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트의 가르침에 나타난 영성과 기도
성 베네딕트의 가르침에 나타난 영성과 기도
성 베네딕트의 가르침에 나타난 영성과 기도 / 하태규 교수영성신학2005.10.29 21:20:03허호익*.218.50.115http://theologia.kr/board_system/46819성 베네딕트의 가르침에 나타난 영성과 기도하 태 규(혜천대학 전임강사)목 차Ⅰ. 영적인 생활1. 겸손2. 복종Ⅱ. 기 도1. 마음의 기도 - 침묵2.시편 찬송Ⅲ. 결 론참고문헌들어가는 말ꡔ수도원 생활 또는 수도원 운동ꡕ을 생각할 때, 금욕적인 생활과 사회와의 차별 혹은 단절된 개인이나 공동체의 생활을 떠올리게 된다. 이런 것을 우선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초기의 수도승(수도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를 모델로 한 중세 수도원 운동가1)들이 취한 행동 방식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수도사들의 삶의 형태에 대해서 그 기원을 찾아보면,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서의 도피’라든지, 또는 ‘신풀라톤주의적 사고에 기인한 것’이라든지, 또는 중세 수도원 운동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의 은둔자들을 모델’로 했다는 면에서 개인의 금욕과 사회와의 단절은 수도사들의 삶을 대표하는 「삶의 방식」으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동방의 은둔자들의 삶이 서방에 전파되었을 때 로마의 은둔자들은 동방과는 달리 현실적인 복음사역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2). 이런 수도사의 형태의 변화에 큰 역할을 한 것이 베네틱트이다.베테딕트 수도원 삶을 들여다보면, 초기의 수도원 운동이 지향했던 바와는 다른 개인의 금욕과 대사회관(對社會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삶의 형태는 안토니나 파코미우스 등의 선배들의 모습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보이지만, 베네딕트를 「기독교 수도원」의 정형을 제공한 사람으로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수도를 통해 나아가고자 하는 목표점과 그 목표점에 도달하는 방식에 대해 이전 사람들 보다 포괄적인 이해가 있다고 보아진다. 일반적으로 수도원 운동이 세속을 등지고 개인의 구원 혹은 신일합일을 추구하는 것으로 평가받지만, 베네딕트가 추구했던 삶의 방식은 단순히 이런 평가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베네딕트의 생애에 관해서 기록한 그레고리는 소년시절부터 시끄러운 로마를 떠날 수 있었던 베데딕트를 부러워했으며, 속세를 멀리하고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었던 베네딕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는지를 그레고리는 베네딕트에 관한 그의 책에서 보여주려고 했다. 한편 그레고리는 은수자였던 베네딕트가 수도자들을 지도할 뿐 아니라, 주민들을 기적으로 도와주고 복음선포로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3)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베네딕트의 수도적 삶은 개인 구원의 만족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제자의 삶에 목표가 있었다. 이것은 그의 「영적인 생활」에 대한 가르침에서 잘 나타나며, 신앙의 태도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서 잘 설명된다.R. W. Southern은 그의 책에서 베네딕트로부터 중세의 종교질서가 시작되었다4)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베네딕트가 단순히 그의 책 ꡔ규칙ꡕ을 통해서 외형적인 체계를 잡았다는 것에 한정하는 평가는 아니다. 적어도 베네딕트가 중세의 종교질서, 그리고 수도원의 체계를 집대성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수도원 생활의 근거를 즉, 수도원의 정신(spirit)을 세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형태 면에서 발전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추구하는 내용 영성(spirituality)이 탁월함을 체계적으로 전수할 기틀을 마련했다는 면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Ⅰ. 영적인 생활성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을 위한 ꡔ규칙(Rule)ꡕ에서 어떤 사람이 수도원에 들어오고자 할 때 쉬운 관문이 주어져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초기의 기독교 수도원을 찾는 구도자들은 동방으로의 긴 행로를 거쳐야 했다. 이 여행은 세상의 평안함과 좋은 것들을 등지고 떠나는 것이었다.5) 수도원으로 향하던 많은 사람들은 혼란하던 시기에 참된 평안과 안식을 보기 위해 떠났는데, 그들의 방법은 육체의 필요를 제한하는 금욕적인 생활이었다.수도원에서의 생활이란 육체적 금욕 생활을 의미하며, 그것은 영적 생활을 훈련하는 것이다. 영적 생활이란 죄로 물들어 있고 불완전하고 이기적인 영혼과 인격(character)을 깨끗이 하는 소극적 측면과, 선함과 거룩함을 계발하고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측면을 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성 생활의 「금욕과 선행의 실천」은 ‘완전함(perfection)’을 추구하는데, 이것은 모든 종교 생활의 공인된 의무였다. 이것을 통해서 정결해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했다[BM 46].영적 생활에 관한 베네딕트의 가르침은 Cassian에게서 많이 빌려왔다. 카시안은 영적인 생활에 관해서 베네딕트에게 대단히 중요한 인식론적 틀을 제공하였다. 카시안은 영적 지식을 실제적인(πρακτικη6))지식과 이론적인(θεωρετικη7))지식의 이중적인 요소(twofold)로 되어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나뉘어진 지식들은 참된 인식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전개한다. “이론적 지식을 얻고자 하는 자 하는 자는 우선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실제적인 지식을 다 행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실제적 지식은 이론적인 지식 없이 얻어질 수 있지만, 묵상한다는 것(the contemplation)은 실제적(실천적)인 것 없이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죄악으로 더러워진 것들을 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다. 실천을 완벽히 한다는 것은 양자의 체계에 의존한다. 첫째 방법은 모든 결함의 본성과 그것들의 치료의 길(manner)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선행의 순서를 발견하고, 그것들의 완전함을 우리의 마음에 고착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잘못된 것들의 본성을 이해하고자 계속 노력하지도 않고, 또 그것들을 제거하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실천적 지식의 두 번째 단계인 선행을 이해하거나 영적이고 천상적인 신비들을 얻을 수 있는 묵상적 지식의 보다 높은 차원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 실제적인 생활은 여러 가지 다양한 전문적인 일과 관심들로 힘이 모아졌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목표의 중점을 은둔자의 비밀스러움에 두어서 혼자 거하면서 얻는 침묵을 통해 하나님과 연합하고자 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관심과 노력을 수도사의 삶의 체계화와 그 형제들을 돕는 데 기울였다. 어떤 이들은 광야에서 은퇴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서 기쁨을 찾기도 하였다. 어떤 이들은 환자를 돌보거나 자신을 양육하거나,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그가 받은 은사를 따라 선택한 일들을 시작하는 것은 각 사람이 추구해야하는 완전함을 이루는 데 선한 것이고 유익한 것이다. 여러 가지 길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각자는 그가 한 번 정한 일들을 완벽하게 해야하고 그의 목적을 결코 바꾸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그의 삶의 방향이 무엇이든지 완벽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모든 열정을 가지고 얻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은 실천(윤리적인 것)에 대한 완전한 이해력인 제자도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이는 이론적 순수성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BM 47-48]이처럼 수도사들에게 있어서 참된 앎이라고 하는 것은 실천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 구체적인 삶의 형태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가르침을 보존하는 수도원에서의 수도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인내(수도원 생활이라는 삶의 인내)로서 나누어 가지고자 하는 것이다.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목표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 나라에 목표를 둔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의) 직접적(immediate)인 목적과 목표는 마음의 깨끗함(purity)이다. 우리에게 한계가 있지만, 이 목표를 향해 꾸준히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 우리는 가능한 한 올바르게 우리의 과정을 잡아가야 한다[BM 48].완전함에 이르는 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과 지혜의 시작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서부터 건전한 양심의 가책을 갖게된다. 양심의 가책은 자기를 이겨내도록(극기) 재촉한다. 예를들면 모든 소유(욕망)로부터 벗어나고 경멸하도록 한다. 욕망을 벗어버림으로 겸손을 얻게 되고, 겸손함에서 욕구에 대한 금욕을 배운다. 욕구에 대한 금욕을 통해서 모든 잘못들이 근절되고 없어진다. 잘못을 버림으로써 선행이 일어나고 증가된다. 선행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깨끗함을 얻게 된다. 마음의 깨끗함을 통해 사도적 사랑의 완전함이 몸에 익혀지는 것이다. 베네딕트의 지성의 배경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가진 내적 금욕과 영적인 생활에 관한 가르침을 얻게 된다. 그는 그의 금욕의 최상위에 자기-의지(self-will)의 포기를 둔다. 그는 육체의 금욕에 있어 관대하지 않은 것처럼 자기-의지의 포기를 집요하게 강요한다[BM 49].자기-의지에 대한 포기가 행동으로 나타나면 세 가지 종교적 서약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다른 의지에 대한 순종을 준비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에 대한 초연함과 가난, 그리고 셋째는 마음의 깨끗함과 순결이다. 이것이 자기 훈련과 선행을 실천하고 금욕하는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성경(마태복음 16:24)에 있는 것처럼 자기의지를 부인하는 것이야말로 영성의 뿌리인 것이다.[BM 50]1. 겸 손베네딕트에게 있어서 실제적 삶의 긍정적인 요소인 선행을 훈련하는 것이 잘 나타나는 것은 「겸손」에 대한 그의 가르침8)에서이다. 베테딕트에게 있어서 겸손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보다 넓고 깊은 것으로서[BM 52], 「수양(discipline)」과 동일한 말로 쓰이며, 자기훈련과 금욕을 포함하는 말이다[BM 51].겸손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그의 계명에 주목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겸손은 진리를 실재적으로 보게 하며, 하나님과 우리가 실재적인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52]. 그리고, 우리가 겸손의 최고의 경지에 이르려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서 그 사랑의 온전함에 직접적으로 나아 갈 수 있는 것이다.[BM 53]2. 자기의지의 포기그 다음 단계는 자기-의지의 포기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사랑하거나,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즐거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순종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BM 52]. 자기-의지의 포기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고, 이 가르침은 이집트의 수도승들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것이다[BM 53 참조]. 자기 인생에서 나타나는 애착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것이 물질적이든 영적이든간에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기쁨, 쾌락 등을 몰아낸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서는 사람들은 어떠한 기쁨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BM 53]. 영적인 기독교인은 피조물로부터 오는 어떠한 쾌락도 이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BM 54]. 삶에서 나타나는 애착은 그것이 크든 작든 간에 죄에서 기인되는 것이다.3. 복 종영적인 생활에서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복종이다. 베데딕트는 수도원장에게 선행을 행하는 것과 복종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할 만큼 복종을 강조한다[BM 55]. 베네딕트는 나이든 수도사들은 젊을 수도사들을 사랑하게 하고, 젊은 수도사들은 나이든 수도사들에게 복정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존경한다든지 우러러 본다는 것은 참된 사랑의 개념을 담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BM 55]. 사실 ꡔ규칙(Rule)ꡕ의 중심 내용은 복종이라 할 수 있다. 수도사는 특별히 가난하게 여겨지지 않았었다. 오히려 수도사들은 그들이 입지 않는 옷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수도사는 자신을 순종에 - 즉 그리스도께, ꡔ규칙ꡕ에 수도원장에게 바친 자인데, 특히 수도원장의 명령은 마치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복종해야 했다. 이 복종은 겸손의 첫 단계이다. 그것은 지체나 냉담, 또는 억지나 불평이 없는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이어야 한다.이런 영적인 생활에 관한 베네딕트의 생각을 정리해 보면 이 모든 것을 성경의 가르침에서 나오는 것이고, 영적인 생활의 시금석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이다. 베네딕트는 그의 ꡔ규칙ꡕ이 그리스도와 시작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움직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끝이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도원의 생활은 이것을 훈련하여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는 것이고 수도사는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는 물론, 수도원장과 손님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 병든 자 들을 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수도사는 자신을 부인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를 닮아가기 위해 복종하고, 주님의 고난을 인내로서 동참하고,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완전한 자비에 이른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것도 앞세우지 않으며,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 보다 높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에게 맞추는 것이 가장 적절한 규칙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BM 57].Ⅱ. 기 도수도사들이 해야 할 주요 세 가지 일은 육체 노동(중세 수도원에서는 종종 경시됨)과 거룩한 책읽기(성경과 다른 신앙 서적을 읽고 묵상함)와 하나님의 일(기도)이었는데, 베네딕트는 수도생활의 핵심을 기도라고 생각하였다. 매일 각 개인에게 기도를 위한 시간들이 배정되었다. 대부분의 경건회는 예배당에서 행해졌다. 시편 119: 62, 164에 따라 수도사들은 낮에 일곱 번 그리고 밤중에 한 번, 모두 여덟 번씩 모여 예배 드렸다. 제일 처음의 기도회는 물론 새벽에 행해지며 그 후 또 다른 일곱 번의 집회가 있다. 중세의 수도원들이 엄격하게 지킨 이 시간들은 각각 Matins, Lauds, Prime, Terce, Sext, None, Verpers, Compline 등으로 불리워졌다. 이러한 집회의 대부분의 시간은 시편의 낭송과 기타 성경 강독으로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여가가 있는 많은 평신도들도 이와 비슷한 경건시간을 가졌으므로 각각 시간에 따라 읽어야 할 성경의 부분들을 정리해 놓은 책인 [Breviaries]에 나타난 대로 성경에 익숙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덟 가지 시간의 기도들은 그 후 “교회법에 따른 기도 시간들(canonical hours)”이라 불리워졌으며 이를 거행하는 것을 “경건회(Divine Office)”라 불렀다.9)1. 마음의 기도- 침묵베네딕트가 공적인 공동체나 개인적인 기도를 함에 있어 수도사들에게 ‘마음의 기도’를 연마하도록 하였다. 이 말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이집트의 수도사들의 기도형태를 이어온 카시안의 기도형태에서 빌어온 것이다[BM 58]. 마음의 기도에서 중요한 용어는 ‘순수함’이라는 것이다[BM 62]. 기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카시안은 수도생활을 하는 것과 기도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믿음의 사생과 기도의 최고의 경지인 관상(觀想)은 자연적인 변증법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영적 지식’이란 성경의 문자 뒤에 숨겨진 신비들에 대한 ‘영적 통찰’을 의미한다. 성령은 관상의 빛에 의해 순수한 마음속에 ‘영적 지식’을 수여하며, 수도사의 삶은 가능한 모든 방법의 헌신 가운데 ‘관상(contempla-tion)’을 행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곧 ‘영적 지식’의 길을 준비시키는 ‘정화(purification)’의 작업10)이라고 생각한다.이런 카시안의 생각은 베네딕트에게도 전해져서 ‘침묵 속에서의 기도’, ‘마음의 정화’, 그리고 ‘마음의 집중’, ‘눈물의 회개’ 등으로 기도를 정리하게 하였다. 이런 기도의 생활은 영적인 생활과 연결되어 모든 수도사들의 추구해야 하는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방법에 기도를 설정하게 된다.‘깨끗함’과 ‘집중’은 카시안의 용어들인데[BM 67], 카시안에게 있어서 기도의 단계가 절정에 이르게 되는 기도의 최고의 단계는 완전하고 순수한 기도, 즉 ‘불의 기도’이다. 이 불의 기도는 곧 ‘침묵의 기도’인 바,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황홀의 극치로 인도한다. 이 불의 기도는 모든 악독 뿐 아니라, 모든 소유 본능까지를 뛰어넘는 전적으로 포기된 영혼의 상태를 말한다.11)이런 기도 형태가 용어와 개념에 있어서 이전의 것에 의존하지만, 베네딕트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 데 있어서 사용한 성경적인 근거를 빼놓을 수 없다. 마음속에서 침묵으로 기도하는 것을 택할 수 있었던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6장 6절12)이다. 그는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기도를 이런 태도로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BM 70참조]. 그들은 기도 외에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영적인 생활을 위해서 어떠한 것도 기도보다 앞서는 것이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베네딕트도 카시안 처럼 ‘마음의 기도’를 통해서 최고의 영적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BM 73 참조].2. 시편 찬송베네딕트는 거룩한 은혜의 영감 아래에서 길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도는 순수할 뿐 아니라 짧아야 한다고 말하였다[규칙 c. XX]. 베네딕트는 이전의 수도원 운동가들보다 기도시간을 줄였다.13) 대신에 모든 기도에서 시편은 암송되고 불리워지는 것으로 강조되었다. 기도에 시편을 사용하는 것은 베네딕트 이전의 바실과 카시안 등의 전통이기도하며[BM 68], 어거스틴도 시편을 부르는 것을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BM 69]. 특히 “vigils”과 밤기도에서 기도의 형태로 혹은 침묵하는 동안에 불리워졌는데,14) 시편을 낭송하는 것은 읽는 것과 연관이 되는데, 이것은 나중에 수도원의 기도 생활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가 되었다.15) 수도원에서는 교회법에 따른 공적인 기도순서를 정하여서 매주마다 시편 전체를 한번씩 낭송할 수 있도록 배당되었다. 기타 또 다른 성경 강독은 시간과 요일과 절기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시편 전체와 성경의 여러 부분들을 암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16) ‘소리를 내어 기도하거나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완전해지고 또한 하나님을 완전히 경배하기 위해 ꡔ규칙ꡕ에 의해 시도된 원리이다[BM 72].Ⅲ. 결 론이제까지 살펴본 바 대로 베네딕트 수도회에는 영성 훈련을 위한 원칙과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깊은 영성은 우리 시대에도 좋은 모델이 되고, 그 영성을 쌓는 훈련의 내용은 이 시대 사람들에게도 좋은 기준이 된다. 특히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겸손, 자기포기 그리고, 주님께 복종하는 내용은 자아(self)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세대 속에 더욱 돋보이는 가치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미사여구와 소리지름 그리고 중언부언의 기도가 아직도 주류를 이루는 한국 기독교에 침묵의 기도와 짧은 시편의 기도는 기도의 진정한 모델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시대가 혼탁할수록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들을 기다린다. 베네딕트 수도원에 대한 탐구를 이 시대에 하게 되는 것도 시대가 혼탁함 때문이다. 이 연구를 통해 베네닉트의 삶과 훈련이 이 시대에도 요구됨을 깨닫게 된다. 그들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이 시대가 홍수가 나서 물이 많음에도 마실 물이 없는 기갈 때문이리라.참 고 문 헌Butler, D. C. : Benedict Monashism, Cambridge & New York, 1961. [BM]으로 표기.St. Benedict : The Rule of St. Benedict in English, Minesota, 1982. ꡔ규칙(Rule)ꡕ로 표기.Duckett, E. S : Monasticism, Michigan, 1966.Ed. McGinn, B. & Meyendorff, J. : Christian Spirituality, New York, 1989.Walker, G. S. M. : The Growing Storm, London, 1961.Kidd, B. J : A History of the Church. vol II, Oxford, 1922Southern, R. W. : Western Society and the Church in the Middle Ages, Middlesex, 1982.Bainton, R. H. : Early and Medieval Christianity, Liverpool, 1965.곤잘레스, 「중세 교회사」, 서영일 역, 서울, 1987.윌리암, 캐논, 「중세 교회사」, 서영일 역, 서울, 1993.토니 레인, 「기독교 사상사」, 서울, 나침반, 1987.자료출처 http://theologia.kr/board_system/46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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