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대하여 ⑵ 교회의 세 가지 징표 김홍전
교회에 대하여 ⑵ 교회의 세 가지 징표⑵ 김홍전
엡 1:13-23 1979.10.28(주)자료출처:http://cafe.daum.net/wansu63
오늘도 지난 주일에 계속해서 교회에 관하여 생각하겠습니다. 먼저 지난 주일에도 얘기했지만은 이 교회관이 잘못되면 대단히 위험한 일이올시다. 오늘날은 그런데 문제가 교회관 때문에 일어나는 일을 때때로 보면서도 예를 들면, 에큐메니칼 운동, WCC 문제, 이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교회 문제는 한마디로 무엇보다도 교회관에서부터 생각해야 하는 것이올시다. 교회는 늘 이래도 되느냐? 이래도 교회는 괜찮은 것이며 교회가 성립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하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 이런 교회관에 있는 문제들이 우리 주위에까지라도 때때로 엄습하는 데도 불구하고 항상 그런 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잘 모르고 예수 믿고 천당간다는 그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그 공식이라고 할, 이상한 캐치플레이즈(catch-phrase) 그것 하나에서만 주저앉아 버리는 이런 위험한, 절대로 이런 식의 부지할 수 없는 것, 그 사람을 바르게 하나님 앞으로 부지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명심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다가 배교하는 시대에 배교의 물결로 휩쓸려 가는 것은 기독교라는 것을 전혀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오. 다 어느 정도 만큼은 아노라고 하는 것인데 꼭 알아야 할 중요한 것들은 모르고 또 가져야 할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가지지 못하고 또 믿음이 튼튼한 반석과 같이 서 있지를 아니하고 요동하는 까닭에 그리고 항상 그것이 공리적인 동기나 목표를 가지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까닭에 그건 기독교가 아니고 종교를 하는 까닭에 그렇다 그말이오.
진리를 떠나서 이렇게 방황하는 사실이 오늘날 시대상에 현저하게 드러나는 이 배교라는 사실을 훨씬 더 보강하고, 더 번성하게, 더 치열하게 만들어져 나가는 것이다 말이오. 이 배교라는 큰 사실이 어디서 현저하게 역사적인 사실로 일어나겠느냐 하며는 물론 배교라는 것은 기독교를 전제로 하고 하고 있는 것인 까닭에 기독교 국가라는 사회에서 먼저 일어날 거요. 그건 분명해요. 기독교 국가라고 할 때에 그것이 현저한 사실로 움직이는 것은 유럽과 아메리카 땅이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아메리카 땅에는 한국에서 살 때와는 비교가 안 되게 현저한 배교의 큰 도도한 물결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이제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이오. 그것 없이 미국에 와서 아메리카에 와서 그냥 그대로 세월을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히 하나님 앞에 모델 춰치(model church)하는 것을 늘 지향하면서 가려고 하는 사람들로는 도저히 용인 못하는 것이오. 항상 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어떠한 기회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아메리칸 사회에 살고 있는 만큼 가지는 기회라는 것은 이제 피부로서 접촉할 수 있는 큰 세계적인 역사적인 흐름이라는 것이오. 둔감한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어디다 갖다 두어도 모르지만, 손에다 쥐어 주어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영적으로 민감성을 가진 사람 같으면 주의를 해서 늘 그런 것을 보아야 하는 것이고 개혁교회가 원래 지향하는 바는 이런 민감한 영혼의 작용이 그 교회를 항상 바르게 이끌고 나가기를 원하는 것이오.
개혁교회라는 것은 지난 주일에도 말했지만 건실한 인텔리겐차라고 했을 때 그게 단순히 이 세상의 지식만을 상당히 기초로서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지식에 대해서도 인텔리겐차의 노릇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한 국가에 있을 때 건실하고 중견적인 시민 노릇을 못하는 거나 꼭 마찬가진인 것이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다고 할지라도 건실하게 그가 알아야 할 중요한 지식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그러면 그런 인텔리겐차가 그런 인텔리젠스(intelligence)를 가지고 그 접촉하고 있는 사회의 의미와 사회 현실을 사실을 바로 판단해서 파악하는 것과 그 가치가 무엇인가, 그 사실은 어떠한 가치를 어떠한 현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는가. 이런 것을 사색지 못하고 리즈닝(reasoning)을 못 해내면 그것 인텔리겐차가 아닌 것이오. 그냥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거요. 그런데, 물론 예수 안 믿는 사람이야 아무리 세상 지식이 많더라도 그런 걸 알 까닭이 없어요.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 거요. 그러나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이 그런 것을 잘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 다음에 파악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기의 영혼의 기능의 작용이 있어야만 개혁 교회로서 건전한 교회로서의 행보를 할 수 있는 것이오. 그리고 그런 것은 건전한 교회에서 중견이 가져야 하는 것이오. 중견이라면 누구냐면 노인들이 아니고 어린애들이 아니고 연약한 사람도 아니고 항상 이 세상에서 살 때도 가장 왕성하게 일하고 분별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중견을 형성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런 교회가 하나의 사회 단체로서의 의미로 볼 때 어떤 사회든지, 단체든지 가지고 있는 그런 사회단체로서의 요소라는 것, 건실한 중견과 건실한 중산 계급과 또 건전한 열성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과 교회는 특별히 그 중에 하나 요구하는 것은 신령한 생활을, 즉 하나님 앞에 전부 다 바치고 사는 생활을 하라는 이런 것으로만 소위 역사적인 개혁 교회는 그 앞으로 점점 작용을 하고 활동을 해서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것이지 그러지 않고 저절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오. 어떠한 타락된 역사 현실은 만들어 내겠지마는 의미 있는 일관된 개혁자들의 그 전통을 받아서 계승하는 전승자로서 일을 못 하는 거란 말이오. 그런 까닭에 이 점을 항상 중요히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금까지 배워오는 이유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귀하게 세우신, 나중에 그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그 충만이라고 하는 가장 위대한 엔티티(entity). 위대한 사실인 교회라는 것을 바르게, 받는 바 도전에 대해서 바른 대답을 할 수 있는 교회로서의 자태를 바로 드러내려는데 중요한 우리의 생활 목표가 있는 것이오. 이런 것을 떠나서 세상에서 부자가 된다든지 이름 내고 살겠다든지 무엇인지 좀 행복스럽게 살겠다든지 하는 소위 유다이모니아, 행복론, 그건 옛날부터 모든 안 믿는 사람의 세계에 다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근대에 와서 유틸리테리안이즘(utilitariaism)으로, 공리주의로 자꾸 발전했는데 그럼 공리주의 생각 가운데 종교까지 마저 이용해 먹는 그런 비천한 일밖에 안 되는 것이오. 이런 것은 테스트하는 날, 진짜와 가짜, 사이비와 진실이라는 것이 이렇게 나누는 날에는 자꾸 갈라지는 것이지 언제까지든지 한 타레에 두어두고 다 그것이 그것인 듯 보게는 안된다 그것이오.
그런 까닭에 이 교회관을 정확하게 바로 가지고 그것을 심오하게 가지고 거기에 의거해서 바로 판단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바로 판단할 뿐 아니라 자기가 바로 행동하고 나가야 해요. 그래서 자기 교회가 바로 서야겠다는 열의를 가지고 정신을 차리고 나가야지 그렇지 아니하고 종교라는 것을 하나의 자기 문화 생활의 일환으로 생각해서 꽃꽂고 가는 것같이 그냥 자기가 꿰뚫고 가고 어느 때는 아쉬우니까 어디 의지할 데 없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의지하고 나가는 이런 공리주의 정도에서 주저앉는다는 것은 세상에 오늘날 우리 교회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비천한 일인 것이오.
그런 까닭에 교회관을 바로 가져야 할 텐데 아메리카 사회에 와서 지난 주일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다시 주의해서 생각할 것은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의식을 집행하는 것이 교회 되는 것 아니다 하는 것이오. 만일 그것이 교회 된다면 가정마다 예배보는 가정은 다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오. 그렇지만 그러한 가정에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그런 의식을 좀더 다른 많은 친구들을 위해서 해놓으면 그건 교회다 생각하는 아주 이론이 되지 않는, 하나님 말씀의 한 구석도 바로 생각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이 교회를 만드는 운동을 모두 다 하는 것이 아메리카 이민 사회에 많이 있는 것을 주의하라는 거요. 교회가 교회 되려면 그 외부의 형성 조건 요소에서부터 생각해 나갈 때 교회의 징표들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그랬지요. 교회가 교회인 것과 아닌 것과 구별할 때 이걸 가지고 징표를 삼는다고. 그 징표가 교회에 구비되려 할 것 같으며 어떠한 구체적인 사실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난번에 얘기했어요.
말씀이 첫째 중요한 징표요. 말씀이 순전하게 바르게 공급 되야 하는 거라 말이오. 바르게 전파되고 가르쳐지고 해야 한다 말이오. 그런고로 말씀이,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큰 사명에 따르면, 나가서 세상에 있는 모든 백성을 제자 삼아서 세례를 삼위의 거룩하신 이름 안에서 세례를 주라 하시는 이 말씀의 뜻은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단계를 여기에 결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또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것을 이제 이후에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잘 지켜서 행하게 하라. 그래서 교육하고 실천하게 한다는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말이오. 이런 것이 말씀이 그 교회 안에서 작용하는 혹은 사역하는 중요한 사실로 그것이 없이 교회는 성립 않는데 이런 것이 정당하게 공급이 되고 정당하게 사역이 되려면 차서(次序)가 있고 젖먹이 어린아이에게 젖을 주지 단단한 음식을 먹여서 체하게 하지 않는 것같이 차서가 있는 게고 또 그것은 교회가 한 살아 있는 실체로서 장성하기에 필요한 생명의 양식으로 공급해야 하는 것이다 말이오.
이런 까닭에 이것은 보통 레이먼(layman)들이 앉아서 읽는 것으로서 공급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주의해야 해요. 이렇게 해서 개혁교회는 역사적으로 말씀의 공급에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는 강단, 풀핏(pulpit)을 늘 얘기는 거요. 신학교 교실도 아니고 집에 앉아서 성경 공부하는 게 아니고 반드시 교회라는 거룩한 형식과 거룩한 내용을 전제로 하고 거기에 반드시 있어야 할 이 카톨릭의 제단을 치우고 그 대신에 있어야 할 강단이 중요한 것이오. 그래서 강단에 서서 성신님이 주장하시므로 나타나는 이 말씀이라는 것은 특별히 예배드리고 하나님 앞에 그 슬하에 모여 앉아서 듣는 바 그 말씀이라는 것은 지금 오늘날 이렇게 앉아 있는 이것, 이런 것이 가장 중요한 형식으로서 개혁교회는 가르쳐 온 것이다 말이오. 그러면 강단이 있으려면 강단에 서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요. 이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은 아주 처음 옛날 원형의 교회, 예를 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회에서도 하듯이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구별해 놓듯이 구별한 사람들이 있는 거요. 아무라도 그냥 임시로 그때 느낀 대로 불러내다가 하는 게 아니라 그 일생을 거기에 바치고 일생을 이렇게 쓰시기로 해서 불러내는 사람들이 있어서 불러내는 그때부터 이후는 일생을 그 일을 위해서 주님 앞에 바치고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오. 그가 서서 그가 자기 집안에 식구를 모아놓고 기도회 하는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라는 의식으로 교회의 형식과 교회의 내용을 갖춘 그 요소들을 담은 자리에서 말씀할 때는 단 한 사람이든지 두 사람이든지 자기 식구만이라든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지 교회는 주어지는 것이다 말이오. 이렇게 발생하는 것이오. 목사는 아무 때라도 저게 교회다 하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오. 교회라는 것은 교회로서의 요소를 형성하기 위해서 교인과 목사로 되는 까닭에 교인들의 그 상태가 그 모여 있는 목적과 동기가 교회로서의 의식 가운데에 모아야 하는 것이다 말이오. 그런데 목사가 또한 함께 같은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교회로서 자기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지, 이 교회로서의 의식이라는 것은 동시에 교회의 가지고 있는 내용의 요소들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제 배워야 할거요.
그러나 형식으로 보더라도 교회는 적어도 이 개혁교회에서는 세 가지 중요한 징표로 가지고 있다고 지난 주일날 얘기했어요. 다시 중요히 기억해 두세요. 말씀을 바르게 듣는 이 형식으로 공급해 주고 전파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항상 권고해 나가는 그것이 있고, 그 다음에는 말씀을 눈에 보는 심벌에 의해서 전해주는 것이 있어요. 이것이 세례와 성찬이라는 성례전인 것이오. 교회는 그러므로 성례전이 교회를 교회 아닌 것과 구별하는 중요한 하나의 마크(mark)로, 징표로 가지고 있는 것이오. 성례전이라는 것은 개혁교회는 절대로 평신도들이 앉아서 집행 못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무서운 경고가 거기 하나님 말씀에 붙어 있는 까닭에 그래요.
고린도전서 11:27-29 붙어 있는 경고는, “주의 떡과 주의 잔을 분별이 없이 마실 때는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합당하지 못하게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면 곧 주의 몸을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이렇게 무섭게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고린도 사람들 가운데는 그것 때문에 약한 자도 많고 병든 자도 많고 죽은 사람도 있다. 그렇게 말씀했어요. 그런 무서운 사실, 하나님이 엄숙하게 다루는 사실을 그냥 평신도들이 그 의미도 잘 모르고 함부로 집행하는 것은 옳지 않은 까닭에 반드시 교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그걸 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 그 교회의 대표자, 또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서 불러 세운 사람이 그 말씀을 거지고 반성을 하고 그것을 집행하게 됐다 그말이오. 그런 까닭에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신성하게 아주 신중하게 행해야 할 예식인 것이오. 그냥 적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오. 앉아 가지고 근신해서 주의해 가면서 늘 해야 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므로 이것도 거기에 그러한 사람, 하나님께서 불러서 그 일로 기름부음을 받게 하신 사람들이 서서 해야 하는 것이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오.
또 그 다음에 권징이라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했어요.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하시는 그 명령에 의해서 행하게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태만하면 권고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잘못되었으면 징벌하는 것이오. 이것은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자면 교회법적인 징계요, 책벌을 하는 것이다 말이오. 이것이 오늘날 와서 아주 해이해지고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는 굉장히 해이해졌어요. 거의 그것 있는가 없는가 모르게 속으로 가만 가만히 모두 다 행해지고 이것이 하나의 교회의 징표로서의 테스티모니(testimony-증거, 선언)로서의 의미는 벌써 안 가진 것 같으다 말이오. 그러나 우리 교회는 명확하게 그걸 가지고 있는 줄을 여러분 아셔야 할거요. 그리고 명확하게 항상 그 조건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이오. 그렇게 해서 때때로 책망이 와야 할 게고 때때로 경계가 가야하고, 그러나 이것은 개인이 개인보고 하는게 아니오.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찔림을 주고 책망을 줄 거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신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또 바르게 함과 의로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했어요. 그러므로 거기는 교리가 있고 그 다음에는 책망이 있는 것이오. 하나님 말씀이 책망을 앉는다면 그 사람이 자신이 말씀에 대해서 면역성이 있거나 둔감한 것이오. 어딘지 정상이 아니오. 정상의 사람은 아무 책망 안 듣고 자라지는 못하는 것이오. 또 바르게 함이 없이 자라지 못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고 본질상 사곡되다고 그랬지 결코 사람의 본질이,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안 했어요. 불의하고 악해서 때로 탐욕이 일어나고 정욕이 일어나고 비뚤어지고 하는 것이오. 그러니까 자꾸 잡아 주는 것이오. 그것을 상당히 나이 먹어서 수양을 했다고 하더라도 틈틈이 틈타 가지고 나오는 것이오. 항차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로서 그것 다 내는 것이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를 자연성을 개발시킨다고 그냥 방치해 버린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법이 아니오.
그렇기 까닭에 우리 교회는 아이도 같이 와서 예배를 보는 것이 좋은 것은 어이들이 예배보면서 당하는 제재, 디시플린(discipline, 제자)이라는 것이 중요한 교육을 하는 것이오. 그렇게 해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기르는 거고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구약적인 용어로 보면 그것이 곧 구약의 종교였어요. ‘주를 경외한다’ 하는 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말이오. 그런데 이와 같은 징표들이 있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있고 교회가 그러한 외부적인 표면적인 요소를 가졌지마는, 예배당이란 것은 교회의 징표는 아니오. 십자가도 교회의 징표가 아니오. 제 1 세기에 그런 것 하나도 없었어요. 가장 모범적인 교회를 세웠던 1세기에는 예배당도 없고 십자가 내걸고 돌아다닌 일도 없고 그냥 이렇게 어떤 집에서 같이 모아 가지고 사도가 없으면 사도가 임명한 다른 사람이 가서 그때 인도를 하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단기간에 모두 특별히 훈련들을 해서 내보내고 했을 것을 다 예상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도는 순회를 하면서 늘 찾아가고 그리고 거룩한 예식은 그 후는 몰라도 그 전에는 항상 사도가 주께 받아 가지고 집행하고 지냈었단 말이오.
그런데 이제 그 교회에 대해서 교회관이 어떻게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했는데 하나 더 생각할 것은 교회관이 그릇되면 가령, 예를 들면 신자들 모여 가지고서는 교회라 만들어 놓고 얼마동안 예배를 보다가서는 어떤 목사가 좋으냐 하고 목사를 이제 찾으면 목사 가운데 미국에 있다가 나가야 할 사람이 그냥 주저앉고 싶으면 교회 목사로라 해 가지고 주저앉고 싶어서 그래서 가서 구직운동을 하다가 마침 생기니까, 왜냐하면 하도 무임(無任)목사가 이민 사회에 많으니까 그냥 떡 들어가서 앉았으면 그냥 교회된 줄 안다 그말이오.
지난 번 미국 갔을 때도 그래 가지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뭐 모두 합했다는 데 서로 자기네 교파의 그 무슨 교리나 주장이나 헌법대로 했으면 좋겠는가고 자꾸 주장하니까 이래서는 하기가 어렵다고 위원을 내가지고서 장로교의 법에서 좀 따고 감리교 법에서 좀 따고 성결교 법에서 좀 따서 만드니 그런 레이먼(layman, 속인)들이 교리에 대해서 분명히 모르는 사람들이, 교리에 지켜서 법이 나오는 것인데 법이 탄생을 하는 것인데 교리라는 것이 그게 모법(母法)이요 자연 모법인데, 모법은 전연 모르는 사람들이 임시로 무슨 규약을 그렇게 만들고 법을 만든다는, 그게 교회가 되겠는가 그러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와서 그 얘기를 해요.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고. 비난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당사자들이 와서 그 얘기를 하길래 그러냐고 이야기만 듣고. 그럼 교리는 무엇이냐고 하니까 무엇을 하나 내세우면 서로 반대할 테니까 안 내세운다는 것이오. 교리 없는 교회가 어디에 있어요? 즉 신조도 없는 그런. 무얼 믿고 사느냐 그러면, ‘예수 믿고 천당 갑니다’ 하나가 구호요. 그건 에큐메니칼의 WCC보다도 약하다 그말이오. WCC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하나님으로 성경이 가르친 대로 믿는 자들이 서로 합동하는 것이고, 그게 교리요. 그놈만도 훨씬 못하지 않느냐? 이러고서도 교회가 되는 줄 아는데 그러한 레벨(level, 수준)이나 그러한 상태가 너무나 많이 돌아다닌다 그말이오.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는가?
요컨대 배교의 현실은 예를 하나 WCC를 보더라도 가령 어떤 사람이 정통을 하겠다면 정통을 해라. 그리고 합해서 하자, 서로 다른 것은 논하지 말고 같은 것만을 거기다가 세워 놓고 그리로 같이 함께 협동해서 일을 하자 해서 자기네 가지고 있는 그 협동해서 일한다고 하는 이상이라고 할 목표하라고 할 걸로 끌고 다 들어갔다 그말이오. 그래 가지고서 미국의 가령 개교회 가운데 “우리는 성경을 그대로 믿고 진리를 그대로 믿습니다. 그러니깐 교단이 어떻더라도 우리는 정통입니다.” 지금도 그런 교회들이 많이 있어요, 북장로교회 말이오. 그러면 어떠냐 괜찮은 것 아니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큰 배를 타고 갔으면 배가 가는 데로 가지 제가 다른 데로는 안 가지는 것이오. 그렇게 정통이면 왜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리고 거의 훼방의 용어까지 쓰는 사람들과 함께 붙어 가지고 다니느냐 그거요. 그래 가지고 같이 앉아 의논하고 한 교파라고, 형제라고 그러고 손잡고 그런 무절조가 어디가 있는가 그말이오.
요컨대 하나님께 대한 그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는 말씀대로 단심이라야 하는 거요. 거룩하다는 것은 첫째는 단심, 한마음으로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전부를 다 바친, 그러한 남편을 위해서 전부를 바친 아내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오. 절조라는 것, 정조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 거요. 신앙이 정조 없으면 신앙이 아닌 것이오. 그런데 훼절(毁節)을 하고 그러니깐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여러 번 남편을 훼절하고 간 여자와 같다고. 그리고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그렇게 꼭 거기에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사실인가를, 그러면서 나중에 에베소서에서 말할 것 같으면 “간음하는 자나 음행 하는 자 도둑이나 탐람이나 이런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말했지 그래도 하나님 나라는 네 것이다고 안 했단 말이오. 왜 그렇게 하나님 말씀이 명확한데도 그것 괜찮은 것같이 저희 맘대로 위로해 가면서 살아요? 개혁교회는 그런고로 역사적으로 엄격했어요. 신앙에 대해서 양보를 안 해주고 그 조건은 하나님 말씀은 말씀이다. 말씀에다가 왜 에누리를 하느냐 하고서는 엄격히 움직였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냥 거기에 휩쓸려 들어가서 점점 저도 모르는 사이에 끌고 가는 데로 큰 데로 들어가서 다 활동하지 않아요. 지금, 부활주일 때니까 같이 예배보자 하고 우 하니 모으면 거기다 모두 프로그램을 맡아 가지고 저희들은 무슨 개혁신앙을 가졌다고 떠들던 사람들이 금방 거기 가 들어 붙어 가지고 그 일을 해요. 그것이 무슨 예배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카나디안 리폼드 춰치(Canadian Reformed Church)라도 당장에 그것 비난한 것을 다 듣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예배냐? 그런 식으로 하는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그렇게 만홀히 여겨서 크다면 좋고 유리하다면 좋다고 쫓아다니는 이 심리가 교회관이 무엇인자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모여 가지고서 교회로라고 해 가지고 이것 묶어서 도매금으로 넘겨주는 것과 같이 되는 것이오. 그러니까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그 심리 자체가 물론 처음에는 외로우니까 서로 들어 붙어 가지고 위로하고 도와주고 살자는 이론으로 말하자면 클럽이나 계와 같은 의미에서 왔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이 존재해야겠다고 주의 몸이 여기 나타나야겠다는 그런 생각은 별로 없는 것이오. 거기에, 말로만 주의 몸이지만, 주의 몸이라면 몸이 되는 요소가 있는 것이오. 요소는 없이 말로만 하면 저절로 되는 것인가?
이러니까 교회관이 볼확실하면 이 배교의 시대에서 누가 잡아가는지도 모르게 다 휩쓸려 가는 것이오. 참 주의해야 해요. 우리 교회는 이런 일에 대해서도 정신을 차려서 잘 알고 있어야지 모르고서 헤헤 하고 그냥 앉아서 무슨 일 당하면 그 사람들 생각에 옳은가 보다 좋은 가 보다 이런 짓한다는 것은 마침 기회가 없어서 안 만들었다는 것뿐이지 아무 것도 그 레벨에서 벗어난 것은 아닌 것을 주의해야 해요. 언제든지 교회에 대해서 이게 하나님께서 경영하시고 구상하신 가장 고귀한 시책인 것을 알고 나 하나의 존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인 줄을 알고 하나님 앞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더 중요한 것이오. 내 하나 여기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최귀(最貴)의 사실이 아니오. 나는 그를 우해서 있는 것이지 그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이렇게 귀한 것인 줄 알고 교회라는 말을 너무 함부로 써 가지고 적당히 만들면 교회인 줄 아는 이런 그룻된 이 관념이라든지 그릇된 관습이나 습성이 있으면 그것 완전히 불식해 버려야 해요. 씻어 버려야 하지 절대로 교회를 존중하게 신성하게 아주 두렵게 생각하고 늘 무엇을 사고를 해가야지 그릇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말씀이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오늘 다시 몇 가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은 조금 그 교회의 외형에서부터 들어가서 성립되는 요소로서 말씀이 거기 반듯이 바르게 공급이 되고 또 바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말씀을 중심으로 먼저 시작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말씀은 대개 어떻게 공급이 되고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성경말씀을 읽기만 하면 되는냐? 읽고 그 뜻을 해석하면 되느냐? 거기에는 자연히 스스로 놈(norm, 표준)이라는 것이, 규범이라는 것이 딱 서 있는 것이오. 그냥 덮어놓고 성경 말씀을 한 역사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끄집어 다 읽고서 재미있게 이야기하면 거기 교회가 성립된다고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말이오.
그러면 교회가 성립되는 요소로서의 말씀이 작용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은혜의 수단으로 반드시 작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오. 메디아 그라티아에로서 반드시 작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오. 은혜의 수단이 아닌 다른 것으로는, 예를 들면 성경은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사역 뿐 아니라 성경의 문헌, 문헌으로서의 가령 예술서로서 위대한 사역이 있다 그말이오. 사상 서류로서도 위대한 사역이 있어요. 역사서류로서도 비견할 수 없는 서류 없는 책이다 그말이오. 또 그것이 신학을 구성하는 원천으로서 중요한 경전이 돼요. 그러나 성경이 경전이 됐다면 곧 하나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오. 성경은 경전 노릇, 종교의 그 중요한 도리를 거기서 구성해 내는 원천으로서 작용을 했다고 해서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금방 결론 못 하는 것이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신학의 원천으로나 사상서류로나 또 도덕예의를 특별히 가르치는 점에 있어서도 위대한 서류고, 예술서류로서 아주 위대한 작품인 것이오. 그러나 그런 작용을 하려면 은혜의 방도라는 테두리 안에서 은혜의 방도의 그 요소 안에서 그것이 작용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은혜의 방도라는 사실을 떠나서도 그것은 그것대로 충분히 안 믿는 사람에게, 민감한 사람들에게 아주 훌륭한, 위대한 감화를 주고 위대한 역사를 하는데 그런 것은 교회에서 공급되는 말씀의 작용은 아니다 하는 것이오. 교회에서 그런 정도로 말씀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교회가 되려고 해석의 요소로서 말씀이 작용하려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 무엇이냐 할 때 한마다로 구속의 은혜의 수단으로서 말씀이 작용되는 것이다. 구속의 은혜의 수단으로서 작용된다고 할 때 그 단계를 우리 생각의 편의를 위해서 두 가지로 크게 나누면 첫째는 구원의 사실, 즉 구속의 사실이라는 거요. 둘째는 구원의 완성에까지의 과정 즉 믿는 사람이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생명만 얻었을 뿐 아니라 들어가면서 나가면서 꼴을 얻어서 자꾸 장성해 간다는 데에 그걸 공급하는 양식으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말이오. 요컨대 예수님을 우리가 생명의 떡이라고 요한복음 6:48에 그말이 있는데, 또 요한복음 10:9에는 예수님의 양은 양우리에서 양문으로 들어가고 나가면서 꼴을 얻고 그 선한 목자 오신 것은 양을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상징적인 그러한 파로이미아(παροιμια)의 용법은 현실상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느냐 할 때 말씀이 우리에게 늘 적용되는 시기부터 시작하는 거요.
괜히 철학적으로 그 막연한 말로 요새 신 복음주의 가운데에서 하는 말과 같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사귄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어떻게 사귀느냐? 그것 참 막연한 얘기요. 그렇게 말하면, 예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가지면 기도하고 어떠한 신비한 감흥을 마음 가운데 얻는데 있는게 아니라 그 말씀에서 그 거룩한 사상과 뜻을 내가 자꾸 받아야 하는 거요.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예수님 앞에 구하고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그 신으로 나한테 역사하셔서 성신님의 역사로 깨닫게 하시고 확신케 하시는 데 있는 것이오. 이것이 예수님과의 교통에 아주 중요한 현실이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어떤 감정적인 감흥이나 찔림이나 마음의 떨림이나 이상한 촉감이나 이런 것을 바란다면 그건 순전히 자기 이성을 무시하고 감각에 의해서 신을 알려고 하는 사람의 짓이다 그말이오.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그거요. 그러니까 은혜의 수단으로서 메디아 그라티아에로서 그것이 우리에게 공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오.
이 성경에 이런 용(用)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말한 데는 디모데후서 3:15,16에 있는 말씀이오. 이 디모데후서 3:15,16 볼 것 같으면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첫째는 구원이오. 성경은 그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셈인데 누구에게 주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것이오. 그리스도 예수에 있는 그 믿음이 그에게 들어감으로 지혜가 들어가는 것이지 믿음 없이 읽기만 하면 구원의 지혜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오. 그런고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는 것이다. 이 구원에 이르려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는 것을 또 여기서 표현하는 것이오.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그 지혜를 성경이 주는 것인데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은혜의 방도로 성신님이 그에게 역사하셔서 보여주셔야 하는 것이 그말씀이오.
그 다음에 디모데후서 3:15 다음에 16,17절 말씀이 이번에는 믿는 사람의 그 장성에 관한, 장성에 있어 하나님 말씀은 어떻게 공급되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인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혹은 교리라) 책망과 (잘못되니까 사람은 그걸 바르게 잡으려고 책망과) 바르게 함과 (책망만 하지 않고 무엇이 바르다고, 바른 데다가 갔다 놓는다 그말이오)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지러지고 결핍이 있고 병신 된 사람이 아니고 병든 사람이 아니고 건강하고 온전한 성인 노릇을 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말이오. 온전케 하며) 또 모든 착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세상에서 살면서 이제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 텐데 그 행동이 착하려면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이나 책망이나 바르게 함이나 의의 교육을 잘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나의 행동 생활이 하나님 앞에 받을 실 만한 것으로, 착하다 하나님의 속성도 착하다는데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 되는 것이지 그러지 않고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심정으로 그걸 해가지고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 안된다 그말씀이오. 그러니까 이것은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할 뿐 아니라 여기 볼 것 같으며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착한 일 행하기에 온전케 할 뿐 아니라 그에게 장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말이오.
즉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로난 사람은 생명인 까닭에 그 생명이 새사람을 형성하고 형성한 새사람은 바로 장성해 나가는 데 장성해 나갈 때에 공급해야 할 것들을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1:5-9 보면 그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하는 것을 이야기한 데가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볼 것 같으면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의 믿음에는 덕을 공급하고 또 덕에는 지식을 공급하고”, 사람이 예수를 진실하게 믿고 하나님을 늘 의지하고 사라겠다고 하면 그 다음에 그 사람에게 보아야 할 것, 그 사람이 내 놓아야 할 것은 덕이 있어야 하는 거요. 관용, 또 남을 친절하게 하는 것, 또 항상 겸손한 것, 또 남에게 대해서 항상 바르게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이오. 이 믿음에 덕이 있어야지 덕 없는 믿음만 가진다는 것은 완전히 불도(佛徒)나 다른 종교하는 사람들과 같은 자기 종교를 하는 거요. 믿음에는 반드시 그 덕이 있어야 하는데 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순진성이라든지 선천적으로 착한 마음이라든지 그 정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오. 그건 그것을 안 믿는 사람도 다 가지는 것이오. 여기는 믿음이 온 까닭에 그로 말미암아 더 공급해야 할 그러한 독특한 덕들이 있는 것이다 그거요.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요구하지 않고 또 볼 수가 없었던 것이지만 믿음이 온 이후에 비로소 이제는 현저하게 보아야 할 그런 덕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 믿음이라는 것은 그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에 잇는 까닭에 새로운 생명은 그가 형성한 그 새로운 생명이 새사람을 형성했을 텐데 그 새사람이 나타내는 덕들이 있다 그것이오. 이 믿음에는 덕을 더하고 그러면 덕행이 늘 있어야 하는 것이오. 덕행이라는 것은 멀리 가는 것 아니다 그말이오. 성신을 의지해서 사랑, 희락, 화평 그것이 덕행을 하기 위한 자기의 바탕을 만들어 주는 것이오. 오래 참는 것, 자비로운 것,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자비로운 것, 또 그 다음에는 양선이라는 것, 친절이란 말이오. 그리고 착한 거요, 마음이. 그 다음에 온유한 것, 또 그 다음에 충성과 하나님에 대해서 절제다.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성격에서는 성신님으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가르친 것인데 이런 성신님으로만 나올 수 있는 이 덕들이 믿음에서 믿음이 있은 이후에 오는 것이오. 왜냐하면 믿음이 있은 까닭에 성신님을 의지하게 되고 성신을 믿게 되고, 따라서 성신님이 약속하신 거룩한 그리스도적인 품성, 도덕적인 성격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이다 말이오.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오.
교회를 밤낮 다녀도 그게 없으며 그런 사람들로만 대부분 형성된 교회라면 그건 교회로서 생명이 없는 것이오. 거기 교회의 다른 요소를 아무리 가졌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능력이 없는 것이오. 증거를 못해요. 에베소 교회는 교리에서 대단히 밝고 훌륭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첫사랑을 버렸다는 것 때문에 촛대를 옮기겠다고 묵시록 2장에서 맨 처음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의 서신 가운데서 우리가 보는 것이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오. 교회로서 성립되었으니까 우리 주님도 교회라는 말을 쓰시고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이 말을 써서 붙이라 했는데 그런데 무엇인고 하니 “너희가 책망할 것은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서 그 촛대를 옮길 터이다. 회개해라” 했어요. 촛대, 교회가 들고 있는 빛,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 하는데 이것 둘 데를 잃어버렸다. 무슨 빛이냐 네가? 지금 이 독특한, 이 흑암의 시대, 배교의 시대, 우리 주님이 오실 날이 멀지 않은 시대, 말하자면 이 세상 역사의 종국에 가까운 시대, 그리로 갈수록 교회는 배교가 일어나고 세상에는 대환란이 일어나고 또 아주 소란과 시끄러움이 사방에 일어날 텐데 이런 시대에 확호하니 서서 끝까지 거룩한 교회로 서려면 분명히 등명을 들고 있어야 해요. 빛을 나타내려면 그 교회로서의 몇 가지 요소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오. 반드시 촛대를 환히 들고 있는 요소로서 그 믿음의 덕, 그리스도적인 품성 그것을 명확하게 가지고 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사상성과 가지고 있는 지식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대한 깊은 지식이 되어야 하겠으므로 여기 그 다음에 믿음 다음에는 덕이고 덕 다음에는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식 다음에는 더 알면 알수록 절제를 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가 자기 조절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항상 절제를 하는 것이오.
하나님 앞에 절제라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나요. 첫째는 단심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거요.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오. 이것이 절제요 마음을 헤프게 세상도 좋아하고 하나님도 좋아하고 그런 것 무절제한 사람인 것이오. 사람의 정의 무절제한 것이 많은데 여기도 좋아하고 저것도 좋아하고 모두 사방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이오. 하나님의 요구인 것이오. 하나님만을 섬기라. 세상도 좋아하고 하나님도 좋아하고 그것 어떻게 되는 건가? 세상을 사랑하는 자 혹은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면서 완전히 반대 위치에 서 있다. 그렇게 옆에 있어 가지고 이쪽 저쪽 다 손 못 대는 것이다 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그런 걸로 첫째는 절제가 나타나고, 둘째로 절제라는 것은 생활에 있어서 주신 바 은혜를 잘 간직해 가지고 주께서 요구하실 때 충분히 그것을 잘 감당해 나가는 그 신앙과 덕과 신과 또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저축인 것이오. 그것이 늘 마음에 있는 것이오. 그래서 영어로 말하면 레디니스(readiness, 준비), 주께서 부르시면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나갈 수 있는 레디니스가 필요한 것이다 그말이오. 함부로 쓰지 않는 것이오. 만일 이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고 디모데후서 2:3절에 말했는데, 그 좋은 군사에 비교하면 전장에서 절제를 하지 않고 아무게라도 헤프게 해버리면 나중에 기진맥진해서 제가 죽고 마는 거요. 언제든지 절제하고 힘을 기를 때 기르고 저축할 때 저축해 가면서 우리 앞의 달려갈 길을 힘써 바로 달리고 또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오. 이게 사도 바울의 말씀이오. 이런 것이 여기는 또 필요한 것이오.
그 다음에는 “절제에는 인내를” 오래 참음이라는 거요. 늘 무엇이든지 오래 참는다는 것, 또 인내에는 경건을, 늘 하나님을 향한 아주 적극적인 마음을 기울이고 교통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오. 경건에다가는 형제의 우애를 형제의 우애에는 사랑을 공급하라. 거기에다 그걸 다 이렇게 공급해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너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있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아는 데 게으르지 않게 된다. 그리고 열매가 없는 무결실한 사람이 되지 않지마는 만일 “그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遠視)치 못하고 그의 옛죄를 깨끗하게 하심을 잊었느니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한번 바르게 세워 주셨는데도 이런 것이 없으니까, 항상 그 공리적인 종교 하나밖에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까 그의 깨끗한 것은 그 옛날에 받은 은혜조차도 잊는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이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그 중요한 공급이라는 것이 첫째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지금 배우는 거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히 공급되는데 있어서는 첫째 구원이라는 것을 얘기했어요. 로마서 1:16절을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 첫째는 유대 사람에게 또한 헬라 사람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 말씀이 첫째 무엇보다도 복음으로 작용하실 수 있어야 해요. 우리에게 복음으로 작용하게 되어야 해요. 교회에서 먼저 말씀이 공급되는 단게로는 복음의 사실들이 깊이 들어가야 한다. 복음이라는 것은 흐지부지하고 사회 운동이라든지 사회 개량 운동이라든지 무슨 민족이라든지 정치 문제를 논의한다든지 그러면 그것 완전히 교회로서 하나님 말씀이 역전되는 거요. 옳지 않은 거요. 그런 것은 사실상 배교의 교회가 잘 하는 일이오. 복음의 사실은 어디 가고 이제는 소위 사회복음이라고 복음이란 말을 쓰면서 사회 개량 운동,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 운동, 민권운동 인종운동 이런데다가 주력하게 됐다 그말이오. 그러나 먼저는 복음이오.
복음이란 것은 무엇이냐 할 때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우리에게 내린 바 그 거룩한 기쁜 소식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것은 달리 죽은 것이 아니고 모범의 죽임이 아니고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한 희생의 대가를 치루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 속죄의 죽음인 것이오. 반드시 속죄요. 속죄라는 말은 죄를 전제로 하고 하는 말이오. 그런고로 죄라는 관문에서 예수님께 안 들어가고 “세상이 허무하니까 예수 믿으시오” 혹은 “하나님께서 기묘한 행복을 준비하시고 계시니까 그걸 받도록 예수 믿으시오.” 요새 어떤 그룹들은 성경주의라면서, 복음주의라면서, 그렇게 그런 영향을 받는 나라가 다 그런 것 가지고 막 굉장한 모두 다 사람들 모여 가지고 떠들고 있다 그말이오. 그 식이오.
속죄의 죽음이라고 할 때는, 누구의 죄를 속하느냐 할 때는 내 죄지 세상은 죄인이다 하는 세상은 죄악 세상이다. 그런 것 가지고 개괄론 해서 슬그머니 개인의 죄를 지적하는 것을 모피하고 나가는 요런 짓 않는 것이다 말이오. 그리고 죄에 대해서 속하시려고 돌아가셨다 하는 것이오.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토죄를 하신다. 죄책을 물으신다. 반드시 일호도 용서 없이 그냥 용서는 없어요. 하나님이, 대가를 받으시고. 그런 그 대가라는 것은 내가 영원히 죽고 죽고 죽어도 다 없는 지옥의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 대가라 말이오. 그것을 대신 받아 주신다는 것이 속죄인 거요. 그러기 위해서 육신의 죽음과 또 만 번의 죽음이라는 것을 십자가상에서 다 치루시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다 말이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내 죄는 죄책을 면제했지만 죄책을 면죄함으로써 나는 이제 죄인이 아니냐, 나는 이제 죄 없는 것으로 생각하느냐, 관념으로는 죄인이라고 여기지만은 사실 자기의 생활 감정상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안 느끼고 사는 것이오. 이것이 예수를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악폐요. 우리가 그러기 쉽다고 하는 것을 우리 자신이 늘 반성해야 해요.
고요히 돌아가서 이 날 하루도 내가 사라에게 말한 것이나, 사람 대했을 때나 자기 자신이 행동한 것이나 생을, 무슨 감정을 가져 보세요. 얼마나 많이 잘못이 있고 결핍이 있어 가지고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회개를 해야 할 문제도 있지 않은가. 이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인데 오늘날은 회개도 부흥회할 때 몇 사람이 앉아 그냥 그 시시하고 표면적인 몇 가지 이야기만 가지고서 밤낮 회개하고 야단 내고 하지 사실상 그 성격상 문제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결핍에 대해서 인간성의 결핍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일이 없다 그말이오.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아니면 자기인데 자기라 할 것 같으면 좋고 나쁜 것이 다 뒤섞여 있어서 선악과 따먹은 것과 같이, 선악과 같이 좋고 나쁜 것이 뒤섞여 있는데 그 나쁜 것들이 다 죄로서 하나님 앞에는 항상 죄책을 짊어질 사실인 거요. 이렇게 해서 신학상 그걸 포텐셜 걸트(potential guilt, 잠재적 범죄가 있음을 의미), 가능한 죄책들이라 그말이오. 하나님이 물으시면 물으실 수 있는 죄책들이 여기 있는 것이다. 다만 물으시지 않는 것뿐이다. 죄책이 없느냐 그거요. 그런 까닭에 죄책이 있는 나로서는 그러므로 하루에 열 번이라도 회개를 해야 한다 그것이오. 자기 죄, 자기를 바라보고 반성을 하고 반성한 다음에는 문제를 다른 데에 가 찾지 않고 자기에게서 늘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말이오.
이런 생활을 않고 이런 죄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명확하게 취하는 이 생활을 않고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종교를 그 위에다 자꾸 건설하려고 해도 개혁교회는 안되는 것을 알아야 해요. 왜 교회가 권징을 엄격하게 하느냐, 왜 항상 죄에 대해서 엄격하게 늘 말을 하느냐 하면 각각 그 죄에 대해서 희미하고 면역성이 생기고 모호해져 가는 이것을 맹성을 시키려는 것이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교회적으로 자기의 죄에 대한 것을 반성하도록 하는 것이오. 그것을 특별한 시간 내서 이제 기도하고 가만히 늘 생각합시다. 그렇게 언제든지 할 게 아니라 그것은 개인개인이 가지 집에서 늘 하는 거요. 해야 할 것이오. 그것도 않고 예배당에 가서 예배한 번 봤으면 다 했다는 이런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도저히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경건하게 사는 태도가 아닌 거요. 경건이라는 건 열의를 가져야 하는 것이오, 하나님 앞에.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 했어요. 그런데 그 열심은 어디로 가고 돈벌고 이 세상사는 데는 우리가 굉장히 열을 내는데 하나님을 믿고 자기의 죄를 반성하고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가지고 산다는데 있어서는 그렇게 열을 안 내게 됐다는 것은 얼마나 이 세상의 물결이 강하고 영향이 강해서 우리를 그 동안 휩쓸고 잡았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오.
이제 우리가 교회로서도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정신을 차리자 않으면 아니 되겠다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우리 주위에 자꾸 모여오는데, 특별히 성약교회는 그런데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오. 첫째 시작할 것은 그 성격상 결함들에 대해서 우리가 각각 반성하는 것이 좋아요. 뭐 다른 특별한 죄를 밖에 가서 번하지 아니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다른 특별한 죄를 범해서 교회에서 책벌을 해야만 그게 죄라고 생각하고 회개하고 하는 것 아니오. 이 성격상 죄악은 사람과 사람관계가 교회 안에 있어서의 그 동안 처사나 자기가 생각한 것이나 하나님을 봉사한다고 하면서 하던 일이나 생각할 때 무엇이 잘못됐는가를 생각할 일이 많을 것이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바로 생각하는 것이 교회로서 정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그 안에 사역하게 하는 도리올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사역하시려고 하는 거요. 내가 막고 저항하고 나가면 타락할 길밖에 없는 것이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는 심히 연약하여서 교회가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이 첫째로는 복음이고 복음의 맨 처음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 죄는 지금도 내 속에서 얼마든지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을 인해서 사로잡아 가지고 세상과 마귀의 진영을 끌고 가기가 심히 쉽고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이제 명심하고 주의하게 하시고 이리하여 교회가 교회다웁게 바로 서게 하시며 이 혼란의 시기, 이 증거를 요구하는 시기, 도전을 받는 이 시대에 있어서 특별히 저희 교회가 정신차려서 바로 서게 하시고 저희들을 다 불쌍히 여기시고 연약하고 힘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사 세우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사랑을 참으로 감사하면서 보답하는 거룩한 심경을 가지게 하시며 이리하여 아버님의 거룩한 교회의 참된 자태를 드러내는 길로 바르게 전진케 합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엡 1:13-23 1979.10.28(주)자료출처:http://cafe.daum.net/wansu63
오늘도 지난 주일에 계속해서 교회에 관하여 생각하겠습니다. 먼저 지난 주일에도 얘기했지만은 이 교회관이 잘못되면 대단히 위험한 일이올시다. 오늘날은 그런데 문제가 교회관 때문에 일어나는 일을 때때로 보면서도 예를 들면, 에큐메니칼 운동, WCC 문제, 이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교회 문제는 한마디로 무엇보다도 교회관에서부터 생각해야 하는 것이올시다. 교회는 늘 이래도 되느냐? 이래도 교회는 괜찮은 것이며 교회가 성립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하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 이런 교회관에 있는 문제들이 우리 주위에까지라도 때때로 엄습하는 데도 불구하고 항상 그런 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잘 모르고 예수 믿고 천당간다는 그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그 공식이라고 할, 이상한 캐치플레이즈(catch-phrase) 그것 하나에서만 주저앉아 버리는 이런 위험한, 절대로 이런 식의 부지할 수 없는 것, 그 사람을 바르게 하나님 앞으로 부지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명심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다가 배교하는 시대에 배교의 물결로 휩쓸려 가는 것은 기독교라는 것을 전혀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오. 다 어느 정도 만큼은 아노라고 하는 것인데 꼭 알아야 할 중요한 것들은 모르고 또 가져야 할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가지지 못하고 또 믿음이 튼튼한 반석과 같이 서 있지를 아니하고 요동하는 까닭에 그리고 항상 그것이 공리적인 동기나 목표를 가지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까닭에 그건 기독교가 아니고 종교를 하는 까닭에 그렇다 그말이오.
진리를 떠나서 이렇게 방황하는 사실이 오늘날 시대상에 현저하게 드러나는 이 배교라는 사실을 훨씬 더 보강하고, 더 번성하게, 더 치열하게 만들어져 나가는 것이다 말이오. 이 배교라는 큰 사실이 어디서 현저하게 역사적인 사실로 일어나겠느냐 하며는 물론 배교라는 것은 기독교를 전제로 하고 하고 있는 것인 까닭에 기독교 국가라는 사회에서 먼저 일어날 거요. 그건 분명해요. 기독교 국가라고 할 때에 그것이 현저한 사실로 움직이는 것은 유럽과 아메리카 땅이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아메리카 땅에는 한국에서 살 때와는 비교가 안 되게 현저한 배교의 큰 도도한 물결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이제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이오. 그것 없이 미국에 와서 아메리카에 와서 그냥 그대로 세월을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히 하나님 앞에 모델 춰치(model church)하는 것을 늘 지향하면서 가려고 하는 사람들로는 도저히 용인 못하는 것이오. 항상 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어떠한 기회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아메리칸 사회에 살고 있는 만큼 가지는 기회라는 것은 이제 피부로서 접촉할 수 있는 큰 세계적인 역사적인 흐름이라는 것이오. 둔감한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어디다 갖다 두어도 모르지만, 손에다 쥐어 주어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영적으로 민감성을 가진 사람 같으면 주의를 해서 늘 그런 것을 보아야 하는 것이고 개혁교회가 원래 지향하는 바는 이런 민감한 영혼의 작용이 그 교회를 항상 바르게 이끌고 나가기를 원하는 것이오.
개혁교회라는 것은 지난 주일에도 말했지만 건실한 인텔리겐차라고 했을 때 그게 단순히 이 세상의 지식만을 상당히 기초로서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지식에 대해서도 인텔리겐차의 노릇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한 국가에 있을 때 건실하고 중견적인 시민 노릇을 못하는 거나 꼭 마찬가진인 것이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다고 할지라도 건실하게 그가 알아야 할 중요한 지식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그러면 그런 인텔리겐차가 그런 인텔리젠스(intelligence)를 가지고 그 접촉하고 있는 사회의 의미와 사회 현실을 사실을 바로 판단해서 파악하는 것과 그 가치가 무엇인가, 그 사실은 어떠한 가치를 어떠한 현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는가. 이런 것을 사색지 못하고 리즈닝(reasoning)을 못 해내면 그것 인텔리겐차가 아닌 것이오. 그냥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거요. 그런데, 물론 예수 안 믿는 사람이야 아무리 세상 지식이 많더라도 그런 걸 알 까닭이 없어요.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 거요. 그러나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이 그런 것을 잘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 다음에 파악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기의 영혼의 기능의 작용이 있어야만 개혁 교회로서 건전한 교회로서의 행보를 할 수 있는 것이오. 그리고 그런 것은 건전한 교회에서 중견이 가져야 하는 것이오. 중견이라면 누구냐면 노인들이 아니고 어린애들이 아니고 연약한 사람도 아니고 항상 이 세상에서 살 때도 가장 왕성하게 일하고 분별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중견을 형성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런 교회가 하나의 사회 단체로서의 의미로 볼 때 어떤 사회든지, 단체든지 가지고 있는 그런 사회단체로서의 요소라는 것, 건실한 중견과 건실한 중산 계급과 또 건전한 열성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과 교회는 특별히 그 중에 하나 요구하는 것은 신령한 생활을, 즉 하나님 앞에 전부 다 바치고 사는 생활을 하라는 이런 것으로만 소위 역사적인 개혁 교회는 그 앞으로 점점 작용을 하고 활동을 해서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것이지 그러지 않고 저절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오. 어떠한 타락된 역사 현실은 만들어 내겠지마는 의미 있는 일관된 개혁자들의 그 전통을 받아서 계승하는 전승자로서 일을 못 하는 거란 말이오. 그런 까닭에 이 점을 항상 중요히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금까지 배워오는 이유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귀하게 세우신, 나중에 그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그 충만이라고 하는 가장 위대한 엔티티(entity). 위대한 사실인 교회라는 것을 바르게, 받는 바 도전에 대해서 바른 대답을 할 수 있는 교회로서의 자태를 바로 드러내려는데 중요한 우리의 생활 목표가 있는 것이오. 이런 것을 떠나서 세상에서 부자가 된다든지 이름 내고 살겠다든지 무엇인지 좀 행복스럽게 살겠다든지 하는 소위 유다이모니아, 행복론, 그건 옛날부터 모든 안 믿는 사람의 세계에 다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근대에 와서 유틸리테리안이즘(utilitariaism)으로, 공리주의로 자꾸 발전했는데 그럼 공리주의 생각 가운데 종교까지 마저 이용해 먹는 그런 비천한 일밖에 안 되는 것이오. 이런 것은 테스트하는 날, 진짜와 가짜, 사이비와 진실이라는 것이 이렇게 나누는 날에는 자꾸 갈라지는 것이지 언제까지든지 한 타레에 두어두고 다 그것이 그것인 듯 보게는 안된다 그것이오.
그런 까닭에 이 교회관을 정확하게 바로 가지고 그것을 심오하게 가지고 거기에 의거해서 바로 판단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바로 판단할 뿐 아니라 자기가 바로 행동하고 나가야 해요. 그래서 자기 교회가 바로 서야겠다는 열의를 가지고 정신을 차리고 나가야지 그렇지 아니하고 종교라는 것을 하나의 자기 문화 생활의 일환으로 생각해서 꽃꽂고 가는 것같이 그냥 자기가 꿰뚫고 가고 어느 때는 아쉬우니까 어디 의지할 데 없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의지하고 나가는 이런 공리주의 정도에서 주저앉는다는 것은 세상에 오늘날 우리 교회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비천한 일인 것이오.
그런 까닭에 교회관을 바로 가져야 할 텐데 아메리카 사회에 와서 지난 주일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다시 주의해서 생각할 것은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의식을 집행하는 것이 교회 되는 것 아니다 하는 것이오. 만일 그것이 교회 된다면 가정마다 예배보는 가정은 다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오. 그렇지만 그러한 가정에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그런 의식을 좀더 다른 많은 친구들을 위해서 해놓으면 그건 교회다 생각하는 아주 이론이 되지 않는, 하나님 말씀의 한 구석도 바로 생각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이 교회를 만드는 운동을 모두 다 하는 것이 아메리카 이민 사회에 많이 있는 것을 주의하라는 거요. 교회가 교회 되려면 그 외부의 형성 조건 요소에서부터 생각해 나갈 때 교회의 징표들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그랬지요. 교회가 교회인 것과 아닌 것과 구별할 때 이걸 가지고 징표를 삼는다고. 그 징표가 교회에 구비되려 할 것 같으며 어떠한 구체적인 사실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난번에 얘기했어요.
말씀이 첫째 중요한 징표요. 말씀이 순전하게 바르게 공급 되야 하는 거라 말이오. 바르게 전파되고 가르쳐지고 해야 한다 말이오. 그런고로 말씀이,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큰 사명에 따르면, 나가서 세상에 있는 모든 백성을 제자 삼아서 세례를 삼위의 거룩하신 이름 안에서 세례를 주라 하시는 이 말씀의 뜻은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단계를 여기에 결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또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것을 이제 이후에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잘 지켜서 행하게 하라. 그래서 교육하고 실천하게 한다는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말이오. 이런 것이 말씀이 그 교회 안에서 작용하는 혹은 사역하는 중요한 사실로 그것이 없이 교회는 성립 않는데 이런 것이 정당하게 공급이 되고 정당하게 사역이 되려면 차서(次序)가 있고 젖먹이 어린아이에게 젖을 주지 단단한 음식을 먹여서 체하게 하지 않는 것같이 차서가 있는 게고 또 그것은 교회가 한 살아 있는 실체로서 장성하기에 필요한 생명의 양식으로 공급해야 하는 것이다 말이오.
이런 까닭에 이것은 보통 레이먼(layman)들이 앉아서 읽는 것으로서 공급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주의해야 해요. 이렇게 해서 개혁교회는 역사적으로 말씀의 공급에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는 강단, 풀핏(pulpit)을 늘 얘기는 거요. 신학교 교실도 아니고 집에 앉아서 성경 공부하는 게 아니고 반드시 교회라는 거룩한 형식과 거룩한 내용을 전제로 하고 거기에 반드시 있어야 할 이 카톨릭의 제단을 치우고 그 대신에 있어야 할 강단이 중요한 것이오. 그래서 강단에 서서 성신님이 주장하시므로 나타나는 이 말씀이라는 것은 특별히 예배드리고 하나님 앞에 그 슬하에 모여 앉아서 듣는 바 그 말씀이라는 것은 지금 오늘날 이렇게 앉아 있는 이것, 이런 것이 가장 중요한 형식으로서 개혁교회는 가르쳐 온 것이다 말이오. 그러면 강단이 있으려면 강단에 서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요. 이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은 아주 처음 옛날 원형의 교회, 예를 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회에서도 하듯이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구별해 놓듯이 구별한 사람들이 있는 거요. 아무라도 그냥 임시로 그때 느낀 대로 불러내다가 하는 게 아니라 그 일생을 거기에 바치고 일생을 이렇게 쓰시기로 해서 불러내는 사람들이 있어서 불러내는 그때부터 이후는 일생을 그 일을 위해서 주님 앞에 바치고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오. 그가 서서 그가 자기 집안에 식구를 모아놓고 기도회 하는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라는 의식으로 교회의 형식과 교회의 내용을 갖춘 그 요소들을 담은 자리에서 말씀할 때는 단 한 사람이든지 두 사람이든지 자기 식구만이라든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지 교회는 주어지는 것이다 말이오. 이렇게 발생하는 것이오. 목사는 아무 때라도 저게 교회다 하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오. 교회라는 것은 교회로서의 요소를 형성하기 위해서 교인과 목사로 되는 까닭에 교인들의 그 상태가 그 모여 있는 목적과 동기가 교회로서의 의식 가운데에 모아야 하는 것이다 말이오. 그런데 목사가 또한 함께 같은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교회로서 자기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지, 이 교회로서의 의식이라는 것은 동시에 교회의 가지고 있는 내용의 요소들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제 배워야 할거요.
그러나 형식으로 보더라도 교회는 적어도 이 개혁교회에서는 세 가지 중요한 징표로 가지고 있다고 지난 주일날 얘기했어요. 다시 중요히 기억해 두세요. 말씀을 바르게 듣는 이 형식으로 공급해 주고 전파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항상 권고해 나가는 그것이 있고, 그 다음에는 말씀을 눈에 보는 심벌에 의해서 전해주는 것이 있어요. 이것이 세례와 성찬이라는 성례전인 것이오. 교회는 그러므로 성례전이 교회를 교회 아닌 것과 구별하는 중요한 하나의 마크(mark)로, 징표로 가지고 있는 것이오. 성례전이라는 것은 개혁교회는 절대로 평신도들이 앉아서 집행 못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무서운 경고가 거기 하나님 말씀에 붙어 있는 까닭에 그래요.
고린도전서 11:27-29 붙어 있는 경고는, “주의 떡과 주의 잔을 분별이 없이 마실 때는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합당하지 못하게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면 곧 주의 몸을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이렇게 무섭게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고린도 사람들 가운데는 그것 때문에 약한 자도 많고 병든 자도 많고 죽은 사람도 있다. 그렇게 말씀했어요. 그런 무서운 사실, 하나님이 엄숙하게 다루는 사실을 그냥 평신도들이 그 의미도 잘 모르고 함부로 집행하는 것은 옳지 않은 까닭에 반드시 교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그걸 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 그 교회의 대표자, 또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서 불러 세운 사람이 그 말씀을 거지고 반성을 하고 그것을 집행하게 됐다 그말이오. 그런 까닭에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신성하게 아주 신중하게 행해야 할 예식인 것이오. 그냥 적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오. 앉아 가지고 근신해서 주의해 가면서 늘 해야 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므로 이것도 거기에 그러한 사람, 하나님께서 불러서 그 일로 기름부음을 받게 하신 사람들이 서서 해야 하는 것이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오.
또 그 다음에 권징이라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했어요.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하시는 그 명령에 의해서 행하게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태만하면 권고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잘못되었으면 징벌하는 것이오. 이것은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자면 교회법적인 징계요, 책벌을 하는 것이다 말이오. 이것이 오늘날 와서 아주 해이해지고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는 굉장히 해이해졌어요. 거의 그것 있는가 없는가 모르게 속으로 가만 가만히 모두 다 행해지고 이것이 하나의 교회의 징표로서의 테스티모니(testimony-증거, 선언)로서의 의미는 벌써 안 가진 것 같으다 말이오. 그러나 우리 교회는 명확하게 그걸 가지고 있는 줄을 여러분 아셔야 할거요. 그리고 명확하게 항상 그 조건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이오. 그렇게 해서 때때로 책망이 와야 할 게고 때때로 경계가 가야하고, 그러나 이것은 개인이 개인보고 하는게 아니오.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찔림을 주고 책망을 줄 거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신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또 바르게 함과 의로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했어요. 그러므로 거기는 교리가 있고 그 다음에는 책망이 있는 것이오. 하나님 말씀이 책망을 앉는다면 그 사람이 자신이 말씀에 대해서 면역성이 있거나 둔감한 것이오. 어딘지 정상이 아니오. 정상의 사람은 아무 책망 안 듣고 자라지는 못하는 것이오. 또 바르게 함이 없이 자라지 못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고 본질상 사곡되다고 그랬지 결코 사람의 본질이,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안 했어요. 불의하고 악해서 때로 탐욕이 일어나고 정욕이 일어나고 비뚤어지고 하는 것이오. 그러니까 자꾸 잡아 주는 것이오. 그것을 상당히 나이 먹어서 수양을 했다고 하더라도 틈틈이 틈타 가지고 나오는 것이오. 항차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로서 그것 다 내는 것이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를 자연성을 개발시킨다고 그냥 방치해 버린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법이 아니오.
그렇기 까닭에 우리 교회는 아이도 같이 와서 예배를 보는 것이 좋은 것은 어이들이 예배보면서 당하는 제재, 디시플린(discipline, 제자)이라는 것이 중요한 교육을 하는 것이오. 그렇게 해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기르는 거고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구약적인 용어로 보면 그것이 곧 구약의 종교였어요. ‘주를 경외한다’ 하는 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말이오. 그런데 이와 같은 징표들이 있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있고 교회가 그러한 외부적인 표면적인 요소를 가졌지마는, 예배당이란 것은 교회의 징표는 아니오. 십자가도 교회의 징표가 아니오. 제 1 세기에 그런 것 하나도 없었어요. 가장 모범적인 교회를 세웠던 1세기에는 예배당도 없고 십자가 내걸고 돌아다닌 일도 없고 그냥 이렇게 어떤 집에서 같이 모아 가지고 사도가 없으면 사도가 임명한 다른 사람이 가서 그때 인도를 하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단기간에 모두 특별히 훈련들을 해서 내보내고 했을 것을 다 예상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도는 순회를 하면서 늘 찾아가고 그리고 거룩한 예식은 그 후는 몰라도 그 전에는 항상 사도가 주께 받아 가지고 집행하고 지냈었단 말이오.
그런데 이제 그 교회에 대해서 교회관이 어떻게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했는데 하나 더 생각할 것은 교회관이 그릇되면 가령, 예를 들면 신자들 모여 가지고서는 교회라 만들어 놓고 얼마동안 예배를 보다가서는 어떤 목사가 좋으냐 하고 목사를 이제 찾으면 목사 가운데 미국에 있다가 나가야 할 사람이 그냥 주저앉고 싶으면 교회 목사로라 해 가지고 주저앉고 싶어서 그래서 가서 구직운동을 하다가 마침 생기니까, 왜냐하면 하도 무임(無任)목사가 이민 사회에 많으니까 그냥 떡 들어가서 앉았으면 그냥 교회된 줄 안다 그말이오.
지난 번 미국 갔을 때도 그래 가지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뭐 모두 합했다는 데 서로 자기네 교파의 그 무슨 교리나 주장이나 헌법대로 했으면 좋겠는가고 자꾸 주장하니까 이래서는 하기가 어렵다고 위원을 내가지고서 장로교의 법에서 좀 따고 감리교 법에서 좀 따고 성결교 법에서 좀 따서 만드니 그런 레이먼(layman, 속인)들이 교리에 대해서 분명히 모르는 사람들이, 교리에 지켜서 법이 나오는 것인데 법이 탄생을 하는 것인데 교리라는 것이 그게 모법(母法)이요 자연 모법인데, 모법은 전연 모르는 사람들이 임시로 무슨 규약을 그렇게 만들고 법을 만든다는, 그게 교회가 되겠는가 그러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와서 그 얘기를 해요.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고. 비난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당사자들이 와서 그 얘기를 하길래 그러냐고 이야기만 듣고. 그럼 교리는 무엇이냐고 하니까 무엇을 하나 내세우면 서로 반대할 테니까 안 내세운다는 것이오. 교리 없는 교회가 어디에 있어요? 즉 신조도 없는 그런. 무얼 믿고 사느냐 그러면, ‘예수 믿고 천당 갑니다’ 하나가 구호요. 그건 에큐메니칼의 WCC보다도 약하다 그말이오. WCC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하나님으로 성경이 가르친 대로 믿는 자들이 서로 합동하는 것이고, 그게 교리요. 그놈만도 훨씬 못하지 않느냐? 이러고서도 교회가 되는 줄 아는데 그러한 레벨(level, 수준)이나 그러한 상태가 너무나 많이 돌아다닌다 그말이오.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는가?
요컨대 배교의 현실은 예를 하나 WCC를 보더라도 가령 어떤 사람이 정통을 하겠다면 정통을 해라. 그리고 합해서 하자, 서로 다른 것은 논하지 말고 같은 것만을 거기다가 세워 놓고 그리로 같이 함께 협동해서 일을 하자 해서 자기네 가지고 있는 그 협동해서 일한다고 하는 이상이라고 할 목표하라고 할 걸로 끌고 다 들어갔다 그말이오. 그래 가지고서 미국의 가령 개교회 가운데 “우리는 성경을 그대로 믿고 진리를 그대로 믿습니다. 그러니깐 교단이 어떻더라도 우리는 정통입니다.” 지금도 그런 교회들이 많이 있어요, 북장로교회 말이오. 그러면 어떠냐 괜찮은 것 아니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큰 배를 타고 갔으면 배가 가는 데로 가지 제가 다른 데로는 안 가지는 것이오. 그렇게 정통이면 왜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리고 거의 훼방의 용어까지 쓰는 사람들과 함께 붙어 가지고 다니느냐 그거요. 그래 가지고 같이 앉아 의논하고 한 교파라고, 형제라고 그러고 손잡고 그런 무절조가 어디가 있는가 그말이오.
요컨대 하나님께 대한 그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는 말씀대로 단심이라야 하는 거요. 거룩하다는 것은 첫째는 단심, 한마음으로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전부를 다 바친, 그러한 남편을 위해서 전부를 바친 아내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오. 절조라는 것, 정조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 거요. 신앙이 정조 없으면 신앙이 아닌 것이오. 그런데 훼절(毁節)을 하고 그러니깐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여러 번 남편을 훼절하고 간 여자와 같다고. 그리고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그렇게 꼭 거기에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사실인가를, 그러면서 나중에 에베소서에서 말할 것 같으면 “간음하는 자나 음행 하는 자 도둑이나 탐람이나 이런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말했지 그래도 하나님 나라는 네 것이다고 안 했단 말이오. 왜 그렇게 하나님 말씀이 명확한데도 그것 괜찮은 것같이 저희 맘대로 위로해 가면서 살아요? 개혁교회는 그런고로 역사적으로 엄격했어요. 신앙에 대해서 양보를 안 해주고 그 조건은 하나님 말씀은 말씀이다. 말씀에다가 왜 에누리를 하느냐 하고서는 엄격히 움직였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냥 거기에 휩쓸려 들어가서 점점 저도 모르는 사이에 끌고 가는 데로 큰 데로 들어가서 다 활동하지 않아요. 지금, 부활주일 때니까 같이 예배보자 하고 우 하니 모으면 거기다 모두 프로그램을 맡아 가지고 저희들은 무슨 개혁신앙을 가졌다고 떠들던 사람들이 금방 거기 가 들어 붙어 가지고 그 일을 해요. 그것이 무슨 예배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카나디안 리폼드 춰치(Canadian Reformed Church)라도 당장에 그것 비난한 것을 다 듣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예배냐? 그런 식으로 하는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그렇게 만홀히 여겨서 크다면 좋고 유리하다면 좋다고 쫓아다니는 이 심리가 교회관이 무엇인자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모여 가지고서 교회로라고 해 가지고 이것 묶어서 도매금으로 넘겨주는 것과 같이 되는 것이오. 그러니까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그 심리 자체가 물론 처음에는 외로우니까 서로 들어 붙어 가지고 위로하고 도와주고 살자는 이론으로 말하자면 클럽이나 계와 같은 의미에서 왔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이 존재해야겠다고 주의 몸이 여기 나타나야겠다는 그런 생각은 별로 없는 것이오. 거기에, 말로만 주의 몸이지만, 주의 몸이라면 몸이 되는 요소가 있는 것이오. 요소는 없이 말로만 하면 저절로 되는 것인가?
이러니까 교회관이 볼확실하면 이 배교의 시대에서 누가 잡아가는지도 모르게 다 휩쓸려 가는 것이오. 참 주의해야 해요. 우리 교회는 이런 일에 대해서도 정신을 차려서 잘 알고 있어야지 모르고서 헤헤 하고 그냥 앉아서 무슨 일 당하면 그 사람들 생각에 옳은가 보다 좋은 가 보다 이런 짓한다는 것은 마침 기회가 없어서 안 만들었다는 것뿐이지 아무 것도 그 레벨에서 벗어난 것은 아닌 것을 주의해야 해요. 언제든지 교회에 대해서 이게 하나님께서 경영하시고 구상하신 가장 고귀한 시책인 것을 알고 나 하나의 존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인 줄을 알고 하나님 앞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더 중요한 것이오. 내 하나 여기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최귀(最貴)의 사실이 아니오. 나는 그를 우해서 있는 것이지 그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이렇게 귀한 것인 줄 알고 교회라는 말을 너무 함부로 써 가지고 적당히 만들면 교회인 줄 아는 이런 그룻된 이 관념이라든지 그릇된 관습이나 습성이 있으면 그것 완전히 불식해 버려야 해요. 씻어 버려야 하지 절대로 교회를 존중하게 신성하게 아주 두렵게 생각하고 늘 무엇을 사고를 해가야지 그릇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말씀이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오늘 다시 몇 가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은 조금 그 교회의 외형에서부터 들어가서 성립되는 요소로서 말씀이 거기 반듯이 바르게 공급이 되고 또 바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말씀을 중심으로 먼저 시작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말씀은 대개 어떻게 공급이 되고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성경말씀을 읽기만 하면 되는냐? 읽고 그 뜻을 해석하면 되느냐? 거기에는 자연히 스스로 놈(norm, 표준)이라는 것이, 규범이라는 것이 딱 서 있는 것이오. 그냥 덮어놓고 성경 말씀을 한 역사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끄집어 다 읽고서 재미있게 이야기하면 거기 교회가 성립된다고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말이오.
그러면 교회가 성립되는 요소로서의 말씀이 작용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은혜의 수단으로 반드시 작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오. 메디아 그라티아에로서 반드시 작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오. 은혜의 수단이 아닌 다른 것으로는, 예를 들면 성경은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사역 뿐 아니라 성경의 문헌, 문헌으로서의 가령 예술서로서 위대한 사역이 있다 그말이오. 사상 서류로서도 위대한 사역이 있어요. 역사서류로서도 비견할 수 없는 서류 없는 책이다 그말이오. 또 그것이 신학을 구성하는 원천으로서 중요한 경전이 돼요. 그러나 성경이 경전이 됐다면 곧 하나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오. 성경은 경전 노릇, 종교의 그 중요한 도리를 거기서 구성해 내는 원천으로서 작용을 했다고 해서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금방 결론 못 하는 것이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신학의 원천으로나 사상서류로나 또 도덕예의를 특별히 가르치는 점에 있어서도 위대한 서류고, 예술서류로서 아주 위대한 작품인 것이오. 그러나 그런 작용을 하려면 은혜의 방도라는 테두리 안에서 은혜의 방도의 그 요소 안에서 그것이 작용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은혜의 방도라는 사실을 떠나서도 그것은 그것대로 충분히 안 믿는 사람에게, 민감한 사람들에게 아주 훌륭한, 위대한 감화를 주고 위대한 역사를 하는데 그런 것은 교회에서 공급되는 말씀의 작용은 아니다 하는 것이오. 교회에서 그런 정도로 말씀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교회가 되려고 해석의 요소로서 말씀이 작용하려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 무엇이냐 할 때 한마다로 구속의 은혜의 수단으로서 말씀이 작용되는 것이다. 구속의 은혜의 수단으로서 작용된다고 할 때 그 단계를 우리 생각의 편의를 위해서 두 가지로 크게 나누면 첫째는 구원의 사실, 즉 구속의 사실이라는 거요. 둘째는 구원의 완성에까지의 과정 즉 믿는 사람이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생명만 얻었을 뿐 아니라 들어가면서 나가면서 꼴을 얻어서 자꾸 장성해 간다는 데에 그걸 공급하는 양식으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말이오. 요컨대 예수님을 우리가 생명의 떡이라고 요한복음 6:48에 그말이 있는데, 또 요한복음 10:9에는 예수님의 양은 양우리에서 양문으로 들어가고 나가면서 꼴을 얻고 그 선한 목자 오신 것은 양을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상징적인 그러한 파로이미아(παροιμια)의 용법은 현실상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느냐 할 때 말씀이 우리에게 늘 적용되는 시기부터 시작하는 거요.
괜히 철학적으로 그 막연한 말로 요새 신 복음주의 가운데에서 하는 말과 같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사귄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어떻게 사귀느냐? 그것 참 막연한 얘기요. 그렇게 말하면, 예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가지면 기도하고 어떠한 신비한 감흥을 마음 가운데 얻는데 있는게 아니라 그 말씀에서 그 거룩한 사상과 뜻을 내가 자꾸 받아야 하는 거요.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예수님 앞에 구하고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그 신으로 나한테 역사하셔서 성신님의 역사로 깨닫게 하시고 확신케 하시는 데 있는 것이오. 이것이 예수님과의 교통에 아주 중요한 현실이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어떤 감정적인 감흥이나 찔림이나 마음의 떨림이나 이상한 촉감이나 이런 것을 바란다면 그건 순전히 자기 이성을 무시하고 감각에 의해서 신을 알려고 하는 사람의 짓이다 그말이오.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그거요. 그러니까 은혜의 수단으로서 메디아 그라티아에로서 그것이 우리에게 공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오.
이 성경에 이런 용(用)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말한 데는 디모데후서 3:15,16에 있는 말씀이오. 이 디모데후서 3:15,16 볼 것 같으면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첫째는 구원이오. 성경은 그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셈인데 누구에게 주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것이오. 그리스도 예수에 있는 그 믿음이 그에게 들어감으로 지혜가 들어가는 것이지 믿음 없이 읽기만 하면 구원의 지혜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오. 그런고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는 것이다. 이 구원에 이르려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는 것을 또 여기서 표현하는 것이오.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그 지혜를 성경이 주는 것인데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은혜의 방도로 성신님이 그에게 역사하셔서 보여주셔야 하는 것이 그말씀이오.
그 다음에 디모데후서 3:15 다음에 16,17절 말씀이 이번에는 믿는 사람의 그 장성에 관한, 장성에 있어 하나님 말씀은 어떻게 공급되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인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혹은 교리라) 책망과 (잘못되니까 사람은 그걸 바르게 잡으려고 책망과) 바르게 함과 (책망만 하지 않고 무엇이 바르다고, 바른 데다가 갔다 놓는다 그말이오)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지러지고 결핍이 있고 병신 된 사람이 아니고 병든 사람이 아니고 건강하고 온전한 성인 노릇을 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말이오. 온전케 하며) 또 모든 착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세상에서 살면서 이제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 텐데 그 행동이 착하려면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이나 책망이나 바르게 함이나 의의 교육을 잘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나의 행동 생활이 하나님 앞에 받을 실 만한 것으로, 착하다 하나님의 속성도 착하다는데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 되는 것이지 그러지 않고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심정으로 그걸 해가지고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 안된다 그말씀이오. 그러니까 이것은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할 뿐 아니라 여기 볼 것 같으며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착한 일 행하기에 온전케 할 뿐 아니라 그에게 장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말이오.
즉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로난 사람은 생명인 까닭에 그 생명이 새사람을 형성하고 형성한 새사람은 바로 장성해 나가는 데 장성해 나갈 때에 공급해야 할 것들을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1:5-9 보면 그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하는 것을 이야기한 데가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볼 것 같으면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의 믿음에는 덕을 공급하고 또 덕에는 지식을 공급하고”, 사람이 예수를 진실하게 믿고 하나님을 늘 의지하고 사라겠다고 하면 그 다음에 그 사람에게 보아야 할 것, 그 사람이 내 놓아야 할 것은 덕이 있어야 하는 거요. 관용, 또 남을 친절하게 하는 것, 또 항상 겸손한 것, 또 남에게 대해서 항상 바르게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이오. 이 믿음에 덕이 있어야지 덕 없는 믿음만 가진다는 것은 완전히 불도(佛徒)나 다른 종교하는 사람들과 같은 자기 종교를 하는 거요. 믿음에는 반드시 그 덕이 있어야 하는데 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순진성이라든지 선천적으로 착한 마음이라든지 그 정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오. 그건 그것을 안 믿는 사람도 다 가지는 것이오. 여기는 믿음이 온 까닭에 그로 말미암아 더 공급해야 할 그러한 독특한 덕들이 있는 것이다 그거요.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요구하지 않고 또 볼 수가 없었던 것이지만 믿음이 온 이후에 비로소 이제는 현저하게 보아야 할 그런 덕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 믿음이라는 것은 그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에 잇는 까닭에 새로운 생명은 그가 형성한 그 새로운 생명이 새사람을 형성했을 텐데 그 새사람이 나타내는 덕들이 있다 그것이오. 이 믿음에는 덕을 더하고 그러면 덕행이 늘 있어야 하는 것이오. 덕행이라는 것은 멀리 가는 것 아니다 그말이오. 성신을 의지해서 사랑, 희락, 화평 그것이 덕행을 하기 위한 자기의 바탕을 만들어 주는 것이오. 오래 참는 것, 자비로운 것,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자비로운 것, 또 그 다음에는 양선이라는 것, 친절이란 말이오. 그리고 착한 거요, 마음이. 그 다음에 온유한 것, 또 그 다음에 충성과 하나님에 대해서 절제다.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성격에서는 성신님으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가르친 것인데 이런 성신님으로만 나올 수 있는 이 덕들이 믿음에서 믿음이 있은 이후에 오는 것이오. 왜냐하면 믿음이 있은 까닭에 성신님을 의지하게 되고 성신을 믿게 되고, 따라서 성신님이 약속하신 거룩한 그리스도적인 품성, 도덕적인 성격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이다 말이오.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오.
교회를 밤낮 다녀도 그게 없으며 그런 사람들로만 대부분 형성된 교회라면 그건 교회로서 생명이 없는 것이오. 거기 교회의 다른 요소를 아무리 가졌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능력이 없는 것이오. 증거를 못해요. 에베소 교회는 교리에서 대단히 밝고 훌륭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첫사랑을 버렸다는 것 때문에 촛대를 옮기겠다고 묵시록 2장에서 맨 처음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의 서신 가운데서 우리가 보는 것이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오. 교회로서 성립되었으니까 우리 주님도 교회라는 말을 쓰시고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이 말을 써서 붙이라 했는데 그런데 무엇인고 하니 “너희가 책망할 것은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서 그 촛대를 옮길 터이다. 회개해라” 했어요. 촛대, 교회가 들고 있는 빛,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 하는데 이것 둘 데를 잃어버렸다. 무슨 빛이냐 네가? 지금 이 독특한, 이 흑암의 시대, 배교의 시대, 우리 주님이 오실 날이 멀지 않은 시대, 말하자면 이 세상 역사의 종국에 가까운 시대, 그리로 갈수록 교회는 배교가 일어나고 세상에는 대환란이 일어나고 또 아주 소란과 시끄러움이 사방에 일어날 텐데 이런 시대에 확호하니 서서 끝까지 거룩한 교회로 서려면 분명히 등명을 들고 있어야 해요. 빛을 나타내려면 그 교회로서의 몇 가지 요소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오. 반드시 촛대를 환히 들고 있는 요소로서 그 믿음의 덕, 그리스도적인 품성 그것을 명확하게 가지고 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사상성과 가지고 있는 지식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대한 깊은 지식이 되어야 하겠으므로 여기 그 다음에 믿음 다음에는 덕이고 덕 다음에는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식 다음에는 더 알면 알수록 절제를 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가 자기 조절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항상 절제를 하는 것이오.
하나님 앞에 절제라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나요. 첫째는 단심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거요.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오. 이것이 절제요 마음을 헤프게 세상도 좋아하고 하나님도 좋아하고 그런 것 무절제한 사람인 것이오. 사람의 정의 무절제한 것이 많은데 여기도 좋아하고 저것도 좋아하고 모두 사방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이오. 하나님의 요구인 것이오. 하나님만을 섬기라. 세상도 좋아하고 하나님도 좋아하고 그것 어떻게 되는 건가? 세상을 사랑하는 자 혹은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면서 완전히 반대 위치에 서 있다. 그렇게 옆에 있어 가지고 이쪽 저쪽 다 손 못 대는 것이다 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그런 걸로 첫째는 절제가 나타나고, 둘째로 절제라는 것은 생활에 있어서 주신 바 은혜를 잘 간직해 가지고 주께서 요구하실 때 충분히 그것을 잘 감당해 나가는 그 신앙과 덕과 신과 또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저축인 것이오. 그것이 늘 마음에 있는 것이오. 그래서 영어로 말하면 레디니스(readiness, 준비), 주께서 부르시면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나갈 수 있는 레디니스가 필요한 것이다 그말이오. 함부로 쓰지 않는 것이오. 만일 이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고 디모데후서 2:3절에 말했는데, 그 좋은 군사에 비교하면 전장에서 절제를 하지 않고 아무게라도 헤프게 해버리면 나중에 기진맥진해서 제가 죽고 마는 거요. 언제든지 절제하고 힘을 기를 때 기르고 저축할 때 저축해 가면서 우리 앞의 달려갈 길을 힘써 바로 달리고 또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오. 이게 사도 바울의 말씀이오. 이런 것이 여기는 또 필요한 것이오.
그 다음에는 “절제에는 인내를” 오래 참음이라는 거요. 늘 무엇이든지 오래 참는다는 것, 또 인내에는 경건을, 늘 하나님을 향한 아주 적극적인 마음을 기울이고 교통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오. 경건에다가는 형제의 우애를 형제의 우애에는 사랑을 공급하라. 거기에다 그걸 다 이렇게 공급해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너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있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아는 데 게으르지 않게 된다. 그리고 열매가 없는 무결실한 사람이 되지 않지마는 만일 “그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遠視)치 못하고 그의 옛죄를 깨끗하게 하심을 잊었느니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한번 바르게 세워 주셨는데도 이런 것이 없으니까, 항상 그 공리적인 종교 하나밖에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까 그의 깨끗한 것은 그 옛날에 받은 은혜조차도 잊는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이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그 중요한 공급이라는 것이 첫째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지금 배우는 거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히 공급되는데 있어서는 첫째 구원이라는 것을 얘기했어요. 로마서 1:16절을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 첫째는 유대 사람에게 또한 헬라 사람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 말씀이 첫째 무엇보다도 복음으로 작용하실 수 있어야 해요. 우리에게 복음으로 작용하게 되어야 해요. 교회에서 먼저 말씀이 공급되는 단게로는 복음의 사실들이 깊이 들어가야 한다. 복음이라는 것은 흐지부지하고 사회 운동이라든지 사회 개량 운동이라든지 무슨 민족이라든지 정치 문제를 논의한다든지 그러면 그것 완전히 교회로서 하나님 말씀이 역전되는 거요. 옳지 않은 거요. 그런 것은 사실상 배교의 교회가 잘 하는 일이오. 복음의 사실은 어디 가고 이제는 소위 사회복음이라고 복음이란 말을 쓰면서 사회 개량 운동,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 운동, 민권운동 인종운동 이런데다가 주력하게 됐다 그말이오. 그러나 먼저는 복음이오.
복음이란 것은 무엇이냐 할 때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우리에게 내린 바 그 거룩한 기쁜 소식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것은 달리 죽은 것이 아니고 모범의 죽임이 아니고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한 희생의 대가를 치루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 속죄의 죽음인 것이오. 반드시 속죄요. 속죄라는 말은 죄를 전제로 하고 하는 말이오. 그런고로 죄라는 관문에서 예수님께 안 들어가고 “세상이 허무하니까 예수 믿으시오” 혹은 “하나님께서 기묘한 행복을 준비하시고 계시니까 그걸 받도록 예수 믿으시오.” 요새 어떤 그룹들은 성경주의라면서, 복음주의라면서, 그렇게 그런 영향을 받는 나라가 다 그런 것 가지고 막 굉장한 모두 다 사람들 모여 가지고 떠들고 있다 그말이오. 그 식이오.
속죄의 죽음이라고 할 때는, 누구의 죄를 속하느냐 할 때는 내 죄지 세상은 죄인이다 하는 세상은 죄악 세상이다. 그런 것 가지고 개괄론 해서 슬그머니 개인의 죄를 지적하는 것을 모피하고 나가는 요런 짓 않는 것이다 말이오. 그리고 죄에 대해서 속하시려고 돌아가셨다 하는 것이오.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토죄를 하신다. 죄책을 물으신다. 반드시 일호도 용서 없이 그냥 용서는 없어요. 하나님이, 대가를 받으시고. 그런 그 대가라는 것은 내가 영원히 죽고 죽고 죽어도 다 없는 지옥의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 대가라 말이오. 그것을 대신 받아 주신다는 것이 속죄인 거요. 그러기 위해서 육신의 죽음과 또 만 번의 죽음이라는 것을 십자가상에서 다 치루시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다 말이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내 죄는 죄책을 면제했지만 죄책을 면죄함으로써 나는 이제 죄인이 아니냐, 나는 이제 죄 없는 것으로 생각하느냐, 관념으로는 죄인이라고 여기지만은 사실 자기의 생활 감정상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안 느끼고 사는 것이오. 이것이 예수를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악폐요. 우리가 그러기 쉽다고 하는 것을 우리 자신이 늘 반성해야 해요.
고요히 돌아가서 이 날 하루도 내가 사라에게 말한 것이나, 사람 대했을 때나 자기 자신이 행동한 것이나 생을, 무슨 감정을 가져 보세요. 얼마나 많이 잘못이 있고 결핍이 있어 가지고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회개를 해야 할 문제도 있지 않은가. 이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인데 오늘날은 회개도 부흥회할 때 몇 사람이 앉아 그냥 그 시시하고 표면적인 몇 가지 이야기만 가지고서 밤낮 회개하고 야단 내고 하지 사실상 그 성격상 문제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결핍에 대해서 인간성의 결핍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일이 없다 그말이오.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아니면 자기인데 자기라 할 것 같으면 좋고 나쁜 것이 다 뒤섞여 있어서 선악과 따먹은 것과 같이, 선악과 같이 좋고 나쁜 것이 뒤섞여 있는데 그 나쁜 것들이 다 죄로서 하나님 앞에는 항상 죄책을 짊어질 사실인 거요. 이렇게 해서 신학상 그걸 포텐셜 걸트(potential guilt, 잠재적 범죄가 있음을 의미), 가능한 죄책들이라 그말이오. 하나님이 물으시면 물으실 수 있는 죄책들이 여기 있는 것이다. 다만 물으시지 않는 것뿐이다. 죄책이 없느냐 그거요. 그런 까닭에 죄책이 있는 나로서는 그러므로 하루에 열 번이라도 회개를 해야 한다 그것이오. 자기 죄, 자기를 바라보고 반성을 하고 반성한 다음에는 문제를 다른 데에 가 찾지 않고 자기에게서 늘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말이오.
이런 생활을 않고 이런 죄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명확하게 취하는 이 생활을 않고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종교를 그 위에다 자꾸 건설하려고 해도 개혁교회는 안되는 것을 알아야 해요. 왜 교회가 권징을 엄격하게 하느냐, 왜 항상 죄에 대해서 엄격하게 늘 말을 하느냐 하면 각각 그 죄에 대해서 희미하고 면역성이 생기고 모호해져 가는 이것을 맹성을 시키려는 것이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교회적으로 자기의 죄에 대한 것을 반성하도록 하는 것이오. 그것을 특별한 시간 내서 이제 기도하고 가만히 늘 생각합시다. 그렇게 언제든지 할 게 아니라 그것은 개인개인이 가지 집에서 늘 하는 거요. 해야 할 것이오. 그것도 않고 예배당에 가서 예배한 번 봤으면 다 했다는 이런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도저히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경건하게 사는 태도가 아닌 거요. 경건이라는 건 열의를 가져야 하는 것이오, 하나님 앞에.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 했어요. 그런데 그 열심은 어디로 가고 돈벌고 이 세상사는 데는 우리가 굉장히 열을 내는데 하나님을 믿고 자기의 죄를 반성하고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가지고 산다는데 있어서는 그렇게 열을 안 내게 됐다는 것은 얼마나 이 세상의 물결이 강하고 영향이 강해서 우리를 그 동안 휩쓸고 잡았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오.
이제 우리가 교회로서도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정신을 차리자 않으면 아니 되겠다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우리 주위에 자꾸 모여오는데, 특별히 성약교회는 그런데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오. 첫째 시작할 것은 그 성격상 결함들에 대해서 우리가 각각 반성하는 것이 좋아요. 뭐 다른 특별한 죄를 밖에 가서 번하지 아니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다른 특별한 죄를 범해서 교회에서 책벌을 해야만 그게 죄라고 생각하고 회개하고 하는 것 아니오. 이 성격상 죄악은 사람과 사람관계가 교회 안에 있어서의 그 동안 처사나 자기가 생각한 것이나 하나님을 봉사한다고 하면서 하던 일이나 생각할 때 무엇이 잘못됐는가를 생각할 일이 많을 것이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바로 생각하는 것이 교회로서 정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그 안에 사역하게 하는 도리올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사역하시려고 하는 거요. 내가 막고 저항하고 나가면 타락할 길밖에 없는 것이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는 심히 연약하여서 교회가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이 첫째로는 복음이고 복음의 맨 처음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 죄는 지금도 내 속에서 얼마든지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을 인해서 사로잡아 가지고 세상과 마귀의 진영을 끌고 가기가 심히 쉽고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이제 명심하고 주의하게 하시고 이리하여 교회가 교회다웁게 바로 서게 하시며 이 혼란의 시기, 이 증거를 요구하는 시기, 도전을 받는 이 시대에 있어서 특별히 저희 교회가 정신차려서 바로 서게 하시고 저희들을 다 불쌍히 여기시고 연약하고 힘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사 세우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사랑을 참으로 감사하면서 보답하는 거룩한 심경을 가지게 하시며 이리하여 아버님의 거룩한 교회의 참된 자태를 드러내는 길로 바르게 전진케 합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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