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잘못된성경해석_의인 아흔아홉과 죄인 하나
***목사의 잘못된 성경해석(의인 아흔아홉과 죄인 하나)
자료출처: http://cafe.daum.net/heretical/Knya/13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변승우목사는 성경해석을 완전히 엉터리로 하는 사람이다.
첫째로는 정말 이렇게 해석하는 목사가 과연 있다는 자체가 신기하기만 하며, 둘째로는 이러한 엉터리 해석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변승우목사의 눅15장7절의 해석을 살펴보자.
- 여기 두 종류의 집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든 회개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밖에 있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는 천국에 갈 사람이고 하나는 지옥에 갈 사람입니다. 그런데 회개한 사람에 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려면 이 말씀 그대로 회개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단 한가지라도 회개할 죄가 남아있으면 안됩니다. 모든 죄를 다 회개했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쳔, 27-28쪽)
본문을 전체문장으로 살펴보자.
눅 15:3-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위 본문이 “죄를 회개할 것 없는 의인만 구원을 받는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면 그는 목사의 자격이 없다. 변승우목사는 성경과 전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
(1)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중요한 초점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며, “죄인”이 되어야만 하며, “아흔아홉마리의 양”이나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 그 초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변승우목사는 거꾸로 “아흔아홉”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변승우목사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오히려 성경은 “의인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의인이 되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을 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변목사는 모르고 있다.
변승우목사는 과연 모든 죄를 끊고 회개한 의인인가?
롬 3:10-12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위 본문의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은 실제적인 상황이 아니라, “죄인 한명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문학적인 표현법이다.
오히려 나같으면 죄인 1명과 의인 999명을 대조하고 비교함으로서 더욱 그 가치를 극대화하는 강조적인 표현법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2) 예수님이 본문을 말씀하신 이유와 배경을 보아야만 한다.
눅 15: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가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세리, 목자, 행상인, 피혁공과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불렀으며, 율법적인 의무를 지키지 못한 사람들과 또 중병에 걸린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눅15장을 학자들은 “소외된 자의 복음”(Gospel of the Outcast)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여 그러한 소외된 자들과 자리를 함께 한다는 자체가 금지된 사항이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이러한 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은 그러한 소외된 자들(죄인이라고 불리는 계층의 사람들)을 구원하려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변승우목사는 본문의 배경을 전혀 외면한 채, “회개할 것 없는 의인아흔아홉”을 강조하면서 회개할 것이 없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해석을 하는 것이다.
(3) 변승우목사의 책을 읽어보면 그러한 내용이 자주 나타나는데, 변목사는 “회개”라는 단어의 뜻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회개가 단순히 “죄에서 돌이키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수없이 설명하였지만, 회개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방향수정”을 말한다.
즉 불신으로부터의 회개는 곧 믿음이 되어진다.
즉 본문에서 말하는 “의인”과 “죄인”의 차이점은 하나님께로 돌아 왔는가, 혹은 돌아오지 않았는가에 대한 차이점이며, 바로 그러한 개념이 “회개”(메타노에오)의 뜻이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말하는 죄인과 의인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벧전 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4) 변승우목사의 이러한 성경해석은 그가 평소에 주장하던 것과 다름이 없다. 그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하나님의 칭의도 자신이 의를 갖고 있어야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행위를 믿음의 행동이나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행위는 우리의 칭의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마음 속에 있는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몸의 움직임과 활동이 몸에 있는 생명의 표현이듯 믿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표현인 행위들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입니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쳔, 127쪽)
- 하지만 우리 안에 의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안에 의로움이라고 전혀 찾아 볼 수 없으며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만큼이나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심에 비추어볼 때 완전히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이다(지옥에 가는, 166쪽)
자료출처: http://cafe.daum.net/heretical/Knya/13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변승우목사는 성경해석을 완전히 엉터리로 하는 사람이다.
첫째로는 정말 이렇게 해석하는 목사가 과연 있다는 자체가 신기하기만 하며, 둘째로는 이러한 엉터리 해석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변승우목사의 눅15장7절의 해석을 살펴보자.
- 여기 두 종류의 집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든 회개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밖에 있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는 천국에 갈 사람이고 하나는 지옥에 갈 사람입니다. 그런데 회개한 사람에 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려면 이 말씀 그대로 회개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단 한가지라도 회개할 죄가 남아있으면 안됩니다. 모든 죄를 다 회개했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쳔, 27-28쪽)
본문을 전체문장으로 살펴보자.
눅 15:3-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위 본문이 “죄를 회개할 것 없는 의인만 구원을 받는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면 그는 목사의 자격이 없다. 변승우목사는 성경과 전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
(1)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중요한 초점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며, “죄인”이 되어야만 하며, “아흔아홉마리의 양”이나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 그 초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변승우목사는 거꾸로 “아흔아홉”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변승우목사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오히려 성경은 “의인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의인이 되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을 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변목사는 모르고 있다.
변승우목사는 과연 모든 죄를 끊고 회개한 의인인가?
롬 3:10-12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위 본문의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은 실제적인 상황이 아니라, “죄인 한명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문학적인 표현법이다.
오히려 나같으면 죄인 1명과 의인 999명을 대조하고 비교함으로서 더욱 그 가치를 극대화하는 강조적인 표현법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2) 예수님이 본문을 말씀하신 이유와 배경을 보아야만 한다.
눅 15: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가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세리, 목자, 행상인, 피혁공과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불렀으며, 율법적인 의무를 지키지 못한 사람들과 또 중병에 걸린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눅15장을 학자들은 “소외된 자의 복음”(Gospel of the Outcast)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여 그러한 소외된 자들과 자리를 함께 한다는 자체가 금지된 사항이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이러한 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은 그러한 소외된 자들(죄인이라고 불리는 계층의 사람들)을 구원하려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변승우목사는 본문의 배경을 전혀 외면한 채, “회개할 것 없는 의인아흔아홉”을 강조하면서 회개할 것이 없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해석을 하는 것이다.
(3) 변승우목사의 책을 읽어보면 그러한 내용이 자주 나타나는데, 변목사는 “회개”라는 단어의 뜻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회개가 단순히 “죄에서 돌이키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수없이 설명하였지만, 회개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방향수정”을 말한다.
즉 불신으로부터의 회개는 곧 믿음이 되어진다.
즉 본문에서 말하는 “의인”과 “죄인”의 차이점은 하나님께로 돌아 왔는가, 혹은 돌아오지 않았는가에 대한 차이점이며, 바로 그러한 개념이 “회개”(메타노에오)의 뜻이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말하는 죄인과 의인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벧전 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4) 변승우목사의 이러한 성경해석은 그가 평소에 주장하던 것과 다름이 없다. 그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하나님의 칭의도 자신이 의를 갖고 있어야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행위를 믿음의 행동이나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행위는 우리의 칭의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마음 속에 있는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몸의 움직임과 활동이 몸에 있는 생명의 표현이듯 믿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표현인 행위들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입니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쳔, 127쪽)
- 하지만 우리 안에 의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안에 의로움이라고 전혀 찾아 볼 수 없으며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만큼이나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심에 비추어볼 때 완전히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이다(지옥에 가는, 166쪽)
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https://www.esesang91.com/b/preach/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