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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맨톤 (Thomas Manton, 1620-1677)

토마스 맨톤 (Thomas Manton, 1620-1677) 
<출처:http://www.lloydjones.org>

 
'맨톤'은 가장 저명한 청교도 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섬셋트(Somerset)에서 출생하였고, 옥스퍼드 티벌톤(Tiverton)과 웨드햄(Wadham)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맨톤'은 어린 시절에 아름다운 자연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자랐다. 스코틀란드 장로교 목사의 자손으로 구김살 없는 성품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맨톤'은 엑스터(Exter)의 주교를 지냈고 후에 노르위치(Norsich)의 주교를 지낸 유명한 '죠셉 홀'(Joesph Hall)에 의해서 20살에 목사로 임직되었다. 설교가로 이름을 떨치면서 '맨톤'은 목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데븐(Devon)에서는 3년 간의 목회사역(牧會使役)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3년이 거의 끝날 무렵에 '맨톤'은 대영 포프햄(Popham)의 후원을 얻어 스토크 뉴윙튼(Stoke Newington)에서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맨톤'은 런던의 성직자들과 의회에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7년 뒤에 '맨톤'은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 교회의 나이 많은 청교도 목사 '오바다, 세지위크'의 뒤를 이었다. 구세대(舊世代) 청교도들이 '세지위크' 후계자로서 유일하게 '맨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죽을 때까지 그 도시에서 탁월한 목회자로서 지위를 유지하였다.
 
'맨톤'은 1662년에 명예신학박사(D.D) 학위를 옥스퍼드 대학에서 받았다. 그러나 옥스퍼드 선언(Oxford Oath)을 거부하여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에 '맨톤'은 자기집 방문을 터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으며 청교도 집회에 설교자로 각광을 받았다. '맨톤'은 특별히 인간과 죄의 본질에 대해서 많은 설교를 하였다.
 
장로교파로서 '맨톤'은 동료들 중에 어느 누구보다도 더 평화를 사랑하였다. 아마도 '맨톤'이 저지른 가장 어리석은 일은 '차알스' 2세(Charles, Ⅱ) 복위(復位)에 큰 몫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맨톤'이 자신이 사랑하는 청교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관대한 성품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비국교도로서 자주 고통을 당해야 하는 상황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맨톤'의 위대한 사랑과 작업은 설교였다. '맨톤'은 크고 서로 다른 회중(會衆)에게 몇 년 동안을 일주일에 서너번씩 설교를 하였다. 후대 청교도 설교자 가운데에서 가장 고전적이며 세련되었던, '윌리암 벨즈'(William Bates)는 '맨톤'이 격에 떨어지는 설교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맨톤'의 입장에서 본다면 많은 노력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총과 진실한 헌신의 결과였다. '맨톤'은 지칠줄 모르고 설교를 준비했고, 설교를 했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쓰고 있던 설교에 집어넣기 위하여, 잠자리에 있었다가도 '맨톤'은 한 밤중에 일어나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다.
 
19세기에 편집된 판인 '맨톤'의 작품 22권 중에 20권이 설교집이었다. 설교집은 시편 119편에 대한 연속된 119개의 유명한 설교로부터 자질구레한 여러 경우에 대하여 쓴 단편적인 설교를 포함하고 있다. '맨톤'과 동시대에 살았던 유명한 대주교 '어셔'(Archbishop ussher)는 '맨톤'이 영국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다고 말하였다. 스티븐 차녹(Stephen Charnock)은 '맨톤'을 당시의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내 준 설교자라고 생각했다.
 
'바로우'의 설교와 같은 점을 '맨톤'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두 사람의 설교는 최고 수준이었고, 당시의 문학과 설교가 보여 주는 특징적인 오류를 거의 청교도 설교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다.
 
1. 토마스 맨톤의 약사
 
토마스 맨톤은 아버지를 비롯해서 조부와 외조부가 모두 목회자들이었다. 그는 타고난 재능이 많아서 14세에 대학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맨톤의 부모가 그를 옥스퍼드의 워드햄 대학(Wadham College)에 보내기 전에 1년 간 더 집에 있길 원하였다. 그는 기본 교육을 마친 뒤에 신학을 공부하고 엑스터(Exeter) 감독이었던 유명한 조셉 홀(Joseph Hall)에게서 안수를 받았다. 그는 데본(Devon)에서 3년 동안 목회한 뒤에 런던의 스톡 뉴잉턴(Stoke Newington)에 있는 한 교회로 옮겼다. 7년 뒤 그는 1677년에 사망할 때까지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에서 사역하던 연로한 오바다이어 세지윅 목사의 뒤를 이었다.
 
맨톤은 크리스토퍼 러브(Christoper Love, 1618-1651)라는 젊은 목사를 존경하였다. 이 목사는 왕정파와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1651년에 교수형을 당하였다. 맨톤은 교수대에서 이 젊은 목회자의 마지막을 돌보았다. 맨톤은 군인들의 사살 위협을 받으면서도 크리스토퍼 러브 목사의 장례식 설교를 할 만큼 담대하였다. 그는 1662년 이후로 박해를 받았고 투옥도 되었다.
 
맨톤이 코벤트 가든에서 사역하는 동안 고관들도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많이 참석하였고 때때로 의회에서 설교하기도 하였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의 군종 목회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실족할 때가 있음을 보여준다.
 
맨톤은 시장 앞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학식을 드러낼 수 있는 어려운 주제를 택하였다. 그래서 주님은 이 일로 한 사람의 입을 통하여 그를 꾸짖으셨다. 모임이 끝난 뒤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나타나서 자기는 영혼의 양식을 위해서 집회에 왔는데 매우 실망했다고 불평하였다. 그러자 맨톤 박사는 진심으로 죄송하게 여기면서 말했다. "성도님, 제가 당신에게 메시지를 드리지 못하였다면 당신이 지금 저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다시는 시장 앞에서 오늘처럼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맨톤은 가정 예배를 크게 중시하였다. 그는 아침과 저녁에 짧은 기도를 올리고 다음에 성경 한 장 읽고 나서 자녀들에게 읽은 본문의 일부를 외우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본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한 뒤에 긴 기도로 마쳤다. 그는 주일에는 공적 예배나 가정 예배를 정성껏 드렸다. 그는 성찬식을 생동력 있고 사랑이 넘치는 방식으로 집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월요일에는 휴식하면서 방문자들을 맞이하였다.
 
1871년에 맨톤의 전집 22권이 다시 출판되었다. 라일(J.C. Ryle) 감독은 추천 서문에서 맨톤을 비롯한 청교도들의 공헌을 극찬하였다. "청교도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지금까지 살았던 잉글랜드인들의 어떤 계층보다도 국가의 품위를 더 고양시킨 사람들이다." 1백 년이 지난 1970년대에 맨톤의 저서들이 미국에서 1천부의 한정판으로 출판되었다. 맨톤은 그의 야고보서 주석이 출판되엇을 때 불과 30세였다. 그의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2절, 야고보서, 유다서, 시편 119편의 주석들은 퍽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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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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