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자태 제5장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3)_김홍전
제 5 장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3) (민 21:4-9)
오늘 저녁에 읽은 민수기 21장 4절부터 기록된 구리뱀 혹은 놋뱀에 대해서는 우리가 과거에도 느후스탄,(놋뱀또는 놋조각)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배울 때, 즉 히스기야왕이 그 때 이미 700년 이상이나 계속해서 내려오던 놋뱀을 깨뜨린 이야기를 배울 때 그 몇 가지 의미에 대해 상고한 바 있습니다. 지난 주일 아침과 저녁에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의 자세와 그 신앙이 직면한 일대의 위기, 즉 분기점이라는 문제를 생각했는데, 우리가 또 한번 이 문제를 들어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복습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형성된 것을 살펴보십시다. 먼저 자연적인 상태로 보면, 한 가족이 애굽에 들어가서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차츰차츰 번성해서 처음의 불과 70여명의 소수가 430년 이내에 장정만도 60만명이나 되는, 그러니까 전체의 수로 보아서는 250만 내지 300만이나 되는 거대한 수를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상태로 거대한 수를 형성한 것이 하나의 민족적 형태를 취하게 된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그들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민족의 문제를 뚜렷이 하면서 한개의 역사적 의의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건지심을 받아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와- 시내산 밑에 이르러 거기서 하나의 민족으로서 확실히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사명을 받은 데에서부터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의 노예 민족에 불과했지만, 애굽에서 하나님의 크신 손, 펴신 팔로 건지심을 받아 홍해를 건너 마라와 엘림과 르비딤을 지나 시내산 밑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하나님이 그 백성을 건지신 본래의 크신 뜻을 보이시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보물이 되며, 또한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의 나라가 된다(출 19:4-6)는 큰 민족적 사명과 존재의 의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과 사명과 의의를 분명히 나타내고 완수하기 위해서 그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제도와 생활상 필요한 규범을 그들에게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성막을 지으라는 하나님의 크신 분부로서도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분부대로 하나님의 성막을 짓고 그 성막을 중심으로 그들의 민족적인 정치 생활을 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민족적인 생활의 근거지를 향해서 전진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단순한 하나의 정치적인 조직일 뿐만 아니라 산업의 흥성과 나아가 민족 특유의 문화적 형태라는 것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백사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이라고 하는 선주 민족의 위대하고 거대한 이교 문화가 번성하고 있는 땅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그들은 거기에 들어가 그 문화를 파괴하고,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 위에 그들 자체의 독특한 히브리적인 문화를 건설해 나가야 할 사명을 가진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상태
그러나 이 백성들의 상태를 보면, 그들이 애굽에 있는 동안 가지고 있었던 특성이라는 것은 애굽 사람들이 강제로 노예화 했다는 사실밖에 없었습니다. 인구가 번성했다는 것이 가장 특성적인 사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백성들이 애굽에 있는 동안에 독특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희미하나마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인 한 관념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는가 하면 신앙이라고 할 만한 훌륭한 형태는 이루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종교 관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 종교 관념조차도, 종교의 중심이 되는 신앙의 대상에 대한 개념이 사실상 불분명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생활을 여러 가지로 연구하고 조사해 보면, 저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고 섬긴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는, 그가 미디안에서 자기를 보내시는 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비로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즉 “나는 나일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일 것을 증명하는 그런 하나님이다”하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번역한 바로 그 이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일단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들어가서 “야훼, 그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할 때, 그들에게는 ‘야훼’라는 하나님께 대한 개념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그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너희 선조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출 3:15)고 했을 때, ‘아, 우리도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약속을 하셨다는 것을 조상들로부터 들었다’하는 정도였을 뿐입니다. 그들에게서는 이미 거룩한 하나님께 대한 개념, 즉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지적인 내용의 근간이 되는 ‘신앙의 대상’에 대한 교훈이 말살되어 있었습니다. 단 한 사람의 예언자도 이스라엘 백성이 담부지역으로 고통하는 그 속에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격려시켜 ‘일어나라’고 한 기록이 없습니다.
모세가 자기로 인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이 저들에게 임하는 것을 저들이 혹여 라도 알기를 바라서 궁중의 모든 환락과 영화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40장년의 훌륭한 모든 위치와 또 왕위 계승의 가능성까지도 다 포기하고-나가서 그 백성과 더불어 함께 고통 하려고 그들에게 들어갔지만, 그들은 모세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예언자 가운데서도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위대한 사람이 그들 속에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네가 누구냐?”하고 대든 것입니다. 이렇게 대들며 자기들끼리만 떠든 것이 아니라 그를 배반하여 팔고 애굽의 바로에게 고자질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패장 하나를 죽인 것을 큰 사건이나 난 것같이 조작해서 마침내 모세를 모반자로 낙인을 찍어 찾도록 만듦으로써 그는 더 이상 거기에 있지 못하고 피할 수 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라는 것이 이렇게 자기네의 구원자를 배반하는 종교라면 그런 종교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런 사건은 이 사람들의 종교적인 빈곤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들은 물질과 육신만의 노예일 뿐만 아니라 그 정신 상태에 있어서도 암매의 노예 노릇을 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상태에서 출발한 오합지졸과 같은 사람들을 군대로 끌고 나가서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대하고 가장 강력한 역사를 만들어 내는 한 민족으로 조직되도록까지 끌고 나간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그 노고와 심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리고 모세의 위대성이 거기에서 참으로 빛나는 것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이 백성은 많은 과정을 겪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 여정 중 깨달았어야 할 신 지식
이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으로 애굽에서 해방되어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서 신 광야로 들어가 거기에서 다시 시내 광야로 내려간 것이 그렇게 많은 시일을 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달 이내에 다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리고 시내 광야에서 1년 정도 있다가 제 2년에 다시 노정을 출발해 저 가데스 바네아라는, 새로 허락하신 땅의 어귀까지 갔는데, 이 거리 역시 먼 거리가 아닙니다. 마일로 따지면 150마일, km로 240km, 날 수로는 불과 열흘밖에 안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러나 그후 다시 그곳에서 홍해 길로 내려와 홍해의 에시온 게벨을 거쳐 거기서 100마일쯤 되는 에돔의 국경을 돌아 아라바 길로 북상하여 모압 평지까지 이르렀느데,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압 평지에 이르는 기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5개월 이내에 다 거기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길을 가면서 이 백성들은 어떠한 신을 체험했는가?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당신을 스스로 증거해 나가시는 신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제 이 백성이 가지고 있어야 할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지적 요소였습니다. 신앙은 신앙의 대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또 신앙은 신앙해야 할 조건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조건은 기대와 희망 가운데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고 기대 할 때 비로소 신앙이 생깁니다. 그리고 기대할 때에는 그 기대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방법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될 때 자기 이상의 능력에 대한 기대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에 대한 기대는 그 능력의 발원처에 대한 확실한 개념, 즉 신앙의 대상에 대한 확실한 개념이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의 의미
그런데 이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모세가 물었을 때, 모세에게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나는 장차 나일 것이다” 영어로는 “I will be what I will be"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나는 나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존재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정적으로 고요히, 그리고 어떤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렇게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면 그러한 신 개념과 신 추리라는 것은 부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특히 구약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가르치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상념은, -이것은 또한 구약 신학상 심히 중요한 문제로 우리가 주의해서 배워야 할 것인데- 하나님은, 철학자들이나 혹은 스콜라 신학자들이 독특히 논증하고자 하는 그런 정적인, 하나의 위치를 점유하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은 하나님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 가부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다”하는 전제 하에서 시작했지, “하나님은 이러이러하니까 계신다”하는 신의 존재의 증명을 위해 조그마한 빛이나 여운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신은 존재한다”는 데서부터 시작하되, 신은 역사의 과정 가운데에서, 생활의 증험 가운데에서, 또 현실 생활 속에서 자기가 맛보아 앎으로써 비로소 그 존재를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히브리 말로 표시할 때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즉 “나는 장차 나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역사의 과정 속에서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존재를 대표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표시하시기보다는 하나님 당신이 어떠한 하나님인 것을, 즉 그의 독특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역사의 과정 가운데 당신을 증명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역사의 과정 속에서 당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지금 이야기가 호방하게 되어 가는데, 이것을 구약 신학이라는 학문의 용어를 빌어서 말한다면, “신이 어떠한 존재를 가지시며, 어떻게 당신을 계시하시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역사의 과정 가운데에서 하나님 당신이 당신인 것을 증명해 나간다고 할 때, 역사를 통해서 계시가 더욱더 하나님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낸다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이른바 성서신학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서신학상의 문제를 우리는 성경 중 제일 먼저 출애굽기에서부터 현저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 문제를 출애굽기에서부터 현저하게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은, 창세기부터가 모세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그 모세가 실제로 가장 접근한 사실을 기록해 나간 것이 출애굽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를 살펴 나가는 것이 항상 연구에 편리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노예 민족에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 것을 보이셨느냐 하면, 크신 손. 펴신 팔로, 애굽 백성은 치시되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해 놓으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건지실 큰 의사를 보이시되, 마치 이신론의 신처럼 “나는 천지를 내고 모든 것을 공평히 관찰하고 재판하는 하나님이다. 나는 인류를 감독하고 자세히 쳐다보고 있다. 나는 너희를 건질 테다”하면서도 팔짱을 끼고 앉았고, 보이지도 아니하며, 다만 선언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역사 가운데에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백성을 구별하시되 애굽에게는 당신의 치시는 손을 펴서 임하시고, 이스라엘 위에는 당신의 특별하신 계호와 은혜의 표시로서 빛으로 임하시고, 장자를 살리시는 것으로 임하시며, 애굽에 내린 열 재앙의 위해가 하나도 내리지 않도록 하신 것으로 임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이스라엘은 독특하게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러한 현실 가운데에서 무엇을 배워야 했는고 하니 위대한 선지자 모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명해 나간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역사상 여러 이민족 가운데에도 선지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선지자의 독특성은 정적인, 정지의 하나님, 즉 ‘존재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동적이시며, 창조하시고 역사의 과정에서 당신을 증명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실증해 나가면서 백성에게 그것을 외치고 가르치는 데 있었습니다. 애굽에도 선지자가 있었고 예언자가 있었으며, 바빌로니아에도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의 독특한 점은 그런 데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성호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이러한 동적인 역사의 과정 가운데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는 점에서부터 하나님을 알기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느끼는 하나님은 항상 능력의 하나님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찌기 하나님은 당신을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히브리말로는 ‘엘 샤다이’라는 말로 표시했습니다(창 17:1, 28:3, 35:11, 43:14, 48:3). 그러나 역사의 과정이 점점 훨씬 짙어지고 더 진전되면서부터는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비교적 족장 시대의 이름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 이전에 중요한 성호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엘 엘룐’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또 있었습니다(창 14:18,19,20,22).
그러나 출애굽기에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즉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실 때에는 단순히 능력이신 하나님일 뿐 아니라, 당신이 선택한 이 백성과는 계약을 맺으시고, 맺으신 계약 가운데에서 그 백성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시며, 또 사명을 주시고 그것을 달성케 하시며, 그것을 달성케 하기 위한 역사의 과정을 당신이 친히 운전하시는 하나님으로 당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한마디로 구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께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을 표시하는 것인데, 그것은 ‘아도나이’라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주’라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주이신 까닭에 이후 이스라엘 백성 위에 왕 노릇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신 까닭에 주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이신 까닭에 왕 노릇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로서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위에 임하시고, 주재로서의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며 또한 언약을 맺으시고, 맺으신 언약에 의해서 그 백성에게 주신 사명을 달성케 하신다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강하게 느껴졌던 또 하나의 사실은, 하나님은 항상 주재하시사 필요할 때 저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을 하신 다음 백성들이 성막을 지어 놓으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친히 거하셔서 즉 ‘샤켄’하셔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상하기 위해서 지성소에서부터 영광의 구름이 올라가는데, 이것을 ‘거하시는 구름’, ‘쉐키나의 구름’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홀로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중 가운데 같이 거하시며 백성과 더불어 만나사 그들과 교통하시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내려 주시고 그들의 사명 수행과 존재 가치를 온전케 해 주신다는 큰 사실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거하신다는 이 사실은 또 하나의 가장 중요한 사상입니다.
이방에도 이스라엘과 유사한 신의 명칭이 있음
물론 이것은 이방 종교 가운데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의 종교 가운데에도 자기네의 신이 주라는 사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른 종교의 여러 현실을 조사할 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알’이라는 이름 자체가 주라는 말입니다. 이 바알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에 자기의 주 하나님을 표현하려 할 때 ‘아도나이’라는 말과 뒤섞어 쓰던 이름입니다(호 2:16).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바알에 대해서 강하게 대립하여 그것을 타매하면서 ‘아도나이만이 여호와 하나님이다’하는 것을 나타낸 적도 있습니다(호 2:8-23).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오히려 그 가나안에 이미 수립된 가나안 백성의 종교에 정복당했다는 사실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아도나이’라는 귀한 이름을 가졌지만 ‘바알’이라는 이교적인 이름과 뒤섞어 가지고 하나님을 바알적인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시돈 이나 두로에 있는 그 가나안적인 바알을 그대로 하나님에게다 부합시킨 것은 아닙니다. ‘바알’이라는 명의를 가지고 자기네 하나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우상 섬기기를 좋아해서 그랬다고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엘로힘’이라는 말이나, ‘야훼’라는 말 자체도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호라는 것이 그 명의에 있어서 독특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구약에서 ‘엘로힘’이라는 말이 하나님이라는 말로 사용되지만 그것이 우상에게도 사용되고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원래 ‘엘로힘’이라는 말이 복수인 까닭에, 우상에게 사용될 때 어느 때에는 우상들, 혹은 신들이라는 뜻인 ‘엘로하’라는 단수대신 복수 그대로의 ‘엘로힘’이라는 말을 쓰고, 그 밑에 오는 동사가 복수 동사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37:12).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것일 때에는 ‘엘로힘’이 단수 명사로 쓰이면서 단수 동사가 늘 붙어 다닙니다. 그런 까닭에 ‘엘로힘’이라는 것이 하나님 당신의 독특한 이름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 나라의 하나님이라는 이 성호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의 참 하나님께 붙여진 독특한 독점적인 성호가 아닌 것과 똑 같습니다. 중국 말에서의 상제라는 말이, 이미 있던 옥황상제에 대한 칭호인 것처럼, 우리 말의 하나님도 우리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던 고대의 종교, 가령 육당 최남선 선생의 설을 빌리면 고대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이 저 태양이라고 하는데, 우리도 애굽 사람들과 같이 그 ‘라’라고 하는 신, 곧 태양신을 섬겼거나, 또는 무엇이 됐든지 자기네가 종교의 대상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가지고 있던 신을 하나님이라고 했다면 그것도 또한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신의 칭호가 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빌어다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독특성
이런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호 자체가 독특해서 이스라엘의 종교가 독특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성호를 가지고 당신을 보이셨든지 간에 당신 자신의 나타나심과 당신의 속성, 그리고 그 속성으로 말미암아 구성되는 개념의 독특했기에 이스라엘의 종교가 독특했던 것입니다. 어느 점에서 그러하냐 하면 전능하신 그가 저들과 늘 더불어 같이 계시면서 교제하시되 그 교제하는 차원이 절대로 이교 신의 교제의 차원과 같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는 점에서, 말하자면 “구별되어야 하겠다”는 점에서 이교의 어떤 신과도 같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구별되고 모든 권위와도 구별될 뿐 아니라, 모든 신에게서도 나는 구별된다. 그런고로 구별된 위치에서 나와 교제해라. 다른 어떤 신을 섬기듯이 나를 섬겨도 안되고 다른 어떤 신과 교제하듯이 나와 교제해서도 안된다”고 하신 것입니다(신 17:2-5).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후 이스라엘 백성을 누누이 타매한 이유는 그들이 이방신과 교제하는 소위 디비네이션, 강신술, 영매술, 영교술 등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맹렬하게 타매하시면서 “용서없이 죽일지니라”하신 것입니다(레 20:1-8, 신 17:2-5). 왜냐하면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과 이교의 신을 뒤섞어서 하나님의 차원을 낮추게 할 위험이 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1 세대의 실패
이렇게 하나님께 대해 독특한 위치 가운데 있었던 제 1세대, 곧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은 이제 시내산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거리는 앞에서 말한 대로 약 240 km, 불과 열흘 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앞은 허락하신 그 땅입니다. 이곳은 바란 광야에 있는 곳으로서 일찌기 아브라함이 하갈을 내어 보냈을 때 하갈이 나가서 방황하던 곳입니다(창 16:7). 아브라함이 살던 곳(헤브론, 창 13:18)에서 멀지 않은, 허락하신 그 땅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 1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허락하신 땅 문턱 앞에 이르러서 “우리는 못 들어가겠다”한 것입니다. “이 땅에는 아낙 자손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 우리를 장사 지낼 땅이 없어서,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말이냐! 자,장관 하나를 세워 가지고 돌아가자!”하고 적극적으로 반항한 것입니다. 이 백성들의 반항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주일에 우리가 이야기한 까닭에 다시 반복을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1세대는 완전히 실패를 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애굽적인 요소와 애굽적인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독특하게 당신 자신을 보이시고, 증명해 주셨으며, 독특하게 교제를 하시려 하셨고 그리고 더 할 수 없이 그들을 계호하셨지만 그들은 그런 하나님께 대해서 느끼고 깨달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있었던 제 1세대는 거기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애굽을 나올 때에는 큰 신앙과 큰 기쁨을 가지고 나왔고, 하나님께서 때때로 물과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제도를 내시며 성막을 짓게 하셨을 때에는 다 마음 가운데 큰 소망이 부풀어 올라서 “자, 얼마 안 있어서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했지만, 이제 금방 그 곳에 들어갈 수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 섰을 때에는 “못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신앙은 뭐냐 할 때 그들의 신앙은 끝까지 애굽적인 차원, 애굽의 이교적인 영향의 테두리에서 못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제 2세대
따라서 이들을 데리고는 안되겠다 해서 선택한 것이 제 2세대입니다. 즉,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미만이던 사람과 광야에서 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장정만 다시 모압 평지에서 세어 보았을 때 제 1세대와 그 수에서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을 지난번에 우리가 배웠습니다. 모두 60만 이상이었습니다. 전에는 603,000명이 나왔지만 이번에는 602,000명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수의 새로운 세대를 데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한 끝에 다시 원 기점인 가데스 바네아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가데스 바네아에서부터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하면 에돔과 더불어 싸워 이겨서 에돔을 통과했어야 할 터인데(민 20: 14-21).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사해에서부터 아래로 160km나 길게 내려온 에돔의 국경을 우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회하려니까 다시 아래로 내려와 홍해의 아카바만에 돌출한 엘랏 혹은 에시온 게벨까지 왔다가 거기서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길은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론은 이 길을 가다가 호르산에서 죽었습니다(민 20:22-29). 광야를 헤맨지 40년이 되던 바로 그 한해에 모세의 3남매가 다 죽었습니다. 미리암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미 죽었고(민 20:1). 아론은 가다가 도중에 호르산에서 죽었고 이제 모세만 홀로 남아 이 백성을 끌고 전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진해 나가다가 도중에 다시 길이 험해지니까 백성이 또 원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망의 내용(1) - 선조의 역사까지도
민수기 21장 4절부터 보면,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했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 중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소수입니다. 이미 광야에서 40년이나 지낸 까닭에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약 40세 이상 된 사람들입니다. 애굽에서 20세 미만일 때 나온 사람들만이 남았을 터이니까 제일 나이 많이 먹은 사람도 60세밖에 안되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백성의 주축은 물론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즉, 20세에서부터 40세까지의 청장년들이 주동이 되어서 군대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40세에서 60세까지는 요즈음 어떤 나라에서나 다 그렇듯이 예비역으로 뒤처져야 했습니다. 이렇게 나이 든 사람들은 뒤로 처져있고 장정들이 앞에 서서 나가고 있는데 이 장정들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들에게 출애굽의 경험이 있는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닌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까닭에 애굽에서 나온 경험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태어났다 해도 시내 광야나 그 위의 신 광야에서 난 것이 아니고 여기의 바란 광야나 또는 진 광야(가데스 바네아가 있는 광야)에서 났으면 난 것입니다. 그 일대에서 빙빙 돌다가 다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애굽을 나왔다는 것이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 할 때에는 자기들의 경험만을 근거로 하지 않고 선조가 가지고 있던 역사까지 끄집어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그 원망은 40세 이상의 노년들이 모두 그렇게 하니까 청장년들도 “왜 우리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해서 죽게 하는고?”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원망의 하나입니다. 만일 40세까지의 청장년들이 도무지 그런 원망을 아니했다고 가정한다면 이 원망은 적어도 40세 이상의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한 것입니다.
원망의 내용(2) - 식물
그 다음에는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식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기까지, 좌우간 허락하신 땅에 가서 먹을 것이 있을 때까지는 만나를 계속해서 내리셨으니까 식물이 없을 턱이 없습니다. 고기가 정 먹고 싶다면 그 수많은 약대, 수많은 양떼들 가운데서 잡아먹을 수도 있었습니다(출 12:38). 그렇게 자꾸 원망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원망을 하려니까 이런 것들을 가지고라도 원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도 없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물이 없어서, 기갈이 심해 죽은 적은 없었습니다. 물이 없다 원망하면 모세가 분노해서도, 좌우간 지팡이로 땅을 쳐서라도 물을 내어 먹였습니다. 물이 없어, 기갈이 자심해서 그만 길에 넘어져 죽었다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옷도 해지지 않게 해 주시고 신발도 해지지 않게 하시고, 그 사람들의 체력도 약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신 8:4). 거기서 그만 넘어져 버리지 않게 다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원망하려니까 그런 것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즉 식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박한 식물은 싫어한다. 이렇게 밤낮 먹기 싫은 것 한가지만 먹으라고 해서 재미 없다”하는 이야기입니다. 알쏭달쏭한 것을 다 먹어 보아야 하겠다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원래 먼저 왔던 사람들이 애굽에서 먹던 외와 참외와 수박, 그 다음에는 부추, 마늘, 파 그리고 생선 이런 것들을 못 잊어서 엉엉 운 때가 있던 것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마 자기네 선조, 자기네 선배가 모두 그렇게 탐욕을 일으키고 울던 것을 잘 보아 온 터이라, 그들도 그렇게 한번씩 해 보는 모양입니다. 민수기에는 원망하는 일이 여러번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원망을 하는데도 마치 스트라이크나 하듯이 조직적으로 잘 합니다. 동맹파업하는 데 길이 난 사람들은 멋있게 조직을 해서 멋있게 와-하고 파업을 하고는 딱 그쳐버리고 마는데, 이 사람들도 원망하는 데 있어서는 상당한 기술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기술은 아닙니다.
징계 불뱀을 보내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들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 21:6). 불뱀이 나와서 막 무니까 이 사람들이 그 불뱀, 독사에 물려 그 다음엔 퉁퉁 붓고, 독이 몸에 빙빙 돌아가지고 나중에는 열이 광장히 올라 뜨거워하며 죽었습니다. 왜 불뱀이라고 했는가? 그전에 우리가 배웠지요? 모든 학자들이 다 “아마 이랬을 것이다. 아마 저랬을 것이다”하며 상상만 할 뿐 알길이 없다고-. 그 뱀이 무는 것이 어떻게 뜨겁게 딱딱 쏘는지 마치 거기에다 불이나 켜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불뱀이라고 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뱀의 껍대기에 뻘건 불과 같은 형상이 있어서 번쩍번쩍하니까 불뱀이라고 했는지 또는 뱀의 껍데기 위에 뜨거운 햇빛이 비취면 그것이 번쩍거리는 것이 불과 같아서 불뱀이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으나, 좌우간 모양도 위협적이고 또 물기만 하면 사람은 죽고마는 무서운 뱀이었습니다.
이렇게 뱀에게 물려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가니까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했습니다. 이제야 깨달았다 그 말입니다. 죽게 되니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망을 자꾸하면 가끔 이렇게 불뱀이 나와서 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이것을 보면 사람이 항상 고귀하고 좋은 환경에서만 좋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요즈음의 사회 개량주의자들의 의견대로 한다면 이렇게 원망을 해 버릇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환경을 주고 좋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오히려 더 무서운 사실을 보내 주셨습니다. 불뱀이 물어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불뱀이 와서 무니까 비로소 “아, 우리가 원망한 것은 잘못이었구나”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원망, 부패한 인간 본성의 표출
이 말은, 사람은 환경 자체의 여유 없음 때문에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가운데 부패의 본성이 있어서 거기에서 원망이 나오며, 또 이 원망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하나님께서 엄위로 나타내 뵈시기까지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불가부득이 인류 위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무서운 손이 때때로 강하게 지배할 필요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난하면, “가난하니 혁명을 일으키고 시끄럽게 하자!”하고, 괴로우면 “괴로우니 하나님을 원망하고 죄를 더욱 짓자!”하며,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으니 더욱 포학하고 사회 질서를 교란하자”고 야단을 냅니다.
그러면 먹을 것이 넉넉하면 그런 짓을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 가운데에는 본질적인 부패와 전적인 타락의 본성이 있어서 이것은 기회와 틈만 생기면 구실을 붙여서 악을 행합니다. 이러할 때에는 하나님의 징벌과 엄위의 무서운 손이 그들에게 때때로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을 막는 방식으로 비교적 선한 것과 좋은 것으로 주시는 데만 주력하시지 않고 때로는 무서운 엄위로 그들에게 임하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항상 부족한 것 같이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 그러냐? 내 은혜가 부족해서 그렇다면 내가 잘못 했다. 내가 은혜를 더 주마”하고 이렇게 후회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내가 은혜를 참 적게 주었구나”하고, “너희들 생각이 옳다”하시면서 사람의 그 생각에 양보하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가운데 누구의 생각이 옳으냐 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옳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은혜를 부족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은혜를 더줄 것이 아니라 징벌을 내려야 하겠다”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벌을 내리시면 비로소 은혜 주셨을 때의 은혜를 생각하고 “아이구 내가 건강했을 때가 좋았는데, 그 때는 괜찮았는데”하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용하시며 그들의 원망을 못들은 척 하시고 그대로 은혜를 베푸시고 계시는 것을 그들은 만홀히 여겨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뱀이었지 맛있는 음식과 평안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불뱀이 임하니까 백성들은 비로소 잘못 했다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도구
그 다음으로 불뱀 사건의 중요한 점은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 2세대의 신앙에 한 분기점을 이룬 것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도 우리가 누누이 얘기했지만 만일 성경에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 평안히 살면서 행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그들과 ‘같이하신’것으로 계시되어 있었다면, 즉 구약의 기록이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구약은 어떠한 신을 보이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한 부족의 신을 보이는 것밖에 안됩니다. 어떤 부족이든 어떤 민족이든 각각 자기의 신이 있어서 그 신은 그 민족의 복리를 위해서 특별히 은고를 베풀고 이 민족이 다른 민족과 더불어 적대할 때에는 이 민족의 편이 되어 준다는 점은 다른 어떤 이교의 사상 가운데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종교의 독특성은 어디에 있느냐?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 신 계시와 신의 도리의 독특성은, 여호와가 민족 신으로서 그 이스라엘 민족 위에 은고를 베푸는 점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왜 은혜를 베풀어 건져내셨느냐 하면, 모든 천하의 백성이 다 같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먼저 이들을 통해 나타내시고, 이것을 표본 혹은 프로토타입으로 삼아 모든 백성들이 거기에 도달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사명은 자기네만 거기에 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하만민 가운데 당신의 거룩한 경륜의 내용으로 한 민족을 세우시려고 할 때, 즉 만민 가운데서 모든 택하신 백성들을 뽑아내시려고 할 때 그릇과 도구로 쓰시려고 이스라엘을 세우신 것뿐입니다.
그런고로 여호와는 이스라엘 한 민족의 신으로서의 여호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한 민족을 특별히 은고해 가는 한 민족 신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이스라엘 적인 종교, 이스라엘적인 신앙은 천하에 독특한 것입니다. 이런 독특한 사상이 구약 가운데 특히 중요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여러 군소의 부족과 주위에 있는 여러 민족의 이교 사상과 혼동해서는 아니될 중요한 점입니다.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어떻게 거룩하신가? “나는 천하 만민 위에 공의로 판단할 뿐 아니라, 천하 만민에 대한 내 경륜이 있어서 그것을 펴련다. 펴기 위해서 필요한 그릇을 내가 취하여 쓴다. 이 때에 필요한 그릇은 이스라엘 너희다”그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필요한 그릇인 것뿐이지 천하의 다른 민족들과는 처음부터 독특하게 운명이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그릇 되이 생각해서 이스라엘은 아주 하늘에서부터 어떤 독특한 특권을 도장 찍듯 찍어 가지고 나온 것같이 늘 생각하고 자기네의 책임을 포기하고 자기네의 임무에 대해서 태만히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께 반역하고 나간 후에도 그들은 항상 이스라엘의 특권이라는 것을 기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괴상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큰 사상이 무엇인가를 오해한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의 특권만을 생각한다면, “아, 여호와는 결국 이스라엘의 독특한 신이구나, 그렇다면 여호와가 별다른 신이 아니고 여럿의 신이 아니고 여럿의 신, 가령 이 블레셋 사라의 ‘다곤’, 바릴로니아의 ‘벨’(사 46:1, 렘 1:2)과 뭐다를 것이 있느냐? 애굽에는 ‘라’신이 있고 이스라엘에는 여호와가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여호와를 이스라엘적인, 지방적인, 민족적으로 국한된 신으로 생각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여호와는 사람이 생각해 내고 교묘하게 꾸며낸 한 신에 불과한 것이냐 하면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놋뱀을 쳐다본 의미는?
이렇게 해서 여기 이 사람들은 불뱀에 물려 죽게 됐을 때 비로소 회개를 하고 모세에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이 불뱀에게 물려 죽는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7-9). 이렇게 뱀이 막 번성해 가니까 그들은 뱀이 떠나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밖에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물려서 죽는 사람은 죽을지라도 더 물리지 않게 해주십시오”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준비는 뱀이 떠나게 해달라는 이 사람들의 요구뿐 아니라 뱀에게 물린 사람들도 낫게 해주셨습니다. 즉, 이 사람들의 소원대로 뱀이 나오지 않게 하셨을 뿐더러 뱀에게 물린 사람도 나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이란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도록 하여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게 한 것입니다. 모세가 놋을, 청동을 가지고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놓으니 햇빛에 번쩍번쩍하는 것이 불뱀과 같은 형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면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그것을 쳐다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문제가 따릅니다. 이 사람들이 그것을 쳐다봄으로 얻는 것은 무엇이냐?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어떻게 방향 지어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공부하십시다. 만일 여러분이 내일부터라도 계속해서 공부하시려면 이런 이스라엘의 신앙이라는 문제나 그 외 신앙의 여러 자세의 문제에 대해서 구약이나 신약에 있는 어떤 것을 하나 선택해서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녁 이야기가 우리 교우들에게는 종래에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소위 구약 신학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엮어서 이야기한 까닭에 퍽 호방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많은 연구의 결과로 나타난 결론들이므로 지금 여러분에게 이 연구의 과정을 다 이론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면 지치고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 정도로 파악해 두시고 다음에 더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과연 그렇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조금 까다로와졌지만 우리 교우들은 잘 소화하실 줄 믿고 이제는 그전보다 좀더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는 셈 치고 공부하십시다. 다 같이 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일찌기 불뱀이 나타나서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드러낼 뿐더러,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방향의 하나의 갈림길로서 불뱀과 맞닥뜨렸고, 이런 역사적 현실은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 후의 역사의 방향에 새로운 사실을 기대하게 하신 것이요, 주님은 모든 준비에서 유루가 없으시고 그 크신 권능과 지혜를 이들 위에 무한히 나타 내셨건만 이 우맹과 같은 인류는, 비록 그 가운데 선택 받은 그릇일지라도 항상 무지몽매하여서 역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로 취하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그것을 형해화하고 의식화하며 인간 종교화하여 마침내 이 타락한 현실은 주님의 쓸어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께서 오사 우리에게 참된 신앙의 실질을 베풀어 오셨지만 오늘날도 사람들은 종교를 형해화하고 혹은 형식화,제도화하는 데 주력하여, 그것이 인간 종교화하는 방향을 취하는 나쁜 경향이 기독교 안에 너무나 파다하게 있는 것을 보나이다. 이러한 속에서 저희를 건져내시고 깨닫게 하사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가, 무엇이 성경에서 역사적으로 요구하시고 비취시며 이끌고 나가시려 하는 것인가를 바로 깨닫게 하시옵소서. 그렇게 되려면, 이를테면 분기점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깨달아 아버님께서 오늘날 우리가 알지 못할 때에는 불뱀과 같은 심히 무섭고, 뜨거우며 견딜 수 없는 환경의 공박과 어려움이 임할 수도 있다는 이 큰 사실을 명심케 하옵소서.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이 신앙이 없는 제 2세대가 이제 믿음으로 살든지 아니면 믿음없이 죽어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 하는 이런 거대한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또 그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참된 믿음의 자세는 무엇이었는가를 저희들로 바로 깨달아 알게 하시옵소서. 이리하여 믿음을 가지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큰 사명의 길로 전진하거나 아니면 믿음없이 이 세상과 함께 쓰러지거나 할 수밖에 없는 이런 거대한 세기적인 분기점 앞에 저희가 서 있음을 바로 깨닫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저녁에 읽은 민수기 21장 4절부터 기록된 구리뱀 혹은 놋뱀에 대해서는 우리가 과거에도 느후스탄,(놋뱀또는 놋조각)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배울 때, 즉 히스기야왕이 그 때 이미 700년 이상이나 계속해서 내려오던 놋뱀을 깨뜨린 이야기를 배울 때 그 몇 가지 의미에 대해 상고한 바 있습니다. 지난 주일 아침과 저녁에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의 자세와 그 신앙이 직면한 일대의 위기, 즉 분기점이라는 문제를 생각했는데, 우리가 또 한번 이 문제를 들어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복습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형성된 것을 살펴보십시다. 먼저 자연적인 상태로 보면, 한 가족이 애굽에 들어가서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차츰차츰 번성해서 처음의 불과 70여명의 소수가 430년 이내에 장정만도 60만명이나 되는, 그러니까 전체의 수로 보아서는 250만 내지 300만이나 되는 거대한 수를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상태로 거대한 수를 형성한 것이 하나의 민족적 형태를 취하게 된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그들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민족의 문제를 뚜렷이 하면서 한개의 역사적 의의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건지심을 받아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와- 시내산 밑에 이르러 거기서 하나의 민족으로서 확실히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사명을 받은 데에서부터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의 노예 민족에 불과했지만, 애굽에서 하나님의 크신 손, 펴신 팔로 건지심을 받아 홍해를 건너 마라와 엘림과 르비딤을 지나 시내산 밑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하나님이 그 백성을 건지신 본래의 크신 뜻을 보이시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보물이 되며, 또한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의 나라가 된다(출 19:4-6)는 큰 민족적 사명과 존재의 의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과 사명과 의의를 분명히 나타내고 완수하기 위해서 그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제도와 생활상 필요한 규범을 그들에게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성막을 지으라는 하나님의 크신 분부로서도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분부대로 하나님의 성막을 짓고 그 성막을 중심으로 그들의 민족적인 정치 생활을 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민족적인 생활의 근거지를 향해서 전진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단순한 하나의 정치적인 조직일 뿐만 아니라 산업의 흥성과 나아가 민족 특유의 문화적 형태라는 것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백사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이라고 하는 선주 민족의 위대하고 거대한 이교 문화가 번성하고 있는 땅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그들은 거기에 들어가 그 문화를 파괴하고,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 위에 그들 자체의 독특한 히브리적인 문화를 건설해 나가야 할 사명을 가진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상태
그러나 이 백성들의 상태를 보면, 그들이 애굽에 있는 동안 가지고 있었던 특성이라는 것은 애굽 사람들이 강제로 노예화 했다는 사실밖에 없었습니다. 인구가 번성했다는 것이 가장 특성적인 사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백성들이 애굽에 있는 동안에 독특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희미하나마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인 한 관념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는가 하면 신앙이라고 할 만한 훌륭한 형태는 이루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종교 관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 종교 관념조차도, 종교의 중심이 되는 신앙의 대상에 대한 개념이 사실상 불분명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생활을 여러 가지로 연구하고 조사해 보면, 저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고 섬긴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는, 그가 미디안에서 자기를 보내시는 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비로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즉 “나는 나일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일 것을 증명하는 그런 하나님이다”하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번역한 바로 그 이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일단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들어가서 “야훼, 그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할 때, 그들에게는 ‘야훼’라는 하나님께 대한 개념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그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너희 선조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출 3:15)고 했을 때, ‘아, 우리도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약속을 하셨다는 것을 조상들로부터 들었다’하는 정도였을 뿐입니다. 그들에게서는 이미 거룩한 하나님께 대한 개념, 즉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지적인 내용의 근간이 되는 ‘신앙의 대상’에 대한 교훈이 말살되어 있었습니다. 단 한 사람의 예언자도 이스라엘 백성이 담부지역으로 고통하는 그 속에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격려시켜 ‘일어나라’고 한 기록이 없습니다.
모세가 자기로 인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이 저들에게 임하는 것을 저들이 혹여 라도 알기를 바라서 궁중의 모든 환락과 영화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40장년의 훌륭한 모든 위치와 또 왕위 계승의 가능성까지도 다 포기하고-나가서 그 백성과 더불어 함께 고통 하려고 그들에게 들어갔지만, 그들은 모세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예언자 가운데서도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위대한 사람이 그들 속에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네가 누구냐?”하고 대든 것입니다. 이렇게 대들며 자기들끼리만 떠든 것이 아니라 그를 배반하여 팔고 애굽의 바로에게 고자질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패장 하나를 죽인 것을 큰 사건이나 난 것같이 조작해서 마침내 모세를 모반자로 낙인을 찍어 찾도록 만듦으로써 그는 더 이상 거기에 있지 못하고 피할 수 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라는 것이 이렇게 자기네의 구원자를 배반하는 종교라면 그런 종교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런 사건은 이 사람들의 종교적인 빈곤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들은 물질과 육신만의 노예일 뿐만 아니라 그 정신 상태에 있어서도 암매의 노예 노릇을 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상태에서 출발한 오합지졸과 같은 사람들을 군대로 끌고 나가서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대하고 가장 강력한 역사를 만들어 내는 한 민족으로 조직되도록까지 끌고 나간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그 노고와 심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리고 모세의 위대성이 거기에서 참으로 빛나는 것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이 백성은 많은 과정을 겪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 여정 중 깨달았어야 할 신 지식
이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으로 애굽에서 해방되어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서 신 광야로 들어가 거기에서 다시 시내 광야로 내려간 것이 그렇게 많은 시일을 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달 이내에 다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리고 시내 광야에서 1년 정도 있다가 제 2년에 다시 노정을 출발해 저 가데스 바네아라는, 새로 허락하신 땅의 어귀까지 갔는데, 이 거리 역시 먼 거리가 아닙니다. 마일로 따지면 150마일, km로 240km, 날 수로는 불과 열흘밖에 안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러나 그후 다시 그곳에서 홍해 길로 내려와 홍해의 에시온 게벨을 거쳐 거기서 100마일쯤 되는 에돔의 국경을 돌아 아라바 길로 북상하여 모압 평지까지 이르렀느데,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압 평지에 이르는 기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5개월 이내에 다 거기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길을 가면서 이 백성들은 어떠한 신을 체험했는가?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당신을 스스로 증거해 나가시는 신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제 이 백성이 가지고 있어야 할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지적 요소였습니다. 신앙은 신앙의 대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또 신앙은 신앙해야 할 조건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조건은 기대와 희망 가운데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고 기대 할 때 비로소 신앙이 생깁니다. 그리고 기대할 때에는 그 기대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방법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될 때 자기 이상의 능력에 대한 기대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에 대한 기대는 그 능력의 발원처에 대한 확실한 개념, 즉 신앙의 대상에 대한 확실한 개념이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의 의미
그런데 이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모세가 물었을 때, 모세에게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나는 장차 나일 것이다” 영어로는 “I will be what I will be"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나는 나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존재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정적으로 고요히, 그리고 어떤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렇게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면 그러한 신 개념과 신 추리라는 것은 부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특히 구약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가르치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상념은, -이것은 또한 구약 신학상 심히 중요한 문제로 우리가 주의해서 배워야 할 것인데- 하나님은, 철학자들이나 혹은 스콜라 신학자들이 독특히 논증하고자 하는 그런 정적인, 하나의 위치를 점유하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은 하나님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 가부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다”하는 전제 하에서 시작했지, “하나님은 이러이러하니까 계신다”하는 신의 존재의 증명을 위해 조그마한 빛이나 여운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신은 존재한다”는 데서부터 시작하되, 신은 역사의 과정 가운데에서, 생활의 증험 가운데에서, 또 현실 생활 속에서 자기가 맛보아 앎으로써 비로소 그 존재를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히브리 말로 표시할 때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즉 “나는 장차 나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역사의 과정 속에서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존재를 대표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표시하시기보다는 하나님 당신이 어떠한 하나님인 것을, 즉 그의 독특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역사의 과정 가운데 당신을 증명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역사의 과정 속에서 당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지금 이야기가 호방하게 되어 가는데, 이것을 구약 신학이라는 학문의 용어를 빌어서 말한다면, “신이 어떠한 존재를 가지시며, 어떻게 당신을 계시하시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역사의 과정 가운데에서 하나님 당신이 당신인 것을 증명해 나간다고 할 때, 역사를 통해서 계시가 더욱더 하나님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낸다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이른바 성서신학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서신학상의 문제를 우리는 성경 중 제일 먼저 출애굽기에서부터 현저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 문제를 출애굽기에서부터 현저하게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은, 창세기부터가 모세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그 모세가 실제로 가장 접근한 사실을 기록해 나간 것이 출애굽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를 살펴 나가는 것이 항상 연구에 편리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노예 민족에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 것을 보이셨느냐 하면, 크신 손. 펴신 팔로, 애굽 백성은 치시되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해 놓으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건지실 큰 의사를 보이시되, 마치 이신론의 신처럼 “나는 천지를 내고 모든 것을 공평히 관찰하고 재판하는 하나님이다. 나는 인류를 감독하고 자세히 쳐다보고 있다. 나는 너희를 건질 테다”하면서도 팔짱을 끼고 앉았고, 보이지도 아니하며, 다만 선언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역사 가운데에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백성을 구별하시되 애굽에게는 당신의 치시는 손을 펴서 임하시고, 이스라엘 위에는 당신의 특별하신 계호와 은혜의 표시로서 빛으로 임하시고, 장자를 살리시는 것으로 임하시며, 애굽에 내린 열 재앙의 위해가 하나도 내리지 않도록 하신 것으로 임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이스라엘은 독특하게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러한 현실 가운데에서 무엇을 배워야 했는고 하니 위대한 선지자 모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명해 나간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역사상 여러 이민족 가운데에도 선지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선지자의 독특성은 정적인, 정지의 하나님, 즉 ‘존재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동적이시며, 창조하시고 역사의 과정에서 당신을 증명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실증해 나가면서 백성에게 그것을 외치고 가르치는 데 있었습니다. 애굽에도 선지자가 있었고 예언자가 있었으며, 바빌로니아에도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의 독특한 점은 그런 데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성호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이러한 동적인 역사의 과정 가운데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는 점에서부터 하나님을 알기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느끼는 하나님은 항상 능력의 하나님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찌기 하나님은 당신을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히브리말로는 ‘엘 샤다이’라는 말로 표시했습니다(창 17:1, 28:3, 35:11, 43:14, 48:3). 그러나 역사의 과정이 점점 훨씬 짙어지고 더 진전되면서부터는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비교적 족장 시대의 이름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 이전에 중요한 성호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엘 엘룐’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또 있었습니다(창 14:18,19,20,22).
그러나 출애굽기에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즉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실 때에는 단순히 능력이신 하나님일 뿐 아니라, 당신이 선택한 이 백성과는 계약을 맺으시고, 맺으신 계약 가운데에서 그 백성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시며, 또 사명을 주시고 그것을 달성케 하시며, 그것을 달성케 하기 위한 역사의 과정을 당신이 친히 운전하시는 하나님으로 당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한마디로 구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께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을 표시하는 것인데, 그것은 ‘아도나이’라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주’라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주이신 까닭에 이후 이스라엘 백성 위에 왕 노릇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신 까닭에 주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이신 까닭에 왕 노릇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로서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위에 임하시고, 주재로서의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며 또한 언약을 맺으시고, 맺으신 언약에 의해서 그 백성에게 주신 사명을 달성케 하신다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강하게 느껴졌던 또 하나의 사실은, 하나님은 항상 주재하시사 필요할 때 저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을 하신 다음 백성들이 성막을 지어 놓으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친히 거하셔서 즉 ‘샤켄’하셔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상하기 위해서 지성소에서부터 영광의 구름이 올라가는데, 이것을 ‘거하시는 구름’, ‘쉐키나의 구름’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홀로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중 가운데 같이 거하시며 백성과 더불어 만나사 그들과 교통하시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내려 주시고 그들의 사명 수행과 존재 가치를 온전케 해 주신다는 큰 사실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거하신다는 이 사실은 또 하나의 가장 중요한 사상입니다.
이방에도 이스라엘과 유사한 신의 명칭이 있음
물론 이것은 이방 종교 가운데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의 종교 가운데에도 자기네의 신이 주라는 사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른 종교의 여러 현실을 조사할 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알’이라는 이름 자체가 주라는 말입니다. 이 바알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에 자기의 주 하나님을 표현하려 할 때 ‘아도나이’라는 말과 뒤섞어 쓰던 이름입니다(호 2:16).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바알에 대해서 강하게 대립하여 그것을 타매하면서 ‘아도나이만이 여호와 하나님이다’하는 것을 나타낸 적도 있습니다(호 2:8-23).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오히려 그 가나안에 이미 수립된 가나안 백성의 종교에 정복당했다는 사실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아도나이’라는 귀한 이름을 가졌지만 ‘바알’이라는 이교적인 이름과 뒤섞어 가지고 하나님을 바알적인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시돈 이나 두로에 있는 그 가나안적인 바알을 그대로 하나님에게다 부합시킨 것은 아닙니다. ‘바알’이라는 명의를 가지고 자기네 하나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우상 섬기기를 좋아해서 그랬다고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엘로힘’이라는 말이나, ‘야훼’라는 말 자체도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호라는 것이 그 명의에 있어서 독특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구약에서 ‘엘로힘’이라는 말이 하나님이라는 말로 사용되지만 그것이 우상에게도 사용되고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원래 ‘엘로힘’이라는 말이 복수인 까닭에, 우상에게 사용될 때 어느 때에는 우상들, 혹은 신들이라는 뜻인 ‘엘로하’라는 단수대신 복수 그대로의 ‘엘로힘’이라는 말을 쓰고, 그 밑에 오는 동사가 복수 동사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37:12).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것일 때에는 ‘엘로힘’이 단수 명사로 쓰이면서 단수 동사가 늘 붙어 다닙니다. 그런 까닭에 ‘엘로힘’이라는 것이 하나님 당신의 독특한 이름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 나라의 하나님이라는 이 성호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의 참 하나님께 붙여진 독특한 독점적인 성호가 아닌 것과 똑 같습니다. 중국 말에서의 상제라는 말이, 이미 있던 옥황상제에 대한 칭호인 것처럼, 우리 말의 하나님도 우리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던 고대의 종교, 가령 육당 최남선 선생의 설을 빌리면 고대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이 저 태양이라고 하는데, 우리도 애굽 사람들과 같이 그 ‘라’라고 하는 신, 곧 태양신을 섬겼거나, 또는 무엇이 됐든지 자기네가 종교의 대상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가지고 있던 신을 하나님이라고 했다면 그것도 또한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신의 칭호가 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빌어다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독특성
이런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호 자체가 독특해서 이스라엘의 종교가 독특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성호를 가지고 당신을 보이셨든지 간에 당신 자신의 나타나심과 당신의 속성, 그리고 그 속성으로 말미암아 구성되는 개념의 독특했기에 이스라엘의 종교가 독특했던 것입니다. 어느 점에서 그러하냐 하면 전능하신 그가 저들과 늘 더불어 같이 계시면서 교제하시되 그 교제하는 차원이 절대로 이교 신의 교제의 차원과 같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는 점에서, 말하자면 “구별되어야 하겠다”는 점에서 이교의 어떤 신과도 같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구별되고 모든 권위와도 구별될 뿐 아니라, 모든 신에게서도 나는 구별된다. 그런고로 구별된 위치에서 나와 교제해라. 다른 어떤 신을 섬기듯이 나를 섬겨도 안되고 다른 어떤 신과 교제하듯이 나와 교제해서도 안된다”고 하신 것입니다(신 17:2-5).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후 이스라엘 백성을 누누이 타매한 이유는 그들이 이방신과 교제하는 소위 디비네이션, 강신술, 영매술, 영교술 등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맹렬하게 타매하시면서 “용서없이 죽일지니라”하신 것입니다(레 20:1-8, 신 17:2-5). 왜냐하면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과 이교의 신을 뒤섞어서 하나님의 차원을 낮추게 할 위험이 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1 세대의 실패
이렇게 하나님께 대해 독특한 위치 가운데 있었던 제 1세대, 곧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은 이제 시내산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거리는 앞에서 말한 대로 약 240 km, 불과 열흘 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앞은 허락하신 그 땅입니다. 이곳은 바란 광야에 있는 곳으로서 일찌기 아브라함이 하갈을 내어 보냈을 때 하갈이 나가서 방황하던 곳입니다(창 16:7). 아브라함이 살던 곳(헤브론, 창 13:18)에서 멀지 않은, 허락하신 그 땅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 1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허락하신 땅 문턱 앞에 이르러서 “우리는 못 들어가겠다”한 것입니다. “이 땅에는 아낙 자손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 우리를 장사 지낼 땅이 없어서,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말이냐! 자,장관 하나를 세워 가지고 돌아가자!”하고 적극적으로 반항한 것입니다. 이 백성들의 반항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주일에 우리가 이야기한 까닭에 다시 반복을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1세대는 완전히 실패를 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애굽적인 요소와 애굽적인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독특하게 당신 자신을 보이시고, 증명해 주셨으며, 독특하게 교제를 하시려 하셨고 그리고 더 할 수 없이 그들을 계호하셨지만 그들은 그런 하나님께 대해서 느끼고 깨달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있었던 제 1세대는 거기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애굽을 나올 때에는 큰 신앙과 큰 기쁨을 가지고 나왔고, 하나님께서 때때로 물과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제도를 내시며 성막을 짓게 하셨을 때에는 다 마음 가운데 큰 소망이 부풀어 올라서 “자, 얼마 안 있어서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했지만, 이제 금방 그 곳에 들어갈 수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 섰을 때에는 “못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신앙은 뭐냐 할 때 그들의 신앙은 끝까지 애굽적인 차원, 애굽의 이교적인 영향의 테두리에서 못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제 2세대
따라서 이들을 데리고는 안되겠다 해서 선택한 것이 제 2세대입니다. 즉,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미만이던 사람과 광야에서 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장정만 다시 모압 평지에서 세어 보았을 때 제 1세대와 그 수에서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을 지난번에 우리가 배웠습니다. 모두 60만 이상이었습니다. 전에는 603,000명이 나왔지만 이번에는 602,000명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수의 새로운 세대를 데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한 끝에 다시 원 기점인 가데스 바네아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가데스 바네아에서부터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하면 에돔과 더불어 싸워 이겨서 에돔을 통과했어야 할 터인데(민 20: 14-21).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사해에서부터 아래로 160km나 길게 내려온 에돔의 국경을 우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회하려니까 다시 아래로 내려와 홍해의 아카바만에 돌출한 엘랏 혹은 에시온 게벨까지 왔다가 거기서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길은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론은 이 길을 가다가 호르산에서 죽었습니다(민 20:22-29). 광야를 헤맨지 40년이 되던 바로 그 한해에 모세의 3남매가 다 죽었습니다. 미리암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미 죽었고(민 20:1). 아론은 가다가 도중에 호르산에서 죽었고 이제 모세만 홀로 남아 이 백성을 끌고 전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진해 나가다가 도중에 다시 길이 험해지니까 백성이 또 원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망의 내용(1) - 선조의 역사까지도
민수기 21장 4절부터 보면,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했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 중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소수입니다. 이미 광야에서 40년이나 지낸 까닭에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약 40세 이상 된 사람들입니다. 애굽에서 20세 미만일 때 나온 사람들만이 남았을 터이니까 제일 나이 많이 먹은 사람도 60세밖에 안되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백성의 주축은 물론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즉, 20세에서부터 40세까지의 청장년들이 주동이 되어서 군대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40세에서 60세까지는 요즈음 어떤 나라에서나 다 그렇듯이 예비역으로 뒤처져야 했습니다. 이렇게 나이 든 사람들은 뒤로 처져있고 장정들이 앞에 서서 나가고 있는데 이 장정들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들에게 출애굽의 경험이 있는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닌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까닭에 애굽에서 나온 경험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태어났다 해도 시내 광야나 그 위의 신 광야에서 난 것이 아니고 여기의 바란 광야나 또는 진 광야(가데스 바네아가 있는 광야)에서 났으면 난 것입니다. 그 일대에서 빙빙 돌다가 다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애굽을 나왔다는 것이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 할 때에는 자기들의 경험만을 근거로 하지 않고 선조가 가지고 있던 역사까지 끄집어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그 원망은 40세 이상의 노년들이 모두 그렇게 하니까 청장년들도 “왜 우리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해서 죽게 하는고?”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원망의 하나입니다. 만일 40세까지의 청장년들이 도무지 그런 원망을 아니했다고 가정한다면 이 원망은 적어도 40세 이상의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한 것입니다.
원망의 내용(2) - 식물
그 다음에는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식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허락하신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기까지, 좌우간 허락하신 땅에 가서 먹을 것이 있을 때까지는 만나를 계속해서 내리셨으니까 식물이 없을 턱이 없습니다. 고기가 정 먹고 싶다면 그 수많은 약대, 수많은 양떼들 가운데서 잡아먹을 수도 있었습니다(출 12:38). 그렇게 자꾸 원망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원망을 하려니까 이런 것들을 가지고라도 원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도 없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물이 없어서, 기갈이 심해 죽은 적은 없었습니다. 물이 없다 원망하면 모세가 분노해서도, 좌우간 지팡이로 땅을 쳐서라도 물을 내어 먹였습니다. 물이 없어, 기갈이 자심해서 그만 길에 넘어져 죽었다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옷도 해지지 않게 해 주시고 신발도 해지지 않게 하시고, 그 사람들의 체력도 약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신 8:4). 거기서 그만 넘어져 버리지 않게 다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원망하려니까 그런 것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즉 식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박한 식물은 싫어한다. 이렇게 밤낮 먹기 싫은 것 한가지만 먹으라고 해서 재미 없다”하는 이야기입니다. 알쏭달쏭한 것을 다 먹어 보아야 하겠다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원래 먼저 왔던 사람들이 애굽에서 먹던 외와 참외와 수박, 그 다음에는 부추, 마늘, 파 그리고 생선 이런 것들을 못 잊어서 엉엉 운 때가 있던 것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마 자기네 선조, 자기네 선배가 모두 그렇게 탐욕을 일으키고 울던 것을 잘 보아 온 터이라, 그들도 그렇게 한번씩 해 보는 모양입니다. 민수기에는 원망하는 일이 여러번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원망을 하는데도 마치 스트라이크나 하듯이 조직적으로 잘 합니다. 동맹파업하는 데 길이 난 사람들은 멋있게 조직을 해서 멋있게 와-하고 파업을 하고는 딱 그쳐버리고 마는데, 이 사람들도 원망하는 데 있어서는 상당한 기술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기술은 아닙니다.
징계 불뱀을 보내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들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 21:6). 불뱀이 나와서 막 무니까 이 사람들이 그 불뱀, 독사에 물려 그 다음엔 퉁퉁 붓고, 독이 몸에 빙빙 돌아가지고 나중에는 열이 광장히 올라 뜨거워하며 죽었습니다. 왜 불뱀이라고 했는가? 그전에 우리가 배웠지요? 모든 학자들이 다 “아마 이랬을 것이다. 아마 저랬을 것이다”하며 상상만 할 뿐 알길이 없다고-. 그 뱀이 무는 것이 어떻게 뜨겁게 딱딱 쏘는지 마치 거기에다 불이나 켜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불뱀이라고 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뱀의 껍대기에 뻘건 불과 같은 형상이 있어서 번쩍번쩍하니까 불뱀이라고 했는지 또는 뱀의 껍데기 위에 뜨거운 햇빛이 비취면 그것이 번쩍거리는 것이 불과 같아서 불뱀이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으나, 좌우간 모양도 위협적이고 또 물기만 하면 사람은 죽고마는 무서운 뱀이었습니다.
이렇게 뱀에게 물려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가니까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했습니다. 이제야 깨달았다 그 말입니다. 죽게 되니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망을 자꾸하면 가끔 이렇게 불뱀이 나와서 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이것을 보면 사람이 항상 고귀하고 좋은 환경에서만 좋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요즈음의 사회 개량주의자들의 의견대로 한다면 이렇게 원망을 해 버릇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환경을 주고 좋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오히려 더 무서운 사실을 보내 주셨습니다. 불뱀이 물어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불뱀이 와서 무니까 비로소 “아, 우리가 원망한 것은 잘못이었구나”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원망, 부패한 인간 본성의 표출
이 말은, 사람은 환경 자체의 여유 없음 때문에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가운데 부패의 본성이 있어서 거기에서 원망이 나오며, 또 이 원망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하나님께서 엄위로 나타내 뵈시기까지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불가부득이 인류 위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무서운 손이 때때로 강하게 지배할 필요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난하면, “가난하니 혁명을 일으키고 시끄럽게 하자!”하고, 괴로우면 “괴로우니 하나님을 원망하고 죄를 더욱 짓자!”하며,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으니 더욱 포학하고 사회 질서를 교란하자”고 야단을 냅니다.
그러면 먹을 것이 넉넉하면 그런 짓을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 가운데에는 본질적인 부패와 전적인 타락의 본성이 있어서 이것은 기회와 틈만 생기면 구실을 붙여서 악을 행합니다. 이러할 때에는 하나님의 징벌과 엄위의 무서운 손이 그들에게 때때로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을 막는 방식으로 비교적 선한 것과 좋은 것으로 주시는 데만 주력하시지 않고 때로는 무서운 엄위로 그들에게 임하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항상 부족한 것 같이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 그러냐? 내 은혜가 부족해서 그렇다면 내가 잘못 했다. 내가 은혜를 더 주마”하고 이렇게 후회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내가 은혜를 참 적게 주었구나”하고, “너희들 생각이 옳다”하시면서 사람의 그 생각에 양보하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가운데 누구의 생각이 옳으냐 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옳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은혜를 부족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은혜를 더줄 것이 아니라 징벌을 내려야 하겠다”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벌을 내리시면 비로소 은혜 주셨을 때의 은혜를 생각하고 “아이구 내가 건강했을 때가 좋았는데, 그 때는 괜찮았는데”하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용하시며 그들의 원망을 못들은 척 하시고 그대로 은혜를 베푸시고 계시는 것을 그들은 만홀히 여겨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뱀이었지 맛있는 음식과 평안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불뱀이 임하니까 백성들은 비로소 잘못 했다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도구
그 다음으로 불뱀 사건의 중요한 점은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 2세대의 신앙에 한 분기점을 이룬 것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도 우리가 누누이 얘기했지만 만일 성경에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 평안히 살면서 행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그들과 ‘같이하신’것으로 계시되어 있었다면, 즉 구약의 기록이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구약은 어떠한 신을 보이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한 부족의 신을 보이는 것밖에 안됩니다. 어떤 부족이든 어떤 민족이든 각각 자기의 신이 있어서 그 신은 그 민족의 복리를 위해서 특별히 은고를 베풀고 이 민족이 다른 민족과 더불어 적대할 때에는 이 민족의 편이 되어 준다는 점은 다른 어떤 이교의 사상 가운데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종교의 독특성은 어디에 있느냐?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 신 계시와 신의 도리의 독특성은, 여호와가 민족 신으로서 그 이스라엘 민족 위에 은고를 베푸는 점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왜 은혜를 베풀어 건져내셨느냐 하면, 모든 천하의 백성이 다 같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먼저 이들을 통해 나타내시고, 이것을 표본 혹은 프로토타입으로 삼아 모든 백성들이 거기에 도달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사명은 자기네만 거기에 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하만민 가운데 당신의 거룩한 경륜의 내용으로 한 민족을 세우시려고 할 때, 즉 만민 가운데서 모든 택하신 백성들을 뽑아내시려고 할 때 그릇과 도구로 쓰시려고 이스라엘을 세우신 것뿐입니다.
그런고로 여호와는 이스라엘 한 민족의 신으로서의 여호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한 민족을 특별히 은고해 가는 한 민족 신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이스라엘 적인 종교, 이스라엘적인 신앙은 천하에 독특한 것입니다. 이런 독특한 사상이 구약 가운데 특히 중요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여러 군소의 부족과 주위에 있는 여러 민족의 이교 사상과 혼동해서는 아니될 중요한 점입니다.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어떻게 거룩하신가? “나는 천하 만민 위에 공의로 판단할 뿐 아니라, 천하 만민에 대한 내 경륜이 있어서 그것을 펴련다. 펴기 위해서 필요한 그릇을 내가 취하여 쓴다. 이 때에 필요한 그릇은 이스라엘 너희다”그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필요한 그릇인 것뿐이지 천하의 다른 민족들과는 처음부터 독특하게 운명이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그릇 되이 생각해서 이스라엘은 아주 하늘에서부터 어떤 독특한 특권을 도장 찍듯 찍어 가지고 나온 것같이 늘 생각하고 자기네의 책임을 포기하고 자기네의 임무에 대해서 태만히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께 반역하고 나간 후에도 그들은 항상 이스라엘의 특권이라는 것을 기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괴상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큰 사상이 무엇인가를 오해한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의 특권만을 생각한다면, “아, 여호와는 결국 이스라엘의 독특한 신이구나, 그렇다면 여호와가 별다른 신이 아니고 여럿의 신이 아니고 여럿의 신, 가령 이 블레셋 사라의 ‘다곤’, 바릴로니아의 ‘벨’(사 46:1, 렘 1:2)과 뭐다를 것이 있느냐? 애굽에는 ‘라’신이 있고 이스라엘에는 여호와가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여호와를 이스라엘적인, 지방적인, 민족적으로 국한된 신으로 생각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여호와는 사람이 생각해 내고 교묘하게 꾸며낸 한 신에 불과한 것이냐 하면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놋뱀을 쳐다본 의미는?
이렇게 해서 여기 이 사람들은 불뱀에 물려 죽게 됐을 때 비로소 회개를 하고 모세에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이 불뱀에게 물려 죽는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7-9). 이렇게 뱀이 막 번성해 가니까 그들은 뱀이 떠나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밖에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물려서 죽는 사람은 죽을지라도 더 물리지 않게 해주십시오”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준비는 뱀이 떠나게 해달라는 이 사람들의 요구뿐 아니라 뱀에게 물린 사람들도 낫게 해주셨습니다. 즉, 이 사람들의 소원대로 뱀이 나오지 않게 하셨을 뿐더러 뱀에게 물린 사람도 나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이란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도록 하여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게 한 것입니다. 모세가 놋을, 청동을 가지고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놓으니 햇빛에 번쩍번쩍하는 것이 불뱀과 같은 형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면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그것을 쳐다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문제가 따릅니다. 이 사람들이 그것을 쳐다봄으로 얻는 것은 무엇이냐?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어떻게 방향 지어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공부하십시다. 만일 여러분이 내일부터라도 계속해서 공부하시려면 이런 이스라엘의 신앙이라는 문제나 그 외 신앙의 여러 자세의 문제에 대해서 구약이나 신약에 있는 어떤 것을 하나 선택해서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녁 이야기가 우리 교우들에게는 종래에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소위 구약 신학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엮어서 이야기한 까닭에 퍽 호방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많은 연구의 결과로 나타난 결론들이므로 지금 여러분에게 이 연구의 과정을 다 이론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면 지치고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 정도로 파악해 두시고 다음에 더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과연 그렇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조금 까다로와졌지만 우리 교우들은 잘 소화하실 줄 믿고 이제는 그전보다 좀더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는 셈 치고 공부하십시다. 다 같이 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일찌기 불뱀이 나타나서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드러낼 뿐더러,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방향의 하나의 갈림길로서 불뱀과 맞닥뜨렸고, 이런 역사적 현실은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 후의 역사의 방향에 새로운 사실을 기대하게 하신 것이요, 주님은 모든 준비에서 유루가 없으시고 그 크신 권능과 지혜를 이들 위에 무한히 나타 내셨건만 이 우맹과 같은 인류는, 비록 그 가운데 선택 받은 그릇일지라도 항상 무지몽매하여서 역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로 취하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그것을 형해화하고 의식화하며 인간 종교화하여 마침내 이 타락한 현실은 주님의 쓸어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께서 오사 우리에게 참된 신앙의 실질을 베풀어 오셨지만 오늘날도 사람들은 종교를 형해화하고 혹은 형식화,제도화하는 데 주력하여, 그것이 인간 종교화하는 방향을 취하는 나쁜 경향이 기독교 안에 너무나 파다하게 있는 것을 보나이다. 이러한 속에서 저희를 건져내시고 깨닫게 하사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가, 무엇이 성경에서 역사적으로 요구하시고 비취시며 이끌고 나가시려 하는 것인가를 바로 깨닫게 하시옵소서. 그렇게 되려면, 이를테면 분기점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깨달아 아버님께서 오늘날 우리가 알지 못할 때에는 불뱀과 같은 심히 무섭고, 뜨거우며 견딜 수 없는 환경의 공박과 어려움이 임할 수도 있다는 이 큰 사실을 명심케 하옵소서.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이 신앙이 없는 제 2세대가 이제 믿음으로 살든지 아니면 믿음없이 죽어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 하는 이런 거대한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또 그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참된 믿음의 자세는 무엇이었는가를 저희들로 바로 깨달아 알게 하시옵소서. 이리하여 믿음을 가지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큰 사명의 길로 전진하거나 아니면 믿음없이 이 세상과 함께 쓰러지거나 할 수밖에 없는 이런 거대한 세기적인 분기점 앞에 저희가 서 있음을 바로 깨닫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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