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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하여⑴ 교회의 세 가지 징표 (김홍전)

교회에 대하여⑴ 교회의 세 가지 징표 (김홍전)


엡 4:11-24 1979.10.21(주)

자료출처:http://cafe.daum.net/wansu63





 

오랜만에 우리 여기 교회의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된 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은혜 가운데 두심으로 다 큰일 없이 조용히 지내게 하신 것을 또한 감사하는 바올시다.



이 세상을 우리가 바라볼 때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우리들 자신이 좀더 안일한 가운데 아무 감각 없이 사는 거와 같은 생활 태도나 또 이 세상에 그냥 세상에만 취해 가지고 별로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일과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모르는 사람들같이 산다는 것은 심히 위험한 일인 걸 더욱 느끼게 되고, 그러면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각성해서 경성한 상태로 살고 있는가 할 때 우리들 자신도 심히 반성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을 알고 이제 우리 교회에서 생각해야 할 것들을 시대의 여러 가지 형상 가운데에서도 가령 이 세상이나 또 그 세상에 확실히 구별되어 있어야 할 교회의 현실이라는 것이 어떤 가를 바로 판단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큰 원칙, 어떻게 되어야 하는데 어떠해야 하는가, 특별히 교회라는 건 그 교회 자체가 무엇인가를 성경이 우리에게 바로 잘 가르치는 것이고, 세상이라는 것은 세상이 어떠한 것이다 하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너희가 처해 있는 것은 무엇이며 너희는 거기서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소위 이 세계관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바로 수립하도록 가르친 것이요, 세계관이나 사관의 문제는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더욱더욱 깊이 쌓아서 성숙한 사람다웁게 그런 것을 널리 심오하게 포회하는 것이 대단히 소원되는 일이지마는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가장 귀한 큰 사실 그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문제인데 이 교회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늘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올시다. 아는 것 같이지만 잘 모르는 일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특별 미주(美洲)에는 여러 사람들이 이민해 와서 전에 크리스찬이었던 사람들이 이민해 오면 이민 온 그 도시나 그 지방에서 믿는 사람들이 교파 여하를 불구하고서 모아서 우리 교회 하나 꾸미자 하고서 모아서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교회라고 하지마는 그러나 교회란 그런 것인가 하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바로 알아야지 알지 못하고 그와 같은 것이 그런가 보다, 믿는 사람들이 모아서 합해서 예배만 그리면 교회가 되는 것같이 생각하는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은 성경이 가르친 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해서 비롯되는 일이요, 이것이 유치한 사람들인 경우에는 불가부득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자꾸 성숙해야 하겠다는 걸 늘 느끼는 사람들에게 항상 그러한 정도 안에 주저앉아 있다는 것은 절대로 좋은 것 아닙니다.



교회라는 건 그것이 얼른 쉽게 말할 대 어떤 일정한 형체, 혹은 형식이라는 것이 있는 게고 즉 형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외면이라는 말보다도 그 소위 폼(form)이라는 것이 있는 게고 그 내용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데 그 내용에 대해서 무엇이다 무엇이다 하는 것보다 우리들이 알게 쉽게 먼저 그 형식에 있어서는 어떤 것을 먼저 갖춰야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형식을 갖춘다는 것도 아무리 갖춰도 그 내용이 없으면 소용이 없어요. 그야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마는 그 내용에 있어서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이 확연히 있는 거라 말씀이요. 교회의 본질상 문제에서 우리가 볼 때에 교회는 원래 보편의 교회, 혹은 본질의 교회라는 것은 사람이 보는 건 아니오. 볼 수 없는 것이지마는 그 볼 수 없는 것이 아무런 형상도 없이 공중에 공기와 같이 있는 것은 아니고 이 인간 사회에 거룩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육신을 가지고 사회를 형성하고 사는 인류에게는 육신과 사회의 형식으로서의 볼 수 있는 형태를 만들어 주신 거라 말이요. 이렇게 해서 지교회라는 형식이 있고 이 지교회라는 형태라는 것은 보지 못하는 교회를 구현하는 데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과 보편의 교회를 드러내지 아니할 때는 그건 한낱 종교단체에 불과한 것이다 말이요. 그러려며는 그 참된 교회, 본질의 교회를 나타내기에 적응한 형태를 혹은 형식을 취해야 하는 것인데 외부의 형태뿐 아니라 그 내용에 갖춰 있는 제도나 혹은 여러 가지 필요한 조건들이 있는 것인데 이런 것에서부터 차례차례 알아서 우리가 본질의 문제까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옳을 거예요.



그러면 먼저 이 가장 형식상 문제에서부터 얘기할 때 성경이 가르친 바른 교회관, 이것을 가령 신학상 역사적으로 흘러온 그 신학의 대류를 우리가 볼 때 우리가 그걸 개혁신앙, 개혁신학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개혁자들로 말미암아 명확하게 수립되고 천명됐을 뿐더러 그 후에 이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이라도 반드시 개혁자들이 개척해 놓고 또 역사로서 차츰차츰 형성해 놓은 중요한 사실들에 밀착해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각각 자기 생각 나름대로 이리 찢고 저리 찢고 해서 속으로부터의 여러 가지 자기네씩 생각으로 이상한 그룹들을 모두 만들어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뭐 그전이라고 없는 건아니라 옛날과 같이 절대주의 체제하에서 통제를 할 때는 모든 것이 하나의 이름, 카톨릭이란 이름 하에서 움직였다고 할지라도 프로테스탄트의 수립 이래로서는 각각 제 이름을 가지고서 무슨 그룹이네 무슨 그룹이네 하는 데 성경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확실히 신봉하면서 그 말씀이 가르친 거룩한 내용에 의해서 인간 만반에 대한 그 거룩한 하나님의 판단을 가급적 잘 알고 깨닫고 나가려고 하는 그 구심적인 노력이 현저한 그것을 개혁교회라, 개혁신앙이라 또 개혁신학이라, 이렇게 해서 몇 가지의 유효한 유명한 교단들, 가령 개혁교회나 장로교회나 등등 아메리칸 교회나 이렇게 몇 가지 유명한 교단들이 있지마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유형을 만일 신학적으로 구분한다면 개혁신앙이라 할 것이므로 이름조차 독립한 개혁교회(Independent Reformd Church)라고 했지만, 그 개혁교회가 명확하게 언제든지 들고 나서서 교회인 것과 교회 아닌 종교단체와를 구분하는 표준을, 외면에 있어서도 세웠다 그 말이요. 내부에서만 세운게 아니라, 즉 그것을 무슨 말로 표현했다고 하니 신학상 교회의 징표라 무엇이 교회냐, the marks of church라고, Marks of the church. 그 교회의 징표라, 무엇이 교회가 교회 아닌 것과 명확하게 구별되는 징표냐? 요컨대 사람의 감각에도 호소할 수 있고 사람들이 보통 일반적으로 깨달아 알 수 있을 만큼 명확하게 갈라놓는 거라 말이요.



그것을 이야기할 때 그 징표의 내용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이야기했다고 그전에 내가 여러분한테 말씀드렸어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결하게 공급하는 것이다 그거요.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 말씀을 보이는 형태로서 공급하는 예식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가장 신성한 예식, 성례를 실행하고 혹은 집행하고 행한다는 것이오. 셋째는 교회의 불순이라는 것을 언제든지 막기 위해서 엄격하게 단속해서 이 한국말로는 권징(勸懲)이라는 말로 번역했는데 또 일본 사람들은 계명이라는 계(戒) 자하고 규칙이라는 규(規)자을 붙여서 계규(戒規), 계규라는 것은 경계하고 규칙을 딱 세워서 그 규례 안에서 살도록 하는 말하자면 규범을 세워준 것이오. 그 규범 안에서 잘못할 때 그것은 책벌도 하고 징계해 가지고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명확하게 물론 하는 것이다. 개혁교회는 특별히 그 점을 강조했어요. 어떤 사람들 생각에는 가장 중요한 건 말씀이다 하지만 물론 말씀이 가장 중요해요. 그러나 교회가 교회 아닌 것과 구별할 때 이 권징이라는 것은 중요한 사실로 거기서 있는 것이요.



그런데 권징이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져서 뭐 꼭 반드시 교회에서 공고만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라는 바른 원리(principle) 위에서 잘못되면 이것 생각 그렇게 하니까 안된다 하고 먼저 권하기도 하는 것이요. 그러나 어쨌든지 그 형식, 형태 그 절차는 여러 가지가 있을지라도 지금 말한 이 세 가지가 중요한 것인데, 이 세 가지를 볼 때 거기 필연적으로 어떤 형식을 꾸며내려면 그 세 가지가 바르게 집행되기 위하여서 있어야만 할 어떤 중요한 요소, 중요한 사실이 공통으로 있는 거라 말이오. 그러면 그 중요한 사실이 공통으로 있다 할 때는 그게 뭐냐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결하게 공급하는 건 첫째 그 말씀을 선포만 할 뿐 아니라 거룩히 해석을 해서 깨달아 알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오. 그러려며는 어떠한 것을 우리가 가르치느냐, 여기 내가 성경 한 구절을 읽고 얘기하는데 에베소서 2:19-22를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님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즉 가족)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락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신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여기 볼 것 같으면 우리가 어떤 터 위에 있는 것과 어떻게 장성해 가는 것과에 대해서 두 가지를 얘기한 거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 우리의 자격으로 말하면 외국인도 아니고 손님도 아니고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고 하나님의 가족이라.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 디모데서에 말한 거와 같이, 그 집에 하나님이 가장이고 그 안에 가족 노릇하는 것이다.



그러고 또 하나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는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다. 여기에 통치자 대 피통치자의 관계를 보이고 또 가장 대 가족의 관계를 보이는 말씀이 19절에 있고 20절에 가서 어떤 터 위에 세웠는가 할 때는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건물을 성전을 상상하면서 지금 이 얘기를 할 때 그러면 그 모퉁이돌 기초석은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고 그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지하는 모든 힘과 은혜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락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간다. 이게 장성해 가는 상태인데 상태로 보면 선전이라는 상징으로서도 볼 수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내실을 볼 것 같으면 성신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거기 거하시는 처소다. 성전이란 것은 쉬키나의 영광이 거기 있고 시온좌 위에 하나님이 앉아 계시는 거라 말씀이오. 그래서 하나님이 앉아 계시는 거라 말씀이오. 그래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자꾸 지어져 가는 것이다. 완성의 날을 바라고 장성해 가는 것이 교회다. 하는 것이요 그냥 어떤 형태로 우두커니 있는 것이 교회가 아니다 하는 것이오.



그러나 터는 무엇이냐 하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란 뭐냐하면 사도들이 가르치고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은 자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란 뭐냐하면 사도들이 가르치고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해 놓은 그 터 위에서 이 교회는 서는 것이다. 여기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바로 가르친 것을 받아서 전해야 할 중요한 기관이 필요한 거요. 그러고 그것은 바로 받아서 전승해서 바로 전수를 해야지 그릇되게 제 마음대로 해놓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 말이오. 필연적으로 거기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부탁해서 세우지는 사람이 없이는 교회란 성립 않는 것이다 그것이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부탁해서 세운 그 사람은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가르친 그 전통 하에서 확고하게 조직한 것을 그 다음에 전달해 주는 것이다 그 말이오. 첫째 이런 권위자를 요구하는 것이오. 그런고로 몇 사람들이 모아 가시고서 그냥 교회라고 예배만 보면 교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오. 그러고 거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확실한 터 위에서 전달된 그것을 전승한 사람이 있고 그걸 전수해 주는 임무를 하는 그 기관이 거기 서야 하는 것이오. 요컨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플핏(pulpit), 강단이란 걸 없이 교회라는 걸 생각 않는 것이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 반드시 교중에게 임해야 하는데 은혜의 방도로 임하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본질적인 것, 가장 그 말 그대로를 잘 나타내는 곳이 강단이지 신학교의 교단이 아니다 그것이오. 이것을 프로테스탄트나 개혁교회나 아주 강조했던 것이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고 성례를 집행할 때는 이 고린도전서 11장에 성례에 관한 말씀을 보면은 “너희가 이 떡과 이 잔을 분변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그런고로 이것을 바로 분별치 않고 이를 행하는 자는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 그래서 고린도 교회도 약한 자도 많고 병든 자도 적지 않으며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27-30절).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가지고 약하게도 되고 병도 나고 죽기도 했다. 주의해라. 이래서 성례의 집행을 함부로 않는 것이다. 아주 신중하게 주의해서 거기 대하는 거요. 이런 것을 신중하게 할 뿐 아니라 그런 의미를 곡해하지 않고 딴 것으로 생각하고 잘못 전하고 또 그것을 삭감하고 이런 짓을 않게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고 그런 것을 잘 깨달을 사람이 필요해서 개혁교회는 제도를 세우기를 목사 아닌 사람은 집행 못하게 만든 것이오. 아무라도 카톨릭과 같이 죽을 임시면 세례 준다고 후딱 주고 이렇게 안 했다 그 말이오. 또한 이것은 교회의 권위 하에서 하는 까닭에 교회의 권위를 상징하는 그런 자리가 아니면 사석에서는 않는 것이다 그 말이오. 그런 까닭에 이와 같은 것을 하려면 교회의 권위를 상징하고 그것을 나타내고도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야 하니까 여기도 역시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 위에 있는 것을 바로 받고 바로 전수 할 수 있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거기 서야만 하는 것이다 그거요.



셋째로 권징을 행할 경우라도 그것이 교인들끼리 앉아서 “너는 잘못했으니 너? 정지해야겠다. 너 교회 나오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못하는 거라 그 말이오. 최후에 하나님이 판결을 하시는 그 판결을 바로 전달할 수 있는 말씀의 풍요성과 깨달음 가운데서 그걸 바로 지시하는 사람이 생겨야 하는 것이오. 그러고 그것은 또 교회의 권위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해요. 교회는 그런고로 그 권위를 대표하는 법적인 체제가 필요하고 체제하에서 그 제도하에서 그 권위를 입은 사람이라야 한다 그 말이오. 여기 있어서 교회라는 것은 이와 같은 권위자가 있어야 하고 권위의 체계가 서야 하는 것이고 도 그것이 틀림이 없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전통을 이어받는 일이 생겨야 한다 그 말이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전통을 바로 이어받기 위해서는 거기에 필연적으로 그 거룩한 도리에 부합하는 교회의 신앙의 개조가 필요한 거요. 교리가 필요하다 그 말이오. 교리를 요약해서 바로 선포하는 신조라는 것이 확고하니 서 있어야 하는 것이오. 아무 신조도 없는 것은 교회가 아닌 것이오. 어디 이 교파 저 교파에서 어떤 도시로 이민 왔다고 우우 하니 모아서 몇이서 모아 가지고 며칠 예배보고 우리는 교회다? 그 교회 안 되는 것이오. 형식으로 봐서도 교회가 안 되는 것이오. 내부가 안되겠다는 것은 뭐 내부의 문제, 조건에 해당하는가 여부가 또 있지마는 껍데기로도 안 되는 것이다 그 말이오. 거기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권위로서 그걸 교회로서 인정하는 사실들이 구비되어야 하는 거라 말이오. 이렇게 해서 교회가 교회로서 인정하는 사실들이 구비되어야 하는 거라 말이오. 이렇게 해서 교회가 교회로서 확고하니 서려고 할 것 같으면 거기는 신조, 즉 교리라는 것이 명확하게 서 있어서 신앙고백이 교인들에게 있어야 해요. 신앙고백이 있다는 데서 비로소 교회의 회중이란 건 정식으로 성립하는 것이오.



일찍이 다른 어떤 교단에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그와 전연 다른 신앙고백을 한 사람, 예를 들면 도르트교회에 도르트 종교회의의 결정을 선포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이 그런 걸 부인하는 그것이 뭐냐하면 알미니안에 대한 정죄거든. 그런데 알미니안 사람들, 가령 메소디스트(Mothodist)나 홀리네스(Holiness)나 이 사람들하고 합쳐 가지고서 앉아서 교회라고 하면 신앙고백은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거기 생기는 거요.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없이 “아,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같이 모인다”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집단이지 그런다고 교회가 성립하는 건 아니오. 그러고서는 목사만 청빙해 오면 교회 되는 건 아니오. 교회는 그러한 확실한 신앙고백의 터,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어 위에 세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적어도 그것을 자기네가 확신하는 주관적으로라도 확신한 사실이 거기 서야 하는 것이오. 그런 아무 것도 의식이, 확신여부는 그만두고 의식조차 없는 사람들이 모아 가지고서는 이 교파의 교리를 조금 따고 저 교파의 헌법 조금 따고 해서 두루뭉수리 만들어 가지고 아무런 신학적 배경과 일치성이 없이 무슨 아무런 논리적인 일관성이 없이 만들어내는 그런 규례하에서 자기네끼리 모인다는 것은 그게 교회로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오. 이런 것들을 주의해서, 특별히 이런 것을 미국에 가서 많이 보았는데 교회라고 그런 사실들이 있다는 걸 얘기할 때 그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하겠다고 덤빈 것이오. 모두다. 그래가지고 자기네끼리 모아 가지고서는 조화하기 위해서 다른 교파 여럿이 합했으니까 그것이 서로 규각이 안 나고 조화하기 위해서 이것 합니다. 교회라는 것은 조화하기 위해서 사람 모으는 그런 클럽이나 사고 장소가 아닌 것이오.



제일 중요한 것은 먼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의미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고 그의 거룩한 신성성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오. 성도의 교통이란 후에 오는 것이지 성도의 교통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오. 성도의 교통이란 이름 하에서 그냥 크리스찬이란 이름 붙은 사람들이 사교장을 만드는 그런 걸 무슨 성도의 교통인 것같이, 성도의 교통이란 말 자체도 그게 벌써 거기는 그렇게 쓰이는 게 아니란 말이오. 이 코이노니아라는 말도 그렇게 쓰이는 것이 아닌 것을 생각지 않고 자기네끼리 이 세상에서 계 모이는 사람들이 모아서 밥이라도 같이 사먹고 좋아하는 희희낙락하면 그게 성도의 교통인 줄 안다는 이런 정신, 이런 아주 즉물적인 물질적인 이 세상적인 생각에서 교회란 신성한 이름을 가지고 함부로 막 쓰는 것은 일이 아닌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 말이오. 이런 것을 우리 교회 교우들은 분명히 알고서 무엇이 교회인가 무엇이 교회 아닌가를 알고 그냥 교회에 대한 평을 할 때에라든지 판단을 할 때 부주의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오. 그런 것이 오늘 우리가 형식의 문제에 있어서 교회를 생각할 때 중요히 생각해야 할 것이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라고 했는데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령 “내가 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리라” 하시는 말씀도 있고 이래서 확실히 그 개념으로서 베드로란 이름을 주셨는데 물론 베드로란 이름 ‘페트로스’, 조그만한 돌이라는 말에 불과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이 ‘페트라’ 위에 세운다고 큰어머니가 될 만한 큰 반(盤), 바위를 생각하고 그렇게 이번에는 여성 명사를 써 가지고서 바위를 칭호를 했는데 그거야 뭐 페트로스나 페트라나 그것이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오. 그것 가지고 교묘하게 해석하려고 할 이유는 없으나 문제는 나중에 사도 베드로에게도 네가 나를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든지 치라든지 이런 말씀을 해서 큰 대목자장이 너에게 목자의 일을 맡기니 양을 잘 돌아보고 치라는 것이다. 여기에 사도적인 권위, 사도적인 전통이란 것이 서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것은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대로 교황이라든지 법왕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확실히 부여받은 것처럼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지 교황으로 선발된 사람 하나만 할 수 있다는 건 아니오. 그러나 안 부르신 사람은 못하는 것이오. 하나님이 그 일로 불러서 양을 맡겨야지 안 맡긴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종교직을 맡아 가지고서 하면 그건 종교 기업에 어떤 직위를 가진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 말이오. 이것이 교회 타락에 중요한 현상의 하나인 거요.



부르심에 대한 정확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그냥 신학을 하고 그냥 목사가 되고 그냥 교회에서 목사라고 돌아다니는 사실이오. 그런 까닭에 신학교에서 입학식 할 때 “소명감이 있소?” 하고 묻는 것은 아주 약방 감초같이 하는 소리지마는 “예, 있습니다”하는 것도 약방 감초같이 하는 대답이지마는 나중에 놓고 보면 아무 소명감도 없는 사람들이오. 적어도 양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또 그 양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바로 전달하려는 노력도 없이 기업을 만드느라고 애를 쓰고만 돌아다닌다 그 말이오. 양을 어떻게 하는가, 양의 물질과 생활을 돌아보는 것이 그의 하는 일이 아니오. 왜냐하면 그 형식적으로 형상으로 말할 때는 사람이지 양이 아니고, 독립한 사람이고 하나의 인격이고 자기 개성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어서 각각 자기 생활을 하는 거요. 생활을 돌아보라는 게 아니오, 그의 영혼의 상태, 그의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를 보고 공급할 건가 말건 가도 주의해서 봐 가면서 바르게 먹여 나가는 것이다 그 말이오. 그런고로 말씀을 주의해서 말씀에 치중해 가지고 먹을 약식을 만들어 주지 않고 영양 없는 것을 만들어 내주면서 일을 하는 것은 일은 아니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에서 그 신조의 확호한 테두리 안에서 정상적으로 바로 자라나되, 여기 보면 자라나서 차츰 성전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고 장성에 대한 얘기를 했어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른다고 아까 우리가 에베소서 4장에서 봤다 그 말이오. 이젠 어린아이와 같아서는 안 되겠다 하는 얘기도 했다 그 말이오. 그렇게 장성해야 할 텐데 장성을 않고 언제까지든지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은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와도 말씀에 대하여서 착심을 하지 아니하고 어떤 형식에 끝내고 어떤 계획을 하면 그만이다 하는 생각으로 끝내고 말고 주신 말씀에 의해서 자기를 반성하는 데서부터 시작해 가지고, 자기의 그 인간적인 존재를 반성하는 데서부터 시작해 가지고 그 다음에 내가 교회의 일원으로 그리스도의 지체의 한 부분으로서 정당하냐, 부정당하냐, 이것을 늘 생각해야 하는 거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라는 터 위에서 이 교회가 성립되는데 신비의 연합이라면 생명이 공급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리스도의 생명이 공급되어서 비로소 너는 살았다는 이름도 얻고 살았으니까 산 존재로 하나님은 인정하시고 그에게 은사도 주시고 무슨 가치를 요구하시는 것인데 그런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면서 실상은 죽은 노릇을 하는 일이 많다 그 말이오. 성경에서도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것이니라.” 너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살렸다 했는데 죄와 허물을 도로 뒤집어 쓰고 앉았으면 도로 죽는 거요. 그게 죽음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오.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말이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영원히 빼앗겼다는 것이 아닌 까닭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치졸해서, 유치해서 이건 항상 남이 돌아봐야지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쓰는 것이나 그 말하는 것이나 남아 돌아봐야지 그걸 그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가 없다는 이것이 생기면 항상 그것 가지고서 거룩한 교회가 자라나가기는 어려운 것이오.



개혁교회는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이 교회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정당하겠는가? 우리가 이 교회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와 또 그 말씀을 전달하는 그 종의 사역과 또 그걸 먹고 자라난다는 확실한 태도와 고백, 신앙고백과 그 순종이라는 덕 하에서 결속되는 이런 종교적인 한 단체 형식을 취할 때 그것은 일시에 그러고 마는 게 아니라 항시적으로 그래야겠다는 것이오. 일시에 그러다 마는 게 아니오. 며칠 하다가 마는 게 아니오. 항시적으로 그러려며는 그것은 자체가 독립해서 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현실상 요구하는 조건이오. 그러니까 세계 어떤 나라 교회에서든지 조직 교회로서 서려며는 반드시 교역자를 충분히 대우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어야만 하고 그러기까지는 후견을 받는 견습 교회밖에는 안 되는 것이오. 그렇지 않으며 다른 큰 교회나 다른 데에서 그를 원조해 가면서 길러서 장성해서 제 구실을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오.



여러분 한국에 살면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행습도 알지요. 소위 미조직 교회라 해 가지고서는 처음에 기도회 처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당회장이 임명돼서 목사가 가면 말씀은 거기 있고 신앙고백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12신조가 있고 그러니까 일단 교회라는 형식을 취하지마는 그러나 충분히 장성한 교회로서 서지 못하는 까닭에 아직 미조직 교회, 당회도 없는 교회로 총회의 총대도 아직 보낼 수 없고 그러니까 교회 행정에 대해서 가담할 자격이 없다 그 말이오. 그냥 당회장의 감독 하에서만 암만 그게 민주주의 정치를 한다는 장로교회지만 감독 하에서 나가는 거고, 감독교회는 또 말할 것이 없이 모두 것 감독을 하는 게고, 이렇게 해 가지고서 장성을 해서 자기네가 하나의 충분한 독립단체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독립을 하게 되는 것이오. 그때 거기 응해서 갈 수 있는 사람들이 가 가지고, 목사라는 사람이 응해서 갈 수 있어 가지고 노회, 소위 위임식, 위원회에서 가 가지고서 위임을 해줄 때 그 여러 가지 묻는 말잖아요? 교인들 앞에는 이 목사님의 쓰실 것을 여수히 언제든지 공급하고 그 가르침에 열복하고 그 지도하는 대로 잘 따라가기로 서약하느냐고 반드시 그 서약을 묻잖아요. 그리고 목사에게는 달리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거기 늘 일생 가담해 있기로 작정하느냐고 그래서 충실하게 그것을 자기의 일터로 알고 일을 보라는 거요. 임시로 보는 것이 아니오. 이것은 위임이오. 위임이 있을 때까지는 임시 목사가 서는 것이오. 임시로 당회장으로 들어가서 돌아봐 주는 것이오. 이것이 한국에서도 하는 습관이오. 이건 한국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세계 어디서든지 이 개혁교회 계통에서는 그가 교회로서의 의미를 가지려며는 독립 단체로 항시적인 존재라야 하겠다 그것이오.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오. 개혁교회로서 성숙성이 있어 가지고 그리스도의 정병이 돼서 싸울 만한 교회가 되고 즉, 자기의 시대 사명을 행할 만한 교회가 되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지금 우리 교회가 항상 원하고 돼야겠다 늘 하는 말이자마는, 하려며는 적어도 그 전체가 사명의식이 맹령해 가지고 자기만 유지하고 사는 그것으로 뭐 교회 했다고 생각 않고. 우리가 이 시대에 이 역사 시기에 어떤 성격 하에서 오는 도전과 싸워야 할 싸움에 대해서 각성을 해 가지고 이 싸움을 나가서 싸워야겠다. 싸움을 나가려면 어떻게 해요? 유치한 사람이나 어린 사람은 못하는 거오. 성인이라야 하는 것이오. 성인도 충분히 신체검사 해 가지고서 다 통과해서도 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군사라. 네가 나와 같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하는 말씀을 디모데후서 2장에 말씀했는데 좋은 군사가 되려며는 성숙성이 있어 가지고 능히 싸워서 그 정사나 권세나 혹은 권위자 그러나 이 어둠에 세상 주관자들이나 공중에 있는 악한 신들을 대적함이라. 대적을 적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오. 무엇이 적인가를 알 수 있고 적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앉았다가는 자기가 당하고 마는 것이오.



둘째는 적을 봤을 때는 마귀는 화전으로 멀리서 쏘아대서 그놈을 맞지만 믿음의 방패로 그놈을 막아내면서 앞에 가서 성신의 검이란 검을 가지고 지근의 거리에 가서야 비로소 자기는 공격 무기로 쓸 수 있지 즉, 단병접전(短兵接戰)을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오. 이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검으로서 내게 사용되는 그만한 식견과 능력이 거기 붙어야 하는 것이지 그것 없이 싸움하러 못 나가는 것이다 말이오. 그러려며는 성숙한 교회가 돼야 해요. 여기도 보면 건물이 돼서 점점 장성해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러야겠다 그랬어요. 완전한 분량이라 그 말이오. 즉 하나의 격을 충분히 이뤄야 한다 말이오.



그러면 그러게 하려며는 사실상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옛날부터 지금까지 건실한 그러한 성숙성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건실한 중산 계급들이 중견인이 되고 인텔리겐차(intelligentsia)가 중견이 되 가지고 모아야 하는 것이오.,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예수 믿고 천당가는 식만 가지고서 도저히 개혁교회의 건실한 것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이오. 말을 하면 알아들어야 하고 알아만 들을 뿐 아니라 신령한 생활을 해서 직심하게 그것을 늘 연구를 하고 생각하고 깨달아야 해요. 이렇게 해서 기본 조건으로 중산 계급이요 인텔리겐차가 신령한 생활을 반드시 경영해야지 세속적인 생활을 하는 건 뭐 인텔라 아니라 별 것이라도 소용이 없는 것이고, 중산 계급 아니라 부자라도 소용이 없는 것이오. 원래 부자는 교회 안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상적으로 그 교회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어요. 자기 자신이 훨씬 겸손해야 하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훨씬 각오를 단단히 해야지 그렇지 않으며 자기 돈 때문에 목깔려 가지고 안 되는 것이오.



그런고로 개혁교회는 항상 어디다가 치중했느냐 하면 건실하게 근로하면서 사는 중산 계급을 늘 중요히 봤다 그 말이오. 이것이 그 후에 유럽 사회가 발단할 때 유럽 사회의 형성에 있어서도 중견이 되는 사람들이오. 오늘날에도 어느 나라든지 만한 국민이 그런 건실한 인텔리겐차들. 중견 계급들이오. 중산 계급 자들이오. 너무 가난하면 먹고사는 문제가 자기를 꽉 지배해 가지고서 안 되는 것이오. 가난해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돈에 욕심이 생겨 놓으면 먹고사는데 그냥 전력을 기울여 버리는 게고 하나님 나라의 일과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에 관해서는 그렇게 깊이 착심 않는 것이오. 이렇게 해놓으면 그가 모두가 돈을 많이 벌었든지 작게 벌었든지 문제가 아닌 것이오. 상관이 안 되는 것이오. 문제는 신령한 생활을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치중을 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오. 세상일이라는 건 과외의 생활이다. 지나가는 생활이다. 이 세상의 모든 민즈(means)라는 것 말이요, 직장에 가서 일하는 것도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가져야지 의미를 안 가지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깨달은 사람이라야 성숙성이 있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고 우리가 나가서,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하고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같이 생각하는 건 당초에 그릇된 사상이고 기독교의 사상이 아닌 것이오. 의미가 있으려면 의미가 있는 생활을 해야 해요. 의미 없이 그것에 매달리고 하나님의 나라일이니까 나는 내 정력을 다 여기다가 기울인다 하면 그게 하나님 나라의 일 안 되는 거라 말이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엄연히 인류 역사 가운데 있어서, 존재해서 그것이 진행되는 까닭에 그 진행에 자기가 가담해서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 자기가 힘을 써야 하는 것이오.



그런데 교회에 갔으니까 나는 얼마를 냈으니까 그 다음에는 그대로 움직여 가겠지. 그러면 그 교회 전체에 대한 한 부분으로서의 책임을 자기만 얼마 하면 된다는 이런 생각으로써 결론을 맺어버리면 이래 가지고는 교회 안되는 것이다 그거요. 내가 교회의 일부분으로서 교회 전체의 지금 현상은 어떠며 이해는 어떠며 교회로서 존립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런 일에 대한 것을 교회다웁게, 성숙한 사람다웁게 생각하는 것이오. 집안에서도 아이들이 커 가지고 성수해진 다음에는 제 집안 살림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수입 지출이나 생활 방도나 어떻게 되면 잘 유지되고 발전될 것인가를 다 걱정하는 것이지, “그런 것 나는 모릅니다. 나는 몇 푼 받아 가지고 몇 푼만 내놓겠습니다” 세상이 그래 가지고서는 그 집안이 다스리거나 어거해 나가거나 그걸 지고 나갈 자식은 없는 것이오. 이와 같이 교회에서도 꼭 마찬가지요. 그래서 중산계급을 요(要)한다 하지마는 그냥 덮어놓고 사람 형태로써 혹은 가지고 있는 그 경제 정도로서 중산이다 이것을 얘기하는 것 아니오. 문제는 그 중견이 돼 가지고서 그 교회를 지지하겠는가? 지지할 수 있는 세력으로서 자기의 힘을 다 하는가? 요구하는 것이다 말이오. 인텔리겐차도 덮어놓고 아는 것은 소용없는 것이오. 알고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가? 어려운 얘기를 할 때 그걸 깨닫고 거기에 의해서 자기가 포회해야 할 거룩한 사상을 포회하는가? 그게 문제요. 이렇게 해서 거룩한 사상을 포회해 가지고 나가야만 할 것이고, 이런 사람들이 장성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이런 사람들이, 그래서 자꾸 장성해 가라는 것이오. 장성해서 자기네가 깨달아야 할 바를 깨닫고 그러고 당하는 일에 대해서 무엇을 해야 할건가? 이런 결과 이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느냐 하면 사명을 갖는 거요. 교회가 이 세대에 난 것은 무엇 때문에 났느냐?



그러고 오늘날 우리가 보건대 이 사명이라는 건 그 시대에 역사의 성격에 비춰서 생각하는 것이오. 그 역사가 어떤 도전을 해와요. 예를 들면 오늘날 시대, 배교라는 무서운 현실이 있을 때 이 배교의 현실 앞에서 참교회는 어떤 건가? 이름만 정통이면 되는가? 오늘날 이름만 정통이라고 하면서 무너진 교회가 얼마든지 있는 걸 당장에 미국에 있는 장로교회들을 볼 때 그 사람들이 끝까지, 지금 남장로교회는 아직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그냥 가지고 그 교리를 변경을 안 했으면서 부패는 그대로 다 하고 다 떨어져 넘어가는 것을 본다 말이오. 생활이 경건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자기 자신이 신령한 생활, 즉 성신님만 의지하는 것과 자기의 죄를 늘 반성하는 것과 자기의 부족과 결핍이 무엇인가를 민감하게 깨달을 수 있는 형식만 꾸미고 형식으로써 가령 교리만 그냥 항상 성경 신앙을 강조하는 교리 가졌다, 웨스트민스터만 가졌다 그러면 되는냐? 안 되는 것이다 말이오. 이런 것들 때문에 벌써 우리는 역사상 속은 일도 많고 벌써 경험을 다 해본 일들이오. 어떻게 부패하고 타락해 나가는가? 오늘날 한국 교회를 바라 볼 때 어떻게 지금 기울어져 내려가 버렸는가? 성경 신앙을 안 해서 그런가? 말할 때는 성경이면 절대 그만인 것같이 다 얘기하는 데 어떤 때는 과신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하고 아무 상관없이 타락을 해버리는 것이다 말이오.



그런 까닭에 이런 것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건실한 교회로 바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러고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것이오. 그렇게 하고 교회가 아직까지도 후견하는 상태 가운데 있을 때는 겸손하게 아주 빨리빨리 될 수 있는 대로 독립할 수 있는 성숙한 교회가 돼야겠다고 그게 하나의 지망으로서 나가야지 아직 사명을 생각한다든지 의식할 만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오. 즉 후견의 상태라는 것은 자체가 충분히 지지를 못하는 까닭에 교회의 요소를 구비하기 위해서는 밖에서 어떤 다른 도움이 늘 와야 한다는 그거요. 이런 상태에 있을 때는 거기서 벗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하고 나가는 것이 모든 교회에다 대고 늘 요구하는 것이오. 그렇게 되도록 해라하는 것이오. 그러려며는 교인 수가 적다든지 이것보다도 교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각성이 빈곤한 것을 먼저 깨우치는 것이오. 그러고 각성이 아무리 많아도 어떤 일정한 정도가 늘 있는 것이니까 경제적 정도라든지 사람의 수도 있는 것이오. 그래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상태에 올라가야 해요. 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은 나라마다 혹은 그 사회마다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오. 소수라도 하는 사회가 있고 다수도 잘못하고 빈곤하게 하는 사회가 있고 그래요.



옛날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열 명의 하나를 하도록 만들었어요. 그게 소위 십일조 정신이 라는 것이오. 열 명의 하나. 그러면 열 명이 모으면 열 명이 자기의 일년 총 소득의 십분지 일을 다 같이 모으면 그 에버러지(average)의 한 몫을 거기서 다른 사람, 레위 사람 하나를 지지할 수 있었다 그 말이오. 그러나 사실상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열 명의 하나라는 제도, 그러고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른 사람은 제한을 했어요. 레위 사람으로 제한을 했다 그 말이오. 꼭 열 명의 하나씩의 비례로 전부 주신 게 아니라 사십 명의 하나 정도로 주셨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사십 명이 하나를 겨우 유지하는 게 아니라 십일조 하는 것은 엄격하게 정해준 까닭에 거기서 나와 가지고 아마 보통 십일조보다도 십분의 일을 받는 게 아니라 십분지 사 정도, 그 수학의 계산대로 하면 한 것이지마는 이와 같은 루스(loose)한 숫자가 나오는 것은 그건 레위 사람 숫자가 정확하게 사십 대 일로 늘 있는 건 아니오. 불었다 줄었다 하는 것이고, 또 레위 사람이, 나와서 직무를 행하는 사람이 한 살 때부터 나와서 하는 건 아니오. 그러니까 그 연령층을 때고 와서 직무를 행하는 연령부터 이제 칠 때 대체로 레위 사람이 또 다른 분깃이 없어요. real estate(자신의 토지)도 없다 말이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그걸 줬지만 레위에게는 안 주고 “내가 네 상급이다” 하나님께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명해서 그 사람들이 너희 장자를 대신했고 그 사람들에게는 땅을 주지 아니하고 너희가 곧 그 사람들의 기업으로서 존재할 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신 거요. 이런 까닭에 그들은 신성한 의무로서 그들을 지지해야 해요.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옛날 하나님께서 내신 사회는 그렇지만, 그런 규범과 제도를 다 만들어 준 사회는 그렇지만 신약에 와서는 훨씬 그보다 우수한 사회 제도와 규범 가운데 들도록 요구하신 것이 마태복음에, 우리가 보는 산상보훈에 그 하나님 나라의 여러 가지 제도인데도 오히려 훨씬 그러지 못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자기는 교회로라도 떠들고 그러고서는 거기서 무슨 문제들을 많이 일으키고 하는 것을 볼 때에 무엇이 먼저 해야 할 일이냐? 먼저 해야 할 일은 못하면서 거기서 보자기 뜯는 일을 한다든지 하면 이거 아주 참 유치할 뿐 아니라 저급한 일이 되는 것이다 말이오. 그런 까닭에 이러한 상태를 주의해서 이 말씀을 듣는 우리 교우들 모두가 이런 원칙을 전에도 시간이 있을 때 더러 이런 얘기를 했지마는 다시 명확하게 이 사실들을 인식을 하시고 우리 교회. 여기 저기 모두 흩어져 있는 교회가 이런 일에 있어서 명확하게 바르게 판단하고 마음을 먹고 나가기를 바랍니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를 교회로 세우시고 먹이시고 기르시며 장성하기를 바라시고 제 구실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시지마는 저희들이 생각과 각성이 심히 부족하고 또 저희들의 정도가 심히 미급해서 아버님 앞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를 별로 생각 못하고 그냥 항상 이와 같이 흥뚱흥뚱한 가운데 막막한 가운데 늘 지내는 상태를 하감하시고 저희 각 교회들을 격려하시고 정신을 차리게 하셔서 지금 어떠한 현실에 직면해 있는가를 눈을 떠서 바로 보고 깨달을 수있게 하시고, 어떻게 우리는 행동을 해서 다른 사람 앞에 참으로 빛이 되겠는가에 대해서도 주의를 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큰 데 지금 감당하지 못하는 사실에 심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아버님 앞에 확호하게 각성하고 바로 서게 하시옵소서. 이리하여 아버님께서 저희들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 되기를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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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https://www.esesang91.com/b/preach/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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