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자태 2 제 1 강 백부장의 신앙(1)_김홍전
신앙의 자태 2 제 1 강 백부장의 신앙(1)/김홍전
자료출처: http://cafe.daum.net/wansu63
제 1 강 백부장의 신앙(1) 마 8:5-13 눅 7:1-10
서언/구원의 신앙의 한 예를 공부하려 함
눅 7장 1절부터 읽겠다."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1)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어떤 사본에, 하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이와 똑같은 사실이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1)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어떤 사본에, 이스라엘 중에서라도)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2)앉으려니와 헬, 기대어 누우려니와 (유대인의 음식 먹을 때에 가지는 자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오늘 저녁에 우리가 상고할 문제는 믿음의 자세 혹은 믿음의 상태라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슨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지금 상징적인 표현을 써서 자태라 혹은 자세라 하는 말을 붙인 것이다. 결국 이것은 믿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믿음의 상태라 하더라도 그것이 또한 자세이니까 믿음의 정도라고도 할 수 있다. 영어로는 코오스라든지 폼이라든지 하는 말을 쓸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놓고 볼 때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어떤 종류의 믿음이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얼마만한 믿음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는 바른 믿음, 곧 구원 신앙에 대해서 공부하려는 것이지, 그 이외의 기적 신앙, 현세 신앙, 또는 역사 신앙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즉, 가장 중요한 구원의 믿음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서 그 자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우리 주께서는 믿음의 크기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믿음의 종류에 대해서도 판단하시사 말씀하신 일이 있다. 즉 "왜 믿음이 없느냐?"라든지,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셔서 믿음이 많고 적은 것을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참 기이히 여기시고, "이런 믿음을 내가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하심으로써 믿음의 종류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이렇게 주께서 말씀하신 믿음의 중요한 예들을 뽑아내서 공부하는 것은, 그동안 교리적으로만 서술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관념을 좀더 명확하게 파악하고 정돈하기 위해서이다.
믿음이라고 할 때, 왕왕 우리는 그것을 너무 추상적으로, 논증적으로, 혹은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 설명을 하려니까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 이제 믿음의 자태를 우리가 확실히 마음에 그려 잡기 위해서는 이런 믿음의 예들을 공부해 나가는 것이 좋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특이한 것임
우리는 지번번에 참으로 어려운 문제, 즉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공부했다. 일찌기 세계적인 석학 로우리라고 하는 사람도 제가 있던 곳에 일년에 한번씩 와서 특강을 할 때 이것에 대해서 강의한 적이 있다. 물론 그가 가지고 있는 견해나 보는 법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늘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연 같지를 않다. 우리가 그 사람의 것을 따다가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따와야 좋지도 않다. 그는 영국 사람으로 물론 훌륭한 학자이다. 맨체스터 대학교 구약 교수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구약 학자이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의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스라엘의 종교사적인 문제와 그들의 신앙 또한 구약 성서 신학을 서로 비교해 가면서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종교는 가나안적 배경에서 자라났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들의 종교가 가나안적 배경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은 가나안적 배경과 싸웠으나 번번이 자기들의 그것을 지키는 데 실패한 것을 배웠다. 세상에는 이와 같이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적 경향을 가진 학자들의 그러한 논설들은 많이 있어도, 이스라엘의 신앙을 순수하게 별다른 관점에서 - 곧 우리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관점에서 - 엮은 글은 없다. 우리와 같은 관점에서 쓰여진 글이 있는가 하고 지금까지 아무리 찾아보고 여러 가지를 뒤적거려 보았어도, 원래 그런 방명의 학자가 희소한데다가, 그나마 글이 있다 해도 대체로 고등 비평의 지지자들이나 혹은 자유주의자들이 쓴 것이어서 우리와 같은 입장에서 논하여진 글은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좀 까다롭기는 하지만 면밀하게, 새로운 학문적인 견지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에 대해 보아 나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자태"에 대해서 공부해 나가는데 그렇게 어려운 학문을 강의하듯이 할 수만은 없으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앙의 생생한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른 조건들을 보기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저녁에 읽은 백부장의 신앙이다. 이 백부장의 신앙에 대해서 성경에 나타난 대로 우리가 한 번 고찰해 보기로 하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상 차이
우리는 이 이야기가 마태복음에 기록된 내용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이 서로 좀 다른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누가복음에는 백부장 자신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한 것으로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자신)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하고 직접 이야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기록 태도에 항상 이러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백부장이 누구를 시켜 이야기했어도 그가 예수님께 직접 이야기한 것이다. 마태복음은, 백부장이 예수님께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가 중요했지 어떤 방법으로 이야기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고로 마태는 가장 중요한, 소위 영어로 썹스턴스만을 취해서 쓴 것이다. 이에 대해서 누가는 항상 그렇듯이 그래픽하게 그려 놓았다. 정경을 그리되 '백부장이 예수님께 이야기를 했다고 하지만 그는 유대의 장로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이야기한 것이다.'고 해서 그 저간의 사정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로마 시대의 백부장
그런데 '백부장이 사람을 보냈다'고 했는데, 이 백부장은 그러면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을 한 번 알아 두는 것이 그 장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의 성경 본문을 바로 해석하려면 그를 너무 과대 평가해도 안 되고 또한 과소 평가해도 안 되는 까닭이다. 백부장에 대해서 "이 사람이 이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겸손했다"고 할 때, 그 백부장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고서야 그의 겸손에 대해서나 그의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백부장이라고 하면 로마의 군대에 속한 하나의 장교이다. 옛날 로마의 육군은 여러 개의 군단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아마 이때 가이사랴에는 로마군의 한 군단 본부가 주둔하고 있었던 듯하다. 사해축서를 연구해 보면, 가이사랴에 주둔했던 군단의 대 병력이 이동해서 여리고 맞은편으로부터 넘어온 기록이 있다. 그때, 유대 사람들이 도망을 가면서 자기들이 쓰던 돈을 거기에다 내던지고 갔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 돈을 땅 속에서 파낼 때 보면 그러한 기록들이 함께 많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또 우리가 로마 사가들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로마군의 편제
그런데 로마군이 한 군단 안에는 열 개의 대대가 있었다. 군단을 라틴어로는 레기온 - 영어로는 리젼이라고 하고, 대대를 코홀트라고 한다. 그 다음 각 대대 안에는 매니플이라고 하는 중대가 셋이 있고, 한 중대 안에는 두 개의 소대가 있었다. 이 소대를 영어로 센츄리라고 하는데 이 소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백부장이다. 라틴어로 켄튜리오 - 캔튜리아라는 것을 지휘하니까 켄튜리오, 영어로는 센츄리온이라고 한다. 이것을 헬라말로 번역하면 백인의 장이라 해서 헤카톤타르코스 혹은 헤카톤타르케스라고 한다. 헤카톤은 '백'이라는 말이요 아르코스는 아르콘에서 온 '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헬라말로 번역하지 않고 로마 명을 그대로 써서 켄츄리온이라고 했다. 마가복음은 원래 로마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이 되어서 로마의 독특한 고유 명사 같은 것은 그대로 쓴다.
원래 '백부장'이라고 하니까 백 사람을 지휘하는 사람이겠지만, 우리가 대게 판단하건대, 군단의 병력 여하에 따라서 그 수가 적어지기도 하고 많아지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한 군단 안에 소속되어 있는 백부장의 수를 헤아려 본다면, 한 군단 안에 열 개의 대대가 있고, 한 대대 안에 세 개의 중대가 있으니까 한 군단 안에는 30개의 중대가 있게 되며, 그 다음에 한 중대 안에 두 개의 소대가 있으므로 한 군단 안에는 60개의 소대가 있는 셈이어서, 결국 한 군단 안에는 60명의 백부장이 있게 된다. 군단을 지휘하는 사람을 천부장이라고 하며, 여섯 사람의 천부장이 교대해 가면서 군단을 지휘하는 것이 로마의 보병 군단의 규례이다. 그런고로 백부장(소대장)을 백 명 장이라고 하면 한 군단은 그것의 60배이니까 6,000명이 될 것이다. 대개 큰 군단은 보병 6,000명에다 또 300명 내지 700명의 기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반드시 6,000명이 되지 않을 때는 그 수에 따라서 한 백부장이 100명 이하, 어느 때는 50명 정도도 지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외에 독립 대대의 백부장이라는 것도 있다. 그 대대는 군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독립해 있으므로 독립 대대라고 한다. 이러한 대대를 또한 한 영문이라고 한다(행 21:34,22:24). 예를 들면 친위 대대라고 해서, 로마의 군제를 호위하는 대대도 있었고 혹은 팔레스틴에 와 있는 총독을 호위하는 대대도 있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고넬료가 속해 있던 그 이달리야대라는 영문은 친위대인 것 같다고 한다(행 10장). 행전 27장 1절에 나오는 백부장은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라고 했는데. 이는 어거스터스라는 황제 이름을 가진 독립 대대의 백부장이라는 뜻이다. 그는 그의 부대 본부가 있는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호송항 지중해를 건너간 사람이다.
백부장의 의무는 자기 수하의 병정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점검하고 군복과 식사 등의 전부를 항상 검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병영 안에서 군대를 지휘할 뿐 아니라 또한 전장에 나가서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구별된 특별한 의무가 부여되면 각각 그 지장의 사정에 따라 특별한 책무를 가지고 행동하기도 한다. 이달리아대 안에 있던 고넬료 같은 백부장(행 10:1)은 아마 특별한 임무를 띠고 활동했던 것으로 우리가 볼 수 있다. 또 아까 말한 백부장 율리오도 바울을 호송하는 특별한 책임을 진 사람이었다.
신약에 나오는 백부장들
신약 성경에 다섯 사람의 백부장에 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세 사람은 아마 예수님을 따라간,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첫째는 오늘 우리가 배우려고 하는 자기의 종이 나음을 받은 가버나움에 있는 파견대 - 수비대 - 의 백부장이다. 둘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곁에서 로마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백부장으로, 지진이 나고 어둠이 임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마음 가운데,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로다"(막 15:39), "저는과연 의인이로다"(눅 23:47)라고 고백을 한 사람이다. 셋째는 이달리아대의 백부장 고넬료로서 성신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다. 넷째는 예루살렘의 한 백부장으로서 바울이 민요를 만나서 고문을 당하게 됐을 때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자기 상사에게 경고해서, 판결이 없이는 그를 함부로 칠 수 없음을 말한 사람이다. 곧 그는 바울을 아무 판결도 없이 덮어놓고 고문을 하는 그 무도의 태형에서 건져 낸 사람이다(행 22:26). 마지막으로는 바울을 지중해 건너 로마에까지 호송할 책임을 졌던 아구사도대의 율리오라는 백부장이다(행 27:1). 그는 풍랑을 만나서 파선하게 되자 죄수들이 도망칠까봐 그의 부하들이 이들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했을 때, 바울을 아껴서 그를 구하려고 그런 일을 막고 오히려 헤엄 칠 수 있는 사람만 다 헤엄 쳐서 건너가게 한 사람이다. 이들이 대개 신약 성경에 나온 백부장들이다.
로마군의 꽃
자료출처: http://cafe.daum.net/wansu63
제 1 강 백부장의 신앙(1) 마 8:5-13 눅 7:1-10
서언/구원의 신앙의 한 예를 공부하려 함
눅 7장 1절부터 읽겠다."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1)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어떤 사본에, 하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이와 똑같은 사실이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1)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어떤 사본에, 이스라엘 중에서라도)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2)앉으려니와 헬, 기대어 누우려니와 (유대인의 음식 먹을 때에 가지는 자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오늘 저녁에 우리가 상고할 문제는 믿음의 자세 혹은 믿음의 상태라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슨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지금 상징적인 표현을 써서 자태라 혹은 자세라 하는 말을 붙인 것이다. 결국 이것은 믿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믿음의 상태라 하더라도 그것이 또한 자세이니까 믿음의 정도라고도 할 수 있다. 영어로는 코오스라든지 폼이라든지 하는 말을 쓸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놓고 볼 때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어떤 종류의 믿음이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얼마만한 믿음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는 바른 믿음, 곧 구원 신앙에 대해서 공부하려는 것이지, 그 이외의 기적 신앙, 현세 신앙, 또는 역사 신앙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즉, 가장 중요한 구원의 믿음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서 그 자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우리 주께서는 믿음의 크기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믿음의 종류에 대해서도 판단하시사 말씀하신 일이 있다. 즉 "왜 믿음이 없느냐?"라든지,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셔서 믿음이 많고 적은 것을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참 기이히 여기시고, "이런 믿음을 내가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하심으로써 믿음의 종류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이렇게 주께서 말씀하신 믿음의 중요한 예들을 뽑아내서 공부하는 것은, 그동안 교리적으로만 서술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관념을 좀더 명확하게 파악하고 정돈하기 위해서이다.
믿음이라고 할 때, 왕왕 우리는 그것을 너무 추상적으로, 논증적으로, 혹은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 설명을 하려니까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 이제 믿음의 자태를 우리가 확실히 마음에 그려 잡기 위해서는 이런 믿음의 예들을 공부해 나가는 것이 좋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특이한 것임
우리는 지번번에 참으로 어려운 문제, 즉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공부했다. 일찌기 세계적인 석학 로우리라고 하는 사람도 제가 있던 곳에 일년에 한번씩 와서 특강을 할 때 이것에 대해서 강의한 적이 있다. 물론 그가 가지고 있는 견해나 보는 법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늘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연 같지를 않다. 우리가 그 사람의 것을 따다가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따와야 좋지도 않다. 그는 영국 사람으로 물론 훌륭한 학자이다. 맨체스터 대학교 구약 교수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구약 학자이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의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스라엘의 종교사적인 문제와 그들의 신앙 또한 구약 성서 신학을 서로 비교해 가면서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종교는 가나안적 배경에서 자라났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들의 종교가 가나안적 배경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은 가나안적 배경과 싸웠으나 번번이 자기들의 그것을 지키는 데 실패한 것을 배웠다. 세상에는 이와 같이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적 경향을 가진 학자들의 그러한 논설들은 많이 있어도, 이스라엘의 신앙을 순수하게 별다른 관점에서 - 곧 우리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관점에서 - 엮은 글은 없다. 우리와 같은 관점에서 쓰여진 글이 있는가 하고 지금까지 아무리 찾아보고 여러 가지를 뒤적거려 보았어도, 원래 그런 방명의 학자가 희소한데다가, 그나마 글이 있다 해도 대체로 고등 비평의 지지자들이나 혹은 자유주의자들이 쓴 것이어서 우리와 같은 입장에서 논하여진 글은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좀 까다롭기는 하지만 면밀하게, 새로운 학문적인 견지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에 대해 보아 나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자태"에 대해서 공부해 나가는데 그렇게 어려운 학문을 강의하듯이 할 수만은 없으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앙의 생생한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른 조건들을 보기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저녁에 읽은 백부장의 신앙이다. 이 백부장의 신앙에 대해서 성경에 나타난 대로 우리가 한 번 고찰해 보기로 하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상 차이
우리는 이 이야기가 마태복음에 기록된 내용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이 서로 좀 다른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누가복음에는 백부장 자신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한 것으로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자신)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하고 직접 이야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기록 태도에 항상 이러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백부장이 누구를 시켜 이야기했어도 그가 예수님께 직접 이야기한 것이다. 마태복음은, 백부장이 예수님께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가 중요했지 어떤 방법으로 이야기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고로 마태는 가장 중요한, 소위 영어로 썹스턴스만을 취해서 쓴 것이다. 이에 대해서 누가는 항상 그렇듯이 그래픽하게 그려 놓았다. 정경을 그리되 '백부장이 예수님께 이야기를 했다고 하지만 그는 유대의 장로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이야기한 것이다.'고 해서 그 저간의 사정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로마 시대의 백부장
그런데 '백부장이 사람을 보냈다'고 했는데, 이 백부장은 그러면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을 한 번 알아 두는 것이 그 장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의 성경 본문을 바로 해석하려면 그를 너무 과대 평가해도 안 되고 또한 과소 평가해도 안 되는 까닭이다. 백부장에 대해서 "이 사람이 이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겸손했다"고 할 때, 그 백부장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고서야 그의 겸손에 대해서나 그의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백부장이라고 하면 로마의 군대에 속한 하나의 장교이다. 옛날 로마의 육군은 여러 개의 군단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아마 이때 가이사랴에는 로마군의 한 군단 본부가 주둔하고 있었던 듯하다. 사해축서를 연구해 보면, 가이사랴에 주둔했던 군단의 대 병력이 이동해서 여리고 맞은편으로부터 넘어온 기록이 있다. 그때, 유대 사람들이 도망을 가면서 자기들이 쓰던 돈을 거기에다 내던지고 갔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 돈을 땅 속에서 파낼 때 보면 그러한 기록들이 함께 많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또 우리가 로마 사가들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로마군의 편제
그런데 로마군이 한 군단 안에는 열 개의 대대가 있었다. 군단을 라틴어로는 레기온 - 영어로는 리젼이라고 하고, 대대를 코홀트라고 한다. 그 다음 각 대대 안에는 매니플이라고 하는 중대가 셋이 있고, 한 중대 안에는 두 개의 소대가 있었다. 이 소대를 영어로 센츄리라고 하는데 이 소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백부장이다. 라틴어로 켄튜리오 - 캔튜리아라는 것을 지휘하니까 켄튜리오, 영어로는 센츄리온이라고 한다. 이것을 헬라말로 번역하면 백인의 장이라 해서 헤카톤타르코스 혹은 헤카톤타르케스라고 한다. 헤카톤은 '백'이라는 말이요 아르코스는 아르콘에서 온 '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헬라말로 번역하지 않고 로마 명을 그대로 써서 켄츄리온이라고 했다. 마가복음은 원래 로마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이 되어서 로마의 독특한 고유 명사 같은 것은 그대로 쓴다.
원래 '백부장'이라고 하니까 백 사람을 지휘하는 사람이겠지만, 우리가 대게 판단하건대, 군단의 병력 여하에 따라서 그 수가 적어지기도 하고 많아지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한 군단 안에 소속되어 있는 백부장의 수를 헤아려 본다면, 한 군단 안에 열 개의 대대가 있고, 한 대대 안에 세 개의 중대가 있으니까 한 군단 안에는 30개의 중대가 있게 되며, 그 다음에 한 중대 안에 두 개의 소대가 있으므로 한 군단 안에는 60개의 소대가 있는 셈이어서, 결국 한 군단 안에는 60명의 백부장이 있게 된다. 군단을 지휘하는 사람을 천부장이라고 하며, 여섯 사람의 천부장이 교대해 가면서 군단을 지휘하는 것이 로마의 보병 군단의 규례이다. 그런고로 백부장(소대장)을 백 명 장이라고 하면 한 군단은 그것의 60배이니까 6,000명이 될 것이다. 대개 큰 군단은 보병 6,000명에다 또 300명 내지 700명의 기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반드시 6,000명이 되지 않을 때는 그 수에 따라서 한 백부장이 100명 이하, 어느 때는 50명 정도도 지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외에 독립 대대의 백부장이라는 것도 있다. 그 대대는 군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독립해 있으므로 독립 대대라고 한다. 이러한 대대를 또한 한 영문이라고 한다(행 21:34,22:24). 예를 들면 친위 대대라고 해서, 로마의 군제를 호위하는 대대도 있었고 혹은 팔레스틴에 와 있는 총독을 호위하는 대대도 있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고넬료가 속해 있던 그 이달리야대라는 영문은 친위대인 것 같다고 한다(행 10장). 행전 27장 1절에 나오는 백부장은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라고 했는데. 이는 어거스터스라는 황제 이름을 가진 독립 대대의 백부장이라는 뜻이다. 그는 그의 부대 본부가 있는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호송항 지중해를 건너간 사람이다.
백부장의 의무는 자기 수하의 병정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점검하고 군복과 식사 등의 전부를 항상 검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병영 안에서 군대를 지휘할 뿐 아니라 또한 전장에 나가서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구별된 특별한 의무가 부여되면 각각 그 지장의 사정에 따라 특별한 책무를 가지고 행동하기도 한다. 이달리아대 안에 있던 고넬료 같은 백부장(행 10:1)은 아마 특별한 임무를 띠고 활동했던 것으로 우리가 볼 수 있다. 또 아까 말한 백부장 율리오도 바울을 호송하는 특별한 책임을 진 사람이었다.
신약에 나오는 백부장들
신약 성경에 다섯 사람의 백부장에 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세 사람은 아마 예수님을 따라간,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첫째는 오늘 우리가 배우려고 하는 자기의 종이 나음을 받은 가버나움에 있는 파견대 - 수비대 - 의 백부장이다. 둘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곁에서 로마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백부장으로, 지진이 나고 어둠이 임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마음 가운데,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로다"(막 15:39), "저는과연 의인이로다"(눅 23:47)라고 고백을 한 사람이다. 셋째는 이달리아대의 백부장 고넬료로서 성신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다. 넷째는 예루살렘의 한 백부장으로서 바울이 민요를 만나서 고문을 당하게 됐을 때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자기 상사에게 경고해서, 판결이 없이는 그를 함부로 칠 수 없음을 말한 사람이다. 곧 그는 바울을 아무 판결도 없이 덮어놓고 고문을 하는 그 무도의 태형에서 건져 낸 사람이다(행 22:26). 마지막으로는 바울을 지중해 건너 로마에까지 호송할 책임을 졌던 아구사도대의 율리오라는 백부장이다(행 27:1). 그는 풍랑을 만나서 파선하게 되자 죄수들이 도망칠까봐 그의 부하들이 이들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했을 때, 바울을 아껴서 그를 구하려고 그런 일을 막고 오히려 헤엄 칠 수 있는 사람만 다 헤엄 쳐서 건너가게 한 사람이다. 이들이 대개 신약 성경에 나온 백부장들이다.
로마군의 꽃
백부장은 로마의 군인으로서 마음이 강직한 사람이다. 또 군대 훈련을 일선에서 수행하는 사람이지, 뒤에 앉아서 사무를 본다든지 혹은 작전이나 책략을 짜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고로 그는 군인들을 직접 다루는 사람답게 강직하고, 명령 일하에 움직이는 기민성 기동성이 있는 사람이다. 천부장과 같이 정치성을 띠지 않고 말을 할 때에도 항상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착착 이야기해 버리는 그러한 전형적 로마의 군인으로서 로마군의 꽃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다. 적어도 장교 가운데 가장 군인다왔다.
로마의 역사를 보면 로마군은 그 상부로 올라갈수록 정치적 부패에 휩쓸려서 상층 정치 세력과 함께 부패한 경향이 많았는데, 나중에 로마가 망할 때는 이러한 부패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로마가 망하기 전에라도 병영 황제(근위병에 의해 옹립된 황제) 시대를 보면 군인들이 채를 다 잡고 어떤 사람을 황제로 냈다가 마음에 안 들면 금방 칼로 그의 목을 베거나 내쫓아 버리고 또 다른 사람을 황제로 세워 놓고 자기들 멋대로 병영에서 주권을 행사하고 살던 시대가 있었다. 로마의 역사에는 부패한 군인들의 그러한 책동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항상 강직하게 서서 로마의 법과 질서 곧 군대의 사기와 기강을 유지한 것은 대개 백부장 그룹이었다.
항상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 군대의 정화는 최상부에 있는 최고의 지휘관이기보다는 일선의 지휘관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강력해야 그 군대가 강력해지는 것이다. 아무리 위에서 명령해도 이들이 그에 좇아서 싸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부패한 짓이나 한다면 그 국가는 망하는 것이다. 그 중요한 예가 중국의 소위 국부군이다. 장 개석 총통 휘하에 있던 이 군대들이 일선 지휘관들은 무기가 새로 오면 그것을 내다가 자꾸 적에게 팔아먹었다. 그래서 모 택동의 군대는 미국제 무기를 국부군으로부터 공급받아, 처음에는 연안에서 미미한 세력을 가졌던 그들이 점차 켜져서 나중에는 중국을 석권해 버렸다. 중국 대륙을 차지한 것이다. 일선 지휘관의 그러한 부패에 의해서 국가의 존망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일반 군인 곧 그냥 초모되어 전역의 대열에 주욱 세워지는 일반 군인들이 아니라, 전선 지휘관들이다. 제 일선에서 딱 지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엄숙하게 기강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가 세계를 제패해서 대제국을 이루고 소위 그 팍스 로마나(로마의 지배에 의한 평화)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은 로마 사람들과 그 군인들의 강력한 기강과 준법 정신이었다. 로마가 예술이라든지 과학이라든지 혹은 철학이라든지 하는 이런 방면에 위대한 것이 전연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헬라에 대립하여 특색 있게 서지는 못했고 오히려 문화의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찬란한 헬레니즘의 여파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로마가 이 세계에 유산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그 엄격한 군대의 정치, 그리고 용기 있게 끝까지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 거대한 팍스 로마나를 유지하려고 하던 비젼과 정신이다. 또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던 강력한 군대 조직과 또 일반 사회에 실시했던 법률이다. 로마인들의 법의 개념, 곧 법 철학은 매우 심오한 것임을 오늘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로마의 장교 가운데 꽃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백부장들이다.
로마의 역사를 보면 로마군은 그 상부로 올라갈수록 정치적 부패에 휩쓸려서 상층 정치 세력과 함께 부패한 경향이 많았는데, 나중에 로마가 망할 때는 이러한 부패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로마가 망하기 전에라도 병영 황제(근위병에 의해 옹립된 황제) 시대를 보면 군인들이 채를 다 잡고 어떤 사람을 황제로 냈다가 마음에 안 들면 금방 칼로 그의 목을 베거나 내쫓아 버리고 또 다른 사람을 황제로 세워 놓고 자기들 멋대로 병영에서 주권을 행사하고 살던 시대가 있었다. 로마의 역사에는 부패한 군인들의 그러한 책동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항상 강직하게 서서 로마의 법과 질서 곧 군대의 사기와 기강을 유지한 것은 대개 백부장 그룹이었다.
항상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 군대의 정화는 최상부에 있는 최고의 지휘관이기보다는 일선의 지휘관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강력해야 그 군대가 강력해지는 것이다. 아무리 위에서 명령해도 이들이 그에 좇아서 싸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부패한 짓이나 한다면 그 국가는 망하는 것이다. 그 중요한 예가 중국의 소위 국부군이다. 장 개석 총통 휘하에 있던 이 군대들이 일선 지휘관들은 무기가 새로 오면 그것을 내다가 자꾸 적에게 팔아먹었다. 그래서 모 택동의 군대는 미국제 무기를 국부군으로부터 공급받아, 처음에는 연안에서 미미한 세력을 가졌던 그들이 점차 켜져서 나중에는 중국을 석권해 버렸다. 중국 대륙을 차지한 것이다. 일선 지휘관의 그러한 부패에 의해서 국가의 존망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일반 군인 곧 그냥 초모되어 전역의 대열에 주욱 세워지는 일반 군인들이 아니라, 전선 지휘관들이다. 제 일선에서 딱 지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엄숙하게 기강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가 세계를 제패해서 대제국을 이루고 소위 그 팍스 로마나(로마의 지배에 의한 평화)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은 로마 사람들과 그 군인들의 강력한 기강과 준법 정신이었다. 로마가 예술이라든지 과학이라든지 혹은 철학이라든지 하는 이런 방면에 위대한 것이 전연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헬라에 대립하여 특색 있게 서지는 못했고 오히려 문화의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찬란한 헬레니즘의 여파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로마가 이 세계에 유산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그 엄격한 군대의 정치, 그리고 용기 있게 끝까지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 거대한 팍스 로마나를 유지하려고 하던 비젼과 정신이다. 또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던 강력한 군대 조직과 또 일반 사회에 실시했던 법률이다. 로마인들의 법의 개념, 곧 법 철학은 매우 심오한 것임을 오늘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로마의 장교 가운데 꽃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백부장들이다.
가버나움의 백부장
오늘 본문에 나온 백부장은 가버나움에 와 있었던 백부장이다. 가버나움은, 헤롯 안디바(눅 3:1)가 분봉왕이 되어 자기 아버지 헤롯(눅 1:5)에게서 물려받은 영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로마 황제의 재가에 의한 것이다. 즉 이때는 헤롯 안디바가 번왕 또는 번방왕,분봉왕으로서 갈릴리 지방과 요단 강 서쪽에 있는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때이다. 우리 주께서 "저 여우(눅 13:32)라고 말씀하셨던 이 헤롯 안디바의 정부가 가버나움에 있었고, 우리 주께서도 나사렛에서 이곳으로 옮기셔서 여기를 중심삼아 전도하고 계시던 때이다(마 4:12-13; 눅 4:16,31).
오늘의 본문 눅 7:1절에,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셨다"고 하는 것은 그 앞에 기록된 산상 보훈(마 5:1-7:29; 눅 6:20-49), 즉 참으로 위대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강령을 선언하시기를 마치셨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언을 마치시고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신 소식이 들리니까, 한 백부장이 이제 예수님 앞에 자기의 사정을 고하되 - 직접 자기가 나아가지를 아니하고 그곳의 유대 장로 몇 사람을 보내서, "내 종이 지금 앓고 있사오니 낫게 해주십시오" 한 것이다. 백부장이 유대의 장로들에게 청해서 자기를 대신해서 예수님께 가서 자기 사정을 이야기해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유대 장로들이 반갑게 생각하고 간 것이 분명하다. 또 대 로마 제국의 판도 안에 있는 식민지 백성으로서 가버나움 영문의 장, 수비대장이 말을 하는데 안 들을 수도 없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왜정 시대에 일본 사람 경찰서장이나 수비대장이 불러다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듣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때도 로마가 그런 거대한 권력으로 지배하던 시대이다. 팔레스틴은 이미 오랜 전부터 로마의 큰 세력 가운데 있었고, 그 로마의 참된 통치의 역은 결국 가이사의 대표자로서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이었다. 헤롯 안디바나, 아켈라오(마 2:22) 같은 사람들은 명색이 왕이지만 사실상 총독의 이 큰 권력하에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총독이 병력을 가지고 치안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본문 눅 7:1절에,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셨다"고 하는 것은 그 앞에 기록된 산상 보훈(마 5:1-7:29; 눅 6:20-49), 즉 참으로 위대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강령을 선언하시기를 마치셨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언을 마치시고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신 소식이 들리니까, 한 백부장이 이제 예수님 앞에 자기의 사정을 고하되 - 직접 자기가 나아가지를 아니하고 그곳의 유대 장로 몇 사람을 보내서, "내 종이 지금 앓고 있사오니 낫게 해주십시오" 한 것이다. 백부장이 유대의 장로들에게 청해서 자기를 대신해서 예수님께 가서 자기 사정을 이야기해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유대 장로들이 반갑게 생각하고 간 것이 분명하다. 또 대 로마 제국의 판도 안에 있는 식민지 백성으로서 가버나움 영문의 장, 수비대장이 말을 하는데 안 들을 수도 없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왜정 시대에 일본 사람 경찰서장이나 수비대장이 불러다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듣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때도 로마가 그런 거대한 권력으로 지배하던 시대이다. 팔레스틴은 이미 오랜 전부터 로마의 큰 세력 가운데 있었고, 그 로마의 참된 통치의 역은 결국 가이사의 대표자로서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이었다. 헤롯 안디바나, 아켈라오(마 2:22) 같은 사람들은 명색이 왕이지만 사실상 총독의 이 큰 권력하에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총독이 병력을 가지고 치안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백부장의 위력
그런데 총독 가운데는 두 부류가 있었다. 예컨대,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은 원로원에서 파견된 사람인 까닭에 정식으로 법적인 관료로 서 있는 것이지만,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는 로마 황제가 직접 파견한 사람인 까닭에 황제의 사신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또 로마의 관료라고 하지만 실상은 군인이다. 그래서 일단은 군정을 실시했다. 이 군인 총독은, 원로원에서 보낸 총독처럼 어떠한 문제든 법에 의해서 절차를 밟도록 그 권력이 제한된 자리가 아니라, 군대의 법을 가지고 그냥 진압을 할 수 있는 자리이다. 즉, 그는 큰 정책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민족적인 종교 문제 같은 그 지역 사람의 문제는 그들에게 맡기기는 하되, 어떤 문제로 소요가 일어나거나 치안이 교란될 때에는 사정 없이 군대로 진압해 버리는 그런 권력자이다. 이것이 로마의 군인 총독이다. 예수님 시대의 빌라도가 그러한 총독(Governor의 지휘를 받으나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한 총독)이었다. 이러한 총독의 치하에서는 군대가 주둔하여 누르고 있는 까닭에, 로마 군인들이 로마의 법 - 곧 절차법에 순응하지 않는다. 소위 무슨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니라 명령 일하에 그 백성들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옛날 우리 나라의 왜정 시대에도 명색으로는 법 절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일본 말로 데쯔즈기호우(수속법)라는 절차법이 있었지만 그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쓰였다면 남의 재산 싸움이나 쓰였을 뿐이다. 그리고 잘못한 일이 있다고 하면 으레껏 먼저 형사범으로 몰아서 덮어놓고 잡아다 두들겼다. 그렇게 고문부터 하여 반죽음을 시켜 놓고 그 다음에야 명식으로 공판이라는 것을 했다. 이렇게 일본인들은 이 양방을 다 썼다. 이에 반해 영국인들은 법 절차를 딱딱 지켜서 어떤 곳에 가든지 공정하게 식민 통치를 한 까닭에 비교적 소수의 인원으로도 많은 사람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한국을 먹은 다음에 이 양쪽을 다 쓴 것이다. 그들은 원래 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옛날부터 그들은 사무라이여서, 길에서 사람을 붙들면 여러 말 할 것도 없이 덮어놓고 때로 놓고 본다. 말하자면 한국에서도 그들은 군대의 명령하에 이러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런 것을 상상해 보면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틴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만일 소요를 일으키거나 하면, 덮어놓고 잡아다 놓고 "먼저 매로 쳐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잡혔을 때에도 먼저 매로 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사람을 정식으로 공판도 않고 이렇게 함부로 형벌을 가할 수 있느냐?"고 하니까, 백부장이 그 말을 듣고 천부장에게 가서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 사람은 로마 사람입니다. 로마 사람을 데려다 이렇게 함부로 쳐 놓으면, 나중에 투서를 해서 탄핵할 터인데 그러면 우리가 당하게 됩니다"고 한 것이다. 그렇게 로마 사람에게는 법이 엄연히 있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이 없는 식민지 백성이나 노예 계급에 있어서는 아무런 명색이 없었다. 성명이 없었다. 20세기에 있어서도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을 민족 운동을 했다고 잡아다 놓고 죽이고서는 심장 마비로 죽었다고 하는 짓들을 얼마든지 했던 판인데 그 시대에야 더 말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세례 요한도 꾸짖은 로마 군인의 강포
이와 같은 상태 가운데 있던 거기에서 백부장은 얼마나 위력을 가지고 있었겠는가 상상해 보라. 물론 로마 도시나 로마 제국의 자유민들이 있는 곳, 즉 법 질서가 엄연히 있는 곳에서는 그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단 로마가 이렇게 통치하고 지배하고 억압하고 있는 식민지에 오면 그들은 거대한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식민지 백성들에게 항상 명령하고 깔보고 함부로 말했다. 유대 사람들은, 이렇게 강포한 군인들 가운데서 더러는 세례 요한의 말에 마음의 찔림을 받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회개를 고하기도 했다. 그럴 때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유독히 꼭 집어낼 만한 말을 했다. "백성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4). 즉, 강포를 행해서 돈도 빼앗고 강포를 행해서 제 기분도 풀고 하는 이런 짓을 말아라고 한 것이다. 로마 군인들이 그런 짓을 많이 한 까닭에 유독히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이때 군인들이 요는 하루에 한 데나리우스(데나리온)였는데, 요새 돈으로 환산하면 아주 적은 돈이지만 그때의 시세로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용 노동자가 하루에 받는 품삯이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말은, "남들은 하루 종일 열 두 시간이나 노동을 해서 받는 돈을 너희는 편한 군인살이를 해 가면서 받으니 그것으로 족한 줄로 알아라" 하는 것이다. 백부장은 그러한 로마 군인들의 지휘관이었다.
백부장을 위해 예수님께 간곡히 청한 장로들
가버나움에는 백부장이 열 명 또는 스무 명씩이나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확실치는 않아도 거기에는 친위대라고 할 수 있는, 왜정 시대 일본 사람들의 수비대 같은 것이 하나 있었을 것이고, 그 백부장은 그 대의 장으로 있었을 것이다. 그런고로 그는 거기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렇게 강포하기가 쉽고 또 강직한 것을 자기의 자랑으로 여기어 뽐낼 만한 형편에 있었는데도, 그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청해서 자기의 사정을 '보고 들은 대로 예수님께 말씀해 주시오'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이스라엘 장로들도 즐겁게 응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백부장을 대신해서 예수님께 와서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백부장보다도 더 간곡할이만큼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혹시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간곡한 청 때문에라도 백부장의 소원을 들어주실까 하는 그런 심정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지금 이 장로들은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잘 알 까닭이 없다. 다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몇 개의 기적에 대해서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직은 예수님의 그 훨씬 많은 기적이 있을 때가 아니다. 기적을 행하신 지 얼마 안 되는 때이다. 바로 조금 전에 문둥병자를 낫게 하신 일이 있고(마 8:2-3; 눅 5:12-13), 그전으로 올라가면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일이 있고(요 2:1-11), 귀인의 아들의 병을 고치신 일(요 4:46-54) 등이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정도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때에 예루살렘을 왕래하셨으므로 누군가가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백부장에게 전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백부장은 그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장로들을 청해서 예수님께 이것을 고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런데 총독 가운데는 두 부류가 있었다. 예컨대,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은 원로원에서 파견된 사람인 까닭에 정식으로 법적인 관료로 서 있는 것이지만,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는 로마 황제가 직접 파견한 사람인 까닭에 황제의 사신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또 로마의 관료라고 하지만 실상은 군인이다. 그래서 일단은 군정을 실시했다. 이 군인 총독은, 원로원에서 보낸 총독처럼 어떠한 문제든 법에 의해서 절차를 밟도록 그 권력이 제한된 자리가 아니라, 군대의 법을 가지고 그냥 진압을 할 수 있는 자리이다. 즉, 그는 큰 정책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민족적인 종교 문제 같은 그 지역 사람의 문제는 그들에게 맡기기는 하되, 어떤 문제로 소요가 일어나거나 치안이 교란될 때에는 사정 없이 군대로 진압해 버리는 그런 권력자이다. 이것이 로마의 군인 총독이다. 예수님 시대의 빌라도가 그러한 총독(Governor의 지휘를 받으나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한 총독)이었다. 이러한 총독의 치하에서는 군대가 주둔하여 누르고 있는 까닭에, 로마 군인들이 로마의 법 - 곧 절차법에 순응하지 않는다. 소위 무슨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니라 명령 일하에 그 백성들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옛날 우리 나라의 왜정 시대에도 명색으로는 법 절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일본 말로 데쯔즈기호우(수속법)라는 절차법이 있었지만 그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쓰였다면 남의 재산 싸움이나 쓰였을 뿐이다. 그리고 잘못한 일이 있다고 하면 으레껏 먼저 형사범으로 몰아서 덮어놓고 잡아다 두들겼다. 그렇게 고문부터 하여 반죽음을 시켜 놓고 그 다음에야 명식으로 공판이라는 것을 했다. 이렇게 일본인들은 이 양방을 다 썼다. 이에 반해 영국인들은 법 절차를 딱딱 지켜서 어떤 곳에 가든지 공정하게 식민 통치를 한 까닭에 비교적 소수의 인원으로도 많은 사람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한국을 먹은 다음에 이 양쪽을 다 쓴 것이다. 그들은 원래 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옛날부터 그들은 사무라이여서, 길에서 사람을 붙들면 여러 말 할 것도 없이 덮어놓고 때로 놓고 본다. 말하자면 한국에서도 그들은 군대의 명령하에 이러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런 것을 상상해 보면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틴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만일 소요를 일으키거나 하면, 덮어놓고 잡아다 놓고 "먼저 매로 쳐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잡혔을 때에도 먼저 매로 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사람을 정식으로 공판도 않고 이렇게 함부로 형벌을 가할 수 있느냐?"고 하니까, 백부장이 그 말을 듣고 천부장에게 가서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 사람은 로마 사람입니다. 로마 사람을 데려다 이렇게 함부로 쳐 놓으면, 나중에 투서를 해서 탄핵할 터인데 그러면 우리가 당하게 됩니다"고 한 것이다. 그렇게 로마 사람에게는 법이 엄연히 있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이 없는 식민지 백성이나 노예 계급에 있어서는 아무런 명색이 없었다. 성명이 없었다. 20세기에 있어서도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을 민족 운동을 했다고 잡아다 놓고 죽이고서는 심장 마비로 죽었다고 하는 짓들을 얼마든지 했던 판인데 그 시대에야 더 말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세례 요한도 꾸짖은 로마 군인의 강포
이와 같은 상태 가운데 있던 거기에서 백부장은 얼마나 위력을 가지고 있었겠는가 상상해 보라. 물론 로마 도시나 로마 제국의 자유민들이 있는 곳, 즉 법 질서가 엄연히 있는 곳에서는 그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단 로마가 이렇게 통치하고 지배하고 억압하고 있는 식민지에 오면 그들은 거대한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식민지 백성들에게 항상 명령하고 깔보고 함부로 말했다. 유대 사람들은, 이렇게 강포한 군인들 가운데서 더러는 세례 요한의 말에 마음의 찔림을 받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회개를 고하기도 했다. 그럴 때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유독히 꼭 집어낼 만한 말을 했다. "백성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4). 즉, 강포를 행해서 돈도 빼앗고 강포를 행해서 제 기분도 풀고 하는 이런 짓을 말아라고 한 것이다. 로마 군인들이 그런 짓을 많이 한 까닭에 유독히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이때 군인들이 요는 하루에 한 데나리우스(데나리온)였는데, 요새 돈으로 환산하면 아주 적은 돈이지만 그때의 시세로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용 노동자가 하루에 받는 품삯이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말은, "남들은 하루 종일 열 두 시간이나 노동을 해서 받는 돈을 너희는 편한 군인살이를 해 가면서 받으니 그것으로 족한 줄로 알아라" 하는 것이다. 백부장은 그러한 로마 군인들의 지휘관이었다.
백부장을 위해 예수님께 간곡히 청한 장로들
가버나움에는 백부장이 열 명 또는 스무 명씩이나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확실치는 않아도 거기에는 친위대라고 할 수 있는, 왜정 시대 일본 사람들의 수비대 같은 것이 하나 있었을 것이고, 그 백부장은 그 대의 장으로 있었을 것이다. 그런고로 그는 거기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렇게 강포하기가 쉽고 또 강직한 것을 자기의 자랑으로 여기어 뽐낼 만한 형편에 있었는데도, 그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청해서 자기의 사정을 '보고 들은 대로 예수님께 말씀해 주시오'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이스라엘 장로들도 즐겁게 응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백부장을 대신해서 예수님께 와서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백부장보다도 더 간곡할이만큼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혹시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간곡한 청 때문에라도 백부장의 소원을 들어주실까 하는 그런 심정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지금 이 장로들은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잘 알 까닭이 없다. 다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몇 개의 기적에 대해서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직은 예수님의 그 훨씬 많은 기적이 있을 때가 아니다. 기적을 행하신 지 얼마 안 되는 때이다. 바로 조금 전에 문둥병자를 낫게 하신 일이 있고(마 8:2-3; 눅 5:12-13), 그전으로 올라가면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일이 있고(요 2:1-11), 귀인의 아들의 병을 고치신 일(요 4:46-54) 등이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정도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때에 예루살렘을 왕래하셨으므로 누군가가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백부장에게 전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백부장은 그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장로들을 청해서 예수님께 이것을 고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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