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참 선지자요, 누가 거짓 선지자인가?
누가 참 선지자요, 누가 거짓 선지자인가?
김지찬 / 총신대 신대원 구약학 교수
총신대 목신원 특강…'거짓 선지자는 따로 있는게 아니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cccsw1224/1613)

이 글은 김지찬 교수가 총신대 목회신학전문대학원에서 2월 4일 특별강연한 내용을 요약한 글이다.
김 교수는 '누가 참 선지자요, 누가 거짓 선지자인가?'를 주제로 2시간에 걸쳐 강연했다.
한국교회와 민족의 위기
십수 년 전부터 최근까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용어는 '위기'인 것 같다.
경제적으로 외환 위기 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고, 외교적으로는 북핵 위기가 고조되어 있으며, 이념적으로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사회적으로 위기 상황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일부 교계 지도자들은 아직도 낮은 복음화율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한편 어떤 이들은 평신도들이 제대로 목회자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한국교회와 민족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목회자들에게서 찾아야 한다는데 목소리가 모아지고 있다.
현재 한국이 당하고 있는 위기의 가장 큰 책임을 영적인 지도자들이 통감해야 한다는 지적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직 이 문제가 개선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위기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참 선지자면 영원히 참 선지자인가
오늘날 다수의 영적 지도자들이 위기 의식이 결여된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한국교회와 사회의 위기를 야기한 책임의 상당 부분을 책임져야 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문제를 '나'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의 교역자들은 자신이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한 번 참 선지자이면 영원히 참 선지자이며, 결코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실존적이든, 그동안의 신학 교육에서이든 간에 현대 목회자들 대부분은 자신이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근원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번 기회에 영적인 지도자로서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은 심각하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거짓 선지자는 누가 보아도 분명한 외적 표지가 있는가? 한 번 참 선지자가 되면 그것은 변함이 없는 것인가? 한 번 소명을 받으면, 언제나 자기 원하는 대로 참 선지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목회자는 한 번 목사로 안수를 받으면, 성경에 대한 연구와 확신 없이도 언제든지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 것인가? 혹시 우리 모두는 실제 사역 현장에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거짓 선지자,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우선 구약 성경은 자타가 인정하는 거짓 선지자가 신분상 따로 있었다고 보고 있는지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구약 성경은 실제 역사적 이스라엘 안에서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여러 모로 보여주고 있다.
그 첫 번째 근거는 구약 안에 '거짓 선지자'란 명칭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선지자'란 히브리어 명칭 '나비'는 구약 전체에 '참 선지자'는 물론 내용상 거짓 선지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혼용되고 있다(신18:20).
심지어 선지자란 명칭은 거짓 선지자는 물론
심지어는 바알 신을 섬기는 선지자의 경우에도 사용되고 있다:
'선지자들(한네비임)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렘 2:8)
결국 구약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거짓 선지자'란 명칭이 전문 용어(technical term)로 나타나지 않고, 그저 '선지자'(나비)란 명칭이 전부이다.
특별히 구약 성경 기자들이 굳이 거짓 선지자를 지명해서 가리킬 때에는 별도의 명칭이 없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는 선지자'(한네비임 한니브임 비쉬미 셰케르·렘23:25) 등으로 부연해서 표현할 뿐이다.
이 점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인간 선지자들이 진실과 거짓 사이를 오고 갈 수 있음(prophets can move back and forth between truth and falsehood)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어디 그뿐인가? 거짓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뿐 아니라, '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시니라'(코 아마르 아도나이)는 '사신 공식'(messenger formula)을 사용한다.
참 선지자나 거짓 선지자 모두 여호와를 동일한 권위로 내세웠기에 외관상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것은 지난한 문제였다.
이것은 특별히 예레미야와 하나냐가 충돌하는 예레미아 28장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하나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왕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라면서, 예레미야의 예언과는 정반대되는 다른 예언을 선포했다.
이 때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하고 사신 공식을 사용하기까지 한다.
보기에 참 선지자 같은 하나냐
하나냐를 반박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논박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보게된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하나냐를 향해 '거짓 선지자'라고 호통을 쳤어야 할 것 같은데, 예레미야는 자신도 하나냐의 예언처럼 길한 일이 일어났으면 하고 바란다고 말한다: '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 예언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집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다시 옮겨오시기를 원하노라.'(렘 28:6)
하나냐와 예레미야의 대결에서 오히려 강력한 상징적 행동으로 기선을 잡은 자는 하나냐였다.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취하여 꺾고, 모든 백성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 열방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 길을 가니라.'(렘 28:10∼11)
하나냐의 이런 행동은 예레미야의 상징적 행동을 무효화시킨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취하여 꺾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냐의 행동을 막지 못한 채, 꼬리를 슬그머니 내리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예레미야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선지자는 평생 전할 말씀을 한 번에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기다리자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후에야 예레미야는 하나냐에게 가서 심판을 선언한다.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었느니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신다 하라.'(렘 28:12∼15)
한 선지자도 참과 거짓을 오간다
구약을 자세히 읽어보면 참 선지자가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가 참된 예언의 중개자가 되기도 한다.
열왕기상 13장을 읽으면 우리는 선지자는 참과 거짓을 오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구약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처음에는 벧엘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음식 금지 규정을 순종하기까지는 참 선지자로서 행동한다.
그러나 비록 순전한 동기였다 하더라도 음식 금지 규정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순간, 자신의 메시지의 신빙성에 금이 가게 하였으므로 거짓 선지자로서 행동을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처음에는 천사를 운운하면서 거짓 하나님의 말씀으로 속인 점에서 거짓 선지자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매개체가 되고, 그 말씀이 성취되어 유다에서 온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고, 벧엘의 단을 향해 던져진 처음 메시지의 지지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참 선지자로 행동하고 있다.
참 선지자가 무의식적으로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가 참된 예언을 전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스라엘에서 선지자는 모두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나, 참 선지자란 명칭이 따로 없었는지 모른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 사건 때만 존재해
위에서 논의한 이유로, 어떤 학자는 '누가 참 선지자요, 누가 거짓 선지자인지'를 가르는 문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물론 이 정도는 아니지만, 구약에서의 거짓 예언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 거짓과 참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된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나누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성경에서 말하는 선지자직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 사건이 있을 때에만 진정한 선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선지자란 스스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명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구약 선지자들이 한 번 소명을 받았다고 해서 그 뒤로는 언제나 자기하고 싶은 대로 선지자 노릇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볼 수 있다. 늘 여호와의 말씀이 있어야만 선지자는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올바른 기초가 없는 신학 운동이나 성령 이해나 영성 운동은 거짓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 선지자적 사역을 지속하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그 안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오늘날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사건 없이도 전문적으로 성경 말씀을 전하는 직업적 종교인인가? 아니면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을 전하는 진정한 말씀의 종인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둘째,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구별은 처음부터 정해지는 것도 아니며, 한 번 정해지면 평생 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가 신분상 따로 있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기가 어렵다.
결국 선지자들은 참과 거짓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자기 몸으로도 증언해야
셋째, 참 선지자는 그가 전한 메시지를 삶 가운데서 순종함으로 메시지의 신빙성을 높여야 한다.
한 선지자의 예언이 참인지 거짓인지 평가할 때에 그의 행동과 삶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선지자의 행동은 그가 전한 메시지와 일치되어야 한다. 참 선지자는 순종의 길로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의 진정성을 밝혀야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도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기준으로 순종(삶의 열매)을 언급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마 7:15∼18).
넷째, 거짓 선지자를 구분해야 한다.
사단은 심지어 택한 자라 하더라도 유혹한다.
인간에게 사단의 유혹이 떠난 때가 없다.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의 최후 순간까지 사탄의 유혹은 계속됐다.
때로는 광명한 천사로, 때로는 말씀의 허울을 쓰고 우리를 유혹하는 사단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기에 앞서, 자신을 살피기 위해서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섯째, 선지자들은 실제로 거짓을 행하고 있는데도 자신들이 참 말을 하기에 참 선지자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속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거짓 선지자들도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는 사신 공식(messenger formula)을 사용하기에 외견상 참 선지자와 구별이 힘들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실존적으로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다.
설교자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단지 진리를 말할 뿐 진리 안에 살지 않으면 우리의 삶으로 우리가 말한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기에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섯째,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여호와의 말씀은 자기 백성들에게조차 배척을 받고 수난을 당할 수 있다.
이 말씀의 수난이 그 말씀을 전하는 인격체인 선지자, 예레미야의 수난으로 나타난다. 열왕기상 13장에도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 왕의 적대적 행위뿐 아니라, 벧엘의 늙은 선지자로부터 속임과 미혹의 대상이 되어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다.
이런 수난과 고통은 단순히 선지자 개인의 수난과 고통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의 괴로움이요, 곧 하나님의 괴로움인 만큼 너무 놀라지 말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데, 곧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깨우치는데 더 힘을 써야 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끝내 승리한다
일곱째,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말씀의 종들이 여러 가지로 부적절한데도 여호와의 말씀은 끝내 승리하고 만다는 점이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나 벧엘의 늙은 선지자나 모두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선지자의 개인적 윤리성에만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가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은 승리한다. 때로는 거짓 선지자들이나 악한 자들이 더러운 자기 욕심에서 말씀을 가로막기도 하나,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진하게 하고 만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 선지자이든 거짓 선지자이든 그 전달자의 자질에 의해 폐기되지 않는다(브레바드 S. 차이즈, 「구약신학」(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164p).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타협되거나 약화되지 않으며, 결국은 성취되기 마련이라는 점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늘 현대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하는 자로서 임무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깨달아,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무리 배척과 고난을 당하여도, 이 일을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특별히 한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참 선지자가 타락할 수 있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했던 자도 돌아와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선지자의 사명이 완전히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회자들이 참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분을 가리키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과 그 분을 직접 목도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가감 없이 전달하면서 늘 거짓으로 미혹하는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고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잘 감당한다면, 우리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위기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말없는 다수의 좋은 목회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성공주의와 물량주의의 유혹을 극복하며,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다면 오늘 우리의 위기는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이기에 위기란 위험의 시간인 동시에 기회의 때이기도 한 것이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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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찬 / 총신대 신대원 구약학 교수
총신대 목신원 특강…'거짓 선지자는 따로 있는게 아니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cccsw1224/1613)

이 글은 김지찬 교수가 총신대 목회신학전문대학원에서 2월 4일 특별강연한 내용을 요약한 글이다.
김 교수는 '누가 참 선지자요, 누가 거짓 선지자인가?'를 주제로 2시간에 걸쳐 강연했다.
한국교회와 민족의 위기
십수 년 전부터 최근까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용어는 '위기'인 것 같다.
경제적으로 외환 위기 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고, 외교적으로는 북핵 위기가 고조되어 있으며, 이념적으로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사회적으로 위기 상황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일부 교계 지도자들은 아직도 낮은 복음화율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한편 어떤 이들은 평신도들이 제대로 목회자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한국교회와 민족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목회자들에게서 찾아야 한다는데 목소리가 모아지고 있다.
현재 한국이 당하고 있는 위기의 가장 큰 책임을 영적인 지도자들이 통감해야 한다는 지적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직 이 문제가 개선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위기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참 선지자면 영원히 참 선지자인가
오늘날 다수의 영적 지도자들이 위기 의식이 결여된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한국교회와 사회의 위기를 야기한 책임의 상당 부분을 책임져야 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문제를 '나'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의 교역자들은 자신이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한 번 참 선지자이면 영원히 참 선지자이며, 결코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실존적이든, 그동안의 신학 교육에서이든 간에 현대 목회자들 대부분은 자신이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근원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번 기회에 영적인 지도자로서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은 심각하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거짓 선지자는 누가 보아도 분명한 외적 표지가 있는가? 한 번 참 선지자가 되면 그것은 변함이 없는 것인가? 한 번 소명을 받으면, 언제나 자기 원하는 대로 참 선지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목회자는 한 번 목사로 안수를 받으면, 성경에 대한 연구와 확신 없이도 언제든지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 것인가? 혹시 우리 모두는 실제 사역 현장에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거짓 선지자,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우선 구약 성경은 자타가 인정하는 거짓 선지자가 신분상 따로 있었다고 보고 있는지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구약 성경은 실제 역사적 이스라엘 안에서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여러 모로 보여주고 있다.
그 첫 번째 근거는 구약 안에 '거짓 선지자'란 명칭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선지자'란 히브리어 명칭 '나비'는 구약 전체에 '참 선지자'는 물론 내용상 거짓 선지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혼용되고 있다(신18:20).
심지어 선지자란 명칭은 거짓 선지자는 물론
심지어는 바알 신을 섬기는 선지자의 경우에도 사용되고 있다:
'선지자들(한네비임)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렘 2:8)
결국 구약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거짓 선지자'란 명칭이 전문 용어(technical term)로 나타나지 않고, 그저 '선지자'(나비)란 명칭이 전부이다.
특별히 구약 성경 기자들이 굳이 거짓 선지자를 지명해서 가리킬 때에는 별도의 명칭이 없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는 선지자'(한네비임 한니브임 비쉬미 셰케르·렘23:25) 등으로 부연해서 표현할 뿐이다.
이 점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인간 선지자들이 진실과 거짓 사이를 오고 갈 수 있음(prophets can move back and forth between truth and falsehood)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어디 그뿐인가? 거짓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뿐 아니라, '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시니라'(코 아마르 아도나이)는 '사신 공식'(messenger formula)을 사용한다.
참 선지자나 거짓 선지자 모두 여호와를 동일한 권위로 내세웠기에 외관상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것은 지난한 문제였다.
이것은 특별히 예레미야와 하나냐가 충돌하는 예레미아 28장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하나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왕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라면서, 예레미야의 예언과는 정반대되는 다른 예언을 선포했다.
이 때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하고 사신 공식을 사용하기까지 한다.
보기에 참 선지자 같은 하나냐
하나냐를 반박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논박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보게된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하나냐를 향해 '거짓 선지자'라고 호통을 쳤어야 할 것 같은데, 예레미야는 자신도 하나냐의 예언처럼 길한 일이 일어났으면 하고 바란다고 말한다: '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 예언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집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다시 옮겨오시기를 원하노라.'(렘 28:6)
하나냐와 예레미야의 대결에서 오히려 강력한 상징적 행동으로 기선을 잡은 자는 하나냐였다.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취하여 꺾고, 모든 백성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 열방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 길을 가니라.'(렘 28:10∼11)
하나냐의 이런 행동은 예레미야의 상징적 행동을 무효화시킨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취하여 꺾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냐의 행동을 막지 못한 채, 꼬리를 슬그머니 내리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예레미야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선지자는 평생 전할 말씀을 한 번에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기다리자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후에야 예레미야는 하나냐에게 가서 심판을 선언한다.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었느니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신다 하라.'(렘 28:12∼15)
한 선지자도 참과 거짓을 오간다
구약을 자세히 읽어보면 참 선지자가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가 참된 예언의 중개자가 되기도 한다.
열왕기상 13장을 읽으면 우리는 선지자는 참과 거짓을 오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구약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처음에는 벧엘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음식 금지 규정을 순종하기까지는 참 선지자로서 행동한다.
그러나 비록 순전한 동기였다 하더라도 음식 금지 규정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순간, 자신의 메시지의 신빙성에 금이 가게 하였으므로 거짓 선지자로서 행동을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처음에는 천사를 운운하면서 거짓 하나님의 말씀으로 속인 점에서 거짓 선지자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매개체가 되고, 그 말씀이 성취되어 유다에서 온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고, 벧엘의 단을 향해 던져진 처음 메시지의 지지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참 선지자로 행동하고 있다.
참 선지자가 무의식적으로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가 참된 예언을 전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스라엘에서 선지자는 모두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나, 참 선지자란 명칭이 따로 없었는지 모른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 사건 때만 존재해
위에서 논의한 이유로, 어떤 학자는 '누가 참 선지자요, 누가 거짓 선지자인지'를 가르는 문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물론 이 정도는 아니지만, 구약에서의 거짓 예언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 거짓과 참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된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나누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성경에서 말하는 선지자직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 사건이 있을 때에만 진정한 선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선지자란 스스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명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구약 선지자들이 한 번 소명을 받았다고 해서 그 뒤로는 언제나 자기하고 싶은 대로 선지자 노릇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볼 수 있다. 늘 여호와의 말씀이 있어야만 선지자는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올바른 기초가 없는 신학 운동이나 성령 이해나 영성 운동은 거짓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 선지자적 사역을 지속하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그 안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오늘날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사건 없이도 전문적으로 성경 말씀을 전하는 직업적 종교인인가? 아니면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을 전하는 진정한 말씀의 종인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둘째,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구별은 처음부터 정해지는 것도 아니며, 한 번 정해지면 평생 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가 신분상 따로 있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기가 어렵다.
결국 선지자들은 참과 거짓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자기 몸으로도 증언해야
셋째, 참 선지자는 그가 전한 메시지를 삶 가운데서 순종함으로 메시지의 신빙성을 높여야 한다.
한 선지자의 예언이 참인지 거짓인지 평가할 때에 그의 행동과 삶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선지자의 행동은 그가 전한 메시지와 일치되어야 한다. 참 선지자는 순종의 길로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의 진정성을 밝혀야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도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기준으로 순종(삶의 열매)을 언급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마 7:15∼18).
넷째, 거짓 선지자를 구분해야 한다.
사단은 심지어 택한 자라 하더라도 유혹한다.
인간에게 사단의 유혹이 떠난 때가 없다.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의 최후 순간까지 사탄의 유혹은 계속됐다.
때로는 광명한 천사로, 때로는 말씀의 허울을 쓰고 우리를 유혹하는 사단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기에 앞서, 자신을 살피기 위해서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섯째, 선지자들은 실제로 거짓을 행하고 있는데도 자신들이 참 말을 하기에 참 선지자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속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거짓 선지자들도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는 사신 공식(messenger formula)을 사용하기에 외견상 참 선지자와 구별이 힘들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실존적으로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다.
설교자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단지 진리를 말할 뿐 진리 안에 살지 않으면 우리의 삶으로 우리가 말한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기에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섯째,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여호와의 말씀은 자기 백성들에게조차 배척을 받고 수난을 당할 수 있다.
이 말씀의 수난이 그 말씀을 전하는 인격체인 선지자, 예레미야의 수난으로 나타난다. 열왕기상 13장에도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 왕의 적대적 행위뿐 아니라, 벧엘의 늙은 선지자로부터 속임과 미혹의 대상이 되어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다.
이런 수난과 고통은 단순히 선지자 개인의 수난과 고통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의 괴로움이요, 곧 하나님의 괴로움인 만큼 너무 놀라지 말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데, 곧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깨우치는데 더 힘을 써야 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끝내 승리한다
일곱째,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말씀의 종들이 여러 가지로 부적절한데도 여호와의 말씀은 끝내 승리하고 만다는 점이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나 벧엘의 늙은 선지자나 모두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선지자의 개인적 윤리성에만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가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은 승리한다. 때로는 거짓 선지자들이나 악한 자들이 더러운 자기 욕심에서 말씀을 가로막기도 하나,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진하게 하고 만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 선지자이든 거짓 선지자이든 그 전달자의 자질에 의해 폐기되지 않는다(브레바드 S. 차이즈, 「구약신학」(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164p).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타협되거나 약화되지 않으며, 결국은 성취되기 마련이라는 점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늘 현대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하는 자로서 임무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깨달아,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무리 배척과 고난을 당하여도, 이 일을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특별히 한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참 선지자가 타락할 수 있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의 역할을 했던 자도 돌아와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선지자의 사명이 완전히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회자들이 참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분을 가리키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과 그 분을 직접 목도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가감 없이 전달하면서 늘 거짓으로 미혹하는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고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잘 감당한다면, 우리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위기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말없는 다수의 좋은 목회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성공주의와 물량주의의 유혹을 극복하며,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다면 오늘 우리의 위기는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이기에 위기란 위험의 시간인 동시에 기회의 때이기도 한 것이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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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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