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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하여 ⑶교회의 세 가지 징표 김홍전

교회에 대하여 ⑶교회의 세 가지 징표 김홍전
시 119:1-16 1979.11.4 자료출처:http://cafe.daum.net/wansu63
 
오늘도 다시 교회에 관하여 생각하겠습니다. 제 세 번째인데 지금 우리는 교회라는 것이 무언가를 바로 알기 위해서 또 그릇된 교회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면서 우선 외부 바깥에서부터 어떠한 상태를 교회라고 하고 어떠한 것을 교회라고 않는가 하는 데서부터 고찰해 왔습니다. 보통 신학상 교회론을 얘기할 때 내부의 얘기, 본질의 얘기를 하지마는 우리가 보통 접촉하는 교회라는 말의 개념의 그 분명한 것을 생각해 나가려고 할 때 외부에서부터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나가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징표로서 세 가지, 말씀을 전파하고 그리치는 것과 둘째로 말씀을 보이는 형상으로 상징을 통해서 또한 공급하는 것, 그 다음에 권징(勸懲)을 신실하게 행한다는 것, 이런 것들이 개혁교회가 역사적으로 교회의 징표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중요한 것들이오. 이 징표들에 의해서 아닌 것과 긴 것을 또한 판단하게 되는데 그 징표들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다 같이 말씀을 전하는 사실과 말씀을 공급하는 사실과 권징을 행하는 사실에는 하나님이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권위로써 세우시는 사실이 거기는 있어야 하고 그렇게 권위의 임명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사실을 시인해 나가시면서 그것이 성립되도록 권위로 임명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에 교회의 성립의 요체는 우선 말씀의 권위가 구체적으로 정상적으로 설 수 있는 조건들을 구체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하는 거요. 그리고 또 하나는 교회가 교회로서 요소, 그것이 그 안에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오.
 
  우리가 외부의 현상인 말씀의 전파와 또 성례와 또 권징의 행사만이 교회를 분간하는데 완전하고 전부의 조건이 되어 있는게 아니고 거기에 좀더 근본적으로 들어가서 생각하면 교회라는 것은 그것이 본질로 볼 때 볼 수 없는 것이고 전체의 자태를 사람이 그대로 감각의 기능으로써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이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이오. 그래서 이런 것을 가리켜서 흔히 본상의 본질의 교회 혹은 보편의 교회라 하는데 이런 쳐치 캐톨릭(church catholic), 보편의 교회, 본질의 교회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쳐치 인비지블(church invisible,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것이오. 이 보이지 않는 것이 볼 수 있는 형식으로 나타나서 유기체라는 것이 볼 수 있는 여러 사람들의 조합으로 나타나서 이것이 하나의 조직체적인 형태를 취하고 나타나서 우리 교회의 속성들과 요소들을 발휘할 때 비로소 교회인 것인데 이것을 외면에서 들여다 보면 교회라는 형식을가지고 있으면 그 형식에 쳐치 인비지블이라는 것이, 보이지 아니하는 교회가 나타나 있는가? 그것으로 교회인가 아닌가를 정하는 것이지 거기에 참된 본질적인 교회가 그 안에 거하지 아니한다며는 아무리 모든 형식을 다 갖추어도 그건 교회가 아니다 하는 것을 이제 주의해야 해요.
 
  그러니까 여기에 무엇이 있느냐? 거기 말씀의 전파가 있고, 성례의 집행이 있고, 거기에 권징의 행사가 있으면 그대로 다 교회가 아니냐 하겠지마는 그것 사람들이 갖출 수 있는 조건으로 교회가 성립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니오. 교회가 성립이 되려면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님께서만 갖추어 주시는 거룩한 조건이 거기 있어 가지고 그것이 볼 수 있는 그런 몇 가지의 쳐치 막스(church marks)를 통해서 교회의 표징(表徵)들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오. 그걸 좀더 근원적으로 말할 때는 한마디로 볼 수 없는 참자태와 본질이 나타나는 형태에서만 그게 교회라고 참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거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아서 종교를 형성하고 의식을 집행하고 제도를 놓으면 곧 그대로 교회가 되느냐 하면 그대로 교회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말이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성에 교회에 관해서 말할 때 “교회가 점점 타락하면 심히 괴악하게 되고 심지어는 사탄의 교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러며는 이와 같이 ‘사탄의 회’라. 이게 묵시록에 있는 사탄의 세네각(synagogue, 유대인의 교회)이라는 말인데 이 사탄의 회라는 우리가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요 실상은 사탄의 회라”(계 2:9) 이러한 무서운 말씀을 우리가 볼 때에 교회가 모든 형식을 구비하고도 사탄의 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해요.
 
  그러면 사탄의 교회,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 그 사이에 여러 종류의 타락의 종교가 있을 거라 그말이오. 점점점점 타락해서 나쁜 놈을 자꾸 들여다 보고, 또 더 타락하고, 나쁜 놈을 들여다 보고, 더 나쁜 것을 들여다 보고 최후에는 사탄에게 딱 잡혀서 나중에 사탄이 제가 “내가 하나님이로라” 하는 것을 “아, 그렇습니다”하고 모시고 않았을 만한 그런 교회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거요. 이런 관점에서 참된 교회라는 것이 무언가를항상 바로 생각하고 파악하고 거기 의거해서 우리가 서야지 혹여라도 타락한 생각에 감염이 되어서 잘못되게 교회 아닌 것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이런 큰 그릇 가운데 빠들지 말라 하는 거요. 지난 주일에 다시 얘기했지마는 우리가 이제 계속해서 오늘은 교회가 교회로서 본질을 잘 드러낸 참된 교회로서 존재하려며는 거기에 본질적인 여러 가지 것이 있어야 할 것이지마는 가령 외부에서 볼 때 증표로서 말씀이 바로 전파되고 바로 거기서 교도된다고 할 때 그 말씀이라는 것은 어떻게 작용되고 즉 사역하게 되는 것인가? 어떻게 하며는 그릇된 것이고 어떻게 하며는 바로 사역되는 것인가? 여기에 의해서 교회의 증표가 제대로냐 정상이내, 왜냐하면 증표인 것 같으나 사실은 교회의 증표로 다시 서브(serve)할 수 없는 것인가를 또 분별하는 거요.
 
  그러면 교회의 징표로서의 말씀은 이것을 통틀어서 개괄적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구속의 은혜의 방도로서의 말씀의 공급이 거기 있어야 하는 것이지 구속의 은혜의 방도를 떠난 여타의 문헌으로서 경전으로서의 성경의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어떤 사역도 그것이 교회의 징표를 형성하는 말씀의 공급상은 아니라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말이오. 여기서 우리가 늘 성경이라는 하는 기독교의 경전을 생각할 때 이것이 은혜의 방도로서 쓰이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아니하게 그러나 사람의 세계에 있어서는 문화적으로 가치 있고 유효하게 쓰이는 일이 있고 하는 것을 늘 주의해야 해요. 가령 성경에서 경전에서 하나의 종교의 자태를 추출해 내가지고 종교의 자태에 의해서 제도를 꾸미고 모든 형식을 갖추게 할 수 있는 것이오. 즉 성경에서 끄집어 내는 종교는 명색이 기독교요, 기독교라는 종교를 그 성경에 있는 도리에 의해서 배워 가지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꾸며낼 수가 있고, 거기에 필요한 제도들을 다 만들어낼 수 있고, 필요한 신학과 신앙고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요. 말씀이 그렇게 사용됐을 때는 곧 그 교회의 참된 증표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할 때 우리가 여기서 주의할 것은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성경에서 추출해 냈다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은혜의 방도로 사용한 일이 된다고 단언 못하는 것이다 그거요. 성경에서 신학을 추출해 냈으니까 즉 성경은 구속의 은혜의 방도로서 사용됐다고 말 못하는 것이다 그거요.
 
  항차 거기서 예술적인 것이나, 역사적인 것이나, 학문적인 것, 도덕적인 것, 다른 사상적인 것을 끄집어 내 봐야 그것이 훌륭하게 영향을 주고 그것이 또한 이 세상의 다른 서적과 비교할 때 비류 없이 높은 것이지마는 그러나 메디아 그라티아에(media gratiae)로서는 의미를 안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거요. 그러니까 늘 주의할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메디아 그라티아에로서 확실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냐 그것이 항상 관심사요. 메디아 그라티아에, 즉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경 말씀이 사용되기로 하면 거기에 분명히 있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물론 말할 것 없이 성신님의 쿰 벌러(cum verbo), 그 ‘말씀과 함께’의 역사라는 것이오. 성신이 그 말씀과 성신께서 그 말씀과 함께 역사를 하며는 어떤 결과를 내느냐? 성신님이 역사 않더라도 상당한 결과를 내요. 어떤 결과를 내느냐 하면 도덕적으로 사람을 변천시켜 주는 것, 개과천선(改過遷善)시켜 주는 일도 하고 심지어 종교를 하나 형성해서 근실하고 독실한 종교인을 하나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요. 그러나 성신이 역사하신 결과 나타나는 사실은 한마디로 죽음이라는 상태에서 생명이라는 사실을 가져다 주는 이것이 현저한 사실인 거요. 사람이 어떤 문화적인 활동을 하고 생활을 하고 또 성경을 이용해서 어떻게 성경의 위대한 문화적 가치를 드러냈으며 특별히 그 도덕적인, 그 사상적인, 그 종교적인 위대한 가치를 성경을 사용해서 드러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죽은 사람은 여전히 죽은 것이고 또 그것을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 앞에 죽은 사람이라고 해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아니고 이 세상 사람인 이상에 즉 하나님의 일반 은혜 가운데는 사는 것이오. 일반 은혜 가운데 살면서 성경의 종교적인 위대성을 이해도 하고 그걸 발휘도 하고 그걸 그렇게 축조도 하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구축해 올라가는 것이 하나의 틀로서 자기의 종교로 설 수 있는 것이다 말이오. 그런 까닭에 성경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의 방도로 사용 안됐다고 해서 기독교 종교가 거기 형상할 수 없고 도저히 기독교라는 형태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오.
 
  배교라 하는 문제는 이러한 무서운 위험한 사실과 연결되어 있는 거요. 다른말로 말하면 성경에서 추출해 내서 만든 기독교가 배교의 교회의 큰 틀을 이룰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이오. 기독교를 만들어 내려면 성경을 떠나서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가상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어요. 가상으로 만들어 내면 암만 기독교란 이름을 붙여도 세상 사람이 인정할 때 기독교라고 인정을 못하는 것이다 말이오. 성경을 부분적으로 사용했다고 그래서 그것을 기독교라고 또 반드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있어요. 여러분 오늘날 세계에 서 있는 여러 유사 종교나 여러 이단적인 그 섹트(sect, 분파종교)운동 가운데에서 성경을 거의 바르게 사용치 아니하면서도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들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성경을 대척적인 의미에사 반대하고 아니다 하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 변론하는 조건들을 찾기 위해서 자꾸 끄집어 내 가지고 자꾸 얘기하지만 그 자체가 기독교 아닌 것을 우리가 다 보는 거라 말이오. 세상 모르는 사람들은 기독교라는 범괄적인 광의의 의미 가운데 그런 것을 다 넣어 보려고 그러지마는 그런 실례들 가운데에서 우리가 볼 때에 좌우간 성경을 사용해서 기독교적인 형태를 구성했다고 그것이 은혜의 방도로 바로 사용됐다고는 도저히 못하는 것이다 하는 것이오.
 
  그러면 성경이 은혜의 방도로 사용되었을 경우에 그 첫째의 큰 결과는 그것이 사역된 사람에게 반드시 그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의 상태로 옮겨갔다는 현저한 사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오. 즉 모든 사람이 죄와 허물로 하나님 앞에 죽어 있는 것이지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가 그에게 효과 있게 사역한 사람, 즉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정한 사람들은 때가 이르러서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불러내셔서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가니까, 성경이 경건의 말씀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속에 들어 가니까 성신님이 그와 더불어 역사함으로써 첫째 하는 것은 그 죽음의 상태 - 죄와 허물로 죽었던 상태 -에서 새로운 생명에다 갖다 놨다 말이오. 그게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오. 영생이라는 말이오. 하나님의 약속대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했는데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있다”(요일 5:12)는 말씀대로 참으로 그가 성경의 말씀이 들어가서 은혜의 방도로 사용됐던 첫째의 결과는 생명이라는 것을 참주의해야 해요.
 
  이런 경우에 성경의 어떤 말이라도 편언척구라도 들어가서 성신님이 역사만 하면 그 속에 생명이 작용하는 것이냐 할 때 절대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오. 그게 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의 새로운 공급과 혹은 생명을 새로 주신다는 사실과 그 말씀이 거기 성신님으로 사역됐다는 역사됐다는 그 사실에는 항상 어떤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우리고 하여금 모르지 앟게 알게 하신 것이다 그거요.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서 더팽ㅇ로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만 가면 그는 구원받는 다고 하는 이건 절대로 망론(妄論)이지 정론(正論)이 나닌 것이오. ‘예수 믿고 천당’ 함으로써 그 사람이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그 내용이 다 들어가는 게 아니다 그것이오.
 

  그러면 그런 점에 잇어서 성경이 우리에게 바르게 뭐라고 가르쳤는고 하니 다른 말이 아니고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적 사실이 먼저 들어가야만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는 것을 가르친거요. 복음의 사실,이것이 중요한 것이오. 그러고 이런 사실이 들어가며는 그 사람이 그냥말씀만 들어왔다고 해서 생명이 생긴 것이 아니라 생명 그것 자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 까닭에 사람이 그걸 어떻게 못하는 거요. 죽은 사람을 살리는 데는 살리시는 그 분이 생명을 주어서 사는 것이지 그 죽은 사람이 자기가 어떻게 해 가지고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말이오. 그러니까 생명 자체는 하나님이 주시는 거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신님으로 그에게 생명을 주시는 동시에 그가 각성해서 정신이 환기되어 가지고 새로운 생맹을 받은 자, 즉 새로운 생명체가 각성할 수 있는 첫째의 중요한 문제는 복음 사실이라고 그랬어요. 그게 복음 사실인 거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고 그의 속죄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사실은 있게 된 것이라 말오. 이 복음 사실에 대한 그의 각성은 곧 확신으로 서 있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느냐, 다른 사람에게서도 증명할 수 있느냐 하면는, 왜냐하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증명할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거요. 이런 사람들이 모여야 교회가 교회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니까. 자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 못하는 사람끼리 천명히 모아도 교회는 안 되는 것이오. 왜냐하면 교회로서 증명이 안되는 것이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거요. 종교 집단으로 모여 떠는 것뿐이지 그것을 교회라고 얼른 말 않는 것이다고.
 
  그러면 그런 점에 있어서 개인 개인이 자기가 새로운 생명 가운데에 산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있다는 것. 그것은 중요한테 그렇게 되려면 그 사람 속에 있는 각성의 정도가 어떤 것인가를 우리가 알아 봐야 해요. 이것을 그전에 우리가 다 얘기한 거요. 그 사람의 속에 있는 각성의 정도라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그 사람이 참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아는 것인데,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말씀을. 말씀을 확실히 신뢰하고 신의(信依)하는 데 있다 그말이오. 믿고 거기에 의지한다 그말이오. 그러면 말씀이 얼마만한 정도에서 그에게 구원이란 사실을 확증해 주느냐 하면 그것은 복음 사실을 부분적으로 아니고 비교적 구비된 내용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오. 이것이 주의해야 할 문제요. 왜? 복음 사실이 구비되지 않고 단편적으로 떠돌아 다니는 이런 사실이 너무나 교계에서 많이 돌아 다니는 거요. 그런 까닭에 우리가 거룩한 교회로 자태를 늘 명확하게 드러내려고 하며는 교회가 자태를 제 스스로 나타내는게 아니라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하나가 확실히 증거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 신앙의 상태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증거를 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은 구원의 신앙의, 즉 구원의 신앙의 세 가지 요소 가운데에 그 첫째로 중요한 지적인 요소가 충분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거오. 구원의 신앙의 지적인 요소라 하는 것이 즉 “얼마만한 정도의 내용을 내가 믿어야 구원 받았다 하는 것을 확실할 수 있는가? 즉 구원과 그것이 얼마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보통 사람이 ‘예수를 믿고 천당’ 하는 정도 가지고 구원의 신앙의 지적 내용, 즉 노티티아(notitia)라는 것을 충분히 형성 못하는 것이오. 그런데 예수 믿고 천당 가라는 것으로 전도가 된 것으로 오랫동안 밀고 나온 것도 여러분 아실 거요. 또 예수를 소개할 때 다른 관문에서 소개해 가지고서 바르게 전달 안 되는 것을 알아야 해요. “세상이 허무하니까 예수를 믿고 마음에 위로를 받고 살아 가십시오”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여러 가지 문제가 많고 이 세상이 고통과 문제가 많으니까 세상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예수를 받아들이시오” 하고 마치 세상의 사회아(社會我) 의식이 강한 사람이 ‘사회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먼저 솔선해서 모든 문제의 대답이 되는 예수한테 나가겠다’ 그런 어쭙잖은 것으로 참으로 예수를 바르게 받아들이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말이오. 마치 예수님 말씀과 같이 양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도적과 같이 담 넘어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오.
 
  어디로부터 들어가느냐? 누누이 얘기했지마는 이 사실을 오늘날은 복음주의라는 이름하에서도 뒤로 두고 은폐하는 강한 경향이 지금 흘러 가고 있어요. 이 아메리카 주에서 먼저 그것이 강하게 시작한 거요. 이래 가지고 유럽으로도 퍼져 나가고 동양으로도 퍼져 나가서 “그것이 무엇이 잘못이내?” 하고서는 막연히 많은 젊은이가 따라 가는 것을 이번에 갔을 때도 또 다시 보고 아연함을 느꼈다 말이오. 그 뭐냐하면 예수님을 소개할 때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준하고 계십니다”부터 소개를 하고 정식 관문, 이 문으로 들어와야 너는 예수를 바로 만난다고 정식 관문을 보이지 않더라 그말이오. 그렇게 하고 “사람들은 다 죄 때문에 그 좋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 이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사귀십시오” 하면 이런 식 여러분 다 잘 들었을 거요. 얼마나 그것이 굉장한 프로퍼간다(propaganda, 선전운동)로 특별히 학생들, 대학생들한테 청년들한테 막 퍼져 나가는가. 복음주의란 이름을 가지고, 그러고 그와 같은 것은 운동으로서는 복음주의의 무슨 운도의 거장이라고 하는 사라들 붙어 다니면서 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는 예수님의 위대한 인격을 믿는 것으로구원의 요소가 되는 것은아니오. 예수님이 역사상 위대한 선구자라는 것을 믿는 것으로 구원받는게 아니다 말이오. 예수님이 완전한 인격자라고 우리가 암만 생각해 봐도 그것으로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오. 또 예수님의 그 지극한 사랑, 또 예수님의 무한하신 능력, 예수님의 신성 그것으로 구원받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때에 제일 처음 믿어야, 절대로 믿어야 하고, 언제든지 믿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가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인 거요. 즉 그가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인 거요. “왜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셔야 하느냐 하면 내 죄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것 믿는 거요. “왜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셔야 하느냐 하면 내 죄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것 믿는 거요. 다른 사람 세상 사람의 죄 때문에 그렇다고 그렇게 막연하게 두리 세워 놓고 생각할 게 아니오. 내 죄 때문에 그런 것이다고.
 
 그러며는 예수님을 내가 맞이하게 전에 먼저 시작하는 것은 “나는 죄인이다”는 데부터 시작하는 것이오. 나는 죄인이다. 그러고 이 죄를 예수님이 속하지 아니했다면 나는 올데갈데 없이 무서운 형벌을 세상에서도 받지만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고 영원하 지옥밖에 내게는 돌아올 게 없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미의 무서운 공의의 호리라도 갚지 아니하면 나오지 못하는 그 철저한 심판이 거기 있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오. 이래야 예수님의 공로가 또 고귀한 것도 아는 것이오. 철저한 심판이 거기 있다 자기의 죄,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일호도 남김이 없는 철저한 심판,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이 대신 받아 주시느라고 십자가에거 돌아가신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요.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해 줄 분이니까 어쨌다고 그거 믿는 거 아니오. 예수님이 위로를 주는 거니까. 권능이 많고 사랑해서 위로를 줄 테니까 이제는 세상에 고생 많고 고통 많는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께 오라는 그 수도사적 그런식 생각을 하는 것 아니다 말이오.
 
  그런 까닭에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속해 주셨다는 것, 속죄의 사실이라는 거, 여기서부터 우리가 시작해야 해요. 그러며는 그 전제는 ‘나는 죄인이다.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철저하고 엄연하다. 그러고 그것은 언제 임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게서 그것을 대신 받은 사실을 나는 이제 믿고 의지한다. 내가 어디가 숨으랴? 만세의 반석인 예수님게 가서 숨는다.’ 이렇게 믿는 것이오. 그가 내 죄의 형벌을 다 대신 받으셨다는 이 사실, 그뿐 아니라 그는 당신이 돌아가심으로 이 돌아가셨다는 사실 때문에 내 죄의 무서운 권세, 죄를 진자는 죄의 노예가 되는데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나로서 스스로 깎아낼 수 없는 스스로 떼어낼 수 없는 이 탐욕,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남을 미워하는 마음, 자기를 잘났다고 늘 생각하는 마음, 이 끊을 수 없는 이런 것들을 예수님께 의지하고 그가 나를 대신해서 집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 속죄의 사실 그것은 속죄뿐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심은 속죄뿐 아니라 죄의 노예 상태 가운데 있는 나를 벗겨 주시는 큰 은혜를 나타내신다는 거을 믿어야 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죄를 철저히 속할 때는 필연적으로 그 죄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질질질 끌려 가면서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셔야 하는 거라 말이오. 그러시지 않기 위해서는 너는 죄를 지어서 죄값을 치뤄야 할 죄책이 있을뿐더러 죄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매일매일 현실 생활에서 끌려가고 그 마침내는 어디 가겠느냐? 마침내는 영원한 무서운 형벌로 가는 것이다. 이 무서운 형벌을 받 받으신 이상에는 무서운 형벌로 이끌고 가는 요인이 없어쟈야 한다 그말오.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내 죄의 값만 죄책만을 면제하신 게 아니라 이제는 죄의 무서운 주권 도미니언(dominion), 나를 지배하는 지배력, 권세에서 벗겨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은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런가 하고 그냥 바라보는 게 아니라 믿어야 한다. 믿어야 그것이 효과 나는 것이오. 속죄한 것도 믿어야 효과 나는 것이오.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 속죄는 전하면서 십자가는 그래도 전하면서 죄의 무서운 권세에서 나를 벗겨 주셔서 노예 시작에서 사 내어 자유를 주신다는 위대한 사실은 거의 은폐하고 있다 말이오. 이런 것이 그 사람의 구원의 신앙을 형성하는 데 완전하냐 하면 불완전한 것이오. 이러 것이 불완전하면 증거자로서 불완전한 것이오. 증거자로서, 증거자로서 불완전하면 교회가 증거자 노릇을 못하고 교회가 교회라는 것을 증거 못하면 저건 교회인가 아닌가 알 수 없는 것이다 말이오. 그러니까 교회를 얘기할 때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그 지체 하나하나가 교회가 살아있는 것이라면 지체는 살아있는 것이다. 지체는 다 죽었는데 교회만 산다면 그것은 일 없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구원의 신앙의 요소라고 하는 것이 그에게 족하게 있음으로만 비로소 증거자로서의 자기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오. 증거자로서의 자기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사랑의 띠로 매어지고 또한 거룩한 교회의 형식을 갖추는 데서 비로소 교회로서의 내실도 증거할 수 있는 것이오. 그게 사실이오.
 
  그러면 말씀이 들어가서 그에게는 첫째는 이렇게 죽음에서 나와서 생명에 들어갔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실이 그게 성경 말씀에 그냥 경전의 말씀으로 종교를 형성하는가 그렇지 아니하면 참된 교회를 형성하여서 생명을 증명하는가를 갈라 놓는 거요. 이렇게 말씀이 사람 속에 들어가서 성신님의 그 말씀과 공역하시는 그 사실이 그에게 명백하게 있을 때에는 생명이라는 사실이 먼저 있다고 그랬어요. 그 다음에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이것을 꼭 늘 기억할 것인데, 말씀이 나에게 은혜의 방도로 역사한다면, 그것을 신학적으로 한마디로 말할 때 성화(聖化)의 역사라는 것이오. 쌔티피케이션(sanctification, 성화)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오. 불완전에서 더욱 완전을 향해서 이끌고 올라가시면서 쌩티피게이션의 첫째 아이디어(idea)는 죄로 말미암아 더럽히는 것, 그릇된 걸로 더럽히는 것을 자구 성신님의 역사로 그 죄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하신 그 거룩하신 역사를 현실상 적용해 주시는 것이다 말이오. 해서 죄를 씻어 주시는 것이오. 죄를 씻는 다는 것은 죄책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죄가 나를 지배한 상태에서 나를 자꾸 벗겨 주시는 것이다 말이오 .죄가 나를 지배한 상태라는 것은 그걸 통틀어서 대표적인 말로 쓰자며는 나라는 것, 아상이라는 것이 지배할 때요. 나라는 것이 지배할 때 그 어떤 이상적인 주장이 나를 지배하더라도 내가 나에게 왕 노릇을 할 때에는, 아상이라는 것이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씻어내야 해요. 성신님의 성화의 역사라는 것이 점진적이고 또 일생 끊임이 없는 것이고 또 점점점점 이 후패하고 희미한 상태에서 점점 새롭고 능력 있는 상태로 올라가는 거요. 예수를 믿는 시간이 오래된 될 수록 성화의 사실은 현저하게 그에게 나타나야 하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그는 다른 말로 이 말을 표현하자면 병 없이 정상적으로 장성한다는의미요. 병이 없이 정상적으로 장성해 가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그에게 나타날 거예요. 이런 것이 은혜의 방도로서 그에게 역사한 증거고 보람이지, 이런 것 없이 종교를 자꾸 형성하고 혹은 몇 가지의 윤리적인 인간상을 형성해 나가는 것으로는 절대로 그게 은혜의 방도로서의 정상적인 역사를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고 은혜의 방도로서의 정상적인 역사가 없는 것은 교회에서 공급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자태가 아닌 것이오. 교회에 가면 하나님의 말슴을전하는 데에 은혜의 방도로보다도 과학적인 사실로, 역사적인 사실의 사실로, 그렇지 아니하면 어떤 사상적인 내용을 진술함으로,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종교 철학을 얘기하므로, 그렇게 하며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은혜의 방도로 사역 않는 것이라 말이오.
 
  오늘날의 이 자유주의자들의, 리버럴(liberal, 자유당원들)들의 교회나 혹은 현대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의 교회의 강단에서 나오는 말들이 무엇인가를들어보면 알 거예요. 얼마나 교회가 가지고 있는 특권적인 그 메디아 그라티아에(media gratiae)로서의 말씀의 용(用)이 벌써 사라지고 있는가. 거기는 장엄한 의식은 있어요.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말은 해요. 그러나 성경을 해석한다고 해서 해석보다는 도도하고 장황한 철학, 종교 철학론을 하고 있는 것이오. 그러한 상태 아니며는 그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그 도덕훈(道德訓), 어떤 윤리적인 사살을 가기서 뽑아내서 얘기하는 이런 정도요. 그러고 그런 무슨 처세훈이나 도덕후능ㄹ 받아면 그것으로서 “은혜받았습니다” 하고 사람들은 또 그냥 속고 있는 것이오. 속아가지고 있는 것이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 그 속에 역사한 소이가 아닌 것이오. 역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하는 걸 우리가 주의해야 해요.
 
  은혜의 방도로 그 사람의 속에서 역사할 때 그 말씀의 독특한 그 용(用)들을, 독특한 성격이 작용하는 상태를 성경에서는 한 두 몇 가지의 중요한 말씀으로 가르쳤어요. 첫째는 복음이라 해서 지난 번에 우리가 말씀했는데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를 믿는 모든 사람을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 사람에게요 또한 헬라 사람에게로다” 하는 것이 로마서 1:16에 있는 말씀인데, 이 은혜의 방도로서 역사하는 사실의 그 별다른 표현을 또 하나 우리가 보면 베드로후서 1:5-9을 볼 것 같으며는 여기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게 성화의 한 자태일 것이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가 없는 자가 되지 앟게 하려니와 만일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이렇게 믿음에는 무엇을 공급하냐, 믿음이 있은 다음에 세월이 간 후엔 다시 이걸 생각해 보라. 그것이 아니고 믿음이 있다고 그러고 그것이 전부인줄 알지 말아라 하는 거요. 장성하는데 갖춰야 할 것들은 이런 것이다. 믿음에는 덕이 있어야 하겠고, 덕에는 지식이 있어야겠고 그랬어요. 지식이 있은 다음에는 절제가 있고, 절제에다가는 무엇을 또 붙여야 하는고 하니 인내를 붙이고 인내에다가는 경건을 붙여야 하고 경건에다가는 형제 우애를 붙여야 하는 거고, 거기다가는 사랑을 또한 가해야 하는 것이다. 공급해라 하는 거라 말이오.
 
  그런데 성경 말씀은 이와 같이 차츰 필요한 것들을그에게 공급해서 장성하게 해 주시는 데, 첫째는 구원하신다는 그 복음, 새로운 생명과 속죄를 구원하신다는 그 복음, 새로운 todaudd과 속죄를 우리에게 주시는 바 복음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고 그랬고, 또 성경이 그 다음에 우리에게서 역사하는 것은 모든 가치를 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필요한 분석과 분해를 하는 것이오. 즉 정체를 바로 드러내 주는 거요. 이건 사실의 판단을 먼저 정확하게 하게 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표준하에서 정당한가치 판단이 그에게 있게 하게 하려는 그 중요한 기초적인 일인 것이오. 이렇나 본해황 분석과 모든 것을 잘 드러내서 정체를 파악하게 하시는 이 작용을 성경이 하는 것이다 그랬어요.
 
  히브리서 4:12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기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브리 4:12-13을 봤어요. 이 하나님 말씀이 이번에는 양쪽의 날이 서 있는 마치 매쓰와 같이 혹은 그렇지 아니하면 좌우간 양편 날이 서 있는 칼과 같이 어느 쪽으로 쳐도 참 무서웁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거요. 이것의 의미는 심오한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마는 이것과 더불어 가령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 전달되었으면 그 사람에게 그 말씀이 원하는 그 기대하는 거룩한 적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하고 그 사람이 그것을 쇠해 버리게도 할 수 있는 것이오.
 
  적극적인 효과를 나타내지 아니할 때 말씀이 그냥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괜히 헛되게 한 것이 되느냐 하면 절대로 그런 게 아니오. “하나님 말씀은 어느 경우든지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해서 여기 성경 말씀을 어디 또 한 군데 보면 이것이 고린도후서 2:15-16 말씀을 보면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첫째 망하는 사람)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즉 구원 얻는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이 말의 뜻을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 말씀으로 구원 받을 사람인가 망할 사람인가 우리는 모르지만 말씀이 떡 임해 보면 망할 사람과 구원 받을 사람이 분명한 것이다. 말씀이 이르러서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로서 나타나는 것이지마는 망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말씀은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 정죄의 무서운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거요. 그래서 멸망으로 사망에서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다.
 
  말씀은 사람에게 들어갔을 때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그만큼 말씀이 주려는 은혜가 그에게 오는 게지만 안 받으며는 그 반대의 하나님의 무서운 문책이 늘 붙어 다니는 것이다 그것이오. 이것이 은혜의 방도로서의 말씀의 용(用)인 거요. 즉 하나님의 말씀인 이상에는 그냥 경전 말씀과 같이 그냥 둥그러간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간 이상에는 그것은 이런 무서운 작용을 하는 게요. 양날이 서서 이쪽으로 치면 그쪽으로 가지만 이쪽으로 치면 이쪽으로도 깎아지는 것이다. 어느 편으로 다 이 칼은 예리하게 작용하는 것이지 구원만 작용하고 멸망에 대해선 아무 작용도 없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이 구원의 크신 사실이라는 건 엄숙하고 위대한 사실로써 그것은 소홀히 하면 소홀히 했다는 사실, 그걸 안 받으면 안 받았다는 사실은 무서운 형벌을 받을 죄악이 되는 것이오. 절대로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도한 말을 안 들은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은 죄하고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그말이오. 그것이 그것 자체가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이오. 그런 까닭에 말씀이 복음의 내용으로 정당하게 그 사람에게 공급되어야 하겠지만 공급된 이상 받고 안 받는 문제에 있어서 받으며는 구원을 받겠지만, 그가 그것을 받지 않았을 때는 그것 때문에 무서운 멸망과 흑암이라는 것은 더하는 것이다 그것이오.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는 많이 준 자에게 많이 뺏고 또 많이 달라고 하고, 또 알고서 잘못을 할 것 같으며는 모르고 잘못을 한 사람보다 더 맞는다. 이 큰 원칙이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들어갔든지 그 사람에게 들어갔으며는 그 사람에게 들어간 만큼 안 들어간 사람과는 달리 그 사람을 그 말씀에 대해서 바로 대접하거나 푸대접하고 그로 말미암아 큰 형벌을 받거나 즉 문책을 받거나 하는 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은 예리한 것이다 하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보통 말씀이라는 것을 듣고서는 구원 이의에는 그 다음의 생활에 있어서는 그 말씀이 도덕적인 교훈으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는 거요. 어떤 도덕적인 교훈, “이것 하지 말아라 저거 하지 말아라 저것 하지 말아라” 하고 그런데 이렇게 도덕적인 교훈으로 작용하는 일은 이게 안 믿는 사람에게도 하는 것이오. “무얼 하면 안되겠다, 무얼 하는게 좋겠다” 하는 건 안 믿는 사람에게도 하는 것이오.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말씀이 이렇게 단순히 무슨 도덕적인 교훈을 혹은 율법의 지켜야 할 그 주문으로 그냥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해요. 마치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이라는 게 “하라, 하지말라”하는 이 명령이라는 것이 실정법적인 그냥 효과만을 내고 마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참 잘못인 것이요.
 
  그런 까닭에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나온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산다 하면서 특정법적인 명령에 의해서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 뜻대로 하고 사는 것인 줄로 아는 건 이게 큰 오해다 하는것이요 이미 기간이 많이 갔으니까 이 얘기는 이 다음에 다시 하겠습니다마는 말씀이 우리에게 있어서 효과 있게 작용해서 장성을 시킬 때에 그 말씀의 작용이 라는 것은 어떤 상태나 거기에 대해 우리의 이해라는 것은 어떻게 생겨야 하는 건가 하는 것이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주님의 거룩하신 말씀이 저희 안에서 가장 정상적으로 사역해서 성신님이 그것을 쓰시는 확실한 열매를 내게 하시고, 혹은 성경이 그 속에서 작용하므로 성경에 의지해서 사니까 그것으로써 성경 뜻대로 세상에서 바로 사는 것인 줄로 아는 오무와 미망 가운데 빠지는 일이 없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의 그 거룩한 뜻과 사역이라는 것이 누구에게 무엇을 명하는 것인가. 어떤 바탕 위에서 그것을 하라고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바로 알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로 공급되는 일인가를 바로 알아서 사이비적인 여러 현상과 진실한 현상을 구별할 줄 알게 하시고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릇되지 말고 바르게 말씀에서 장성하여 하나님께서 참교회로 세우신 그 거룩한 본의를 이곳에서 이루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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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https://www.esesang91.com/b/preach/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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