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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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강단&말씀모음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2009년 12월 10일 목요일 가조제일교회 새벽기도회 『[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4: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 벡에 진 쳤더니 [2]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명 가량이라 [3]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 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 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10]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삼상 3:19-4:11, 개역)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선지자로 세워가는 모습과 엘리의 가문이 멸망하는 과정을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선지자로 세워 가시는 증거가 나타났다. 19절에서 보는대로,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이 말은 사무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예언의 말은 헛된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무엘 자신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이다. 20절에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시되 말씀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의미있는 말씀이다. 그것은 연이어 나오는 말씀과 연결되어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타락과 그와 반대되는 여호와의 말씀의 신실함이 대조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들이신 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공동체로 세워가시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온전히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그 생명의 길을 저버리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욕심에 사로잡혀서 여호와 유일의 신앙을 저버렸다. 저들의 신앙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 4장의 말씀으로 드러나게 된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보복하기 위해 결사항전을 벌일려고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4천명 가량이 죽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대책을 강구했다. 그 대책이란 것이 무엇인가? “...,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였다. 언약궤를 가져오자,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땅이 울릴만큼 사기가 충천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실제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팼다. 이스라엘 보명 삼만 명이 죽었다. 언약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다. 이것이 왜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으로 나타나신 것과 함께 관련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말씀이 되는가? 이스라엘의 그 소위 신앙이라는 것은 ‘부적’수준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내세워 그 언약궤 자체가 무슨 효험이 있어서 적들을 물리쳐 주리라 고 여겼다. 언약궤 안에 있는 말씀대로 순종할 생각은 안하고 그 언약궤 자체가 무슨 묘한 힘을 발휘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엉터리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대책을 세워 내어놓은 대안이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신앙의 수준이 이런 정도였으니 그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다. 여호와 신앙이 종교성으로 전락해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잘못된 종교성을 심판하신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종교성으로만 채워진 죄악된 신앙을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일에 핵심적인 인물해 가신다. 우선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신앙의 개념을 부수어 바르게 회복해 나가고자 하신다. 이런 일들은 다 저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데서 나온다. 언약의 백성으로서 가져야할 복은 세상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오로지 여호와를 기뻐하고 그 말씀에 즐거이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더 많이 가질려고 하고 더 많이 누릴려고 하자 여호와는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부적에 불과한 종교로 타락했다. 오늘날의 신앙은 어떨까? 예배 드림이 중하고 소중하지만 그것이 종교성으로 치우쳐져 있지는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배들 드림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신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일전에 유행했던 말 중에,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한다”이 말은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 에배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 되고 말았다. 아브라함은 가는데마다 제단을 쌓았다 그러니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아라~ 말을 그럴싸 하지만 예배 이외에는 말할꺼리가 없는 종교인이 되고 말았다. 예배 뿐 아니라 갖가지 헌금을 드림으로써 자기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은 분명 그릇된 신앙이다. 놀라운 것은 헌금의 명목을 늘려가면 궁시렁대면서도 그대로 다 따라 한다는 사실이다. 벌 받을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혹시나 그 일로 인해서 내가 하는 일에 화가 미칠까봐 불안해서 아무리 헌금 숫자를 늘려도 그대로 다 따라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것은 일차적으로 지도자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마음에 겁을 먹고 재앙을 당할까봐 맹종하는 것은 신앙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신앙고백으로서의 헌금, 우리가 이 세상에 목적을 두지 않고 이 세상에 보상을 두지 않는 고백으로서의 헌금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손으로 우리의 능력과 지혜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허락해 주심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헌금이어야 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배는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 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우리의 드릴 예배는 산제사라고 했다. 삶 속에서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나타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 세대의 죄악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그것만 따라가야 한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예배가 아니라 새언약 안에 들어온 자가 여호와 안에서 가지는 풍성함과 넉넉함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거룩하게 드리고, 집 안에서는 그 예배 드린 자가 사랑과 섬김과 희생이 없다면 종교인으로 자라가고 있는 증거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삶은 엉망이면서도 보란 듯이 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틀렸다는 말씀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예배는 너무나 그런 일에 익숙해 있다. 형식적인 예배는 거룩히 드리면서도 삶은 거룩하지 못하다. 예배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우리의 목적을 위해 예배를 드리는 종교성으로 타락해서는 안된다. 그 중심에는 항상 말씀을 강론하는 자의 중차대한 책임이 있다.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타신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엘리의 그 아들들은 오히려 바알과 아세라 종교에 오염되었고 말씀은 권위를 상실하고 언약궤는 부적떼기로 취급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블레셋을 들어서 저들을 심판하시고 말씀의 권위를 세워 저들로 여호와의 말씀의 중함을 알고 그 언약의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하는 자로 세워가시고자 했다. 오늘도 우리의 삶에 종교성으로 오염된 것은 없는지 돌아보며,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가정과 삶에 그리고 교회에서 동일한 거룩함으로 나타나도록 하자~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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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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