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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민 목사의 '강청기도론', 그 허상

강준민 목사의 '강청기도론', 그 허상
'적극적 사고방식'의 또다른 변형
자료출처: http://doingtheology.co.kr/jboard/?p=detail&code=ministry&id=59&page=4

강준민 목사의 <강청기도의 능력>은 오늘처럼 기도의 능력에 대한 소망이 많이 사그라들고 있는 시대에 중요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기도의 끈기와 방법에 대한 의지와 생각이 빈곤해져 가는 때에 기도 문제를 정면에 내놓고 제기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그는 한 많은 우리 민족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슬픔과 의분과 분노와 절박한 기원을 모두 담아 강렬한 마음으로 집중해서 기도하는 것, 그리하면 응답받는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는 이가 능력을 얻어 기도했던 바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언뜻 나무랄 데가 없다. 그래서 그의 책은 기독교 신앙권에서 주목받는 책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과 결론이 과연 바람직하고 타당한가? 문제는 없는가? 그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은, 이 기도에 앞서서 기도하는 자가 구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한 전제가 명백하지 않을 경우, 이른바 강청기도는 인간의 탐욕과 헛된 이기심, 그리고 오판과 교만에 대한 심도 깊은 자기성찰이 없는, “하나님 내놔라, 내 보따리” 하는 식의 ‘떼쓰기 기도’가 되고 만다.

'적극적 사고방식’의 변형

그는 기도의 방식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 그 기도의 동기와 목표 그리고 내용에 대한 성찰적 점검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일단 기도하고 보자, 그래서 복 받고 보자, 그것이 최상의 은총이다, 라는 식으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과 비전의 충만함이 없는, 자기 소욕에 대한 갈구를 어떻게 보다 강력하게 전달할 것인가, 이것이 그의 책에서는 사실상의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참된 기도에 대한 모독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기도의 겉모양은 넘치나 그 기도로 진실한 기독교인이 탄생하고 교회가 이 사회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까닭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기도의 외관은 있으나 정작 필요한 기도의 참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통찰하지 못한 채, 이른바 ‘적극적 사고방식’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 관점으로 기도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잘못된 욕망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가 되며 회개와 예언자적 소명이 결여된 기복주의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강준민 목사는 가령, 불의한 재판관과 억울한 과부의 비유를 들면서, 과부의 강청이 결국 재판관의 손을 들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 뼈아픈 한을 거두지 않고 미칠 듯한 아픔을 토해내자 상상할 수 없는 힘이 솟구쳐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스러운 인생의 위기를 기도의 기회로 삼으면, 사태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기도의 정의와 의미가 다 해결되는가 보자.

여기서 ‘억울한 과부’라는 존재는 적어도 두 가지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다. 과부는 이스라엘 성서시대의 현실에서 고아와 함께 최우선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약자로 규정되어 있다.

그 과부가 억울한 일을 겪었을 때,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현실이 유지된다면 그 현실은 이 과부에게 이중의 고난을 지우는 셈이다. 재판관은 이러한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이 임무인데도 도리어 그는 약자에 대한 돌봄을 외면했다. 이 재판관이 불의하다는 것은 바로 성서가 이렇게 강조한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현실 아래, 사회적 약자의 억울함이 풀리지 않고 지속되는 상황에 대하여 사회적 약자 자신이 그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 이것이 중요하다. 불의한 권력자의 권세 앞에서 이 과부는 주눅 들지 않고, 재판관의 의무를 밝히고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고 있다.

불의한 세상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는 자의 기도, 그래서 불의한 자마저 그 기세에 눌려 별수 없이 손을 드는 그 강렬함, 이것이 하나님께 우리가 보여야 할 바인 것이다. “하나님, 이 세상이 이토록 불의하고 그 불의가 꺾일 줄 모르는 자세로 약자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를 가만히 두고 보시겠습니까?” 하는 기도인 것이다.

그저 한을 가슴에 담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능력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 불의했던 재판관마저도 공의를 베풀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영력, 이것이 우리가 구해야 할 바인 것이다.

기도의 내용적 핵심이 관건인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실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고 절실한 기도의 표본이 되는 것이다. 그걸 강준민 목사는 강력하게 떼를 쓰니 불의한 재판관도 별수 없었다는 식으로 곡해하고 있다.

떼를 이왕 쓰려면 왕창 크게 써라 는 식이 된다. 이는 떼를 써야 겨우 우리의 소망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으로, 그리고 고집불통에다 무얼 해도 웬만해서는 만족하지 않는 소인배적 하나님으로 격하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과부의 기도는 결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기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나사렛 예수께서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약자들의 억울함이 풀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의 능력에 담긴 뜻이다. 강준민 목사의 강청기도 개념에는 이러한 인식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의 고뇌 대신, 그저 개인적 곤경과 어려움을 푸는 기도로 우리의 기도 수준을 묶어두고 있다.

그로써 그의 강청기도는 이 사회의 현실과 마주하면서 불의를 타파해 나가며 의를 구하는 용기 있고 힘있는 기도의 수준으로 육박해 들어가지 못하고 만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기도를 오늘날 우리는 하고 있는가? 강준민 목사는 이 기도를 강청기도의 핵심적 보기로 들 수 있을까?

내 마음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

마리아의 기도는 불의를 행하는 권세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기도이자, 불의한 세상에서 한을 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통렬하게 고백하고 있다. 만일 이러한 기도를 오늘날 드린다고 하면 이를 가리켜 정치적 기도라고 비난할 것인가.

과부는 현실의 업신여김을 그대로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숙명을 거슬러 그러한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직접 돌격해 들어간다. 불의에 눈을 감고 있는 존재에게 부단히 공의를 일깨운다.

그리고 그 공의가 재판관의 삶에 압박을 가한다. “불쌍한 과부를 돌보지 않은 재판관”이라는 낙인은 그에게 불명예이다. 불의한 재판관마저도 의를 향한 과부의 뚝심에 무너졌거늘, 불의한 재판관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당연히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대들의 공의를 요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겠는가, 이것이 정작 예수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던 핵심이다.

우리가 상실하고 있는 것은 과부의 강렬하고 집요한 기도가 아니라, 그 과부가 지향하고 있는 ‘공의로움’이다. 마리아의 기도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의로운 능력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강준민 목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무엇을 얻기 원하는지 모른다면 조용한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자신의 소원을 관찰해 보십시오. 그 소원이 구체적일수록 좋습니다….'기도가 강렬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현실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는 소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필요한, 소원의 기준에 대한 성서적 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가 인간적인 욕망으로 품고 있는 소망인지, 하나님 나라의 뜻에 따라 품게 되는 의의 능력인지 구별이 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으로 위장된 탐욕을 위해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보조자가 되고 만다. 도깨비 방망이를 얻는 것이 기도의 목표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자, 기도의 순결성을 훼손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교회가 기도소리는 높으나, 구하는 것이 대체로 자신의 일신상의 이기적 욕망이라는 점에서 교회는 도리어 세속을 향한 타락의 길잡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결과, 우리는 지도자적 목회자의 타락과 부패를 보며 교회의 분란에 처하게 된다.

달라는 것은 많으나, 정작 필요한 것을 구하는 자는 적은 것이다. 자기 욕망이 앞선 나머지, 하나님 나라의 뜻과 그 의를 구하는 노력은 최선의 중요성을 가진 것이라고 믿지 않은 세태의 비극적 모습이다.

강준민 목사는 강청기도가 뜨거운 감정을 가진 기도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처음 기도 세계에 접했던 어린 시절, 저는 조용기 목사님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조 목사님이 늘 강조했던 것은 분명한 목표와 불타는 소원이었습니다. 뜨거운 열망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감정을 강청기도에 드리는 데 사용하십시오. 뜨거운 감정이 담긴 기도를 드리십시오. 감정이 깊어지면 갈망이 됩니다. 충분히 갈망하면 놀라운 기도 응답이 나옵니다.

분명한 목표와 불타는 소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명백하지 않으나 감정을 담으라는 것은, 허사와 형식에 매여 습관적이고 의례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렇다면 옳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불타는 소원과 뜨거운 열망의 대상에 대한 고뇌를 풀어 놓지 않는다. 기도에 감정을 담는 것은, 그 기도에 자신을 온통 몰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어떤 소망과 열정에 대한 헌신이 전제되어 있다.

자기 자신을 모두 걸고 하는 기도, 그것에 인간의 감정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담긴다. 땀이 비오듯 하는 기도를 드린, 겟세마네의 예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우고 있는가?

그것은 다만 자신의 감정을 온통 강렬한 갈망으로 채운 자의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도의 대상에 걸고 전력투구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열정으로 터져 나오는 기도이다.

그러나 강준민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열정으로 구하는 기도보다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이 알아 달라는 기도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에 따르려는 헌신은 생겨나기 어렵다.

그것은 오직, 헌신 이전에 자신만의 복 받음을 우선적 관심으로 하는 삶의 자세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강청’은 ‘순종’과 대립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에 따라 나는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깨달아 아는 자의 기도가 아니라, 그래서 그 무슨 일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무리 불리하게 보일지라도 순종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그에게서는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다.

기도의 과잉이 이루어지는 시대

그는 인생의 비결을 “선택과 집중”이라고 말한다. 기도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많은 것을 얻으려 하지 말고 하나를 정해서 그에 집중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취할 것과 버릴 것, 놓아야 할 것과 쥐고 있어야 할 것을 가려내는 지혜를 얻으려는 이들이다. 그것이 우선이다. 이 지혜를 구하기 전에, 자신의 선택에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유리된 기도생활이 아닐 수 없다.

지혜를 구하는 자가 복되다. 솔로몬은 많은 것 가운데 이를 구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구하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지혜롭게 구할 것을 밝히 깨우치고, 그 깨우침으로 하나님의 뜻과 만나 하나가 되는 기쁨, 여기서 진정한 힘이 나오고 현실을 돌파하는 하늘의 능력이 샘솟는 것이다.

그저 강렬하게, 자신의 소망을 비는 것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신의 일방적 요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기도로 착각하게 하고, 진정한 하나님과의 쌍방 대화의 길에 눈뜨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실로 적지 않다.

강준민 목사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 성서적 이해의 오류가 심각하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채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어머니 리브가는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지혜는 분별력입니다. 분별력은 중요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축복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야곱이 잘 되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축복 기도를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자신은 저주를 받을지언정 야곱이 이삭의 축복 기도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아비 이삭을 속이고 에서 대신에 축복기도를 받다가 발각되면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야곱이 말해주자, 저주는 자기가 받을 테니까 축복기도를 받으라고 대답합니다.

창세기 27장 12-1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도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여기서 리브가는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빈 것이 아니라, 아버지 이삭의 환심을 속임수를 써서라도 아들 야곱이 얻기를 바랐던 것일 뿐이다.

자식 편애의 갈등과 대립의 경계선에 야곱이 서 있었고, 그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술수에 동조하여 늙고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약점을 이용하여 형이 받을 유산의 권리를 자신이 가로채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하고 만다. 하나님의 방법을 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제 손에 쥐려 하다가 그만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가 정작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은 우연치 않게 어느 이름 모를 곳에서 돌을 베개로 삼고 자던 중에 만난 하나님으로부터이다.

따라서 리브가는 도리어 어리석은 어머니가 되고 만다. 자신의 노후를, 밖으로만 돌아치는 아들 에서보다는, 집에서 얌전하게 자신과 함께 있는 야곱에게 맡기고 싶은 심정이 지나쳐 술수를 쓴 것이 아버지와 아들을 척지게 했고, 아들 사이를 갈라 놓고 말았다.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여 그 뜻을 물어 택한 방법이 아니었던 결과이다. 그 어머니의 어리석은 욕심과 아들 야곱의 지혜 없는 동조가 그의 추방을 낳고, 그의 유랑과 긴 세월 이국땅에서 지내는 나그네가 되게 한다. 먼저 지혜를 구하여 그 방법을 묻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욕망의 기원’이 도달하는 끝이다.

강준민 목사가 리브가를 그러한 축복기도의 의미를 아는 여인으로 예를 들고 있다면, 그 기도의 모략에 깃든 문제를 보지 못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 현실에서 무수히 벌어지는 문제이다.

방식이 어떠하든, 그 결과가 어떤 저주스러운 현실을 가져오든 일단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중심으로 기도의 모략에 열중하면, 그것은 도리어 아름다운 인간관계까지 파괴하고 만다. 리브가의 잘못된 생각이 이삭의 집안을 얼마나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는지 직시해야 한다.

잘살고 있던 집안이 서로 갈라지고, 쫓겨나고 추격하고 대립하는 세월, 그래서 아들 둘을 결국 잃어버릴지 모르는 우려 속에서 지내야 했던 리브가의 신세. 이는 하나님의 경고이자 깊은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리브가는 이삭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지혜로운 여인이었으나, 그의 자식 문제 앞에서는 그 총명함이 흐려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무모한 축복 박탈 작전을 꾀하다가 그만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그러니 그녀는 축복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던 것이다. 이후 야곱이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잤을 때 하나님을 꿈에서 보자, 그는 “아니, 이런 곳에 하나님이 계실 줄이야” 하고 놀라워한다.

자신의 술수와 계획에 따라 축복을 강탈하려 했던 과거가 이로써 결별되고,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자리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깊은 기원이 보다 결정적임을 깨닫는 것이다.

야곱은 그로써 축복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 진정 알게 된다. 인간의 방식과 헤아림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앞서지 않는 일체의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는 것, 그리고 그 축복에 자신을 전적으로 걸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권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 이를 그는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술수가 앞서고, 그 술수를 보완하는 기도가 되면 그 기도는 이미 진실의 능력을 잃는다. 오늘날 기도의 문제는 무엇보다 이 대목을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참된 마음과 만날 수 없게 된다.

기도가 부족한 듯하나 기도의 과잉이 이루어지는 시대, 그렇지만 그 과잉된 기도의 현실 속에서 제대로 된 기도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중심이 잡히면 열정과 간절함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이끌어 줄 존재를 만나고자 하는데 어찌 간절함의 자세가 없을 것인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나머지는 이에 더하시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본체를 찾아 신앙의 중심을 잡을 일이다.

이것이 보다 중요하게 풀어야 할 숙제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속의 욕망을 기도로 포장하는 위선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럴 때, 아무리 대단한 기도를 드리는 듯해도 그것은 결국 허사가 되고 만다.

기도의 힘, 그것은 우리를 순결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한다. 자기의 소망을 먼저 내세우는 기도가 될 때, 우리는 어느새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포로가 되고 만다. 복음은 이 포로 됨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능력이 아니던가. 그 해방의 능력을 얻는 자의 기쁨, 참된 기도에 그 기쁨이 있을 것이다.

이 기사는 <기독교사상> 10월호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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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새벽강단&말씀모음
https://www.esesang91.com/b/preach/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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