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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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강단&말씀모음

인간의 전적부패에 대하여...(

인간의 전적부패에 대하여...(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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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인 부패, 전적인 신앙
로마서 3:1~18
지난주일 살펴본대로 유대인들의 특권의식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였고 율법을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 된 것을 대단한 자랑거 리로 여겼습니다. 또한 할례를 받은 것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된 표로 생각하고 이것 을 구원의 조건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특권의식에만 사로잡혀서 실천적인 삶이 부족하였던 유대인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 은 2장 마지막 부분에서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면서 저들의 외식을 꼬집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겉으로 유대인이 아니라 속으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겉으로 할례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외적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심령의 변화를 받아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세례를 받았다, 나는 직분자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하고 강조하면서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외식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만 인정받는 껍데기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마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3장에 들어와서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다라는 말로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자랑거리로 여겼던 것들을 무시하는 것 처럼 보이니까 그러면 도대체 유대인들의 특권은 무엇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특권이 범사에 많다는 말을 하면서 그 중에서 제일 큰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로마서 9:4-5절에 유대인들의 특권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 나타난 특권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그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을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특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최고의 신탁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미 배운대로 하나님은 자연만물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나타내주시지만 인간이 부패하여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I.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거짓됨이 주는 진리
여기서 하나의 논쟁거리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할지라도 그들이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그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더라도 사람들이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지키지 않았다면 그 말씀의 능력과 신실함이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한 사람들의 불 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4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거짓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으로 판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인하여 신실하고 능력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소망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의 불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영향을 받는다면 얼마나 불안하 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제쳐놓고서라도 저 같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때로는 성도들이 간절한 마음과 사모함으로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갈급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오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게 세파에 시달리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로와 새 힘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사명이 있는 저의 모습을 보면 너무도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신실치 못한 저의 모습과 부족하고 연약한 저로 말미암아 혹시나 은혜를 받지 못할 자가 있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는 부분이 항상 설교를 하는 저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서는 너무도 고통스러워 안수기도를 부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부탁을 하지는 않았어도 너무도 안타까워서 자원하여 기도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기도를 받으시는 분들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의 무능력함에 실망을 하였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도들 앞에서 담대히 말씀을 외치며 저들을 위하여 축복기도 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 자체의 권위와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설교하는 저는 부족하고 기도하는 저는 능력이 부족합니다만 제가 설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히4:12). 그 말씀의 능력이 이 시간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으시고 담대히 말씀을 전파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살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말씀을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 유익을 가지고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확실한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었던 심령들을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의 힘이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곤난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도다"(시119:50) 이 시간도 진정 위로부터 내리시는 위로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의 능력이 있음으로 말씀을 통하여 위로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 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하면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북돋아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둔한 자들에게 지혜를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시119:97-100). 하나님의 말씀은 제자의 수가 더해가는 부흥의 역사를 일으킵니다(행6:7). 그러므로 교회가 질적 양적으로 부흥하기를 원하십니까? 말씀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 각 기관에서 말씀운동이 힘있게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 역사상에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밑거름은 말씀운동이었습니다. 지금도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뒷받침하지 않는 모든 주의나 활동들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무언가 왕성한 것 같지만 이내 시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삶의 기초가 될 때만이 그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마7:24-27). 오늘 사람들이 철썩 같이 한 약속들도 오래가지 못하고 파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국민들 앞에 약속을 하고 상대방 앞에서 맹서를 하였어도 사람들의 약속은 형편에 따라 휴지조각처럼 버려지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은 수시로 변합니다. 제도도 수시로 변합니다. 법도 수시로 바뀝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믿고 살아가겠습니까? 대통령이 그럴 수가 있느냐? 국무총리가 그럴 수 있느냐고 울분만 토로할 것이 아닙니다. 부패한 인간의 심성이 그런 것인데 언제 그것을 몰랐습니까?
바라기는 이러한 믿지 못할 세상이 되었다하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말씀만 붙들고 소망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한다 할지라도 변화무쌍한 세상적인 것을 바라보고 기대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소망 중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 인간의 철저한 타락과 부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살펴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특혜를 설명하고 난 다음에 9절에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철저한 타락의 모습을 적라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와 최후 심판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누가 누구보다 의롭다 착하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절대적인 입장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볼 때 모두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 다. 그것도 의라는 것이 티끌만큼도 없는 철저한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10절에서 12절까지 짧은 구절에서 "없다 없다 없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인도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전적부패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셈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하여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세 가지 견해가 있었는데
첫째는, 인간은 본질상 건강하다는 견해이며
둘째는, 인간은 병들었다는 견해이며
셋째는, 인간은 죽었다는 견해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를 진단하면서 병이 들기는 들었는데 꽤 심각하다는데는 의견이 일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병에 걸리기는 하였지만 점차적으로 나아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죽었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하고 더욱 열심히 싸워나가면 소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직 장의사에게 연락할 필요는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견해는 우리 인간들이 건강하거나 병이 들었거나 라고 말하지 않고 아예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입니다.(엡2:1).
하나님이 아담에게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따먹음으로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죽은 사람들을 향하여 빨리 일어나십시오 라고 한다면 일어나겠습 니까? 죽었기에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인간들은 죄의 결과로 우리 스스로는 선을 행할 능력도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마치 날개가 부러진 새와 같이 스스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할 수 없게 되었습 니다. 그럼에도 '나는 아니야 나는 죄인이 아니야 나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단 말이야' 하고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의를 조금이라도 내세우는 한 구원의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11절에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하였는데 이 문제는 교회사에서 유명한 논쟁을 하였던 문제입니다. 5세기가 시작될 무렵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와 펠라기우스(Pelagius)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자유의지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만약 인간이 무엇을 할 의무가 있다면 그것을 행할 능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의지가 죄에 속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중립적인 상태에 있고 따라서 어떤 순간이든 어떤 상황이든 자유롭게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들까지 죄의 영향이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의 죄는 아담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쳤을 뿐 다른 아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따라서 오늘날 인류들도 원하기만 한다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 고 보았습니다. 이 말이 옳은 것 같지요? 이 말을 믿는다면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도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말이요 인간들 스스로 선을 행하려고 마음만 먹기만 하면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반박하였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죄 짓기를 멈출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타락함으로써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자기 의지까지도 상실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갈 자유의지는 있지만 죄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능력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입니다. 전적인 부패입니다. 구원도 믿음으로 된 것이지만 그 믿음 자체도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말씀드리면서 학적으로 어렵게 말씀드리는 것보다 저가 이해한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하여 보겠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지식인들 가운데서 인간의 전적부패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 가 있습니다. 저들의 주장 중 한 예를 들면 사람들 중에는 의지적으로 강한 자들이 있기에 한번 결심한 것은 반드시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하면 된다는 사상). 그리하여 그들이 선을 행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또한 성경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에 거듭남의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신 중에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이 사람이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무슨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마디로 씨(종자)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선을 행한다할지라도 육은 육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육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육식동물인 사자를 사로잡아 그 앞에 밀짚 더미나 여물통을 놓아둔다고 상상해 보십시다. 사자는 밀짚이나 여물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 왜 먹지 않을까요? 신체적으로 자연적으로 그런 것들을 먹을 수 없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체적으로는 여물을 씹어먹고 들이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자의 본성상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자에게 초식동물들이 먹는 음식을 왜 먹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사자는 '나는 이 음식이 싫어서 먹을 수 없어 나는 고기를 좋아하거든'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산떡을 먹어야 살 수 있다고 말하셨는데 왜 산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살지 않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사자의 말을 빌리면 그런 음식이 싫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고 싶고 선을 행하고 싶지만 본성상 그 체질이 부패하여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어느 한 부분이 썩은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썩었습니다.
이러한 부패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서는 우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옥의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진노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오직 예수님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들을 전적부패 가운데서 건져 구원하여 주실 분이십니다. 우리의 본성으로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우리들을 다시 죄와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자랑하고 붙들고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죄의 권세를 깨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의지로도 고상한 도덕으로도 끊을 수 없는 죄의 사슬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번에 끊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보혈만이 악한 죄의 습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적인 부패를 보면서 낙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는 전적으로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날마다 그의 사랑에 이끌리어 십가가 튼튼히 붙들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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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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