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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소식

종교다원주의자 길희성 교수의 [종교의 이해] 강의 노트

종교다원주의자 길희성 교수의 [종교의 이해] 강의 노트

종교학적 지성

 

종교학적 지성은 개방적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하며, 신학과 세속적 지성 사이에서 제 3의 길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상대의 입장에 서서 연구하는 것이며, 접근방식은 대화적 접근방식과 인간주의적 접근방식이어야 한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에 대한 만족적인 정의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설로서는 정의할 수 있다. 우선 종교는 삶의 궁극적 기반(ultimate foundation)에 대한 헌신이다. 이 궁극적 기반을 발견한 사람이 곧 신자인 것이다. 이것은 특정한 인간에게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궁극적 기반을 찾는 존재, 곧 homo-religious이기 때문이다. 신학자 Paul Tillich는 신앙은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했는데, 모든 인간은 이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성이 지배한다고 하는 현대 문명에서조차 종교는 사회의 궁극적 기반으로 여전히 존재한다.

 

인간에게 궁극적 기반을 제공한 종교

 

첫째, 보편적 종교(세계 종교)로서 전 세계를 상대로, 전 세계에 퍼진 세계종교를 말한다. 이 종교들은 선교를 하는 종교로,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를 말한다. 이들은 인종, 성별을 초월한 평등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둘째, 특수종교로서 어느 한 국가, 지역, 부족에 국한되는 종교인데, 일본의 신도, 유교, 힌두교, 유대교 등이 그것이다.  

 

세속화

 

문화의 기반이 종교적 지배로부터 벗어나 정치, 경제, 사회 등이 자신의 독자적 기준에 따라 운동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종교에서 이성으로의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의 문화사는 종교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종교적 차원이 실재하고 있다. 여전히 지배적인 문화적 패턴은 종교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세속적 휴머니즘 역시 기능적으로 보면 보편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준종교로 취급된다. 세속적 휴머니즘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의 형식을 취하는데, 평등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합리주의를 그 성격으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세속적 휴머니즘은 현세의 인간적 행복을 추구하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의 역할과 동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역시 준종교로서의 역할을 한다.

 

종교에 대한 정의

 

종교를 정의하는 어려움은 우선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공통적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정의는 두 측면으로 나누어서 전개해야 하는데, 첫째, 형식적, 기능적 정의로서 이것은 종교의 기능과 역할을 위주로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내용적 정의로 예를 들면 신에 대한 신앙,믿음, 의례, 행위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신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 즉 God인가 gods인가의 문제, 무신론적 종교의 문제 등이 어려움을 준다.

 

Etich Fromm의 정의

 

Etich Fromm은 Freud의 영향을 받았다. Freud는 종교는 유아기를 청산하지 못한 성인들의 집착의 산물이라고 보았고, 따라서 종교는 성숙한 인격 형성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Fromm은 선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 대해 깊은 연구를 수행했고, 그 결과 종교는 성숙한 인격 형성에 공헌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종교 정의는 형식적, 기능적 정의의 성격을 지닌다. 그는 "집단에 속한 개인에게 삶의 방식(정향성의 테두리)과 헌신의 대상을 제공하는, 한 집단에 의해 공유되는 사유와 행동의 어떤 체계"로 종교를 정의했다. 그는 사람들은 이 체계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보았고, 따라서 모든 이에게 이 체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이든지 그 어떤 것을 섬길 수밖에 없으므로 어떤 신을 믿는가 만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에게 인간은 존재를 의식하는 존재이다. 이 의식하는 존재라는 의미는 자기를 초월하여 대상화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식은 인간을 문제적으로 만든 저주이며 자연의 이방인이 되게 한 것이다. 여기서 치유는 균열의 통합과 고향 회귀를 의미하고, 종교는 바로 이것의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 태도가 심리적 방향에 따라 인간에게 파멸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에 의하면 종교는 권위주의적으로는 인간의 건전한 이성, 지성적 비판을 말살하고 인간의 소외를 가져오며, 또한 과거지향적 태도를 갖게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종교가 인간주의적으로 나타나면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평등의 보편성을 추구하며 인간의 계발하는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의미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

 

인간은 의미를 묻는 존재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의미와 목적이 있다면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이 의미 해석의 틀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삶의 '의미의 위기' 곧 삶의 anomie 상태가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조건은 무의미로부터 의미를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의미를 만드는 것이 종교이다. 과학은 어떻게(how)에 대해 답할 수는 있지만 왜(why)에 대해서는 답할 수 없다. 종교는 죽음과 도덕적 부조리, 무죄한 자의 고통 등 의미의 위기에 봉착한 인간에게 인생의 의미를 긍정하려는 노력이며, 따라서 종교는 마지막 합리주의의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초월적 각도에서 인생을 봄으로써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종교의 구조론

 

종교를 종교이게 하는 것은 초월과 성이다. 초월은 존재론적, 인식론적 차원에서 초월적 실재, 초월자의 보이지 않는 실재, 불가시적 힘을 의미한다. 성은 범접하기 어려운,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 초월, 성은 속의 세계와 구분됨으로써 의미를 나타낸다. 성과 속의 구분이 없는 종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초월세계의 불가시성이다. 그러므로 초월을 속의 세계로 매개시켜주지 않으면 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매개 시스템이 곧 종교이다. 이 시스템은 우선 종교적 경험이다. 인간은 선험적으로 신을 알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믿음, 계시, 황홀경, 삼매, 소명, 환청, 꿈 등으로 나타나는데 그 특징은 경험한 당사자만이 아는 주관성, 불가시성, 내적 성격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 표현이다. 이것은 종교적 경험이 외적,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든 아니든, 종교적 경험을 했건 안했건 그것을 알 수 있다. 춤이라든가, 순례, 건물등의 전통이 그것이다. 여기서 경험과 표현의 선후차성이 논란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과 속의 문제를 기본적인 것으로 하는 것이다.

 

속과 종교적 전통, 그리고 종교적 경험의 상호 의존성

 

종교적 전통은 가시적 체계이나 이 자체만으로는 종교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종교의 사물화,물상화의 오류를 피해야 하며, 그것은 인간적, 내면적, 정신적 차원이 포함될 때 가능하다. 결국 전통이란 역사적 산물이므로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리나 사상. 제도를 절대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을 절대시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종교 숭배로, 우상 숭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전통은 인간의 신앙과 결합될 때 비로소 종교적 현상이 된다.

 

한편 종교적 전통이 의미가 있는 것은 속의 세계에서 바로 성의 세계로 건너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인간은 상징을 통해 성과 만난다. 그러므로 상징은 그 자체로서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매개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비유처럼 종교는 손가락이지 달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해 Eliade는 hierophany(성현)의 개념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속된 세계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성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종교 생활은 초월적 경험을 현실(俗)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신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가?

 

첫째, 자연현상이다.

둘째, 역사적 사건과 경험이다. 이것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적 패턴이다.

세 번째는 인간의 내면,심성,마음,영혼,양심이다. 이것은 자기 성찰을 통한 신과의 조우로 신비주의의 성격이다. 인간 자체 내에 초월성이 있다는 것으로 Imago Dei, 心卽佛이 그런 의미이다.

 

자연중심적 종교

 

자연중심적 종교는 자연을 항구성, 질서의 영감을 전해주는 의미있는 실재로 인식한다. 곧 자연의 영적 가치를 추구한다. 종교들 중에서 어떤 종교는 우주 지향적 성향이 강하고, 또 어떤 종교는 그 성향이 약하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자연을 영적 의미가 충만한 성스러운 우주로 인식한다. Primitive religion, Archaic religion은 우주적 종교의 성격이 강한데, 우주적 종교란 자연 정향성이 강한 종교를 의미한다. 이것과 구분되는 것이 바로 historical religion이다. 여기서 자연에 대한 공포로 종교가 기원했다는 주장은 올바르지 않다. 원시 종교는 자연 속에서 성스러운 힘을 느낀 것이다. 이것이 Eliade가 말한 hierophany로서 종교의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이다. 예를 들어 하늘은 물리적 의미의 하늘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로서 광대무변, 지고함, 광명(빛), 비, 축복의 원천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하늘을 신성시하고 신격화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신성을 느낀 것이다. 대지는 생명의 근원, 끊임없는 창조력과 생명력으로 이해되었다. 매장은 또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날 것을 희구하는 종교성이다. 태양은 밝음, 빛, 여원성, 항구성, 불변성, 질서, 남성적 원리인 양을 상징한다. 이 역시 태양 자체를 물체로써 숭배한 것이 아니라 태양 속에서 거룩함을 읽은 것이다. 달은 여성적 원리인 음을 상징하며 변화와 시간,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물은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래서 정화 의식에 사용되며, 해체와 카오스의 상징이기도 하다. 여기서 해체란 용해의 차원에서 개체적 차이의 무의미를 의미한다. 세례는 물속에 들어가는 것인데 이것은 옛 자아의 죽음을 상징한다. 카오스란 새로운 양식의 출현의 전단계인 것이다. 식물, 나무는 끊임없는 갱신을 상징한다. 성목신앙이 있다. 여성은 생명을 출산하므로, 성적인 힘의 성스러운 의미로 이해된다. 산과 강에서 산은 우주의 중심, 강은 생명의 원천을 상징한다. 인간의 몸도 몸 자체를 자연의 일부로 파악하여 소우주로 인식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이상의 원초적 감수성이 사라지고 있다.

 

애니미즘

 

애니미즘은 인간 이외의 존재에도 의지가 있고 작용한다는 믿음이다. 이 애니미즘은 정령숭배, 신령 숭배의 의미로서 19세기말에 E.B. Tylor가 [원시문화]에서 처음 제시하였다. 그는 종교의 기원에 관심을 가졌는데, 종교의 발전단계를 Animism에서 Polytheism으로 그리고 Monotheism으로 진화하였다고 보았다. 원시인들은 사고 구조가 유치해서 인과관계를 자기 바깥의 영적 존재와 연결시켰고, 꿈 등의 경험으로 영적 실재를 상상했다고 주장한다. 동물, 식물, 구름, 산 등 자연적 실재 배후에는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Animism이 종교의 가장 원초적 단계였다는 것은 가설의 차원이며, 현재는 학술적으로 거부되고 있다.

 

spirits, gods, God

 

gods, God은 인격성과 신화를 가지고 있는 반면 Animism은 신화의 성격이 약하다. 그럼에도 spitits는 의지와 인격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애니미즘은 무생물체에까지 spirit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현대에도 언어적 습관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시나 일상 생활의 의인화 습관이다. 예를 든다면 배(ship)를 she로 부르는 것이다. 세계영혼(Weltsiele)이나 Geist, Weltgeist(세계정신)과 같은 개념도 애니미즘의 영향을 갖고 있으며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God을 영적인 힘으로 인식한다.

 

Annimism의 형태

 

애니미즘의 형태는 샤마니즘, 조상숭배로 나타난다. 우선 조상숭배에 있어 조상신이 되는 조건은 남성이어야 하며, 객사했거나 원한을 갖고 죽어서는 안된다.

 

Animatism(Dynamism) : 힘의 숭배

 

Tylor의 제자들인 Marrett, Codrington등이 제시한 것으로, 애니미즘보다 더 원초적인 것이다. 그들은 비인격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의 원초적 단계라고 보았다. 이러한 힘에 대한 종교현상은 태평양 군도의 Mana 숭배,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Orenda, Waka 숭배, 일본의 Kami 숭배 등이다. 코드링턴은 멜라네시아 종교현상을 연구하면서 Mana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 Mana는 초자연적인 비범한 힘이며, 사물에 깃들어 있는 힘이다. 만물은 이 마나를 가지고 있다. 이런 것은 보편 종교에서도 나타난다. 이슬람의 경우 축복하다라는 의미의 Baraka, 기독교의 Charisma(은총)과 같은 개념이 그것이다. 이는 매혹적이면서 두려운 힘이고, R.Otto에 의하면 두렵지만 매혹적인 신비이다. 그리고 Fetishism(주물숭배)도 애니마티즘의 성격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힌두교의 Brahman은 비인격적인 성스러운 힘 개념으로서 애니마티즘의 철학적 표현이고 동양의 도도 마찬가지이다.

 

Polytheism

 

Monotheism과 대비되는 Polytheism은 다양성, 관용적 태도, 겸손함을 그 성격으로 한다. 여기에서 신은 누구나 혼자서 독점할 수 없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Polytheism의 신은 부족주의적, 문화적, 사회적 신으로, 곧 제한된 신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기능에 따라 여러 신으로 분화되어 있다. 따라서 Monotheism의 신은 전부 아니면 전무여야 하지만 다신교 안의 신은 자체 안에 모순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Polytheism의 신은 '나'의 이해와 경험에 근거한 신, 곧 자신에 맞는 신의 추구라는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Atheism은 형성될 수 없다. 이 Polytheism은 선교의 필요성을 가지지 않으며 고대 문명의 종교이다. 그것은 이집트, 고대 그리스, 황하, 인도 문명을 의미한다.

 

Polytheism의 신관

 

Polytheism의 신들(gods)은 독자적 의지를 관철하는 인격성을 가지고 있으며, 신화를 통해서 발현한다. Polytheism은 이상적인 사람 형상(물론 동물 형상도 있다)의 신상을 제작하였고, 신전을 세웠으며, 사제들이 존재했다. 이 신들의 특징은 불사(immorta1)이다. 그들은 전지전능하지는 않지만 죽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Polytheism의 신들은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Polytheism의 극복

 

Polytheism의 극복은 우선 Monism(일원론)적 방향에서 왔다. 그것은 인조 종교, 대부분의 아시아 종교에서 나타난다. 인도 종교의 경우 Veda 시대에는 다신교였지만 말기에는 하나의 신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고가 등장했다. 그 '하나'를 비인격적인 Brahman(범)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비인격적인 존재의 근원이다. 이러한 생각은 Polytheism의 신들의 제한성과 유한성에 대한 자각 속에서 나왔지만,  Monism은 Polytheism을 탄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극복은 Monotheism에서 왔다. 그것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같은 인격신을 믿는 종교였다. 하지만 이들도 다신교를 완전히 다 없앨 수는 없었다. 기독교에서만 해도 마리아 숭배, 성인 숭배 등이 남아 있는 것이다.

 

Polytheism과 현대

 

오늘날의 정신세계는 Polytheism의 재생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post-modern의 상황이다. Modernity는 이성의 절대화란 측면에서 Monotheism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Post-modernity는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로서의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주장한다는 면에서 Polytheism적인 성격을 갖는다. 거대 담론에서 미시 담론으로 옮겨가는 Post-modern 사회에서 Polytheism은 자문화 중심주의(Ethno centrism)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Monotheism의 문화사적, 종교사적 의의 

 

Monotheism은 이른바 성서적 세계관에 근거한 형제(자매)종교인 유태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전통으로 세계 인구의 반을 지배하고 있다. 이 Monotheism은 서구적 보편주의 색심으로, 하나의 가치기준과 척도로 사물을 보는 것이다. 즉 보편주의의 두 뿌리는 이 성서적 신앙과 그리스 합리주의 전통인 것이다. Polytheism은 부족주의, 지역주의, 종족주의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온 인류의 신을 상정할 수는 없었고 Monotheism이 그 대체세력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서의 Monotheism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느님을 창조주로 제시한 것은 당시 고대 근동사회가 하늘과 땅을 신격화하고 있었던 면에서 매우 도전적인 명제였다. 즉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하늘과 땅(자연)의 피조성을 주장함으로 그것들이 탈신성화 된 것이다. 탄원시인 시편 102편에서도 하느님의 영원성과 동일성, 독자성이 고백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세계는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피조성을 그 성격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자연의 탈주술화, 곧 신성과 자연의 분리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지위가 격상하고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이 부분 때문에 현대 환경론자들은 기독교를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비난한다. 한편 시편 8편에서는 세계는 하나님의 작품(Handy work)로 고백되며, 인간은 하느님 다음 가는 자리, 만물의 다스리는 자로 고백된다. 구약 성서에서의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의미의 自然(Nature)이 아니라 피조물(Creation)인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성서적 세계관에는 '自然'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성서적 자연은 신현(Theophany)의 장소이다. 예로 출애굽기 19장의 시내산 계시사건때의 묘사를 보면 경이로운 자연현상은 그 자체가 신이 아니라 단지 신현의 수단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열왕기 19장의 엘리야 사건에서도 바람,지진,불길과 같은 자연 현상속에 계시지 않은 신이 묘사됨으로써  자연의 신성이 거부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 종교는 자연의 형상화, 신의 형상화를 금지했다는 측면에서 신상 타파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래 이스라엘 종교에는 신화,신상,신전이 없었던 것이고, 훗날 신전을 세우려 할 때 예언자들이 우상화에 대한 경계속에 반대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구약성서의 의미는 무엇인가? 구약성서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종교 내적 종교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상타파와 다신 숭배전통 파괴로 나타난다. 그리고 최초로 True God과 False God의 구별이 시작되었고, 배타성과 독선적 태도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자연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정치권력의 신성성도 파괴했다는 측면은 높이 사야 한다.

 

Monotheism의 정치 비판 - 윤리적 Monotheism

 

고대 근동사회에서 왕권은 Divine kinship의 성격이 강했다. 그 대표적인 나라는 이집트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12지파 연맹의 느슨한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훗날 왕이 생겼을 때도 왕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이 강력히 존재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의 보편적 의지 앞에 어떠한 인간의 권력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예언자 정신으로 계승되었다. 이는 처음부터 왕권체제에 대한 성서의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치비판은 왕정체제만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에 대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신과 인간의 관계를 계약관계로 보아 계약의 위배는 파기, 곧 징벌을 가져온다고 하여 선민사상을 특권으로 보는 사고에 대해 비판했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자 정신은 형식적인 종교의례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었다. 아모스의 경우 형식적 종교의례에 반기를 들고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선언을 하고 있다. 출애굽기 23장의 약자보호법 같은 경우도 약자에 대한 보호의 추구와 자연,땅에도 적용하여 쉬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Monotheism의 역사의식

 

야훼 사상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 만나는 하느님 신앙이다. 성서 자체가 역사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체험을 역사적 경험(역사적 구원)속에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는 역사적 이야기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훗날 Pascal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은 철학자의 하느님이 아니라"라고 했다. 그러나 성서는 역사교과서는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 역사 기술이라기 보다는 신앙의 눈으로 역사를 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History로서의 객관적 역사가 아니라 Geschite로서의 의미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종교적 경전인 성서가 이토록 역사의식이 강한 이유는 구약의 인간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신앙으로 역사를 해석했기 때문에 역사의식이 경전에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역사적 신앙, 역사적 계시인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은 출애굽 사건이었다. 해방자 하느님, 역사에 개입하는 하느님, 부족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사의 한 가운데로 개입하는 하느님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성서는 신앙의 입장에서 쓴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적 역사의식과 서양 역사의식

 

서양 역사의식의 출발은 성서이다. 성서는 역사적 계시, 즉 역사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 현시를 기록한 책이고 신약 또한 예수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역사관은 시작과 종말이 있는 일직선적 역사관으로 특징 지워진다. 그것은 하나의 목적(telos)을 향한 역사의 방향이 있고, 그것은 불가역적이라는 의식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헤겔과 맑스에게도 계승되고 있다.

 

유태교, 이슬람, 그리스도교의 Monotheism

 

이 세 종교는 우상 숭배를 경계하는 창조주 신앙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은 예수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를 비판한다. 그들은 예수를 예언자의 하나로서만 인정하기 때문이다. 한편 구원자 신앙도 공유하고 있다. 역사에 개입하여 자기 백성을 돌보고 구원하는 신에 대한 믿음이다. 다음으로 계시자 신앙 역시 공유하고 있다. 이 계시는 이성 위에 있으며, 사건과 사람(예언자)를 통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심판주, 종말 신앙을 공유한다.

 

현대 세계의 주요한 5대 이념체계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세속적 휴머니즘(자유주의), 사회주의이다. 이들은 특정한 종적, 민족, 사회, 문화의 울타리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이념체계이다. 이중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신봉자들에게 삶의 방향과 궁극적 의미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으로 종교가 수행해온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 다섯 이념체계의 공통점은 보편주의이며 평등주의이다. 그런데 이 보편주의가 이념간 갈등의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이들 보편주의는 자신들의 보편주의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스리랑카의 타밀 힌두교도와 신할리즈 불교의 갈등이나 태국의 불교 유일 지배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에 특수주의적인 전통이 수반되면서 갈등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종교학과 신학

 

종교학은 종교를 구성하는 제반 현상들 - 신조,교리,신화,의례,공동체,제도,종교적 체험 등-을 학문적 객관성에 입각하여 체계적으로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종교학은 신학과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첫째, 신학자는 주로 자기가 속한 종교전통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만, 종교학자는 가능한 한 세계의 모든 종교를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막스 뮐러는 '한 종교만을 아는 사람은 어떤 종교도 모르는 자'라고 했다. 둘째, 신학은 신앙을 전제로 그 안에서 자신의 전통 이해를 추구하는 규범적 성격을 가지지만 종교학은 반드시 신앙적 태도를 요구하지 않으며 때로는 신앙적 태도가 종교학 연구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종교학은 종교적 신앙과 전통이 학문적 지성과 양심을 대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학문인 것이다.

 

종교학과 사회과학

 

사회과학은 종교에 대해 환원주의적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것은 종교를 종교적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사회적, 심리적 현상으로 파악하여 종교의 초월적 측면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종교학은 규범적 학문인 신학과 세속적 지성에 의해 영위되는 사회과학적 종교 연구의 사이에서 양자를 매개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하는 중도적 학문이다.

 

종교학과 철학

 

철학은 종교적 관념과 사상에 대해 비판적 지성의 입장에 서서 그것들의 진리성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규범적이다. 그러나 종교학은 진리성의 문제보다는 그것들이 지닌 종교적 의미와 기능을 이해하는데 일차적 관심을 둔다는 측면에서 기술적이다.

 

W. C. Smith의 인격주의적 종교 연구

 

하나의 종교전통만을 연구하는 사람을 종교학자라고 할 수는 없다. 종교학자는 주로 타인의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여기서는 신앙적인 혹은 신학적인 태도보다는 소위 객관적, 학문적 태도를 중시한다. 그러므로 종교학자는 진리 판단을 유보(=판단중지:epoche)하고 모든 종교 현상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종교란 것이 신앙심을 떠나서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Wilfred Cantwel Smith의 대안이 바로 '참여적 관찰자'의 입장이다.

 

그는 [종교적 의미와 목적]이라는 책에서 종교적 문제의 지적 이해에는 외부관찰자로서의 유형과 전통의 참여자로서의 유형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는데, 그는 여기에 세 번째 유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정과 선택과 탐구와 혁신을 업으로 삼고 있는 다음 세대의 사람들'로써 두 유형을 종합한 참여적 관찰자이다.

 

 

한편 종교 연구 태도의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비교종교학 : 어디로, 그리고 왜?"라는 논문에서 다루었다. 과거 서구 학자들은 타종교를 '그것'(It)으로 대해왔다. 그것은 물화의 태도였다. 이러한 태도가 '그들'(They)로 발전했고 '당신들'(You)로 간주되다가 마침내 '우리들'(We)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했다.

 

 

스미스에 의하면 종교란 외형적으로 관찰 가능한 '축적적 전통'(Cumulative tradition)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 '신앙'(Faith)이라는 양면을 지닌 것이다. 과거의 종교학은 이 축적적 전통에 집중하여 종교의 비인격화와 물화를 초래했다. 그러나 종교의 장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마음이며 참 종교사는 단순히 축적적 전통들의 형성 및 발전과정이라기보다는 이 전통들이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불러 일으켜 온 종교적 체험과 의미 등의 보이지 않는 내적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역사는 신앙의 역사이며 종교의 연구는 곧 인간의 연구인 것이다. 그는 종교에 있어서 객관적 상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상징이란 어디까지나 그것을 통하여 초월적 실재를 감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만 상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 연구는 종교적 인간으로서의 인간이해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에게 인간은 한편으로는 세상에 발붙이고 사는 존재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부단히 초월적 실재와 접하고 사는 존재이다.

 

종교현상에는 신자의 입장을 떠나서 생각할 수 있는 고정된 객관적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교현상의 의미를 위해서는 대화가 중요하다. 여기서 타종교에 대한 진술에서 중요한 것은 진술자의 공동체가 알아들을 수 있으며 그 진술이 다루고 있는 타 공동체의 동의를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종교현상이 갖는 의미에 관해서는 결코 외부인이 신자를 능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사에 있어서 유일한 옳은 지식은 '당사자의 의식 속에 참여하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주객 대립의 인식이론은 지양되어야 하며 오히려 상호 신뢰와 존중 속에서 대화하는 길만이 상대방을 옳게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합리적 인격주의라고 한다. 합리적 인격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는 공동체적인 비판적 자기의식을 의미한다.

 

일반적 진리관은 비인격적 객관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스미스의 종교관은 인격적 진리관이다. 이것은 종교에 있어 진리는 특정한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 진리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상의 스미스 이론의 문제점은 첫째, 축적적 전통을 모두 신앙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J.Hick은 시, 기도, 예언 등은 신앙의 일차적 표현으로 보고 이것을 자료로 한 체계적 사유로 교리와 신학을 이차적 표현이라고 보았다. 둘째, 의미론의 문제이다. 우리는 신앙인 자신의 해석을 중시하면서도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주관적 해석의 이데올로기적 은폐성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의 의식 속에 잡히지도 않고 인정조차 할 수 없는 의미의 해석도 역시 사실로서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객관주의를 초래할 위험도 있다. 타인의 내면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잘못된 객관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는 것이다. 의미란 궁극적으로는 연구자 자신이 이해하는 것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학적 배타주의

 

서양의 전통적 신학은 근본적으로 종교다원성이라는 것을 모르고 형성된 신학이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우월주의나 배타성은 무지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교 문화권을 지키려는 사회적 정치적 동기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이 세계관은 세 가지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변화의 계기를 겪게 되었다. 첫째, 근대 과학적 세계관과 계몽주의적 합리주의, 둘째, 역사주의, 역사적 세계의 자각을 특징으로 하는 역사적 상대주의의 충격, 셋째, 동양의 위대한 종교적 전통들의 도전이 그것이다.

 

특히 동양의 종교 전통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물음을 가지고 있어 우월성의 정당성을 고집할 수가 없게 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다원성은 현실 그 자체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서구의 종교가 아니다. 토착화(Indigenization)라는 말은 더 이상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토착화되지 않은 신학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배타주의(Exclusivism)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는 포괄주의(Inclusivism)로 나타났으나 이 역시 그리스도중심주의(Christocentrism)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제 다원주의적(Pluralistic)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주의에서 신중심주의(Theocentrism)로의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 다원성을 엄연한 사실로 인정하며 세계의 주요 종교전통들의 동등성을 수용하는 태도이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필요성

 

첫째, 지적인 이유이다. 진리 파악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으며 인간은 유한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는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상대적이지만 계시와 예수는 절대적 기준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계시를 주장하는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입장은 도전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적 양심은 문화적, 역사적 상대주의를 수용할 수 밖에 없다.

 

둘째, 도덕적 이유이다. 오늘날 대화는 도덕적 지상명령이다. 왜냐하면 인류 공동체간의 평화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대화는 겸손을 전제로 한다. 진정한 대화란 자기의 진리 인식이 오류일 수도 있으며 부분적이거나 불완전인 것일수 있음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의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종교간 협력은 매우 시급히 필요하다.

 

셋째, 신학적 이유이다. 우선 하느님의 초월성이 그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다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부정을 통해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제한된 하느님이다.

 

다음으로는 유일신 신앙에 근거한다. 즉 그리스도인들만의 하느님이 아닌 것이다. 유일하신 하느님이라면 다른 민족의 하느님이기도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해주신 것에 있지 우리만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편파성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가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할 때 자신들만을 사랑하고 자신들만의 인생을 의미 있게 해주는 하느님이라면 결코 사랑의 하느님이 아닌 것이다. 또한 선택은 특권이기에 앞서 사명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예수라는 한 특정한 존재의 표현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힘이요 실재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앞세우는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의 신학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인식의 순서 상 예수가 우선일지 모르나 존재의 순서 상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 신학

 

종교다원성을 지적 도덕적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신학적 이유에서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수용하는 신학을 우리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 입각한 그리스도교 신학으로서, 누가 보아도 의심의 여지없는 그리스도교적 특성을 지닌 신학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전통의 재해석, 변화된 세계와 역사의 현실 가운데서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의 정립을 추구한다.

 

서구 모노테이즘과 아시아 종교

 

monotheism : farther type - prophetic(western religion)

monism : mother type  - mystical(eastern type)

 

유일신 신앙에도 신비주의가 있으나 제한적이다. 서양의 신비주의는 사랑속의 통교로 신과 하나가 되는 관계적 성격이다. 여기서는 여전히 타자로서의 신이며, 신과 인간의 분리와 차이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신과 인간의 동일성은 없다. 반면 mystical한 동양 종교는 깨달음을 중시한다. 그리고 관조적, 수용적, 수행적이다. monotheism에서 만물은 신에 의한 창조물이다. 반면 monism에서의 신은 인간과 사물 안에 내재하는 궁극적 실재이다. 따라서 세계는 신의 출현(emerge), manifest, evolve이다. 신은 만물의 모태(womb)이다.

 


monotheism : 불복종 / monism : 무지

 

monism에서의 신은'내 안에 있으므로' 인간과의 타자적 대치국면이 없다. 그러므로 초월적 비판정신이 약하여 예언자적 역동성이 없다. 지혜로운 자들이 나타나 무지한 자를 깨우쳐주는 type이다.

 

중국의 종교

 

중국 종교는 낙관주의적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중국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연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자연의 도(naturalism)를 추구 : 서구와 같은 super naturalism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의 어의는 '스스로 그렇다'(self so)이다. 가시적 자연과 불가시적 자연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아시아 종교는 자연주의적, 내재주의적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변화는 일정한 course와 패턴이 있고, 이것이 순환, 반복한다. 순환과 반복은 조화, 평형, 질서의 예측 가능한 자연이다. 또한 중국인은 자연의 파괴적 측면을 경험하는 것이 약했다. 따라서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를 중시한다. 자연의 길, 변화의 법칙은 음양론으로, 이는 대립적 이원주의가 아니라 상보적 이원론(complementary dualism)의 특징을 갖는 것으로, 음양의 상호교호작용으로 모든 사물이 운행한다는 것이다.  중국인은 역사의 변화도 자연의 법칙에 따른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파생된  중국적 낙관주의는 음과 양의 변화와 조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고를 대표하는 것이 주역(The Book of Change)이다. 주역은 자연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그 상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자연에 맞추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역은 팔궤(양) ......  (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는 우주적 상황을 상징으로 나낸 것이다.  이것을 다시 64궤로(여섯줄씩) 나타내고, 그 하나하나를 爻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각 궤가 자체로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時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리듬에 자신을 맞추려는 의도를 갖는다.

 

중국 사상의 두 흐름 : 유가와 도가.

 

유가와 도가는 문화(禮)에 대한 태도로 구분된다. 道家는 무위자연의 태도, 반문화, 반사회의 성격을 가지며, 무로서의 자연을 강조한다. 도는 無名,無形으로, 무는 만물의 근원이다. 도가에서는 도와의 합일이 궁극적 가치이다. 한편  儒家는 인간의 문화, 질서, 사회는 자연을 본받은 것으로 본다. 孟子의 性善說에서 보듯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긍정적 이해에 기반하며, 유교의 天(자연)은 윤리적 자연, 인간적, 도덕적 자연이다. 그러므로 인륜은 곧 천륜인 것이다. 天命之謂性은 인간에게 내재한 심성, 곧 인간에게는 천이 부여한 성이 모두 내재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유교와 도교의 공통점은 기본적으로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힌두교

 

asram : 개인의 삶의 체계(idel course of life)

 

1. 梵行期 : 집을 떠나 스승(구루) 밑에서 베다 공부. 결혼,성생활 할수 없음.

2. 在家期 : 의무적 결혼, 후손을 낳고, 생업에 종사하며, 제사를 지내야 한다.

3. 林棲期 : 준은퇴기, 숲에서 금욕적 생활을 하며 명상한다.(moksa)

4. 抛棄期 : 사회적 identity를 모두 버리고 금욕, 고행, 걸식 (sadhu : 성스러운 삶)

 

해탈(moksa) : 윤회(samsara) 세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

 

해탈의 길

 

 

힌두교는 dharma에 대해서는 융통성이 없고 억압적 타율적이다. 그러나 해탈, 구원의 문제에 관해서는 대단히 자유롭다. 그 길은 여럿이다.

 

1. karma marga(행위의 길) : 선행을 통한 구원의 추구(불완전한 구원의 길)

2. jnana marga(지혜의 길) : [Upanishad](신비적 지식), 우주의 비밀을 아는 지혜

                                          -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Brahman, 梵)을 아는 것

    ※ 속성이 있는 브라만 : Sajuna(인격신) - Isvara(대신,주신) / Shiva, Vishnu

        속성이 없는 브라만 : Nirjuna(비인격신) - devats(작은 신. 다신적)

3. Bhakti marga(信愛의 길) : 인격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

    ※ Bhagavad-gita(주님(Krisna)의 노래)

    ※ 신과 연인(loving union) - 신과 인간의 차이는 인정

 

힌두교는 브라흐만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다양한 사상 형태를 취한다. 현대 종교다원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J.H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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