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2009년 12월 7일 월요일 가조제일교회 새벽기도회
『[12]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 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18]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겨더라 [19] 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20] 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그 집으로 돌아가매 [21]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삼상 2:12-26, 개역)
점점 언약의 백성으로서 그 의미를 상실해가는 시대에 가장 핵심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제사장의 타락이었다. 주변 나라의 침입으로 인한 어려움으로 먹고 살기 어려운 경제적인 원인으로 우리의 시선을 집중 시키지 않는다. 그들의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지 못함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방나라들과 다르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남다른 간섭하심과 섭리하심으로 이르게 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땅에서 해야할 것은 다른 이방나라들이 소원하는 것처럼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백성, 의로운 백성이 되어야만 했다. 그 거룩, 그 의로움은 언약 안에서의 거룩이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더 악한 길로 빠져서 살아갔다. 그들이 그런 길로 간 이유는 오직 자기 욕심을 이루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한다.
본문에서도 이런 시대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제사장 그룹이 얼마나 타락의 밑바닥으로 내려왔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이런 극악한 자리에 이러게 된 것은 무엇보다 여호와의 임재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엘리의 두 아들이 불량한 아들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매우 의심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불량자'(不良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네 벧리야야알'은 직역하면 벨리알의 아들들'(sons of Belial, KJV)이란 뜻으로(고후 6:15)' 곧 '사악한 자들'(wicked men, NIV), '나쁜 녀석들'(evil men, Living Bible), '쓸모없는 자들'(worthless men, RSV)이란 의미이다. 이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스하스는 사람들 보기에 사악한 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도 전적으로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사해문서 가운데 하나인 '빛의 아들들과 암흑의 아들들의 전쟁'(1QM)에서는 벨리아르가 빛의 아들들의 지도자(미카엘)의 맞수인 암흑의 아들들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신약성경에는 사탄에 관해 언급할 때 사용한 단어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벨리알를 비교하면서 벨리아르를 그리스도의 정반대에 있는 존재로 적고 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고후 6:15)
본문 자체의 주석이나 사해문서와 신약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을 살펴봐도, 불량자라 불린 것은 이미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길에서 벗어난 악한 자 곧 그리스도와는 정반대의 자리에 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이 행한 행동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를 무시한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었다.
‘멸시함이었더라’에 쓰인 히브리어 ‘니아추‘가 여기서처럼 강조형으로 쓰일 경우 특히 하나님께 대한 적국적인 훼방 및 경멸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다(민 16:30; 신31:20; 삼하 12:14; 시 10:3, 13; 74:18; 사 1:4; 5:24). 따라서 엘리의 두 아들들의 죄악은 단순히 제사 제물을 탐내어 그것을 탈취한 강도 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맺은 언약과 구속의 제사 제도를 파괴하고 어지럽힌 신선 모독죄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O. Von Gerlach).
엘리의 두 아들들은 더 나아가서 회막문에 수종드는 여인들과도 동침했다. 이것은 회막 문에 수종드는 여인들과 서로 합의하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런 것은 이방제사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한 것이란 바로 이런 저들의 악함과 타락이 이방인의 악한 소위를 본받아서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에까지 악하게 영향을 미쳐서 타락했기 때문이다. 엘리는 이런 일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타락과 방종의 길로 치닫고 있던 두 아들의 행위를 저지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늘날 교회라고 해서 예외일까? 많은 교회들이 세상의 온갖 이론과 사상을 가지고 와서 순진한 성도들의 영혼을 악하게 물들게 하며, 시대를 분변치 못하고 함께 타락의 길로 걷고 있다. 이미 교회 됨을 상실한채 교회 안에서는 세상의 것들을 섞어서 가르치고 있다. 인간의 죄를 지적하기보다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인간의 욕심을 이루어 가라고 자극하고 독려한다. 교회로서 오직 말씀이라는 차원에서 벗어나서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좋다는 이방종교의 개념이 이미 굳혀져 있다. 아무리 지적을 해 주고 그것은 잘못된 길이라고 해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 모든 일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성공을 이루기 위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내어 놓으라고 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괴로우실까? 어쩌다가 이 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놀라운 것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자라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그 속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절망해 가는 그 현장 속에 개입하셨다. 그리고 그 개입은 조용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무엘은 커 갈수록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 성경이 계속 여호와를 강조하는 것은 언약의 신실함 곧 자기 백성을 향하여 끝까지 인자를 베푸시고 그 백성을 사랑하사 의의 길로 인도하시려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자기 백성들이 여호와를 저버리고 곁길로 갈지라도, 언약에 실패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향한 언약을 끝까지 지켜가시는 모습을 시위하신다. 사무엘은 그 증거다.
세월이 지나 그 언약의 실체가 나타났을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처음부터 백마탄 왕자로 오셔서 나라를 뒤엎으시는 모습으로 오시지 아니하셨다. 그 시작은 조용했고 그 사건은 여호와께서 언약의 신실함을 드러내는 실현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소망이 있음은 이런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다. 구원의 시작도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개역)
우리가 구원을 요청하지도 않았으며 구원이 왜 필요한지 왜 있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지도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셔서 구원하셨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요 우리가 찬양할 노래제목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이제 새 언약 안에 들어왔다. 이제는 그 새언약 안에서 떨어져 나감이 없다. 하나님께서 기어이 완성의 자리로 영광의 자리고 이끄신다. 우리가 연약하여 실패할 때에도 우리를 놓지 아니하시고 거룩과 경건으로 세워가신다.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찬양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증명하신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욱 알아가며 우리의 우리 됨이 이 세상의 보상에 있지 아니하며 오로지 여호와 그 분이 우리의 기업이 되심을 감사하며 누리며 살자~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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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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