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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진목사 고전교육 시리즈3_기독교적 고전학교, 그 즐거운 상상

안정진목사 고전교육 시리즈3_기독교적 고전학교, 그 즐거운 상상


Worldview Column
고전교육 시리즈3_기독교적 고전학교, 그 즐거운 상상_안정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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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관동역회
2011. 7. 7. 22:09

문법, 논리학, 수사학을 강조
‘고전적’(classical)이라는 말은 고전교육의 ‘구조와 형식’을 의미한다. 미국기독교고전교육연합(ACCS)에 속한 고전학교들은 모든 교육과정에서 다음의 것들을 강조한다. 먼저, 모든 과목에서 3학과(trivium, ‘문법, 논리학, 수사학’)를 강조한다. 사실, ‘고전교육을 한다는 것’은 ‘3학과’를 체득한다는 말이다. 부모는 다양한 환경에서 아이가 ‘3학과’를 체득할 수 있도록 도울 뿐 아니라, 항상 기도해야 한다. ‘배움의 도구’들을 체득하는 것은 일평생을 배움을 위해 준비된 사람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또한, ‘고전교육을 한다는 것’은 ‘고전정신’을 소유함에서 시작된다. 고전정신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과거의 유산을 각성하고, 그것에 감사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중요한 의미에서, ‘감사’는 ‘3학과’의 두 번째 단계인 ‘이해’의 단계보다 먼저 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창조세계를 붙잡고, 감사하지 않을 때 그것은 기독교 교육일 수 없다. 아이가 하나님을 향한 감사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다. ‘감사’는 ‘이해’에 올바른 방향 뿐 아니라, 아이의 삶의 방향에 바른 길을 제시해 준다. 세속 교육에서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homo sapiens)로 정의 되지만, 기독교 교육에서 인간은 철저히 호모 아도란스(homo adorans)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주 앞에 서 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교육을 기독교적이게 할 수 있는 것은 예배의 중심성을 아이의 삶 속에 두는 것 외에는 없다. 아래와 같이, 고전교육이 ‘지식’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지혜’로 나아가지만, ‘문법’(지식)과 ‘논리’(이해) 사이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예배)를 두지 않는다면, 비록 기독교란 이름을 가졌다 할지라도, 또 다른 인본주의적 교육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문법(지식) ▶ 감사(예배) ▶ 논리(이해) ▶ 수사(지혜)

 

배움과 삶을 사랑하도록 강조
둘째로, 배움과 삶을 사랑하며, 학문적인 소명을 펼치도록 강조한다. 두 번째 강조는 교사들을 향한 것이다. 교사들이 가르치는 내용에 열정과 애정이 없다면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교사 스스로가 가르치는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들이 그 과목을 즐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열정으로 가득차고 잘 훈련된 양질의 교사들이 교실 마다 배치되어 있다면 이보다 중요하고 큰 자산은 없을 것이다. 고전학교의 시작은 교사들의 훈련과 준비된 교사들을 확보하는데 있다. 준비된 교사들이 있는 곳에 준비된 학생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배우는 것을 사랑하고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도록 끊임없이 학생들을 격려해야한다. 만일 이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학생은 나머지 학교생활을 그 기초위에 세워 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단지 ‘배움의 도구’들을 얻는데 멈추지 않고, 그것들을 사용하려는 열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면학 분위기를 강조
마지막으로, 모든 목적들이 올바르게 성취, 생산될 수 있는 면학 분위기를 강조한다. 고전학교들은 매우 엄격하고 품위 있는 ‘질서’를 강조한다. 이러한 ‘엄격함과 질서’의 바탕에는 학생들을 향한 ‘공평과 사랑’이 놓여 있다. 학생들을 향한 ‘공평과 사랑’이 중단되지 않을 때, 규율의 엄격함이 올바로 기능되며 유지할 수 있다. 실제로 ‘훈계와 징계’ 없는 ‘공평과 사랑’은 재앙을 불러오게 된다. 질서 없는 혼란한 교실에서 아이를 사랑하고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다. 이런 중심에서, 고전학교는 아이들에게 육체적인 체벌을 사용한다. 물론 한 아이가 징계를 받을 때 부모는 모든 단계에 관여한다. 학교의 위치는 부모를돕는 것이지 결코 대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징계는 부모와 함께 한다. 즉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부모와 의논되고 보고된다는 말이다. 교사는 감시자 혹은 밀고자가 아니라 부모의 보조자로서 기능한다. 이런 태도는 ‘징계와 훈계’에서만 아니라, 학교의 전체 프로그램에 적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와 교사들은 현실적으로 학생들의 삶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난제들을 모두 해결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징계의 주된 목표는 면학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교육
그리스도 중심적 교육은 성경을 중심에 두고 통합된 전체의 부분으로 모든 과목을 가르친다(딤후 3:16-17; 골 1:15-20). 기독교적 고전학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 교육이 그리스도 중심적이기 위해선 세상에 ‘세례’를 주는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 즉 일반 공립학교들이 가르치는 교과목에 ‘기도’로 물을 뿌리고, 성경과목을 개설하는 식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다. 인본주의 교육은 만물의 중심에 ‘인간’을 두지만, 기독교 교육은 그 중심에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둔다. 그러므로 교육에 중립 지대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사실, 모든 진리는 어떤 세계관의 빛 가운데서 이해된다. 이것은 역사, 예술, 수학 등의 모든 과목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빛 안에서 가르쳐 져야 함을 뜻한다. 성경은 이 계시를 가르치는 절대적인 역할을 차지하기 때문에, 기독교 교육에서도 성경은 중심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성경 과목을 세속적인 교과과정에 끼워 넣는다고 해서 결코 기독교 학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홈스쿨 역시 마찬가지다. 참된 기독교 교육을 위해 ‘성경과목, 기독 교사, 기도’와 같은 모든 요소들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독교 교육을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 요소들이 발견되는 곳이면 그 곳이 어디든지 기독교 교육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참된 기독교 교육은 성경적 세계관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학생들에게 성공적으로 침투되고 전수될 것을 요구한다. 더불어, 기독교적 관점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적 교과서를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과 미국의 모든 종류의 공교육의 실패는 ‘인간과 지식’에 관한 잘못된 전제, 곧 인본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전제 위에 학교와 학생을 양육해 가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자기 파괴적인 활동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초가 인본주의적인 것으로 유지된다면, 기독교적 장식물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그 나무를 보아 열매를 알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이처럼,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과 지식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질문은 특정한 세계관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답할 수 없다. 기독교인은 오직 한 가지 방식으로 그 질문에 답할 수밖에 없고, 그 대답은 전체 교육 과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성경적인 기독교인 삶의 모델 제공
둘째로, 성경적인 기독교인의 삶의 분명한 모델을 제공해야 한다(마 22:37-40; 마 5:13-16). 모든 기독교인에게 ‘외식’은 늘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기독교 학교는 학생들이 외식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교사와 직원들 모두에게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구한다. 사실 ‘외식’이 묵인 될 때, 그것은 보다 나쁜 문제로 나아간다. 이런 경우에 통합된 기독교 세계관은 ‘죽은’ 정통이 될 수밖에 없다. 비기독교적인 삶은 비기독교적 가르침으로 나아갈 뿐이다. 부모와 교사 혹은 교직원의 ‘외식’은 학생들의 모든 학습과 삶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삶의 모범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신실한 교사와 직원들의 삶은 학생들 양육하고 훈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교실 속에서 격려와 훈계, 책망과 바르게 함은 그러한 능력 가운데 올바른 기능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발전을 격려
마지막으로, 모든 학생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시작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격려 받아야 한다(마 19:13-15). 사실 중생이 없이는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적 삶의 스타일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은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을 준다 해도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않은 아이는 결코 자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다 심고 물을 주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성장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우리가 거듭나게 될 때 하나님은 각인의 생명 속에서 성장을 일으키신다. 따라서 그 누구도 결코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비록 기독교 교육이라 할지라도 교육이라는 수단을 통해 완전한 인간을 꿈 꿀 수 없는 것이다. 공립학교 교육은 시작부터 교육이야 말로 인간과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이들이 학생을 향한 엄격한 통제와 규율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이러한 교육철학이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교육 환경은 매우 율법적일 수밖에 없으며, 교사의 눈만 피하면 된다는 외식이 자리 잡게 된다. 반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은 교실 안에서 도덕적인 환경을 창조하게 한다. 좋은 가르침은 합리적인 기독교적 지성과 경건한 기독교적 삶에 이바지 할 뿐 아니라, 복음 위에 세워진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고전 15:1-8). 믿음과 회개로 이 복음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사람은 구원받게 될 것이다. 고전학교는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갖지 못하는 모든 아이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러한 관계 속으로 데려가도록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 다음에, 나머지 교육이 제공된다. 만일 아이들이 주님을 알고 있다면, 그 관계를 발전 시켜 가도록 그를 격려하는 것이 학교의 목적인 셈이다.


나가면서: ‘카르페 디엠’?
‘과거와 대화 하는 것’은 고전교육의 심장과 같다. 그러나 맹목적인 과거 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과거의 전통에 집착 할수록 ‘알맹이’는 소홀히 하고, ‘외모’만 치장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개봉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The Dead Poets Society)는 이러한 예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는 1859년에 설립된 명문 고등학교의 새 학기 개강식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학교의 출신의 새 영어 교사인 ‘키팅’ 선생(로빈 윌리암스 역)은 수업 첫 날부터 파격적인 방식으로 수업을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준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키팅’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우리 모두는 벌레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주어진 현재를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이 학교의 현관에 새겨진 라틴어 속에 선명히 제시된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살라). 키팅은 19세기에 살았던 미국 시인 ‘윗맨’(Whitman)의 시를 인용하면서, 인간의 자율성에 기초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 지금 까지 이 영화는 대체로 양질의 교육영화로 호평받아 왔지만, 이 영화 속에 전제된 세계관은 ‘허무주의’가 지배적이다. 키팅은 소년들에게 탁월함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오늘’을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날 니체나 헤밍웨이와 같은 사람들이 품었던 전제인 ‘허무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솔로몬 역시 ‘해 아래’ 존재하는 공허함을 보았고 그것을 경험했지만, 그 경험이 그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으로 이끌었다. 영화 속의 학교는 진정한 고전교육의 유산을 탕진해버린 탕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영화는 내용이 없이 외모와 분위기만 남아 있는 학교에 ‘인간의 자율성’ 혹은 ‘허무주의’와 같은 거짓된 유산이 채워지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소망은 탕자가 유산을 자기 파멸에 사용한 것처럼 되기 쉽다. 역사적으로, 거짓된 소망이 자리 잡은 고전학교들은 결코 오래 가지 못했다. 때문에 기독교적 고전교육 혹은 고전학교를 세우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기초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전의 건물을 완전히 허물고 반석 위에 새 건물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월간<WORLDVIEW>2011년 6월호에서
자료출처 https://m.blog.naver.com/cworldview/30112618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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