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L, 고신의 소리’ - 교회의 공공성이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를 살린다
KOL, 고신의 소리’ - 교회의 공공성이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를 살린다
‘KOL, 고신의 소리’ - 교회의 공공성이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를 살린다기자명 고신뉴스 KNC 입력 2023.02.04 10:21 조회수 14문장환 목사(진주삼일교회)교회의 공공성(公共性)이란?‘살아나는 교회, 살리는 교회’가 KOL(고신의 소리)의 첫 번째 시리즈의 주제다. 교회가 살아나야 살리는 교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앞선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김하연 목사)라는 글은 첫 번째 주제로 아주 적합하다.코로나 팬데믹으로 정점을 찍었던 교회의 위기는 실상 교회 정체성의 위기였다. 교회가 교회답게 존재하려면 그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교회는 언약공동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공동체,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이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않아야 한다. 이제 두 번째 주제로 교회의 공공성을 다루려고 한다. 앞선 글이 살아나는 교회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 글은 살리는 교회에 중점을 둔다. 앞선 글이 하늘에 속한 영광스러운 교회를 다룬다면, 이 글은 땅에 있는 선한 교회를 다룬다. 교회는 이것도 놓치지 말고 저것도 붙잡아야 한다.21세기에 들어와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공공성’이다. 교육의 공공성, 의료의 공공성, 방송의 공공성 등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모든 분야에서 논의되는 개념이다.공공성(公共性, publicity)은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사회의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이다. 앞의 공(公)은 공식적인(official), 혹은 공적인(public) 이란 의미이고, 뒤의 공(共)은 공유하는(common) 이란 의미다. 그래서 공공성이란 한 개인이나 특정 단체를 뛰어넘어 일반사회의 대표적 기구가 공적 혹은 공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고, 일반사회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성격이다.이 단어를 교회에 적용한 것이 ‘교회의 공공성’인데, 교회(기독교)의 한계를 넘어서 사회나 국가나 시민들과 공유하는 것, 그리고 그들과 맺고 있는 관계와 역할을 일컫는 말이다.비슷한 용어로 ‘공동선(共同善, the common good)’은 모든 사람의 유익이나 이익을 말하는 것으로 사적인 선과 공적인 선의 조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남산은 혼자서 오를 수 있지만 에베레스트산은 함께 올라야 가능한 것처럼, 이 개념은 특정인이나 단체를 배제하지 않고 모두에게 바람직해야 한다는 것이다.‘교회의 공동선’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처럼 교회 담장을 넘어 일반인들의 유익과 이익을 추구해주고 사회나 국가의 선(the good)을 위하여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밀접한 용어는 ‘공적신학,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인데, 기독교의 진리를 공적 언어로 표현하고, 공적 영역으로부터 신학적 통찰을 얻고,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신학적 담론이다.공공신학은 크게 두 과업을 가지는데, 기독교 진리를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그들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고, 또한 공공의 영역에 참여해 기독교적 견해를 제시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신학은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설명하고 설득하여 사회적 변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학이다.유관한 용어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선교가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와 세상을 향한 운동이라는 말이다. 교회는 선교의 도구이고, 교회의 본질과 소명은 선교이다. 교회의 선교 참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샘 같은 사랑 운동에의 참여다.‘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교인들이 선교사로서 교회당 바깥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격려하는 교회다. 그 외에도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용어는 보수적 교회의 공공성의 일면을 오래전부터 대변해 온 말이다. 반면에 참여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등의 용어들은 급진적인 교회가 가지고 있는 공공성의 일면을 대변해왔다.교회의 공공성의 역사인간은 이기심과 이타심이 공존하고, 사익을 추구하면서도 공익을 의식하는 신비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공동체의 연대성에서 개인의 개별성으로 이동하고, 유대성이 허물어지고 고립이 심해지는 경향을 보여 왔다. 계몽주의에 근거를 둔 상대주의, 개인주의, 이기주의, 소비주의로 인해 세상은 끝없이 분열되었다.그 결과, 빈부격차, 차별, 불공정, 자원고갈, 생태계 파괴, 기후변화, 공동체 붕괴, 종교와 문화의 충돌, 인간 소외, 질병 팬데믹 등으로 인류의 생존 가능성에 심각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느냐의 질문에 답하고, 또한 개인과 사회, 사익과 공익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연구해왔다.고대에서 근대까지 세상의 철학은 사익과 공익의 조화를 강조하면서도,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형태를 취하여 왔다.기독교의 전통에서 공공성은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께 기반을 두는데, 하나님의 창조와 다스림의 본래 목적이자 질서가 그것이다. 성경은 공공성을 위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구약성경은 약육강식의 고대 근동 사회에서 이스라엘 공동체 구성원의 안전, 보존, 번영을 위하여 영적, 사회적, 법적, 물질적 차원에서 하나님이 역사(役事)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또한 그것들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사람에게도 확장되는 미래를 조망하고 있다.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것들이 온 세상의 문화와 역사로 확장되는 출발점이 된다고 말하며, 실제로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교부 크리소스톰은 기독교의 가장 완벽한 규칙과 정확한 정의의 최고점은 바로 공동선의 추구라고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개인의 선함도 중요하지만, 도시를 위한 선함의 획득과 보존은 더욱 위대하고 완전하다고 생각하였다.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설립한 예수회는 공동선을 실천하는 것에 집중하였다.누구보다도 교회의 공공성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칼빈인데, 신학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연구하고 실행하였다. 그의 종교개혁 목표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 ‘개인적 영적 공동선’을 누리고, 서로서로 올바른 관계를 맺어 ‘사회적 공동선’을 회복하여 하나님 나라의 공공성을 세우는 것이다.교회는 이것을 구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칼빈은 구별이 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교회의 공동선과 인류의 공동선이라는 신학 패러다임을 창출하였고, 그 관계성을 규정하였고, 또한 그것들을 제네바라는 도시에서 실행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공동선의 개념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공공성을 전반적으로 형성하였다.교회 공공성의 최근 연구는 ‘공공신학’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는데, 1974년 미국의 신학자 마틴 마티가 이 단어를 ‘시민 종교’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마티는 국가적 도덕 가치 체계를 수립하려는 시민 종교와 달리 공적 주제들을 교회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제안하려는 의미에서 공공신학을 제안하였다. 이후에 데이비드 트레이시는 복음을 공공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예를 들면, 그는 인간의 깨어진 현실과 하나님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 십자가라는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가 기독교인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맥스 스택하우스는 기독교적 에토스를 기반으로 공적 분야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 비기독교적인 전통이나 일반 학문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이러한 흐름은 ‘선교적 교회’에 대한 연구로, 혹은 남아공이나 한국 등에서 공공신학이나 교회의 공공성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교회의 공공성의 필요성공공성은 시대적 요청이다. 지금은 교회의 공공성 연구가 필요한 토양이 형성되었고, 긴박하게 요청이 되는 실정이다. 지금 시대는 상대주의, 개인주의, 소비주의라는 풍조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때다. 세상은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마치 하나가 된 것 같고, 사람, 물질, 지식, 심지어 이벤트까지도 공유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점점 더 소원해지고 있다.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자기 욕망을 좇아 전쟁의 신 마르스, 돈의 신 맘몬, 성애의 신 아프로디테를 탐닉한다. 그러는 중에 사람과 사회와 세상은 갈등, 충돌, 붕괴, 왜곡, 고갈, 파괴, 분리, 차별, 소외를 경험하면서, 공영의 미래는 고사하고 과연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느냐 하는 근본적인 의문에 빠졌다.결국 이것은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사회와 세상이 어떻게 하면 공존 공영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우리에게 공공성이라는 주제를 소환한다.공공성이 대두됨으로 갈등 관계로 있었던 이념들이 상당한 타협점을 얻게 되었고, 한계를 지녔던 사상들이 다분히 스스로 보완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익을 공익으로, 개별성을 공동체성으로, 분열성을 연대성으로 그 흐름들을 변경시키는 공공성이지만, 그렇다고 사익이나 개별성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사익과 공익의 조화, 개별성과 공동체성 혹은 연대성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공공성의 요청은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 교육, 문화, 예술, 스포츠, 종교, 기술 등에도 공공성을 위한 연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당연히 교회에도 적용이 되었다. 예를 들면, 보수적 교회의 개인적 신앙과 진보적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가치를 모두 간직하려는 노력이 교회의 공공성이라는 이름으로 요청된다.교회의 공공성은 사상-세계관적 응전이다.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세속화와 다원주의가 그 특징이다. 사회나 문화가 기존 종교의 제도나 상징체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다양한 세계관과 상징체계가 경쟁하면서 공존한다. 당연하게 어떤 세계관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동시에 사람과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도 현저하게 약화 되었고, 종교는 공공영역에서 퇴출이 되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물러나는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 현상이 일어났다. 이제는 교회도 신앙을 사회에 연결 짓는 것보다는 사람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치료요법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을 보인다.공공의 영역에서 교회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고, 게다가 세속화와 국가중심주의는 교회를 공공의 영역에서 밀어내고 있다.그러나 교회는 시작부터 공익적 존재이고, 공공의 이익을 명료화하고 실행하는 것을 지향한다. 하나님은 교회를 특정 사회 안에서 세우셨고, 따라서 교회의 영성은 개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수준까지 나아간다. 더군다나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개인과 대중 사이를 중재하고 연계하는 적절한 제도가 필요한데, 교회는 그 역할을 가장 효율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조직이다,그래서 교회는 사회의 중요한 자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다시 한 번 공공성의 정체를 확인하고 공공의 참여에 대한 의식을 형성해야 한다.교회의 공공성은 교회적으로 필요하다. 1990년 이후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과 사회적 신뢰도가 계속 내림세를 보이고 있는데, 교회 공공성의 약화가 그 주된 원인이라고 종교사회학자들은 진단한다.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얼마만큼 감당하느냐에 따라 교회에 대한 사회의 호불호(好不好)의 흐름이 달라진다. 교회의 공공성 수행 정도가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와 평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그리고 교회의 신뢰도나 평판은 개인이나 개교회 전도의 열심과는 상관없이 기독교 전체의 증가나 감소를 결정하는데, 사회의 현상 혹은 트렌드를 형성한다. 교회의 공공성 수행과 사회적 신뢰도 사이에는 시간적 차이가 있다.마치 나무를 심고 후에 열매를 먹는 것과 같다. 교회의 공공성은 기독교의 산업 인프라와 같아서 한번 이루고 나면 상당 기간 성장과 발전을 가져오고, 한번 실패하고 나면 오랜 기간 쇠퇴를 가져온다.다행히도 기독교 전래 초기부터 한국교회는 공공성을 많이 실천하였다. 교회는 계급주의, 사대주의, 샤머니즘을 타파하고, 나라의 독립, 민족의 자유, 신분 철폐, 성평등, 약자를 향한 박애 등을 실천하였다.그래서 사회적 신뢰를 얻었고,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폭발적 부흥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반세기 전부터 한국교회는 공공성의 수행을 등한시하였다. 외적으로 교회가 절정의 성장을 이룰 때였지만, 공공성에 실패하였다.교회에 만연한 성속(聖俗)의 이분법적 사고방식, 내세주의, 기복주의, 성장주의, 신앙의 사사화(私事化), 개교회주의, 교파주의, 교권주의, 세습, 분쟁, 양극화, 불의에 대한 침묵, 사회적 책임의 부재, 연대의 거부, 소통의 소홀 등으로 공공성 수행에서 낙제하였다.교회는 이기적이고 폐쇄적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고, 사회적 신뢰를 상실한 채 쇠락의 길을 걷는 사회적 현상이 일어났고, 지금은 가속화되는 형편이다. 이제는 다시 한 번 교회 공공성을 회복할 때다. 한국교회는 미래를 향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교회의 공공성은 개혁주의 신학의 놓칠 수 없는 주제다. 한국의 주류 교회가 공공성 연구와 실행의 기회를 상당 기간 잃어버렸지만, 칼빈주의에 기반한 신학을 가졌기에 공공성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칼빈주의의 중심 원칙은 우주론적 특성을 가지는데, 포괄적인 삶의 원리로써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을 교회와 세상에 특히 세상의 공적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다.이 원칙을 신학적으로 계승하고 적용한 아브라함 카이퍼는 모든 삶의 영역들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신학과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삶의 체계로서의 세계관을 주장한다.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시간, 장소, 존재, 영역, 관계에 적용된다. 이 세계관을 좁게는 개혁주의 넓게는 복음주의가 공유하고 있다. 기독교적 관점과 가치를 추구하는 이런 신학은 당연히 세상에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그래서 우리의 신학적 과제는 모든 영역에, 특히 공공의 영역에 기독교적 이해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세상의 요구와 필요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신학적 용어로 번역하고 교회에 소통하여 교회로 세상에 적절하게 반응하게 하는 것이다.교회의 공공성은 성경적 요구다. ‘오직 성경’의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교회의 공공성은 당연히 성경적 근거가 충분하다. 성경에 나타난 공공성은 창조에서부터 ‘우리’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그리고 아담과 하와라는 복수의 인간 모습에서 기원한다.그리고 이 주제는 구약의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에서 본격적으로 출발한다. 12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를 위해서 율법을 준수해야 했다. 율법은 공동체가 개인의 삶에 개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각종 절기와 제사 제도도 사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공적 영역에 속하여 공동체의 거룩한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였다.선지자들의 외침은 공공을 위한 공적 외침이었고, 실제로 공동선을 이루고 공의로운 사회 형성에 공헌하였다. 그리고 이런 공공성은 이스라엘을 넘어서 온 세상으로 확장하는 소망을 가졌다.신약에 들어와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는 본질적으로 공적인 담론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이며, 그 나라를 전하는 것은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혁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교회는 당연히 공공성을 가지고 있다.복음서와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지고 오신 예수님과 그것을 세우고 확장하는 교회를 소개하고, 서신서는 구체적으로 교회가 그 공공성을 어떻게 행사하여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계시록은 그것의 완성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변혁과 새 창조의 주체로서 자세와 전략을 갖추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공공성인데, 성경적 연구와 설교 나아가서 실천이 절실하게 필요한 영역이다.교회의 공공성을 실천하려면!공공성을 향한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사회에서 기독교인은 선한 시민이 되어야 하고, 교회는 선한 기관이 되어야 하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교회 공공성이 성경과 신학과 교회 역사와 전도와 선교에서 얼마나 요긴한 주제인지를 연구하고 공유해야 한다.설교도 공공의 영역에 속한 주제들을 자주 다양하게 다루어야 하고, 교인들이 공공 문제들을 논할 때 성경적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도록 지도하여야 한다.교회는 지역 사회에 참여하고 소통해야 한다. 교회는 단지 교세 증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여 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재정을 투입하고, 교회가 공공의 장소나 공간이 되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그리고 교회들이 협력하여 실행할 때, 공공성은 더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연합기관들도 자기들을 위한 활동들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대사회적인 선행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지역 사회의 건강한 유관 단체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교회 공공성 연구 및 실행을 위한 전문기관을 세워야 한다. 교회들은 자기 교회를 넘어서서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인프라를 만드는 일에 투자해야 한다. 교회의 공공성은 사회의 복잡함과 얽혀서 연구와 실행이 간단하지 않기에, 하나의 교회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총회와 노회 혹은 유관 단체는 전문기관을 세워야 하고, 교회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가장 소중한 사역으로 여기고 여기에 참여해야 한다.공공성의 실천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해야 한다. 자랑하거나 떠벌리면 공공성의 수행과 결과가 미약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시대가 아니라 다음 시대에 열릴 열매를 바라보며 인내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기회와 역량을 교회 공공성에 쏟아붓는다면 다음 세대가 달콤한 열매를 먹을 것이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한다.
자료출처 http://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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