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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강단&말씀모음

증인[행 1:6-8]/ 박영선목사

증인[행 1:6-8]/ 박영선목사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17064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
 
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행 1:8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신 것이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천국 도래와 세상 역사의 끝이 지금이냐고 물은 것이다. 그 때 예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다만 그때까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오늘은 이 말씀이 의도하는 바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생각 중에 가장 대표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바로 구원관이다. 그들은 이미 선민으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유일한 대상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심정과 같은 것이다.
 
자기들은 구원이 필요한 자가 아니라 구원을 얻은 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언제 실현시켜 줄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빨리 주께서 주의 나라를 임하게 하여 자신의 옳음을 확인시켜 주고 원수들이 빨리 멸망받는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거기에 대하여 주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고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증인이 되는 일이다’ 라고 대답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의 나라가 임하심이 이때니이까?”라는 질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또 그에 대한 대답이 왜 ‘증인’이라는 말로 등장하느냐 하는 것을 파악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질문과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 된다. 제자들의 질문은 마치 이것과 똑같다.
 
학교에서 시험을 본다 할 때에 좋아하는 학생들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다. 지금 제자들이 말하는 ‘주의 나라가 임하심이 지금입니까?’라는 물음은 그런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시험을 통해 자신들의 우수함이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자신들의 의로움과 저들의 불의함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것이 모든 인간들의 유일한 종교적인 본능이다.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 이것은 신앙심을 갖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적인 본능이다. 신앙 생활을 하는 것도 ‘옳음’을 갖기 위함이다. 기독교를 믿으면 내가 더 옳은 사람이 된다는 발상이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리다’라는 분별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거기에 대한 주님의 답은 “증인”이다.
 
 
 
 
성경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인간을 심판하시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마태복음 25:31-46을 보자.
 
나중에 주님이 오셔서 판단하시는데 한쪽에게는 ‘너희가 나에게 잘했다’ 하시고 다른 한쪽에게는 ‘너희가 나에게 잘못했다’고 하신다. 그런데 서로가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언제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놀란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너희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안한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구제를 했다, 좋은 일을 했다’ 하는 문제에 그친 것이 아니라 ‘좋은 일, 구제, 봉사, 헌신 등의 대상’에 더 관심이 많으신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눈에 안 띄는 자이고 도와줘도 별 볼 일없는 자이고 생색이 안 나는 자이다.
 
지금 주님의 대답은 옳다, 그르다가 아닌 대상에 관한 문제로, 대인관계의 문제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옳음도 그 옳음이 이론적이고 절대적이지 않고 누구에게 했느냐의 문제이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
 
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
 
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
 
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
 
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9-13)”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 관원들, 종교지도자들의 싸움거리는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였다. 그들은 왜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책망했다. 이것은 죄를 용납하고 함께 죄를 저지르는 공범죄가 아니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호세아 6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라’고 하셨다. 여기서 제사란 그런 의미에서 자기의 옳음을 증명해 내는 행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나는 옳다, 틀린 일을 행하지 않았다’ 하는 것보다 긍휼이 낫다는 것이다.
 
남을 멸망시키고 손해를 끼치면서 나만 옳다, 나만 죄를 짓지 않았다는 식으로의 옳음은 성경이 말하는 옳음과는 다르다고 주님은 지적하신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
 
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
 
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
 
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9-14)”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비유는 겸손이나 교만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의 의로움이 왜 평가를 받지 못하는가? 그의 의로움이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구별해서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렸다’라는 식의 의로움은 성경이 원하는 의로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의 의로움은 그의 의로움이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끼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옳다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여인을 죽이지도 않았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주께서 지금 모든 신자에게 요구하는 성경의 의(義)라는 것은 결국 그를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죄에서부터 돌이켜 살려내자는 싸움이 성경이 원하는 의로움이다. 이에 비해서 인간이 갖는 의는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린 사람입니다. 하나님 빨리 오셔서 내가 옳으니 상을 주시고 저 원수를 멸망시켜 주십시오’ 이것 밖에는 없다면 그것은 의가 아닙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6이하에 나온 질문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있는 제자들에게 ‘지금 당장에 네가 해야 할 일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디까지 증인이 되어야 합니까?
 
그들이 심판을 요구하는 이웃들인 예루살렘, 유대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이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붙잡고 있는 로마를 넘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구하기 위해서 복음은 가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마저도 아시아로 가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그를 칼로 붙잡고 있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꺼내도록 인도하고 계신다. 이것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중요한 내용인 것이다.
 
성경은 내가 있으므로 말미암아 내 이웃이 얼마 만큼 이익을 얻고 은혜를 입었느냐로 나의 옳음을 점검하라고 요구하고 있지 나의 옳음이 저 사람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끊임없이 들고 나온 것들을 살펴보자.
 
안식일 논쟁,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관한 문제, 죄인과 왜 식사를 함께 하느냐는 문제 등등이 모두 율법을 가지고 나오는 문제이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
 
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4-15)”
 
모든 계명, 율법이라는 것은 전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의로움은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나는 도적질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재물을 훔치지 않았다, 살인하지 않았다’와 같이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이웃 사랑의 문제이다. 새벽예배, 철야기도에 아무리 열심히 참석했어도 그것이 주께 다가가는 열심이어야지 남을 판단하는 경지로 간다면 종교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
 
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
 
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
 
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
 
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3:1-5)”
 
지금 이 사람에게 손이 낫느냐 낫지 않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하시나 안하시나를 보려고 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기쁠 것인가 그가 불구에서 나아진 기쁨에 동참하고 그가 지금 불구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간데 없고 고치면 율법을 통해 고소해 죽이리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 유대인 중에 정치적인 한 집단으로서 분리파라는 유명한 정치, 종교적인 집단이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대로 경건하게 살자고 모인 정치적이기도 하고 종교적이기도 한 특별한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들이 가진 의가 주를 향한 열심이 주님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옳음, 신앙의 가장 큰 핵심은 한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법을 지키는 마음이 아니다. 악하고 나쁜 길로 가지 못하도록 선한 길로의 안내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
 
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
 
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
 
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
 
여 더 유익하리라(빌 1:20-24)”
 
사도 바울은 고생고생해서 지금 이 시간까지 와 있다. 그는 죽으면 천국에 가서 주님을 만날 것이며 지극한 영광과 상급 속에 영접을 받을 것이다. 그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지만 살아있는 것이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빌립보 교회 교인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그의 고생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하기 전에 자신이 살아서 이익을 볼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고생의 길도 기쁨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말씀처럼 “내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우리는 그러한 “너희”를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 앞에 우리가 ‘나는 옳고 너희는 틀렸다는 구별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더 살아야 하겠고 더 나를 죽여야겠고 이들을 위하여 더 기도해야 되리라’는 입장에서 그들을 붙잡아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저들은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며 알지 못하여 요청하지 않지만 나는 알고 있기에 홀로 기도하며 안타까와 하며 ‘너 회개하기 전에 죽으면 안돼’라고 부르짖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생에 있어서 신앙의 정당한 방향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용서하며 얼마나 많이 용납하며 기도하며 안타까와 하는 자인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얻게 하며 긍휼과 자비를 펼치기를 기뻐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인격과 표정과 사람의 모든 것을 바꿔 나가도록 채찍질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방향이다. 그럴 때에 우리의 인생이 기적과 환희와 승리로 가득 찰 것을 약속한다.
 

 

 

 

 

 

 
증인 (2)[행 1:6-8]

 
 
 
 
 
사도행전 1:6-8까지의 이 내용에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물질계, 이 세상이 언젠가는 그 역사와 존재가 끝날 날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종말은 오게 될 것이고, 그날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질 것이다. 돌연한 종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점진적으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이 세상의 종말은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끝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곳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 아니기 때문에 끝을 내시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처소, 본향으로 약속된 나라가 올 것이며, 완성될 그 나라를 준비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언제 끝날 것이냐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이 세상이 언제 끝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도래할 나라를 준비하는 것만이 우리의 책임이다.
 
영원히 주어질 나라에서 우리의 수준, 우리의 모습을 준비하며 그 나라를 건설하며 그 나라에 불러들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아들이는 일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도대체 살아서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기다려야 하며 어떤 일들을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펼쳐보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상세한 조목들을 확인해야 된다.
 
 
 
 
마태복음 28장은 사도행전 1:8을 확대해서 설명한 구절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
 
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여기에서 세 가지 명령이 떨어진다. ①제자를 삼으라, ②세례를 주라, ③가르치라. 이 세 가지를 우리는 대 위임령이라고 한다. 이 셋 중에서 오늘은 먼저 제자삼는 일부터 살펴보려고 한다.
 
 
 
 
‘제자를 삼으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태튜어(mathematics)’라 한다. 옛날에는 제자가 되면 그 스승의 집에 들어가서 먹고 살면서 평생을 그와 같이 했다. 부자지간의 밀접한 관계 버금가는 관계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 제자라는 말의 의미가 많이 희석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제자,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야 하는 증인이 되는 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어서 우리에게 맡긴 커다란 명령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 속에서 보통 신자들은 전도를 하라, 예수를 전하라,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지금 마태복음의 표현을 빌리면 거기에는 전도하라는 단어를 쓰지않고 제자를 삼으라고 했다. 이렇게 쓴 이유는 주께서 그의 나라를 건설하시며 그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른 우리들을 훈련하시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는 것이다.
 
‘전도를 한다’는 것과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아주 다르다. 전도는 보통의 경우 선포적일 수밖에 없다.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고 증언하기를 바라는 내용들을 그에게 말이나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나의 존재와 삶의 모습과 모든 것을 바쳐서 상대방을 설득하라는 책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이 제자삼는 일이 없어진 것이라고 본다. 현대인들이 가장 바라는 신앙의 형태는 교회생활에 참여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상태는 신앙의 내용을 듣고 즐기고 돌아가지 그것으로 어떻게 각자의 생활 속에 녹아 내렸는가를 점검받는 일은 거부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내 인격과 삶에서 어떻게 녹아 내리고 있는가를 점검받는 것을 싫어한다. 디도서 1장에서는 교회에 있어야 할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
 
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
 
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
 
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5-9)”
 
디도를 바울이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장로들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 장로들을 세우는 이유가 저들로 하여금 생명된 말씀의 진리, 신앙의 내용들을 지키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장로는 어떤 사람을 뽑느냐 할 때에 성령이 충만하고 신앙이 좋고 하는 이야기를 쓰지 않고 아주 실제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장로는 그가 갖고 있는 신앙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알아 가장 사랑하는 자녀에게 이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가르치는 자라는 뜻이다. 장로의 기준으로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가장 실제적인 생활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그랬을 때 그의 말이 권위를 갖는 것이다. 교회는 그러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하고 불신자가 있는 세상에 나아갈 때 신자란 바로 그 입장에 서는 것이다.
 
‘저들은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이며 이 세상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살지 않는 자들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그들의 양식으로 갖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를 보는 자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생명의 도전을 진리의 자극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에 가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나누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
 
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
 
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
 
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
 
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17-20)”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배부르고 등 따뜻하기 위해서 공부 열심히 하고 권력 붙잡고 돈을 긁어 모은다. 그러면 신자들은 어떠한가? 그것으로도 성이 안차서 예수까지 믿는 자들이다. 왜 예수를 믿는가 하면 배부르려고 믿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으로 세상이 요구하는 길이 아닌 길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저들과 똑같은 길, 똑같은 목적을 두고 똑같은 짓을 하는데 세상 사람들의 총, 칼과 저들이 가진 모든 권세 위에 예수까지 믿어서 기도까지 하며 그 일을 이루려고 한다. 성령까지 받아 남을 해치고 자기가 성공하려 한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기독교가 부흥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말씀의 흥왕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 흘러 넘쳤다. 그런데 언제나 기독교 역사에서 재미있는 것은 그 부흥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예가 드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달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역사학자들은 어떤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습관화해야 한다고 한다.
 
내용의 전달 이전에 습관의 전달, 규칙의 전달이 더 급하므로 형식의 전달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형식주의라는 것은 늘 경계를 해야 하지만 형식의 전달이 없으면 내용은 훨씬 더 형식보다 끊어지기 쉽다.
 
유대인들이 오늘날까지 그들의 신앙을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철저한 의식과 규칙으로 그들에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주의는 문제지만 유대인으로 하여금 유대 민족주의의 신앙이 끊어지지 않게 이어온 유일한 방법이다. 형식주의는 무섭지만 내용주의는 더 무섭다.
 
전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요구들을 가장 원색적으로 펼쳐야 하는 규칙과 명령으로서의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그 신앙은 자신의 것으로 굳어지지 않는다. 자녀에게 이웃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원색적인 규칙들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성경책이 보이도록 들고 다니라. 그것이 우리를 굳게 만들고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형식주의를 반대하면 내용주의라는 우리의 실력을 무시한 지점까지 끌고 간다. 그러다 보면 신령한 내용들을 고수하는데 손해를 봤다. ‘나는 내용주의자다’ 하면서 많은 형식들을 놓아 버렸고 그 형식을 놓자 그 안에 담을 내용마저도 떨어뜨린 지점에 와 있게된 것을 정직하게 돌아볼 때가 되었다.
 
설교를 듣고 마음으로 감동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흘러나올 최소한의 원색적인 규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2차, 3차적인 더 높은 차원으로 나가는 것은 더 안된다.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큰 문제는 그 내용이 무엇으로 가야 하느냐는 놓친 채로 열심히 했다는 것밖에 없다는 것으로 본다. 그 감동만이 남아있지 감동한 것으로 내가 바라보는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진전되어지는 것으로 적용된 것이 없다. 늘 그 수준이다. 교회생활에 익숙하고 성경 내용에 익숙한데 사람이 커 가는 것이 없다. 그 목표 지점을 향하여 다가가는 것이 없다. 형식을 놓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우리가 가진 내용들을 머리에서 머리로 전달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고 말한다.
 
제자를 삼으라.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각자가 결정해야 한다. 세상을 살기 위해서 기독교를 들먹이지 말고 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세상을 꿰뚫어 지나가는 사람의 실력과 지식을 이제 겸비해야 한다. 그것이 제자된 사람이다. 우리에게 습관으로 젖어야 한다.
 
본문 중 여기 ‘증인’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에서 ‘증인’은 헬라어로 ‘마르테르라’인데 이것은 영어의 martyr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martyr는 순교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증인이 되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 사실, 자기가 항복한 그 내용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거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심각한 싸움에 그 심각함이 없어졌다는 것이 현대교회의 큰 병이다.
 
배가 불러서 그렇게 되었다. 배가 불러지면서 교회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놓아 버렸다. 교회는 치장하기에 바빴고 사업을 하기 시작했고 업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선교가 어떤 국력의 신장같이 교회 실력의 한 모습이 되었으나 사랑하는 마음,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진리의 진리 됨의 폭발력은 많이 희석된 느낌이다.
 
이것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하면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목숨을 건, 뼈를 깎는 싸움이 아닌 남은 힘의 싸움들이기 때문이다. 잉여분에 관한 것이다. 전도도 선교도 교회에 나오는 것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체력, 경제력, 정신력의 잉여분에 관한 것으로 하지 그것이 없으면 쓰러질 정도로까지의 문제로 충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수준이 낮아서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 분명히 그 수준에 와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은 책망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부여받은 명령과 부름받은 일이 얼마나 복된 것이며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나 하나의 존재가 얼마나 많은 이웃들 앞에 커다란 문제인가? 마태복음 5장으로 결론을 내려보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
 
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
 
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
 
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말로가 아닌 행동으로 이 행동은 또 종교화된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을 의미한다. 말은 곡물을 재는 그릇이다. 말을 뒤집어 놓고 등불을 켜서 그 속에 넣어두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을 비취게 하기 위하여 불을 켜서 가장 높은 자리에 놓는다.
 
신자를 삼으면 하나님께서 그 신자를 모든 어두운 곳 위에 갖다 놓고 비취게 하기 위해서 그를 빛으로 부르신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왜 우리 자녀가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한 인간이 한 세상 생활,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생활한다는 면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시켜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것밖에는 우리의 자신있는 근거가 없기 없기 때문에 공부,공부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된다.
 
우리는 신자로서 부족하다.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자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주를 믿으며 주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신자답지 못하다. 우리는 빛인데 연기 외에는 내지 못한다. 완전공해이다. 우리의 특권, 우리의 사명, 우리의 영광된 소망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제자를 삼으라. 이것이 갖는 엄청난 내용들을 다시 되돌아 봐야 한다. 우리는 짧은 인생살이에서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인 것을 놓치지 말고 오늘 배부르기 위해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 때문에 우리의 중요한 목표들과 복된 내용들을 놓치고 사는 것을 부끄러운 줄을 아는 원래의 신자된 자의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
 

 

 

 

 

 

 
증인 (3)[행 1:7-8]

 
 
 
 
 
왜 주님은 우리에게 전도하라, 교화하라, 신자를 만들라 하지 않으시고 제자를 삼으라 하시는가? 사람에게는 구원보다는 더 깊은 하나님의 요구가 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그의 인격이 되고, 그의 사상이 되고, 모든 면에서 그가 드러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를 삼으라는 내용 속에 구체적으로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세례를 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9,20을 다시 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
 
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우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야 한다. 제자를 삼은 뒤에는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과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오늘은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왜 제자를 삼는데 수반되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려 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피려는 세례를 주라는 내용 속에 들어있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성경에서 세례를 준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한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 몸으로 연합한다. 성경이 하나가 되었다는 얘기를 할 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과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신자끼리도 한 몸으로서 하나가 되었다는 통일성에 관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세례를 주라는 뜻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 몸으로 가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한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 그의 지체로서의 연합, 통일을 말한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몸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라. 그래서 ‘하나’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가 통일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지금의 역사를 끝내고 우리에게 약속된 나라가 언제 시작될 것이냐 하는 시간과 기한은 우리가 정할 것이 아니지만 그 나라는 반드시 온다. 우리는 그 나라에 초대되고 있고 그 나라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이 하셔야 할 부분이 있고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증인되는 일이요, 모든 사람을 제자 삼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일이다.
 
이것은 지금 어떤 목표를 향하여 우리가 해 나가야 될 일이지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해야 될 일이라는 것은 지금 완성되어 있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세례를 주라는 것은 세례를 줌으로써 제자를 삼는 일이고, 제자를 삼아서 이제 완성시켜야 하는 일의 시작이며 과정이고 방법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받는 것은 복된 일이지만 이제부터 새로운 과제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우리를 그 몸으로 부른 이 세례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의 말씀을 보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
 
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유대인들의 집짓는 법은 주춧돌 대신 모퉁이 돌을 놓고 거기서부터 벽을 양쪽으로 짓되 그 큰 돌을 의지하여 건물을 지어 나간다. 밑에 주춧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쪽 코너가 기초가 되는 셈이다. 그 모퉁이 돌이 주님이시다. 그분을 의지해서 거기에서부터 이어져서 그리고 거기에 부름받은 모든 신자들이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이 지어져 간다는 말은 부름을 받아 모퉁이 돌과 연합을 한 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까지이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
 
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
 
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2-13)”
 
우리가 짓는 집에 주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모퉁이 돌이 되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성경은 부름받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고 연합하여 훈련을 받는 이 일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목적이 있는가 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성도들 간에도 하나이다. 이 하나된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
 
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
 
로 세우느니라(엡 4:15-16)”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됨을 지키는데 성령의 열매가 동원된다.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고 하나님이 무리를 완성시키려고 하는 목적지는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을 벗어나 영적이고 초월적인 어떤 경지에로의 초대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고 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훈련을 여기서 받는 것이다.
 
우리는 죄에 빠져 남을 물어뜯는데 익숙해져 있다. 내 마음에 선한 것이 없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에서 우리는 자기를 위하여 쳐 복종시키는 것을 비로소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교회를 요구하고 있고 제자를 삼는 문제에서 교회를 요구한다. 제자 삼으라. 그리고 세례를 꼭 주어 교회에 그를 불러 들이라. 신자들끼리 한 몸이 되는 훈련을 시키라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선한 의도는 있지만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다. 처음에는 열심도 생기지 않고 결심도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겠다고 결심을 해도 되지 않는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열망은 있으나 절대로 의자에 앉지를 못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열심이 실제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들어와서 맨 뒤에 숨지 말고 사람들 옆에 끼어서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라. 이 훈련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을 훈련하는 곳이며 교회가 무엇이 분명히 유지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꼭 알고 넘어가야 한다.
 
교회는 이 두 가지가 꼭 유지되어야 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훈련을 받아야 된다. 두 가지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수권이다. 또 하나는 그 안에 부름받은 모든 신자들의 동등함과 다양함이다. 이 두 가지를 우리는 지켜야 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
 
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
 
로 세우느니라(엡 4:15-16)”
 
그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그에게서만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어 큰다. 우리 몸을 봤을 때 명령은 머리를 통해서만 떨어진다. 머리에서 명령하지 않았는데 팔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면 병에 걸린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의 최고 병이 무엇인지 아는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신앙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를 떠나서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뺏기 위해서만 교회를 이용하고 있고 신앙을 이용하고 있는 일이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교회를 오고, 자신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마음에 어떤 불안감 때문에 헌금을 내서 때우는 것이 아닌가? 오늘 우리는 우리가 세워 놓은 목표에서 기독교를 오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통수권을 인정해야 한다. 그로부터 만이다. 그가 하라고 한 것만을 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지니라’ 앞에서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많이 요구되었던 것이 성령의 열매이다. 힘써 지켜야 한다.
 
모든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뉘는 곳이니 나뉘지 말아야 한다. 싸워 나뉘기보다는 져서 연합하여야 한다. 교회는 이 훈련을 받는 곳이다. 빌립보서 2장을 보면 신자들의 동등함 신자의 하나 됨에 관하여 이런 요구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
 
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
 
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
 
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
 
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
 
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
 
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유일한 원리가 있었다면 복종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결국 신앙이란 믿음의 싸움이다. 신자들이 왜 주님의 요구를 묵살하는가? 교회에서는 주님이 더 잘 아실지 모르지만 세상을 사는 것은 자신이 더 잘 안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보다 지혜로우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우리보다 우리를 더 아끼시고 사랑하시며 선하시며 의로우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교회에서 돈내는 것은 쉽다. 사업하는 것이 쉽고 전도하는 것이 쉽다. 그러나 그것 말고 자신이 변해달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최고로 내건 것이 성품적인 싸움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 사람들은 세상을 목표로 살고 있지 않구나 하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악착스럽게 세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살지 말고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주 앞에 칭찬받을 사람으로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에 주님께서 요구한 이 문제들을 싸움의 내용으로 삼아달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싸움의 내용은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하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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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https://www.esesang91.com/b/preach/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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