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진리를 아는 지식 (부흥과 지식)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창35:11-12)
1. 교회가 영적으로 깊은 침체에 빠져 있을 때,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은 잊혀진다.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고, 영적인 생명을 충만히 누리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과 감격과 기쁨 속에서 산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오늘날 전도가 잘 되지 않는 가장 커다란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참된 기쁨을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오늘날 조국교회의 영적인 침체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의 정체성을 잃은 채 살아가게 만들어 주고 있다. 교회에서는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고 축복인지를 말해도, 실제로 세상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러한 교회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때가 너무나 많다. 그리스도오 말미암은 구속과 하나님의 백성 된 축복으로부터 먼 삶을 살아갈 때가 많다. 이는 복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부흥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을 보여주는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생각나게 한다. 마땅히 되어야 할 자기 존재와 현실적으로 있는 자신의 존재 사이에서 고민하도록 만들어 준다. 부흥에 대한 갈망은 이러한 고통에서 비롯된다.
4. 우리의 신앙의 가장 큰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하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그러한 지식의 터 위에서 그분과 사귀는 것이다. 그 교제를 통하여 우리의 전인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5. 오늘날 조국교회가 열렬한 부흥의 체험을 강조하는 많은 교회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성화에 대한 열심으로 이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바로 신앙의 핵심을 신비한 체험과 능력에만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 체험은 반드시 그분의 성품을 닮은 삶을 추구하게 만든다.
6. 오늘날 우리는 차가운 정통이 아니면 쓸모없는 뜨거운 성령 운동 중 하나를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이다. 영적인 삶의 무지와 곤궁함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지에 기인한다.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추구점이 되지 못하고 있다.
7. 우리는 정작 중요한 일에는 마음을 바치지 못하는 대신 쓸모 없고 사소한 일에는 열심을 내고 있다. 우리가 참으로 진리를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가? 우리가 진리를 아는가?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하는 경험들이 있는가? 그 진리에 대한 인식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가? 그 진리 때문에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더 거룩한 교제로 들어가고 있는가?
8. 부흥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고통을 느끼는 것은 바로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영적인 각성을 통하여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는 것이 아니다. 죄의식으로 인한 압도적인 슬픔으로 인하여 영혼의 깊은 고뇌를 경험하게 된다.
9. 개인적으로 커다란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의 영혼의 상태를 정확하게 깨닫고 자신의 위기를 생각하게 된다. 물론 진리의 말씀의 빛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반성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10. 성경 진리에 대한 지식은 뼈대와 같고, 체험은 살과 같다. 따라서 지식만 가득하고 체험이 없으면 뼈만 앙상한 사람과 같고, 체험만 있고 성경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뼈 없는 연체 동물과 같다.
11. 교회의 역사는 신앙에 있어서 지성을 중시하는 경향과 체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진자운동을 계속해 왔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을 중심 축으로 시작해서 신학과 이지와 교리를 중시하는 경향과 신비한 체험과 생명력있는 신적 교제를 중시하는 경향이 시계추처럼 진자운동을 계속해 왔다.
12. 참된 지식은 경험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한다.
13.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단지 쓸데없는 사변으로 장난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그분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훨신 중요하다.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신을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히려 우리의 지식은 먼저 두려움과 경외를 가르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여기에 실로 순수하며 참된 종교가 있다. 그것을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를 수반하는 것을 의미한다.(존 칼빈)
14. 하나님을 아는 참지식은 경험을 동반하고 그렇게 습득된 지식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헌신을 불러일으킨다. 그 지식은 우리를 깨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열심에 자신을 다 드리게 한다. 그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을 동반하고 이 땅에서 사랑하는 것이 없도록 만들어 준다. 그로 하여금 그 지식을 갖지 못하였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으리만치, 하나님과 잃어버린 세상의 영혼들을 위하여 살게 만들어 준다.
15. 그 지식의 내용이 그릇된 것일 때만 거짓 지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내용이 아무리 참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도무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의 영광을 위한 열심과 잃어버린 세상의 영혼들에 대한 거룩한 연민과 우리 자신의 죄악된 모습에 대한 경건한 슬픔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것도 역시 다루는 내용에 관계없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다.
16.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의 오류는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는 말씀을 대해도 삶의 원리가 되지 못하는 지성주의적인 접근이다. 성경공부와 설교를 통해서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어도 차가운 문자 이상을 만나지 못한다. 둘째로, 말씀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오류는 적용의 위험이다. 우리는 성경을 대하면서 행동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접근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무수한 적용들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문을 읽고는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무엇인가 행동을 결심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이런 행동지향적 적용주의는 우리를 새로운 율법주의로 흐르게 한다. 이렇게 성경을 대하게 되면 우리는 경건에 대하여는 많은 것을 알지만, 정작 우리의 경건의 궁극적인 이유가 되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된다.
17. 제임스 패커는 그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하도록 지적한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첫째는 하나님을 많이 모르면서도 하나님에 관하여 많이 알 수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경건에 관해서는 많은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은 거의 모를 수 있다는 점이다. 전자는 신학과목이나 변증학 등을 공부함으로써 얻게 되는 지식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고, 또한 후자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실천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자신은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18. 지금은 무엇을 믿든지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식의 태도들이 교회 안에 만연하고 있다. 이제는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도리인 교리를 깊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이제 우리는 오히려 교리를 중시하고 고수하려는 교회들이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교회인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 이전에는 신앙고백에 있어서 작은 문구 하나를 인하여서 순교자들까지도 생겨났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교리보다는 삶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인지, 이 문제에 있어서 호양(互讓)의 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왜 그렇까? 왜, 기독교의 터전이요 기초가 되는 교리들이 가볍게 취급되고, 또 그렇게 취급되어도 교회는 이렇듯 진리에 대한 그릇된 취급에 너그러울 수 있을까? 그것은 진리에 대한 확신의 부족이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성경의 진리가 그들에게 영적으로 체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진리를 소유하고 그것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19. 종교개혁가들이 복음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거기에 생명을 건 것은 그들이 그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진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체험하고 발견한 진리들이었기에 그것이 그들에게 성경의 사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0. 말틴 루터의 다음과 같은 자전적인 고백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 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것은 살아가는 일을 통해서, 죽어가고 저주받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독서하고 명상하고 이해하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1.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체험이 말틴 루터로 하여금 로마 카톨릭의 비성경적인 교리 체계를 비판하게 하였다. 그는 교황의 파문장을 불태우면서 진리의 깃발을 들었다. 자신이 깨달은 이 진리를 위하여 생명의 위협을 두렵게 여기지 않으면서 종교개혁을 수행하였는데, 그 교리를 지금 우리도 신앙고백서와 교리서 안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 교리를 알았던 방식과 인식의 질은 우리의 그것과 매우 다른데, 이는 그가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하는 가운데 그 교리를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22. 그(말틴 루터)는 신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십자가 체험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을 마치 실제 일어난 일들 가운데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신학자로 인정될 수 없다. 그러나 고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눈으로 볼 수 있고 명백한 하나님의 일들을 파악하는 사람은 신학자라고 인정될 자격이 있다. 영광의 신학자는 악한 것을 선하다고 부르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십자가 신학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
23. 기독교에 “관한”, 복음에 “관한” 추상적인 진리들을 수집하고, 철학적인 전제들을 모으는데 있어서 세상 학문이 추구하는 방법과 똑같이 진리를 탐구하고, 그들이 “알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안다”고 말해서는 진정으로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진리를 가지고는 그 진리를 따라서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24. 우리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를 알면 그 지식은 우리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고 싶은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고 싶은 소망을 불타게 한다. 그분 안에서 구속받는 자신의 처지를 즐거워하며 거룩한 섬김을 위한 열심을 갖게 한다.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교제를 사모하고 그래서 보다 깊은 경건을 추구하게 한다. 그런 방식으로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지식과 생활이 분리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25.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 교리들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즉 진리를 깊이 경험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만이 그 진리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 경험되지 못한 진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차가운 문자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죄악된 영혼에 거룩한 고민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하고, 우리의 삶을 정결하게 씻어 주지도 못한다.
26. 부흥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가장 위대한 축복은 바로 이것이다. 부흥을 경험하는 교회에 하나님의 성품과 진리에 대한 깊은 앎을 가져다준다. 온교회가 함께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진정으로 한 공동체가 되게 한다.
27.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교회의 공동체성에 대한 논의는 다분히 그 관심이 밖으로 드러나는 외면적인 활동이나 공동체 구성원들 각자가 공동체애 대하여 느끼는 만족감에 집중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즉 교회가 공동체라는 사실을 강조할 때는 사회에 대한 봉사나 혹은 교회 속에서 어떤 구성원들의 소외 문제를 논의할 때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28.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가 서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교회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 공동체는 신앙 공동체라는 사실과 또한 그 공동체는 함께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신자들의 모임은 하나님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공동체성을 갖게 되고, 그 공동체 안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교회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29. 무엇보다도 부흥이 가져다주는 가장 영광스러운 축복은 진리 인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약 천오백년 전의 설교들이 지금도 읽는 우리들의 가슴에 감명을 주는 것은 진리의 힘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 설교의 능력은 설교자 속에 역사하고 있던 진리에 대한 경험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30. 설교자는 강의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태어난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부흥의 영광이 있는 광야에서 거룩한 고독 속에서 설교자가 빚어져 가는 것을 안다면, 교회에 부흥의 경험 없이는 설교자가 없다는 교회 역사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1. 오늘날 부흥에 관해 흥미를 갖는 사람들 중에는 위험한 오해가 있다. 그들은 부흥을 자기들의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채용해 보려고 한다. 교회가 “부흥운동”을 통하여 이룬 외적인 성과들에 만족해 하면서, 그런 부흥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고 싶어하고 이런 저런 일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부흥에 관심을 갖는다.
32. 우리의 삶의 목표는 결코 무엇인가 이 땅에 일을 남기는 것일 수 없다. 심지어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일 수 없다. 우리의 삶의 모든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다. 온 땅의 백성들이 그분의 이름을, 그 앞에 진심으로 무릎을 꿇으며 예배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는 일이 중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우리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동기가 한없이 순수하게 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33. 우리는 성경의 권위가 도전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의 계시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자율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몰아낸 그 자리를 인간의 철학과 사상에 내어주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도의 초보로 여기는 대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도 못한 자들의 이성의 판단을 성경 위에 올려놓기 좋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34. 조국교회에서조차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한 복음은 세상과의 부조화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적당히 인간의 사상이라는 물에 희석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교회에서 예배를 그리고 설교를 들으며 그 진리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제는 종교에 매인 너무 “폭 좁은 신앙 생활”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35. 이제는 거룩한 말씀의 능력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변해 버린 화석화된 교회들이 그 능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스스로 세운 교회의 조직이나 프로그램으로 교회 자신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현실이 되었다. 우리들이 아무리 수고할지라도 그 수고가 하나님 자신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다.
36. 그러므로 부흥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도 심각한 죄이다.
37. 이제 우리 동포들은 교회를 점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인 삶의 형편은 형편없이 낮아졌고, 신학교에는 소명 의식이 불분명한 많은 수의 목회자 후보생들이 교회에 취업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연일 교계 신문에 보도되고 있는 신학교의 소요 사태와 고소 고발 사건들을 보라. 우리의 일상적인 수고를 비웃고 있지 않는가? 왜 성도들이 많이 늘어났고, 그토록 많은 목회자들이 수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국교회의 초창기 선교 시대를 회고하며 그리워하게 되었는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의 수고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위대한 일들의 행하심이 조국교회 안에서 거의 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목마른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38. 우리가 참된 부흥을 통하야 교회를 교회 되게 하시고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 되게 하시는 위대한 일을 그리워하고 그 일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탄원하는 대신, 거짓된 부흥으로 교회의 성장이나 도모하려는 인간적인 야망에 불타고 있는 동안에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비참하리만치 쇠퇴하였고, 교회 안에는 회심의 경험이 없는 교인들로 붐비게 되었다.
39.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한 프로그램 만들기에 골몰하는 동안에 원수 마귀는 교회의 영성을 흐리게 만들었고, 세상의 편의주의적인 사고와 세속적인 사랑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는 거룩한 진리를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기관으로서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여 주는공동체가 되는 대신 수시로 세상을 향해 손짓하는 이벤트 회사처럼 변질되어가고 있다.
40. 역사적으로 교회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쇠퇴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안일한 신앙 생활을 하려는 나태한 교인들과 그들을 적절히 다루지 아니하는 복음의 일군들의 합작품이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도시 한 가운데는 잠든 교회가 있고 잠든 교회 한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을 잃어버린 설교단이 있다.
41. 상업주의와 손잡은 축복 신앙, 뜨거운 열기는 가득해도 십자가는 없는 집회들, 부흥이라는 구호는 많아도 참된 부흥을 만나보기 어려운 조국교회의 상황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42. 야곱은 다시 올라간 벧엘에서 새롭게 하나님을 만났다. 이처럼 부흥은 언제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땅에 있는 교회들이 비상하게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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