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자태 제7장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5)_김홍전
신앙의자태 제7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5) 김홍전
(민 21:4-9)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본래의 목적이 사람에 의하여 흐려짐
어제 공부하던 것을 계속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무신앙의 연고인데, 이 무신앙이란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건져 내셔서 이끌고 나가시는 본의에는 다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은 신앙으로만 역전 역투해서 앞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원수를 쳐 물리치기도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본래의 뜻이 그들을 통하여 나타나도록 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들의 생활과 함께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것을 세우고, 그곳의 이교적인 그릇된 것을 훼파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본래의 목적이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역사로 말미암아 흐려지지 않게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신 본래의 목적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흐려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본래의 거룩한 목적을 알 수 있게끔 행동하거나 그것을 알 만한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타낼 만큼 세상이 성격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일을 하나 하셔야 할 터인데 그것이 곧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다는 사실이고, 이 택하신 백성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세계를 만드신 본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고 소위 문화라는 것을 지어나가는 것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증명하듯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고 또 이 세상 사람들을 쓰셔서 하나님이 가지신 뜻을 땅 위에 이루시려고 한다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역사나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땅에 만들어 놓으셨느냐 하는 것을 바르게 가르쳐 줄 만한 일을 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나라가 일어나서 이 세상에서 큰 세력을 잡고 굉장한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아, 과연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저 나라는 저렇게 애를 쓰고 가는구나.’하고 인정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게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하는 일을 보면 비록 거기에 기독교가 있고 종교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을 만드신 본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일을 합니다. 오히려 그 뜻을 반대하고 그것을 은폐하며 그것을 거짓것으로 꾸며서 다른 것이 있는 양으로 보여주는 일들을 해 나갑니다.
형식적인 기독교 -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드러내지 못함
이것을 다른 방면에서 보십시다. 이 세상에는 기독교를 가진 기독교의 나라라는 국가도 많습니다. 그러면, 영국이나 혹은 유럽에 있는 많은 나라뿐만 아니라 가령 미대륙에 있는 나라들이 하는 일을 볼 때, 그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또 그 국가를 형성해 나가고 국가의 문화 생활을 하는 데에 기독교적인 요소가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과연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저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가고 있구나’하고 생각하게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사람들의 동상이나 기념비 같은 것이 길가에서도 보이는데, 그것을 보면 기도하는 모양도 있고 혹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 건너와서 나라를 개척했다”고 하는 말을 볼 수도 있습니다. 또 미국 돈 10센트짜리나, 25센트짜리나 50센트짜리를 보면 “인 갇 위 트러스트” 즉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명료하게 쓰여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에 과연 ‘이 나라는 기독교 국가다’하는 것을 다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봄으로써 우리는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과연 이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리셔서 복을 주셨다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꼭 미국까지 갈 것 없이 우리 한국에만 와 보더라도 이런 것을 느끼는 일이 있습니다. 요사이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한 뒤 하는 말이, “한국에 가보니까 그 나라는 기독교 국가 같더라. 기차를 타고 써억 지나가면서 차창 밖으로 멀리 시골을 보면 사람들이 사는 집은 납작한데 큰 집이 서있는 것은 예배당하고 관청뿐이더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배당은 빨간 벽돌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큼직큼직하게 지어져서, 조금만 가면 또 예배당이 서있고 조금만 가면 또 예배당이 서있으니까 ‘그것 참 굉장하구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이나 미국의 큰 예배당들과 또 모든 행사나 사람들의 말투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는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닌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하면 그것을 봄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알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화가 아무리 기독교적이고, 표면에 그것을 칠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이 본래 사람을 내신 거룩한 목적과 뜻을 알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닌 딴 것을 늘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마귀가 이 세상 나라의 여러 가지 것을 손으로 잡아 흔들 때에도 항상 무서운 모양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광명한 천사인 체하고 나타나서 “나도 기독교인이다”하면서, 기독교의 행사를 화려하게 꾸미기도 하고 기독교적인 모양을 여기저기 세워 놓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상을 하나 세우려 한다고 해서 마귀가 저 기도하는 상을 세워서는 안되겠다 하고 뚜드려 부수려 하지 않습니다. 마치 낚싯밥을 주듯이 어떤 정도만큼은 기독교적인 요소를 다 줍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받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아 우리는 기독교 국가다. 좋다’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조그마한 예배당에 있다가 열심으로 기도하고 열심으로 부흥회를 하고 돈을 모아서 벽돌로 빨간 예배당을 큼직하니 하나짓고는 ‘아,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 하난 크게 지었으니까 은혜 받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네 교회가 무엇을 이룬 것으로 생각하고, 어떤 훌륭한 경계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해서는 그 속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을 세우신 거룩한 목적이 무엇이라 하는 것을 알게 해주는 사실이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람을 지으신 본래의 목적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사람이 보기 좋고 듣기 좋게 그러한 형식만을 꾸미고 형식적인 기독교 행사나 벌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 나타내신 방법 - 이스라엘의 선택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본래의 목적을 바로 나타내어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와는 다른 일을 한가지 하셨습니다. 그 일을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하나 세우셨습니다. 그 계획은 사람들이 방황하며 제멋대로 가는 데에서 어떤 한사람을 뽑아내신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그에게 나타내시고 그 하실 일에 대해서 먼저 큰 광경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을 차츰차츰 번성케 되도록 보호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멀리 떠난 상태에서 애굽의 종 노릇을 했지만, 이번에는 그들을 그러한 상태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을 알리시되 “내가 너희들을 택한 것은 너희들만 잘 살게 하려고 하거나, 너희들이 종노릇하는 것이 불쌍해서 행복스럽게 하려고 땅 하나를 준비해서 거기에 들어가 평안하게 먹고 즐겁게 살라고 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가나안이라는 땅에 가서 그곳의 생활, 즉 나를 반대하고 나와는 거리가 먼 그들의 생활을 쳐부숴 버리고, 거기에다 한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 사람의 생활 상태를, 사람의 역사를 만들어 내라.”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고 사회 생활을 하며 문화를 건설하여 나가는 그것이 내가 원하는 그대로가 아니고 오히려 나를 반대하고 나를 알려고 해도 알지 못하도록 가리는 일을 자꾸 하는 것이니까 너희는 그런 것을 뚜드려 부숴라. 그래서 나를 잘 알 수 있게 하여라”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 가운데 같이 거하는 내 나라를 거기에 세워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어, 하나님의 깊으신 계획을 이루어 나가시려고 이 백성을 불러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아는 믿음이 필요했던 이스라엘 백성
그러므로 이 백성들은 광야의 행진에서 하나님이 일러주신 그 크신 계획을 늘 마음 깊이 생각하고 있어야 했을 뿐 아니라, 대체 그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세워 나가시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우선 당장에 필요한 것은 알고 있어야 했었습니다. 그것이 크게 한마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이처럼 지식이 필요하고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이 그저 믿습니다 하는 그런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중에 떠 있는 부허한 종교 감정입니다.
믿음에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 왜 믿어야 할 것인가, 또 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은, 내가 왜 믿어야 할 것인가를 알았다면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무슨 믿음이 필요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 내신 거룩하신 목적과 뜻을 아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날의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건져 내셨느냐 하는 것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있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을 몰라도 믿음인 줄로 알면 큰 야단입니다. “다만, 예수님만 믿고 내가 천당 갑니다”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신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의 믿음이 되려면 구원이 뭔가를 알아야 합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믿음은 구원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믿음에는 단계가 있음
그런데 구원의 믿음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초보부터 아는 것입니다. 그 첫 단계를 알고, 그 다음에 그것이 참으로 구원의 믿음일 것 같으면 거기서 구원에 대해서 점점 더 알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더 알아지면서 자꾸 믿음이 장성해 나가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초보가 뭐냐하면, “나는 죄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건져 내셨다.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영생의 나라로 옮기셨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알고 믿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 꼭 그렇다고 증명할 도리는 없습니다.
그것을 믿어서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하려면 처음에는 그 정도로 알았지만 그것이 차츰차츰 올라가서 더 많은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많은 지식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왜 나를 건져내셨느냐를 아는 것입니다. “왜 나를 건져내셨나, 무슨 목적이 있으신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거기에 도달하는가?” -이런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모르고 밤낮 ‘하나님은 나를 건져 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하면 그것이 구원의 믿음인지 또는 소위 그런 정통 교리를 그냥 받아 가지고 그것만 밤낮 외고 있는 그런 믿음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그러한 몇 가지 조목만을 나열해서 그것만을 묻고 대답하고 그것만 졸졸 외고 있습니다. 그것만 밤낮외고 있다고 해서 구원의 믿음이 있느냐 하면 구원의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사도신경을 다 왼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의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도신경을 외고 있으면 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런 조건은 없습니다. 물론 사도신경을 보면 복음의 일련이 그 안에 다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초적인 것만을 밤낮 외고,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는 자기식 종교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구원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노예 상태 가운데에서 그 크고 희한한 손으로 그들을 건져내사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로 들어와서 시내산 밑에까지 이르게 하시고, 거기서부터 이제 하나님께서 뜻을 나타내사 민족으로 조직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을 경험했습니다. 이 첫째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신 것과 기적을 행하신 것을 말합니다. 둘째의 큰 경험은, 과연 바로가 그만 할수 없으니까 “나가거라”해서 모세가 그들을 다 끌고 나간 경험입니다.
셋째의 큰 경험은 바로의 군대가 뒤에서 막 몰아오는데, 하나님께서 진 앞에서 인도하던 거룩한 구름을 진 뒤로 오게 해서 빽빽이 둘러 싸게 하므로 바로의 군대에게는 어두움이, 이스라엘에게는 광명이 있게 구별해 놓으신 경험입니다. 그 다음의 큰 경험은 홍해를 가르시고 그 안으로 지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애굽 군대도 홍해 속으로 들어와서 자기네와 똑같은 경험을 할 줄 알았더니 그만 온 물이 딱 합쳐지면서 그들은 홍해를 건너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 큰 경험입니다. 그 뒤에는 마라에서 물이 써서 먹을 수 없을 때 물을 달게 하여 먹여 주신 경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신 구원의 지식
이렇게 시내산 밑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러가지 큰 경험을 주셔서, 이 경험들이 하나씩, 둘씩 쌓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을 그 쌓이는 경험 가운데서 하나씩 둘씩 더 알아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초보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더 많은 것을 알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하시는 분으로만 알았더니, 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백성을 구별하사 애굽 백성에게는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신 것까지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이 언약하고 약속하신 바를 꼭 그대로 지켜주시는 분이라는 사실도 경험했습니다. 즉, 애굽 백성의 장자와 첫것은 다 죽이시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문설주에 피를 바르게 하사 그 피를 보시고 넘어가신 사실을 역력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나가실 때 인도해 나가시는 거룩한 방법이 있고 거룩한 계시가 있어서 그것을 도무지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방법을 분명히 보여 주사 백성이 혼미하지 않고 혼동하지 않게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확실한 사실을 또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 크신 손으로 홍해를 가르사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 내셨지만, 애굽 군대는 뒤쫓아 들어가다가 물이 합쳐져서 모두 죽게 하신 심판의 하나님이신 사실 -하나에게는 심판이요 다른 하나에게는 구원이라는 사실, 즉 홍해의 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희한하게도 하나님을 찬송할 조건이 되었으나, 애굽 백성에게는 죽음의 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경험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조건을 가지고 하나에게는 죽음이요, 다른 하나에게는 삶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기묘한 분이심을 자꾸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쓰디쓴 현실이라도 당신이 원하시는 거룩하신 뜻을 한번 나타내실 때에는 달게도 만드실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 쓴 것이 그 백성에게 부닥치게 하시면서 쓴 그것을 달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쓴 물에 부닥치는 것이 쓰지도 않고 달지도 않은 맹맹한 물에 부닥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쓴 물에 부닥쳤는데, 그 쓴 물이 달게 되었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 고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물이 없는 곳에 부닥쳤을 때 그곳의 바위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셔서 그 많은, 거의 300만이나 되는 대중이 다 먹을 수 있게 풍요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물없는 메마른 땅을 갈지라도 물을 내시고, 먹을 것 없는 메마른 광야를 갈지라도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시고 또 허락하신 것은 다 이루어 주시며 또 그것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필요할 때에 어김없이 내주신다는 것을 경험해 온 것입니다.
이 경험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지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경험을 통하여 여러 가지를 보게 하여 주시되, 여러 가지 면을 같은 차원에서 알쏭달쏭하게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보여 주시고 그 위에서 또 하나를 보여 주셔서 이렇게 자꾸자꾸 하나님의 오의를, 깊은 뜻을 더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로서 효과가 있으려면 그냥 다양하게 잡다하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 대한 해석과 반성을 할 때 -거기에서 하나님 당신을 보여 주시는 것을 배워갈 때- 어느 때는 이렇게도 하시고 어느 때는 저렇게도 하신다는 것만을 배우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아무 두서없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렇게 하시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토대로 하여 한 단위에서 저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 당신의 속성과 능력과 어떤 분이심을 희미한 데서 밝은 데로, 빈약한 데서 풍성한 데로 끌고 올라가시며 가르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초보 지나면 사명 깨달아야 함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더욱 증가하여 장성해 감에 따라,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이니까 과연 훌륭하신 분이다. 전에 내가 조금만 알았을 때에는 그 부분에서만 믿었더니, 이제는 풍성히 아는 까닭에 그 풍성한 가운데 내가 믿노라’하고 의지한다면 그것이 구원의 신앙의 장성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 이르기까지의 광야 생활 가운데서 이러한 신앙이 장성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으로 더 큰 계시를 내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유치한 이스라엘 백성을 거기까지 끌고 오신 다음에야 비로소,“내가 왜 너희를 건져 냈는가?”하는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 예수를 믿고 초보적인 단계에 있을 때에는, 즉 예수 믿는 기본 도리와 하나님께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한 조건들을 알아서 일정한 위치에 도달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지각이 생겨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어렸을 때에는 젖을 먹지만 차츰차츰 장성해서 일정한 나이가 되면, “너는 이제 사람의 구실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장성인으로서의 깨달음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깨달아서 사람의 뜻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각이 생겨 무엇을 깨닫고 난 다음에 입지를 하여 차츰차츰 자기를 그 방향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은 그리스도교의 도리에서 배우기 이전에 보통의 이 세상 도리에서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자명의 공리입니다.
어렸을 때는 어리니까 어린애 노릇을 해도 되지만, 일정한 나이가 되면 어린애 노릇을 해서는 안됩니다. 어른 노릇을 해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고, 신자도 그렇습니다. 어떤 나이를 먹으면 어른다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어린애 같은 생활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어른다운 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왜 나를 불러내셨느냐,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그러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이냐, 어떻게 생활과 행동을 해야 하겠느냐, 무슨 목표를 가져야 할 것이냐?’하는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어린 아이가 지키는 몇 가지만을 그냥 지키고 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성 못하면 문제에 부딪쳤을 때 반역함
이스라엘 백성도, 비록 이렇게 굉장한 것을 다 아는 사람들은 못될지라도, 장성한 사람답게 그 다음 단계에 필요한 신에 대한 지식과 구원에 대한 지식을 가졌어야만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께 대한 계시는 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경험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계시였습니다. 시내산에서의 계시는 독특하고 풍성한 계시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으로써 알아 나가지만, 역사의 과정 위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특하게 직접적인 계시를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 직접적인 계시가 오늘날에는 성경에 풍성하게 쓰여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우리는 누구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배웠으면 배운 바대로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시내산 밑에서 열흘 길, 240km를 걸어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갔을 때 이제는 허락하신 땅으로 들어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 시내산 밑에서 1년 동안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를 했지만, 그동안 장성해야 할 것을 충분히 장성하지 못한 까닭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문제에 부닥쳤을 때 동요하고 말았습니다. 그 문제란,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에 있습니다.
그러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동요했다는 것은 그 이전의 1년 동안에 준비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크신 계시를 하셨지만 그들은 그 계시에 대해서 잘 깨달아 알지 못하고 그만 애굽적인 형식적인 생활을 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종교를 형식화한 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어라, 어떤 날 수를 지켜라 어떤 제도를 세워라” 하시니까 그런 형식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자세히 배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큰 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크고 많은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의 경험을 통하여 그들에게 깊은 것을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꿈에라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모자라서 배반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준 것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터득하기를 항상 모자라게 터득했다는 말입니다. 바로 배워야 할 것을 바로 안 배운 것입니다.
그러면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보고한다는 이 큰 사실 앞에서 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했겠는가? 그 누구의 말을 들어야 했겠는가?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들어야 했겠는가? 아니면 나머지 열 사람의 말을 들어야 했겠는가? 물론 오늘날 우리가 앉아서 생각할 때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고 따라가야만 했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안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까닭에 40년 광야에서 방랑하면서 그 1세대는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그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마음이 떨리고, 허락하신 땅에 들어갈 생각이 다 없어져서 애굽의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을 일으켰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다음 세대가 일어나서 들어가게 되는데, 이들이 아라바길에서 불뱀을 만난 것은 원망을 한 까닭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 2세대는 애굽으로 되돌아갈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낳은 사람들이 아닌 까닭에 그렇습니다.
애굽에서 낳은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들이 주동은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부형들이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했을 때 그 되돌아가려고 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 광야에서 다 죽은 것을 뻔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못하고, 가기는 가는데 틈만 있으면 반항을 하고 원망을 하려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라바 길에서 또 길이 험하다고 원망을 한 것입니다.
각성 없으면 종교와 본심간에 괴리 생김
이것은 그 사람들이 구원받은 그 큰 내용에 대해서 잘 알지를 못했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도 그냥 가라고 하니까 가는 것이지 왜 가야 하나, 가서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에 대해서 깊은 인식이, 각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깊은 인식, 깊은 각성이 생기게 하기 위해서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때때로 여기저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일러주었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그것은 이제 불뱀을 만난 이후에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이 백성을 모아 놓고 한 자리에서 주욱 이야기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이야기한 것이 과거에는 전연 듣지 못한 새로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전에 한 이야기를 다 모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듀트러노미, 혹은 신명기라 하는 말 자체가 ‘율법을 반복한다’ 또는 ‘율법의 사본이다’ ‘율법을 또 한번 베낀다’하는 말입니다.
율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것이지 둘째 율법이란 말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신명기를 새로운 율법으로 또 준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과거 40년 동안 광야의 여기저기에서 가르친 이야기입니다. 이제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기 전에 잘 깨달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는 까닭에 이미 가르친 이야기를 종합해서 주욱 선언해 나간 것입니다. 이것을 한번에 다 선언하려면 3시간 반쯤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과거 여기저기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그것을 듣고 깨달았다면 그것이 분명한 신앙을 가질 만한 재료로서 충분했겠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그들은 길에 대해서 원망을 했습니다. 신앙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우리를 애굽에서 데리고 올라왔다는 말이냐?”하고 다시금 그 고전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애굽에서 건져 내셔서 이 때까지 살게 하신 그 이유를 하나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애굽에서 건짐을 받아 40년을 광야에서 살다가 이 길을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한 반항입니다. 이날 이때까지 저들의 반수 이상은 애굽에 가 본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우리를 애굽에서부터 인도해 냈느냐, 무엇 때문에 저기를 들어가야 하느냐?”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에 구원했느냐?”는 말입니다. 구원에 대한 아무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말에는 또 무슨 의미가 내포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실 때는 좋다하고 기뻐하나 괴로움을 주실 때는 싫다하며 반항을 한다는, 항상 이해만을 앞세우는 종교가 그들에게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에게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제도가 다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다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지켜 가면서 원망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지키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본심으로는 원망을 하였습니다. 종교와 본심이 따로 움직였습니다.
종교와 본심의 괴리의 예 - 사회복음주의
오늘날의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종교는 종교이고 본심은 본심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종교로는 기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려운 문제에 부닥뜨리면 제 본색이 드러납니다. 어려운 문제가 자기의 생활에 부닥치면, ‘아, 여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가 됐구나. 하나님은 여기서 어떤 희한한 일을 하시려는가?’하는 것을 기대하는 믿음의 기대가, 믿음의 소망이 그를 지배하는 대신, ‘무엇 때문에 나는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하면서 그 일을 당하는 의미를 모르고 원망을 합니다. 그리고는 세상 사람이 해결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은 일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만약 그들의 방식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에 적용해 본다면, 그들이 길 때문에 곤비하다고 하면 하나님은 “자, 내가 다시 선언한다. 너희들이 뭐 가나안 땅에까지 들어가서 싸우고 그럴 것 있느냐, 이 근방 적당한 데로 가라. 그러면 내가 거기 사방에서 샘을 터뜨려 물이 많이 나게 하련다. 물만 많이 나면 그 훤한 광야가 낙토 복지가 될 것 아니냐, 그러면 거기를 건설해서 나라를 만들어라”하셨으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나보다 더 맛있는 것을 주시면 됐을 것입니다. -“너희 음식이 박하구나. 안됐다. 미안하다. 박한 음식을 밤낮 먹여서 미안하다. 그러니 좀더 좋은 음식을 주마” 요새의 사회복음주의자들의 해결 방식이 그것입니다. 사회에 좀더 좋은 질서를 보여주고 좀더 균등하게 잘 살게 한다면 이런 죄악이 없어지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 방법 - 불뱀
그러면 하나님은 그러한 해결 방법을 쓰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해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뱀을 보내서 물게 하셨습니다. “이놈들, 뱀에게 물려 죽게 생기면 너희들이 나를 찾을 것이다. 어차피 죽을 놈은 죽어라”- 아주 단호한 태도로 나오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찾는 자는 가나안 복지에 갈 의미가 있지만, 죽게 생겨도 하나님을 아니 찾는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하시고 나누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갈라내 버리자”하시며 갈라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 가운데는 그가 죽게 되는 때까지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대체 하나님이 이런 것으로 갈라내야 할 만큼 사람은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믿음이 자꾸 타락해 내려가면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네가 정 그렇게 타락하면 이제는 죽든지 살든지 하나를 택해라. 이것으로 마지막 결판을 낼 수밖에 없다”하시는 것입니다. 이 죽든지 살든지라는 것은 최후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자칫 잘못해서, 한 발 잘못 디디면 죽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조금 잘못하면 매를 때리지만, 아주 잘못하면 죽든지 살든지 둘 중에 하나로써 결판을 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고비에 들어가기까지 잘못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심판받아야 할 처지에 도달하는 것은 최후의 경우입니다. 사람의 타락이 극도에 이르러 있어서 이 극도의 타락에 이른 사람을 건질 때에는, “너, 이 타락으로 그냥 죽든지, 아니면 이 살 길을 취해 살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라”하고 두가지 길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이 이렇게 죽고 사는 문제에까지 이르렀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다시 보는 것입니다. 이 죽고사는 문제에 이르기 전에 이미 누차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사를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조그마한 것으로 하나님이 “나는 싫다”하셨을 때, “아, 그러면 아니해야지”했어야 하는데, “나는 싫다”하시는데도 그냥 하고, “나는 싫다,싫다”하시는데도 그냥 하고, “이놈, 내가 싫다고 하는데 왜 그래?”하셔도 그냥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것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했구나”하고서 매질을 가하시는데도 그냥 밀고 나가다가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깊이 빠져들어가니까 나중에는 그러면 무엇이 더 중하냐 하신 것입니다. “네 생명이 중하냐,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중하냐?”하시면서 죽고사는 문제로 한번 해보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무서운 진노 가운데 빠져들어가도록까지 우매하게 밀고 나간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믿음이 없는 까닭에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결국은 죽고 사는 문제에 딱 맞닥뜨렸습니다.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며 살지않고 네 고집대로 하다가 죽겠느냐?” 이제는 제 고집대로 할 자는 죽어라 그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자신이 구하는 본래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항상 제가 좋으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런 행동을 하는 자와, 나는 더이상 교제 않겠다 그것입니다. “이제는 가거라. 쓰다고 네가 뱉으니 나도 너를 뱉아버리겠다” 둘 중에 하나로 결판을 짓겠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 모세의 구원 선언
그때 이 백성 가운데 ‘이제는 안 되겠다’하고 “하나님, 우리를 이렇게 징벌을 하시니 참 잘못했습니다”하고 마음으로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도리를 보고서 살아야 겠다고 각성한 사람이 있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만큼 각성한 사람이 있었겠는가는 좌우간 성경의 이야기대로만 보면 모세가 장대에 구리뱀을 달아 놓았습니다. “자, 너희들은 뱀이 나와 지금 물려 죽게 되니 잘못했다고 하는구나. 원망을 한 때문에 당하는 것을 인정하는구나. 그러니 이제 살길을 낸다”-잘못 한 것을 인정 않고 그대로 원망을 계속했더면 살길을 낼 것도 없이 그냥 다 쳐버렸을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살 길을 낸다. 자, 장대 위의 구리뱀을 쳐다보아라” 평소에 거짓말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던 모세가 전달하는 말을 그들은 들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장대를 세워 놓고 선언하기를, “자, 하나님께서 이것을 쳐다보면 산다고 말씀하시고 이것을 만들라고 하셨다. 그러니 누구든지 이것을 쳐다보면 산다”고 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빼놓고 그저 “야, 너희들 이것만 쳐다봐라, 그러면 산다”하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한번은 그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평소에 그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권위를 승인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물을 주랴?”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내가 너희에게 물을 주랴?”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결정적으로 모세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말이 되었습니다. 모세와 같이 일생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산 사람이 왜 이런 실수를 했느냐 하면, 분노 가운데서 이런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놋뱀을 본 사람들(1) - 잘못을 분명히 시인한 사람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는,“아,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구나. 우리가 원망을 해서 이렇게 죽을 뻔했는데 살리시는구나”하면서 감사히 여기고 쳐다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길을 가려 하지 않고 그길을 원망한 이 사람들은 아파서 몸이 붓고 막 죽어가는 그때에라도 마음으로는 이것이 하나님을 거역한 때문이로구나 하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살 길을 하나님이 보이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반가운 소식을 믿고 그것을 쳐다보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들 중에 제일 중요한 분자가 되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이야 잘못한 것이지만 그 잘못한 것을 얼마나 깨닫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철저하게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 원망한 것이 잘못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들이 모세에게 “하나님과 당신을 원망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잘못의 전부가 아니고 원망을 할 정도로 마음의 수준이 낮아 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왜 자기들이 원망을 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가라고 하시는 길을 가기 싫다고 한 것 아니냐?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별로 관련도 닿지 않는 40년 전의 애굽 이야기를 하며 핑계를 댔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애굽에서 올려왔느냐고.” -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40년 전의 일까지 끄집어내서 핑계를 할 정도로 원망을 하는데 아주 조직적이요, 그것에 길이 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원망할 재료를 끄집어내고 끄집어내다가 40년 전 것까지 끄집어낸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원망을 늘 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아마 그 원망도 아주 기술적으로 하는가 봅니다. 원망을 기술적으로 하는 사람이 더러 있기는 있습니다. 항상 불평을 하는 사람은 불평할 재료가 없는가 하고 봤다가 아무리 보아도 없을 것 같으면 옛날, 3년 전 기와집에서 묵은 고추장 먹던 일까지라도 끄집어내서 원망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3년 전 이야기가 아닌 40년 전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원망을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의 대다수는 애굽과는 상관도 없어서 애굽에는 가 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애굽에서 일어난 일은 겪어 보지도 못한, 이 광야에서 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 하는 소리가 중요한 원망으로서 나왔다면 아직도 이스라엘의 어른들, 장로들의 생각이 그러한 식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들의 신앙 - 이스라엘 신앙의 정화
그러나 이런 것은 잘못이라고 곰곰이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구나, 우리가 갈 길은, 우리의 운명은 앞에 있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는 아름다운 땅이 있다. 거기에 우리가 건설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게 지난 일만을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이 이후에 오는 유대 사람들의 신앙에 가장 정수한 중요한 부분을 형성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사상, 즉 유대주의의 정화인 가장 중요한 사상은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이러한 신앙의 전통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안 믿는 유대교인들이나 유대교의 대학자들도 유대교의 가장 정화라고 할 높은 사상의 하나를 끄집어낼 때에는 이것을 끄집어냅니다.
세계의 어떤 나라에서든지 자기네의 역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역사라는 것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계 어떤 나라든지 항상 과거를 화려하고 찬란했던 시대로 꾸며서 이야기해 나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스스로 4천년 문화 민족이네, 5쳔년 문화 민족이네 하면서 -과연 4천년이나 5천년이 됐는지 확실치 않지만- 과거를 찬란하게 이야기합니다. 앞으로 무엇이 될는지는 이제 두고 보아야 하니까, 앞으로 몇 천년의 문화 민족이 될 사람들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계의 어떤 민족이든지 항상 과거를, 특히 과거에 번영했던 시기를 화려하게 꾸며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과거의 화려하고 찬란한 시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다는 장차 올 화려한 시기를 이야기하면서 과거는 과거에다 붙여 놓습니다. 그것은 특색있는 사상으로서 현대에까지 그렇게 내려왔습니다. 유대교의 위대한 학자들 혹은 유대교의 시오니스트들의 생각 가운데는 그 사상이 늘 있습니다. 즉, 역사를 그렇게 해석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해석이 아니고 유대교 학자들의 해석입니다. 자기네 역사의 특성을 해석할 때 그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면 그런 독특한 사상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오늘 읽은 사건에서 연유합니다. 처음 출애굽한 사람들 가운데는, 과거 애굽의 생활이 노예 생활이었을지언정 더러 좋은 것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 애굽 사람들 가운데는 다정한 친구들도 있었고, 인정 많은 사람도 있었으며, 우리가 노예로 고생하고 애쓸 때 패장들과 감독들은 항상 박대를 했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서로 친하게 왕래하는 사람도 있어서 그 사람들이 뒤로는 돌려 빼주기도 하고 도와 주기도 하고 그랬다’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악하고 불의하고 불한당 같은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고 더러는 좋은 사람들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과 서로 다정하게 지내던 그 정은 남는 것이고, 때때로 그 남은 정 때문에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이래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겠다 하는 말을 과거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제 2세대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즉, “무엇 때문에 우리를 그 속에서 데리고 나왔다는 말인가? 애굽으로 돌아가겠다”하는 그 말은 그대로 못하고 묘하게 “무엇 때문에 우리를 애굽에서 올려왔단 말이냐?”하는 소리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 소리는 마찬가지 소리입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게 쑥 들어갔습니다. 불뱀을 만난 것입니다. 뱀에게 물린 뒤에는 “아이구 그런 소리하다가는 뱀한테 물려 죽겠다. 다시는 그런 소리 안해야 겠다.”한 것입니다. “이제는 싫든 좋든 장래를 향해서 가자. 뒤로 가려고 하면 뱀에게 물려 죽을 터이니까 물려 죽느니 앞으로 가서 한번 맞닥뜨려 싸우자. 그래서 쳐부수고서 나라를 건설해 보자.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라가 아니냐?” 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진하기 시작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 기초적인 종자가 되는 신앙이 나중에는 메시야 사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제는 좋든지 나쁘든지 장래를 향해서 전진하자 하는 이러한 생각을 여기서 실마리로 가진 사람들이 그 후에 시대를 통해서 차츰차츰 그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을 때 그 사상은 메시야 사상으로 빛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땅에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역사적인 발전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인류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인류를 왜 만들어 내셨느냐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저희들 멋대로 나라를 세워 가지고 저희 문화를 건설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것을 쳐부수어 가면서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경영하시는 나라가 있으니 그 나라를 땅 위에 세워 그것이 미미한 데서부터 충만한 데로 도달하기까지 역사를 만들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을 체현하시기 위해서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 기구와 그릇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사 애굽에서 건져 내셔서 끌고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기에 가장 가까운 사상, 비록 그러한 크신 하나님의 경영은 다 알지 못하더라도 희미하나마 그 종자라도 가질 만한 신앙을 가진 이 사람들이 제일 우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첫째로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놋뱀을 본 사람들(2) - 단순 소박하게 믿은 다중
그 다음으로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겠는가? 아파서 죽겠으니까 우선 나으려고 뱀을 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파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뱀을 달아놓고 “자, 쳐다보아라. 그러면 낫는다”하니까, “아이구, 우리 모세 선생님이 뱀을 쳐다보면 낫는다고 하시니 나는 쳐다보고 나으련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슨 과거를 헤아려 보고, “내가 잘못했다. 원망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원망할 것이 아니다. 40년 전의 그 원망 때문에 우리의 부조들이 광야에서 다 넘어졌는데, 우리가 또 이런 짓을 했구나”하고 회오한 것은 아닙니다. 거기까지 멀리 생각이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아파서 그냥 죽겠는데, “이것 쳐다보아라. 쳐다보면 낫는다”하니까, “예, 쳐다보면 낫는다고 했으니 쳐다보겠습니다”하고 단순 소박하게 믿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그룹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들도 그것을 보았을 때 나았겠는가? 누구든지 쳐다보면 다 나으리라고 했으니까 그대로 한 이상 분명히 나았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 사람들이 뱀에 물린 것은 원망해서 물렸습니다. 또 구리뱀을 쳐다보라 하니까 쳐다보고 나았습니다. 단순 소박하게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해서 나았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많은 층을 형성하는 타입입니다. 누구인가 지도자나 어른들이, 또는 그들 중 사상성이 강한 사람들이 만일 그릇되게 인도하고 원망하면 그냥 덩달아서 원망을 합니다. 누군가 그들이 신뢰할 만한 40세 이상 된 장로들이 일어나서, “무엇 때문에 우리를 애굽 땅에서 올려와 가지고 이 고생을 하게 하느냐, 이 박한 식물만 밤낮 먹고 살라고 하느냐?”하면서 “이것 안되겠다. 이것 안되겠다”하며 사두레 공론들을 하면, 그 공론을 듣고는 “그렇지,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나,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해?”하면서 덩달아 원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했던 까닭에 뱀한테 물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쳐다보면 산다 하니까 쳐다보고서 나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인도하는대로 따라가는 양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리 가자면 이리 가고, 저리 가자면 저리 가는 사람들입니다.
다중의 뇌동 심리
이런 사람들이 항상 대중을 형성하는 것인데, 대중이라는 것은 자기가 강한 의사를 다 표시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강력한 의사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에게 그 의사를 선포하고 전달해서 선동하면 그냥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단순하지만 단순한 만큼 위험성이 많습니다. 어떤 위험성을 가지느냐? 이들을 그릇되이 인도하면 그릇된 인도를 대중의 힘으로 밀고나가 크게 그릇되이 변화시킬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항상 군중의 뇌동심리에 가장 잘 영합하는 인물들입니다. 뇌동심리란 - 우뢰가 한군데서 “우르르”하면, 다른데서 “와아-”한다고 해서 그것을 우뢰 뢰(雷)자, 한가지 동(同)자 해서 뇌동, - 이 뇌동심리가 이런 사람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한 쪽에서 와아-하니 일어나서 강력한 사람이 상당한 이론을 들어서 떠들어 대면 우-하니 좇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대중을 형성하는 까닭에 이 대중은 그릇된 인도에도 쉽게 뒤따라갑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가 하면, 첫째 기독교 안에 대중의 현상은 이런 사람들이 빚어내온 현상이라는 것과, 둘째는 그런고로 이 대중의 현상, 다수 대중의 현상이라는 것이 반드시 정당하냐 하면 반드시 정당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로 결국 대중은 대거해서 그릇된 데로 갈 가능성이 심히 많고, 또 역사를 통해서 보면 때를 따라서 대중은 늘 그릇된 데로 간 것이 나타납니다. 기독교 안에 이런 일이 있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런 요소가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의 손 아래에서 지도를 받을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지도자의 손이 멀고 그 소리가 귀에서 멀면, 목전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의 선동에 귀가 솔깃하기 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위대한 지도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있었고 그의 위대한 교훈이 있었지만, 모세의 소리는 멀고 장로나 원로들, 혹은 나이 많은 사람들의 선동은 가까왔습니다. 가까운 선동에는 따르면서 참으로 훌륭한 지도자의 지도에 대해서는 원망을 했습니다. 왜 원망을 하는가? 이 원망을 하는 이유는 인간의 그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이 그대로 발휘된 까닭입니다. 이러한 대중을 형성하는 그룹은 인격적으로 우수하지 못한 까닭에, 즉 그들의 해석도 심오하지 않고 감정도 부허해서 요동하기 쉬우며 그 의지라는 것도 비교적 연약한 까닭에 간단한 자기의 해석에 의해서 움직이고 또 자기 속에 있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 좌우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탐욕에 지배되기 쉽습니다. 이것들이 이 대중의 뇌동 현상에 꼭 나타나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탐욕이 어떠한 형세로 나타나느냐 하면 종교를 이해의 문제로, 공리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런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개인으로 보면 종교적인 이기주의, 즉 종교를 이기주의 아래에서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요, 전체로 보면 공리주의, 즉 다중이 종교를 이용해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대중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 큰 층, 아주 굉장한 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중이니까 제일 많은 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기독교인의 대다수가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즉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강력한 인격을 갖지 못하고 비교적 박약한 인격을 가진 까닭에,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성신을 의지해서 완전히 정복했다는 기독교의 복음의 참된 자태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큰 도리에 참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목전의 가까운 이해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지도자의 언설에는 귀를 기울이나, 참으로 심오하게 계시를 가지고 가르치는 그것에는 귀를 기울이기 싫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기독교의 대세
오늘날 세계의 기독교인의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이런 사람들 아닙니까? 그래서 세계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과 소위 국제주의적인 교회 정치운동의 간판을 내세우고 혹은 그것을 가지고 선동하면 그냥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 이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세계 기독교의 대세를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것도 그런 운동입니다. 이렇게, 다수의 사람들이 뇌동 심리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비교적 신앙도 단순합니다. 어떤 조그마한 지역 사회에 가서,가령 한국이라는 사회에 와서 거기의 주도적인 세력이 무엇인가 알면 그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한국의 장로교의 주도적인 세력은 과거에 전통적인 근본주의 였으니까, 그 교회가 전통적인 근본주의이면 교인은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지 교인에게 근본주의 신앙이 마음 깊이 다 박혀서 따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수를 따라가는 뇌동 심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근본주의를 주욱 유지해 가던 교회가 삼분 사열이 되어가는 이유는 그런데에 있듭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말씀의 깊은도리가 전달되지는 않고, 안심 입명하고 마음에 환희와 평안을 얻으며 죽어서는 천당에 간다는 그러한 종교적 공리주의가 계속 이야기 되어지니까 그들은 그것만 붙들고 나간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그것은 죽은 후의 이야기이니까 그 이야기만 하는 것은 의미없으니 살아 생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해서, ‘살아생전에는 남 못지 않게 잘 살아야겠다. 그러면 잘 살기 위해서는 뒤에 처진 못난 사람 되어서는 안 되겠다’한 것입니다.
왜정세대에는 사람들이 꽉 갇혀 있어 국제주의라는 것은 별로 생각할 수가 없어서, 기독교 안에서도 국제주의라는것은 아주 극소수 이외에는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마자 서양 문물이 막 들어오고 세계가 축소되어 비행기만 한 번 타면 금방 12시간 안에 세계의 반절을 날아가게 되니까,“자, 그러면 우리도 세상에 나가서 출세해야 하겠다”하는 출세의 욕구가 생겼습니다. 이것이 탐욕입니다. 출세를 하려고 하는 데 다른 재주가 없으니 기독교를 어떻게 발판 삼아서 해야 하겠다 한 것입니다. 이러할 때 돈 많고 세력이 큰 나라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손을 내밀면서, “우리가 그렇게 해줄 터이니 우리하고 함께 하자”하면, 얼씨구나 좋다 하고 손을 잡았습니다. 이때 전통적인 주장을 가진 사람들은 이들에 대해서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며 충돌하여 갈라졌습니다.
그러면 전통적인 주장을 하며 갈라진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것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차츰차츰 그리로 쏠려 갔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또 갈라지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또 갈라질 것입니다. 자꾸 분열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앙이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소수의 사람 이 외의 대다수가 가진 공리주의라는 것은 결국 과거에 가지고 있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뀌는 것입니다.
처음의 종교적인 공리주의가 이번에는 세속적인 이기주의로 변해 나가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꾸자꾸 갈 것입니다.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앙을 그릇된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데는 늘 주동 역할은 하지 못해도, 그릇된 방향으로 밀고 나가는 지지 세력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주의할 것은, 이 그룹들이 나중에 이스라엘 신앙을 형식주의화하고, 형성주의화하는 거대한 조류를 뒤에서 떠받치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또 이 그룹들의 대표적인 예가 나중에 예수님 시대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다 따라다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일단 빌라도의 법정에 있어서는 제사장들이 돈을 주고 선동했을 때,“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하고 다 그렇게 소리를 지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쟁-각성한 개인이 하는 일
그러므로 이제 이런 사람들은 엄하게 단속을 하고 바르게 지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연약한 자가 강건해집니다. 항상 성경에서도 “강건하여지라. 주 안에서 장부가 되어 강건해지라.깨어라”고했읍니다.(고전16:13참조). 성경에서“깨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것은 연약한 사람들에게 “너희는 바른 정신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바로 배워라”하는 것입니다.“깨어라. 각성해라” 각성하려면 각성할 재료가 있어야 합니다. 그냥 저절로 각성이 안됩니다. 각성할 만한 조건들이, 비판할 만한 재료들이 자꾸 들어가야 합니다. ‘아,이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것을 깨우쳐 주어야하고, 좌우간 깨어 가지고 장부가 되어서 튼튼해지고 강건해져야 할 것입니다.
각성이 없는 사람들이 군중을 이루면 강한 세력은 만들지만 하나님 나라의 전쟁에 있어서는 세력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쟁은 하나하나가 각성을 하여 싸우는 것이지 한꺼번에 와~ 몰려가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몰려가는 사람이 참된 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용사들이 앞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자꾸 깨달아 가야만 합니다. 그런고로 교회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는다 하는 문제에 대해서 주의를 해야 합니다. 많은 수가 다 각성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 다중을 형성하는 층이 바로 뇌동 심리의 층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 층은 그러므로 속화하기 참 쉬운 것입니다.
놋뱀을 본 사람들(3)-완고한 사람들
그 다음에 또 하나 제3의 그룹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 제3의 그룹의 극단적인 예를하나 들면, 죽은 사람은 고집을 부려서 그만 죽었으니 말할 것도 없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도“그렇게 하기 싫다”하고 버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지독하게 완고한 사람들로서, “그런 어리석은 소리 말아라. 장대에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는데, 아니 뱀한테 물렸는데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면 사느냐?”하면서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이시고 많은 지혜를 보이셨으니까 기적을 믿는다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끝까지 그럴 이유가 없다고 자꾸 버티는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최후에는, 주위에서 “밑져야 본전 아니냐? 밑천 들 것 없으니까 한 번 쳐다봐라. 쳐다봐서 아니면 아니라고 네가 주장하면 되지 않느냐?” 하면서 자꾸 설복을 하니까, 자기 생각에도 그것이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이 되어서 그것을 쳐다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나았겠습니까, 아니면 믿음이 없이 그렇게 쳐다보았으니까 죽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쳐다면 낫는다고 했으니까 좌우간 쳐다만 보았으면 그 사람은 확실히 나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어떤 층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쳐다보아서 나았는데, 쳐다보아 나은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희한한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우연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만 쳐다보아서 나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버티던 여러 사람들이, 쳐다보면 낫는다고 주위에서 계속 거드는 바람에 쳐다보고 나은 까닭입니다.“아, 나도 당초에는 곧이 듣지 않았는데, 사실 뭐 어쩌다 쳐다보니까 낫기는 나았어. 그런 것을 보니 분명히 거기에는 뭐가 있어.”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이한 감-‘아, 그것 참 신기한 일이다’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완고가 최대한도로 부서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완고해서, 소위 합리주의자로서 그럴리 없다 하고 버텼지만, 그러나 어떤 계기에 쳐다본 것으로 나아, 그 완고가 깨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쳐다본다는 것은 눈에 띈다는 것이 아닙니다. 쳐다보아야 합니다. 아파서 죽게 된 사람이라도 눈을 들어서 그것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저 만큼 있는 것일지라도 눈을 들어 쳐다보고 나은 것이지, 그냥 눈에 저절로 띄었더니 나아졌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성경에는 “쳐다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쳐다 보라는 것이니까, 각각 자기의 의지를 거기에다 행사해라 그것입니다.
이적 신앙, 은혜 주신 목적 깨달아야 함
그것을 쳐다보고 나은 사람은 ‘그것 참 희한한 일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이며, 맏음이 없는 자라도 여기서부터 믿음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안믿던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기적에 접촉하게 해서 만일 나았다고 하면 그가 믿음 있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믿음이 들어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 여러분은 그전에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일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8:26). 그러한 제자들인데 풍랑이 일단 잔잔해지니까,“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마8:27)하면서 그 다음부터는 기이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그 사람들의 믿음에 보탬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시발점으로해서 그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곰곰이 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도 최소한도 구리뱀을 쳐다보기 위해서는, 보면 낫는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도 저것도 없는데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거기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되고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발전하지 아니하면 그 기이한 사실에 대한 자기의 감격이나 희한감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엷어지고 나중에는 그것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다수가 또한 그러했습니다. 과거 하나님의 많은 영광을 보고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이 40년을 광야에서 방랑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크신 선언으로,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했다.”(민14:22)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큰 은혜를 받고 또 받았어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아까 말했던, 그저 하라는대로 하는 그 층도 문제이지만, 이 자꾸 잊어버리는 층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일반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잊어버리는 경향은 누구에게든지 있는 것이지만, 이런 경향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그의 안에서 믿음이 발전하고 장성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았을지도 그것으로 끝날 뿐 구원은 받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받은 자의 주축이 되어 하나님의 그릇으로써 유용하게 쓰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그릇으로 끝까지 유용하게 쓰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도, 즉 피동적인 그릇으로서도, 다시 말하면 일반은총의 대상으로서도 하나님 나라에 사용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도 쓰시고 마른 막대기라도 쓰십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섬기겠다는 생각이 없는 동안에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역군 노릇은 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밤낮 끌려 다니는 일꾼밖에 안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려고 기회를 주셨을 때, 그리고 마음 가운데 그러한 각성이 생기고 희한함을 느끼며 감사함을 느끼게 하셨을 때, 그것을 그냥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 지나쳐 버리면 그것은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그것으로 ‘왜 하나님은 나를 낫게 하셨느냐?’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은혜는 감사하고 고맙고 좋다 하고 그 은혜를 가지고 향락하고 사는 것으로 끝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많은 신자가 하는 짓입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의미는 “왜 은혜를 주셨는가?”하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은혜 주신 목적을 깨달아서 그 목적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을 주셨으면 “아, 건강을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하면서 그저 건강을 향락하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왜 건강을 주셨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나에게 돈을 주셨다 지식을 주셨다 어떤 사회적 위치를 주셨다고 할 것 같으면, 왜 무슨 목적으로 이것들을 주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로 향해서 가야 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신앙이 제대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으면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만 가지고서는 신앙이 안됩니다. “감사합니다”하는 것은 느끼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것을 제3의 그룹에서 보는 것입니다.
결어 / 환란의 유익
마지막으로 우리가 종합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사람들의 신앙은 그것을 봄으로 몸이 나았다는 사실입니다. 뱀에게 물리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뱀을 보내어 뱀으로 하여금 그들을 물게 하심으로 그들을 물게 하심으로 그들에게 없던 신앙을 일으키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환란이 없었던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하는 시편 기자의 말과 같이 그 환란 속에다 다른 것으로 바꿀수 없는 중요한 은혜를, 즉 믿음이라는 것을 주셨던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왕왕 환란이라는 보자기에 싸서 보낸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일단 환란의 보자기를 거두어 가 버리시면 남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믿음이 남았으면 그 믿음은 다시 장성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씨를 심고 가노라고 그랬으니까 땅을 한 번 파는 아픔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만, 한 번 파서 심었으면 그 다음에는 거기서부터 올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이 기적의 신앙은 거기에서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구원을 받은 거룩한 목적을 확실히 인식하고 그 목적을 향해서 장성해 나아가는 신앙으로 확연히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계기로 이제는 허락하신 땅으로 쳐들어갈 수 있는 용기와 확실한 목적과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자신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원하셔서 뱀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압 땅에 올라가서 모세는 신명기의 그 교훈을 다시 한 번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또 끝난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의 교훈이 베풀어진 후 발락과 발람의 사건이 나옵니다(신1:4,5민21:33-22:2). 이 앞으로 당하는 경험에 있어서 신앙이 있는 사람들에게, 즉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에게는 다시 닥칠 발람의 올무에 어떻게 해야 승리할 것인가를 여기서(불뱀 사건)부터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발람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절대의 계획하에서는 선지자로 움직임을 받아서 이스라엘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나쁜 계책의 올무에 걸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태를 바라고 나아가는, 그 특수한 목적을 향한 그들의 각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 문제에 의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때 큰 은혜를 받았으면 그것이 그대로 있으면 안됩니다. 거기서부터 그가 장성해 가야 그 다음에 오는 바람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 신앙은 구원의 신앙의 확실한 자태를 드러내는 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이었나? 왜 우리를 이렇게 건져내셨나? 왜 우리를 이끌고 나오셨는가? 이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배우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민 21:4-9)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본래의 목적이 사람에 의하여 흐려짐
어제 공부하던 것을 계속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무신앙의 연고인데, 이 무신앙이란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건져 내셔서 이끌고 나가시는 본의에는 다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은 신앙으로만 역전 역투해서 앞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원수를 쳐 물리치기도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본래의 뜻이 그들을 통하여 나타나도록 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들의 생활과 함께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것을 세우고, 그곳의 이교적인 그릇된 것을 훼파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본래의 목적이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역사로 말미암아 흐려지지 않게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신 본래의 목적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흐려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본래의 거룩한 목적을 알 수 있게끔 행동하거나 그것을 알 만한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타낼 만큼 세상이 성격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일을 하나 하셔야 할 터인데 그것이 곧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다는 사실이고, 이 택하신 백성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세계를 만드신 본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고 소위 문화라는 것을 지어나가는 것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증명하듯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고 또 이 세상 사람들을 쓰셔서 하나님이 가지신 뜻을 땅 위에 이루시려고 한다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역사나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땅에 만들어 놓으셨느냐 하는 것을 바르게 가르쳐 줄 만한 일을 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나라가 일어나서 이 세상에서 큰 세력을 잡고 굉장한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아, 과연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저 나라는 저렇게 애를 쓰고 가는구나.’하고 인정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게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하는 일을 보면 비록 거기에 기독교가 있고 종교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을 만드신 본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일을 합니다. 오히려 그 뜻을 반대하고 그것을 은폐하며 그것을 거짓것으로 꾸며서 다른 것이 있는 양으로 보여주는 일들을 해 나갑니다.
형식적인 기독교 -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드러내지 못함
이것을 다른 방면에서 보십시다. 이 세상에는 기독교를 가진 기독교의 나라라는 국가도 많습니다. 그러면, 영국이나 혹은 유럽에 있는 많은 나라뿐만 아니라 가령 미대륙에 있는 나라들이 하는 일을 볼 때, 그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또 그 국가를 형성해 나가고 국가의 문화 생활을 하는 데에 기독교적인 요소가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과연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저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가고 있구나’하고 생각하게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사람들의 동상이나 기념비 같은 것이 길가에서도 보이는데, 그것을 보면 기도하는 모양도 있고 혹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 건너와서 나라를 개척했다”고 하는 말을 볼 수도 있습니다. 또 미국 돈 10센트짜리나, 25센트짜리나 50센트짜리를 보면 “인 갇 위 트러스트” 즉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명료하게 쓰여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에 과연 ‘이 나라는 기독교 국가다’하는 것을 다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봄으로써 우리는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과연 이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리셔서 복을 주셨다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꼭 미국까지 갈 것 없이 우리 한국에만 와 보더라도 이런 것을 느끼는 일이 있습니다. 요사이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한 뒤 하는 말이, “한국에 가보니까 그 나라는 기독교 국가 같더라. 기차를 타고 써억 지나가면서 차창 밖으로 멀리 시골을 보면 사람들이 사는 집은 납작한데 큰 집이 서있는 것은 예배당하고 관청뿐이더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배당은 빨간 벽돌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큼직큼직하게 지어져서, 조금만 가면 또 예배당이 서있고 조금만 가면 또 예배당이 서있으니까 ‘그것 참 굉장하구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이나 미국의 큰 예배당들과 또 모든 행사나 사람들의 말투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는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닌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하면 그것을 봄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알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화가 아무리 기독교적이고, 표면에 그것을 칠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이 본래 사람을 내신 거룩한 목적과 뜻을 알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닌 딴 것을 늘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마귀가 이 세상 나라의 여러 가지 것을 손으로 잡아 흔들 때에도 항상 무서운 모양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광명한 천사인 체하고 나타나서 “나도 기독교인이다”하면서, 기독교의 행사를 화려하게 꾸미기도 하고 기독교적인 모양을 여기저기 세워 놓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상을 하나 세우려 한다고 해서 마귀가 저 기도하는 상을 세워서는 안되겠다 하고 뚜드려 부수려 하지 않습니다. 마치 낚싯밥을 주듯이 어떤 정도만큼은 기독교적인 요소를 다 줍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받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아 우리는 기독교 국가다. 좋다’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조그마한 예배당에 있다가 열심으로 기도하고 열심으로 부흥회를 하고 돈을 모아서 벽돌로 빨간 예배당을 큼직하니 하나짓고는 ‘아,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 하난 크게 지었으니까 은혜 받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네 교회가 무엇을 이룬 것으로 생각하고, 어떤 훌륭한 경계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해서는 그 속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을 세우신 거룩한 목적이 무엇이라 하는 것을 알게 해주는 사실이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람을 지으신 본래의 목적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사람이 보기 좋고 듣기 좋게 그러한 형식만을 꾸미고 형식적인 기독교 행사나 벌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 나타내신 방법 - 이스라엘의 선택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본래의 목적을 바로 나타내어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와는 다른 일을 한가지 하셨습니다. 그 일을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하나 세우셨습니다. 그 계획은 사람들이 방황하며 제멋대로 가는 데에서 어떤 한사람을 뽑아내신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그에게 나타내시고 그 하실 일에 대해서 먼저 큰 광경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을 차츰차츰 번성케 되도록 보호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멀리 떠난 상태에서 애굽의 종 노릇을 했지만, 이번에는 그들을 그러한 상태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을 알리시되 “내가 너희들을 택한 것은 너희들만 잘 살게 하려고 하거나, 너희들이 종노릇하는 것이 불쌍해서 행복스럽게 하려고 땅 하나를 준비해서 거기에 들어가 평안하게 먹고 즐겁게 살라고 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가나안이라는 땅에 가서 그곳의 생활, 즉 나를 반대하고 나와는 거리가 먼 그들의 생활을 쳐부숴 버리고, 거기에다 한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 사람의 생활 상태를, 사람의 역사를 만들어 내라.”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고 사회 생활을 하며 문화를 건설하여 나가는 그것이 내가 원하는 그대로가 아니고 오히려 나를 반대하고 나를 알려고 해도 알지 못하도록 가리는 일을 자꾸 하는 것이니까 너희는 그런 것을 뚜드려 부숴라. 그래서 나를 잘 알 수 있게 하여라”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 가운데 같이 거하는 내 나라를 거기에 세워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어, 하나님의 깊으신 계획을 이루어 나가시려고 이 백성을 불러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아는 믿음이 필요했던 이스라엘 백성
그러므로 이 백성들은 광야의 행진에서 하나님이 일러주신 그 크신 계획을 늘 마음 깊이 생각하고 있어야 했을 뿐 아니라, 대체 그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세워 나가시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우선 당장에 필요한 것은 알고 있어야 했었습니다. 그것이 크게 한마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이처럼 지식이 필요하고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이 그저 믿습니다 하는 그런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중에 떠 있는 부허한 종교 감정입니다.
믿음에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 왜 믿어야 할 것인가, 또 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은, 내가 왜 믿어야 할 것인가를 알았다면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무슨 믿음이 필요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 내신 거룩하신 목적과 뜻을 아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날의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건져 내셨느냐 하는 것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있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을 몰라도 믿음인 줄로 알면 큰 야단입니다. “다만, 예수님만 믿고 내가 천당 갑니다”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신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의 믿음이 되려면 구원이 뭔가를 알아야 합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믿음은 구원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믿음에는 단계가 있음
그런데 구원의 믿음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초보부터 아는 것입니다. 그 첫 단계를 알고, 그 다음에 그것이 참으로 구원의 믿음일 것 같으면 거기서 구원에 대해서 점점 더 알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더 알아지면서 자꾸 믿음이 장성해 나가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초보가 뭐냐하면, “나는 죄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건져 내셨다.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영생의 나라로 옮기셨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알고 믿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 꼭 그렇다고 증명할 도리는 없습니다.
그것을 믿어서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하려면 처음에는 그 정도로 알았지만 그것이 차츰차츰 올라가서 더 많은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많은 지식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왜 나를 건져내셨느냐를 아는 것입니다. “왜 나를 건져내셨나, 무슨 목적이 있으신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거기에 도달하는가?” -이런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모르고 밤낮 ‘하나님은 나를 건져 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하면 그것이 구원의 믿음인지 또는 소위 그런 정통 교리를 그냥 받아 가지고 그것만 밤낮 외고 있는 그런 믿음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그러한 몇 가지 조목만을 나열해서 그것만을 묻고 대답하고 그것만 졸졸 외고 있습니다. 그것만 밤낮외고 있다고 해서 구원의 믿음이 있느냐 하면 구원의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사도신경을 다 왼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의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도신경을 외고 있으면 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런 조건은 없습니다. 물론 사도신경을 보면 복음의 일련이 그 안에 다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초적인 것만을 밤낮 외고,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는 자기식 종교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구원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노예 상태 가운데에서 그 크고 희한한 손으로 그들을 건져내사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로 들어와서 시내산 밑에까지 이르게 하시고, 거기서부터 이제 하나님께서 뜻을 나타내사 민족으로 조직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을 경험했습니다. 이 첫째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신 것과 기적을 행하신 것을 말합니다. 둘째의 큰 경험은, 과연 바로가 그만 할수 없으니까 “나가거라”해서 모세가 그들을 다 끌고 나간 경험입니다.
셋째의 큰 경험은 바로의 군대가 뒤에서 막 몰아오는데, 하나님께서 진 앞에서 인도하던 거룩한 구름을 진 뒤로 오게 해서 빽빽이 둘러 싸게 하므로 바로의 군대에게는 어두움이, 이스라엘에게는 광명이 있게 구별해 놓으신 경험입니다. 그 다음의 큰 경험은 홍해를 가르시고 그 안으로 지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애굽 군대도 홍해 속으로 들어와서 자기네와 똑같은 경험을 할 줄 알았더니 그만 온 물이 딱 합쳐지면서 그들은 홍해를 건너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 큰 경험입니다. 그 뒤에는 마라에서 물이 써서 먹을 수 없을 때 물을 달게 하여 먹여 주신 경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신 구원의 지식
이렇게 시내산 밑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러가지 큰 경험을 주셔서, 이 경험들이 하나씩, 둘씩 쌓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을 그 쌓이는 경험 가운데서 하나씩 둘씩 더 알아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초보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더 많은 것을 알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하시는 분으로만 알았더니, 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백성을 구별하사 애굽 백성에게는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신 것까지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이 언약하고 약속하신 바를 꼭 그대로 지켜주시는 분이라는 사실도 경험했습니다. 즉, 애굽 백성의 장자와 첫것은 다 죽이시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문설주에 피를 바르게 하사 그 피를 보시고 넘어가신 사실을 역력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나가실 때 인도해 나가시는 거룩한 방법이 있고 거룩한 계시가 있어서 그것을 도무지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방법을 분명히 보여 주사 백성이 혼미하지 않고 혼동하지 않게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확실한 사실을 또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 크신 손으로 홍해를 가르사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 내셨지만, 애굽 군대는 뒤쫓아 들어가다가 물이 합쳐져서 모두 죽게 하신 심판의 하나님이신 사실 -하나에게는 심판이요 다른 하나에게는 구원이라는 사실, 즉 홍해의 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희한하게도 하나님을 찬송할 조건이 되었으나, 애굽 백성에게는 죽음의 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경험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조건을 가지고 하나에게는 죽음이요, 다른 하나에게는 삶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기묘한 분이심을 자꾸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쓰디쓴 현실이라도 당신이 원하시는 거룩하신 뜻을 한번 나타내실 때에는 달게도 만드실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 쓴 것이 그 백성에게 부닥치게 하시면서 쓴 그것을 달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쓴 물에 부닥치는 것이 쓰지도 않고 달지도 않은 맹맹한 물에 부닥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쓴 물에 부닥쳤는데, 그 쓴 물이 달게 되었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 고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물이 없는 곳에 부닥쳤을 때 그곳의 바위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셔서 그 많은, 거의 300만이나 되는 대중이 다 먹을 수 있게 풍요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물없는 메마른 땅을 갈지라도 물을 내시고, 먹을 것 없는 메마른 광야를 갈지라도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시고 또 허락하신 것은 다 이루어 주시며 또 그것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필요할 때에 어김없이 내주신다는 것을 경험해 온 것입니다.
이 경험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지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경험을 통하여 여러 가지를 보게 하여 주시되, 여러 가지 면을 같은 차원에서 알쏭달쏭하게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보여 주시고 그 위에서 또 하나를 보여 주셔서 이렇게 자꾸자꾸 하나님의 오의를, 깊은 뜻을 더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로서 효과가 있으려면 그냥 다양하게 잡다하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 대한 해석과 반성을 할 때 -거기에서 하나님 당신을 보여 주시는 것을 배워갈 때- 어느 때는 이렇게도 하시고 어느 때는 저렇게도 하신다는 것만을 배우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아무 두서없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렇게 하시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토대로 하여 한 단위에서 저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 당신의 속성과 능력과 어떤 분이심을 희미한 데서 밝은 데로, 빈약한 데서 풍성한 데로 끌고 올라가시며 가르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초보 지나면 사명 깨달아야 함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더욱 증가하여 장성해 감에 따라,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이니까 과연 훌륭하신 분이다. 전에 내가 조금만 알았을 때에는 그 부분에서만 믿었더니, 이제는 풍성히 아는 까닭에 그 풍성한 가운데 내가 믿노라’하고 의지한다면 그것이 구원의 신앙의 장성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 이르기까지의 광야 생활 가운데서 이러한 신앙이 장성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으로 더 큰 계시를 내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유치한 이스라엘 백성을 거기까지 끌고 오신 다음에야 비로소,“내가 왜 너희를 건져 냈는가?”하는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 예수를 믿고 초보적인 단계에 있을 때에는, 즉 예수 믿는 기본 도리와 하나님께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한 조건들을 알아서 일정한 위치에 도달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지각이 생겨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어렸을 때에는 젖을 먹지만 차츰차츰 장성해서 일정한 나이가 되면, “너는 이제 사람의 구실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장성인으로서의 깨달음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깨달아서 사람의 뜻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각이 생겨 무엇을 깨닫고 난 다음에 입지를 하여 차츰차츰 자기를 그 방향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은 그리스도교의 도리에서 배우기 이전에 보통의 이 세상 도리에서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자명의 공리입니다.
어렸을 때는 어리니까 어린애 노릇을 해도 되지만, 일정한 나이가 되면 어린애 노릇을 해서는 안됩니다. 어른 노릇을 해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고, 신자도 그렇습니다. 어떤 나이를 먹으면 어른다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어린애 같은 생활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어른다운 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왜 나를 불러내셨느냐,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그러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이냐, 어떻게 생활과 행동을 해야 하겠느냐, 무슨 목표를 가져야 할 것이냐?’하는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어린 아이가 지키는 몇 가지만을 그냥 지키고 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성 못하면 문제에 부딪쳤을 때 반역함
이스라엘 백성도, 비록 이렇게 굉장한 것을 다 아는 사람들은 못될지라도, 장성한 사람답게 그 다음 단계에 필요한 신에 대한 지식과 구원에 대한 지식을 가졌어야만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께 대한 계시는 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경험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계시였습니다. 시내산에서의 계시는 독특하고 풍성한 계시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으로써 알아 나가지만, 역사의 과정 위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특하게 직접적인 계시를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 직접적인 계시가 오늘날에는 성경에 풍성하게 쓰여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우리는 누구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배웠으면 배운 바대로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시내산 밑에서 열흘 길, 240km를 걸어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갔을 때 이제는 허락하신 땅으로 들어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 시내산 밑에서 1년 동안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를 했지만, 그동안 장성해야 할 것을 충분히 장성하지 못한 까닭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문제에 부닥쳤을 때 동요하고 말았습니다. 그 문제란,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에 있습니다.
그러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동요했다는 것은 그 이전의 1년 동안에 준비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크신 계시를 하셨지만 그들은 그 계시에 대해서 잘 깨달아 알지 못하고 그만 애굽적인 형식적인 생활을 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종교를 형식화한 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어라, 어떤 날 수를 지켜라 어떤 제도를 세워라” 하시니까 그런 형식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자세히 배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큰 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크고 많은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의 경험을 통하여 그들에게 깊은 것을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꿈에라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모자라서 배반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준 것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터득하기를 항상 모자라게 터득했다는 말입니다. 바로 배워야 할 것을 바로 안 배운 것입니다.
그러면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보고한다는 이 큰 사실 앞에서 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했겠는가? 그 누구의 말을 들어야 했겠는가?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들어야 했겠는가? 아니면 나머지 열 사람의 말을 들어야 했겠는가? 물론 오늘날 우리가 앉아서 생각할 때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고 따라가야만 했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안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까닭에 40년 광야에서 방랑하면서 그 1세대는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그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마음이 떨리고, 허락하신 땅에 들어갈 생각이 다 없어져서 애굽의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을 일으켰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다음 세대가 일어나서 들어가게 되는데, 이들이 아라바길에서 불뱀을 만난 것은 원망을 한 까닭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 2세대는 애굽으로 되돌아갈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낳은 사람들이 아닌 까닭에 그렇습니다.
애굽에서 낳은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들이 주동은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부형들이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했을 때 그 되돌아가려고 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 광야에서 다 죽은 것을 뻔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못하고, 가기는 가는데 틈만 있으면 반항을 하고 원망을 하려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라바 길에서 또 길이 험하다고 원망을 한 것입니다.
각성 없으면 종교와 본심간에 괴리 생김
이것은 그 사람들이 구원받은 그 큰 내용에 대해서 잘 알지를 못했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도 그냥 가라고 하니까 가는 것이지 왜 가야 하나, 가서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에 대해서 깊은 인식이, 각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깊은 인식, 깊은 각성이 생기게 하기 위해서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때때로 여기저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일러주었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그것은 이제 불뱀을 만난 이후에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이 백성을 모아 놓고 한 자리에서 주욱 이야기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이야기한 것이 과거에는 전연 듣지 못한 새로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전에 한 이야기를 다 모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듀트러노미, 혹은 신명기라 하는 말 자체가 ‘율법을 반복한다’ 또는 ‘율법의 사본이다’ ‘율법을 또 한번 베낀다’하는 말입니다.
율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것이지 둘째 율법이란 말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신명기를 새로운 율법으로 또 준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과거 40년 동안 광야의 여기저기에서 가르친 이야기입니다. 이제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기 전에 잘 깨달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는 까닭에 이미 가르친 이야기를 종합해서 주욱 선언해 나간 것입니다. 이것을 한번에 다 선언하려면 3시간 반쯤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과거 여기저기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그것을 듣고 깨달았다면 그것이 분명한 신앙을 가질 만한 재료로서 충분했겠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그들은 길에 대해서 원망을 했습니다. 신앙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우리를 애굽에서 데리고 올라왔다는 말이냐?”하고 다시금 그 고전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애굽에서 건져 내셔서 이 때까지 살게 하신 그 이유를 하나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애굽에서 건짐을 받아 40년을 광야에서 살다가 이 길을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한 반항입니다. 이날 이때까지 저들의 반수 이상은 애굽에 가 본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우리를 애굽에서부터 인도해 냈느냐, 무엇 때문에 저기를 들어가야 하느냐?”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에 구원했느냐?”는 말입니다. 구원에 대한 아무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말에는 또 무슨 의미가 내포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실 때는 좋다하고 기뻐하나 괴로움을 주실 때는 싫다하며 반항을 한다는, 항상 이해만을 앞세우는 종교가 그들에게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에게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제도가 다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다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지켜 가면서 원망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지키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본심으로는 원망을 하였습니다. 종교와 본심이 따로 움직였습니다.
종교와 본심의 괴리의 예 - 사회복음주의
오늘날의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종교는 종교이고 본심은 본심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종교로는 기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려운 문제에 부닥뜨리면 제 본색이 드러납니다. 어려운 문제가 자기의 생활에 부닥치면, ‘아, 여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가 됐구나. 하나님은 여기서 어떤 희한한 일을 하시려는가?’하는 것을 기대하는 믿음의 기대가, 믿음의 소망이 그를 지배하는 대신, ‘무엇 때문에 나는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하면서 그 일을 당하는 의미를 모르고 원망을 합니다. 그리고는 세상 사람이 해결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은 일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만약 그들의 방식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에 적용해 본다면, 그들이 길 때문에 곤비하다고 하면 하나님은 “자, 내가 다시 선언한다. 너희들이 뭐 가나안 땅에까지 들어가서 싸우고 그럴 것 있느냐, 이 근방 적당한 데로 가라. 그러면 내가 거기 사방에서 샘을 터뜨려 물이 많이 나게 하련다. 물만 많이 나면 그 훤한 광야가 낙토 복지가 될 것 아니냐, 그러면 거기를 건설해서 나라를 만들어라”하셨으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나보다 더 맛있는 것을 주시면 됐을 것입니다. -“너희 음식이 박하구나. 안됐다. 미안하다. 박한 음식을 밤낮 먹여서 미안하다. 그러니 좀더 좋은 음식을 주마” 요새의 사회복음주의자들의 해결 방식이 그것입니다. 사회에 좀더 좋은 질서를 보여주고 좀더 균등하게 잘 살게 한다면 이런 죄악이 없어지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 방법 - 불뱀
그러면 하나님은 그러한 해결 방법을 쓰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해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뱀을 보내서 물게 하셨습니다. “이놈들, 뱀에게 물려 죽게 생기면 너희들이 나를 찾을 것이다. 어차피 죽을 놈은 죽어라”- 아주 단호한 태도로 나오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찾는 자는 가나안 복지에 갈 의미가 있지만, 죽게 생겨도 하나님을 아니 찾는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하시고 나누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갈라내 버리자”하시며 갈라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 가운데는 그가 죽게 되는 때까지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대체 하나님이 이런 것으로 갈라내야 할 만큼 사람은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믿음이 자꾸 타락해 내려가면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네가 정 그렇게 타락하면 이제는 죽든지 살든지 하나를 택해라. 이것으로 마지막 결판을 낼 수밖에 없다”하시는 것입니다. 이 죽든지 살든지라는 것은 최후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자칫 잘못해서, 한 발 잘못 디디면 죽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조금 잘못하면 매를 때리지만, 아주 잘못하면 죽든지 살든지 둘 중에 하나로써 결판을 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고비에 들어가기까지 잘못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심판받아야 할 처지에 도달하는 것은 최후의 경우입니다. 사람의 타락이 극도에 이르러 있어서 이 극도의 타락에 이른 사람을 건질 때에는, “너, 이 타락으로 그냥 죽든지, 아니면 이 살 길을 취해 살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라”하고 두가지 길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이 이렇게 죽고 사는 문제에까지 이르렀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다시 보는 것입니다. 이 죽고사는 문제에 이르기 전에 이미 누차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사를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조그마한 것으로 하나님이 “나는 싫다”하셨을 때, “아, 그러면 아니해야지”했어야 하는데, “나는 싫다”하시는데도 그냥 하고, “나는 싫다,싫다”하시는데도 그냥 하고, “이놈, 내가 싫다고 하는데 왜 그래?”하셔도 그냥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것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했구나”하고서 매질을 가하시는데도 그냥 밀고 나가다가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깊이 빠져들어가니까 나중에는 그러면 무엇이 더 중하냐 하신 것입니다. “네 생명이 중하냐,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중하냐?”하시면서 죽고사는 문제로 한번 해보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무서운 진노 가운데 빠져들어가도록까지 우매하게 밀고 나간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믿음이 없는 까닭에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결국은 죽고 사는 문제에 딱 맞닥뜨렸습니다.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며 살지않고 네 고집대로 하다가 죽겠느냐?” 이제는 제 고집대로 할 자는 죽어라 그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자신이 구하는 본래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항상 제가 좋으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런 행동을 하는 자와, 나는 더이상 교제 않겠다 그것입니다. “이제는 가거라. 쓰다고 네가 뱉으니 나도 너를 뱉아버리겠다” 둘 중에 하나로 결판을 짓겠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 모세의 구원 선언
그때 이 백성 가운데 ‘이제는 안 되겠다’하고 “하나님, 우리를 이렇게 징벌을 하시니 참 잘못했습니다”하고 마음으로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도리를 보고서 살아야 겠다고 각성한 사람이 있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만큼 각성한 사람이 있었겠는가는 좌우간 성경의 이야기대로만 보면 모세가 장대에 구리뱀을 달아 놓았습니다. “자, 너희들은 뱀이 나와 지금 물려 죽게 되니 잘못했다고 하는구나. 원망을 한 때문에 당하는 것을 인정하는구나. 그러니 이제 살길을 낸다”-잘못 한 것을 인정 않고 그대로 원망을 계속했더면 살길을 낼 것도 없이 그냥 다 쳐버렸을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살 길을 낸다. 자, 장대 위의 구리뱀을 쳐다보아라” 평소에 거짓말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던 모세가 전달하는 말을 그들은 들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장대를 세워 놓고 선언하기를, “자, 하나님께서 이것을 쳐다보면 산다고 말씀하시고 이것을 만들라고 하셨다. 그러니 누구든지 이것을 쳐다보면 산다”고 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빼놓고 그저 “야, 너희들 이것만 쳐다봐라, 그러면 산다”하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한번은 그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평소에 그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권위를 승인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물을 주랴?”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내가 너희에게 물을 주랴?”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결정적으로 모세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말이 되었습니다. 모세와 같이 일생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산 사람이 왜 이런 실수를 했느냐 하면, 분노 가운데서 이런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놋뱀을 본 사람들(1) - 잘못을 분명히 시인한 사람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는,“아,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구나. 우리가 원망을 해서 이렇게 죽을 뻔했는데 살리시는구나”하면서 감사히 여기고 쳐다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길을 가려 하지 않고 그길을 원망한 이 사람들은 아파서 몸이 붓고 막 죽어가는 그때에라도 마음으로는 이것이 하나님을 거역한 때문이로구나 하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살 길을 하나님이 보이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반가운 소식을 믿고 그것을 쳐다보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들 중에 제일 중요한 분자가 되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이야 잘못한 것이지만 그 잘못한 것을 얼마나 깨닫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철저하게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 원망한 것이 잘못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들이 모세에게 “하나님과 당신을 원망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잘못의 전부가 아니고 원망을 할 정도로 마음의 수준이 낮아 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왜 자기들이 원망을 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가라고 하시는 길을 가기 싫다고 한 것 아니냐?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별로 관련도 닿지 않는 40년 전의 애굽 이야기를 하며 핑계를 댔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애굽에서 올려왔느냐고.” -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40년 전의 일까지 끄집어내서 핑계를 할 정도로 원망을 하는데 아주 조직적이요, 그것에 길이 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원망할 재료를 끄집어내고 끄집어내다가 40년 전 것까지 끄집어낸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원망을 늘 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아마 그 원망도 아주 기술적으로 하는가 봅니다. 원망을 기술적으로 하는 사람이 더러 있기는 있습니다. 항상 불평을 하는 사람은 불평할 재료가 없는가 하고 봤다가 아무리 보아도 없을 것 같으면 옛날, 3년 전 기와집에서 묵은 고추장 먹던 일까지라도 끄집어내서 원망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3년 전 이야기가 아닌 40년 전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원망을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의 대다수는 애굽과는 상관도 없어서 애굽에는 가 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애굽에서 일어난 일은 겪어 보지도 못한, 이 광야에서 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 하는 소리가 중요한 원망으로서 나왔다면 아직도 이스라엘의 어른들, 장로들의 생각이 그러한 식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들의 신앙 - 이스라엘 신앙의 정화
그러나 이런 것은 잘못이라고 곰곰이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구나, 우리가 갈 길은, 우리의 운명은 앞에 있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는 아름다운 땅이 있다. 거기에 우리가 건설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게 지난 일만을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이 이후에 오는 유대 사람들의 신앙에 가장 정수한 중요한 부분을 형성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사상, 즉 유대주의의 정화인 가장 중요한 사상은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이러한 신앙의 전통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안 믿는 유대교인들이나 유대교의 대학자들도 유대교의 가장 정화라고 할 높은 사상의 하나를 끄집어낼 때에는 이것을 끄집어냅니다.
세계의 어떤 나라에서든지 자기네의 역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역사라는 것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계 어떤 나라든지 항상 과거를 화려하고 찬란했던 시대로 꾸며서 이야기해 나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스스로 4천년 문화 민족이네, 5쳔년 문화 민족이네 하면서 -과연 4천년이나 5천년이 됐는지 확실치 않지만- 과거를 찬란하게 이야기합니다. 앞으로 무엇이 될는지는 이제 두고 보아야 하니까, 앞으로 몇 천년의 문화 민족이 될 사람들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계의 어떤 민족이든지 항상 과거를, 특히 과거에 번영했던 시기를 화려하게 꾸며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과거의 화려하고 찬란한 시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다는 장차 올 화려한 시기를 이야기하면서 과거는 과거에다 붙여 놓습니다. 그것은 특색있는 사상으로서 현대에까지 그렇게 내려왔습니다. 유대교의 위대한 학자들 혹은 유대교의 시오니스트들의 생각 가운데는 그 사상이 늘 있습니다. 즉, 역사를 그렇게 해석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해석이 아니고 유대교 학자들의 해석입니다. 자기네 역사의 특성을 해석할 때 그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면 그런 독특한 사상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오늘 읽은 사건에서 연유합니다. 처음 출애굽한 사람들 가운데는, 과거 애굽의 생활이 노예 생활이었을지언정 더러 좋은 것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 애굽 사람들 가운데는 다정한 친구들도 있었고, 인정 많은 사람도 있었으며, 우리가 노예로 고생하고 애쓸 때 패장들과 감독들은 항상 박대를 했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서로 친하게 왕래하는 사람도 있어서 그 사람들이 뒤로는 돌려 빼주기도 하고 도와 주기도 하고 그랬다’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악하고 불의하고 불한당 같은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고 더러는 좋은 사람들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과 서로 다정하게 지내던 그 정은 남는 것이고, 때때로 그 남은 정 때문에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이래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겠다 하는 말을 과거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제 2세대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즉, “무엇 때문에 우리를 그 속에서 데리고 나왔다는 말인가? 애굽으로 돌아가겠다”하는 그 말은 그대로 못하고 묘하게 “무엇 때문에 우리를 애굽에서 올려왔단 말이냐?”하는 소리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 소리는 마찬가지 소리입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게 쑥 들어갔습니다. 불뱀을 만난 것입니다. 뱀에게 물린 뒤에는 “아이구 그런 소리하다가는 뱀한테 물려 죽겠다. 다시는 그런 소리 안해야 겠다.”한 것입니다. “이제는 싫든 좋든 장래를 향해서 가자. 뒤로 가려고 하면 뱀에게 물려 죽을 터이니까 물려 죽느니 앞으로 가서 한번 맞닥뜨려 싸우자. 그래서 쳐부수고서 나라를 건설해 보자.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라가 아니냐?” 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진하기 시작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 기초적인 종자가 되는 신앙이 나중에는 메시야 사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제는 좋든지 나쁘든지 장래를 향해서 전진하자 하는 이러한 생각을 여기서 실마리로 가진 사람들이 그 후에 시대를 통해서 차츰차츰 그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을 때 그 사상은 메시야 사상으로 빛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땅에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역사적인 발전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인류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인류를 왜 만들어 내셨느냐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저희들 멋대로 나라를 세워 가지고 저희 문화를 건설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것을 쳐부수어 가면서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경영하시는 나라가 있으니 그 나라를 땅 위에 세워 그것이 미미한 데서부터 충만한 데로 도달하기까지 역사를 만들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을 체현하시기 위해서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 기구와 그릇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사 애굽에서 건져 내셔서 끌고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기에 가장 가까운 사상, 비록 그러한 크신 하나님의 경영은 다 알지 못하더라도 희미하나마 그 종자라도 가질 만한 신앙을 가진 이 사람들이 제일 우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첫째로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놋뱀을 본 사람들(2) - 단순 소박하게 믿은 다중
그 다음으로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겠는가? 아파서 죽겠으니까 우선 나으려고 뱀을 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파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뱀을 달아놓고 “자, 쳐다보아라. 그러면 낫는다”하니까, “아이구, 우리 모세 선생님이 뱀을 쳐다보면 낫는다고 하시니 나는 쳐다보고 나으련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슨 과거를 헤아려 보고, “내가 잘못했다. 원망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원망할 것이 아니다. 40년 전의 그 원망 때문에 우리의 부조들이 광야에서 다 넘어졌는데, 우리가 또 이런 짓을 했구나”하고 회오한 것은 아닙니다. 거기까지 멀리 생각이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아파서 그냥 죽겠는데, “이것 쳐다보아라. 쳐다보면 낫는다”하니까, “예, 쳐다보면 낫는다고 했으니 쳐다보겠습니다”하고 단순 소박하게 믿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그룹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들도 그것을 보았을 때 나았겠는가? 누구든지 쳐다보면 다 나으리라고 했으니까 그대로 한 이상 분명히 나았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 사람들이 뱀에 물린 것은 원망해서 물렸습니다. 또 구리뱀을 쳐다보라 하니까 쳐다보고 나았습니다. 단순 소박하게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해서 나았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많은 층을 형성하는 타입입니다. 누구인가 지도자나 어른들이, 또는 그들 중 사상성이 강한 사람들이 만일 그릇되게 인도하고 원망하면 그냥 덩달아서 원망을 합니다. 누군가 그들이 신뢰할 만한 40세 이상 된 장로들이 일어나서, “무엇 때문에 우리를 애굽 땅에서 올려와 가지고 이 고생을 하게 하느냐, 이 박한 식물만 밤낮 먹고 살라고 하느냐?”하면서 “이것 안되겠다. 이것 안되겠다”하며 사두레 공론들을 하면, 그 공론을 듣고는 “그렇지,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나,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해?”하면서 덩달아 원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했던 까닭에 뱀한테 물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쳐다보면 산다 하니까 쳐다보고서 나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인도하는대로 따라가는 양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리 가자면 이리 가고, 저리 가자면 저리 가는 사람들입니다.
다중의 뇌동 심리
이런 사람들이 항상 대중을 형성하는 것인데, 대중이라는 것은 자기가 강한 의사를 다 표시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강력한 의사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에게 그 의사를 선포하고 전달해서 선동하면 그냥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단순하지만 단순한 만큼 위험성이 많습니다. 어떤 위험성을 가지느냐? 이들을 그릇되이 인도하면 그릇된 인도를 대중의 힘으로 밀고나가 크게 그릇되이 변화시킬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항상 군중의 뇌동심리에 가장 잘 영합하는 인물들입니다. 뇌동심리란 - 우뢰가 한군데서 “우르르”하면, 다른데서 “와아-”한다고 해서 그것을 우뢰 뢰(雷)자, 한가지 동(同)자 해서 뇌동, - 이 뇌동심리가 이런 사람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한 쪽에서 와아-하니 일어나서 강력한 사람이 상당한 이론을 들어서 떠들어 대면 우-하니 좇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대중을 형성하는 까닭에 이 대중은 그릇된 인도에도 쉽게 뒤따라갑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가 하면, 첫째 기독교 안에 대중의 현상은 이런 사람들이 빚어내온 현상이라는 것과, 둘째는 그런고로 이 대중의 현상, 다수 대중의 현상이라는 것이 반드시 정당하냐 하면 반드시 정당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로 결국 대중은 대거해서 그릇된 데로 갈 가능성이 심히 많고, 또 역사를 통해서 보면 때를 따라서 대중은 늘 그릇된 데로 간 것이 나타납니다. 기독교 안에 이런 일이 있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런 요소가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의 손 아래에서 지도를 받을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지도자의 손이 멀고 그 소리가 귀에서 멀면, 목전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의 선동에 귀가 솔깃하기 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위대한 지도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있었고 그의 위대한 교훈이 있었지만, 모세의 소리는 멀고 장로나 원로들, 혹은 나이 많은 사람들의 선동은 가까왔습니다. 가까운 선동에는 따르면서 참으로 훌륭한 지도자의 지도에 대해서는 원망을 했습니다. 왜 원망을 하는가? 이 원망을 하는 이유는 인간의 그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이 그대로 발휘된 까닭입니다. 이러한 대중을 형성하는 그룹은 인격적으로 우수하지 못한 까닭에, 즉 그들의 해석도 심오하지 않고 감정도 부허해서 요동하기 쉬우며 그 의지라는 것도 비교적 연약한 까닭에 간단한 자기의 해석에 의해서 움직이고 또 자기 속에 있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 좌우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탐욕에 지배되기 쉽습니다. 이것들이 이 대중의 뇌동 현상에 꼭 나타나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탐욕이 어떠한 형세로 나타나느냐 하면 종교를 이해의 문제로, 공리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런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개인으로 보면 종교적인 이기주의, 즉 종교를 이기주의 아래에서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요, 전체로 보면 공리주의, 즉 다중이 종교를 이용해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대중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 큰 층, 아주 굉장한 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중이니까 제일 많은 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기독교인의 대다수가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즉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강력한 인격을 갖지 못하고 비교적 박약한 인격을 가진 까닭에,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성신을 의지해서 완전히 정복했다는 기독교의 복음의 참된 자태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큰 도리에 참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목전의 가까운 이해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지도자의 언설에는 귀를 기울이나, 참으로 심오하게 계시를 가지고 가르치는 그것에는 귀를 기울이기 싫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기독교의 대세
오늘날 세계의 기독교인의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이런 사람들 아닙니까? 그래서 세계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과 소위 국제주의적인 교회 정치운동의 간판을 내세우고 혹은 그것을 가지고 선동하면 그냥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 이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세계 기독교의 대세를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것도 그런 운동입니다. 이렇게, 다수의 사람들이 뇌동 심리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비교적 신앙도 단순합니다. 어떤 조그마한 지역 사회에 가서,가령 한국이라는 사회에 와서 거기의 주도적인 세력이 무엇인가 알면 그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한국의 장로교의 주도적인 세력은 과거에 전통적인 근본주의 였으니까, 그 교회가 전통적인 근본주의이면 교인은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지 교인에게 근본주의 신앙이 마음 깊이 다 박혀서 따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수를 따라가는 뇌동 심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근본주의를 주욱 유지해 가던 교회가 삼분 사열이 되어가는 이유는 그런데에 있듭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말씀의 깊은도리가 전달되지는 않고, 안심 입명하고 마음에 환희와 평안을 얻으며 죽어서는 천당에 간다는 그러한 종교적 공리주의가 계속 이야기 되어지니까 그들은 그것만 붙들고 나간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그것은 죽은 후의 이야기이니까 그 이야기만 하는 것은 의미없으니 살아 생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해서, ‘살아생전에는 남 못지 않게 잘 살아야겠다. 그러면 잘 살기 위해서는 뒤에 처진 못난 사람 되어서는 안 되겠다’한 것입니다.
왜정세대에는 사람들이 꽉 갇혀 있어 국제주의라는 것은 별로 생각할 수가 없어서, 기독교 안에서도 국제주의라는것은 아주 극소수 이외에는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마자 서양 문물이 막 들어오고 세계가 축소되어 비행기만 한 번 타면 금방 12시간 안에 세계의 반절을 날아가게 되니까,“자, 그러면 우리도 세상에 나가서 출세해야 하겠다”하는 출세의 욕구가 생겼습니다. 이것이 탐욕입니다. 출세를 하려고 하는 데 다른 재주가 없으니 기독교를 어떻게 발판 삼아서 해야 하겠다 한 것입니다. 이러할 때 돈 많고 세력이 큰 나라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손을 내밀면서, “우리가 그렇게 해줄 터이니 우리하고 함께 하자”하면, 얼씨구나 좋다 하고 손을 잡았습니다. 이때 전통적인 주장을 가진 사람들은 이들에 대해서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며 충돌하여 갈라졌습니다.
그러면 전통적인 주장을 하며 갈라진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것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차츰차츰 그리로 쏠려 갔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또 갈라지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또 갈라질 것입니다. 자꾸 분열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앙이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소수의 사람 이 외의 대다수가 가진 공리주의라는 것은 결국 과거에 가지고 있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뀌는 것입니다.
처음의 종교적인 공리주의가 이번에는 세속적인 이기주의로 변해 나가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꾸자꾸 갈 것입니다.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앙을 그릇된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데는 늘 주동 역할은 하지 못해도, 그릇된 방향으로 밀고 나가는 지지 세력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주의할 것은, 이 그룹들이 나중에 이스라엘 신앙을 형식주의화하고, 형성주의화하는 거대한 조류를 뒤에서 떠받치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또 이 그룹들의 대표적인 예가 나중에 예수님 시대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다 따라다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일단 빌라도의 법정에 있어서는 제사장들이 돈을 주고 선동했을 때,“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하고 다 그렇게 소리를 지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쟁-각성한 개인이 하는 일
그러므로 이제 이런 사람들은 엄하게 단속을 하고 바르게 지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연약한 자가 강건해집니다. 항상 성경에서도 “강건하여지라. 주 안에서 장부가 되어 강건해지라.깨어라”고했읍니다.(고전16:13참조). 성경에서“깨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것은 연약한 사람들에게 “너희는 바른 정신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바로 배워라”하는 것입니다.“깨어라. 각성해라” 각성하려면 각성할 재료가 있어야 합니다. 그냥 저절로 각성이 안됩니다. 각성할 만한 조건들이, 비판할 만한 재료들이 자꾸 들어가야 합니다. ‘아,이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것을 깨우쳐 주어야하고, 좌우간 깨어 가지고 장부가 되어서 튼튼해지고 강건해져야 할 것입니다.
각성이 없는 사람들이 군중을 이루면 강한 세력은 만들지만 하나님 나라의 전쟁에 있어서는 세력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쟁은 하나하나가 각성을 하여 싸우는 것이지 한꺼번에 와~ 몰려가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몰려가는 사람이 참된 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용사들이 앞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자꾸 깨달아 가야만 합니다. 그런고로 교회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는다 하는 문제에 대해서 주의를 해야 합니다. 많은 수가 다 각성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 다중을 형성하는 층이 바로 뇌동 심리의 층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 층은 그러므로 속화하기 참 쉬운 것입니다.
놋뱀을 본 사람들(3)-완고한 사람들
그 다음에 또 하나 제3의 그룹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 제3의 그룹의 극단적인 예를하나 들면, 죽은 사람은 고집을 부려서 그만 죽었으니 말할 것도 없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도“그렇게 하기 싫다”하고 버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지독하게 완고한 사람들로서, “그런 어리석은 소리 말아라. 장대에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는데, 아니 뱀한테 물렸는데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면 사느냐?”하면서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이시고 많은 지혜를 보이셨으니까 기적을 믿는다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끝까지 그럴 이유가 없다고 자꾸 버티는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최후에는, 주위에서 “밑져야 본전 아니냐? 밑천 들 것 없으니까 한 번 쳐다봐라. 쳐다봐서 아니면 아니라고 네가 주장하면 되지 않느냐?” 하면서 자꾸 설복을 하니까, 자기 생각에도 그것이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이 되어서 그것을 쳐다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나았겠습니까, 아니면 믿음이 없이 그렇게 쳐다보았으니까 죽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쳐다면 낫는다고 했으니까 좌우간 쳐다만 보았으면 그 사람은 확실히 나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어떤 층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쳐다보아서 나았는데, 쳐다보아 나은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희한한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우연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만 쳐다보아서 나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버티던 여러 사람들이, 쳐다보면 낫는다고 주위에서 계속 거드는 바람에 쳐다보고 나은 까닭입니다.“아, 나도 당초에는 곧이 듣지 않았는데, 사실 뭐 어쩌다 쳐다보니까 낫기는 나았어. 그런 것을 보니 분명히 거기에는 뭐가 있어.”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이한 감-‘아, 그것 참 신기한 일이다’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완고가 최대한도로 부서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완고해서, 소위 합리주의자로서 그럴리 없다 하고 버텼지만, 그러나 어떤 계기에 쳐다본 것으로 나아, 그 완고가 깨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쳐다본다는 것은 눈에 띈다는 것이 아닙니다. 쳐다보아야 합니다. 아파서 죽게 된 사람이라도 눈을 들어서 그것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저 만큼 있는 것일지라도 눈을 들어 쳐다보고 나은 것이지, 그냥 눈에 저절로 띄었더니 나아졌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성경에는 “쳐다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쳐다 보라는 것이니까, 각각 자기의 의지를 거기에다 행사해라 그것입니다.
이적 신앙, 은혜 주신 목적 깨달아야 함
그것을 쳐다보고 나은 사람은 ‘그것 참 희한한 일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이며, 맏음이 없는 자라도 여기서부터 믿음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안믿던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기적에 접촉하게 해서 만일 나았다고 하면 그가 믿음 있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믿음이 들어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 여러분은 그전에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일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8:26). 그러한 제자들인데 풍랑이 일단 잔잔해지니까,“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마8:27)하면서 그 다음부터는 기이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그 사람들의 믿음에 보탬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시발점으로해서 그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곰곰이 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도 최소한도 구리뱀을 쳐다보기 위해서는, 보면 낫는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도 저것도 없는데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거기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되고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발전하지 아니하면 그 기이한 사실에 대한 자기의 감격이나 희한감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엷어지고 나중에는 그것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다수가 또한 그러했습니다. 과거 하나님의 많은 영광을 보고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이 40년을 광야에서 방랑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크신 선언으로,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했다.”(민14:22)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큰 은혜를 받고 또 받았어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아까 말했던, 그저 하라는대로 하는 그 층도 문제이지만, 이 자꾸 잊어버리는 층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일반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잊어버리는 경향은 누구에게든지 있는 것이지만, 이런 경향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그의 안에서 믿음이 발전하고 장성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았을지도 그것으로 끝날 뿐 구원은 받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받은 자의 주축이 되어 하나님의 그릇으로써 유용하게 쓰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그릇으로 끝까지 유용하게 쓰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도, 즉 피동적인 그릇으로서도, 다시 말하면 일반은총의 대상으로서도 하나님 나라에 사용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도 쓰시고 마른 막대기라도 쓰십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섬기겠다는 생각이 없는 동안에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역군 노릇은 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밤낮 끌려 다니는 일꾼밖에 안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려고 기회를 주셨을 때, 그리고 마음 가운데 그러한 각성이 생기고 희한함을 느끼며 감사함을 느끼게 하셨을 때, 그것을 그냥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 지나쳐 버리면 그것은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그것으로 ‘왜 하나님은 나를 낫게 하셨느냐?’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은혜는 감사하고 고맙고 좋다 하고 그 은혜를 가지고 향락하고 사는 것으로 끝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많은 신자가 하는 짓입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의미는 “왜 은혜를 주셨는가?”하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은혜 주신 목적을 깨달아서 그 목적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을 주셨으면 “아, 건강을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하면서 그저 건강을 향락하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왜 건강을 주셨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나에게 돈을 주셨다 지식을 주셨다 어떤 사회적 위치를 주셨다고 할 것 같으면, 왜 무슨 목적으로 이것들을 주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로 향해서 가야 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신앙이 제대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으면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만 가지고서는 신앙이 안됩니다. “감사합니다”하는 것은 느끼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것을 제3의 그룹에서 보는 것입니다.
결어 / 환란의 유익
마지막으로 우리가 종합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사람들의 신앙은 그것을 봄으로 몸이 나았다는 사실입니다. 뱀에게 물리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뱀을 보내어 뱀으로 하여금 그들을 물게 하심으로 그들을 물게 하심으로 그들에게 없던 신앙을 일으키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환란이 없었던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하는 시편 기자의 말과 같이 그 환란 속에다 다른 것으로 바꿀수 없는 중요한 은혜를, 즉 믿음이라는 것을 주셨던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왕왕 환란이라는 보자기에 싸서 보낸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일단 환란의 보자기를 거두어 가 버리시면 남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믿음이 남았으면 그 믿음은 다시 장성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씨를 심고 가노라고 그랬으니까 땅을 한 번 파는 아픔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만, 한 번 파서 심었으면 그 다음에는 거기서부터 올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이 기적의 신앙은 거기에서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구원을 받은 거룩한 목적을 확실히 인식하고 그 목적을 향해서 장성해 나아가는 신앙으로 확연히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계기로 이제는 허락하신 땅으로 쳐들어갈 수 있는 용기와 확실한 목적과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자신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원하셔서 뱀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압 땅에 올라가서 모세는 신명기의 그 교훈을 다시 한 번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또 끝난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의 교훈이 베풀어진 후 발락과 발람의 사건이 나옵니다(신1:4,5민21:33-22:2). 이 앞으로 당하는 경험에 있어서 신앙이 있는 사람들에게, 즉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에게는 다시 닥칠 발람의 올무에 어떻게 해야 승리할 것인가를 여기서(불뱀 사건)부터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발람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절대의 계획하에서는 선지자로 움직임을 받아서 이스라엘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나쁜 계책의 올무에 걸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태를 바라고 나아가는, 그 특수한 목적을 향한 그들의 각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 문제에 의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때 큰 은혜를 받았으면 그것이 그대로 있으면 안됩니다. 거기서부터 그가 장성해 가야 그 다음에 오는 바람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 신앙은 구원의 신앙의 확실한 자태를 드러내는 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이었나? 왜 우리를 이렇게 건져내셨나? 왜 우리를 이끌고 나오셨는가? 이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배우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https://www.esesang91.com/b/preach/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