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하나님의 일 (요 6:29)
진정한 하나님의 일 (요 6:29)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이 ‘고상한 생각’ 때문에 역사적으로 신앙인들은 금욕, 고행, 선행, 봉사 등의 활동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마음 속 중심에도 “하나님보시기에 선한 어떤 일을 나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지 않습니까? 이 생각을 품으며 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노력자체는 영이 살아 움직인다는 증거입니다. 2천 년 전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어떤 제자들이 예수께 질문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 사실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들이 주님께 하고 싶은 질문이 아닌가요? 만일 한 사람의 존재중심에 이 질문의 자리가 없다면 - 관심과 열정이 온통 삶의 여러 대상들에 흩어져 있다면 - 그의 영은 아직 ‘죽음의 잠’을(엡 5:14) 깊이 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의 질문에 주목해 봅시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상식’입니다. 저 제자들이나 우리들은 모두 ‘상식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란 ‘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노력도 하고 희생도 하여 이루는 어떤 ‘성과적 일,’ 그것을 우리는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여기 우리가 주시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성과적 일’을 기준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보는 일에 고착되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성과적 일’이란 기준으로 보는 관점을 ‘행위주의’라 합니다. 그리고 ‘행위주의’는 실상 알게 모르게 많은 교인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행위주의자’는 근본에서 ‘행동의 증명’이 기독교에서 가장 큰 가치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눈에 가장 훌륭한 크리스천은 ‘도덕적 모범’에 있어서 하자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눈에 가장 차원 높은 일은 테레사수녀 같은 사람이 보여주는 자선행위입니다. 흔히 그들의 눈에 이상적 기독교지도자는 걸인들을 돕거나 길에서 ‘밥 퍼주는’ 일을 하는 사역자들입니다. 대형교회들의 화려하고 거창한 물량적 과시에 신물이 난 많은 평신도들에게 실상 행위주의적 관점은 매력 있는 관점입니다. 이렇게 ‘행위’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눈으로 교회들의 잘못, 목회자들의 잘못, 주변 교인들의 잘못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기독교의 높은 경지에라도 올라있는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행위주의’의 눈으로 열심히 이 사람의 잘못, 저 사람의 잘못을 보는데 바쁜 마음, 그 마음의 비극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바쁜 와중에 자신 속의 ‘들보’를(마 7:3) 볼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들보’를 못 본다는 것은 자신 속의 죄악과 병의 ‘깊이’를 직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회개다운 회개가 존재중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라는 언어를 자신이 자주 입술로 뇌여도 그 언어가 자신의 영혼에게는 공허한 말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한 말씀에 직면해도, 찬송을 불러도 그 십자가를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니 얼굴에 눈물 한 방울이 없습니다. (회개의 영이 없으니 관련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색맹인 눈이 휘황찬란한 색채의 아름다움 앞에서 ‘검은 세상’만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실상 그 영혼을 깊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행위’라는 기준입니다. 실제로 무서운 사실은 이 영혼이 은밀히 자신의 어떤 ‘행위적 성과’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로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지탱이 단단할수록 그의 남에 대한 판단의 칼도 더 날카로워 집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고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과연 충격의 대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즉 구원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 이것은 “몸을 불사르게 내줄(고전 13:3)” 태세를 뽐내고 있는 제자들에게 거의 허탈을 느끼게 할 대답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큰 기쁨을 느끼실 ‘일’이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대답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것(to believe)’은 ‘하나님이 하신 일(what God has done)’을 '받는 것'이지 나의 무엇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주께서는 구원자를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하셨습니까? 그것은 기독교에서 인간의 최대숙제가 ‘도덕적 자기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최대의 숙제는 어떻게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참으로 믿고 영접하여 그 분이 주시는 변화를 갖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참 하나님의 일’은 오만한 자아의 자기증명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자아’를 겸손하게 받는 것입니다. 실상 구원자를 믿는 것은 결코 단순한 피동적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것에 새로운 적극성과 능동성을 갖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가져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향한 정직, 아직까지 해보지 않은 죄의 인정, 아직까지 가져본 적이 없는 ‘거룩하신 분’을 향한 바른 두려움과 떨림, 아직까지 품어보지 않은 의를 향한 주림과 목마름, 이 모든 것을 구원자 앞에 서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드디어 자신의 죄악을 직시하기 시작합니다! 회개의 눈물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드디어 성령께서는 무한히 놀랍고 아름다운 십자가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에게, 오직 그에게 십자가는 ‘감격과 감사의 사실’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놀라운 일은 이제 그 영혼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 . 부은바”되어(롬 5:5) 그 사랑이 그 사람의 참 ‘마음 본질’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이제 “거짓이 없는 사랑(고후 6:6)”을 말로, 행위로 드러내며 살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믿는 것은 인간이 열망하던 ‘최고의 행위,’ 즉 ‘거짓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모든 행위들)의 완성(롬 13:10)이기 때문입니다. ‘행위주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직 구원자께서 우리를 ‘행위다운 행위’로 이끌어 주십니다. 걸인을 돕고 빈자에게 밥을 퍼 주는 일은 모두 기독교신앙이 보일 수 있는 좋은 선행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름 없는 평신도라도 그가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감격과 감사로 어제보다 오늘 더 정직하고, 더 친절하고, 더 긍휼히 여기고, 더 겸손한 자가 되어 있다면 거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일’은 있으며, ‘하나님의 미소’가 있는 것입니다
http://www.facebook.com/home.php#!/notes/kiseok-kim/진정한-하나님의-일-한동대학교-교목실-김형겸-목사님의-글/168394169879524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이 ‘고상한 생각’ 때문에 역사적으로 신앙인들은 금욕, 고행, 선행, 봉사 등의 활동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마음 속 중심에도 “하나님보시기에 선한 어떤 일을 나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지 않습니까? 이 생각을 품으며 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노력자체는 영이 살아 움직인다는 증거입니다. 2천 년 전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어떤 제자들이 예수께 질문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 사실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들이 주님께 하고 싶은 질문이 아닌가요? 만일 한 사람의 존재중심에 이 질문의 자리가 없다면 - 관심과 열정이 온통 삶의 여러 대상들에 흩어져 있다면 - 그의 영은 아직 ‘죽음의 잠’을(엡 5:14) 깊이 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의 질문에 주목해 봅시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상식’입니다. 저 제자들이나 우리들은 모두 ‘상식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란 ‘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노력도 하고 희생도 하여 이루는 어떤 ‘성과적 일,’ 그것을 우리는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여기 우리가 주시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성과적 일’을 기준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보는 일에 고착되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성과적 일’이란 기준으로 보는 관점을 ‘행위주의’라 합니다. 그리고 ‘행위주의’는 실상 알게 모르게 많은 교인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행위주의자’는 근본에서 ‘행동의 증명’이 기독교에서 가장 큰 가치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눈에 가장 훌륭한 크리스천은 ‘도덕적 모범’에 있어서 하자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눈에 가장 차원 높은 일은 테레사수녀 같은 사람이 보여주는 자선행위입니다. 흔히 그들의 눈에 이상적 기독교지도자는 걸인들을 돕거나 길에서 ‘밥 퍼주는’ 일을 하는 사역자들입니다. 대형교회들의 화려하고 거창한 물량적 과시에 신물이 난 많은 평신도들에게 실상 행위주의적 관점은 매력 있는 관점입니다. 이렇게 ‘행위’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눈으로 교회들의 잘못, 목회자들의 잘못, 주변 교인들의 잘못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기독교의 높은 경지에라도 올라있는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행위주의’의 눈으로 열심히 이 사람의 잘못, 저 사람의 잘못을 보는데 바쁜 마음, 그 마음의 비극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바쁜 와중에 자신 속의 ‘들보’를(마 7:3) 볼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들보’를 못 본다는 것은 자신 속의 죄악과 병의 ‘깊이’를 직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회개다운 회개가 존재중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라는 언어를 자신이 자주 입술로 뇌여도 그 언어가 자신의 영혼에게는 공허한 말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한 말씀에 직면해도, 찬송을 불러도 그 십자가를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니 얼굴에 눈물 한 방울이 없습니다. (회개의 영이 없으니 관련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색맹인 눈이 휘황찬란한 색채의 아름다움 앞에서 ‘검은 세상’만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실상 그 영혼을 깊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행위’라는 기준입니다. 실제로 무서운 사실은 이 영혼이 은밀히 자신의 어떤 ‘행위적 성과’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로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지탱이 단단할수록 그의 남에 대한 판단의 칼도 더 날카로워 집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고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과연 충격의 대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즉 구원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 이것은 “몸을 불사르게 내줄(고전 13:3)” 태세를 뽐내고 있는 제자들에게 거의 허탈을 느끼게 할 대답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큰 기쁨을 느끼실 ‘일’이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대답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것(to believe)’은 ‘하나님이 하신 일(what God has done)’을 '받는 것'이지 나의 무엇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주께서는 구원자를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하셨습니까? 그것은 기독교에서 인간의 최대숙제가 ‘도덕적 자기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최대의 숙제는 어떻게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참으로 믿고 영접하여 그 분이 주시는 변화를 갖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참 하나님의 일’은 오만한 자아의 자기증명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자아’를 겸손하게 받는 것입니다. 실상 구원자를 믿는 것은 결코 단순한 피동적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것에 새로운 적극성과 능동성을 갖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가져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향한 정직, 아직까지 해보지 않은 죄의 인정, 아직까지 가져본 적이 없는 ‘거룩하신 분’을 향한 바른 두려움과 떨림, 아직까지 품어보지 않은 의를 향한 주림과 목마름, 이 모든 것을 구원자 앞에 서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드디어 자신의 죄악을 직시하기 시작합니다! 회개의 눈물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드디어 성령께서는 무한히 놀랍고 아름다운 십자가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에게, 오직 그에게 십자가는 ‘감격과 감사의 사실’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놀라운 일은 이제 그 영혼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 . 부은바”되어(롬 5:5) 그 사랑이 그 사람의 참 ‘마음 본질’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이제 “거짓이 없는 사랑(고후 6:6)”을 말로, 행위로 드러내며 살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믿는 것은 인간이 열망하던 ‘최고의 행위,’ 즉 ‘거짓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모든 행위들)의 완성(롬 13:10)이기 때문입니다. ‘행위주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직 구원자께서 우리를 ‘행위다운 행위’로 이끌어 주십니다. 걸인을 돕고 빈자에게 밥을 퍼 주는 일은 모두 기독교신앙이 보일 수 있는 좋은 선행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름 없는 평신도라도 그가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감격과 감사로 어제보다 오늘 더 정직하고, 더 친절하고, 더 긍휼히 여기고, 더 겸손한 자가 되어 있다면 거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일’은 있으며, ‘하나님의 미소’가 있는 것입니다
http://www.facebook.com/home.php#!/notes/kiseok-kim/진정한-하나님의-일-한동대학교-교목실-김형겸-목사님의-글/168394169879524
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https://www.esesang91.com/b/preach/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