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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자태 제4장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2)_김홍전

신앙의자태 제 4 장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2)(민 21:4-9)
김홍전                                                                         
 
서언
 
신앙의 상태 혹은 자태, 특별히 신앙이 어떻게 형성되어 나타나는가 할 때 자태라는 말을 쓰는데, 오늘도 이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아 나왔다 할 때 그 사람들이 받은 구속은 애굽에 노예 되었던 민족적 상태, 그러한 역사적 현실에서 건짐을 받아 크신 손, 펴신 팔로 홍해를 건너서 광야의 길로 나온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너의 자자손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거룩하신 약속하에 아브라함은 처음에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두류하며 살았습니다. 그 후 야곱의 대에 이르러 비로소 애굽으로 내려가서 기백년 동안 노예의 생활을 하는 지경에 이르러 차츰차츰 영화의 역사로부터 비참한 역사로 전락해 들어갔습니다. 이런 비참한 역사로 전락해 내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별히 정치적인 노예화 상태에 있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
 
처음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등용되던 때에 애굽을 힉소스가 지배하던 때인 듯합니다. 또는 여러가지 연구의 결과에 의하면 반드시 정확하지는 않으나 힉소스 이전에 등용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지 힉소스가 세미틱 유목민으로서 애굽을 침공하여 점령했으나 불과 1세기 반 남아 지배를 하다가 원래의 애굽의 미즈라임 족속 가운데서 아모스라는 사람이 더베라는 데서부터 일어나 군대를 휘몰아 힉소스에게 강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힉소스는 더 견디지 못하고 자기네가 나왔던 아라비아 땅으로 차츰차츰 나가 버리고, 애굽은 다시 원래의 애굽 사람인 미주라임 족의 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서 애굽인들이 새로이 편 강한 정책은, 일찌기 힉소스와 동류요 동족인 셈족 히부리 사람의 인구가 중다하고 급속히 번식해 나가는 것을 볼 때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도의 인종 정책을 써서 그들에게 담부지역의 고생을 시켰으며,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의 남아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렸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분이 다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애굽이 어떻게 정책을 썼느냐 하는 정치사적인 점을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이러한 정치적인 환경, 즉 어떤 대제국의 거대한 침략과 정복과 점령과 통치의 역사 가운데 흔히 볼 수 있는, 일방 식민 정책, 일방 제국주의 정책 하에서 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한 상태로 자기네의 명맥을 유지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긴밀하게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그가 언약을 이루어 주실 것을 기다리는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일찌기 자기 선조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의 내용에 대한 신뢰조차 차츰차츰 희박해져서 그 하나님께 대한 생각도 막연해졌습니다.‘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그리고 ‘우리가 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되어 있었습니다. 옛날의 자기들의 선조에게 나타나셔서 언약하신 하나님의 그 언약이 어떠한 역사적 상태에 나타나고 있었느냐 하면, “우리는 일대의 제국의 노예 민족에 불과하다”는 절망적이고 무신적인 상태 가운데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비극적 사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으로 그들이 나쁘다든지 아주 못났다든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작 비극은 그들이 그러한 절망적이고 무신적인 상태에 빠져들어갈 역사적인, 정치적인 현실 앞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바로 증시할 선지자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멀리 있는 자기들의 선조, 즉 일찌기 땅에 왔다가 이미 가버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날도 살아 계셔서 그들이 노예 상태에 있는 정형을 일일이 하감하시고 통촉하시며 손을 내미사 친히 크신 손, 펴신 팔로 그들을 건져내실 수 있는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확연히 믿고 의지할 만한 신앙과, 그러한 신앙의 기초가 되는 그 지적인 요소인 신개념과 신에 대한 가신의 증시를 구체적으로 능력 있게 전달해 주는 선지자, 예언자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교사가 없고 예언자의 소리가 끊어진 이 백성에게 있어서 그러한 비참한 정치적인 노예 상태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해서는 차츰 멀리 떠나고 현실에 대해서는 아유하고 구구히 뒤따라 가는 구종과 패역과 구안 가운데 빠져 들어가게 되는 심정과 일반적인 상태를 지어 주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아감
 
이러한 때에 모세가 나타나서 40 장년의 훌륭한 학문과 훈련을 받은 사람답게 하나님께서 저 백성들을 건지시리라는 뜻을 전하려 한 것입니다. 즉, 모세는 ‘내가 애굽의 궁전의 화려한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고 나가서 저들과 함께 고생과 노역을 감연히 맛보며 나간다면, 저들이 혹여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건져내시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느냐’하는 야릇한 기대를 가지고 자기의 동족인 히브리 사람들을 돌아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스데반의 연설 가운데 모세가 왜 그 백성을 돌아보러 나갔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행 7:20-24). 모세는, 혹여 저들이 자기의 손을 빌어 하나님께서 저들을 구원하실 것으로 기대할 것을 스스로 마음가운데 예료하고 나갔습니다. 모세는 히브리 백성의 신앙 상태를 그들이 현실상 가지고 있는 신앙의 상태보다 훨씬 고도적인 것으로 가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히브리 사람들이 모세의 출현을 반가이 맞이하고,“아, 혹시 이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것이 아닌가?”하고 기대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배반했습니다. 모세조차 거기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하나 때려 죽였다 할 때 사람 하나를 때려 죽였다는 사실이 왕자 모세에게 있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모반을 한다고 고자질하고 중상을 한 까닭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이라도 자신을 모반하는 왕자를 가만히 둘 수는 없었습니다. 옛날의 왕가에서도 현존의 왕우에 대해서, 현존의 왕실에 대해서 모반하는 왕족을 그대로 두지 않고 골육 상쟁하는 것이 흔히 있기 쉬운 일입니다. 그런고로, 이름없는 미미한 노예 하나를 왕자가 매로 때렸든지 주먹으로 쳤든지 해서 죽였다 하는 것 때문에, 혹은 애굽의 패장 가운데 하나를 그렇게 죽였다고 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될 만큼 왕가가 능이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애굽의 패장 하나를 그가 죽였다는 것 때문에, “이 히브리 놈이 애굽 사람을 죽이다니!”하는 그런 일이 생길 까닭이 없습니다. 애굽의 제국이 가지고 있던 금도와 거대한 세계 정책으로 볼 때, 일단 애굽 왕가의 사람이 되고 또 이미 공주의 아들로서 40년간이나 거기서 커 온 사람에 대해서는 이제 그가 이민족이라든지 혹은 어디서 얻어온 사람이라든지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왕가에서는 그렇게 생각지 않게끔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새를 찾아 죽이려고 꾀했다는 것은 그가 이민족이니까 늘 주의를 하고 있다가 “아, 모반하는구나!”하고 죽이려 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현존의 정책에 대해서 반항을 하는 어떤 증시를 할 때에는 그것이 동족 미즈라임일지라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사람 하나를, 애굽 패장 하나를 죽인 것이 반항이 될 수는 없습니다. 패장이 잘못 한 것이 있으면 모세가 일어나 때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장차의 왕위 계승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마 만일 그 때 그 공주가 하셉시스였다면 곧 왕위를 계승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모세였을 것입니다.
 
 
 
 
모세를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
 
그러니까 문제는 모세가 애굽 패장을 죽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를 배반한 데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우리를 죽이려느냐?”하면서 큰 소리로 모세가 모반을 하려 한다고 고자질을 한 것입니다. 공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태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정도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40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40년 동안 더 노예 생활을 하고 더 담부지역으로 고생을 하며 더 무수한 학대를 받다가 마침내 저희들끼리 구구히 견디면서 살던 심정에서 벗어나서 부르짖다 부르짖다 최후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하고 부를 수밖에 없이 되어야 했습니다. 즉,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신개념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넉넉하게 자기 자신의 하나님으로 생각할 정도가 못 되었다면, “우리들의 선조의 하나님”이라는 연고라도 붙여서 부를 수 있게 되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들을 건지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 개념
 
그러한 까닭에 모세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받을 때에도 “만일 내가 가서 그들(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할 때에 그들이 내게 묻기를 ‘네가 만난 그 하나님은 이름이 무엇이냐?’ 한다면 내가 뭐라고 대답하오리이까? 저들이 필연 신 개념에 대해서 물을 것이올시다”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신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는 구원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신이라면 누구냐? 좀더 알아야 하겠다” 적어도 막막한 암흑 가운데, 예언자가 없는 사회 가운데서라도 신에 대한 추구가 있어야만 비로소 구원이 온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회이든지, 아무리 불쌍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불쌍한 까닭에 하나님이 건지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건지심을 받기 위해서는 불쌍한 그 사람의 속에 어떤 형태로든 그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범위 안에서 신께로 그 마음이 향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향하는 이것이 사람이 스스로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혹은 일반 은총을 통해서 혹은 일반적인 사회의 법칙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해서 신께 향하여 부르짖게 만든 후에야 비로소 당신의 손을 내미는 것이지, 신께 부르짖지도 않는 사람을 하나님이 친히 와서 자꾸 싸매고 이끌어 내며 건져내어 평안과 행복을 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을 때 받은 행복에 대해서는 그것을 위대한 행복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사람이 요구하든지 않든지 해는 여전히 비취고 비는 내리니까 사람들은 다 제가 잘나서 잘사는 줄로 생각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을 요구할 때는 적어도 마음 가운데 자기네와 관련 있는 신 개념을 어디서인가 인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선조인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에게 언약했다는 하나님에 가장 가까운, 가장 근리한, 근족적인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가장 가까운 신 개념을 향해서 그들이 차츰차츰 모색을 한 까닭에, 모세도 감연히 하나님께 “그들이 신의 이름을 물을 때에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세가 신의 이름을 물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계시하셨다는 사실로부터 모세 자신이 신께 대한 개념과 그 사상에서 얼마나 장성했던가, 또 미디안 40년이 모세에게는 얼마나 위대한 시기였던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또한 구원함을 받기 전에 가지고 있던 종교의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것을 추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모세가 나타나서 구원을 이야기 할 때는 40년 전에 그를 배척하던 그 상태가 아니고, 머리를 숙여 경배하면서 그것을 받아 들이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담부지역과 학대라는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즉 이 교훈을 받고서야 비로소 구원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너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면서 위대한 하나님의 손을 보았고 혹은 불 기둥이나 구름 기둥이 그들을 인도할 때 위대한 하나님의 찬연한 영광을 보았습니다.
 
 
 
 
불신, 가장 기본적인 의 . 식의 문제 때문에 생겼음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마라에서 물이 쓰다고, 즉 당장에 의,식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항상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저급한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상태를 볼 때 그들은 광야에서 다 엎어져 죽을 신앙 상태밖에 안된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최저 생활의 필요, 즉 생활의 필수품 그런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펴신 손, 크신 구원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하였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건넜다는 것이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홍해를 가르고 건넜다는 생생한 역사적인 경험을 했으면서도 당장에 물이 쓰면 원망을 하고 당장에 먹을 것이 박하면 원망을 하였습니다. 전연 없어서, 결핍되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요컨대 이것은, 현실적인 문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태도를 취하는가에 의하여 그 신앙의 정도와 자태를 드러낸다는 하나의 호례입니다. 홍해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애굽의 말 발굽과 애굽의 철쇄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신 것은 이 광야에서 넘어뜨리려고 하신 것은 아닐 것이라는 충분한 합리적인 추찰과 기대를 할 만한데도 마라에서 물이 쓰니까 물이 써서 어디 먹겠느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에서 나타낸 상태를 보면 현실의 공리적인 문제가 얼마나 그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기초적인 시금석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일단 현실의 공리적인 문제 때문에 신앙의 힘이 발휘되지 아니할 때에는 고매하고 원대한 능력, 즉 하나님 나라라는 이 큰 역사적 현실을 초래케 할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광야에서 넘어짐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만한 자격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에도,“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아, 나는 참말로 구원받았습니다.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하고 진실성 있게 고백했다 할지라도, 일단 그 눈 앞에 닥치는 현실상의 문제, 육체상의 문제, 이 세상에서 사는 문제가 그에게 각박히 임할 때 하나님께 그대로 전부를 맡기고 의지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역사적인 경험을 가지면서도 광야에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신앙 상태에 있었던 것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즉 죄 사유함을 주셨다는 사실, 중생 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목전에 돈이 없거나 살길이 없거나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에는 방황을 하는 예가 많습니다. 하나는 하늘 나라에 있어서 만세 전의 경륜에 따라 시작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땅에서 내 육신의 생명의 생존 문제에 불과합니다. 둘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천양지차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육신의 생존에 관계된 문제를 가지고 크신 구원과 크신 능력을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께 대해 때때로 의심하고 방황한다는 것은 광야의 이스라엘적인 신앙의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신앙의 자태로는 광야에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자태로서는......
 
 
 
 
광야에서 넘어진 그들은 구원받았는가?
 
그러면 광야에서 넘어진 이 사람들의 신앙 상태를 생각할 때, 그들은 과연 확실히 그 영혼들이 구원받았는가 하는 것이 대뜸 떠오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땅에서 하나님의 징벌에 의해 질병이나 큰 불우한 사실을 받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영혼이 꼭 지옥에 들어갔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 광야 40년 간에 넘어진 60만의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은 구원의 신앙이라고 할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구원의 신앙이 아니라는 증거가 또 있는가?  어떻겠는가?  앞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신앙의 내용의 몇가지 요소를 잠깐 사례로만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을 신학적인 관점에서 서술한다면: 첫째,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 개념의 내용이 박약했다는 것은 신앙의 지적 요소의 빈약을 의미합니다. 둘째, 그들이 일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 대해 원망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들이 가진 정서적 요소의 심한 빈곤을 또 일러줍니다. 셋째는,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연히 앞길을 개척하면서 나아가려고 하는 용기가 없이 목전에 위험이 있을 때는 좌절하고 주저 앉아 버리고 원망만 할 뿐, 하나님이 어떻게 해 주시기를 바라지도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기대가 아니고 다만 원망 가운데 빠져 들어갔다는 이 상태는 단순히 그들의 어센수스, 곧 정서적 집착력, 애착력만이 결핍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전진한다는 의지적 요소가 대단히 빈약하고 거의 결핍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민족으로서의 그들의 상태는 거의 구원의 신앙이라 할 만한 특징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별적으로는 혹시 구원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 듯도 합니다. 개별적으로도 단연코 전연 없다 하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중에 반드시 조금이라도 있다고 우리가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구원의 신앙으로서는 심한 박약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환희를 노래하고 또 시내산 밑에서는 “네, 그 명령을 순종하겠습니다”한 상태를 볼 때에는 일단은 어떤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무엇보다도 그들을 건지신 것은 기적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적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경험에 의해서 신뢰하고 나갔습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그들은 기적 신앙에 늘 젖어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기적 신앙이라는 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종결이었습니다. 물론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도 기적에 대한 신앙이 있고 기적을 기대하는 신앙도 있으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신앙도 가질 수 있습니다.
 
 
 
 
구원의 신앙, 신앙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야 함
 
그러나 구원의 대상이 되려면 구원의 신앙으로서의 요소가 거기에 분명히 나타나야 할 터인데 그 요소로서 제일 기본적인 것은 노티티아라는 지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은 이 지적인 요소라는 점에 있어서 심한 빈곤이 있었습니다. 크신 손, 펴신 팔로 건져 내신 그 하나님께 대한 인식이 박약했습니다. 어떤 연고로 그렇게 박약했느냐? 대체로 저들을 하나님께서 건져 내실 때 저들이 보고 들은 것은 하나님의 크신 손, 펴신 팔 그것이 나타난 역사적 현실, 즉 홍해를 갈랐다든지 애굽에게 열 재앙을 내렸다든지 마라에서 쓴 물을 달게 하셨다든지 하는 그런 역사적인 현실입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현실에 대해서 인정하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적인 인식이 되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인식을 궁극적으로 바로 하려면 결국은 ‘하나님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하셨다 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아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하는 것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끝내지 말고, 하나님 당신은 누구시냐 하는 것을 늘 알아가는 것이 구원의 신앙으로서 중요한 점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구원의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필요한 지적인 정의적인 요소가 아무리 있다 할지라도 그 신앙의 대상이 항상 분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인식, 그들의 개념이 박약했습니다. 항상 기적에 대해서는, 그것을 눈앞에 현실적으로 보았으니까 찬란하고 기이한 것으로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했겠지만, 그만 거기에서 끝난 것입니다.
 
 
 
 
우리도,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분명히 알아야 함
 
우리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내시는 여러 가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건져 내실 뿐 아니라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그 어려운 일을 펴 주십니다. 몸에 병이 있을 때 주께 기도하면 주께서 몸을 건강하게 해 주시고, 심한 군박함 가운데서 주께 기도하면 주께서 그것을 면케 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고 마는가?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것과 같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우리가 과연 믿습니다. 하고 증거할 수 있을지언정, 어떤 하나님이시더냐 할 때 대답을 못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할 때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구체적인 속성과 존재의 내용에 대해서 좀더 바로 깨달아서 인격적으로 존재하시고 인격적으로 작용하시며, 그런고로 목적과 경영을 가지시고 나에게 그 목적을 펴시고 그 경영을 가르치시며 그 계획 가운데 나를 들게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순히 몇 개의 군박한 현실에서 나를 구제해 준 데 그치지 않고 이것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시는가, 어디로 이끄시려고 그러시는가, 결국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하시고 계시는가 하는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구원의 신앙으로서의 중요한 자태는 항상 단순히 자기의 공리적인 종교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나는 죄를 면제함 받아야 하겠다. 지옥 가기 싫다. 천당 가고 싶다”든가, 또는 “죄는 예수님의 공로로 면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의롭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지옥을 다 면했습니다. 이제는 영생을 주셨으니 천당 가서 영원 복락을 누리시오”하는 이러한 공리적인 몇 가지 조건하에서만 늘 주저앉지 말라 그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조건만 가지고 10년이고 20년이고 100년이라도 교중을 능히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항상 그것을 중점으로 해서 그 주변만 도는 교육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할 때 그 교회는 아무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광야에서 넘어져 버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게 됩니다.
 
 
 
 
신 개념의 빈약-형식적, 형성주의적 종교 초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이 애굽 백성에게는 10가지 재앙을 주셨지만 자기들은 쏙 뽑아내어 건지시고 홍해로 이끌어 내시어 통과시키신 것을 알고 있으며, 또 마라에서 쓴 물을 달게 하시고 엘림의 오아시스에서 잘 유하게 하셨으며 혹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시고 시내산 밑에서는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다는 것을 다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사람들의 자기의 생활 경험 가운데 희미하고 또 어떤 감정적인 종교 상태에 불과한, 소위 구원이라 자칭하는 여러 상태보다는 훨씬 생생한 현실을 다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이냐 하는 하나님께 대한 구체적인 충분한 사고와 귀납에 의한 신 개념의 풍요성이라는 것이 심히 박약했습니다. 이런 것이 구원의 신앙을 형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 신앙의 대상에 대한 인식의 빈약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풍요치 못하면 못할수록 필연 그것은 우리의 생과 우리의 일생의 행로에 대해서와, 우리가 존재하는 역사의 성격과 나의 사명과의 관계에 대해서 아무런 구체적인 유추, 추리 혹은 판단을 할 근거를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단편적으로 가지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있는 일들이 결국 증시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도 단편적으로 가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이후에 가지고 있던 신앙의 자태를 다시 연구해 볼 때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율법을 율법으로만 단편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 나타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의사의 표시로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 했는가를 찾도록 가르쳐 주신 것인데, 저들의 율법에 대한 해석은 항상 저들이 가지고 있는 공리적이고 현실적인 목적 하에서만 해석하는 까닭에 율법은 형식화하고 형성화하는 제도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율법 자체가 저들에게는 나중에 자기들도 질 수 없는 짐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역대로 내려 와서 마지막에 바리새주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율법 해석인 것입니다. 율법을 해석하지 아니 했기에 그런 것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있지 아니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되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그 권위를 겸해서 가지고 있지 아니 하고 하나의 개념으로 전달된 말로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로 존재하지 아니하고 하나의 전달되는 말로, 경전으로 존재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현실이 그런 것입니다.
 
 
 
 
구속의 복음을 계시하신 하나님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구속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는 어떤 계시가 있었느냐 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유월절은, 애굽의 열 재앙중 제 열번째의 재앙 때 나타났습니다. 양을 잡아서 문설주와 인방에 그 피를 바름으로써 하나님의 그 무서운 심판이 거기는 그냥 넘어간다는, 즉 유월한다는 것 때문에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자기네는 하나님께서 그 거룩하신 의로써 덮어 주셨다는 속죄의 사실을 배웠어야 했습니다(출 12장). 유월이라는 것은 거기에 피가 있는 것을 보고 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피라는 것은 그들을 덮으사 하나님의 엄혹한, 아주 공정하신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것은 심판 받을 것이 아니다. 심판을 내릴 대상이 아니다”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사사롭게, 사적으로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공의 앞에서 볼 때,“그것을 덮는 것이 있다”하는 말입니다. 이 덮는다는 말, 코페르라는 말은 속죄라는 말의 원어인데, 즉 그 피가 그들을 속했다 그 말입니다. 이 속죄의 큰 사실을 통해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배움으로 진실로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있은 후에 비로소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이 있다는 이 큰 사실로 더욱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것을 통해 구속의 기본적인 복음을 배웠어야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 가운데 출애굽기에 나타난 것은 몇 가지의 사회법과 성막을 짓는 제도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고, 그 다음 레위기에서 나타난 것은 두 개의 주제를 가지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첫째는 죄있는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과 더불어 가까이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받겠는가 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그렇게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계속적으로 하나님과 항상 거룩한 코이노니아를 가지고 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첫째는 죄있는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법, 둘째는 거룩한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기는 16장을 경계로 해서 둘로 갈라집니다.
 
 
 
 
불분명한 구원 상태 -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지 못함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것들을 통해서 분명히 구속의 큰 기본적인 복음을 배웠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것들을 다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그것들을 그대로 바로 받아들였다면 그로 인하여 백성 전체가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 중 어떤 사람이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전 백성을 광야에서 넘어지지 않고 가나안 복지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위대한 바른 신앙의 각성으로 이끌었느냐 하면 이끌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죄제, 속건제를 다 드리면서도 왜 광야에서 넘어졌느냐 그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아를 중심으로 그들은 광야에서 37년간을 방황했습니다. 가데스라는 말은 거룩하다는 “카다쉬”에서 온 말로, 거룩한 성막을 친 곳, 즉 성소가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가데스라는 말을 붙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신앙의 유형의 한가지라고 할 때 분명히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고 그리고 자기는 천당 간다 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넘어지듯 넘어질 사람들이 많다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말은 하고 그렇게 분명히 승인하고 그런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구원하신 본래의 목적과는 상관 없이 광야에서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광야에서 넘어졌으면 다 같이 영원히 멸망을 받아서 지옥에 갔겠는가 할 때 우리가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지 않았을지라도 대체로 애굽에서부터 그들을 건져내신 본래의 목적은 없어진 것입니다. 광야에서 죽이기 위해서 건져내신 것은 아닙니다. 애굽에서 건짐을 받았다면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그냥 넘어지고 말았다는 것으로 그 사람들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비록 그들이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튼튼한 구원의 신앙을 가지지는 못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이런 신앙 형태라는 것은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형태로서 실지로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는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회중을 형성하여 성막을 짓고 그 제도 안에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막이나 그 제도는 광야의 생활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문화를 파괴하고 새로운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세우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래의 목적에는 도달하지도 못하고 아무런 각성도 없이 광야에서 쓰러져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만일 이러한 신앙의 유형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구원은 불분명한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알 길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불분명합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성인일 경우에는 항상 명확하게 뒤 따르는 것이 상례인데,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지 않은 까닭에 미심쩍고, 위험한 상태에 있다 그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함
 
구원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은, ‘아 나는 구원받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 내 영혼은 완전히 건짐을 받았다’하고 이렇게 자기 자신이 확증을 할 수 있는, 의식 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이 확증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도나 혹은 형식에 응해서 소가 되었든지 양이 되었든지 그 머리에 손을 얹는다고 하십시다. 손을 얹는다는 것이 안수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원래의 의미는 거기에다 몸을 기댄다하는 뜻입니다. “내가 너다. 나 전체를 너로써 대표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함으로 내가 능력을 너에게 베푼다”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 “나는 너를 의지한다”할 때, 거기에 손을 얹고 그것에 몸을 기대고 있는 이것이 신앙이겠는가 또는 종교 의식이겠는가 하는 것은 알 길이 없습니다. 마치 그것은 사도 신경이나 신앙 고백서를 외울 때 그것이 자기 교회의 전범이니까 외우는 것인가, 참으로 자기의 믿음의 고백으로서 말을 하는 것인가를 우리가 알 길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 문답을 하려고 할 때, “이러이러한 것을 당신은 믿습니까?”하면, 믿는다고 해야 당연히 세례를 받을 것이니까 “예, 믿습니다”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데 밤낮 어떻게 대답해야 할 줄 모르니까 며느리가 “어머니, 목사님이 물으시거든 꼭 요렇게 하시고 조렇게 하세요. ‘예수님을 믿습니까?’하면 ‘예, 내가 믿습니다.’이렇게 대답하세요.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하면 ‘내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하고 그렇게 말씀하세요”했습니다. 이렇게 다 입에다 말을 넣어 가지고 가서, 묻는 대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예수님은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하니까, “우리 며느리가 그러는데 우리 며느리 죄 때문에 돌아갔다고 그럽디다”했습니다. 그런 식이 뭐냐? 기계주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고백이었는가? 고백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이것은 우스운 실례이겠지만 이런 예가 똑똑한 성인에게도 다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아, 이건 세례를 받는 것이니까 이렇게 말을 해야 한다. 좌우간 내가 기독교인이 되려면 이렇게 말을 해야 한다’ 그것입니다. 자기의 마음 가운데서 우러나 자연스럽게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아니 할수 없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나는 꼭 이렇게 말하지 아니 할 수가 없다’는 확실한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마치 소나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듯 예배를 드리지만 그가 확실히 구원받을 신앙을 가진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결어
 
이제 이것이 제 1세대의 이스라엘 60만 장정들의 신앙 상태인데, 제 2세대의 장정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2세대 사람들의 신앙에 결정적인 한 위기를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이 1,2대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시 몇 가지를 더 공부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하는 전체 모습을 조감해 가면서 이야기하는 까닭에 만일 여러분이 집에 돌아가셔서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의 상태까지를 읽으신다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레위기는 뺀다 할지라도 적어도 역사의 사실은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읽어 오시는 것이 좋습니다. 때때로 이야기가 까다로와지는 수가 있을지라도 눈으로 그림을 그려 가면서 어떻게 나와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디서는 무엇을 했나, 또 왜 그렇게 했나 하는 것을 생각해 오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신앙 상태를 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것을 다 종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나 한꺼번에, 뛰는 식의 공부를 하는 것 같습니다만, 우리 교회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하므로 지금 뛰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하기로 하고, 다 같이 기도하시지요.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건짐을 받아 아버지의 크신 은혜로 광야에 나온 이래로 그들이 광야에서 희한한 경험을 많이 하고 또한 특권 있는 분부를 많이 받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약점뿐 아니라 여러 가지 불신의 악이 많이 나타난 것을 다시 생각하고, 그러면 그들의 신앙이 어떤 자태이었나, 어떤 유형이었겠는가, 그와 동시에 우리는 어떠한 상태를 가지기 쉬운가를 비춰 보기 위해서 이제 저희들이 이공부를 시작했사오니, 성신님, 저희에게 깊이 가르치셔서 이 크고 오묘한 도리를 바로 잘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리하여 저희들의 신앙이 항상 허울 좋은 명색의 신앙이 되지 않게 하시고 실질이 있고 능력이 있고 확실한 목표가 있으며 명확한 실증이 있는 신앙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우리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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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https://www.esesang91.com/b/preach/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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