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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L, 고신의 소리’ - 우리 곁에 있는 전쟁, 교회는 어떻게 이해하고 기도해야 할까?(1)


‘KOL, 고신의 소리’ - 우리 곁에 있는 전쟁, 교회는 어떻게 이해하고 기도해야 할까?(1)


‘KOL, 고신의 소리’ - 우리 곁에 있는 전쟁, 교회는 어떻게 이해하고 기도해야 할까?(1)
기자명 고신뉴스 KNC   입력 2023.03.25 00:29  수정 2023.03.28 19:38  조회수 77 

1. 전쟁을 바라보는 교회의 두 시선
신원하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I. 전쟁과 전쟁의 정당성 문제

“전쟁은 정치의 실패이다. 그러나 전쟁은 대화와 타협이 아닌 무력으로 행하는 또 따른 정치의 모습이다.” 프로이센의 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가 ‘전쟁론’을 통해 남긴  이 말이 오늘처럼 실감나는 때는 없는 듯하다.

 

21세기 전후 30년간 끊임없는 전쟁 현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전쟁을 일으킨 지 1년 1개월이 지났다. 이 시각도 우크라이나 곳곳에는 포연이 자욱하다. 러시아는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내 친러시아 성향의 주 정부가 들어선 주의 두 자치 공화국에 거주하는 자국인들을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전역에 미사일을 발사함으로 침공을 감행했다.

공교롭게도 지난 월요일 2023년 3월 20일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개시한 지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2003년 당시 미국은 이 전쟁을 ‘자유해방전쟁’이라고 이름 하면서 이라크를 침공하였고, 이 전쟁은 9년간 지속된 뒤에 끝났다. 미국은 이라크가 9-11 뉴욕 테러와 서방세계 곳곳에서 터지는 테러와 관련이 있는 국가로서 생화학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Weapon of Mass Destruction)를 보유하고 있는 현실에서 향후 미국의 안전을 담보하고 지구촌의 평화를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제적으로 이라크를 공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쟁의 정당성을 천명했다.

이 강대국들이 시작한 전쟁은 정당했고, 정당한 것인가?

 

전쟁에 대한 두 입장

전통적으로 인류 사회는 전쟁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입장을 가져왔다. 평화주의와 정당한 전쟁론이 그 입장의 양대 흐름이다. 그러나 ’정치적 현실주의‘가 주도하는 냉엄한 국제  현실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사용을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다고 보는 평화주의(pacifism)  입장보다는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의 논리가 훨씬 현실적이라 선호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회와 신학자들도 이 문제에 관심 갖고 입장을 정립하여 성도들에게 지침을 제공해왔다. 그것은 서구 국가의 정치와 종교가 기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도 평화주의의 입장이 흘러 내려왔지만 이는 소수의 흐름이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서구의 주류 개신교단들은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속한 교회들도 대부분 정당한 전쟁론을 지지하여 채택해 왔다.

그렇지만 현대의 정치학자들은 전쟁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해서는 점점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 이유 중의 한 가지는 전쟁은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양 세력 중에  한쪽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이들이 보기 때문이다.

즉 전쟁은 다분히 힘의 역학 관계에서의 불균형으로 그리고 자국의 이익추구라는 목적에서 발생하는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정의로운 전쟁이란 실제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라크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냉철하게 한번 들여다보고 평가한다면, 과연 엄청난 희생을 담보로 치른 전쟁이 당사국과 지구촌에 얼마나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주었을까? 

 

한국 교회의 경각심 요구되는 현재 한반도 상황 

특히 우리 한국국민과 교회는 이 문제에 정말 각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정학적 그리고 현실적 상황에 놓여 있다. 정전 상태에 있는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한 채 시시때때로 신형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면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명분을 만들어 우리를 공격할 개연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하는 현실에서 살고 있다. 전쟁에 대한 각별한 경각심을 가져야 할 우리 국민이 이 문제에 대해 담담한 듯 보여 놀랄 뿐이다.

우리 교회라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든 전쟁이 한반도에서 발생할 가능성을 막는 일에 더 관심 갖고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아무리 방어적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전쟁이 일단 발발하면 당사국과 국민들은 수십 년 동안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인식하면서,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전쟁에 대한 경각심과 함께 바른 성경적 신학적 안목을 정립하고 대처해 가야할 필요가 있다. 

 

기획된 본 글이 다룰 내용과 그 목적

이번 ‘고신의 소리’(KOL) 글은 이런 목적으로 기획되고 두 차례에 걸쳐 쓰여질 것이다. 먼저 이번 글에서는 교회역사를 통해 내려오는 전쟁에 대한 교회의 두 시선을 간략히 정리하고 분석함으로 개괄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데 초점을 둘 것이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최근 정치권에서 거론된 바 있는 예방적 선제 타격론의 정당성을 검토해 볼 것이다. 최근  북한 핵무장과 고조되는 위협과 전쟁에서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선제적 타격을 고려할 수 있다는 견해와 남한의 핵 무장론을 한번 진중히 분석하고 이에 대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어떤 의식과 태도로써 한반도의 안전과 지구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지 제안해 볼 것이다. 

II 평화주의(pacifism)

평화주의(Pacifism)는 어떤 이유에서건 전쟁을 시작하거나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고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것은 무력이 평화를 가져올 수 없고,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 평화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세분화시키면 성격별로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인간주의적 입장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인류애적 평화주의‘(humanistic pacifism)와, 둘째는  비폭력이 폭력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현실적 인식에 기반하는 ’실용주의적 평화주의‘(pragmatic pacifism), 셋째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의 방식에 따라야 한다는 신학적 입장으로부터 말미암는 기독교적 평화주의(chrisitian pacifism)다.

세 입장을 대표하는 현대적 인물은 각각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와  미국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 그리고 신학자 존 요더(John H. Yoder)다.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은 평화주의 입장을 견지했다는 것이 신학계의 정설이다. 이 주장은 1~2세기 그리스도인이 단 한 명도 로마 군대의 군사로 복무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교부 터툴리안과 오리겐 등이 쓴 초대교회 문헌의 글들로부터 뒷받침되어 왔다.

이 평화주의 입장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기독교 개종이 점점 늘어나고 기독교를 국교화한 콘스탄틴 황제 시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점점 세력이 약해져서 마침내 소수의 분파(sectaria)로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해서 내려왔다. 종교개혁기에는 재세례파 그룹의 메노나이트 교회와 이후 영국의 퀘이커교도들이 이 평화주의의 흐름을 계승 유지하는 대표적 그룹에 해당한다.

그런데 핵무기가 사용된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한 뒤, 지구촌과 교회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평화주의의 입장을 우호적으로 대하고 실제로 이것이 지구촌의 평화를 위해 옳은 길이 아닐까 하는 의식을 갖고 열려진 마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성경적 이해와 신학적 주장 

기독교 평화주의의 성경적 신학적 토대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다. 평화주의자들은 예수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충족히 드러났기에, 하나님의 뜻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시 열심당원들과 같이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 하지 않고, 도리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돌려대라"(마 5:39)고 가르쳤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 말씀하며 세상 사람과 다른 삶의 방식을 살아야 할 것을 제시하셨다. 평화주의 옹호자들은 예수님이 무엇보다 천사의 힘과 민중의 힘을 동원하기를 거부하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이 세상이 취하는 그런 방식을 단호히 거부하셨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비폭력과 세상을 힘으로 움직이려는 것을 거부한 것의 상징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버려야 하는 것을 말해주는 가장 극적인 사건이다. 이 십자가의 방식은 무능하게 보이지만 결국은 부활로 이어졌다. 바로 이 약함을 취하고 무력을 거부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오는 놀라운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무력을 포기하고 용서하는 비폭력의 삶은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가져온다고 외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전쟁과 무력을 사용하여 자기 뜻과 목적을 구현하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치고 보여주신 그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르고 증거(witness)하는 삶을 이 사회에서 증거하고 구현하려고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III.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

평화주의와는 달리 정당전쟁론(當戰爭論, Just War Theory)은 엄격한 요건을 충족시키는 경우, 전쟁은 정당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교회 역사를 통해 이 입장은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 잡아 왔다. 힙포의 감독 어거스틴(A.D. 354-430)은 전쟁은 미화되어서는 안 되지만, 선량한 국민과 사회를 방어하고 불의한 침략을 응징하고 사회질서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치러진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 이론은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종교개혁기의 루터와 칼빈을 거쳐 현대의 폴 램지(Paul Ramsey)라는 신학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발전시켰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아울러 개신교회는 전쟁은 ’전쟁개시의 정당성‘ 요건과 ’전쟁 행위의 정당성‘ 요건을 만족한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이해하고 그 요건을 크게 9가지로 정리하여 가르쳐왔다. 

 

전쟁개시의 정당성(jus ad bellum, justice toward war) 

우선 전쟁을 시작하려면, 다섯 가지가 충족해야 하는데, 그 첫째는 정당한 원인(just cause)이다. 만약 자국이 부당한 공격을 당하여 자국을 방어하고 자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기를 든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둘째, 정당한 의도(justi ntention)다. 전쟁을 하는 의도가 보복과 상대방의 파멸이 아니라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최후수단(the last resort)이다. 전쟁은 모든 외교적 방편을 다 동원했지만 평화를 회복할 수 없었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 행해져야만 되고 그 때에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합법적인 권위(lawful authority)를 지닌 정부나 인물에 의해 공적으로 선포(official declaration)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국민의 대표인 의회의 동의와 비준을 거쳐 합법적인 정부가 선포해야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지 사적인 그룹이 선포해서는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다.

다섯째, 전쟁을 수행할 때는 승리 가능성(feasibility of victory)이 예측되어야 한다. 전쟁은 엄청난 파괴와 희생이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평화와 같은 선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어야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 행위의 정당성(jus in bello, justice in war)

위와 같은 조건이 만족되어 전쟁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전쟁은 전쟁 행위와 내용에 있어서도 최소 3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섯째, 공격은 제한된 대상과 목표물(limited objectives)에 한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사회간접자산을 파괴하고, 민간시설과 국민 생존에 필요한 전력과 상수원과 같은 것을 공격한다면 그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일곱째, 공격은 자국이 당한 피해에 비례해서(proportionate means) 가해져야 하고, 그 이상으로 과도하게 가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덟째, 공격은 비전투원인 민간인들은 엄격히 배제되어야 한다(noncombatants immunity)는 것이다. 즉 전투병들과 관련자들 이외에는 민간인과 어린이들과 부상병이나 포로들은 공격 대상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적 이해와 신학적 주장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들은 전쟁이 이런 요건을 충족시킬 경우에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입장을 계승해왔는데, 그것은 성경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를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이 모든 전쟁을 정죄하지 않고 때로는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식솔들을 구하기 위해 네 왕의 군대를 좇아가 전쟁한 것(창14:124-16)과 전쟁 영웅인 다윗과 사사들을 신약 기자들이 정죄하지 않고 그것을 믿음의 행위로 기술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정)의를 행하기도 하며…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였느니라’"(히 11:33-34). 세례요한은 군인들이 그에게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무기를 버려야 할 것을 명령하지 않았고(눅 3:14), 예수님도 로마 군대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에게 군대를 떠나는 것이 신실한 믿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았다(눅 7:9)는 것이다.

무엇보다 로마서 13장 1-7절은 무력사용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한다. 악인을 징벌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은 위정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칼을 사용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위정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의 사적인 복수를 막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정의, 자유, 안전, 평화, 질서 등의 중요한 가치가 존중되고 보호받도록 하는 일을 위해서는 강제력이 필요하다기에 정당 전쟁론을 옹호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이웃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해악을 당한 상태에 있는 선량한 이웃을 구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무력 사용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칼빈은 만약 시민들이 불의한 세력의 공격을 받다 고통을 받는다면 정부는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의 대행자로서 이 세력의 악행을 제어하고 정의를 수립하기 위해 전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학자 오도나번(Oliver O'Donovan) 교수는 전쟁을 개인적 사랑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의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고 정의를 수호하고 고양해야 할 정부는 직무의 차원에서 대로는 무력을 사용해야만 하는데, 위정자의 이 직무와 책임은 니라 국가 관계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국제간의 정의를 세우는 목적을 위한 경우라면 때로는 전쟁도 불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정당 전쟁의 논리를 갖고서 나라와 자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공격을 당하지 않은 상태지만 상대를 선제적으로 공격하여 예방할 수 있다는 정당하다는 선제타격론이 20세기 후반기에 논란이 된 바 있다. 이 논리에 대한 신학적인 검토와 실제적인 문제는 다음 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자료출처 http://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783


 






정태홍목사의 유튜브채널 https://www.youtube.com/user/rptmini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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