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2009년 12월 9일 수요일 가조제일교회 새벽기도회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 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 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2]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15]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16]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가로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17]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18]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삼상 3:1-18)
가나안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지파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야했었다. 그러나 이미 여호수아 말기 때부터 타락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도처에서 우상을 섬기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고 간절히 독력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토록 권고하셨지만, 그들은 가나안의 우상과 종교와 문화를 따라갔다.
결국 사사시대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부여하신 가장 이상적인 통치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의 방식대로 세상에서의 물질적 보상을 바라는 죄악된 양상으로 변질되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대로 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해서 이방 나라와 같이 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보이지 아니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이상적이고 완벽한 통치였다. 그들이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그 언약에서 요구하는 율법의 책임과 의무를 저버리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 중심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자기의 욕심대로 가지고 싶고 쾌락을 따라 가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여호와와 그 율법은 그것을 행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기에 그 생명의 길을 저버리고 자기 욕심을 채워줄 우상을 선택했다. 거기에는 자연적으로 성적인 타락이 따라왔다. 나라는 점점 악한 길로 나아갔고 그 악함이 제사장 그룹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엘리의 두 아들들의 방종은 그런 일련의 사건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시대가 그렇게 변질되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괴로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계획을 나타내시고 사무엘을 조용히 준비시키셨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그 타락한 곳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세워지고 있었다.
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희기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는 말씀에서, 말씀과 이상은 동의어다. 여기서 말씀은 하나님의 언어적 소통행위를 훨씬 더 초월하는 아주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의사소통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그 언약과 구원의 역사를 어떻게 진행해 가실지, 그리고 그 택하여 구원한 백성을 어떻게 완성시켜 나갈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요 경륜이다.
이상은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보여주시는 그림언어로서 당대나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사전달 행위이다. 7절에서는 그것은 말씀이 나타나다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상이 말씀이요 말씀이 곧 이상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은 너무 초월적으로 나가서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는 모습들이 만연해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계시의 과정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나타내시고 십자가와 완성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과 이상의 실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월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그 섭리와 경륜을 이해하지 못한채 여전히 은사와 체험과 신비한 것만 추구하고 이미 허락하시고 베푸신 구원을 도외시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가야할 길이 아니다.
2절에서,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라고 한 것은 그가 단지 나이가 들어 늙어서 그렇다기 보다는 그의 영적인 눈이 어두웠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그 역할을 감당해야할 엘리는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 아들의 죄악에 대해서도 강력히 대처하지 못했다.
세상이 어두워져 가고 교회가 경건을 상실하고 세상과 같은 모양으로 타락하는 것은 영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지도자의 타락과 결부되어 있다. 교회는 어느 순간에 죄와 회개의 말씀 선포를 그만두었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복하고 항복하라는 말씀을 그만두었다. 성도는 고객이 되었고, 십일조와 헌금을 많이 하면 더 많이 부풀려서 복을 준다고 말하고 있다. 고객이 듣기 좋은 소리, 고객이 원하는 소리만 늘어놓다보니 말씀맡은 자는 고객의 종노릇이나 하고 있다.
어떤 분의 말씀이, 주일을 지키라는 말씀을 안한지가 오래되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래가지고는 교회 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란다. 주일을 거룩히 보내야 한다는 권고 자체를 못하고 그냥 저냥 넘어가게 되더라는 것이다.
영혼을 위한 진정한 말씀이 사라지고 시대의 사상과 야합되어 점점 말씀의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 말씀은 강단에서 선포되어지고 그 강단에 선 사람은 말씀 맡은 목사이다. 성경을 읽어놓고 다른 얘기를 하다가 돌아와서 다시 성경으로 결론을 내린다. 신학교 시절 이런 식의 설교를 교수님께서는 “보잉747 설교”라고 하셨다. 비행기가 이륙해서 날아다니다가 다시 공항에 착륙하듯이, 시작은 성경에서 했지만 본론은 영 다른 이야기만 늘어 놓다가 다시 성경으로 결론을 맺는 것을 비꼬아서 하신 말씀이다. 오늘날은 보잉747설교가 너무 많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아니하였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은혜와 계획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또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임재하심을 나타내었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기억케 한다. 저들의 죄악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기억이 이끌어 가시겠다는 여호와의 열심의 표시오 자기 백성을 향한 끝없으신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 백성 중에 거하시건만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못볼 뿐이다. 요즘은 하도 보여달라 보여달라 들려 달라 들려 달라고 아우성을 치니 참 안타깝다. 십자가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보내신 성령으로 우리 안에 함께 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케 하심에 항복하지 못하고 더 보여달라고 하고 더 음성을 들려 달라고 하는데, 안보여 주시고 안들려 주니까, 자기가 보고 자기가 듣겠다고 눈을 감고 관심법을 하고 봤다 하고 들었다고 하니 뭘 보고 뭘 들었다는 것일까?
“하나님의 음성 듣기 훈련”을 통해 들은 그 음성은 결국 자기가 자기에게 한 말일뿐이다. “딸아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 딸아 내가 너의 눈물을 안다”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해 주실 말씀이 그 정도 수준이란 말인가? 그 말은 결국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자기가 자기에게 집중한 덕택에 자기 암시를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뿐이다.
우리에게 이미 계시된 말씀이 성경이 있고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 외에 더 필요한 것이 없고 모자람이 없다. 우리에게 요구하신 일은 그 말씀에 순종함이요 그 말씀에 항복함이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는 자는 성경에서 벗어난 자다.
그렇게 늘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사무엘에게 나타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이 태어나고 세월이 지나 지금에 와서야 나타내셨다. 죄악과 타락을 보시자마자 하늘을 가르시고 불과 유황으로 멸하시고 세상을 끝내시지 아니하시고 기다리고 기다리신다.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어 사무엘을 부르셨다.
부르심~
깊이 생각해야할 말이다.
다 목사가 되고 다 선교사가 되어라는 말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너도 나도 그 부르심으로 나섰다고 하는데, 왜 그 부르심이 원하는 길로 가지는 않을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부르심을 듣도록 사무엘의 귀를 열어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은혜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개역)
니고데모는 일반적인 거듭남 곧 이 유대의 율법주의로 거듭났다고 하는 그런 거듭남 말고 다른 거듭남을 원했다. 니고데모는 율법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다. 이런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 하는 일로는 결국 인간의 한계에 부딪히고 절망에 이르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거듭날 수가 없다. 니고데모는 그 배운 유대주의의 ‘틀’ 안에서 이해할려고 하니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부르심은 아무도 들을 수가 없다. 오직 성령께서 열어 주셔야 들을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믿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그 은혜를 주신 것은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그러기에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시고 엘리가문에 일어날 심판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말씀한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선포한 것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이다. 심판을 선포한 것은 저들을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야할 길을 바르게 걷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호와께서 거룩하시기에 저들도 거룩해야만 했다. 심판으로 저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려 함이 아니요 저들을 온전케 하려 함이었다.
세례요한이 와서 전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 1:4)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전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마 3:2)
오순절 이후 사도들이 전한 말씀이 무엇이었는가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 리니』(행 2:38)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그런데 오늘날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심판과 회개와 죄사함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부자되고 성공하는 것으로 목청을 높인다. 그들은 누구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
엘리의 가문을 심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패역함의 책임을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해야했던 그 직분의 중함을 상실한 엘리에게서 찾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분이 중하다. 두렵고 떨림으로 감당해야 한다.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은 하나님의 백성을 바르게 인도해야할 중차대한 사명을 맡았다. 그들이 언약에 신실하게 살도록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떨며 그 율법에 순종하도록 생명을 바쳐 일해야 했다. 그 길은 험난한 일이다. 그 부르심을 받은 자가 가야할 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셔야 했던 그 길을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자~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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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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