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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이해: 루돌프 오토, 『성스러움의 의미』 강독(1)

종교의 이해: 루돌프 오토, 『성스러움의 의미』 강독(1)


종교의 이해: 루돌프 오토, 『성스러움의 의미』 강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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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
2013. 7. 3.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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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현상학’이란 종교를 가치판단 없이 하나의 현상으로서 객관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하는 학문을 일컫는 말이다. 현상학에서는 판단중지(epoche)를 통해 대상이 우리에게 드러난 면에 초점을 맞춘다. 가령 기존의 사회학적‧인류학적‧심리학적 종교 연구들은 ‘종교현상 자체의 특징’을 연구하기보다는 그러한 종교현상이 발생하게 된 ‘사회적인 배경’이나 ‘역사적인 배경’ 혹은 ‘심리적인 배경’을 추적하는 일을 노력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은 ‘종교현상’이 아닌 종교현상의 배후에 있는 ‘원인’을 발견하는 데 힘썼고, 이 ‘원인’에 대한 이론을 세움으로써 종교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즉 종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 때문에 발생하였다고 하거나, 두뇌에 특정 전기 자극이 주어짐으로써 인간이 종교적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하는 등의 이론을 세움으로써 종교와 관련된 의문들에 대해 학문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종교현상학’에서는 종교현상의 ‘원인’보다는 그러한 ‘종교현상 자체’에 주목한다. 종교심리학이 어떠한 심리적 원인에 의해 종교체험이 일어나는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면, 종교현상학은 그렇게 일어난 종교체험에서 그 종교체험자들이 과연 어떠한 것을 경험하느냐의 문제에 더 흥미가 있다. 따라서 종교현상학자들은 종교체험자들의 감정 상태와 체험을 연구해 보기 위해 감정이입을 시도한다. 반드시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종교적 체험을 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추체험을 통해 그들의 상태를 현상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현상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이를 통해 ‘성스러움’에 대해서 연구하고자 한다. 성스러운 것과 대면할 때 인간에게 일어나는 감정이 무엇인지가 그의 중요한 관심사이다.

 

 오토는 자신의 종교현상학적 연구를 통해 성스러움이 고유하며 전적으로 특이한 감정으로서 다른 종류의 감정들로는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이고자 한다. 그는 성스러움이 이렇듯 자류적(sui generis)인 범주라고 한다면, 기존의 사회학이나 인류학 같은 분야로는 성스러움에 대해 제대로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들 분야들은 성스러움이라는 감정이 지닌 고유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이 감정을 다른 원인들로부터 쉽게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이라고 무비판적으로 전제해버리기 때문이다. 오토는 이러한 점으로 인해 오직 성스러움의 감정만을 따로 연구하는 ‘종교학’이라는 분야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초창기 종교학의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누멘적인 것: 도덕적인 의미가 제거된 성스러움

 

 임마누엘 칸트와 같은 철학자는 성스러움이 도덕의 영역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여겼다. 성스러움이란 가장 완전하게 선하거나 도덕적임을 의미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19세기에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을 지배하였고, 다른 종교 연구들에서도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종교가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대해 상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 그 이상이나 이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 구약의 율법들이나 복음서에서 예수가 주장했던 바는 모두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라는 의미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오토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여 성스러움이 단순히 도덕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는 ‘성스럽다’는 말을 결코 그 근원적인 뜻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부차적인 뜻으로 사용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완전히 선하다는 뜻에서 하나의 절대적인 윤리적 속성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성스러운 의지를 말하기를 의무감이나 동기로부터 어떤 흔들림도 없이 도덕적 법칙에 복종하는 의지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완성된 도덕적 의지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어떤 의무나 법칙의 신성성을 말할 때 그 법칙이 실천적 필연성과 보편타당한 구속력을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성스럽다’는 말의 이러한 용법은 엄밀한 것이 못된다.1




 오토는 우선 성스러움에서 윤리적인 의미들을 제거하고 남은 부분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오토에 따르면 셈족의 언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의 고전어에서는 ‘성스럽다’라는 말이 전혀 도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성스럽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카도쉬(qādosch)’와 희랍어 ‘하기오스(hagios)’, 라틴어 ‘쌍투스(sanctus)’나 ‘싸체르(scar)’ 등은 전혀 도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던 단어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덕적인 성격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스러움’이라는 단어에 덧붙여진 부차적인 의미일 뿐이다. 따라서 오토는 성스러움에서 도덕적인 성격이 제거된 나머지 의미야말로 본래 ‘성스러움’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던 고유한 의미라고 본다.

 

 성스럽다는 것은 물론 이 모든 뜻(도덕적인 의미)을 포함하나, 동시에 우리의 감정이 이미 말해주듯이 분명히 어떤 여의(餘意)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여기서 우선 그것을 분리시켜야만 한다. 아니, 사실을 말할 것 같으면 셈족의 언어나 라틴어나 희랍어, 그리고 그밖의 고전어에 있어서 ‘성스럽다’는 말과 그 유사어들은 무엇보다도 오로지 이 여의만을 가리켰으며, 도덕적인 것의 요소는 전혀 포함되지 않거나, 있다 하더라도 근원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결코 그것만을 의미하는 경우는 없었다.2




 그것은 셈족의 종교들 가운데서, 그 중에서도 특히 성서적 종교 안에, 뛰어난 힘을 갖고 살아 있다. 그것은 이 성서적 종교에서 독자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 곧 ‘카도쉬(qādosch)’라는 말로서, 희랍어의 ‘하기오스(hagios)’와 라틴어의 ‘쌍투스(sanctus)’, 그리고 좀 더 정확하게 ‘싸체르(scar)’라는 말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 그러나 이러한 ‘성스럽다’는 말은 본래 그 자체로서는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며, 독자적으로 고려돼야만 하는 하나의 고유하고 근원적인 요소가 점차적으로 윤리적인 도식화와 보충을 받은 결과 비로소 나온 말이다. 그리고 이 요소가 발전되는 시초에는 위에 언급한 모든 표현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선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의미했다.3






 

 

 이 때문에 오토는 성스러움에서 도덕적인 의미를 뺀 나머지 부분을 가리킬 수 있는 새로운 단어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는 ‘신(神)’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인 ‘누멘(numen)’으로부터 ‘누멘적인 것(das Numinose)’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고, 이 단어를 통해 바로 그 성스러움의 본질적인 의미를 가리키고자 한다. 그리스‧로마의 신들이 전혀 도덕적인 존재들이 아니었듯이 ‘성스러움’이라는 것의 본질도 도덕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언어적 감각이 오늘날 두말할 필요 없이 언제나 윤리적인 것을 성스럽다는 것에 끌어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스러움의 고유한 특수 요소를 탐구함에 있어서 적어도 연구의 임시적 방편으로서 성스러운 것에 있어서 윤리적인 요소, 그리고 이에 더하여 합리적 요소들을 모두 제외한 것을 가리킬 수 있는 특수한 이름을 찾을 필요가 있다.4




 따라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첫째로 이러한 요소, 즉 성스럽다는 말의 여의만을 우선 그 특수성에 있어서 포착할 수 있으며, 둘째로 그것의 어떤 변종이나 혹은 발전단계까지도 함께 파악하고 표시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이름을 이 특수한 요소에 대하여 발견하는 일이다. 나는 이를 위하여 우선 라틴어의 ‘누멘(numen)’이라는 말로부터 ‘누멘적인 것(das Numinose)’이라는 말을 만들겠으며(마치 사람들이 ‘omen’에서 ‘ominose’라는 말을 형성하듯이 ‘numen’에서 ‘numinos’라고), 이에 따라 하나의 독특한 누멘적인 해석과 가치 평가의 범주에 대해서,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말이 사용될 때마다, 즉 어떤 대상이 누멘적인 것으로 여겨질 때마다 나타나는 누멘적인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도 말하게 될 것이다.5




 ‘누멘적인 것’이란 ‘성스러움’이라는 감정의 본질이다. 종교는 바로 성스러움이라는 인간의 체험을 본질로 하여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그 성스러움의 본질로서 ‘누멘적인 것’이라는 감정은 곧 종교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모든 종교의 본질은 ‘누멘적인 것’이라는 감정이다. 누멘적인 것이 없는 현상은 종교 현상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이 감정은 종교의 핵심이 된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나마 제시하고자 하는 바, 즉 느끼게 하고자 하는 바는 모든 종교들 가운데에 본래적으로 가장 내적인 핵심으로서 살아 있는 것이며, 만약 그것이 없다면 어떤 종교도 가히 종교라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6





 

 그런데 이러한 감정은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는 비합리적, 혹은 초합리적인 것이다. 단순히 이 감정이 말할 수 없이 신비하고 놀라운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멘적인 것’이라는 감정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인 범주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마치 ‘노랑’이라는 색을 다른 말들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랑’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색이다. 왜냐하면 ‘노랑’은 하나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색깔이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 세부적인 개념들로 분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토도 정확하게 누멘적인 것이 어떠한 감정인지 정의내리거나 분석하려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누멘적인 것과 유사한 이러저러한 감정들을 비교하고 다양한 문학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감정이 무엇인지 느껴보도록 한다. 오토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 안에는 누멘적인 것을 자극하는 요소인 ‘누멘적인 감각(sensus numinis)’이 있다. 외부의 성스러운 대상을 만나서 이 감각이 내부적으로 자극될 때 인간은 누멘적인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오토의 생각이다. 모든 인간에게 누멘적인 감각이 있다는 오토의 생각은 이후 미르치아 엘리아데라는 종교학자에게 이어져 ‘호모 렐리기오수스(hom religiosus)’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범주(누멘적인 것)은 전적으로 자류적(自流的, sui generis)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소여와 마찬가지로 구명은 될 수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정의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듣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도록 돕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구명을 통하여 그 자신 안에서 누멘적인 것이 자극을 받아 살아 움직이고 의식될 때까지 그를 이끌어 주려고 시도하는 일 뿐이다. 우리는 이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이미 알려져 있고 친숙한 마음의 영역들에서 발견되는, 누멘적인 것과 유사하거나 혹은 아주 대조적인 것들을 제시함으로써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첨가할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갑’이라는 것이 꼭 이것은 아니지만 이것에 유사하며 또 저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제 당신 스스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갑’이란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직 자극할 수 있고 각성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영(Geist)으로부터’ 오는 다른 모든 현상들과 마찬가지로.7


1. 루돌프 오토, 길희성 역, 『성스러움의 의미』, 분도출판사, 2009, 37쪽.
2. 루돌프 오토, 『성스러움의 의미』, 37~38쪽.
3. 루돌프 오토, 『성스러움의 의미』, 38쪽.
4. 위와 동일.
5. 루돌프 오토, 『성스러움의 의미』, 39쪽.
6. 위와 동일.
7. 루돌프 오토, 『성스러움의 의미』, 39~40쪽.

자료출처
https://m.blog.naver.com/1019milk/80193248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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