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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이 줄어든 교리적 이유들

매주 성찬을 준비하면서, 성찬에 대한 칼빈의 해석은 정말 중요하다.
현 시대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도 진정으로 은혜받도록 허락하신 그 방편들은 무시한채
은사와 자기 체험에 집중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래의 글은 이런 현상을 뒤로하고 진정 성도가 성찬을 통하여 받게 될 은혜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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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이 줄어든 교리적 이유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007bell/FADn/124 
 
성찬이 줄어든 신학적 이유들 /이종인
Ⅰ. 들어가는 말.
Ⅱ. 성찬신학의 세 가지 중요한 문제들.
Ⅲ. 쯔빙글리의 견해.
Ⅳ. 칼빈의 견해.
Ⅴ.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의 성찬신학.
Ⅵ.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서의 성찬신학.
Ⅶ. 박형용박사의 성찬신학.
Ⅷ. 나가는 말.
Ⅰ. 들어가는 말.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서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공동체이다. 주께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피 흘리심으로써 교회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이시다. 주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뿐 아니라 또한 보존하신다. 보존하시되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하여 유지되게 하신다. 교회는 주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으로서 말씀을 소유하고 성례를 가진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고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된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롬10:17). 하나님께서는 듣는 말씀만이 아니라 보이는 말씀으로서 성례를 제정하셨다.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구원사역을 눈으로 목도케 하시고 느끼고 맛보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운데 말씀과 성례가 함께 머물도록 의도하셨다. 성례는 말씀에 의존하여 있지만 주께서 직접 제정하신 중대한 은혜의 방편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매주 성찬이 자연스러웠다(행2:42,46;20:7). 하지만 오늘날 개혁교회 안에 말씀에 대한 강조는 강성하지만 성찬에 대한 강조는 약화된 느낌을 가진다. 그 대표적 예로 한국교회에서 시행되는 일 년에 두 차례의 성찬을 보아 알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일상적이었던 성찬이 왜 이토록 줄어든 것인가?
성찬이 약화되고 줄어든 이유들로 환경적이고 실천적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본 논고에서 성찬이 줄어든 신학적 이유들을 살피고자 한다. 신학적 이유들을 살펴가되 개혁교회 안에 존재하는 성찬신학의 두 견해, 즉 칼빈(J. Calvin)과 쯔빙글리(U. Zwingli)의 세 가지 신학적 견해 차이를 파악하고 두 견해의 전통을 각기 지지해오고 있는 신앙고백서를 살핌으로써 성찬이 줄어든 신학적 이유들을 분명하게 해보고자 한다. 우선 성찬신학의 세 가지 문제를 먼저 살펴보자.
Ⅱ. 성찬신학의 세 가지 중요한 문제들.
1. 시간의 문제.
성찬에서 시간의 문제는 성찬을 자주 행하는 것과 관련을 지닌다. 성찬이 단지 과거를 회상하고 기념하는 것이라면 자주 행할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기념이라는 것은 일 년에 몇 차례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찬이 과거를 기념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성령을 통한 현재적 실제 누림이고, 미래의 소망을 소급하여 가져오는 것이라면 성찬은 자주 시행해야 할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 된다. 한·두차례의 기념식이 불가능해진다. 이렇듯 성찬을 바라봄에 있어서 시간의 문제는 성찬을 자주 행하느냐 아니냐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2. 방편주체의 문제.
두 번째 신학적 문제는 성찬이라는 방편을 사용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의 문제이다. 만일 성찬을 사용하는 주체가 사람이라면, 성찬을 받기 위한 행위와 노력이 포함되어야 함으로 성찬은 힘겹고 무거운 일이 된다. 과거의 시간성과 함께 맞물려 방편 주체가 사람이 될 때는 성찬은 제사의 분위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매번 사람의 행위가 됨으로써 성찬을 자주 집행하기에는 버겁고 힘겨운 짐이 되는 까닭이다. 반대로 성찬이라는 방편의 주체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라면, 성찬은 은혜의 장소요 즐거움의 식탁이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은 은혜의 도구라면 기꺼이 그리고 즐거움으로 열망하며 받고자 하게 될 것이다. 성찬은 사람의 행위에 매달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으로 자주 시행하는 것을 원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성찬의 주체가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의 문제는 성찬을 자주행하는 문제가 관련을 지닌다.
3. 임재의 문제.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실제 임재 하시느냐? 아니냐? 의 문제 역시 성찬의 횟수와 관련을 가진다. 성찬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단지 상징이나 표 혹은 기호에 불과하다면 1년에 몇 차례의 시행으로서도 그 의미를 찾고 새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찬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한 실재적 임재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주께서 성찬에서 성도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먹고 마시게 하심으로 믿음을 강성하게 하시는 것이라면 성찬을 소홀히 할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의 상에 초청된 성도가 성령을 통해서 그분의 실제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라면 부지런히 그리고 가능한 한 자주 성찬을 시행함으로써 그 은혜를 누려가기를 사모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성찬신학에서의 세 가지 문제, 즉 ‘시간의 문제’, ‘방편주체의 문제’, ‘임재의 문제’는 성찬의 시행횟수와 깊은 관련을 지닌다. 이제 이 세 가지 신학적 문제를 쟁점으로 하여서 쯔빙글리와 칼빈의 성찬신학적 입장을 차례로 살펴보자.
Ⅲ. 쯔빙글리의 견해
1. 시간의 문제.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성찬은 과거에 대한 회상이요 기념이다. 기념한다는 것은 성찬의 시점을 현재에서 과거로 되돌아보는 형식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사실을 기념하고 돌아봄으로써 그 구속사역이 나를 위해 행한 사역임을 다시금 되새기는 행위이다. 성찬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가 단지 과거에 대한 기념이요 회상이기에 현재화 되는 부분이 약화되고 미래의 약속과 소망을 상실하게 된다. 약속과 소망대신 과거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대한 회상으로 애통과 슬픔만을 반복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역임으로 지나치게 엄숙하고 무거워진다. 그에게서는 성찬에서 종말론적인 약속의 선취나 기대를 찾아 볼 수 없다. 앞으로 일어날 풍성한 소망과 현재적 누림이 사라진 메마르고 딱딱한 성찬으로 변모되기 쉽다. ‘기념’이라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 기능의 역할만 하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일년에 네 차례의 성찬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기념설은 과거라는 시간의 개념을 담지하고 있다. 성찬을 과거의 사건으로 파악하고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쯔빙글리의 성찬신학에서의 시관관은 성찬의 횟수를 자주 행하지 않아도 될 타당성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간관 속에서 성찬의 횟수가 적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2. 방편주체의 문제.
쯔빙글리는 방편주체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보다는 ‘사람’에게 두고 있다. 성찬에서 기념하고 회상하는 것은 사람의 행위이다. 이로 인해서 성찬을 받기 위해서는 엄숙한 인간의 행위와 노력 자기 살핌이 수반되어야 한다. 기쁨 대신에 눈물과 슬픔이 머물러 있다. 성찬의 분위기는 잔치보다는 제사에 가깝게 되고 만다.
그의 기념설은 방편의 주체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기념을 한다.’는 것은 성찬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기념을 하는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회상하고 기념함으로써 유익을 얻고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념하는 행위는 사람의 행위가 된다. 성찬에서 중요한 것은 예식을 참여하는 사람 자신의 행위에 있다. 한진환은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성찬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쯔빙글리는 성찬을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보다 생생하게 묵상하기 위한 도구로 가르침으로 성찬의 주체를 인간 편에 두었다. 성찬은 인간의 상상력과 기억력을 자극시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다 실감나게 만드는데 유용한 상징물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성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방편이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 행하는 은혜의 회상물(reminders)이다. 역설적이게도 로마교회의 희생의 개념을 극단적으로 부인했던 쯔빙글리의 견해는 성찬의 방편주체에 있어서 로마교회와 거의 동일하게 맞닿아 있다. 희생제사를 드리는 주체도 사람이고, 기념을 행하는 주체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찬이 사람의 행위가 됨으로써 기념하는 일을 사람의 입장에서 결정하게 된다. 성찬에 참여하는 일은 노동이 되고 버겁고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다.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아닌 행위가 됨으로써 성찬을 자주 행하고 받아 누리는 즐거움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성찬신학에서 ‘방편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라는 점은 성찬의 횟수를 제한하고 줄이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3. 임재의 문제.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성찬에서의 임재의 문제는 상징이요 기념이다. 표와 기호를 드러내지만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는 거절한다. 성찬의 풍요로움과 부유함은 하늘에 있는 것이 되고, 그것을 지시하는 증거물로서의 성찬은 은혜로운 것이지만 현실적이고 실재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있어서의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의 무제는 실제적이 아니라 표상이요 상징이라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이원론적 영향을 따라서 영적인 실체는 하늘에 계신 주님이시고, 성도들이 주의 식탁에서 받는 것은 단지 실체에 대한 표상일 따름인 것이다. 알트하우스(P. Althaus)는 말하기를 “사실 쯔빙글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대 후기의 이원론과 신령주의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들은 영을 육체성의 의미로서 육과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쯔빙글리의 견해로서는 성찬가운데 임재하시고 자신을 우리에게 분여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 단지 표와 상징을 받는 것에 머물고 만다. 표와 인으로써 확증을 누리는 것과 성령을 통해 성찬에 실재하시고 자신을 나누시는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쯔빙글리의 세 가지 성찬 신학적 문제, 즉 시간과 방편주체 그리고 임재의 문제는 이어서 다루게 될 칼빈의 성찬신학과 대립한다. 그는 시간에 있어서 과거 지향적이고, 방편주체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주체이며, 임재에 있어서는 실재임재를 거절했다. 그가 말한 ‘영적임재’는 칼빈이 말한 ‘영적임재’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세 가지 신학적 문제로 인해서 그의 견해를 따르게 될 때 부지런한 성찬은 불가능해진다. 이제 앞서 살핀 쯔빙글리의 견해와 대립하는 칼빈의 견해를 살펴보자.
Ⅳ. 칼빈의 견해
1. 시간의 문제.
시간의 문제에 있어서 칼빈은 과거지향적인 쯔빙글리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성찬은 과거의 사건일 뿐 아니라 성찬가운데 현재로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주시는 은혜의 도구로서 파악하였다.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마실 그 약속(눅22:16)의 미래를 현재로 소급하여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은 슬픔과 애통의 식탁이 아니라 기쁨과 기대의 상이 된다.
그에게 있어서 성찬은 먼 과거의 것을 단지 되돌아보며 회상하고 기념하는 정신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또한 다가올 것만을 내다보며 온전한 교제를 목메고 마냥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성찬은 과거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미래의 온전한 완성에 대한 기대가 현재에 융합되어 성찬을 시행하는 그 현재에 경험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성찬이 단순의 과거의 기념이 아니라 현재 지금 누리는 은혜의 방편이요 도구가 되기 때문에 부지런히 시행해야할 당위성이 발생한다. 이루신 구속의 사역을 현재 즐거워하며, 또한 미래에 성취될 종말론적인 완성을 소급하여 누리는 기쁨이기에 성찬을 빈번하게 시행하는 것은 당연해진다.
2. 방편주체의 문제.
방편주체의 문제에 있어서도 칼빈은 쯔빙글리와 대립한다. 그는 성찬을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도구(instrument)라고 말한다. 그에게 은혜의 방편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성찬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보존하시고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분께서는 성찬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성찬의 주체가 쯔빙글리와는 다르게 하나님이다. 성찬에서 은혜를 베푸시는 주체로서의 주도권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칼빈은 성찬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이고, 베푸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순종함으로 부지런히 성찬을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일 년에 한 번 성찬에 참여하라고 하는 관습은 누가 처음으로 시작했던 간에 분명히 마귀가 만든 것이다.”라고 하면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성찬에 참여할 것을 주장한다.
칼빈은 사람이 성찬을 시행함으로써 은혜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찬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으로 보았다. 신자가 성찬에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찬에서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요, 성찬을 통해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순종이다. 그에게는 성찬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도구이다. 성찬을 통해서 성도들의 신앙을 고양시키고 자라게 하시는 것이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으로서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 다는 유일한 복음을 확증하는 것이라면 기쁨으로 부지런히 받아야 할 것이다. 성도가 성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은 식탁의 주인이 주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약의 한 당사자요 초청받은 손님으로써 베푸시는 성찬에 부지런히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책무요 의무가 된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찬에서 방편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성찬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분여하시는 주권적인 은혜의 행위이기 때문에 이에 반응하여 성도들은 순종으로 성찬에 자주 나와야 하는 당위성이 발생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찬을 부지런히 집행하고 받는 것은 성찬의 주인이신 주의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성찬의 횟수는 되도록 많아질 수밖에 없다.
3. 임재의 문제.
칼빈은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실재로 임재하신다고 보았다. 임재 하시되 성령을 통하여서 역동적이고 분명한 실재로써 임하신다. 주께서는 성찬에서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실제를 주시고 성도들에게 자신을 먹고 마시게 하신다. 그분의 식탁에 초청된 이들은 그분의 실체를 경험하고 그리스도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로마교회의 떡이 육체로 변한다는 것과 아래, 옆에, 안에 육체가 편재함으로써 임한다는 사실을 반대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천상에 계심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가운데 임재 하는 것은 상징이나 표나 기호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실재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에서 우리의 양식이 되시며 자신을 참으로 주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같이 생각되지만, 우리는 성령의 은밀한 능력이 우리의 지각을 멀리 초월한다는 것과 성령의 광대하심을 우리의 척도로 재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즉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성령께서 참으로 결합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믿음이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의 신비한 연합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철저히 성령의 사역과 관계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신자간의 연합과 신자상호간의 연합은 성령의 핵심적 사역이다. 그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나의 지성은 나의 혀가 표현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지성조차 문제의 위대성에 정복당하고 압도된다. 그러므로 이 신비 앞에서 오직 경탄 할 수 밖에 없으며 지성도 생각할 수 없고 혀도 표현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신비를 강조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실재를 분명하게 강조했다.
칼빈은 성찬가운데 성령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실제 임재 하신다는 사실을 말할 뿐 아니라 우리가 보좌 앞에 배설된 식탁으로 들어 올려 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성찬에서 주의 보좌로 초청되며, 보좌 앞에 배설하신 식탁을 대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신을 먹고 마신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로 들어 올려진다.
성찬이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라는 외형을 통하여서 자신을 주시는 것이라면, 이것은 중요한 하나님의 도구요 방편이다. 이것을 소홀히 할 권리가 성도들에게는 없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찬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는 실재이다. 성령을 통한 실재이시다. 또한 이 방편을 통하여 신앙을 강화시키는 도구라면 성찬을 등한시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자신을 실재로써 주시는 은혜의 도구라면 부지런히 사용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요, 참여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가 돌 것이다. 이처럼 칼빈의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한 ‘실제적 임재’는 부지런한 성찬시행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쯔빙글리와 칼빈의 성찬신학은 세 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쯔빙글리의 성찬신학의 견해를 수용할 경우 성찬을 자주 집행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반대로 칼빈의 성찬신학의 견해를 받을 때 부지런한 성찬은 당연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신학적 견해가 개혁교회 안에 함께 존재한다. 제네바의 칼빈과 취리히의 쯔빙글리가 취리히 합의(Zurich Consensus)이후에 함께 개혁교회로 연합했기 때문이다. 이 합의 이후에 개혁교회 안에서 칼빈의 성찬신학의 견해가 초기에는 강력한 영향을 주었지만, 차후로 쯔빙글리의 성찬신학의 견해가 더 우세해지면서 칼빈의 신학적 견해를 축소되어 갔다. 이제 이 두 신학적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를 살펴보도록 하자.
Ⅴ.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의 성찬신학.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는 많은 고백서들 중에서도 광범위한 부분을 다룸으로 인해서 가장 풍성한 신앙고백서라고 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에서의 성찬에 대한 내용은 다분히 논쟁적이고 변증적이다. 로마교회와 루터교회의 성찬신학에 대한 비판을 위주로 기술되어 있어서 성찬의 의미와 내용을 살피는 것에는 소홀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는 칼빈적인 면과 쯔빙글리적인 면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필자의 눈에는 쯔빙글리의 성찬신학을 더 수용하고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1. 시간의 문제.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에서 나타는 성찬의 시간성은 과거로 집중되어 있다. 29장 2항에서 기록하기를 “이 성찬 예식은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스스로 자신을 드린 그 희생을 기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명시한다. 윌리암슨(G.I. Williamson)은 이 항목을 해설하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역에 대한 기념에 대한 강조를 하면서 구속된 과거시제의 의미로써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린 바 그 한 번의 희생 제사는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또 절대적으로 완전하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그 제사를 기념할 것과, 우리의 구원과 영생의 소망을 그것 위에 둘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기에 과거 시제가 사용되어 있다.
과거의 희생사역에 대한 강조 일변도의 모습을 볼 때 시간의 문제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는 쯔빙글리의 신학적 견해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찬에 대한 고백이 과거일변도에 묶여 있게 되면 부지런한 성찬은 어려워진다.
2. 방편주체의 문제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 29장에서는 성찬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1항에서는 “우리 주님 예수께서 그가 잡히시던 날 밤에, 그의 몸과 피로 세우신 성례, 곧 성찬을 제정하여…”라고 말한다. 성찬의 제정이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세우신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3항에서는 주께서 집례할 사역자들을 택정하고 그들을 방편으로 사용하심을 언급하고 있다. 집례자는 하나님의 방편의 도구로써 방편의 주체가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방편주체의 문제에서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는 칼빈의 성찬신학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실제임재의 문제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는 임재의 문제에 있어서 쯔빙글리의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1항에서는 “그가 죽으심으로 친히 의생 제물로 드린 것을 영구히 기념케 하시고”라고 말하고 2항에서는 “이 성찬 예식은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스스로 자신을 드린 그 희생을 기념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찬미를 영적으로 봉헌하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5항에서는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해서 단지 상징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성례에 사용되는 외형적 요소들인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용도를 위해 정당하게 구별되어 있는 까닭에 이 요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 관계는 참된 것이지만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위와 같이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는 쯔빙글리적인 신학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찬가운데 실제 임재하지 않으시고 단지 상징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부지런히 성찬에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정리하자면,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에서는 방편주체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성찬의 주체자 되심을 드러냄으로 칼빈적이라 할 수 있지만, 시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과거적인 면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고, 실제임재의 문제에 있어서는 상징적인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쯔빙글리의 성찬신학의 견해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Ⅵ.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서의 성찬신학.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에서는 28-30주일에 75문답 82문답에 걸쳐서 총 8문답에 이르는 비교적 많은 부분을 성찬에 대하여 할애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서는 칼빈적의 성찬견해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필자는 파악한다.
1. 시간의 문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는 시간의 문제를 표면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성찬을 ‘언약’이라는 맥락에서 설명한다. 언약은 하나님과의 신자와의 관계로서 과거에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과 아울러 다가올 완성의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성찬은 그 언약의 사실을 확증하는 것임으로 부지런히 시행되는 것이 합당해진다. 그래서 울시누스(Z. Ursinus)는 언약의 영속성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자주 성찬을 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가 말했다.
2. 방편주체의 문제
76문답에서 말하기를 “마치 우리 몸의 지체들이 한 영혼에 의해서 살고 다스림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한 성령에 의해서 영원히 살고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라고 언급한다. 문답에서의 내용처럼 성찬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미하며 방편의 주체가 주께 있음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울시누스는 82문답을 해설하는 곳에서 성령께서 성찬을 통하여서 성도들의 심령을 견고케 하는 도구라고 언급한다.
다만 성찬을 정당하게 사용할 때에 성령께서 이 상징물을 도구로 삼아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시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속에 더욱 더 거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일이 더욱 견고해지게 하시며, 그에게서 받은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전체에서 성찬의 제정이 주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람이 제정한 것도 아니고, 한두 번 의식적으로 행하는 기념행사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주께서 제정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의 양육과 신앙 강화를 위하여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은혜의 방편임을 교리문답서는 말한다. 방편주체의 문제에 있어서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은 칼빈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3. 실제임재의 문제
이제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의 문제를 살펴보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78문답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육체적 몸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묻고 답한다.
78문: 그렇다면 떡과 포도주가 정말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합니까?
답: 아닙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고 변하는 것도 아니요 그 자체가 죄를 씻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것에 대한 신적인 증표와 확증이듯이, 성찬의 떡도 마찬가지로 실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지만, 성례의 본질과 속성에 합당하게 그것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울시누스는 떡과 포도주는 그 물체 그대로 변화 없이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성례적으로 실제 참 몸을 주신다고 위의 문답을 해설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감하지 않고 변화시키지도 않은 상태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단순하게 그대로 보아서, 그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드려지신 참된 눈에 보이는 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성례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또 울시누스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눠주신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에게도 주신다고 말한다.
첫 성찬 시에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었고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먹었던 것처럼, 그와 똑같은 의미로 지금도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따라서 바로 그와 동일한 의미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이다. 우리가 시행하는 성찬은 제자들이 시행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리문답 75문답에서는 더욱더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과 피로써 우리를 먹이시고 양육하신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75문: 그대는 그대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이루신 제사와 그의 모든 은덕들에 참여한다는 것에 대해, 성찬에서 어떻게 교훈 받으며 확신을 얻습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모든 신자들에게 그를 기억하여 이 떼어진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고 명령하시면서 이런 약속들을 덧붙이셨으니, 첫 째는 주님의 떡이 나를 위해 떼어지면 잔이 내게 전해지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이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몸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드려지고 찢겨졌으며 그의 피가 나를 위해 흘려졌다는 것이요, 둘째는 주님의 떡과 잔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분명한 표로서 목사의 손에서 받아 입으로 맛보는 것과 똑같이 확실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거시서 흘리신 피로써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의 영혼을 먹이시고 양육하사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76문답에서도 “비록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을 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이며…”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지만, 성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진정한 하나님을 이루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임재의 문제에있에서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서는 칼빈의 성찬신학을 따르고 있다.
이제 눈을 돌려 한국장로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신학자인 박형용 박사의 성찬신학을 살펴보자. 그의 성찬의 견해를 살핌을 통해서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성찬이 줄어든 신학적 이유들이 있는지 고찰해 보자.
Ⅶ. 박형용박사의 성찬신학
박형용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교의신학에 있어서 용어의 문제를 정하는 것과 더불어 개혁신학자들의 문헌들을 소개하고 알린 인물이다. 그는 프린스톤에서 수학하면서 챨스 핫지(C. Hodge)와 벤쟈민 워필드(B. B. Warfield)의 장로교 신학을 연구하였고, 그레샴 메이쳔 박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아들인 박아론 박사는 「기독교의 변증」에서 박형용의 공헌을 한국교회에 개혁신학을 소개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형용 박사의 「교의신학」은 루이스 벌코프의 명저 Systematic Theology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벌코프의 Systematic Theology를 그대로 옮겨 놓은 부분들도 「교의신학」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의 「교의신학」 각 권 내용의 대부분이 벌코프, 챨스 핫지, 워필드, 댑니, 스트롱, 쉐드, 카이퍼, 바빙크 등 서양의 선진 전통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거나 참조한 것이라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은 이 박형용 박사의 교의신학이라고 하는 관현악단의 ‘여러 가지 악기들’이 하나의 완전한 곡조를 취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큰 공헌임에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개혁신학을 한국교회에 알림으로써 끼친 영향은 큰 공헌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신학에 있어서 박형용은 일관되고 분명한 신학사상을 정립 했다기보다는 소개하는 데 그친 것은 아쉬운 점이다. 특별히 성찬신학에 관해서는 개혁신학자들의 의견들이 조금씩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취합하고 있다. 그는 루터교회의 주장과 쯔빙글리의 주장의 중간 지점을 칼빈의 견해로 보고 기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념적인 문제와 효과적인 문제를 수납하고 동시에 실제임재의 부분까지 모두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성찬신학에 대한 명확한 그의 견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시간의 문제
박형용 박사는 그의 성찬에 대한 기록에서 성찬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관련한 피흘리심에 대한 언급들은 있지만, 미래에 대한 소망에 대한 언급은 없다. 성찬의 현재적 사용과 임재에 대한 국면에서도 감화적이고 유효한 효력적 의미에서는 현재적인 것을 말하지만, 그리스도를 성찬가운데서 먹고 마심에 대한 부분은 미미한 듯하다. 성찬에서 보여주는 미래의 소망과 그 나라에서 먹고 마심에 대한 종말론적 기록들은 찾아 볼 수 없다. 박형용의 성찬신학에 있어서 시간의 문제는 칼빈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2. 방편주체의 문제
박형용은 성찬의 주체가 분명히 하나님임을 밝힌다. 그는 말하기를 “성례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행사들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반복해서 강조하면서 “다시 말하면 여기서 치중은 항상 하나님과 그의 행동에 있다”라고 말했다. 성찬이 하나님의 사용하시는 방편임을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이다. 그는 성례를 “성령의 기구”라고 묘사한다. 동시에 그는 성찬의 효력이 신자들의 응답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와 방편으로서의 주체를 강조하지만 성찬의 결과가 신자의 신앙과 응답에 따라서 결과지어진다고 말한다. 그는 성찬에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더불어 사람의 반응적 의무까지 잘 기술하고 있다.
성례에서 하나님은 상징들을 통하여 행동하신다. 그러나 그 행동의 효능은 그 유형한 상징들 자체에 보다도 그것들에 병행하는 신앙에, 즉 하나님의 행동에 향한 신자들의 응답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다.
그는 방편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명시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반응의 의무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방편 주체의 문제에 있어서 쯔빙글리보다는 칼빈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고 본다.
3. 임재의 문제
박형용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에 임재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성찬이, 그리스도에 참여함의 사실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칼빈이 말하는 주께서 성찬가운데 성령으로 실제로 임재하셔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는 주를 먹고 마신다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그는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에 임재에 대해서 “이것은 또한 신자들이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참여함을 상징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칼빈의 성찬 견해를 이해할 때 “실제임재”보다는 감화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을 그의 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칼빈의 견해를 소개하는 글에서 성찬이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는 신앙으로써 취하는 상징이라고 말한다.
칼빈의 제시는 전적으로 명백하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신체와 피가 비록 성찬에 있지 않고 하늘에만 장소적으로 임재 할지라도 신자가 성찬의 요품들을 수취할 때에 생명을 주는 감화를 그에게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 듯하다. 그 감화는 비록 참되고 생적이나 물리적이 아니라, 영적 신비적이며 성령에 의하여 매개되고 수찬자가 그리스도의 신체와 피를 상징적으로 수취하는 신앙의 행위에게 제약된다.
박형용은 자신이 신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던 핫지의 성찬관을 소개하면서 핫지의 견해가 “효능적으로(virtually) 임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박형용 박사는 본인의 주장보다는 여러 사람들을 소개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 듯 보인다. 심지어 칼빈의 임재교리를 부정하고 배척한 댑니(Dabney)의 견해까지 기록해 두었는데, 댑니는 그의 책(Systematic Theology)에서 칼빈의 견해가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와 다르다고 말하고, 칼빈의 견해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칼빈의 실제임재의 견해를 거절한다. 왜냐하면 그의 견해는 이해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벌코프와 핫지, 댑니를 소개한 그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교의신학󰡕이 한국교회에 준 영향이 지대하다는 의미에서 볼 때 그를 통하여 한국교회의 성찬신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칼빈의 견해를 명확하게 인지하기 보다는 개혁신학 안에서 흘러온 두 가지 견해를 모두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프린스톤의 영향을 통해서 쯔빙글리의 전통을 한국교회에 더 크게 소개하는데 일조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장로교회가 박형용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만큼 직·간접적으로 그가 소개한 성찬신학이 한국교회에 많은 부분 영향을 주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쯔빙글리의 성찬신학의 전통이 한국교회에 많은 부분 영향을 주었고 이로 말미암아 성찬을 자주 행하지 않는 전통을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Ⅷ. 나가는 말.
지금까지 개혁교회 안에 존재하는 쯔빙글리와 칼빈의 성찬신학의 차이점을 세 가지 신학적 문제들을 중심으로 살폈다. 더불어 이 두 신학적 견해를 이어온 두 가지 대표적인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서에 나타난 성찬신학을 살펴보았고,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박형용의 성찬신학도 거론해 보았다. 칼빈의 성찬신학적 견해가 점차로 쯔빙글리의 성찬신학에 전복 되어 가면서 기념적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강조됨으로 성찬의 횟수는 줄어들었고, 성찬의 의미도 약화되어갔다. 들리는 말씀과 함께 보이는 말씀, 맛보는 말씀으로써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성찬을 부지런히 시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칼빈의 성찬신학을 바르게 파악하고 회복해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성찬을 부지런히 시행할 수 있는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우선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중대한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성찬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서 칼빈의 성찬신학에 대한 부지런한 연구를 촉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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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https://www.esesang91.com/b/preach/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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