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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자태 제6장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4)_김홍전

신앙의자태 제 6 장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4)(요3 :14-15) 김홍전
 
복습 / 출애굽의 노정
 
놋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인 까닭에 보통 설교를 듣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부하실 것을 잘 준비해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복습도 하시고 예습도 잘 해 오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노정을 다시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와서 맨 먼저 원망을 했던 자리는 마라라는 곳입니다. 그 곳 물이 쓰다고 원망을 하므로 나무 가지를 꺾어 넣어 물을 달게 한 곳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그 물을 마시고 더 진행하여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를 지나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 곳에서도 원망을 하므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게 해 주셨고(출 15:22-16:36), 이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이르러서도 역시 물이 없다고 모세와 다투며 원망을 하였으므로 므리바의 물이 생겼습니다(출 17:1-7). 이 므리바라는 곳은 구약에 두번 나오는데 서로 다른 곳입니다(출 17:7, 민 20:13). 그때 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움을 하고 그 다음에 시내산 밑에 진을 치고 그곳에서 율법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무릇 1년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그 후 출애굽 한 지 제 2년 정월 초하룻날에 처음으로 성막을 그들 진영 안에 세우고(출 40:17), 2월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출발할 준비를 하는데(민 1:1 - 10:10), 줄곧 20일이나 걸렸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2월 20일에 시내 광야에서 출발해서(민 10:11-12) 멀리 가데스 바네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곳까지의 거리는 약 150마일 혹은 약 240km입니다. 홍해는 뿔과 같은 모양으로 삐죽하게 양쪽으로 내밀었는데 그 오른쪽을 아카바 만이라고 합니다. 그곳에 엘라나 혹은 엘랏이라고 하는 곳이 있고 바로 그 위에 에시온 게벨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욱 올라가면서도 그들은 여러번 원망하고 여러번 일을 당했습니다. 다베라에서 원망하여 불이 일어났고(민 11:1-3), 기브롯 핫다아와에서도 원망하여 큰 재앙이 내려 ‘탐욕의 무덤’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여기저기서 원망을 하면서 마침내 허락하신 저쪽 가나안 복지의 문턱이요 어귀가 되는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까지 도달했습니다(민 13:26).-가데스 바네아, 혹은 아인 카데쉬, 아인 카데쉬라는 말은 “가데스의 물”이라는 뜻입니다. 가데스라는 말은 거기에다 성막을 치고 그곳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므로 ‘항상 거룩한 곳’이라 하는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가데스라는 말은 거룩하다는 히브리어 카다쉬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진을 치고 그 근방 일대를 이리저리 방랑하면서 살다가 드디어 그들이 찾아갈 가나안 땅으로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12지파에서 각각 한 사람씩 뽑아서 12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의 갈렙과, 갈렙보다 비교적 젊은 에브라임 지파의 눈의 아들 여호수아 이외에는 모두 가나안 땅을 악평하였습니다. 이 악평 때문에 백성들은 마음이 저상하여 울며불며 또 원망을 하더니 마지막에는 결정적으로 배반하여 한 두령을 내세우고 그 두령을 따라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민 14:1-4).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러 이야기를 하시고 명을 하셨는데 그 결론은 이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시면서 그 기간 동안 광야에서 하나씩 둘씩 땅에 엎드러져 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이상으로 나왔던 수는 굉장히 많았습니다. 20세 이상의 장정만 헤아린 수도 603,550명이었습니다(민 1:46). 여기에는 레위인의 수는 포함되지 않았는데, 일개월 이상된 레위인 남자로 계수된 수만도 22,000명이나 되니(민 3:39), 이것은 굉장한 수였습니다. 그러나 이 60여만의 장정들과, 또 그들과 함께 나왔던 그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광야에서 다 쓰러져 죽었습니다.
 
 
 
 
광야 40년의 의미(1)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고 넘어갈 것은 왜 이 사람들이 광야 40년의 생활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광야 40년 생활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인가? 광야 40년 생활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죽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들은 허락하신 땅을 향하여 들어가기 위해 광야 40년을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광야를 40년이나 방황하던 끝에 죽는다는 그것뿐입니다.
 
 
그러면 남자만 그렇게 죽었겠습니까? 남자만 죽는다는 법은 없습니다. 부인들도 나이 먹으면 죽는 것입니다. 만일 출애굽 했을 때 50세였다면 40년 광야를 사는 동안에 90세나 될터이니까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0세 이상의 남자 장정만 60여만 명이고 거기에 또 부인들이 있어 이들이 모두 죽었을 터이니 그 수는 굉장한 것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 허락을 받고, 또한 사명의 내용으로 받았던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사명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에게 무슨 큰 사명을 주셨는가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주축으로 삼아 큰 사명을 내리셨는데 -이 큰 사명을 그들은 애굽에서 나온지 불과 일년 내에 받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거대한 민족의 조직으로서의 이상을 가지도록 큰 구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것을 시내산 아래서 받았고 그와 같은 큰 사실을 이루기 위한 제도와 법칙을 또한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이와 같이 애굽에서 나온지 얼마 안되어 큰 이상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이 사람들은, 말하자면, 주신 약속과 사명의 수행에 대한 거룩한 보장도 또한 얻은 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이렇게 하려고 건져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백성 중에는 물론 개별적으로 탈락해서 소멸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민족으로서의 전체는 엄연히 그대로 그 사명의 보장 가운데, 사명 수행의 길로 걸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5-8)
 
 
 
 
“하나님의 소유”의 의미 - 하나님의 보장
 
보통, 소유라는 말은 법적으로 누구에게 소속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표시할 때 쓰는 말이지만, 이 성경 말씀에서 소유라는 말은 별다른 묘미를 가졌습니다. 우리 말에서도 소유라는 말이 단순히 법적으로 누가 그것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만을 표시하지 않고 어떤 때는 그 대상의 별다른 가치를 의미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만일 주머니에서 하찮은 부스러기 종이를 꺼내 구깃구깃해서 집어 던졌다고 할 때 누군가가 “이것은 누구 것입니까?”라고 하면, “아, 그것은 내것입니다”하면서 도로 찾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값없이 여겼으므로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 소유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것은 내게 속했던 것이고 현재에도 내게 속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속하지 아니 하였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 혼자 독존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결국 누구에게든 속하기는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 그것은 내 소유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 소유라는 말의 뜻, 그 말에 함축된 의미는 결국 ‘가치’라는 것입니다. 흔히는 물질적인 것 또는 생생하게 보이는 가치를 나타낼 때 소유라는 말을 특별히 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말하면, “내 소유가 되겠다”고 하는 말은 “내게 값있는 재산이 되겠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라고 했으면 그것은 벌써 이스라엘 사람도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했다”하는 것은,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그 때에야 너희가 내 소유가 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 소유가 되겠다”는 것은 하나님 당신이 “내가 너희를 내 소유라고 인정하겠다”는 그 말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무리 내 주머니에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아무렇게나 쓰는 종이 부스러기 같으면 그것에 대해 내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 나는 이런 것 쓸 데 없다. 오히려 주머니를 거추장스럽게 하니 좀 집어 내던지고 가야겠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게 속했을지라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속한 것을 내가 다시 찾는다는 것은 그것이 값이 있는 까닭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세계가 다 내게 속했고 너희들도 내게 속했다. 하지만, 네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이제는 내가 너를 내 소유라고 인정하겠다. 천하의 천군 천사와 세계 만민앞에서, 역사를 통해서 너는 내 소유라고 내가 인정할 것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행동을 전제로 하시고 “인정한다”는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소유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이것은 이렇게 될 것이다’고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 당신이 이렇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이요, 하나님께는 당신이 그렇게 하겠다는 말씀만 하셔도 충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서는 “그건 그렇게 될 것이다”고 할 때, 혹 자기의 힘이 못 미치더라도 다른 힘이 작용해서 그렇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소유가 되겠다”고 우리말로 번역된 이 말은 “너희를 내 소유로 인정하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작용하겠다”고 하는 것을 특별히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 형태 - 제사장 나라
 
그 다음에는 “너희들은 열국 중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어떤 텍스트에서는 이것을 서로 바꾸어 놓아 “거룩한 백성이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되어 있음>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약속임과 동시에 그 백성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는 말입니다. 지난 강설에서 우리가 배웠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민족으로서의 형태를 확연히 조성하는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그들이 모세를 따라서 홍해를 건너온 것 자체가, 옛날의 한 부족이 민족을 형성하기 위해 위대한 민족 운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펴신 팔, 크신 손으로 그들을 건져내신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민족적인 의식과 그 의식에 의한 목적을 가지고 “자, 우리가 민족적으로 결속해서 민족 자체의 존재 의의를 발휘하자.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서 나가자!” 하고서 홍해를 건너 간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갈지 알지도 못했고, 처음에는 구원 자체조차도 알지 못했으며 신 개념도 대단히 모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에도 당신의 존재를 먼저 계시하시지 아니했습니다. 존재로부터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라,“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나는 나일 것이다: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결국 역사의 과정에서 동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그래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실 하에서 실증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그들이 깨닫고 납득하고 파악할 수 있게 만드신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여호와’, 곧 ‘야훼’라는 말의 뜻입니다. “나는 나일 것이다”혹은 “나는 나다”영어로는 “I will be what I will be" 혹은 "I will be that I will be"이러한 야훼 혹은 여호와께서 이제 이 백성을 이끌고 앞에서 말한 경로를 거쳐, 즉 홍해를 건너 마라, 엘림, 르비딤, 시내광야, 그리고 시내산 밑 여기까지 와서야 비로소 그들에게 “너희를 민족으로서의 역사를 형성하고 민족 문화를 지어내는 존재로서 내가 인도하는 것이다”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말은 단순히 세계의 위대한 여러 민족들이 민족으로서의 역사를 시작한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너희는 내게 보물이 될 것이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제사장 나라”라는 말 자체가 벌써 이 민족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위치를 벌써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는 이 세상에 각각 자기의 국체와 주권의 행사에 자기 성격을 그냥 나타내고 사는 한 민족 국가를 형성할 것이다”하는 뜻이 아니라, “너희 나라의 성격은 필연적으로 나 하나님과 이 세상 모든 창생과의 사이에 있는 중보자로서의 의미와 성격을 가질 것이다”하는 뜻입니다. 또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니라”, 즉 세상의 어떤 나라와도 구별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고도적으로 순결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과 연결되어 있는 백성들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거대한 도덕적인 가치와 민족의 활동과 존재와 실존의 목표와 의의를 보여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가지는 가치는 뭐냐? 내 소유다. 하나님인 나의 소유로 인정한다. 나의 보물이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그 존재의 도덕적인 의의와 가치는 무엇이냐? 그것은 거룩한 백성이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으로서의 동적인 사명은 무엇이냐? 땅위에서 제사장 나라로서 활동하고 역사를 지어 가는 것이다”
 

이 백성이 이러한 큰 사명을 받은 것은 애굽에서 나온지 아직 1년이 못되어서 입니다. 애굽에서 나온지 불과 수개월 내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세가 물론 사십주 사십야를 호렙산 속에 들어가 있다가 나오고, 다시 또 들어가 있다가 나오고 했으니까 몇 개월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 개월 걸렸다고 하더라도 1년은 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1년 후에는 거기에 성막을 지었기 때문입니다.(출 40:17). 이제 1년 후에는 율법이 백성들에게 확실히 전달되고 선포되어 그들이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행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에서 나온지 불과 1년의 어간에 그들은 이런 거대한 민족의 이상과 하나님의 크신 사명에 딱 마주 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누구냐? 그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은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베푸신 바 거대한 민족적 사명과 도덕적 성격과, 하나님 당신의 크신 의사의 표시, 즉 “내 보물이다. 내 재산이다. 내 소유다”라고 인정하신 큰 사실의 역사적인 실현을 가질 백성으로서의 보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얼마나 튼튼한 보장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그렇게 하려고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은 “내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하나도 부응 못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그런데 이 백성의 역사적인 현실을 보면 그후 40년 동안 그 받은 은혜의 분부의 어느 한 토막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열국 사이에서 중보 설 만한 아무런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진행하다가 아말렉과 싸웠고 또 미디안과 맞닥뜨린 일도 있으며, 광야에 돌아다니며 다른 민족과 싸운 일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열국들로부터 단지 싸움의 대상으로만 간주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거대한 부족이 이민을 하거나, 베두인들이 유동하는 것처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초원 지대를 옮겨 다니며 목양과 목축을 해 가면서 자기들의 할 일을 하고 살아가는 하나의 적으로서 간주되는 일은 있었어도, 제사장 나라로서 엄연히 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축복의 기관 노릇을 한 때는 없었습니다.
 
 
한 번도, 하나님께서 호렙산 아래에서 이 백성에게 내리셨던 위대한 사명을 자기들의 역사의 현실 위에 구체적으로 옮겨 보는 일을 하지 못하고 죽어간 것입니다. 이것 참 불쌍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전달하신 그 말씀을 자기네의 귀로 직접 듣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광야에서 다 쓰러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위대한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려고 세우신 계획, 너희를 내 소유라고 인정하겠다고 약속하시며 기대하신 것, 어느 하나도 부응하지 못하고 다 쓰러졌습니다.
 
 
 
 
광야 40년의 의미(2)
 
대체 그러면 무엇 때문에 광야 40년이 필요했습니까? 혹여 광야 40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이런 거대한 민족적 사명,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들의 역사 위에 실현해 볼 수 있을까라든지, 혹시 오늘은 이것을 할 수 있을까 하면서 돌아다녔던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여유를 두고 말씀을 하신 일이 없습니다. “혹시 너희들이 광야를 돌아다니다가 그런 것을 이룰 수 있을찌니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갈렙과 여호수아 이외에 애굽에서 나온 자로 20세 이상인 자는 하나도 남김 없이 전부 이 광야에서 없어지리라”하고 아주 명백하게 선언을 하셨습니다(민 14:26-30). 이러한 명백한 선언하에서 그 사람들은 그렇게 돌아다녔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의의, 보통 요즈음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실존의 의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냥 죽어지지 아니하니까 산다는 그것뿐입니다. “사람 사는 것이 별거냐, 이렇게 사는 것이지” - 그것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은 생활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개인의 사명이나, 또는 거룩한 하나님의 에코노미의 단위로서의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방황하듯 인생이라는 거대한 광야를 돌아다니다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으로는 그렇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야 40년 동안에 쓰러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생관이 그러한 것으로서, 무슨 그 이상의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불쌍한 일입니다.
 
 
 
 
비극의 원인 - 신앙 부족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아이러니칼한 사실을 볼 수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출애굽 한지 1년이 되는 제 2년 정월초 하루에 시내산 밑에서 성막을 세우고(출 40:17), 그 후 2월에 들어서는 다시 먼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 때는 아직 그 40년의 숙명적인 선언을 듣기 이전입니다. 그러니까 2월 초하루부터 2월 스무날까지 한 20일 동안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세운지 50일만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가르쳐 주신 대로 그 성막을 다시 덮고(민 4:5-20) 대오를 정비하여 차례차례 자신들의 노정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50마일쯤 되는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가데스는 가나안의 문턱, 어귀입니다. 여기서부터 허락하신 땅은 바로 지호지간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때부터 만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용기를 내서 쑥 들어갔더면, 가서 쳐 이길 뻔 했습니다. 그러나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하는 보고를 듣고, 즉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렇게 격려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나머지 정탐꾼들의 악평과 사기를 저상시키는 말에, 그만 밤새도록 울고불고 야단을 냈습니다. 그러더니 마침내 “장관을 하나 세우고 돌아가자”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 광야 40년의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 가데스에서 한 1년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내산에서 가데스까지는 열흘밖에 안 걸렸습니다. 그리고 가데스에 도착하여 곧 정탐꾼을 보냈고, 이들이 40일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했으니까, 시내산에서 출발한지 모두 합해서 두 달밖에 안되는 때의 일입니다. 두 달 전에는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서 출발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비참한 운명의 선언을 하나님께로부터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그 사람들의 숙명이 달라졌습니까? 그 사람들 자신의 전도에 있어서는 달라진게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처음 시내산 밑에서 떠날 때는 어떤 일정한 마음의 상태, 일정한 종교, 곧 일정한 그들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나 신앙이라는 것은 도저히 허락하신 땅을 정복할 수 있는 은혜의 방도로서의 용처가 없었습니다. 원래 그 사람들은 가데스 바네아뿐 아니라 앞으로 어디를 가든지 날마다 그 신앙이 향상해서 허락하신 땅을 능히 쳐 정복할 뿐 아니라 그러한 생활을 기점으로 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새로운 오이코노미아를 세우기 시작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큰 과제를 지금 앞에다 놓고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으면 우리에게는 그 사명을 이룰 수 있고 수행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능력은 신앙이라는 은혜의 방도를 통해서만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이라는 은혜의 방도가 전연 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부족할 때는 도저히 그 능력을 받지 못하고, 그 능력을 받지 못하면 이르라고 하는 그 곳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이 사람들의 그 숙명적인 거대한 비극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 강설에서부터 우리는 이스라엘의 신앙, 혹은 이스라엘의 종교라는 문제를 대충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구약 신학상 심히 중요한 문제로서,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신 개념은 어떠했는가,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의 역사는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가 바로 그대로 구약 신학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 신학을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와 서로 비추어 가면서 생각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문제는 그 신앙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항상 빈약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오늘 저녁에도 우리가 또 중요하게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신 개념이 빈약하면 바른 신앙 못 가짐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서 가납하실 구원의 신앙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제 1차적인 요소는 항상 지적인 요소입니다. 라틴어로는 노티티아, 혹은 영어로는 Knowledge, 또는 that which I know 혹은 knowing이라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빈약할 때에는 언제나, 그 신앙이 비록 그 여타의 요소, 즉 정의적 요소에 있어서 상당히 풍요한 힘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정신, 곧 바른 신앙일 수가 없습니다. 신이 바르게 발휘되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때때로 있었습니다. 가령 가데스 바네아에서 호르마의 사건이 생기는데(민 14:39-45), 저들이 “우리가 용기를 내서 이 산에 올라가 이제 정복을 하겠습니다”고 하니, 모세는 “아니 너희들은 천자히 올라가지 말아라. 올라간들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기어이 가겠습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들은 그들의 신앙의 의지적인 요소나 정의적인 요소의 볼 만한 것을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당한 노티티아의 근거에 서 있지 아니한 그 여타의 요소라는 것은 항상 만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신앙으로 이 일을 하겠습니다”하고 나설 때, 신앙의 노티티아의 결핍은 결국 그것이 만용에 불과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한다”고 하면서 행하면 나중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오욕을 돌리는 일을 때때로 하게 됩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젊은 사람이 교회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예배 드릴 처소가 그렇게 마땅치 않은 것도 아니어서, 이제는 자기네의 능력을 길러서 참된 보이지 않는 거룩한 교회의 실질을 바로 세우는 데 주력을 해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예배당 집이 신식이 아니네, 탑이 없네 또 무엇이 어쩌네 하면서 탑을 하나 높이 세워 주위사람들이 모두 여기가 예배당인 것을 알 수 있도록 집을 뜯어 고쳐야 하겠다 하고, 새로 설계해서 기왕 있었던 돌집을 뜯어내고 요새 흔히 볼 수 있는 한국식 예배당을 새로 지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어떻게 진행하느냐 하면, “우리가 이일을 다 믿음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풍요하시고 넉넉하시니까 얼마든지 주십니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현저한 예입니다만, 거기에 무슨 믿음의 요소가 있습니까? 그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은 항상 정의적인 부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적 요소에는 심한 빈곤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일인가?”에 대해서 확실히 대답할 만한 외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혹 자기 혼자 기도하다가 “나는 분명히 확신이 있습니다”라고 하지만 자기 혼자 노루잠 자다가 개꿈 꾸는 사람도 있으니까 누가 무어라고 말할 것은 없으나 -이것은 자기 혼자서 신앙이 있다고 하는 것뿐이지 남에게 말할 만한 것은 못됩니다.
 

이렇게 보편 타당성이 있는 지적 요소가 없이 그냥 덮어놓고 어떤 영웅심이나 만용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은 호르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던 짓과 같습니다. 이들의 결핍된 지적인 요소가 호르마산에 방자히 올라가 싸운다고 해서 갑자기 불어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신앙의 대상에 대한 개념이나 사상이 빈곤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야훼로 안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호를 야훼로 알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야훼로 불렀는지 엘로힘으로 불렀는지 또는 애굽의 신 아피스로 불렀는지- 이 사람들이 아론을 시켜서 금송아지를 만들게 한 것을 보면 하나님을 아피스로 생각하고 아피스라고 불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말의 하나님이라는 말도 태양신이었는지 혹은 옛날 고조선의 신의 명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빌려서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의 참된 개념을 거기에 담아 쓰는 것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빈곤은 하나님의 성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의 내용에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풍요하게 항상 증가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그들이 그런 운명 가운데 방황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빈곤한 신 개념 하에서는 필연적으로 -왜냐하면 그것을 근거로 하여 그 다음에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되는 까닭에- 그릇되고 정당하지 못한 인생관이 늘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여기에 어떤 무신론자가 있다면 그는 무신론적인 근거에서 인생에 대한 관찰을 할 것입니다. 즉, 그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만약 피조물이 있다면 그것을 창조한 이가 있을 것이요, 창조한 이가 있으면 그는 신이라야 될 것이다. 그러나 신은 없다. 그러니까 창조한 이도 없다. 따라서 피조물도 없다. 자연 발생한 것이다. 즉, 인생은 자연 발생한 것이니까 자연 발생한 것같이 자연히 소멸할 것이다. 그런고로 인생의 발생이나 소멸은 자연스러운 한 일정한 법칙 혹은 철칙하에서 변동할 수 없는 것이라면 앙탈해도 소용이 없다’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는 숙명론적, 기계주의적 인생관을 가지며, 그러므로 물질주의적인 인생관을 가지기 쉽습니다.
 
 
 
 
신 개념의 빈곤 - 그릇된 인생관 초래
 
이와 같은 신 개념의 빈곤성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제 1세대는 항상 빈곤한 인생관을 가지게 됐습니다. “왜 너희는 40년 동안 거기서 방황하느냐?” “인생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니까 여기서 40년을 방황합니다”그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이스라엘 백성이 참 허무한 백성이다’하고 생각되겠지만,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이 아닌 하나님의 에코노미로서의 공동체 의식과 또한 현 역사의 세계에 있어서 분명히 가져야 할 역사적인 사명에 대한 각성이 명백하고 현실적인 상태로 있느냐 하면 없습니다. 예배당을 10년 다녔다 해도 그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예배당을 10년 다녔어도 그것이 없다면, 40년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인생관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사느냐?” “아, 우리는 살아지니까 산다”그것뿐입니다. 죽는 것은 죄이니 죽지는 못하고, 이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인생관은 있으되 허무하고 빈곤한 인생관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우리를 죄 중에서 건져 내서 이제 자유한 그리스도의 세계에다 놓아 두셨느냐, 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놓으셨느냐?”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고 싶어서 건져 내셨다” 는 그것뿐입니다. 아무리 이론을 해 봐도 그것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니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고 싶어서 구원하셨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거짓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싶어서 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나에게 아무런 인식론도 형성해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싶어서 했으니까 나 자신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하시고 싶어서 하셨으니 하나님이 생각할 탓이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일날이 되면 예배당도 열심으로 가서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노라고 하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이때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바로 그러한 인생관에서 나온 생활입니다.
 
 
인생에 대한, 인생의 목적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를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 개인의 생의 목표가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의 기본은 항상 전체의 부분으로서, 즉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으로서만 의의를 가지는 까닭에, 우리는 그 전체가 무슨 목표를 가지고 어디로 행해야 하는가, 무엇을 하기 위해 이역사를 만들어 내는가, 이 역사는 어떤 성격으로 지어져야 하고 어떤 방향을 취해야 할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불쌍하다’고 한다면, 자신들도 역시 그러한 불쌍한 처지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도 불쌍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신 개념의 빈곤 - 여호와를 부족신으로 생각함
 
그러면 이번에는 그 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한 것이 역사상의 객관적인 사실로서는 무엇을 발생케 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 사람들이 빈약한 인생관을 가졌다고 하십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라는 분이, 빈약한 인생관을 가진, 겨우 요런 사람들을 건져 내다가 광야에다 그냥 내동댕이쳐서 40년을 빼각빼각 하다가 죽게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밖에 안될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비판적인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기록을 단지 역사적인 사실로만 받아들인다면 이 기록의 의의는, 어떤 부족신이 -만일 그것이 신의 작위라면- 자기의 부족을 건져서 이끌고 가다가 힘이 모자라니까 광야에다 집어 내 던졌다 하는 얘기밖에 안됩니다. 그렇게 생각 안되겠습니까? 그것은 물론 악질적인 비판학자들이 하는 소리입니다만, 그런 비판적인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하나의 부족신으로 생각하면 그렇게도 생각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아무 까닭없이 연약한 사람들을, -거기에는 어린아이들도 있고 부인들도 있고 비전투원도 있어서 조용히 자기네끼리 평화롭게 살려고 하는 백성을- 막 무찌르고 불질러서, 내어 쫓고 점령하여 살라고 하신 것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신이 무슨 신이냐, 공평하게 모두에게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는 공정한 재판장일 수는 없지 않으냐 하는 것입니다. 한쪽 편을 들어서 다른 편 백성 -아무 죄없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별히 아무런 대적을 아니한 백성- 들을 때려 눕히라 하고, 불질러 쫓아내 그 땅을 점령하고 그 재산을 빼앗아 살라고 하는 그런 신이라면 그것은 부족신에 불과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부족신적인 관념을 형성할 만한 여러 가지 자료가 이미 구약에는 참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고서 여호와의 거룩하신 전체의 역사의 작위를 속단한다면 참으로 큰 참람입니다. 그리고 큰 망령이 됩니다. 그러한 까닭에 비평가들은 저희의 학문을 하노라고 하면서 그런 것을 중심으로 그 여호와라는 신관을 형성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큰 모독을 하는 죄 가운데 빠져 드는 것입니다. 지난 강설에서 우리가 생각했지만 여호와를 하나의 부족신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후에 유대 사람들이 율법을 형식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에서부터 더욱 고질화됩니다. 오늘날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만,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특이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근본주의, 정통주의라고 하는 사람들이 -특별히 영.미 계통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들을 잘 합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영.미의, 특히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것은 너무 자세한 얘기가 되니까 알과하고 본래의 문제로 다시 돌아갑시다.
 
 
 
 
신 지식은 어떻게 터득하는가?
 
결국 이 백성은 광야에서 넘어지지만, 여호와께서 세계만민에게 보편적인 거룩한 역사의 원칙을 거기에 그대로 명료하게 보이사 항상 거룩한 계시를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계시의 내용은 인생의 역사 위에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되, 첫째는 주권자로서, 그리고 둘째는 그의 거룩하신 속성의 면면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그는 인격신이시요, 그는 만유의 주이십니다. 그런고로 주권자이십니다. 그는 역사 위에서 다만 감독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친히 운전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또 무엇보다도 거룩한 속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그의 속성의 면면을 역사 위에, 현실 생활 가운데 보이십니다. 지금 말한 이 몇 마디의 말들은 여러분이 주 하나씩을 다 달아야 할 말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인격신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또 그 인격신의 존재도 정지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항상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는 말에서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역사의 과정에서 “내가 누군 것을 너희에게 더욱더욱 실증하리라”는 ‘실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의 거룩하신 존재에 대한 의식은 우리의 지적인 사고나 추리에 의해서 얻어지는 결론으로 터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위에서 당신 자신의 의사 혹은 의지를 구체적으로 현시해 나가시므로 그것이 나에게 하나의 실증의 사실로 접촉할 때 내가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은 이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그 작용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의지를 역사 위에서 구현해 나가실 때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발휘하여 터득함으로도 얻는 것입니다. 영혼의 기능의 특수한 작용을 요하는 것도 아니고, 특수한 작용을 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 지식은 정상적인 영혼 기능이 작용할 때 얻어짐
 
우리는 중생이라는 문제를 배울 때, 중생과 변개는 영혼의 기능에 극단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지 특수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그런고로 반드시 정상적으로 영혼의 기능이 작용할 때 하나님께 대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상적인 영혼의 기능이 작용하는 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가 역사 위에 나타날 때 그것이 역사적은 큰 사실로 내게 인식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더 쉽게 하십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가 역사 위에 나타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위에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나라를 일으키시고자 하시면 일으키시고 어떤 나라를 망하게 하시고자 하시면 쳐 멸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하시면 전쟁을 꽉 눌러 버리시기도 하십니다. 사람의 생각과 모든 계획으로는 꼭 전쟁이 일어나고 말겠는데 하나님께서 꽉 누르셔서 전쟁이 못 일어나게도 하시고, 또 사람의 생각으로는 “태평하다. 아무 일 없다”고 하는데 갑자기 큰 환란이 일어나게도 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지는 일반의 인과 법칙에 의해서도 움직이고, 하나님 당신의 적극적이고 특수한 의지의 발휘에 의해서도 움직입니다. 
 
이와 같이 발생하는 역사적인 현실 앞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숭엄하시고 크신 것을 깨닫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개인의 생활 경험 가운데서 하나님을 어떻게 알게 되느냐 할 때, 구약에서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특별히 우리에게 보이신 중요한 하나의 방도는 사람이 위기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분기점 곧 환란이 있을 때 알게 하십니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이렇게 환란이 있을 때는 부르짖게 하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으로는 이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스콜라 철학자들은 인식론이라고 하는 논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당신의 의지가 인류의 역사 위에 구체적으로 작용할 때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파악한 것에 의해서, 즉 새로운 판단 기준에 의해서 자기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이나 사관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부족한 신관 - 신앙의 형식화 초래
 
이스라엘 백성은 부족한 신관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향상시킬 줄 모르고 40년을 방랑했습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쉐키나의 구름을 접촉하면서도 그랬습니다(출 40:34-38). 쉐키나 구름은 오늘날 우리들의 접촉보다는 훨씬 현실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쉐키나 구름을 보지 못합니다. 또한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하고 어떤 일정한 장소를 지정해서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하나님의 무소부재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라는 것은 이런 데다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되 또한 쉐키나 구름 가운데서도 영광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셔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땅에는 안 계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란 말은 특별히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는, 하나님의 편재의 속성과 관련시켜 쓴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인생의 범주에서 하나님께 대한 개념을 가지려고 할 때는 언제든지 어떤 장소적 위치를 생각하기 때문에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있도다’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다’하는 이런 생각도 합니다(사 66:1). 이것도 또한 정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인화 시키는 것이 구약에 있어서는 중요한 하나님의 현시 방법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쉐키나 구름을 이렇게 생생하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은, 당연히 그로 말미암아서 신 개념이 풍요해지고 장성했어야 하는데 참으로 그랬는가? 그 장성의 여부는 그후의 생활과 역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은 그 뒤 항상 형식화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인데, 마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교를 형식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그리스도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을, 항상 무엇인가를 형성해 나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세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 행한 일:
 
(1) 자녀를 낳음

그러면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이들은 하나님 손 아래에서 움직이는 도구로서 무엇에 기여하고 있었느냐 하면, 비록 그것이 자기네가 목적 의식을 가지고 한 일은 아닐지라도 우선 자식을 낳았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낳은 수에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미만의 사람의 수를 합하면 먼저 있던 그 수와 비슷한 수가 됩니다. 민수기 26장 51절과 6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으로 20세 이상 계수함을 받은 자가 601,730명이고, 1개월 이상의 레위인의 수가 23,000명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20세 이상이니까 광야에서 첫 20년 동안 낳은 자식들입니다. 광야에서 40년 후반기에 낳은 아이들은 이 수에 들지 않습니다. 20세 이상이라야 수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네가 거기서 자식들을 낳는다는 사실은 단순히 그냥 낳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산업을 계승해서 하나님이 내신 거룩한 사명이 땅 위의 역사 위에서 끊임없이 전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부와, 내리신 바 사명의 열매를 이스라엘의 제 1세대에게서는 거두지 못했지만 제 2대부터는 거두게 만드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명은 그때의 한 시기의 사명이 아니고 역사와 더불어 유구하게 흘러가야 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열매를 맺는데, 부적당한 가지들은 시들어 말라 버리게 하시고 그에 적당한 가지는 두시사 움이 터 나와서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식을 낳게 됐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 혼인에 관한 부분(제 24장)에서 “이 혼인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자녀로써 교회를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쓴 것을 아실 것입니다. 교회에 있어서의 혼인은 그 거룩한 교회의 구성 분자인 자녀를 퍼뜨려 나가는 것입니다.
 
(2) 자녀를 가르침

그리고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광야에서 자라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자식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독특한 생활 제도와, 또한 죄 있는 인생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는 방법과,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어떻게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인가를 늘 배웠습니다. 그리고 현저하게는 성막의 지성소 위에 올라가 있는 쉐키나 구름의 인도를 받아 자기의 인생 길을 늘 걷는다는 큰 실물 교훈을 늘 받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 2세대가 겪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거기에는 지금 아론과 그의 자손들, 즉 제사장들이 있었는데 이 제사장들은 선생이었습니다. 모세는 선지자이면서, 또 그 이상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게 되어 있었고 그것을 레위인들이 돕고 있었습니다(레 10:8-11, 민 3:5-9). 이미 백성들이 그렇게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사장들은 백성의 자녀들에게, 전에 호렙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큰 사명과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나님과 늘 가까이 살아가야 하는 가를 가르쳤습니다. 그 다음에는 큰 강령을 가르쳤는데, 먼저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즉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거룩한 법칙과, 둘째로 사람끼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사회법을 가르쳤습니다.
 
 
 

제 2세대의 원망 - 음식 타박
 
그 자녀들은 이러한 것들을 배우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애굽 노예 생활을 하지 않았고, 애굽적 종교의 그 악질적인 영향을 대체로 받지 않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애굽적인 여운은 아직 남아있었으니, 그것은 애굽에서 나온 자기들의 부형들이 끼친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음식을 한참 먹고 있다가라도 그 중에 한 노인이 “야 그 생선 한번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면 생전 생선이라고 하는 것을 맛도 보지 못한 이 광야에서 태어난 베두인들이야 그것을 모르니까 “생선이 무엇입니까?”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만일 칠면조 고기를 안 잡숴 보셨다면 누군가가 “아 칠면조 고기 먹고 싶구나”하고 말한다 해도 아무도 그것이 먹고 싶어서 안달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퓨리탄들이 미국에 처음 건너와서 야생하는 칠면조가 많으니까 총으로 그것을 잡아서 먹었습니다. 특히 감사절 때는 “감사합니다”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먹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아주 대대로 내려와서 몇 세기가 되니까 이제는 칠면조 고기가 그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칠면조 고기를 잘 먹는 사람은, 먹다 남은 칠면조를 냉장고에 넣어 두면 밤에 잠자기 전에 냉장고를 열고 다른 음식은 다 제쳐 놓고 그것을 꺼내 그 자리에서 다 집어먹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전연 맛보지 못한 사람이면 거기에 대해서 무슨 사모하고 그리워할 아무 까닭이 없습니다. 지금 이 광야에서 난 사람들은 생선맛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베두인, 즉 광야의 유목민들인 까닭에 그들이 제일 맛들인 것은 풀을 먹고 자란 낙타나 양의 젖이 아니면 양 고기일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맛들인 것은 만나입니다. 먼저의 1세대 사람들은 만나를 보고 ‘이 박한 식물’이라며 야단들을 했지만, 제 2대 사람들에게는 만나가 그렇게 박한 식물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괴상한 음식들을 많이 먹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국에 살면서 이 짜고 맵고 달고 신 것을 먹다가 미국에 가서 처음으로 음식을 먹으면 싱겁기가 한이 없습니다. 우리 말에 아욱장아찌라는 말도 있지만, 아욱장아찌도 그 보다는 짭니다. 그 나라 음식은 당초에 싱거워서 맛이 없습니다. 싱거우니까 애꿎은 소금만 자꾸 뿌립니다. 그런데 우리 같으면 맛있는 간장이 있어서, 일본간장도 쳤다가 한국간장도 쳤다가 해 가면서 먹는데, 이것은 맨 소금만 막 뿌려서 먹으니 무슨 맛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이것 싱거워서 무슨 맛이 있나?”하면서, 음식 타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서양 음식을 타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이나 중국의 음식은 오래된 나라의 음식이니까 훌륭하다. 즉, 나라가 오래되면 음식 솜씨가 놀랍게 발달하는 것이다”하고 억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억설인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그래 가면서 한국 음식을 자꾸 자랑했습니다. “우리는 오래된 나라니까 오랫 동안 주부들이 아주 기묘하게 음식을 발전시켜 이제는 위대한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다. 너희들은 이제 생긴지 얼마 안된 나라라서 항상 이렇지 않느냐? 이게 뭐냐. 고기에다 소금 쳐서먹는 이것은 야만인들이나 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까지 했는데, 나중에는 저도 그 야만인들이나 먹는 고기를 우리 한국 음식보다 더 좋아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도대체 김치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광야의 베두인들이 무얼 그렇게 애굽의 음식을 좋아하게 됐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아라비아에 가서 아라비아의 베두인 어린아이나 젊은 사람 하나를 데려다가 뉴욕의 한 가운데 있는 일류 식당에 가서 한 접시에 백불이나 하는 칠면조 요리를 한번 먹여 보시지요. 아마 “이거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 에이 재미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돌아가서 양 젖이나 치즈를 먹는 것이 제일 좋고, 그 다음에는 양고기를 그냥 맨으로 우둑우둑 먹는 것이 좋다고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소금이 별로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소금도 별로 치지 않고 먹습니다. 오히려 소금을 치면 짜서 못 먹습니다. 그 넓은 광야, 풀이 자라는 바닥에서 소금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활 환경이 장기간 바뀌면 그 입맛도 자꾸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있었던 선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 애굽에서 먹던 생각이 난다. 생선이 먹고 싶다” 참외, 수박, 부추, 마늘, 파 - 용하게도 우리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것을 다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그 노인들 가운데는 더러 “이것 먹고 싶은데, 그것 꼭 먹었으면 좋겠는데” - 아마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젊은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맛입니까? 그것이 무엇이요? 부추가 뭐고 파가 뭡니까? 마늘이 뭡니까?”하고 물었을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야 그런 것이 나오고 또 필요한 것이지, 밤낮 움직여 다녀서 앉은 자리가 따뜻할 사이가 없는 그 사람들에게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는 입맛이 서로 현저하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즉 2세대들도 때때로 “이것 뭐 만나 참 맛 없군. 이것 뭐 밤낮 먹어 봐도 맛도 없고 늘 요 모양이다”고 한 것입니다. 만나는 꿀 섞인 과자 같으니까 맛이 없을 턱이 없습니다(출 16:31). 그러나 그것에 맛을 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 다음 세대는 그렇게 오래 그것을 먹었으니까 맛이 있어야 할 터인데 어떻게 된 것인지 맛을 들이지 못했습니다. 오늘본 민수기 21장 4절에도 “이 박한 식물밖에는 먹을 것이 없다”하고 또 먹을 것을 타박했습니다.
 
 
 
음식을 타박하는 이유 - 배부른 탓
 
그러면 이렇게 먹을 것을 타박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는 어떤 때에 먹을 것을 타박합니까? 여러분들의 연배이신 분들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할 때 그 지독한 식량난 가운데 소위 배급을 준답시고 하루 한 끼밖에 못 먹을, 그거나마 반절은 썩은 것을 섞어 주던 일을 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살아간다는 것이 기묘한 일인데, 그 때에는 그 전에 타박을 하던 흰 쌀밥 한 숟갈만 먹어도 반찬이 무슨 소용 있느냐 였습니다. 그것 하나만 먹어도 그냥 입에서 녹는 것같이 들어가던 경험을 다 했습니다. 흰 쌀밥이 어찌나 맛이 있었는지 밥풀 하나를 입에다 넣고서는 맛을 보았었습니다. 저는 참말 밥풀 하나 입에다 넣고서 먹어 보니까 어찌나 맛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썩은 깻묵하고 또 무엇하고 그냥 뒤섞어 주는 그것을 먹으려니까 흰 밥풀 하나의 맛이 그러했습니다.
 
 
요새 국수를 먹으면 그 국수가 얼마나 연하고 맛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때는 국수가 맛이 있질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그 국수도 무슨 썩은 것하고 함께 섞어 만들었기 때문에 먹으면 씁쓰름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국수라고 먹고 앉았던 것은 배가 고프니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다시 국수가 맵네 짜네 싱겁네 맛없네 해 가면서 타박을 합니다. 그럼 그게 맛이 없어서 그러느냐? 그것이 아니라 배가 불러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제 2세대가 그러합니다. 뱀한테 물려죽는 이 때에는 제 1세대는 다 없어졌습니다. 제 2대째로 광야에서 난 사람들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도 더러 있었을 터이지만 - 만일 40세 이상이라면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겠지만, 지금 주동이 된 사람들은 20세부터 40세입니다. 40세 이상 60세는 그렇게 굉장한 수도 아니고 사실상 주동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동이 되는 그들이 음식 타박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들이 무슨 다른 음식을 얼마나 많이 맛 보았기에 음식 타박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얼른 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다른 음식을 맛보았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배가 부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배고프지 않도록 먹여 주시니까 타박을 할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배가 고파서 눈이 쑥 들어갔다면 타박할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다 먹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은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성막의 여러 제도와 모양 즉 표상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바른 관념을 차츰차츰 터득해 온 백성들입니다. 성막에 따른 여러가지 제도와 제사법 가운데에서, 또 성막을 중심으로 한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가운데에서 배웠습니다. 또 거룩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형제끼리, 자기네 동포간에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조목의 법칙을 거기에서 배웠습니다. 거기서 그렇게 배워 가지고 이제 새로운 군대를 형성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복을 할 수 있는 백성으로 자라난 것입니다.
 
 
그래서 선대의 무신앙 -즉 항상 과거의 강한 애굽적인 요소를 버리지 못하고 연연불망해서 그만 그것과 함께 바란 광야에서 쓰러지고 만 선대의 무신앙- 을 버리고, 이제는 새로운 신앙을 가지고 대를 이어 나가는 것입니다. 비교적 신선한 신 개념과 신앙의 내용들을 가지고 이제는 40년의 방랑 끝에 허락하신 땅을 향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에돔과 더불어 직접 맞닥뜨려 싸울 수도 없고 통과할 수도 없는 까닭에 한 160km나 되는 에돔의 국경을 따라 사해 밑에서부터 주욱 내려와 세일산으로 뻗어있는 땅을 돌아 아카바 만으로 돌아서 가려니까 길이 멀다고 원망을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상태 - 요약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대개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을 바로 하고 바로 깨닫기 위해서 기초적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의 배경이라는 것을 먼저 공부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의 본문으로 들어가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는 그 사람들이 길 때문에 마음이 시들해지고 곤비해져서 원망을 했다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원망에 곁들여 이 박한 식물밖에 없다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배가 불렀었다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들 중에는 애굽적인 요소가 아직도 완전히 제거되지 아니했다 하는 얘기입니다. 그 애굽적인 요소란, 애굽에서 20세 미만으로 나온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아직 살아있어서 같이 무리가 되어 들어갔는데, 그들에게는 아직도 애굽에 대한 회향의 심정, 회고의 심정이 -그것이 그렇게 오래 까지 남아있는 것인지 어쩐지는 모르나-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은 먹는 것을 가지고 먹고 싶다고 울고불고 야단을 냈습니다. 그들은 생선과 참외와 수박과 부추, 마늘, 파 이런 것들을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밖에 고기가 먹고 싶다(민 11:4)고 할 때의 그 고기는 생선을 말한 것이지 육축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양고기를 먹고 있었으니까 육축의 고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 닭고기가 먹고 싶다, 새고기가 먹고 싶다 하겠지만 그 때에는 메추라기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나일강에서 잡아 먹던 생선 그것이 때때로 굴풋할 때 생각이 나면 원망을 한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이 사람들에겐 원망이 한 직업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주 조직적인 스트라이크를 하듯이, 원망을 잘했습니다. 그들은 걸핏하면 원망할 아무 조건도 안되는 것을 가지고도 원망을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원망한다면 그것은 마땅하다고 하겠지만, 먹을 것이 있는데도 그들은 그것이 “박하다” “이게 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주 형편 없는 식물이냐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맛이 꿀섞은 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그것이 과자라도 푹신푹신한 웨이퍼와 같다고 했으니까 그만하면 맛이 있지 않습니까? 요새는 일부러 돈을 주고 사먹기도 하는데 그런 것을 가지고 원망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사명
 
그러면 이 사람들의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셔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들의 원망이 듣기 싫으셔서 “에잇, 이놈들 밤낮 나를 원망하니 가만 안 두어야겠다. 이 원망을 다시는 못하게 하겠다” 하는 이런 의사를 가지셨겠나 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너희들 원망 말고, 찍 소리 말고 그냥 가라는 대로 가거라”하는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가라 하는 데로 가서 뭘 해야 하겠는가 하면, 가서 점령해야 합니다. 점령하면 뭘 하겠는가? 거기에 이미 있던 가나안 족속들의 문화, 특히 헷 제국의 거대한 이교적인 문화, 악질적이면서도 강력한 색채를 가지고 있는 그 문화를 쳐 부수어야 합니다. 오늘날 헷 족속의 문화 유적지 발굴에서 굉장한 것이 많이 나왔는데 그것을 보면 그들이 굉장한 문화의 내용을 가졌다는 것과 그리고 강렬한 색채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강렬하다는 것은 헬레니스틱하다는 것입니다. 아직 헬레니즘이라는 것이 형성될 시기가 아니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쳐부수어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 위에 다시 새로운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에코노미(경륜)의 내용을 세워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이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들어간 후부터는 장기간에 걸쳐 끈기 있게 목표를 향해서 잠시도 불요불굴히 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역전 역투를 해야 할 역사적 운명을 지금 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에 대한 바른 지적 요소를 가진 신앙입니다. 이 사실을 자기네가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가서 허락하신 땅을 쳐 빼앗고 거기에 내가 너희에게 세우려고 하는 거룩한 백성으로,제사장 나라로, 내 소유의 보물로 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거대한 민족의 지표를 가지고 나가는 백성인데도 그들이 원망을 했습니다. 그것은, “왜 우리가 나가는 길에서 이 민족의 지표가 이렇게 불분명하냐?” 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세히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좀 자세히 가르쳐 주셔야겠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냐, 그러냐? 내가 자세히 일러주마”고 하셨을 것입니다. 아도나이로서의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 때문에 원망한 것이 아니고, 먹을 것을 가지고 타박을 한 것입니다. 식물이 박하다고 타박을 했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역려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일정한 곳에 안착하고 좌정하여 정착한 산업을 구성해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서야 정착하여 농사를 짓든지 나중에 교역을 하든지 해서 정착 생활을 할 참입니다. 그 때에 가서는 그런 정착된 경제 기구를 가질 것이나 지금은 아직 그런 기구를 가질 내용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그런 기구가 없는 까닭에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손을 펴시사 지금 지탱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경제의 기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기적의 손으로 먹여 주시므로 산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회 생활을 할 때 먹기 위해서 경제 기구라는 것을 조직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동시키고 또 교역을 해서 자기들의 먹을 것을 마련해 나갑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아직 그러한 정상적인 경제로서 생산 작업을 시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이들에게 관대하셨고, 그만큼 이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이것은 특혜로서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먹을 것을 가지고 원망했습니다. 만일 저들의 피땀을 흘려가며 땅에서 쌀을 생산해 냈다면 원망한들 별수 없으니까 짹 소리 안했을 것입니다. ‘이것 박한데 이것밖에 없나?’ -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니까 원망을 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이 원망하는 태도는 무엇인가? 또, 그 원망만을 없애는 것으로서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원망만을 없애려고 하셨더라면 먹을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시면 됐을 것입니다. 그 좋아하는 생선을 주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다른 것으로 좀 맛있게 요리를 요새 말로 하면 해쉬 라이스 같은 비빔밥이라도 만들어서 주었을 것같으면 -우리야 비빔밥 좋아하지만 그 사람들은 무얼 좋아 하는지 알 수없지만-먹고서는 에헴 하고,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는 찬송이나 한번 했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원망보다 불신앙이 문제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지금 하시려고 하는 일은 원망 자체를 막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원망하는 품성이 나쁘다 하고 그것을 두들겨 고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망하는 버르장이, 요것을 매로 조금 때려서 고쳐야겠다’하고 불뱀이라는 매로 때려 고치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저 사람들에게 꼭 있어야 할것으로 강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제1세대도 그것이 없어서 실패하고 넘어지고만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능히 들어가 정복하고, 능히 하나님의 거룩한 에코노미를 세워 나갈, 그러한 역사를 전개시킬 신앙이었습니다. 그런 확실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그 능력을 자기가 힘입고 나가는 신앙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도가 되는, 은혜를 내려 주시는 파이프와 같은 그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파이프를 하나님 앞에 대고 있어야 여러 가지 필요한 은혜가 올 터인데 그것을 가지지 못해서 넘어졌습니다. 
 

이 백성이 원망하는 그 저변을 살펴보면, 허락하신 땅을 정복해 들어가서 거기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태를 세울만한, 그러한 은혜를 받을 만한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랬는가? 첫째, 그 사람들은 은혜의 방도의 중요한 요소인 인식론이 부족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신앙의 지적 요소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어디로 가는 것이냐에 대한 명확한 의식이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광야 이스라엘의 유사성
 
이제부터는 이 문제를 오늘의 교회의 문제와 비교해 가면서 공부해 나가겠습니다. 먼저 오늘날 교회는 왜 땅 위에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의식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땅위에 교회를 만들어 놓으셨는가? 몇 사람들이 땅 위에서 예수 잘 믿다가 천당 가려고 정거장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가? 마치 비행기표를 예매해 두었다가 비행기 타고 가듯이, 하나님이 부르시면 후루룩 타고 천당 가려고 기다리는 터미널 빌딩인가?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것에 대한 바른 인식이 부족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 땅 위에 교회라는 한 사회 형태를 만드시어 그것을 중심으로 어떤 생활을 하도록 하셨는가에 대한 각성이 빈약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때의 이스라엘적인 교회, 곧 구약 교회가 거룩하게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명확한 각성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있어야만 신앙이 생길 터인데 그것이 없었습니다.
 
 
신앙은 덮어 놓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믿음을 줍소서. 믿음을 줍소서”하고 밤새도록 기도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했습니다. 말씀이 들어가지 않고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그 계획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서고 거기에 대한 자기의 기대가 생길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 이것은 과연 그렇다!’고 할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 이렇게 되어야만 하겠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할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원하지도 않는다면 믿음은 소용 없습니다.
 
 
어디에 들어가길 원하지 않는데 믿는다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항상 “바라는 것의 실상”으로서의 믿음입니다(히 11:1). 무엇을 바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서 우리는 나라를 건설해야겠다. 우리는 거기에 있는 기성의 문화를 파괴하고 새로운 문화를 건설해야겠다”고 하면서 그것을 바랐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까 해 주신다”하고 이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람과 믿음이 약했습니다. 거의 믿음의 자취가 안보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인 까닭에 하나님께서 하시되 우리의 몸뚱이를 쓰시고 우리의 생각을 쓰시고 우리의 인격적인 활동을 쓰셔서 하실 것이다’는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빈약했습니다. 적어도, 그들의 좁은 민족 이상이 아닌, 거룩한 구약의 경륜으로서의 호방한 이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교회가 교회로서의 확연한 기초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랬을 때 무슨 믿음이 생기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을 줍소서”해 봤자 믿음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고서는 무엇을 해 본다고 한들 될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 되는 것 같지만 되어도 별 것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클럽을 만드는 것을 보면 믿는 사람이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 더 잘 합니다. 로타리 클럽 같은 것은 교회보다도 훨씬 많은 돈을 내 가지고 일을 잘 하고 자선 사업도 많이 합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성격이 불확실한 것은,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로 약속하셨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다,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하는 확증과 그 확증을 가질만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해 주셨다는 확증을 토대로 한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여러 번 크신 손, 펴신 팔로 그들을 건지시고 필요한 때에 물과 먹을 것을 주셨고 그리고 신발과 옷이 해지지 않게 하셨는가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의식주를 늘 공급하신 것과 또한 악한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하시며, 때때로 징벌을 하시지만 그 때마다 크신 자비를 나타내셔서 보존하시면서 끌고 나오신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어디인지 그들을 데리고 가시면서 무슨 일을 하시려고 그들을 이렇게 보존하신다는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네가 다 활동을 잘해서 사는 줄 알며, 자기네가 부지런히 장사하고 일하니까 나는 잘 먹고 잘 산다고 착각하고,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을 이루시려고 자기들을 기르시고 보존하시며 나가시는가를 생각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교통 사고로 죽고 병들어 죽고 어려운 일로 죽기도 하지만 오늘날까지 자기가 죽지 않고, 액을 면하고 병신도 되지 않고 건강도 잃지 않고 이만큼 살아 나온 것이 자기 재주로 된 줄로 아는 것이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런 생각을 이 백성들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이렇게 크신 손, 펴신 팔로 보존하시며 나를 끌고 나가시는가, 무슨 목표가 있는가, 뭘 하시려고 하시는가. 그리고 왜 나를 이 광야로 이끌어 내시어 어디로 가라고 하시는가?’ 지금 여기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니 밤낮 눈 앞의 현실 문제만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아 이 먹을 것이 박하다! 아, 길이 멀다!”고 한 것입니다. 길이 멀면 어떻다는 말입니까? 멀어도 목표지에 이르기까지는 갈 길은 가야지 길이 멀다고 타박할 까닭이 없습니다. 멀면 먼 대로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좌우간 목표지까지는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도 않고 길이 멀다고 하는 것은 짜증을 부리는 것입니다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무슨 길이 이렇게 머냐?”“이젠 그만 가고 이 근방 어디에서 적당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네의 목표 목적지에 대한 사랑이 -마음 가운데 맹렬히 타오르는 열정이- 없었습니다. 한번 보지도 못했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도 못하는 땅에 대해서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정탐꾼들이 다녀와서 보고하자 굉장히 놀라 한바탕 울고 돌아가려 했던 제 1대의 자손들인 까닭에, 그들에게서 얼마나 위대한 교육을 받았는지 모르나 그나쁜 영향을 받으며 그들 가운데 뒤섞여셔 자라난 까닭에 그러한 것이 없었습니다. 나쁜 것은 이렇게 항상 더 빨리 자라나는 모양입니다.
 
 
 
 
불뱀을 보내신 의미 - 신앙의 분기점 제시
 
그런고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믿음을 일으키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신 것은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불뱀에 물려서 다 죽게 된 그들이 살려면 믿어야 했습니다. “믿음으로 살든지 못 믿겠으면 그 자리에서 죽든지 해라. 더 이상 데리고 가야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한 분기점이었습니다. “원망하지 말고 가자”가 아니라, “믿고 살든지, 믿지 않고 죽든지 해라”그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믿기 쉬운 것부터 시작하자, 제 일보, 제 일과부터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제 일과는 뭔가? 구리뱀을 하나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 보면 산다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한번 쳐다 보면 산다는 것처럼-. 그런데 그것을 안 쳐다 보고 죽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렇게도 쉬운 이야기가 있습니까? 그러나 너무 쉬워서 믿지 못해 죽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 원, 모세가 와서 여기에다 손을 대고 기도나 한다면 낫겠지만, 아, 독사한테 물려서 몸이 퉁퉁 붓고 막 뜨끈뜨끈해져서 죽게 됐는데, 한번 쳐다 본다고 살겠는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쳐다 보면 산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자기네가 배우고 들은 것들 중에는 없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나, “쳐다 보면 산다”는 이 말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어리석은 이야기 같지만, 제일 하기 쉬운 일을 하라는데 무얼 못하겠다는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아픈데 엉금엉금 기어가라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고개만 한번 돌려 보라는 말인데 뭘 못하겠다는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믿는 것은 가장 쉬운 조건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가장 쉬운 조건 하나뿐입니다. 뭘 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를 다 내 버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술 먹고 담배 피우는데 그것을 끊고 예배당 나오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먼저 믿으시오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시오” “예수님이 누구요?”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돌아가시고 당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구주시오. 그 구주를 당신은 마음 가운데,‘아, 나는 믿습니다’하고 마음으로 매달리시오. 그러면 되는 거요.” -그런데 그것을 못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고개 한번 돌려 쳐다 보라는 것인데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쉬운 조건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쉬운 조건이지만 거기에는 있어야 할 믿음의 요소가 다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쳐다본 자체보다 “하나님 말씀” 믿은 것이 더 중요
 
그러면 이 쉬운 조건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지금 이들이 어디서 뱀에게 물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독사에게 물렸다는 장소가 하도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 아라바길에, 즉 아카바만의 에시온 게벨이 있는 데서부터 에돔까지 사이의 아라바길에는 독사가 참 많다고 합니다. 에살핫돈(왕하 19:37, 앗수르 왕 산헤립의 아들)도 여기를 정복하러 갔다가 그의 군인들이 독사한테 굉장히 많이 물려 죽었다고 합니다.
 
 
좌우간 이 백성들이 독사가 많은 이 고장을 지나가면서 하필 원망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거기에 있는 독사로 물게 하신 것입니다. 이 독사는 불뱀이니까 그 자체가 화덕같이 훨훨 달아올랐는지 혹은 번쩍번쩍 빛났는지 그것은 알 수 없으나, 물려서 독이 오른 사람은 아파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만일 다른 성한 사람들이 주욱 둘러서 있고 혼자만 아파 누워 있었다면 그들이 “야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고 할 것이고, 혹은 반신불수를 떠메고 가듯이 떠메고 가서 “저기 있다. 저것 쳐다봐라. 내가 잘 보이는 곳에다 반듯하게 뉘어주마” 이렇게 했겠지만, 지금은 다 물린 사람들만 있으니까 피차 아파서 늘비하게 쓰러져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긴 장대 위에 구리뱀 하나를 달아 놓고서 크게 지른 소리입니다. 아마 거기에 있던 장로들에게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이르라고 했을 것입니다. - “누구든지 독사에 물린 자는 이것을 쳐다 보아라.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사 구리뱀을 만들어 매어 달라고 하시면서 이것을 쳐다 보면 산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쳐다 보아라, 쳐다 보면 살 것이다” 모세가 이렇게 장로들에게 말하면, 장로들은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도자, 선지자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구리뱀을 바라 보는 자는 살리라고 하셨다. 이 구리뱀을 바라 보아라”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똑똑하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너희들 불뱀 쳐다보아라. 그러면 산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점은 구리뱀을 쳐다본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다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전하면 독사에게 물린 사람들이 그 말을 듣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치 독사에게 물린 사람이 그 독에 중독되어 죽듯, 사탄이 불뱀처럼 물어서 죄에 떨어진 사람은 멸망한다. 그러니 죄는 독사의 독보다도 더 악한 것이다. 예수님은 죄가 가득한 인생의 모양을 취하고 나오시는 점에서 구리뱀과 같다. 그러나 구리뱀은 도무지 독이 없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또한 조금도 죄가 없으신 분이다. 그 예수님을 바라 보라”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구리뱀을 들었다”는 고사에 비춰서 당신도 또한 “들리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에는 이제 알레고리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용케 서로 들어맞은 것이지, 꼭 그렇게 해석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광야에서 마치 모세가 구리뱀을 들듯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쳐다 보고 산 듯이, “나도 들려야 할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들렸다는 그 점에서는 같은 것이지만, 그 광야의 구리뱀은 나다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혹시 비슷한 데가 있다면 마치 뱀에 물린 사람은 죄가 있는 죄인의 모양을 가졌다는 점에서 예수님도 그 죄가 있는 사람의 모양을 그대로 가지고 계셨지만, 구리뱀 속에 일푼의 독이 없듯 예수님의 속에도 일점의 죄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바라본즉, 곧 십자가를 바라본즉 사람마다 구원을 받지 않느냐?”고 합니다만, 그것은 다 십자가를 안 다음의 이야기이고 십자가를 모른다면 그것을 쳐다본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구리뱀을 갖다가 “이것은 십자가를 표상한 것이다”고 해 보아야,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그 사람들이 그것을 쳐다 보고 십자가를 생각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까지 생각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쳐다 봐라, 그리고 살아라” 그것뿐입니다. 너무 지나친 유추를 거기에다 붙일 까닭이 없습니다.
 

여기 민수기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거기에서 복음을 바라보라는 것도 아니고, 십자가를 바라 보라는 것도 아니며, 예수님을 바라 보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약속하셨다. 실지로 쉬운 약속이다. 가장 쉬운 분부다. 그렇게 해라, 그러면 산다” 그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거역하고 싫어하여 타박하고 나가지 말고, 쉬운 이 말 한 마디를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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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https://www.esesang91.com/b/preach/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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