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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 김민호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 조심해야 하지만

[재반론] 김민호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 조심해야 하지만

황광선 교수의 [반론] 기독교인 정치 참여 조심해야 한다
https://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82
에 대해
김민호 목사가 재반론을 올렸다
김민호 목사는 "성경적 입장과 인문학적 입장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운 거리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신학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우월감을 드러내고 그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기독교인 정치 참여는 사랑의 실천이다
https://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77
라는 글에서,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가 몸담은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중 국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두 나라 시민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다
왜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을까?




[재반론]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 조심해야 하지만
기자명 김민호   입력 2025.02.10 06:25  수정 2025.02.10 09:15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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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람데오닷컴 2월 6일 자 황광선 교수의 칼럼에 부쳐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황광선 가천대 교수께서 본인의 눌필(吶筆)을 즐겨 읽어주시고 정중한 배려와 함께 의견을 개진해 주신 데 깊은 감사를 드린다. 칼럼의 특성상 의견을 최대한 함축하여 논지를 펴다 보니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황 교수의 반론에 언급된 우려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의 우려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현실정치를 바라보는 성경적 입장과 인문학적 입장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운 거리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런 차원에서 황 교수의 반론은 입장을 좁힐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 생각하여 내심 반갑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설득이 이루어질지는 의문이다. 아울러 이번 반론 칼럼이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 문제에 대한 우려를 조금이나마 불식(拂拭)시키는 설득의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지면상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논외 문제는 스킵하고 황 교수의 두 가지 우려에 대한 답변만 해보고자 한다.

첫째, 세상 정치는 정화의 영역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황 교수는 필자를 향하여 “순수하다”고 하며 영어로 “naive” 하다는 표현을 덧붙였다. 너무 이상적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어느 정도 인정한다. 분명히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 이유는 현실정치를 바라보는 필자의 관점이 황 교수의 표현처럼 “한정된 자원의 권위적 배분”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철없는 발상으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대다수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종종 대중의 시선에 이렇게 비치곤 했다. 그래서 황 교수의 naive라는 표현은 그다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면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왜 이렇게 비춰질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는 단순히 이상적인 이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은 아니다.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은 현실과 성경의 절대성 사이에서 이 둘을 어떻게 조화롭게 할지 고민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가르침처럼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부름받은 존재들이다. 공감될지 모르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매우 현실적이다.

그런데도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현실에 초월적으로 작용함으로 비참한 현실 속에 신적인 현실을 이식시켜준다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묘한 존재 방식을 취하게 된다. 이것은 “한정된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세속적 통념을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한정된 자원의 신적 권위의 배분"으로 드러내곤 한다. 성경은 이런 가르침들로 가득하다. 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교회 안에서 일어난 “유무상통”(有無相通) 또한 “한정된 자원의 권위적 배분”의 사회적 통념을 깨뜨린 기적이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외부의 인위적 방식이 아닌 자발적 희생으로 자기 소유를 팔아 이웃과 나눈 것이다. 성경은 이것이 복음의 원리라고 가르친다. 이 기적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자기 부인과 희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자기 부인에 참여하게 될 때, 세상에는 현실 통념을 깨뜨리는 역사가 일어난다. 십자가는 사랑의 충만이요, 그 안에서 세상은 점진적인 정화를 보게 된다.

필자가 정치를 바라볼 때, 기독교적 영향력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우리 개혁파 신학 안에서 볼 때, 이 세상은 완전히 정화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 노력으로 세상을 완전히 정화하는 유토피아 건설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해방신학적 관점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성경이 가르치는 정치의 정화는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이미”와 “아직”의 역동적 긴장 관계 안에서 정치를 바라볼 뿐이다.

역사를 바라보자.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가치관을 현실 정치에 적용한 사례는 많다. 물론 황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현실적으로 이런 정치인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상 주관자는 하나님이다. 세상 임금인 사탄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움직인다는 뜻이다. 이런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승리하곤 했다. 그들은 살아남는 쪽을 선택하기보다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다. 그 안에서 그들은 정치적 부활을 경험하며 현실 정치의 변화를 주도하곤 한다. 우리 대한민국의 국부 이승만 대통령 바로 대표적인 예다. 그는 극도의 척박한 대한민국 정치 토양에서 하나님 사랑의 실천으로 자유민주주의 터를 닦아 놓았다. 이것은 전 세계에 유례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의 기독교적 사랑은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유언으로 요약된다.

이승만 대통령뿐 아니다. 영국의 양심으로 평가받았던 윌리엄 윌버포스도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도 영국 정치 정화에 큰 몫을 담당했다. 그는 누구도 할 수 없는 흑인 노예들의 해방을 일구어낸 사람이었다. 그 외에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던 십자가 사랑 때문이다. 지난 칼럼에 언급된 것처럼 십자가 사랑 안에서 ‘시민법’의 정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 사랑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정치 영역도 “한정된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 놀랍게도 “오병의 기적”으로 승화된다. 이를 통해 정치는 진정한 의미에서 진보하게 되었다.

두 번째 논지에 대한 반론을 해보자. 황 교수는 “세상 정치에 대한 변화로 기독인을 끌어들이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시대와 나라와 인종을 초월한 절대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절대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침묵한다면 세상 정치는 자동적으로 표류할 수밖에 없다. 마치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배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기반하여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누가 낼 것인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차별금지법이 통과된 이유는 기독교가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결과였다. 가변적 도덕성을 믿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정치를 맡길 것인가? 자연인들이 우리 신앙의 자유를 지켜주길 기대해야 하는가?

대한민국 역사를 보자.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 풍토 형성에 기독교인들이 직간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것은 유럽 민주주의의 형성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미국 민주주의를 바라본 알렉스 토크빌의 관찰은 기독교인과 정치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 안에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가 유럽과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기 위해 미국 순회를 했다. 그 가운데 알게 된 핵심은 교회의 역할이었다.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 없이는 자유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를 관찰하면서 “자유는 도덕성 없이 세워질 수 없고, 도덕성은 신앙 없이 세워질 수 없다”는 통찰을 얻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기독교인들이 세상 정치에 무관심할 때 기독교 도덕성은 교회 울타리 안에 제한되고 말 것이다. 우리만 동성애를 하지 않으면 될 뿐, 동성애가 합법과 되든 말든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의 태도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불법에 대한 방관은 악으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필자가 이해하는 기독교 정치관은 기독교 정당정치를 의미한다거나, 혹은 기독교 정치가 현실정치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누룩처럼, 혹은 겨자씨처럼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으나, 종국에는 영원한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다양한 영역 속에 침투하여 불분명한 혼전(混戰)을 이루며 하나님 나라 건설을 이루어 간다. 정치적으로 여당과 야당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여당 안에서와 야당 안에서 혼전을 이룬다는 말이다. 신학 영역으로 설명해 보자. 작금의 신학은 보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경계가 불분명할 정도로 혼란하다. 이런 현상은 비단 신학 영역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사회, 예술, 과학 등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는 진리의 성경을 믿는다. 성경은 그냥 진리가 아니다. 세상 모든 영역에 선명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절대 진리다. 소위 철학에서 말하는 하나와 여럿(The one and many)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한 종교집단으로 볼 것은 아니다. 성경이라는 절대 진리(The one)를 삶의 모든 영역(many)에 녹여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데 관심 갖는 사람들이다. 그 영역에 정치도 예외일 수 없다. 필자는 성경이 절대 진리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통치원리가 허용되지 않는 치외법권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성경을 믿는 목사로서의 신앙 고백이면서, 신자로서의 양심적 태도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황 교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참여에 조심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정확하고 신중하게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정치 참여하는 것 자체를 종교적 일탈로 이해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대한민국 시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시민이 아니다. 성경적 관점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다른 차원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황 교수의 주장이 혹시나 이런 필자의 의도와 어느 정도 부합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자료출처 https://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27901


 






정태홍목사의 유튜브채널 https://www.youtube.com/user/rptmini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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