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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철 <갈라디아서 강설 제37강>

황영철 <갈라디아서 강설 제37강>
2012.05.20. 22:54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Ofsm/148 

갈라디아서 강설 제37강
선실善實교회 2007년 1월 7일 주일 오전예배 강설 황영철 목사 

성경본문: 갈라디아서 5장 1절~15절

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서론
계속해서 갈라디아서를 상고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보던 내용을 좀 더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1절부터 31절에서 사도는 그가 자주 사용하지 않는 알레고리, 곧 우화적 해석법을 사용해서 아브라함 가족사에서 발생한 일을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에 적용했습니다. 사도가 이 알레고리를 사용한 것은 아마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화주의자들이 그 방법을 사용해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을 호도한 까닭일 것입니다. 아마 사도 바울은 그들의 논리와 해석법을 그대로 차용하되 그것을 자신의 방법으로 바꿔서 유대화주의자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서 사도는 아브라함 가정 내에서 두 개의 계보를 찾아냅니다.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육신의 아들로 태어나는 계보가 있습니다. 거기서 태어난 아들은 이스마엘입니다. 이 계열이 상징하는 것은 시내산 곧 율법입니다. 이 계열의 사람들은 종, 육신, 율법 등의 용어로 규정됩니다. 그에 대립되는 또 하나의 계열은 자유하는 여인에게서 약속을 따라서 태어나는 아들의 계보가 있습니다. 이 계보는 자유함, 언약, 믿음, 성신 등의 용어로 규정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스라엘 역사 해석
 
그런데 우리가 또한 배운 것 중의 하나는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시내산의 계열에 포함시킨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이런 가르침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의 결과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사도 바울은 당시 유대교와 정반대의 위치에 서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소 어려운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구약 역사에 대한 역사 해석과 역사 철학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시내산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했을 때, 그는 유대교 전체를 율법 종교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종교 체계를 형성했고, 그 결과 율법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대교의 모든 종교 체계가 육신을 따르는 인간의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어떤 위대한 사상과 예술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육신의 열매가 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해석은 구약 이스라엘 역사 속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이 율법의 종으로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중에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중생을 통해 새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거기에 분명히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라면 선지자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따른 이스라엘 사람의 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효용
이는 그들이 율법의 효용을 오해한 결과였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가르치는 법체계입니다. 사람은 어리석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당하게 사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누가 그것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가장 충족하게 정당하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이시요, 법을 주는 분이시며 법을 집행하는 분이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을 주시면서 너희는 이 법을 잘 배워서 이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법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받아 존중하고 그 법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신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구원자가 되신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크게 자비하셨고, 큰 사랑을 베푸신 까닭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동기가 돼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미 그들은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그들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동기가 돼야 하고 그 힘이 돼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 법을 다 지키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 어떻게 하라는 규칙까지 다 만들어 내려주셨습니다. 제사를 통한 속죄의 방법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고 살아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종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에 근거한 종교였습니다. 그것은 율법준수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이 대원칙이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이미 충분이 증거됐습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430 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그런데 우리가 구약 역사에서 보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과 능력도 그들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킬 힘과 동인이 생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사회는 점점 저급한 사회로 떨어져서 주위의 이방인과 같은 상태, 혹은 그보다도 못한 상태로 떨어졌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서 이방 나라에 몸을 파는 창녀에 비유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에스라와 느헤미야에게서 읽을 수 있는 신앙의 부흥입니다. 그 부흥의 캐치 프레이즈는 결국 ‘율법으로 돌아가자’였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은 까닭에 멸망 당한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 나라를 회복케 해 주셨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연히 율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 돼야 합니다. 이 정신과 기상이 드높아져서 심지어 이방인과 혼인했던 사람들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운동까지 벌어졌습니다(스 10:10~12).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이상한 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에서 어떤 부산물이 산출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의해서 사람을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의롭다고 하시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불의하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 자체로 정당한 생각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롭다고 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불의하다고 할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이 흘러 갔습니다. 

율법주의 종교가 된 오해의 발단과 그 결과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특별히 선택된 특권적인 백성이라는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의 자기 정체성의 일부가 돼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라의 멸망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됐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선택된 백성이라 할지라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 특권적인 위치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인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야만이 그 특권적인 위치를 지킬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역사에서 제2성전 시기라고 부르는 중간기 시대에 유대교가 정확하게 어떤 형태로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의 유대교가 한 가지 사상만을 발전시키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한 가지 측면으로 당시 유대교의 성격을 다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자기들을 선민으로 믿었든 안 믿었든, 율법 준수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결국 공로 체계를 발전시켜 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것만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인정을 받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이 한 가지 고려하지 못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선지자의 외침을 잘 살펴보면,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즉,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나는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증거였습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데에 주력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먼저여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으로 돌아가자’고 외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외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어쩔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능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출애굽의 진리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 때에 자기 조상들이 어떻게 비참한 상태에 있었으며, 그 때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들 조상들 아무 행위나 공로가 없었음에도 그들을 위하셨는지를 회상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건지기 위해서 큰 능력을 행하셨는지를 회상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자비를 의지해야 했습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자기의 물리적인 생명을 위해서든지, 도덕적인 능력을 위해서든지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면 되리라는 생각을 아예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율법을 이룸으로써 하나님께 인정을 받겠다는 생각을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포로에서 돌아온 후 이스라엘 사회에서 발전되어 나온 종교 체계였습니다. 거기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점점 사람자기 힘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한 공로 체계로 만들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니까 각각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율법이 어떻게 적용돼야 하는지를 알 필요가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에 일을 하지 말라고 했으면, 거기서 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해 줘야 비로소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으면, 그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인간 사회와 인간 관계란 너무나 복잡하고 다면적이어서 각각의 계명을 지키기 위한 부칙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면 새로운 설명이 첨가돼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학자의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그 많은 부칙을 안다는 것조차 보통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된 까닭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교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종교로 바뀌었습니다.

사도는 유대교에서 발생한 그 모든 왜곡과 오해의 근원을 한 마디로 ‘육신에 속해서 그러하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예루살렘을 하갈의 후손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
당시 유대사회가 그러했기 까닭에 그 사회에 오신 주님께서도 그런 문제를 배경으로 놓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시 유대 군중의 상태를 어떻게 평가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을 보면 주님께서 유대 군중을 향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마가복음 6장 34절에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당시 유대 민중의 목자 노릇을 해야 할 사람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처한 위치가 사도 바울의 묘사를 빌면 하갈의 후손과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유대 민중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인도하고 있었을지 짐작이 갑니다. 결국 그들은 율법주의에 근거한 종교 체계를 그들에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종교 체계라는 것이 유대 민중 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짐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민중은 율법을 안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과 율법학자들에게서 배울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유대 민중 그들은 율법의 무거운 짐 아래에서 수고하면서 허덕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엄한 율법의 제도 하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과 평안을 누린다든지 그 모든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정죄와 자책 속에서 살 뿐이었습니다. 율법의 종이 됐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로 묘사하셨습니다. 혹독한 율법 아래에서 종으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심을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율법 종교가 제시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의 종으로 있어야 비로소 사람은 그 마음이 쉼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사람이 만들어낸 율법 종교 아래에서 허덕이는 백성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유대 민중 그들에게는 목자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교법사들이 목자인 체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자기들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말하는 바를 스스로도 확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종교지도자라 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아무 영적인 유익도, 영적인 지침도 얻지 못했습니다. 마치 양이 목자 없이 유리 방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민중을 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사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마가복음에 기록돼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지 못하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지를 또한 가르치셨습니다. 
 
성신님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
우리가 주님의 가르치심을 전체적으로 보면 거기에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 혹은 어떤 생활의 규범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 혹은 당시 유대교의 잘못된 종교적 관행을 지적하고 수정하시는 것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중요히 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성신에 대해서 풍부하게 가르치셨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는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성령을 힘입어” 쫓아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의 원천이 성신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신을 거역하는 것은 사함 받을 수 없는 죄가 됩니다.
 
또한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여행 중인 벗의 방문을 받고 이웃에게서 떡을 얻으려 하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사람이 그렇게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이 성신님임을 또한 가르치셨습니다.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1~13). 

하지만 성신에 대한 주님의 중요한 가르침은 주로 요한복음에 소개돼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중생에 대한 가르침에서 주님께서는 대원칙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5~7).
 
여기서 주님께서는 두 가지 생명의 원천을 가르치셨습니다. 육으로 태어나서 육으로 사는 삶이 있고 성신으로 태어나서 성신으로 사는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뒤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 두 가지 상이한 생명을 설명하기를, 아담에게 속해 아담의 생명으로 사는 것과 그리스도에게 속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의 다락방 강화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승천 뒤에 성신께서 오셔서 자신이 하던 일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그 일을 더 크게 이루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성신의 인도와 가르침 등 성신께서 오셔서 하실 구체적인 일들을 또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22). 그리고 오순절에는 약속하신 성신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는 성신을 받아서 그 능력과 가르침에 의해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상황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신을 보내셔서 이렇게 큰 구원의 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유대교는 어떤 처지에 있었습니까? 그런 일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막고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도 청맹과니 같았는지 신비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일들이 그들 눈앞에 그렇게도 확연하게 펼쳐지고 있었고, 부활의 사실이 부인할 수 없이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손길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발생할 수 없었던 일들이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무엇에 눈이 멀었는지 그런 것들을 전혀 못 보고 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전통 종교에 꽉 절어 있었습니다. 자기들 종교 이해와 율법 해석의 체계와 전통에 사로잡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그 위대한 구원의 일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육신에 사로잡혀 영적인 일들을 구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사도 바울을 위시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그 하나님의 크신 일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신께서 그 마음에 빛을 비추신 까닭입니다. 거기에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사렛의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이사야의 글을 읽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주님께서 이 말씀을 읽으시니까 사람들이 주님을 다 주목해 주님을 봤습니다. 아마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거기에 아마 어느 정도 긴장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회당에서 여러 사람들 앞에 서서 이사야를 읽으실 때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결국 주님께서 그의 입에 넣어주신 말을 기록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이 이사야의 입에 그 말씀을 넣어주신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구절을 읽으시는 것을 들었을 때 청중은 다른 사람들이 그 구절을 읽는 것과는 다른 어떤 비상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경에 쓰여진 것을 읽었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읽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이한 느낌을 가지면서 주님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주목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글이 말하고 있는 모든 내용의 실체가 바로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 그들 앞에 서 계십니다. 그들이 그분에게서 직접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그 날 그들 귀에 성취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실을 능력으로 증거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됐고, 죄의 포로가 됐던 자들이 그 무서운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습니다. 영적인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눈이 떠져서 하나님을 봤을 뿐만 아니라, 육신의 눈이 멀었던 많은 사람들이 눈이 떠져서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유대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래, 그렇게도 기이한 이적이 그렇게도 풍부하게 벌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출애굽의 이적인들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죽은 자가 무수히 살아났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도 많은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서 예루살렘에 나타났다고 했습니다(마 27:52, 53).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당시 유대교는 그런 일들과 무관한 듯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세상에 매이고, 세상 일에 온통 정신을 쏟느라 하늘이 이 땅에 내려와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결론
우리는 여기서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할까요? 이런 일이 과거 신약시대의 유대인에게만 있던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영적인 암매는 성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육신을 따라 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있는 일입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적인 수준에서도 있고 개인적인 수준에서도 있습니다. 그 발생한 구원의 모든 위대한 일들이 성경에 기록돼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어쩌다가 그 위대한 구원의 일과 무관하게 살게 됐는가 하는 것까지도 기록돼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 모든 글을 읽으면서도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자기 모든 것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여전히 세상이 크게 보이고 세상에서 성공과 성취가 큰 일로 보여서 하나님을 뒷전에 두고 그것을 따라 간다면 그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런 상태에 있다면 그것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던 이스라엘 사람의 상태와 뭐가 다릅니까? 그러면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신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뤄지고 있고, 우리 안에 성신께서 주시는 평안이 있으며, 우리 안에 성신으로 인한 기쁨이 있다면 우리는 성신을 따라 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성신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신을 따라서 행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자기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 없어져야 합니다. 이 사실이 없다면 그 사람의 삶의 기조는 육신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고,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이 사실이 자기에게 생생한 현실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어떤 상태에 있는 것입니까? 거기에 아무리 기독교라는 형태의 종교 생활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육신에 속한 생활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최후의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그 최후의 판단 기준은 그가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명령을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여부입니다. 자기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가라는 여부를 살펴봐야 합니다.
 
자기 부모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배우자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서 힘든 일이었고, 오늘날 교육에 대해서 광기에 가까운 히스테리를 부리는 한국 사회에서 정말 힘든 일이지만, 자기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자기 자신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처럼 이웃에게도 해줘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명하신 도덕, 신자의 윤리입니다. 이 도덕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또한 성신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이 왜 자기를 부인해야 가능한지를 깊이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믿음과 교회의 믿음의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두 반성하십시다.
 
* 인터넷 [선실교회 강설노트]에서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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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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