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진 목사 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
안정진 목사 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
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기자명 기독교보 입력 2021.03.03 15:07 조회수 12http://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13북덕방안정진 목사(서초동교회)그리스도인들도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이런 관심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문학이 왜 필요하지? 성경만으로는 부족한가? 이 질문은 2세기에 테르툴리아누스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앙과 이성, 교회와 세상, 신학과 인문학이 무관하다고 판단했습니다.과연 인문학은 신앙에 무익하고, 심지어 위험한 것일까요? 왜 우리는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고, 신학뿐 아니라 다양한 사상가들의 책을 읽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인간은 프로그램화된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창 1:27).한 예술 분야의 대가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그의 작품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생각과 마음까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작품을 외면한 채 거장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것이지요.인문학(humanities)은 특정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가치 탐구와 표현활동, 즉 인간에 대한 이야기, 사상, 문화에 대한 폭넓은 표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 대해 탐구는 최고의 거장이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중요한 길이 됩니다. 물론 인간을 탐구한다면서 성경이 제시하는 길이 아닌 길로 가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인문학을 절대화, 우상화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문학은 진리를 찾는 한 도구가 될 수 있고 우리가 인문학을 접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주목도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김용규, IVP)서양문명에는 두 줄기의 큰 강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입니다. 흔히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라고 부릅니다. 서양은 이 두 젖줄이 이룬 자양분을 통해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서양문명의 심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두 강을 수원(水原)부터 하구까지 톺아보아야 합니다. 『신』은 그런 책들 중에서 감히 으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 책은 한 철학자의 오래고 치밀한 지적 노력의 보고(寶庫)로서 지금까지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하나로 모아주고 꿰어서 확실히 아름다운 보배로 만들었습니다. 저자 김용규는 서양문명에 대한 심층 이해를 위해 기독교 신(神)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일관성 있게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열쇠인 셈입니다.그 이유는, 신은 종교적인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곧 사회제도와 전통, 생활규범과 관습, 학문과 문학, 미술과 건축, 음악과 공연 등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서양문명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입니다.1부에서 <하나님은 누구인가> 묻고서는, 2부에서 <하나님은 존재다>, 3부에서 <하나님은 창조주다>. 4부에서 <하나님은 인격적이다>. 5부에서 <하나님은 유일자다>라고 답하면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로서의 기독교의 하나님을 제시합니다. 이를 위해 설득력 있는 자료들, 시, 소설, 회화, 조각, 음악, 역사, 과학, 철학을 가져와 주목할 만한 걸작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대충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닥에서부터 샅샅이 훑어가듯이 서양 문명의 심층을 흩어갑니다.김용규는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한 방법으로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개의 교량을 취합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나 안셀무스가 했던 방식으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불렀던 그것입니다. 기령, 안셀무스는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면서 평생 두 가지 태도를 균형 있게 유지했습니다. 신앙이 공허하지 않도록, 이성이 맹목적이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이 책을 통해서 배우는 유익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즉 하나님 나라와 세계(인간, 사회, 자연)를 이어주는 교량으로서 신앙과 이성 둘 중에 어느 하나도 간과하지 않고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지난 2천 년 간 기독교는 이런 입장을 통해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학문체계를 이루어 왔습니다.김용규에게 인문학은 추상적인 활동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고 느끼고 즐거워하고 아파하는 인간 현실 삶에 대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만큼이나 이 땅의 문제에 귀 기울였습니다. 세상의 소리, 곧 사람의 소리에 귀를 여는 것은 상식적인 일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음성에 온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사람의 소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눅 18:2).존 칼빈의 말대로, “현재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이는.,,. 감히 영광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바르트가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이라 말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때 거기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도 유의미하게 들리도록, 하늘에 닿게 하는 신학이 땅에 뿌리를 내리도록, 왜곡되고 잘 못된 것 속에서 진리를 분별하도록 더 열심히 인문학을 접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이 책은 서양문명이 가져온 해악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테러와 전쟁으로 치닫는 문명의 충돌 등을 해결하는 길이 기독교 공동체에 있다고 대담하게 제시합니다. 이는 지난 2천년의 인류 역사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바로 그 일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김용규에게 기독교는 거대한 용광로와 같습니다. 그 불과 열기 속에서 온갖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새롭고 성숙한 것으로 “재창조된” 것들에 희망을 봅니다. 탈근대의 시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인문학을 끌어안는 것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부족하거나 치우치지 않은 “온전함”을 이루어야 길이라고 말입니다. 요컨대, 인문학은 하나님 안에서 ‘예’가 된다는 말이지요.참고도서『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김용규, IVP이 앙증맞고 작은 책은 기독교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에 대해 저자가 강의 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짜배기 가이드 역할을 해 줄 뿐 아니라, 기독교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볼 수 있도록 큰 안목을 키워줍니다.김용규는 기독교 신학의 본질 뿐 아니라 각 시대마다 새로운 도전을 맞이한 기독교 신학이 어떻게 그 도전에 응전해 왔고, 심지어 그것을 융합하고 종합했는지를 다정하게 정리해서 말해주고, 또한 근세, 근대, 탈근대에 대하여 신본적인 이해를 진지하게 제시합니다.예를 들어, 서양문명을 구축하고 이끌어 왔던 신본주의 가치들의 몰락은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할 때부터 시작되었고, 이후로 고삐 풀린 이성은 과학주의, 계몽주의, 실증주의가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가치들은 인류에게 밝고 무한한 미래를 제시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들의 바람대로 되었을까요?김용규는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신본주의 가치의 몰락이 동시에 인본주의 가치의 몰락을 의미한다는 것을 갈파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현실에서 충돌하는 가치들로부터 회피와 도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극복하여 새로움을 만드는 사람이어야 함을 제시합니다.『고전적 교육 입문』크리스토퍼 A. 페린, 꿈을 이루는 사람들인문학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요? 그냥 오래된 책을 읽으면 될까요? 서양 사람들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방법도 중요하게 생각해서 “리버럴아츠”(Liberal Arts)를 고안해 내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노예들을 위한 기술 및 직업 교육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자유 시민’을 위해 고안한 리더십의 학문이었고, 로마와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중세 대학에서 “7학과” 혹은 “리버럴아츠”라는 이름으로 체계화 되었습니다.흔히 “교양 과목”이라고 번역하기 때문에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핵심은 공부하는 기술(trivium, 3학과)에 대한 것입니다. 그 기술을 익혀서, 일평생 모든 영역에 적용하여 “스스로 배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20세기 존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이 등장하면서 지난 백 년 넘게 고전교육(Classical Education)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졌고, 그 수혜를 입은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천년이상 검정된 것으로서 아직도 미국, 유럽, 심지어 일본의 유수한 교육기관에서 이 전통 가운데 미래의 지도자들을 준비시키고 있습니다.페린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교육을 기독교적으로 회복하여서 그 수월성과 유용함이 어떤 것인지를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제시합니다.자료출처 http://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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