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2009년 12월 12일 토요일 가조제일교회 새벽기도회
『[1]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2]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3]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 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 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5]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6]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7]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8] 이에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우리가 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9] 그것을 옮겨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사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신지 라 [10]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가로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11]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12]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삼상 5:1-12, 개역)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포로가 되어 간 그 자리에서 승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말씀한다. 블레셋은 이제 자기들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으며 이스라엘을 정복할 것이라고 여겼으나 그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딴 판으로 흘러갔다.
사탄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승리를 쟁취했다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짓밟아 진정한 승리를 이루시고 사탄을 정복하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부적으로 전락시킴으로서 언약의 백성으로서 죄악된 종교성으로 타락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임재가 무엇인지 바르게 나타내신다. 그것이 첫째로는 이방의 블레셋 족속들 가운데서,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 정당한 반응이 무엇인지 나타내신다.
우선 이방가운데 나타내시는 모습은 블레셋의 다곤신전에서 일어났다. 블레셋은 하나님의 궤를 다곤의 시전에 가지고 들어가 다곤 곁에 두었다. 이튿날 아스돗 사람들이 일어나 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다. 또한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더 무섭게 내리치심으로 악성종양 재앙을 내리셔서 그 지역 사람들을 망하게 하셨다.
결국 블레셋이 백기투항을 하게 되었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모여서 이 사태를 논의했다. 그 첫 번째 대안으로 궤를 가드로 옮기도록 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악성종양이 났다. 다시 에그론으로 보냈다. 거기서도 역시 같이 일이 발생했다. 결국에는 여호와의 궤를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 이런 일련의 일로 인한 결과는 비참했다.
그 일에 대해서 11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또 사람들을 보내어 블레셋 통치자들을 모두 불러모아 놓고 "이스라엘 신의 궤를 돌려 보내어, 그 있던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지 않게 해주시오!" 하고 요청하였다. 하나님이 거기에서 그들을 그렇게 무섭게 내리치셨기 때문에, 온 성읍 사람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러, 큰 혼란에 빠졌다.』(삼상 5:11, 새번역)
이리하여 여호와의 궤는 일곱 달 만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이스라엘을 패배시키고 포로가 되어 가시는 수모를 겪으신 후에 적진에서 승리케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적군들 앞에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심으로 영광을 나타내시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나 저들의 욕심과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종교로 여호와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막과 그 율법이 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편을 들어주시리라 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밖에서 곧 블레셋 땅에서 여호와께서 승리를 취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 주신다. 이스라엘이 실수했던 일 다시말해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조정할 수 있다는 그릇된 종교적 신념을 고쳐가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규례와 수단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과 승리를 보장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출애굽하여 광야길을 지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여호와께서 가르치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개역)
그렇게 긴 세월동안 양육하여 맺어낸 백성들이 여호와의 그 본심을 내몰라라 하며 가나안의 우상에 물들여졌다. 그들이 가나안 우상에 물들여졌다는 것이 겉으로는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여전히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을 높이 찬양하면서 예배하며 그 앞에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성막이 있고 오늘 사건에서 나오는 언약궤도 있었다. 그들은 율법이 있고 할례를 행하는 언약의 백성이었다. 그들이 겉으로 행하는 모든 종교적인 의식으로는 나무랄데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의 우상에 물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외적인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되 가나안 사람들이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을 바쳐 그 우상을 섬기듯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가지시는 그 거룩한 목적과 내용으로 나가지 아니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언약의 백성으로 사는 길에서는 타락의 길로 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다가 장렬하게 죽으리라 하는 마음은 없고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하고 이 세상에서 낙을 누릴까 하는 생각이 저들을 지배했다. 더 좋은 환경을 위해서 여호와께서 분배하신 그 땅을 버리고 남의 것을 뺏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을 모시는 백성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여호와를 제대로 알고 섬기고 살까? 종교적인 일로는 얼마나 열심을 바치고 헌신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돌아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함을 얻어 신자된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며 이끄시는 그 목적은 잊어 버리고 삶의 문제에만 매달린채 이거 좀 해결이나 해 달라고 하지는 않는지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자리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 백성답게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것이 얼마나 많으며 지금도 허락하시는 삶이 얼마나 특별하신 간섭과 배려 있지 깨닫지 못하는 때가 너무 많다. 우리의 눈이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의 신앙의 보상이 이 세상의 것일거라고 굳게 믿고 사는 한 기독교 신앙은 설 자리가 없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만큼 가야하고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것만큼 누릴려고 하면 기독교 신앙은 우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명목상 크리스챤은 많아도 신앙의 진수로 갈려고 하는 이는 적다. 신자는 하나님이 목적이어야 한다. 그 하나님을 높이고 그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그를 닮아가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 그것을 벗어나면 신앙을 퇴색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동원하시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언약궤까지 빼앗기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나타나야할 정당한 반응이란 무엇인가? 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가진 반응이란 종교적인 형태로써는 굉장했지만, 그 하나님을 알아가고 닮아가는 일로는 죄악된 모습으로 타락했다. 그들의 죄악의 짐을 지시고 힘없이 블레셋으로 잡혀 가셔서 거기에서 다시 승리하심으로 여호와가 우상과 비교될 수 없는 참신이시며 그를 대항하는 모든 것들은 다 심판을 받아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만이 이 온 우주에 참 신이심을 나타내시고 저들로 벌벌 떨게 하셨다.
이것은 이방인 가운데 나타난 여호와의 임재에 나타난 반응이다. 그렇다고 저들이 구원의 길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저들에게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심으로 이방인들에게는 두려움으로 떨게 하신다. 그러나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여호와의 임재를 나타내심으로 회개케 하여 언약의 백성으로 회복시키시고 그 풍성함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은혜다.
신앙은 신앙으로서 자리 잡아야 한다. 신앙이란 이름으로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것을 채울려고 하지 말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심이지 이 세상의 떡을 주시려 함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블레셋으로 잡혀 가심은 저들의 죄를 해결하시고 언약 안으로 이끌어 여호와만 섬기는 백성으로 만들려 하심이지 세상의 힘을 주시려 함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사는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무엇을 하여 주시기를 구하고 있는지, 혹 이스라엘의 실패와 같이 동일한 죄된 길로 가고 있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돌아보자.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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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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