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믿음과 성령의 인침
구원의 믿음과 성령의 인침
김창효
1. 시작하는 글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제시한다. 가인에게서 믿음을 찾지 못한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믿음의 근거는 자기 확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믿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신다. 믿음의 결국인 구원을 판가름하는 믿음이 불확실하다면 신자는 천국 입성을 확신할 수 없다.
그럼 하나님의 인정받은 믿음인지의 여부는 무엇으로 아는가.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바로 인침이다. 성령의 인침은 구원에 대한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해 준다. 성령의 인침에 대하여는 인침의 대상과 시기, 성령침례와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분분하고 이에 따라 인침의 의미와 표식에 관한 의견도 나뉜다. 이에 관한 논쟁을 살펴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인침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2. 인침
2.1. 인침의 용례
어떤 표지나 형상, 문자나 단어로 사물을 인증하였던 인장의 사용은 고대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인장은 법적인 보호와 보증의 역할과 함께 사물의 정체나 동일성을 인증하는 증거물 또는 통치나 행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공적인 역할을 했다. 왕의 인장은 그 인장이 찍힌 문서에 권위를 부여하였다. 고대로부터 인장은 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어서 인장은 신의 보호의 징표로서 간주되었다.1) 인침의 의미를 구분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2.1.1. 불가침성의 의미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고 왕의 어인과 귀인들의 인을 쳐서 봉하였다(단 6:17). 또 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서 무덤을 막은 돌에 인을 쳤다(마 27:66). 요한계시록에는 마귀를 무저갱에 던져서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 동안 가둔다(계 20:1-3)는 내용이 있다.2) 하나님만이 이 인봉을 깨뜨릴 권세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인은 내용물이나 안에 들어 있는 것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사용되었다.
2.1.2. 인증(확증)의 의미
왕의 인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며, 왕의 인을 가진 사람은 왕의 대리자임을 인증한다. 바로가 요셉에게 왕의 인장 반지를 주어 전국을 다스리게 하였다(창 41:42). 이세벨은 아합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왕의 인을 찍어 나봇에게 보냈다(왕상 21:8).3) 인장은 어음이나 결혼 서약서 등의 문서를 법적으로 인증하여 유효하게 하였다(예: 느 10:1의 계약서, 사 29:11의 책).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하여 모금한 돈을 넣은 자루에 자신의 인장을 찍었던 사실을 언급하였는데(롬 15:26-28), 이는 실제로 인장을 찍었다기보다는 신뢰할 만하게 전달했음을 확증하는 의미다.4)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얻은 의의 인(롬 4:11)이라고 기록했다. 이 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얻은 의를 인증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27절의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에서 인침의 의미는 하나님이 인자가 하나님의 공식적이고 진정한 대리자임을 확증했다는 것이다.5) 이처럼 인침은 인증(확인)의 용도로 시행되었다.
2.1.3. 소유권과 보호의 의미
요한계시록 7장 2절과 9장 4절에는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장을 지니고 있으며, 그가 하나님의 종들을 인칠 때까지 해롭게 할 네 천사들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이 인침은 인침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구분하고 마지막 때의 두려운 일들 가운데서 그들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6) 이와 같이 인은 소유권과 그 소유물 보호에 사용되었다.
2.1.4. 성령과 관련된 인침의 의미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22절, 에베소서 1장 13절, 4장 30절에서 성령의 인침을 기록했다. 회너(Harold W. Hoehner)는 에베소서 1장 13절에 삼위일체의 특징이 표현되고 있다고 보면서 “하나님은 인치는 자이고, 그리스도는 인침이 이뤄지는 영역이며, 성령은 인을 치는 도구다.”라고 언급했다.7)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인침으로써 자신의 불가침의 소유로 만들었다. 인침의 의미는 앞의 세 구절에서 조금씩 다르게 쓰였다. 기업의 보증으로서의 성령은 믿는 자가 약속을 받고 구속의 날까지 보전되도록 하는 인이다. 그것은 믿는 자가 구속의 날까지 하나님의 소유임을 보여준다. 이 구절들에서 인침이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볼 때 믿음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인침의 비유적인 용도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바울에게는 ‘칭의를 이룰 뿐만 아니라 인치는 역사를 하는 이는 하나님이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8)
3. 성령의 인침
위에 언급한 성령의 인침과 관련이 있는 세 군데의 구절을 먼저 검토하면서 성령의 인침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3.1. 인침의 주체
인을 치는 주체는 성령이 아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에서 “저가”는 바로 앞 절의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와 연결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믿는 자를 견고케 하고 믿는 자에게 기름을 붓고 믿는 자를 성령으로 인친다. 인침의 주체는 성령이 아니고 하나님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인을 치는 데 사용되는 분이며 바로 그 인이다.
3.2. 성령의 인침에 관한 성경 구절 검토
3.2.1.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이는 21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와 연결된다. “견고케 하시고”와 “기름을 부으신”의 대상은 똑같다. 여기에 사용된 두 개의 분사형은 그 대상이 동일해야 하는데, 그 대상은 “너희와 함께”한 “우리”다. 이는 바울과 고린도후서의 수신자들을 말한다.9) 예수가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 61:1)를 자신에게 적용하였고, 사도행전 10장 38절에도 기록된 바와 같이, 고린도후서 1장 21절의 기름 부음은 성령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기름을 붓는 대상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의 기름 부음의 대상은 사도 바울과 같은 직분자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름부음의 대상은 사도 바울을 포함한 “우리”다. 다음에 이어지는 22절의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시는’ 대상 또한 사도 바울은 물론이고 위에서 열거한 종류의 직분자가 아닌 “우리”다.
여기에서 ‘기름을 붓고’,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느니라’는 결국 한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이 세 가지가 다른 의미를 지니지만 성령을 받아야만 이루어지는 내용임에는 틀림없다. ‘기름을 붓고’로 표현되는 성령의 임함은 성령을 받는 자의 직분적 사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의 증인(행 1:8)이란 측면을 말한다. ‘인치시고’로 나타나는 성령의 임함은 ‘인침’으로써 성령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소유이고, 그 구원의 믿음을 확증 받는 것을 뜻한다. 또 ‘보증으로’ 임하는 성령은 성령을 받는 자에게 천국 입성에 대한 보증물로서의 성격을 가졌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사도와 같은 직분자가 아닌 그리스도인들도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문제는 ‘성령은 믿음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임하는가’ 아니면 ‘믿은 후에 성령을 받게 되는가’이다. 전자의 경우, 구원 받은 다음에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거나 인침을 받거나 보증의 성령을 받기 위해서 애써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성령을 받기 위해 성경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성령 인침의 시기에 관해서는 3.3.에서 다루기로 한다.
3.2.2.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들은 에베소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고 수용할 수도 있었는데, 그것을 수용함으로 믿는 자들이 되었다. 여기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믿어”와 “인치심을 받았으니”의 동시성과 시간적 순차성의 문제다. 즉 믿어서 구원 받은 것과 동시에 인침을 받은 것인가 아니면 믿은 후에 인침을 받는가의 문제다. “믿어”와 “인침을 받았으니”에 해당하는 원문 헬라어는 각각 ‘피스튜산테스’, ‘에스프라기세테’다.
구원의 믿음과 동시에 성령의 인침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측은, 구문론적으로 “믿어”(피스튜산테스)는 주동사인 “인치심을 받았으니”(에스프라기세테)와 동일하거나 동시적인 행동을 나타낸다고 한다.10) 그렇다면 믿는 것과 성령의 인침은 동시에 일어난다.11) 따라서 믿음과 동시에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져서 시간적인 차이가 없게 된다. 또 믿는 자는 별도로 성령의 인침을 받기 위해 할 일이 없게 된다. 이는 성령의 인침이 믿음과 동시에 성령을 받아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성령받기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믿으면 자동적으로 성령이 임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믿음 후에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측, 주로 성령침례 신학을 방어하는 오순절운동 측은 에베소서 1장 13절을 중요한 근거로 삼는다.12) 특히 흠정역의 번역을 근거로 내세운다. 흠정역은 “너희가 믿은 후에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으니”(after that ye believed, ye were sealed with that holy Spirit of promise)라고 하여, 성령의 인침이 믿은 후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구원의 믿음과 동시에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힘을 잃게 된다. 성령의 인침을 받으려면 인침 받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인치는 성령을 약속의 성령이라고 소개한다. 더 정확히는 그 인을 약속의 성령 그 자체라는 의미로 기록한다. “약속의 성령”은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한 그 약속에 적용된다(눅 24:19, 요 14:16; 15:26; 16:13, 행 1:5).13) 이 외에도 성령에 관한 약속은 욜 2:28, 마 3:11, 막 1:8, 눅 11:9-13, 행 1:5-8 등이 있다. 그런데 ‘성령으로 인친다’는 별도의 명백한 약속은 없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약속의 성령”이 성령 침례를 의미하는 성령의 임함이라는 데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침’은 ‘성령의 침례’ 혹은 ‘성령을 받는다’는 의미의 성령의 임함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성령의 인침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임함이 구원의 믿음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는 별도의 사안이므로 다음에 종합적으로 다룬다. 다만 성령의 인침이 성령의 임함의 전체적인 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의 인침과 성령침례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인침은 성령이 임하는 여러 목적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3.2.3.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에베소 사람들은 물건 구입의 증거로서 인을 치는 것에 익숙했다. 에베소는 목재 무역이 활발한 해상 도시였다. 상인들은 목재를 구입한 후에 자기의 소유의 표시로 인장을 찍고 목재를 항구에 띄워두었다가 적절한 시기에 믿을 만한 대리인을 보냈다. 그 대리인은 주인의 인장과 일치하는 목재를 찾아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운반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인이 새겨진 영혼들을 구속의 날에 확인하고 데려갈 것이다.14)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30절의 앞뒤에 밝혀져 있다. 즉 도적질과 더러운 말과 모든 악독과 훼방 등으로 열거된 것이다. “그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보호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에베소서 4장 30절을 성령의 인치심이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 보편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로 삼는 측이 있다. 조직신학자 월부어드(John F. Walvoord)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 까닭이다. 이 구절은 신자가 된 우리 모두가 인치심을 받은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성령을 근심케 말라는 권고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만일 성령의 인치심이 영적인 사람들만을 위한 사건이라면, 성령을 근심케 말라는 권고는 불필요한 것이다. 인치심에 관련된 모든 언급은 이 인치심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근거해서 완료된 행위로 보고 있는 것이다.”15) 그는 또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인치심을 받기 위해 비상한 경험이 필요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인치심을 받기 위해서 기도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16)고 단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도행전 19장(1-7)에 나타나는, 믿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에베소 신자들에 관해서는 적절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구원의 믿음을 가진 자는 자동적으로 성령의 인침을 받는다는 주장은 구원의 믿음 후에 성령을 받는 성경의 사건들에 대해 궁색한 설명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고린도후서 1장 22절과 에베소서 1장 13절에 대한 검토에서 인침이 믿음 후에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한 바와 배치된다. 성령의 인침을 받기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예수가 성령을 구하라고 한 누가복음 11장 9-13절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고 이 말씀을 무익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체험의 무용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한 ‘권능 있는 예수의 증인 곧 체험 있는 증인됨’을 차단하는 것이다.
나중에 성령을 받는 사건이 기록된 사도행전에는 당시의 사도들이 신자들을 위해서 성령을 받도록 별도로 기도했으며, 여기에는 특별한 체험이 수반되었다. 이들은 성령침례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과 명령을 가감 없이 충실히 이행했다. 따라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권고가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당시의 분위기는, 모든 신자는 성령을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며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침을 받기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3.2.4. 소결론
구원의 믿음과 동시에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지는가 혹은 구원의 믿음 후에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지는가의 문제는 주로 에베소서 1장 13절의 해석에 집중되어 있다. 또 이 문제는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의 동시성과 시간적 순차성과 관련된 문제를 검토해야 함을 암시한다.
3.3. 성령의 인침의 시기
인침을 받는 시기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에서 “믿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견이 나뉜다. 또 성령의 인침을 성령침례와 관련시킴으로서 구원과 성령침례의 동시성과 순차성에 대한 상이한 의견들이 나오기도 한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이 에베소서 1장 13절에 대한 흠정역(KJV)의 번역이다. 즉 “In whom ye also [trusted], after that ye heard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 in whom also after that ye believed, ye were sealed with that holy Spirit of promise”(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너희가 믿은 후에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것이 미국표준성경(ASV)에서는 “in whom, having also believed, ye were sealed with that Holy Spirit of promise”(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으니)라고 번역되어, 흠정역이 오역되었음을 입증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측은 “having also believed”(믿어)는 시기가 아닌 원인을 가리킨다고 한다. 즉 ‘믿음’이 원인이 되어 ‘인침’이라는 결과가 나타났는데,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받았을 때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17) 또 이들은 에베소서 4장 30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말라”는 말씀은 모든 신자가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8) 따라서 성령의 인침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위 흠정역의 번역을 옹호하는 측은 이 번역이 에베소서의 수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자적인 해석보다는 ‘설명’을 했다고 주장한다.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인치심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믿음의 다음에 오는 것”19)이라고 하여 구원의 믿음과 성령의 인침을 구별하고 이 두 가지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즉 인침은 믿은 다음에 오는 후행적 사건이다.
이에 반대해서 위 의견은 헬라어 문법을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을 야기한다. 또 사도행전 19장 2절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에서도 ‘믿을 때’의 동사가 성령을 ‘받았느냐’는 주동사 시제와 같다는 주장이 있다. 이 ‘믿을 때’의 동사는 에베소서 1장 13절의 ‘믿어’와 마찬가지로 제1부정과거 분사이다. 이에 관하여 이 동사의 시제가 주동사의 시제와 같다고 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제1부정과거 분사가 의미하는 행위는 주동사의 행위보다 앞서거나 같거나 또는 다음일 수 있다.’(E. de W. Burton, New Testament Moods and Tenses(1898), p. 59).20) 주동사의 행위와 동일한 행위를 표현하는 제1부정과거 분사의 사례는 마 19:27; 27:4, 고전 15:18, 엡 1:9, 20, 히 7:27 등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사도행전 19장 2절의 ‘믿는다’라는 제1부정과거 동사는 동시적인 부정과거이고, 믿을 때에 성령을 받는 것은 바울의 교리라고 한다.21)
또한 “믿어”의 헬라어 동사인 피스튜산테스는 제1부정과거 분사로서 보통 앞선 행동을 표현하지만, 이를 결정짓는 것은 문법적 형태가 아니라 문맥이다. 여기에서의 문맥은 두 개의 동사가 한 사건에 대해서 두개의 측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들을 인친 것은 그들이 믿을 때다.22) 성령이 임하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믿는다’와 ‘인친다’의 두 동사로 표현된다는 것이므로, 성령의 인침이 이뤄지는 시기는 당연히 믿을 때라는 결론에 이른다. 여기서는 문맥이 관건이다.23)
문맥상으로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구원의 믿음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비판하는 측도 마찬가지로 문맥을 근거로 들어서 구원의 믿음 후에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는 바울의 에베소서의 목표는 에베소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1장 3절부터 12절까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원하신 경륜이요 목적이다. 이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이라고 기록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이 같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적용된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했다. 이어 13절에서 이방 사람인 “너희도” 구원의 복음을 믿어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다.24) 즉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침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에베소서의 문맥상에서도 그렇고, 또 13절에 있는 성령의 인침의 과정이 사도행전에서 먼저 믿고 그 다음에 성령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 것과 동일한 순서를 따르고 있으므로, 인침은 믿은 다음이라는 주장의 근거라고 한다.25) 즉 성령의 인침은 먼저 믿은 것에 대한 인증과 보증의 의미를 갖는 것이어서, 13절의 인침은 믿은 후에 이루어진다는 해석은 사도행전의 성령 받는 순서와 일치하므로 성령침례에 관한 성경상의 흐름과 비교해 볼 때에도 옳다는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을 말하는 마가복음 16장 17절 이하의 말씀은 예수 믿는 자에게는 당연히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는 등의 표적이 따름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표적이 없는 신자의 상태를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오늘의 신자들의 현실에 비춰볼 때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와 관련된 성경의 전체적인 약속과 사례와 연관시키면 균형 잡힌 해석이 가능해진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인침의 시기에 관한 논의도 위의 몇 구절만 생각해서는 곤란하고 성령과 관련된 성경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침에 관한 양측의 주장 모두 문맥에 따른 해석을 주장한다. 이는 동사의 시제만으로 해석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 성령의 인침은 성령침례와 부득이하게 연결시켜야 한다.
4. 성령의 인침과 성령침례
4.1. 성령의 인침과 성령침례의 관계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는 성령의 인침과 성령침례는 같은 것인데, 증거와 증언에 관한 문제일 때는 “침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우리의 기업과 하나님의 상속자인 우리에게 주어진 확실성의 문제일 때는 “인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6) 그러나 성령이 임하는 여러 목적을 생각해보면 인침은 그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성령이 임하는 목적은 첫째,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행 1:8, 요 15:26 등). 둘째, 예수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는 것이다(롬 8:16). 셋째, 예수 믿는 자의 믿음을 인증하는 인을 치고 구속의 날까지 보호하는 것이다(엡 1:13, 엡 4:30, 고후 1:22). 넷째, 신앙생활을 돕는 것이다(요 14:26, 롬 8:26, 요일 2:27 등). 성령이 임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예수를 증거하는 것임은 사도행전 1장 4-8절의 성령을 기다리라는 예수의 명령과 요한복음 15장 26절의 예수를 증거하시는 이가 성령이라는 것에 잘 드러난다.
성령의 인침은 이와 같은 여러 목적들 중의 하나이며, 성령의 인침과 성령침례는 동일한 의미의 용어로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침은 성령을 받음으로 곧 성령침례를 통해 이루어진다. 또 구원의 믿음과 성령의 인침의 구별 및 시기의 문제는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의 구별 및 시기의 문제다.
4.2.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
위에서 논의한 ‘믿음’과 ‘인침’의 동시성과 시간적 순차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에 관해서 살펴보려 한다.
4.2.1.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침례
4.2.1.1. 행 2:1-4
가장 먼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120명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사도들을 포함한 제자들로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구원의 믿음을 가진 후에 비로소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다. 만일 이들 중 예수가 승천하는 날에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고 성령을 받은 120명에 포함되었다면, 구원받은 후 최소 10일 후에 성령을 받은 셈이다. 물론 나머지 제자들 중에는 구원 받은 후 2-3년이 지난 후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이와 같이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에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다. 구원의 믿음이 먼저 있은 후 성령침례가 뒤따른다.
4.2.1.2. 행 8:4-24
빌립의 전도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물로 침례를 받았다(행 8:12). 침례는 구원 받은 신자가 받는다는 것에 관하여 이론의 여지가 없다. 사마리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이 사마리아 신자들도 성령을 받도록 안수했다. 그때까지 사마리아 신자들 가운데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전혀 없었다(행 8:16). 이에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이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했다(행 8:17).
이 사건은 구원의 믿음을 가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즉시 성령이 임하지 않았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도착하여 안수할 때까지 시간이 흐른 다음에 성령이 임했음을 보여준다. 구원의 믿음을 가짐과 동시에 성령이 임한다면 굳이 사도들이 먼 길을 가서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이들이 침례를 받은 것은 이미 구원의 믿음이 있는 자들임을 말해준다. 이 사건에서도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는 구별되며, 시간적인 격차를 두고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4.2.1.3. 행 19:1-7
바울이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과 나눈 대화인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에서 이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할 정도로 성령에 관한 지식이 없었다. 또 요한의 침례만 받았을 뿐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에 관하여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은 이 ‘에베소 제자들’은 사도행전 19장 13절 이하에 나타난 ‘예수를 빙자하여 악귀를 쫓다가 악귀에게 당하여 도망한’ 어떤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믿음이 없는 사람들로 판단하여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27) 바울이 예수 이름으로 주는 침례를 설명한 다음에 바로 침례를 주는 것을 볼 때에, 이들은 바울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이 확실하다. 또 성경이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만난 사람들을 지칭할 때 ‘어떤 제자들’이라고 한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던의 주장처럼 이들이 예수를 믿은 제자들이 아니라 침례 요한의 제자이거나 사이비 제자라면,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성령침례 여부를 질문한 것이다.
문제의 초점은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의 동시성과 순차성이다. 바울이 “어떤 제자들”에게 구원받은 자에게 주는 침례를 준 다음에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하였으므로 구원의 믿음 다음에 성령침례가 이루어졌다. 또 사도행전 19장 2절의 바울의 질문에서 “너희가 믿을 때에”가 흠정역(KJV)에는 “너희가 믿은 다음에”(since ye believed)로 번역되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이 사건에서도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는 구별되며 시간적 순차성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2.1.4. 행 10:44-48
구원의 믿음 다음에 성령침례라는 시간적 순차성이 고넬료 일가와 친구들의 성령침례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여부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위 두 가지의 성령침례 사건에서처럼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 사이에 시간적 차이를 분명하게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행 11:14)한 것과 이들이 성령 받기 전후 상황을 볼 때에,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전에는 구원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침례를 받았다. 이 사건은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측에는 좋은 근거가 될 수 있지만, 구원의 믿음 후에 성령침례가 있다고 주장하는 측에는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령의 인침은 구원의 믿음에 대한 인증의 의미와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을 표시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고넬료 등이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이 임한 것은 베드로의 설교들 듣는 중에 이들에게 구원의 믿음이 생겨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구원받지 못하여 하나님의 소유가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인을 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성령침례의 세 가지 사건과 성령의 인침의 의미를 되새겨 볼 때, 고넬료 등이 받은 성령침례도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고넬료 등은 설교를 듣는 중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 후에 짧은 시간적 차이가 있는 후에 성령을 받은 것이다. 이 역시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는 시간적 순차성을 가진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4.2.2.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침례의 표식과 인침의 표식
위에서 살펴본 4가지 성령침례 사건 중에서 사도행전 8장 4절 이하의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령침례를 제외하고는 공통적으로 성령이 임할 때에 방언이 나타난다. 사도행전 8장 17-18절에서 시몬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성령이 임함을 인지하고 성령 받게 하는 권능을 매수하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이 상황을 볼 때에 성령이 임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표식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부여한다는 사도행전 1장 8절, 성령이 나타남은 9가지 은사로 표현된다는 고린도전서 12장 7-11절,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 있다는 마가복음 16장 17-18절, 위의 성령침례 사건이 나타난 사도행전 2장 1-4절, 10장 44-48절, 19장 1-7절을 종합해 볼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예언과 방언이고 그 중에 방언은 모든 경우에 나타났다. 또 방언은 예언과 더불어 성령이 임한 표식으로서 객관적이고 즉각적인 인식이 가능하다. 다른 은사들도 성령이 임하는 증거가 될 수는 있지만 즉시 또는 객관적인 확인이 어렵다. 위 세 가지 성령침례 사건의 사례와 일치하는 성령침례의 표식으로서 방언이 사도행전 8장에도 나타났고 시몬이 이를 인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성령침례의 표식으로 방언을 들 수 있는데, 성령침례의 표식은 곧 성령의 인침의 표식도 된다. 물론 성령의 인침의 표식으로서 성령의 열매를 드는 자들도 있다. 곧 성령이 함께 한다는 유일한 증거를 성령의 열매로 본다.28) 그러나 이는 위의 검토에서 본 바와 같이 성령이 임할 때 즉시 알 수 있는 객관적인 표식과 배치된다. 또 성령의 열매는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침례의 증거가 되는 사례가 없으므로 합당하지 않다.
분별되지 않는 인침은 인침의 특성과 목적에 반한다. 그런 인침은 소용이 없고 부적절하며 무의미하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 11:15)와 같이, 베드로가 성령이 임한 현상을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 성령이 임할 때와 고넬료 일가와 친구들에게 임할 때의 공통적이고 분별가능한 표식이 있었기 때문이다.29) 고넬료 등에게 성령이 임하는 표식이 나타남으로써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베드로가 이를 인식하였음이 사도행전 10장 45-46절에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임’을 들었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신 것을 인지하였음이 분명하다. 성령이 임할 때 곧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질 때 베드로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임함의 분별 기준으로 삼은 표식을 무시하고 다른 기준으로 성령의 인침의 표식을 삼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처음 체험과 이방인 고넬료 등의 체험이 동일성을 갖는 점에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함을 알고 놀랐다. 이들은 성령의 인침 곧 성령침례 여부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방언이었다.
4.2.3.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 및 성령의 인침의 시간적 순차성
사도행전 2장 37-38절은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의 순서를 말해주며, 이러한 순서와 시간적 순차성은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의 성령침례 사건에서 잘 나타난다. 성령의 인침은 성령침례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성령의 인침은 구원의 믿음 후에 이루어진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믿어’와 ‘성령으로 인침’은 시간적 순차성이 있다. 즉 구원의 믿음이 있어야 성령의 인침을 받을 수 있다.
4.3. 성령의 인침의 의미와 중요성
성령의 인침은 신자가 가진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합격 판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침을 받은 자는 구원의 확신을 더 분명하게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구원의 믿음을 소유한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침은 구원의 믿음 다음에 별도로 이뤄진다. 성령의 인침은 믿음의 검증이다. 하나님이 열납하는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성령의 인침으로 합격증을 교부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성령의 인침은 하나님의 소유권과 보호를 나타낸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인이 찍혔다. 따라서 인침 받은 신자는 구속의 날까지 보전된다(엡 4:30).
성령의 인침은 약속의 성령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의 인침을 받는 자는 약속의 성취를 체험한다. 왕의 인이 찍힌 것은 사람들 가운데서 귀하게 생각되며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성령의 인은 만왕의 왕의 인이므로 인침 받은 신자는 천사가 수종을 드는 귀한 신분이 된다.
성령의 인침은 체험을 제공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약속의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때까지는 예루살렘에 머무르라고 한 것은 성령이 임하여 충만한 체험과 권능을 소유하는 체험을 주고자 함이다. 이들은 이 체험을 함으로써, 예수가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라고 한 유익을 소유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것은 예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다. 예수가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성령을 구하라, 찾으라’(눅 11:9-13)는 명령을 내렸으므로,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진 후에 성령을 이미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성령의 인침 곧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예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며 사람의 판단보다 예수의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다.
5. 맺는 말
각자의 믿음의 진위 여부에 따라 가인과 아벨처럼 뚜렷하게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스스로 만족한 믿음으로는 마지막 날에 담대히 설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믿음의 근거는 만족이나 신념이 아니다. 하나님이 합격 도장을 찍으셔야 한다. 이 도장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인침, 곧 성령을 받는 것이다. 성령을 확실하게 받은 증거가 있어야 성령의 인침을 받은 것이다.
인침에 관한 바른 이해는 체험 있는 신앙을 낳고 관념적 신앙에서 벗어나게 한다. 성령의 인침으로 말미암아 확신 가운데 하나님이 보증하시고 보호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이는 우선적으로 구원의 믿음과 성령의 인침에 시간적 순차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가능하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는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침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신자는 성령이 임하도록 누가복음 11장 9-13절과 사도행전 2장 37-38절에 나온 바와 같이 성령을 구하는 기도와 간구를 해야 한다.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성령도 임한다고 믿는 신자들은 별도로 성령이 임하기를 구하지 않게 될 것인데, 그 결과는 성경에 약속된 성령이 주시는 체험을 경험하지 못하여, 성령의 인침도 받지 못하게 된다.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약속을 받은 자다. 그러므로 약속을 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으로 보증을 받아야 한다. 성령 받은 자는 자신의 믿음이 합격되었다는 것과 천국에 들어간다는 보증을 받은 것이다.
위 세 가지의 성령의 인침과 관련된 구절에서 보듯, 성령 인침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구원의 믿음을 인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임과 보호를 인침으로 나타내는 것과 구속의 날까지 보존하는 것도 구원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와 인증과 보호와 보존의 의미를 갖는 성령의 인침을 받을 수 없다. 신자는 성령이 임하여 인을 친 것이 구원의 믿음에 대한 합격의 표시임을 명심해야 한다.
각주
1) Gerhard Kittel, 『신약성서 신학사전: 킷텔 단권신약 원어 신학사전』, 번역위원회 역(서울 :요단출판사, 1986), pp. 1252-53.
2) Colin Brown,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Co., 1992), p. 499.
3) Ibid, p. 497.
4) Gerhard Kittel, op. cit., p. 1254.
5) Colin Brown, op. cit., p. 499.
6) Gerhard Kittel, op. cit., p. 1255.
7) Harold W. Hoehner, “Ephesians,”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by John F. Walvoord) Ⅱ(Wheaton: SP Publications, Inc., 1985), p. 619.
8) 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eoffrey W. Bromiley, D. Litt translated(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3), pp. 949-50.
9) Charles Hodge, 『고린도후서』 박상훈 역(서울: 아가페출판사, 1986), p. 38.
10)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Grand Rapids:Eerdmans, 1984), p. 265.
11) Eldon Woodcock, “The Seal of the Holy Spirit,” Bibliotheca Sacra. 155(April-June 1998): 158.
12) James D. G. Dunn, Baptism in the Holy Spirit(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0), p. 158.
13) Donald Campbell, Bible knowledge commentary v.26, 『두란노 강해 주석시리즈: 갈라디아서,골로새서,빌립보서,에베소서』(서울: 두란노서원, 1983), p. 90.
14) F. E. Marsh, Emblems of the Holy Spirit(Grand Rapids: Kregel Publications, 1957), pp. 32-33.
15) John F. Walvoord, 『성령』 이동원 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3), p. 210.
16) Ibid., p. 211.
17) Ibid., p. 210.
18) Ibid.
19) D. Martyn Lloyd Jones, Joy Unspeakable: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성령세례』 정원태 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p. 144.
20) Dunn, op. cit., p. 87.
21) Ibid.
22) Ibid., p. 159.
23) Ibid.
24) D. Martyn Lloyd Jones, op. cit., p. 147.
25) Ibid., p. 149.
26) D. Martyn Lloyd Jones, The Baptism and Gifts of the Spirit(Grand Rapids: Baker Books, 1994), p. 312.
27) Dunn, op. cit., p. 85.
28) Charles Hodge, op. cit., p. 40.
29) Donald T. Williams, 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p. 195.
김창효
1. 시작하는 글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제시한다. 가인에게서 믿음을 찾지 못한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믿음의 근거는 자기 확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믿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신다. 믿음의 결국인 구원을 판가름하는 믿음이 불확실하다면 신자는 천국 입성을 확신할 수 없다.
그럼 하나님의 인정받은 믿음인지의 여부는 무엇으로 아는가.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바로 인침이다. 성령의 인침은 구원에 대한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해 준다. 성령의 인침에 대하여는 인침의 대상과 시기, 성령침례와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분분하고 이에 따라 인침의 의미와 표식에 관한 의견도 나뉜다. 이에 관한 논쟁을 살펴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인침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2. 인침
2.1. 인침의 용례
어떤 표지나 형상, 문자나 단어로 사물을 인증하였던 인장의 사용은 고대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인장은 법적인 보호와 보증의 역할과 함께 사물의 정체나 동일성을 인증하는 증거물 또는 통치나 행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공적인 역할을 했다. 왕의 인장은 그 인장이 찍힌 문서에 권위를 부여하였다. 고대로부터 인장은 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어서 인장은 신의 보호의 징표로서 간주되었다.1) 인침의 의미를 구분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2.1.1. 불가침성의 의미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고 왕의 어인과 귀인들의 인을 쳐서 봉하였다(단 6:17). 또 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서 무덤을 막은 돌에 인을 쳤다(마 27:66). 요한계시록에는 마귀를 무저갱에 던져서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 동안 가둔다(계 20:1-3)는 내용이 있다.2) 하나님만이 이 인봉을 깨뜨릴 권세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인은 내용물이나 안에 들어 있는 것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사용되었다.
2.1.2. 인증(확증)의 의미
왕의 인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며, 왕의 인을 가진 사람은 왕의 대리자임을 인증한다. 바로가 요셉에게 왕의 인장 반지를 주어 전국을 다스리게 하였다(창 41:42). 이세벨은 아합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왕의 인을 찍어 나봇에게 보냈다(왕상 21:8).3) 인장은 어음이나 결혼 서약서 등의 문서를 법적으로 인증하여 유효하게 하였다(예: 느 10:1의 계약서, 사 29:11의 책).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하여 모금한 돈을 넣은 자루에 자신의 인장을 찍었던 사실을 언급하였는데(롬 15:26-28), 이는 실제로 인장을 찍었다기보다는 신뢰할 만하게 전달했음을 확증하는 의미다.4)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얻은 의의 인(롬 4:11)이라고 기록했다. 이 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얻은 의를 인증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27절의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에서 인침의 의미는 하나님이 인자가 하나님의 공식적이고 진정한 대리자임을 확증했다는 것이다.5) 이처럼 인침은 인증(확인)의 용도로 시행되었다.
2.1.3. 소유권과 보호의 의미
요한계시록 7장 2절과 9장 4절에는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장을 지니고 있으며, 그가 하나님의 종들을 인칠 때까지 해롭게 할 네 천사들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이 인침은 인침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구분하고 마지막 때의 두려운 일들 가운데서 그들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6) 이와 같이 인은 소유권과 그 소유물 보호에 사용되었다.
2.1.4. 성령과 관련된 인침의 의미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22절, 에베소서 1장 13절, 4장 30절에서 성령의 인침을 기록했다. 회너(Harold W. Hoehner)는 에베소서 1장 13절에 삼위일체의 특징이 표현되고 있다고 보면서 “하나님은 인치는 자이고, 그리스도는 인침이 이뤄지는 영역이며, 성령은 인을 치는 도구다.”라고 언급했다.7)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인침으로써 자신의 불가침의 소유로 만들었다. 인침의 의미는 앞의 세 구절에서 조금씩 다르게 쓰였다. 기업의 보증으로서의 성령은 믿는 자가 약속을 받고 구속의 날까지 보전되도록 하는 인이다. 그것은 믿는 자가 구속의 날까지 하나님의 소유임을 보여준다. 이 구절들에서 인침이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볼 때 믿음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인침의 비유적인 용도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바울에게는 ‘칭의를 이룰 뿐만 아니라 인치는 역사를 하는 이는 하나님이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8)
3. 성령의 인침
위에 언급한 성령의 인침과 관련이 있는 세 군데의 구절을 먼저 검토하면서 성령의 인침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3.1. 인침의 주체
인을 치는 주체는 성령이 아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에서 “저가”는 바로 앞 절의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와 연결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믿는 자를 견고케 하고 믿는 자에게 기름을 붓고 믿는 자를 성령으로 인친다. 인침의 주체는 성령이 아니고 하나님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인을 치는 데 사용되는 분이며 바로 그 인이다.
3.2. 성령의 인침에 관한 성경 구절 검토
3.2.1.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이는 21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와 연결된다. “견고케 하시고”와 “기름을 부으신”의 대상은 똑같다. 여기에 사용된 두 개의 분사형은 그 대상이 동일해야 하는데, 그 대상은 “너희와 함께”한 “우리”다. 이는 바울과 고린도후서의 수신자들을 말한다.9) 예수가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 61:1)를 자신에게 적용하였고, 사도행전 10장 38절에도 기록된 바와 같이, 고린도후서 1장 21절의 기름 부음은 성령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기름을 붓는 대상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의 기름 부음의 대상은 사도 바울과 같은 직분자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름부음의 대상은 사도 바울을 포함한 “우리”다. 다음에 이어지는 22절의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시는’ 대상 또한 사도 바울은 물론이고 위에서 열거한 종류의 직분자가 아닌 “우리”다.
여기에서 ‘기름을 붓고’,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느니라’는 결국 한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이 세 가지가 다른 의미를 지니지만 성령을 받아야만 이루어지는 내용임에는 틀림없다. ‘기름을 붓고’로 표현되는 성령의 임함은 성령을 받는 자의 직분적 사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의 증인(행 1:8)이란 측면을 말한다. ‘인치시고’로 나타나는 성령의 임함은 ‘인침’으로써 성령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소유이고, 그 구원의 믿음을 확증 받는 것을 뜻한다. 또 ‘보증으로’ 임하는 성령은 성령을 받는 자에게 천국 입성에 대한 보증물로서의 성격을 가졌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사도와 같은 직분자가 아닌 그리스도인들도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문제는 ‘성령은 믿음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임하는가’ 아니면 ‘믿은 후에 성령을 받게 되는가’이다. 전자의 경우, 구원 받은 다음에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거나 인침을 받거나 보증의 성령을 받기 위해서 애써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성령을 받기 위해 성경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성령 인침의 시기에 관해서는 3.3.에서 다루기로 한다.
3.2.2.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들은 에베소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고 수용할 수도 있었는데, 그것을 수용함으로 믿는 자들이 되었다. 여기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믿어”와 “인치심을 받았으니”의 동시성과 시간적 순차성의 문제다. 즉 믿어서 구원 받은 것과 동시에 인침을 받은 것인가 아니면 믿은 후에 인침을 받는가의 문제다. “믿어”와 “인침을 받았으니”에 해당하는 원문 헬라어는 각각 ‘피스튜산테스’, ‘에스프라기세테’다.
구원의 믿음과 동시에 성령의 인침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측은, 구문론적으로 “믿어”(피스튜산테스)는 주동사인 “인치심을 받았으니”(에스프라기세테)와 동일하거나 동시적인 행동을 나타낸다고 한다.10) 그렇다면 믿는 것과 성령의 인침은 동시에 일어난다.11) 따라서 믿음과 동시에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져서 시간적인 차이가 없게 된다. 또 믿는 자는 별도로 성령의 인침을 받기 위해 할 일이 없게 된다. 이는 성령의 인침이 믿음과 동시에 성령을 받아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성령받기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믿으면 자동적으로 성령이 임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믿음 후에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측, 주로 성령침례 신학을 방어하는 오순절운동 측은 에베소서 1장 13절을 중요한 근거로 삼는다.12) 특히 흠정역의 번역을 근거로 내세운다. 흠정역은 “너희가 믿은 후에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으니”(after that ye believed, ye were sealed with that holy Spirit of promise)라고 하여, 성령의 인침이 믿은 후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구원의 믿음과 동시에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힘을 잃게 된다. 성령의 인침을 받으려면 인침 받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인치는 성령을 약속의 성령이라고 소개한다. 더 정확히는 그 인을 약속의 성령 그 자체라는 의미로 기록한다. “약속의 성령”은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한 그 약속에 적용된다(눅 24:19, 요 14:16; 15:26; 16:13, 행 1:5).13) 이 외에도 성령에 관한 약속은 욜 2:28, 마 3:11, 막 1:8, 눅 11:9-13, 행 1:5-8 등이 있다. 그런데 ‘성령으로 인친다’는 별도의 명백한 약속은 없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약속의 성령”이 성령 침례를 의미하는 성령의 임함이라는 데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침’은 ‘성령의 침례’ 혹은 ‘성령을 받는다’는 의미의 성령의 임함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성령의 인침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임함이 구원의 믿음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는 별도의 사안이므로 다음에 종합적으로 다룬다. 다만 성령의 인침이 성령의 임함의 전체적인 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의 인침과 성령침례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인침은 성령이 임하는 여러 목적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3.2.3.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에베소 사람들은 물건 구입의 증거로서 인을 치는 것에 익숙했다. 에베소는 목재 무역이 활발한 해상 도시였다. 상인들은 목재를 구입한 후에 자기의 소유의 표시로 인장을 찍고 목재를 항구에 띄워두었다가 적절한 시기에 믿을 만한 대리인을 보냈다. 그 대리인은 주인의 인장과 일치하는 목재를 찾아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운반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인이 새겨진 영혼들을 구속의 날에 확인하고 데려갈 것이다.14)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30절의 앞뒤에 밝혀져 있다. 즉 도적질과 더러운 말과 모든 악독과 훼방 등으로 열거된 것이다. “그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보호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에베소서 4장 30절을 성령의 인치심이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 보편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로 삼는 측이 있다. 조직신학자 월부어드(John F. Walvoord)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 까닭이다. 이 구절은 신자가 된 우리 모두가 인치심을 받은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성령을 근심케 말라는 권고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만일 성령의 인치심이 영적인 사람들만을 위한 사건이라면, 성령을 근심케 말라는 권고는 불필요한 것이다. 인치심에 관련된 모든 언급은 이 인치심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근거해서 완료된 행위로 보고 있는 것이다.”15) 그는 또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인치심을 받기 위해 비상한 경험이 필요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인치심을 받기 위해서 기도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16)고 단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도행전 19장(1-7)에 나타나는, 믿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에베소 신자들에 관해서는 적절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구원의 믿음을 가진 자는 자동적으로 성령의 인침을 받는다는 주장은 구원의 믿음 후에 성령을 받는 성경의 사건들에 대해 궁색한 설명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고린도후서 1장 22절과 에베소서 1장 13절에 대한 검토에서 인침이 믿음 후에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한 바와 배치된다. 성령의 인침을 받기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예수가 성령을 구하라고 한 누가복음 11장 9-13절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고 이 말씀을 무익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체험의 무용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한 ‘권능 있는 예수의 증인 곧 체험 있는 증인됨’을 차단하는 것이다.
나중에 성령을 받는 사건이 기록된 사도행전에는 당시의 사도들이 신자들을 위해서 성령을 받도록 별도로 기도했으며, 여기에는 특별한 체험이 수반되었다. 이들은 성령침례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과 명령을 가감 없이 충실히 이행했다. 따라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권고가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당시의 분위기는, 모든 신자는 성령을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며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침을 받기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3.2.4. 소결론
구원의 믿음과 동시에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지는가 혹은 구원의 믿음 후에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지는가의 문제는 주로 에베소서 1장 13절의 해석에 집중되어 있다. 또 이 문제는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의 동시성과 시간적 순차성과 관련된 문제를 검토해야 함을 암시한다.
3.3. 성령의 인침의 시기
인침을 받는 시기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에서 “믿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견이 나뉜다. 또 성령의 인침을 성령침례와 관련시킴으로서 구원과 성령침례의 동시성과 순차성에 대한 상이한 의견들이 나오기도 한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이 에베소서 1장 13절에 대한 흠정역(KJV)의 번역이다. 즉 “In whom ye also [trusted], after that ye heard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 in whom also after that ye believed, ye were sealed with that holy Spirit of promise”(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너희가 믿은 후에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것이 미국표준성경(ASV)에서는 “in whom, having also believed, ye were sealed with that Holy Spirit of promise”(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으니)라고 번역되어, 흠정역이 오역되었음을 입증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측은 “having also believed”(믿어)는 시기가 아닌 원인을 가리킨다고 한다. 즉 ‘믿음’이 원인이 되어 ‘인침’이라는 결과가 나타났는데,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받았을 때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17) 또 이들은 에베소서 4장 30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말라”는 말씀은 모든 신자가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8) 따라서 성령의 인침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위 흠정역의 번역을 옹호하는 측은 이 번역이 에베소서의 수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자적인 해석보다는 ‘설명’을 했다고 주장한다.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인치심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믿음의 다음에 오는 것”19)이라고 하여 구원의 믿음과 성령의 인침을 구별하고 이 두 가지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즉 인침은 믿은 다음에 오는 후행적 사건이다.
이에 반대해서 위 의견은 헬라어 문법을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을 야기한다. 또 사도행전 19장 2절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에서도 ‘믿을 때’의 동사가 성령을 ‘받았느냐’는 주동사 시제와 같다는 주장이 있다. 이 ‘믿을 때’의 동사는 에베소서 1장 13절의 ‘믿어’와 마찬가지로 제1부정과거 분사이다. 이에 관하여 이 동사의 시제가 주동사의 시제와 같다고 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제1부정과거 분사가 의미하는 행위는 주동사의 행위보다 앞서거나 같거나 또는 다음일 수 있다.’(E. de W. Burton, New Testament Moods and Tenses(1898), p. 59).20) 주동사의 행위와 동일한 행위를 표현하는 제1부정과거 분사의 사례는 마 19:27; 27:4, 고전 15:18, 엡 1:9, 20, 히 7:27 등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사도행전 19장 2절의 ‘믿는다’라는 제1부정과거 동사는 동시적인 부정과거이고, 믿을 때에 성령을 받는 것은 바울의 교리라고 한다.21)
또한 “믿어”의 헬라어 동사인 피스튜산테스는 제1부정과거 분사로서 보통 앞선 행동을 표현하지만, 이를 결정짓는 것은 문법적 형태가 아니라 문맥이다. 여기에서의 문맥은 두 개의 동사가 한 사건에 대해서 두개의 측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들을 인친 것은 그들이 믿을 때다.22) 성령이 임하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믿는다’와 ‘인친다’의 두 동사로 표현된다는 것이므로, 성령의 인침이 이뤄지는 시기는 당연히 믿을 때라는 결론에 이른다. 여기서는 문맥이 관건이다.23)
문맥상으로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구원의 믿음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비판하는 측도 마찬가지로 문맥을 근거로 들어서 구원의 믿음 후에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는 바울의 에베소서의 목표는 에베소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1장 3절부터 12절까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원하신 경륜이요 목적이다. 이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이라고 기록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이 같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적용된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했다. 이어 13절에서 이방 사람인 “너희도” 구원의 복음을 믿어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다.24) 즉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침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에베소서의 문맥상에서도 그렇고, 또 13절에 있는 성령의 인침의 과정이 사도행전에서 먼저 믿고 그 다음에 성령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 것과 동일한 순서를 따르고 있으므로, 인침은 믿은 다음이라는 주장의 근거라고 한다.25) 즉 성령의 인침은 먼저 믿은 것에 대한 인증과 보증의 의미를 갖는 것이어서, 13절의 인침은 믿은 후에 이루어진다는 해석은 사도행전의 성령 받는 순서와 일치하므로 성령침례에 관한 성경상의 흐름과 비교해 볼 때에도 옳다는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을 말하는 마가복음 16장 17절 이하의 말씀은 예수 믿는 자에게는 당연히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는 등의 표적이 따름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표적이 없는 신자의 상태를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오늘의 신자들의 현실에 비춰볼 때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와 관련된 성경의 전체적인 약속과 사례와 연관시키면 균형 잡힌 해석이 가능해진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인침의 시기에 관한 논의도 위의 몇 구절만 생각해서는 곤란하고 성령과 관련된 성경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침에 관한 양측의 주장 모두 문맥에 따른 해석을 주장한다. 이는 동사의 시제만으로 해석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 성령의 인침은 성령침례와 부득이하게 연결시켜야 한다.
4. 성령의 인침과 성령침례
4.1. 성령의 인침과 성령침례의 관계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는 성령의 인침과 성령침례는 같은 것인데, 증거와 증언에 관한 문제일 때는 “침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우리의 기업과 하나님의 상속자인 우리에게 주어진 확실성의 문제일 때는 “인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6) 그러나 성령이 임하는 여러 목적을 생각해보면 인침은 그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성령이 임하는 목적은 첫째,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행 1:8, 요 15:26 등). 둘째, 예수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는 것이다(롬 8:16). 셋째, 예수 믿는 자의 믿음을 인증하는 인을 치고 구속의 날까지 보호하는 것이다(엡 1:13, 엡 4:30, 고후 1:22). 넷째, 신앙생활을 돕는 것이다(요 14:26, 롬 8:26, 요일 2:27 등). 성령이 임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예수를 증거하는 것임은 사도행전 1장 4-8절의 성령을 기다리라는 예수의 명령과 요한복음 15장 26절의 예수를 증거하시는 이가 성령이라는 것에 잘 드러난다.
성령의 인침은 이와 같은 여러 목적들 중의 하나이며, 성령의 인침과 성령침례는 동일한 의미의 용어로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침은 성령을 받음으로 곧 성령침례를 통해 이루어진다. 또 구원의 믿음과 성령의 인침의 구별 및 시기의 문제는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의 구별 및 시기의 문제다.
4.2.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
위에서 논의한 ‘믿음’과 ‘인침’의 동시성과 시간적 순차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에 관해서 살펴보려 한다.
4.2.1.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침례
4.2.1.1. 행 2:1-4
가장 먼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120명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사도들을 포함한 제자들로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구원의 믿음을 가진 후에 비로소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다. 만일 이들 중 예수가 승천하는 날에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고 성령을 받은 120명에 포함되었다면, 구원받은 후 최소 10일 후에 성령을 받은 셈이다. 물론 나머지 제자들 중에는 구원 받은 후 2-3년이 지난 후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이와 같이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에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다. 구원의 믿음이 먼저 있은 후 성령침례가 뒤따른다.
4.2.1.2. 행 8:4-24
빌립의 전도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물로 침례를 받았다(행 8:12). 침례는 구원 받은 신자가 받는다는 것에 관하여 이론의 여지가 없다. 사마리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이 사마리아 신자들도 성령을 받도록 안수했다. 그때까지 사마리아 신자들 가운데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전혀 없었다(행 8:16). 이에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이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했다(행 8:17).
이 사건은 구원의 믿음을 가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즉시 성령이 임하지 않았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도착하여 안수할 때까지 시간이 흐른 다음에 성령이 임했음을 보여준다. 구원의 믿음을 가짐과 동시에 성령이 임한다면 굳이 사도들이 먼 길을 가서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이들이 침례를 받은 것은 이미 구원의 믿음이 있는 자들임을 말해준다. 이 사건에서도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는 구별되며, 시간적인 격차를 두고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4.2.1.3. 행 19:1-7
바울이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과 나눈 대화인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에서 이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할 정도로 성령에 관한 지식이 없었다. 또 요한의 침례만 받았을 뿐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에 관하여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은 이 ‘에베소 제자들’은 사도행전 19장 13절 이하에 나타난 ‘예수를 빙자하여 악귀를 쫓다가 악귀에게 당하여 도망한’ 어떤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믿음이 없는 사람들로 판단하여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27) 바울이 예수 이름으로 주는 침례를 설명한 다음에 바로 침례를 주는 것을 볼 때에, 이들은 바울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이 확실하다. 또 성경이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만난 사람들을 지칭할 때 ‘어떤 제자들’이라고 한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던의 주장처럼 이들이 예수를 믿은 제자들이 아니라 침례 요한의 제자이거나 사이비 제자라면,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성령침례 여부를 질문한 것이다.
문제의 초점은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의 동시성과 순차성이다. 바울이 “어떤 제자들”에게 구원받은 자에게 주는 침례를 준 다음에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하였으므로 구원의 믿음 다음에 성령침례가 이루어졌다. 또 사도행전 19장 2절의 바울의 질문에서 “너희가 믿을 때에”가 흠정역(KJV)에는 “너희가 믿은 다음에”(since ye believed)로 번역되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이 사건에서도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는 구별되며 시간적 순차성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2.1.4. 행 10:44-48
구원의 믿음 다음에 성령침례라는 시간적 순차성이 고넬료 일가와 친구들의 성령침례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여부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위 두 가지의 성령침례 사건에서처럼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 사이에 시간적 차이를 분명하게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행 11:14)한 것과 이들이 성령 받기 전후 상황을 볼 때에,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전에는 구원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침례를 받았다. 이 사건은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측에는 좋은 근거가 될 수 있지만, 구원의 믿음 후에 성령침례가 있다고 주장하는 측에는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령의 인침은 구원의 믿음에 대한 인증의 의미와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을 표시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고넬료 등이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이 임한 것은 베드로의 설교들 듣는 중에 이들에게 구원의 믿음이 생겨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구원받지 못하여 하나님의 소유가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인을 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성령침례의 세 가지 사건과 성령의 인침의 의미를 되새겨 볼 때, 고넬료 등이 받은 성령침례도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고넬료 등은 설교를 듣는 중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 후에 짧은 시간적 차이가 있는 후에 성령을 받은 것이다. 이 역시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는 시간적 순차성을 가진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4.2.2.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침례의 표식과 인침의 표식
위에서 살펴본 4가지 성령침례 사건 중에서 사도행전 8장 4절 이하의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령침례를 제외하고는 공통적으로 성령이 임할 때에 방언이 나타난다. 사도행전 8장 17-18절에서 시몬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성령이 임함을 인지하고 성령 받게 하는 권능을 매수하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이 상황을 볼 때에 성령이 임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표식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부여한다는 사도행전 1장 8절, 성령이 나타남은 9가지 은사로 표현된다는 고린도전서 12장 7-11절,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 있다는 마가복음 16장 17-18절, 위의 성령침례 사건이 나타난 사도행전 2장 1-4절, 10장 44-48절, 19장 1-7절을 종합해 볼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예언과 방언이고 그 중에 방언은 모든 경우에 나타났다. 또 방언은 예언과 더불어 성령이 임한 표식으로서 객관적이고 즉각적인 인식이 가능하다. 다른 은사들도 성령이 임하는 증거가 될 수는 있지만 즉시 또는 객관적인 확인이 어렵다. 위 세 가지 성령침례 사건의 사례와 일치하는 성령침례의 표식으로서 방언이 사도행전 8장에도 나타났고 시몬이 이를 인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성령침례의 표식으로 방언을 들 수 있는데, 성령침례의 표식은 곧 성령의 인침의 표식도 된다. 물론 성령의 인침의 표식으로서 성령의 열매를 드는 자들도 있다. 곧 성령이 함께 한다는 유일한 증거를 성령의 열매로 본다.28) 그러나 이는 위의 검토에서 본 바와 같이 성령이 임할 때 즉시 알 수 있는 객관적인 표식과 배치된다. 또 성령의 열매는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침례의 증거가 되는 사례가 없으므로 합당하지 않다.
분별되지 않는 인침은 인침의 특성과 목적에 반한다. 그런 인침은 소용이 없고 부적절하며 무의미하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 11:15)와 같이, 베드로가 성령이 임한 현상을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 성령이 임할 때와 고넬료 일가와 친구들에게 임할 때의 공통적이고 분별가능한 표식이 있었기 때문이다.29) 고넬료 등에게 성령이 임하는 표식이 나타남으로써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베드로가 이를 인식하였음이 사도행전 10장 45-46절에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임’을 들었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신 것을 인지하였음이 분명하다. 성령이 임할 때 곧 성령의 인침이 이루어질 때 베드로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임함의 분별 기준으로 삼은 표식을 무시하고 다른 기준으로 성령의 인침의 표식을 삼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처음 체험과 이방인 고넬료 등의 체험이 동일성을 갖는 점에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함을 알고 놀랐다. 이들은 성령의 인침 곧 성령침례 여부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방언이었다.
4.2.3.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 및 성령의 인침의 시간적 순차성
사도행전 2장 37-38절은 구원의 믿음과 성령침례의 순서를 말해주며, 이러한 순서와 시간적 순차성은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의 성령침례 사건에서 잘 나타난다. 성령의 인침은 성령침례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성령의 인침은 구원의 믿음 후에 이루어진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믿어’와 ‘성령으로 인침’은 시간적 순차성이 있다. 즉 구원의 믿음이 있어야 성령의 인침을 받을 수 있다.
4.3. 성령의 인침의 의미와 중요성
성령의 인침은 신자가 가진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합격 판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침을 받은 자는 구원의 확신을 더 분명하게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구원의 믿음을 소유한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침은 구원의 믿음 다음에 별도로 이뤄진다. 성령의 인침은 믿음의 검증이다. 하나님이 열납하는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성령의 인침으로 합격증을 교부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성령의 인침은 하나님의 소유권과 보호를 나타낸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인이 찍혔다. 따라서 인침 받은 신자는 구속의 날까지 보전된다(엡 4:30).
성령의 인침은 약속의 성령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의 인침을 받는 자는 약속의 성취를 체험한다. 왕의 인이 찍힌 것은 사람들 가운데서 귀하게 생각되며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성령의 인은 만왕의 왕의 인이므로 인침 받은 신자는 천사가 수종을 드는 귀한 신분이 된다.
성령의 인침은 체험을 제공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약속의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때까지는 예루살렘에 머무르라고 한 것은 성령이 임하여 충만한 체험과 권능을 소유하는 체험을 주고자 함이다. 이들은 이 체험을 함으로써, 예수가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라고 한 유익을 소유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것은 예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다. 예수가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성령을 구하라, 찾으라’(눅 11:9-13)는 명령을 내렸으므로,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진 후에 성령을 이미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성령의 인침 곧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예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며 사람의 판단보다 예수의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다.
5. 맺는 말
각자의 믿음의 진위 여부에 따라 가인과 아벨처럼 뚜렷하게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스스로 만족한 믿음으로는 마지막 날에 담대히 설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믿음의 근거는 만족이나 신념이 아니다. 하나님이 합격 도장을 찍으셔야 한다. 이 도장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인침, 곧 성령을 받는 것이다. 성령을 확실하게 받은 증거가 있어야 성령의 인침을 받은 것이다.
인침에 관한 바른 이해는 체험 있는 신앙을 낳고 관념적 신앙에서 벗어나게 한다. 성령의 인침으로 말미암아 확신 가운데 하나님이 보증하시고 보호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이는 우선적으로 구원의 믿음과 성령의 인침에 시간적 순차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가능하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는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침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신자는 성령이 임하도록 누가복음 11장 9-13절과 사도행전 2장 37-38절에 나온 바와 같이 성령을 구하는 기도와 간구를 해야 한다.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성령도 임한다고 믿는 신자들은 별도로 성령이 임하기를 구하지 않게 될 것인데, 그 결과는 성경에 약속된 성령이 주시는 체험을 경험하지 못하여, 성령의 인침도 받지 못하게 된다.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약속을 받은 자다. 그러므로 약속을 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으로 보증을 받아야 한다. 성령 받은 자는 자신의 믿음이 합격되었다는 것과 천국에 들어간다는 보증을 받은 것이다.
위 세 가지의 성령의 인침과 관련된 구절에서 보듯, 성령 인침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구원의 믿음을 인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임과 보호를 인침으로 나타내는 것과 구속의 날까지 보존하는 것도 구원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와 인증과 보호와 보존의 의미를 갖는 성령의 인침을 받을 수 없다. 신자는 성령이 임하여 인을 친 것이 구원의 믿음에 대한 합격의 표시임을 명심해야 한다.
각주
1) Gerhard Kittel, 『신약성서 신학사전: 킷텔 단권신약 원어 신학사전』, 번역위원회 역(서울 :요단출판사, 1986), pp. 1252-53.
2) Colin Brown,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Co., 1992), p. 499.
3) Ibid, p. 497.
4) Gerhard Kittel, op. cit., p. 1254.
5) Colin Brown, op. cit., p. 499.
6) Gerhard Kittel, op. cit., p. 1255.
7) Harold W. Hoehner, “Ephesians,”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by John F. Walvoord) Ⅱ(Wheaton: SP Publications, Inc., 1985), p. 619.
8) Gerhar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eoffrey W. Bromiley, D. Litt translated(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3), pp. 949-50.
9) Charles Hodge, 『고린도후서』 박상훈 역(서울: 아가페출판사, 1986), p. 38.
10)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Grand Rapids:Eerdmans, 1984), p. 265.
11) Eldon Woodcock, “The Seal of the Holy Spirit,” Bibliotheca Sacra. 155(April-June 1998): 158.
12) James D. G. Dunn, Baptism in the Holy Spirit(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0), p. 158.
13) Donald Campbell, Bible knowledge commentary v.26, 『두란노 강해 주석시리즈: 갈라디아서,골로새서,빌립보서,에베소서』(서울: 두란노서원, 1983), p. 90.
14) F. E. Marsh, Emblems of the Holy Spirit(Grand Rapids: Kregel Publications, 1957), pp. 32-33.
15) John F. Walvoord, 『성령』 이동원 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3), p. 210.
16) Ibid., p. 211.
17) Ibid., p. 210.
18) Ibid.
19) D. Martyn Lloyd Jones, Joy Unspeakable: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성령세례』 정원태 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p. 144.
20) Dunn, op. cit., p. 87.
21) Ibid.
22) Ibid., p. 159.
23) Ibid.
24) D. Martyn Lloyd Jones, op. cit., p. 147.
25) Ibid., p. 149.
26) D. Martyn Lloyd Jones, The Baptism and Gifts of the Spirit(Grand Rapids: Baker Books, 1994), p. 312.
27) Dunn, op. cit., p. 85.
28) Charles Hodge, op. cit., p. 40.
29) Donald T. Williams, 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p.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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