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사는얘기들

신학실종은 사실인가?

어디에 올려야 할지 몰라서 이곳에 그냥 올려봅니다.

처음부터 글을 써야 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런 것이 동영상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글 쓰는 것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언제부터인가 신학이 실종된 현상학적인 상황에 내몰려 있고 사도들이 외쳤던 생명의 복음이 변질되어 심리학적인 실험의 현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신학의 특징이 무시되고 복음주의라는 말로 뭉뚱그려 혼합된 모습이 현재 한국교회의 현주소이기에 그렇다. 이것은 합동에 속한 다고 예외는 아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이 신학에 반영되어 복음의 현장에서 명백한 울림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를 둘러보면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로 명명하는 개혁주의 신학이 교회에서, 목회의 현장에서, 그 정신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음이다. 오히려 칼빈이 그토록 생명 걸고 싸웠던 이단인 알미니안주의가 버젓이 복음주의 신학으로 자리 잡고 행세하고 있는 형국이 지금이다. 어느 누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작금의 시대적 상황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먼저 각성시키는 의미에서 조심스럽게 글을 전개해 보고자 한다.

 

2009년이 칼빈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대적인 칼빈신학에 대한 조명이 있었고 개혁주의를 내세우는 교단들마다 칼빈신학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내가 속한 합동교단은 물론이고 통합측에서도 거대하게 칼빈탄생 5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아무튼 2009년은 한마디로 한국에서 칼빈의 성대한 신학잔치를 벌렸던 해이다. 대단히 바람직하고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미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이 대부분 칼빈주의 신학을 지녔던 목사님들이었고 그로인해 한국교회의 신학이 칼빈주의요 개혁주의신학이었음은 주지하는 역사적 사실이고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 정체불명의 신학이 무당춤 추듯 정신을 어지럽히더니 이제는 버젓이 혼합된 형태로 한국교회를 점령해버렸다. 그러나 그뿌리를 추적하면 영락없이 로만 카톨릭의 Semi-Pelagianism 이고 그 종자인 Arminianism 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칼빈이 그토록 생명 걸고 막으려 했던 알미니안주의, 그래서 이단으로 정죄한 그 인본주의 신학이 이제 한국교회를 점령한 신학으로 버젓이 행세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인간의 능력을 인정하고, 조건적 선택을 주장하며, 보편적 구원을 외치고,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으며, 은혜에서 타락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인간본성의 우위성을 내세워 1618년 도르트 국제종교회의에 항의서를 들이밀었던 알미니안주의자들에 대항한 것이 칼빈의 5대교리 TULIP 이 아닌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가 필요하며, 제한속제와, 불가항력적 은혜로, 한번 선택한 백성은 끝까지 지켜주시는 성도의 견인, 교리는 죄로 인하여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절대 의지로 말미암는 은혜임을 철저하게 주장한 교리적 선언이었다.

사실 알미니안주의 신학사상은 인간의 본성과 자유의지와 행위를 인간의 구원의지에 첨가하는 인본주의로 이것의 뿌리는 또한 로마 카톨릭 신학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의 구원론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노력(행위)이 아닌가! 종교개혁를 일으킨 위대한 개혁주의사상은 바로 이 같은 인간의 자기 긍정의 의식을 깨트리고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절대의지로 말미암은 은혜를 주장한 것이었다.

그들이 개혁의 기치로 내세운 Sola fide , Sora gratia , Sola scriptura 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아무런 능력이 없으며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은총만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아무 가치 없는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의 역사임을 천명한 것이다. 하지만 무가치한 인간의 공로와 행위를 내세우는 로마 카톨릭 신학인 Pelagianism 이나 그 종자인 Arminianism 같은 인본주의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상쇄시키며 인간의 능력과 의지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의지와 동일선상에 놓기를 원하고 병치시키므로 인간의 구원을 마치 인간의 노력의 산물인양 호도하는 이단사상인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점령하고 있는 신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어이없고 슬픔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한국교회의 신학과 사조를 교회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현상학적인 문제들로 발견할 때마다 한국교회, 특히 복음주의권으로 뭉뚱그려진 그룹들의 신학은 펠라기안이고 알미니안 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고 틀리지 않다고 확신한다.

카톨릭의 Missa를 우리는 예배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도 구원의 완성을 이루지 못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도 매일 제사를 드려 십자가에서 완성하지 못한 구원을 이루어드려야 한다고 하는 그들의 신학이고 제도적 제사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잘못된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구원의 완성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의 제사를 통하여 보속의 의미에서 구원을 완성해 가야 하는 것으로 여기에 인간의 노력이 첨가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공로신학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이 바로 Semi-Pelagianism 이고 Arminianism 이다.

나는 기독교 교회사를 볼 때마다 화가 치민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더욱 화가 치민다. 요1:29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제물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십자가 구속의 구원완성의 통일성과 완전성을 믿지 않고 인간의 노력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완성하겠다고 하는 어리석고 오만한 인본주의사상으로 집단화된 것이 로마 카톨릭이고 공로신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이 썩어 더러운 인간신학의 쓰레기를 내다 버려야 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성격적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교리가 선포되고 있는가? 오늘 한국교회는 교리가 가르쳐지고 있는가?
‘믿습니다’ 하는 인간의 심리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 믿음의 도를 가질 수 있도록 교리를 가르치고 선포해야 한다.우리의 위대한 믿음의 개혁자들이 사도들의 신앙을 신학에 담아 전수해준 개혁주의(칼빈주의)신학을 굳게 붙들고 지켜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르게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온통 싸구려 믿음이, 싸구려 구원이 활개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고 구원받으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전도의 사용문구로 채택하고 있는 말이다. 하지만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죄사함의 은총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죄사함을 받는가? 죄인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복종시키고 낮아질 때 성령의 은혜가 부패하고 타락한 심성을 감화시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드는 것이고 이 믿음의 고백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칭의가 선포되고 구원의 은총을 입는 것이다. 이것이 ‘이신칭의’의 개혁주의 구원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가 아니라 당신은 죄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라고 전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구원받은 확신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이신칭의 믿음이고 이는 성화로 나타난다. 구원받은 자는 그 삶이 성화되기 때문이다. 즉, 죄를 미워하고 거룩함을 삶의 신앙고백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마7:16-18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구원의 표식을 볼 수 있으며,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한 야고보 사도의 외침에서도 구원의 표식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은혜로 구원을 얻은 천국백성된 자가 그 삶으로 성화의 아름다운 선한 역사들을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럽고 마땅하고 당연한 것이다.
마5:16 “이와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므로 이것이 없다면 구원받았다고 할 아무런 확증이 없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요리문답 59문에서 구원을 받은 자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문/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에 참여하게 되는 자가 누구인가?
답/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구속을 매수하신 모든 사람에게 구속이 확실히 적용되며 유효하게 전달되니 그들은 때가 이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에 이른 대로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 성경말씀은 몇 군데 있으나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즉,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의지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가운데 택하신 자에게 믿음 그 조차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인간에게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롬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는 Sola fide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70문에서 칭의는 무엇이라 설명하는지 보자.
문/의롭다 칭하심이란 무엇인가?
답/의롭다 칭하심이란 죄인들에게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행위니 이것에서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자기 목전에 그들 자신들을 의로운 자로 받으시고 여기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안에 공작되었거나 그들이 행한 어떤 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과 충분한 만족이 하나님에 의해 그들에게 전가되고 또한 믿음으로만 받아 드린바 됨으로 인한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 성경말씀은 십여 군데가 넘으나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3:23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엡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즉, 칭의는 인간의 의지나 공로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믿는 자에게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용어인 것이다. 칭의는 ‘죄사함’과 ‘의의 전가’ 인 것이다. 그러므로 Sola gratia 를 감격에 겨워 외치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헌데 로마 카톨릭에, 알미니안 신학을 추종하는 복음주의권에, 이같은Sola theology 가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 없다.

 

오늘 우리의 목회현장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니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전도방식은 인간의 전적타락을 인정하지 않는 알미니안주의 구원관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의지로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무슨 수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의 희생제물이 되셔서 죽으셨다는 것과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행16:25-32 을 보면 구원의 서정을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간수가 고백하는 이 말에는 이미 그 심령을 성령께서 감화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의 행동이신 것이다.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이시고 그 확정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안타깝게도 성경적 구원론, 즉 개혁주의 구원론이 아닌 인간의 심리적 기술에 의해 감정을 유발시켜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음이다. 이것은 신학이 잘못된 당연한 귀결이고 이런 시도들은 결국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성령의 쏟아 부으시는 은혜의 접촉이 없이 감정을 고조시키는 기술로 인해 자기 의지의 발로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시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지도 않을뿐더러 회개의 역사도 없다. 교회에 나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에 대한 구원의 은혜의 감격과 기쁨을 그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없는 것이다. 오히려 교회에 나와 준 것에 대한 의기양양만 있을 뿐이다.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죄인이 철저히 낮아짐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에게 정령 구원의 확신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자신이 구원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박옥수 구원파 집단의 도전적인 외침인 구원받았습니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앞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알미니안주의에 붙어 기생하는 이단들의 도전에 맥없이 넘어지고 있는 현상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교인들로 하여금 개혁주의신학으로 무장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교리를 선포하고 가르치고 이끌지 못한 이유인 것이다.

 

오늘 한국기독교 교단들의 현주소를 볼 때 개혁주의신학이 살아있는 곳이 과연 몇 군데나 될지 지극히 걱정스럽고 우려된다. 명색이 교단 신학으로 칼빈주의 개혁주의신학을 표방하는 합동은 과연 개혁주의신학을 지켜가고 있는가? 표면상으로 그런 것 같으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금방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총론은 개혁주의 신학이지만 각론에서는 알미니안주의가 활개를 치고 있는 꼴이다.
오늘 우리의 교회와 목회현장에서 개혁주의신학이 살아 있는지 반듯이 확인해야 할 중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로 얻는 이신칭의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이시기 때문이다. 이신칭의의 구원은 반듯이 성화를 동반하게 되어 있어서 구원받은 표식이 거기에서 확인됨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반응하는 것은 구원의 열매, 즉 성화인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만이 이 같은 바른 구원론을 신자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다.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교회를 말하다가 장황하게 서론이 늘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늘어놓은 것은 과연 한국교회에 칼빈주의 개혁주의신학이 바르게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짚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합동의 예장방송에서 칼빈500주년 특집세미나를 동영상으로 내보내고 있는데 거기에 통합측의 칼빈5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동영상이 여러편 준비되어 있다. 전주 서문교회에서 개최한 기념학술 세미나이다.
그 중에서 한편을 보게 되었는데, 1540년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칼빈이 예배를 집전한 예배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한일장신대 총장인 정장복교수가 예배인도자였다. 칼빈이 집전한 예배를 그대로 재현한 이 예배의식은 정말 은혜롭고 감동스러웠다. 오늘 우리는 왜 이런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현실적 상황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문제는 정장복교수의 복식에 있었다. 까운 안에 입은 셔쓰가 다름 아닌 Roman Collar 였다. 칼빈을 기념하며 개혁주의 신학사상을 되새기는 자리에 칼빈이 그토록 혐오하고 기피하며 싫어했던 로마 카롤릭의 모습을 버젓이 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설교를 담당한 목사도 까운 위에 Stole 을 걸쳤다. 스톨은 신부들이 착용하는 영대이다.
이것은 오늘 한국 개신교회에서 전혀 낯설지 않는 일반화되어 있는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성찬식에서 사용한 빵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빵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에서 분병으로 사용하는 동그랐고 납작한 작고 하얀 밀조각이었다. 이것은 형식은 개혁주의 예배모범을 재현하고 있으나 형태적 내용은 로마 카톨릭의 유산을 그대로 쓰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자가당착의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오늘 한국의 Protestant 교회에서 이 같은 모습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닌 보편적 현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개신교회라고 하지 않고 굳이 프로테스탄트교회라고 표현한 것은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할 수 있기 위함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이 바로 프로테스탄트이기 때문이다. 무엇으로부터,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왜, 그것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찬양하는 인본주의의 썩은 가치들에 저항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신앙선배들인 개혁주의자들이 피흘려 싸워 쟁취하고 지켜준 그 정신을 지금 우리는 어디서 잃어버렸는가?

신학교수가 자신이 하고 있는 복식이 다름 아닌 로마 카톨릭의 모습이라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목사가 자신의 까운 위에 걸치고 있는 스톨이 신부들이 착용하는 영대라는 사실을 몰랐단 말인가? 성찬예식에서 사용한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빵이 로마 카톨릭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분병인 것을 몰랐단 말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다는 말인가? 너무 일반화되어 있는 우리 교회 안의 카톨릭 잔재들 그래서 의식도 흐미하게 흐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개혁주의든 어떠하리 복음주의(Arminian)든 어떠하리 카톨릭이든 어떠하리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음이다.
혹자는 말한다. 복식을 가지고, 형식을 가지고 유별 떨 것은 없다고, 로만칼라가, 형식들이, 카톨릭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은가 하면서 포괄적 가치로 수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절충주의와 혼합주의는 다름 아닌 포괄주의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한다. 로만칼라는 카톨릭 사제들이 오랜 세월동안 그들의 신부복장으로 받아들이고 신분상을 구별하기 위함과 공식적으로는 신부들의 약식제복으로 외출시 입는 독신의 성직자임을 나타내는 공식복장이다.
그런데 목사가 그들의 복식을 하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다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이상하게 여기는 것을(아니 목사들이 왜 신부들이 입는 옷을 입지, 까우뚱한 그들의 시선들, 여기는 교인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목사님은 이상해 왜 신부들이 입는 옷을 즐겨 입는지 모르겠어 우리가 천주교도 아닌데) 이것이 오늘 우리의 부끄러운 현주소인 것이다. 유난히 카톨릭적인 것을 좋아하는 그 사람들, 그들이야 원래 뿌리가 알미니안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장로교 사람들이 카톨릭적인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조금만 읽어도 장로교를 지키기 위해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역사가 지금도 소리치고 있음을 들을 수 있는데, 장로교에 몸담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정체성 부재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느 교회들은 교회인지 성당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로마 카톨릭의 형식들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다. 결국 무엇인가? 형태적 의식에는 그것의 정신이 담긴다. 카톨릭의 형태에는 그들의 신학이 담겨있다. Semi-Pelagianism 이다. 그리고 그 종자인 Arminianism 이다.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죽음을 걸고 싸운 이단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사상이 아닌 그 어떤 형태적인 것도 교회에서, 우리의 의식에서, 모두 걷어 내어 쓰레기 치우듯 버려야 할 것이다.
카톨릭의 잔재들이 오늘 프로테스탄트교회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자리 잡고 있음에도 별다른 의식없이 간과하고 지나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들(개신교목사)도 카톨릭신학인 펠라기안과 그 종자인 알미니안의 늪에 깊이 빠져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극구 부인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오늘 개혁주의 몇 교단을 제외한 복음주의 교단에는 이제 Roman Catholic 과 Protestat 를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척도가 없어졌다. 신학의 실종인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자인 고든 콘웰 신학교의 조직신학자 데이비드 웰스는 자신의 책 ‘신학실종’ 에서 이 같이 신학이 실종된 현대의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다.
칼빈를 기념하는 행사는 합동이든 통합이든 자신들의 신학적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칼빈신학을 지향하려면 개혁주의사상의 토대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칼빈주의이고 개혁주의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가 무엇인가. 로마 카톨릭을 벗어내는 것 아닌가. 인본주의 신학을 걷어내고 오직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신학을 확립하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이기 때문이다.
통합측의 학술세미나를 합동의 방송망으로 내보낼 생각을 했다면, 설혹 그것이 교단의 교류적 차원에서 마련된 것이라 하더라도 사전에 내용이 검토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내용이 검토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둔 것이라면 합동의 신학도 온전한 칼빈주의 개혁주의가 아님을 들어낸 것이다. 총론에서만 그렇고 각론은 아닌 것 이듯 말이다. 칼빈 500주년 기념학술세미나가 한국에서 여러 교단적 차원에서 개최된 것은 정말 고무적이며 감사할 일이다. 그렇다면 더욱 칼빈주의 개혁주의적 사상으로 철저하게 준비되었어야 옳았다. 칼빈의 예배를 재현한 예배, 그 자체는 정말 은혜롭고 감동적이었다. 아! 이것이 개혁주의 예배로구나 하는 생각에 오늘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고, 로마 카톨릭의 잔재을 보면서는 옥의 티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Protestant를 휩쓸어 버린 쓰나미가 남긴 흔적이 다름아닌 신학의 실종임을 재삼 발견하게 되었다.
진정 신학실종은 사실인가?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4

  • 관리자 · 2011-04-11 16:34
    심정을 토로하신 글 귀하게 잘 읽었습니다. 정말 이 시대의 교회를 바라보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소리를 하면서도, 강단에 서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외치는 시대입니다. 성도들은 분별력을 거의 상실했습니다. 교회는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빌 게이츠를 띄워놓고 이렇게 부자가 되라고 설교를 하니 썩어도 왕창 썩었지요~ 온라인에서 개혁주의 개혁주의 떠들어대는 분들도 정작 신사도교회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을 보고 정말 혀를 내두릅니다. 자기 자신이 신사도적인 교회의 집사이면서 카페의 운영자로 있으니 말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자손들은 어쩌될지 참 걱정입니다. 정말 더 말씀에 깨어 있으며 기도하며 하나님께 엎드려 나아가야할 줄로 생각합니다~
  • 전선민 · 2011-04-13 13:42
    SDG 에 올라온 글이군요. 출처는 알려주셔야... 이러다가는 검색해봐도 원 출처를 모르는 글이 될 겁니다.
  • 하늘군대 · 2011-04-14 11:50
    SDG회원입니다. 이 글은 내가 작성자가 맞고요.
  • 바보 · 2011-07-13 17:33
    위의 글을 전부 읽진 못했는데 부분 부분을 읽은 상태로 글 하나 남기려 합니다. 시간적으로 다 읽기가 어려워서요... 죄송합니다. 글 속에서 하나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 남기려 하는데 예전과 관련하여 가톨릭과 개신교를 비교하여 글을 남기려 할 때는 초대교회와 초기 기독교 역사, 서방, 동방교회의 예전의 역사적 발전사를 이해하고 글을 남긴다면 보다 풍부한 통찰이 발휘되리라 생각합니다. 글의 의미는 알겠는데 근거 자료로서 미흡한 부분이 보인다고 생각됩니다. 저의 좁은 식견에 그렇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