료를 다시 본다 3. 관상기도(2)
제73회 총회자료를 다시 본다 3. 관상기도(2)
이 기사에 실린 연구자료는 너무나 비성경적이며 잘못된 것이다
제73회 총회자료를 다시 본다 3. 관상기도(2)기자명 고신뉴스 KNC 입력 2023.11.15 15:30 조회수 30<지난호에 이어>둘째, 이번 총회 질의건에 나타난 김교수의 입장에는 이번 논쟁을 둘러싼 정목사의 행위에 대해서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결의가 감지된다. 이러한 태도는 김교수의 학문적 태도와는 별개의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에 아쉬운 대목이 발견된다.왜냐하면 김교수 또한 교수이기에 앞서 고신교단 소속의 목사로서 자신의 견해에 이견을 제기하는 교단의 동료 목사에 대해서 좀 더 넓은 마음을 품고 제기된 문제를 놓고 함께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표명하는 가운데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런 태도가 선행될 때 정목사의 문제제기에 담겨져 있는 고신교회를 향한 그의 염려와 사랑이 포용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김교수가 이런 이해와 포용의 정신을 발휘할 때, 교단 내의 화합을 위한 이정표가 올바르게 세워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총회 질의와 관련하여 정목사의 문제 제기에 나타난 우려와 고민이 김교수와 그 외 교단 인사들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본다.오히려 이 질의는 김교수에게 그가 영성신학자로서 개혁신학을 지향하는 고신교단이 관상기도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며 가장 개혁신학적인가를 보여주는 학문적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V. 결론 : 관상기도에 대한 고신 교단의 입장이 질의와 관련된 앞선 고찰들을 통해서 관상기도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고신 교단의 입장 정립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며 이를 통해서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이 더 분명하게 정립될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번 질의에서 비롯된 관상기도에 대한 고신 교단의 입장을 몇 가지로 정리하여 제시하는 가운데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첫째, 고신교단은 성경에 기초하고 개혁신학의 전통에 근거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증진시키는 기도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지만 관상기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관상기도는 수동적 관상기도이든 능동적 관상기도이든 다양한 이교적 사고가 유입된 기도의 형태임을 인지하고 이에 대한 경계심을 지닐 필요성이 인정된다.둘째, 고신교단은 관상기도를 둘러싼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최근에 몇몇 개신교도들이 이를 수용하는 입장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소위 개신교 친화적 관상기도의 실체는 허구이며 이를 통해서 교회 전체가 기도의 영성이 증진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셋째, 고신교단은 관상기도를 둘러싼 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적 논의를 환영하는데 이는 기도에 대한 학문적 진보와 발전을 꾀하기 위함이다. 이 논의가 상호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 먼저 논의 주체들 사이에 인격적인 태도를 토대로 삼고, 학문적으로 성숙함을 드러내는 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서 교회 전체와 기독교계에 이해와 사랑, 합의와 포용의 정신이 함양되는 결과가 도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관상기도에 대한 질의건에 대한 참고자료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1. 정태홍 목사의 신학적 비판, 평가는 정당한가?1.1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의 일반적인 정의 (1.1은 총회 신학위원회의 요청사항임)1)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진 관상기도의 기원일반적으로 현재 회자되고 있는 관상기도는 1974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펜서에 있는 한 수도원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성요셉 수도원(St. Joseph Abbey)의 트라피스트 수도자(Trappist monk)요 피정 지도자(retreat master)였던 윌리엄 메닝거(William Menninger)는 수도원 도서관에서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이라는 14세기 중세 영어로 쓰인 책을 읽고 그 책에 언급된 소위 관상(contemplation)을 자신의 수도원 피정에서 현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하나가 되는 영적 경험을 하도록 하는 일에 적용하는 일을 시작한다.일 년 후 그 수도원 원장(Abbot)인 토머스 키팅(Thomas Keating)과 바실 페닝톤(M. Basil Pennington)도 젊은 천주교인들이 동방 정교회적 명상에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 가담하여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1) 후에 토머스 머톤 (Thomas Merton)이나 바질 페닝톤(M. Basil Pennington) 등은 향심 기도(Centering Prayer)라는 용어도 사용하는데2) 이것이 지금 회자되고 있는 관상기도라고 보면 된다.2) 관상기도는 어떻게 기도하는 것인가? 2)-1 로마 천주교 사제인 펜닝톤의 예펜닝톤은 관상기도의 상세한 형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1) 긴장을 풀고 조용히 앉아서 생동감을 주는 에너지가 쉽게 흐르도록 하라2) 당신 존재의 중심에 내주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가운데 머물라3) 사랑의 말을 들으며 그 말이 부드럽게 존재하도록 하라. 그러면서 믿음으로 가득 찬 사랑으로 하나님께 당신의 존재를 지지하도록 하라.4) 당신이 혹여 다른 어떤 것을 의식하게 되더라도 그 때마다 당신의 기도의 말을 사용하면서 단순하게 부드럽게 주님께로 돌아가라.5) 기도의 마지막에 주기도문(혹은 다른 기도)이 당신의 내면에 스스로 기도하게 하라.2)-2 한국 개신교 신학자 유해룡의 예 (토마스 머튼을 참고하고 있음)한국의 개신교 신학자로서 관상기도와 영성훈련에 대한 연구와 실천을 해 온 유해룡은 영성훈련의 한 방법으로서 향심기도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펜닝톤이 밝힌 것을 좀 더 세부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이 구체적인 제시는 펜닝톤과 함께 언급된 토마스 머튼을 참고하고 있다.향심기도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지닌다. 거룩한 단어→ 내적고요와 평화→ 분심의 인식→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기→ 거룩한 단어 기도의 뿌리는 ‘내적인 침묵’에 있다. 보다 진지한 상태로 기도하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혼란된 감각 기능과 영혼을 마음 한 곳으로 집중시켜 하나님께 향하도록 해야 한다. 이 향심 기도를 훈련하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내적인 고요와 평안을 맛보게 된다.향심기도는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이끌어가도록 나를 맡기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기도가 잘 진행되는지 아닌지를 성찰할 필요가 없다. 향심기도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이중 계명을 완성시킬 수 있다. 첫째, 이 기도는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기도이다. 둘째, 온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집중하며 내맡길 때 사랑의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움으로써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도록 안내한다.1) 따라하기 절차와 유의점 (1)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매개체로 내면의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상징이 나 말들을 선택한다. 혹은 이미 자기 자신 안에서 익숙하게 길들여진 어떤 거룩한 이미지를 내적으로 응시하면서 내면에 집중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주님, 예수님, 아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등의 단어를 선택하여 내면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을 이미지화하여 응시하는 방법을 사용해도 좋다. 그리고 기타 사랑, 평강, 샬롬(shalom)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2) 방해를 받지 않는 조용하고 편안한 자리를 선택한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이미 선택한 단어를 내면으로 깊이 스며들도록 한다. 특히 주의할 것은 기도하는 동안에 몸이 불편하지 않도록 자기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자리를 정하고, 졸음이나 피곤함을 피할 수 있는 시간과 때를 선택한다.(3) 기도를 하는 동안 분심은 피할 수 없다. 분심을 붙잡거나 저항하지 말고 그 곳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라. 분심이 떠오르면 이미 선택한 거룩한 단어나 이미지로 거듭 돌아가서 그 분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한다. 분심을 제거 하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말라. 왜냐하면 분심이 일어나는 것은 정상적인 삶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분심에 대해서 방임하는 태도가 좋다. 방임하는 동안 거룩한 단어로 거듭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단어를 반복해서 음미하라는 말은 아니다. 거룩한 단어로 거듭 돌아가는 이유는 분심으로 인해서 분산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들이도록 도와주는 추와 같은 역할을 한다.(4) 생각이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가 한 곳에 집중되고, 고요한 임재 안에 머물 수 있을 때에 그 거룩한 단어의 역할은 끝이 난다.(5) 적어도 한 번의 기도에서 20분을 할애하고, 하루에 아침, 저녁 두 차례 정도 시간을 할애하면서 한 달 정도 꾸준히 연습한다면 점차로 시간을 자유롭게 늘릴 수 있으며, 내적인 침묵을 매우 익숙하게 맛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6) 이 기도를 확장시켜 적용할 수 있다. 아침에 이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충분히 맛보는 동안에 능동적으로 주님과의 조용한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 이때 그날 하루의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이웃을 향한 중보기도를 할 수도 있다.1.2 정태홍 목사의 김순성 교수에 대한 비판1.2.1. 정태홍 목사의 비판이 가지는 의의정태홍 목사는 위에서 소개하고 있는 원초적 의미에서의 관상기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가 가진 우려는 국내 다수의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논문들을 인용하고 있으며 그들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의 책 『고신의 변질 : 관상기도』는 관상기도에 대한 상당한 자료를 검토했고 이를 제시하고 있다. 문제가 될 수 있는 원천적 관상기도(1.1에서 제시된)의 위험성을 경고하는데 그는 상당히 기여했다.1.2.2 정태홍 목사의 관상기도에 대한 비판점a. 관상기도는 신플라톤적인 신인합일과 이로부터 파생된 종교다원주의적 성격(불교, 힌두교, 중세사막의 수도사들의 만트라 등)을 가진다.b. 관상기도는 이성적, 지성적 작용이나 활동 없이 인간 영혼이 황홀경에 빠져 의지나 감정의 활동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합당한 기도라고 할 수 없다. 이런 그의 우려는 그의 저서 마지막 부분과 자신의 책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그의 책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레노바레 운동을 비롯하여 관상기도와 관련된 고시교단의 목사와 교수들이 있다. 고신교단이 성경과 개혁신학에 근거한다면 관상기도가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고신교단이 로마 카톨릭의 상승의 영성인 관상기도를 용납한다면 고신교단은 개혁주의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고신의 변질』, 240)정태홍 목사는 여기서 관상기도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여전히 여진이 남아있는 레노바레 운동을 언급한다. 이어서 그는 레노바레와 관상기도의 위험을 공히 로마 카톨릭의 상승의 영성이라고 요약하고 있다.따라서 정태홍 목사의 관상기도에 대한 첫 번째 우려는 관상기도가 기도자 스스로를 신적인 존재로 상승시켜 신인합일, 신적 존재로의 신비체험, 신플라톤주의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적 결합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본다. 이런 우려는 정태홍 목사가 인용하고 있는 관상기도에 대해서 비판적인 국내의 개혁진영의 신학자들, 이승구, 라영환, 이은선 교수의 논문에서도 반복되고 있다(이들 신학자들의 논문은 이신열 교수의 글에 모두 언급되어 있으니 중복해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연관해서 원초적 관상기도(1.1)를 주장한 로마 천주교회의 수도자들이 동양의 신비사상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언급한 대목들 때문에 정태홍 목사의 우려는 심화되고 있다.둘째로, 정태홍 목사는 존 오웬과 리처드 백스터와 같은 청교도를 인용하면서 관상기도는 지성과 이해가 동반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기도가 아니라고 규정한다. 정태홍 목사는 신현규와 김남준 목사가 인용하는 백스터와 오웬의 자료를 나열하고 있다. 정태홍 목사는 청교도인 리처드 백스터가 귀고 2세에 의해 체계화된 이성과 추리를 사용하는 학구적 렉시오 디비나를 사용했다는 오방규의 주장을 반대한다. 대신에 이를 신현규의 연구와 비교하면서 신현규의 박사학위논문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백스터의 묵상은 기본적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이성적 접근이다. (『고신의 변질』, 116)백스터의 묵상적인 접근법은 기본적으로 이성적이지만 기독교의 신비적인 측면을 부인하는 않는다. (『고신의 변질』, 118)다만 그는 이런 신비적인 경험들을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백스터는 성경적 계시의 우위성을 주장했다. (『고신의 변질』, 119)정태홍 목사는 백스터가 주를 믿는 성도의 기도는 마음이 살아있어야 하고 냉담하지 않아야 함을 그리고 아무런 열망 없는 기도는 중언부언이라고 했다는 점도 덧붙이고 있다. (『고신의 변질』, 121) 아울러 존 오웬의 다음 말도 인용한다.<다음호에 계속>자료출처https://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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