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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주시는 하나님 - - 호라티우스 보나르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 -  - 호라티우스 보나르
자료출처: http://cafe.daum.net/khc23467/NliL/693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 -  - 호라티우스 보나르
하나님 가족의 특징 - 십자가와 평안
여기에서 말하는 가족은 각나라의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무라도 능히 셀수 없는 큰 무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가족입니다.
모든 구성원은 한가족으로서의 유사성과 그들이 힌가족임을 보여주는
가족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공통점이 있으며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고향에서 태어난 같은 세계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같은 피로 뿌림을 받고 같은 성령으로 거듭났으며
모두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방언을 사용하며 동일한 소망과
동일한 기업의 후사에 속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나라를 통해 그토록 오랜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온
감정과 행동의 동질성은 그들을 특별한 백성으로 구별할 뿐만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동일하신 그분과의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가족임을 보여주는 가장 독특하고도 진정한 요소는
'십자가를 진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한가족이라는 확실한 표시입니다.
그들 모두가 십자가를 지고 있으며 그것을 부끄러워 숨기기는 커녕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죽은자가 되었으며
우리는 세상에 대해 죽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지않고
영광을 누리는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거우며 때로는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이러한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이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십자가는 그이름뿐이 아니라 실제로도 수치와 슬픔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때때로 십자가를 짊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에 못박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처음 주님을 믿고 영접한 때부터 십자가를 떠맡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등지고 문을 나서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치욕을 짊어집니다.
우리가 섬기는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피하려 합니까?왜 그분을 부끄러워 합니까?
왜 우리는 그분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를
자신도 지는 척 흉내만 내려고 합니까?
이 세상의 어떤것도 우리를 위해 주님이 지신 십자가 보다 존귀하고도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비웃고 멸시하지만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야 말로
성도들에게 모든것이 됩니다.
오래전에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살았던 한 성도는
"오,그리스도의 복된 십자가여,
당신의 십자가에 비할만한 것은 없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8)
이와 같이 십자가는 그분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표시로서 그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따를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도와 십자가는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둘을 하나로 묶어 놓았으며
사람은 결코 그것을 나눌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성도도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아들도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하며 그분의 죽으심과 함하여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당한 수치를 견뎌내야 하며
그분의 수치로 옷입은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또한 육신의 정욕과 욕심을 못박아야 하며
모든 지체는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수치를 당해야 합니다.
사탄의 지배를 벗어났음에도 아직도 육이 살아 있는 자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치욕의 언덕에 오르신 것처럼
버림받은자요 죄인으로서 세상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친히 십자가를 지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것을 지고 나를 위해 수치를 당하고 고난을 견디어라.
이것을 지고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라.
이것을 지고 나를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말고 감옥이든 형장이든 가라.
끝가지 나를 따라와 쇠하지않는 면류관을 받으라.
십자가를 지고 수치를 견디는 법을 배우라."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우리는 그분이 몸소 보이신 모범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못박히신 사건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분의 삶 전체를 종결하는 마지막 장면일 뿐입니다.
그분은 구유에 누이신 그 순간부터 이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셨습니다.
그분의 한평생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향하는 순례의 길이었을 뿐입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분은 재판정을 떠나 골고다로 향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땅에서는 그분의 전생애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분의 모든 삶은 수치와 고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분은 평생 고난의 삶을 사셨으며
그분의 죽음은 이러한 고난의 결정체였습니다.
물론 이제 그분에게 십자가와 수치와 고난은 영원히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십자가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평생 '고난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분은 실로 '질고를 아는 자(사53:3)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맏형이신 그분의 삶에 나타난
가족의 특징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실로 질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질고를 아는자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단한번의 만남을 통해서는 동료에 관한 모든 것을 알수 없습니다.
친분은 계속적인 교제의 결과로 쌓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단 한번의 슬픔으로는
그 고통이 얼마나 깊고 아픈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단지 질고를 알기위한 시작에 불과합니다.
날마다 시간마다 그러한 만남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질고를 아셨습니다.
그분은 33년 동안이나 날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질고를 알아가셨습니다.
우리도 마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역시 매일의 경험을 통하여 질고를 알아가야 합니다.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못하며 종이 상전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가신길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고난을 통해 온전해 지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이런점에서 구원의 주기되시는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백성들의 본보기이자 전형이 되십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0-12)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분은 '죽임 당하신 어린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린양을 따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족의 특징을 가장 알기 쉽게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는 손과 발에 못박히고 채찍에 맞고 침 뱉음을 당하셨으며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맏형이시며 우리의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 하나님가족의 특징을 명백히 알았다면
이제 십자가를 지고 그것을 마치 우리앞에 놓은 보석과도 같이
승리의 면류관과 같이 여겨 끝까지 붙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롱과 멸시로 얼룩진 자색옷은
주님보다는 우리가 입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태초부터 에덴에서 예언된 여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발꿈치의상처입니다.
사실 이것은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인자의 특징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이러한 흔적들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알린바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상처는 단지 걸려 넘어지는
'거치는 돌'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는 구주를 보는 영적인 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낮아지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대접도 받지 못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받으신 발꿈치의 상처를 참을 수 없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주신 메시야의 흔적이 이스라엘이
그분을 버리도록 만든 원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입은 상처로 인해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는 발꿈치에 상처를 가진 그분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을 따르며 그 상처를 하나님의 가족에게 주어지는
가장 영광스러운 표지로서 깊이 새깁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몫으로서 이와 유시한 상처를 찾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앞서 간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상처를 경험하였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들보다 낫지 않습니다.
말세의 군병들이 된 우리가 거룩한 백성의 군대가
6천년간 영광스럽게 여겼던 군복을 입기를 주저하면 되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진정한 자녀의 흔적으로서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그것을 가족의 특징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시금석으로 보았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7-8)
이 얼마나 강력한 말씀입니까?
만일 이것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의 말씀이 아니라면
이 말씀에 대해 불합리하고도 과장된 표현이라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실 징계는 우리가 합법적이고 영광스럽게 태어났다는
가장 중요한 흔적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특징이 우리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운데 하나가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합법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분이 우리를 자신의 진정한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분이 우리를 아들로 받아들인 적이 없거나 우리를 거절하신것이라고
말할수도 있을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아들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인정을 받은자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가족으로서의 특징을 지녀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혈과 육은 그것을 두려워 합니다.
우리는 이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두리번 거리면서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간단합니다.
결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살펴보겠지만 이 문제를 회피하려는 모든 시도는 헛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문제는 매우 즐겁고도 유익합니다.
고난과 시련가운데 있는 자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친자녀로
인정하는 보증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보증해 준다는 생각은
실로 우리의 모든여정을 밝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땅에서의 삶이 밝기만 하거나 '꿈속의 환영'처럼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내적기쁨 즉 말할수 없는 영광으로 가득한 기쁨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땅에서 하나님의 가족에게만 허락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외적기쁨과 편리함과 풍요,그리고  의미없는 세속적 유대나
눈물을 모르는 눈은 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본향으로 가기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통과해야 하는 폭풍속에는
땅의 어떤 폭풍도 근접할 수 없는 참으로 깊은 평안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고통과 환란이 있지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참된 평안을 얻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것이야 말로 성도들 성도답게 만들뿐만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을 누리게 하는 독특한 요소입니다.
비록 눈물로 흐려졌으나
그들의 눈은 말할수없는 기쁨으로 반짝이고 있습니다.
비록깊은 시름과 사색에 잠겨 있으나 그들에게는 한없는 평안이 넘쳐납니다.
비록 먹구름이 그들을 덮고 있으나 그위에는 여전히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강같은 평강'이 넘쳐 흐릅니다.
그것은 호수처럼 고여있거나 바닷물처럼 요동하지 않고 깊은 수로를 통해
강처럼 조용히 흐릅니다.
강물은 때때로 바위나 평원을 지나고 때로는 복잡한 수풀을 통과하거나
옥수수밭이나 '포도원'을 지나기도 하지만 그 어떤 방해에도 굴하지않고
여전히 흐릅니다.
그것은 겨울이든 여름이든 날씨가 흐리든 맑든간에 대양에 이를때까지
밤낮을 가리지않고 변함없이 흐릅니다.
우리의 평안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평안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감출수 없듯이 이러한 평안을 숨길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평안을 세상가운데 드러내야 하며
이 둘이 얼마나잘 조화되는지를 보여주어야합니다.
평안을 우리의 삶속에 더욱 풍성하고도 깊게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고통의 눈물을 흘릴때 평안은 마치 소나기위에 떠있는 무지개와 같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여호와의 빛이 우리의 영혼위에 머무르는 한
결코 그곳을 떠나지 않습니다.
의로운 행위는 평안을 가져오며
의의결과는 영원한 확신과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호라티우스 보나르의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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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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