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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의사(구원론)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자료출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88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성도의 견인 교리는 칼빈주의 5대 가르침을 나타내는 TULIP 가운데 마지막 두 음자에 해당하는 P이다. 혹자는 이 교리를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구호로 표현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한번 구원’과 ‘영원한 구원’ 사이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따라 성경적이거나 아니면 비성경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두 가지 구원의 관계를 물리적 도식처럼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번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생 동안 ‘한번 구원’을 얻으려고 몸부림친다. 이것을 얻는다면 ‘영원한 구원’은 무조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면죄부 판매를 정당화 시킨 논리이며,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보편구원론 또는 만인구원론의 근거이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에 대한 오용(誤用)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견인 교리의 논점은 “일단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 온 사람은 항상 그 은혜 가운데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그동안 앞서 네 번에 걸친 칼빈주의 교리 학습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성경 말씀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지금까지의 결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성도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사역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은 아예 전무(全無)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전적 타락).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창세 전에 어떤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시고(무조건적 선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적용시키셨다(제한 속죄).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가능해진 것이다(불가항력적 은혜). 견인 교리는 이러한 성경적 구원의 내용이 어떻게 최종적으로 완성되어지는가를 설명해준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성도의 구원은 결코 상실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첫째,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구원의 확신 문제), 둘째, “우리의 구원은 무엇으로 끝까지 유지되어지는가?”(구원의 보전 문제) 견인 교리는 이 물음들에 대한 성경적 답을 제시해 준다.
“당신은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
유난히 대중 전도를 강조하는 한국 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도 프로그램 중에 ‘전도폭발(Evangelical Explosion)이란 것이 있다. 한국 교회에서 이 프로그램에 절대적(?) 확신과 지지를 갖고 있는 교회와 사람(목회자, 성도)들을 만나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이 프로그램에 대해 특별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다고 한다. 전도에 관한 한 세계적으로 임상 실험이 끝나고, 탁월한 효과를 검증받은 가장 확실한 전도 비법(秘法)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수년 전, 한국에서 섬기던 어느 교회에서 담임 목사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전도폭발 교육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일명 복음제시 요령인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질문 1 (선생님), 만일 오늘밤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신다면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고 계십니까?
질문 2 - (선생님), 만일 오늘밤 이 세상을 떠나 천국문 앞에 섰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선생님)에게 "내 가 너를 나의 천국에 들어오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필자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 프로그램에서 소개하는 복음 내용에 접하기도 전에, 복음 소개에 앞서 반드시 물어야 하는 이 두 가지 질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신학적, 성경적으로 너무나 많은 오류를 내포한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질문 자체가 극단적인 설정인데다, 문제는 천국에 들어 갈 확신 여부를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이 질문을 받은 어떤 사람이 “나는 오늘 밤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다”라고 답하면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하는가? 반대로 “나는 오늘 밤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 갈 자신이 없습니다”고 누군가 답한다면 그 고백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것이 사람의 확신 여부에 달려 있는가 말이다. 구원의 확신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성도로서 구원을 확신해야 할 이유에 관해 수도 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의 확신 여부에 따라 누군가 하늘나라에 들어 갈 자격의 있고 없음이 결정되어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중대한 진리에 대한 도전 행위이다.
구원의 확신에 관한 네 가지 유형
현재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인 R.C 스프룰은 구원의 확신에 관해서는 이 세상에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상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1) 자기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2) 자기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구원받은 사람들.
(3) 자기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구원받은 사람들.
(4) 자기들이 구원받았다고 “알고 있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1), (2), (3)의 경우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1) 그룹의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 불신자들이다. 이들에게는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 (2)에 속한 그룹은 구원받았으나 아직 중생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아직 내적 부르심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을 위해 늘 복음 증거와 전도가 요청된다. (3)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가장 바람직한 성도들의 모습이다. 구원받았음을 아는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4)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실제로 구원을 받지 못했으나 구원에 대해 누구보다도 확신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실제적인 구원과 구원의 확신과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지를 묻게 된다. 분명한 것은 구원을 확신한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거짓되고 잘못된 확신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정죄하신다. 어떤 이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거나 주의 이름으로 어떤 거창하고 종교적인 일을 완수하거나 또는 주의 이름으로 놀라운 기적이나 이적을 행한다면 (그러한 일의 결과로서)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들은 천국(구원)의 확신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도 경험적이며, 실제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의 확신을 정죄하셨다. 이들의 확신과 판단이 구원의 수여자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을 인간의 의지나 행위를 조건 삼아 주시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에 관한 잘못된 정보와 오해가 끊이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구원이 어떤 것이며, 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의 근거와 성령의 역사
그렇다면 성도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구원을 말할 때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서 깨닫게 된다고 증거하고 있다. 지난 시간에 배운 불가항력적 은혜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 이 말은 구원의 확신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필연적이라는 결과임을 말해 준다. 사도 바울의 증거를 들어 보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10,11)
여기서 “굳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지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정말 택함을 받지 못한 자나 부르심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들에게는 이런 권면은 아무런 유익과 영향이 없다. 이 명령은 선택과 내적 소명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권면이다. 이렇듯 성경적인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대한 자각과 반응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감정과 체험과 행위가 앞서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참된 구원의 확신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한 가지 언급을 더 살펴보자.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6-8)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유언(遺言)이다. 사도는 자신의 육신의 생명이 다해 감을 느낄수록 구원의 확신에 대해 더 강한 소망과 애착을 갖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구원의 확신이 가능한가? 바울은 이 서신의 앞 부분에서 그 이유에 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이 말씀은 참된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구원의 확신은 이러한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로부터 나온다. 즉 성도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외에 다른 그 누구 혹은 어떤 것으로도 비롯될 수 없음을 아는 믿음과 신뢰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구원의 확신을 보증 받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6-18)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윗 구절들은 진정한 구원의 확신은 오직 성령의 역사임을 증거한다. 참된 구원의 확신은 성령의 증거로부터 말미암는다. 이 사실을 보증하시는 이가 또한 성령이시다. 여기에 우리의 흔들지 않는 구원의 소망이 있는 것이다. 만약 구원의 확신에 대한 보증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의 완전한 의에 합당한 구원을 이룰 수 있겠는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영광의 상속자라는 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진리를 보증하시는 분이 성령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의 효력은 영원하고 완전하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성령의 은사들과 은혜들을 친히 증거해 주시며, 우리 자신의 영혼과 더불어 그 사실을 친히 확증해 주신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사,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그리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다.
17세기의 영국의 탁월한 청교도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토마스 브룩스(Thomas Brooks, 1606-1680)는 그의 유명한 저서 『확신,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Heaven on Earth; A Treatise on Christian Assurance)』에서 참된 확신과 거짓된 확신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준다. 참된 확신은 거짓된 확신과 근본적으로 큰 차이점을 보이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동반된다. 고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과 반대되거나 이러한 특징들이 나타나지 않는 확신은 거짓된 확신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1. 참된 확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총에 대한 깊은 감격이 수반된다.
2. 참된 확신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더 완전하게 향유하도록 항상 추구하게 만든다.
3. 참된 확신은 대개의 경우 사탄의 강력한 공격을 받는다.
4. 참된 확신은 성도를 더욱 담대하도록 만든다.
5. 참된 확신은 성도로 하여금 이웃의 행복을 추구하게 한다.
6. 참된 확신은 모든 죄에 강력히 대항하도록 한다.
7. 참된 확신에는 사랑, 겸손, 그리고 기쁨이 수반된다.
8. 참된 확신은 성령의 증거로부터 말미암으며, 이 증거는 선명하고 완전하여 만족을 준다.
성도의 견인 교리에 나타난 용어 의미
먼저 성도(saints)라는 말을 살펴보자. 여기서 성도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최종적인 구원의 목적지까지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대개 성경에서 성도라는 말이 사용될 때에는 '믿는 자(believers)'를 의미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구별함을 받은 사람들임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의 대부분의 서신서는 이들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이다(롬 1:7; 고전 1:2; 고후 1:1; 엡 1:1 등). 한 가지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은 이 교리에서 말하는 성도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 혹은 신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성령의 역사로서 깨닫게 되는 참된 구원의 확신은 오직 중생한 마음에만 주어진다. 하나님에 의해 돌과 같은 마음을 제거 받은 사람들이며(겔 36:25-27), 그리스도를 믿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자들이며(고후 5:17),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다(롬 8:15). 즉 참된 구원의 확신은 누구나 갖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사람만이 얻게 된다(엡 1:13).
견인(perseverance)과 보존(preservation)
‘견인’과 ‘보존’은 이 교리의 진정성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단어이다. 그러나 강조점에서 다소 차이가 난다. 견인이라는 용어는 참된 성도는 끝까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을 말하지만, 보존이라는 말은 이 성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로서 끝까지 완수되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즉 전자는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성도의 역할과 활동을 강조한 것이라면, 후자는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에 초점이 맞춰 있다. 이 두 용어는 구원이 성취되는데 필수적인 두 가지 측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견인과 보존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지는 일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 보존이 견인보다 앞선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견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존없이는 인간 스스로의 견인은 불가능하다.
"성도의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는가?“
이제 견인 혹은 보존 교리를 마무리하기 앞서, 한 가지 물음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아야겠다. “한번 얻은 구원은 정말 잃어버리지 않나요? 우리의 구원이 혹시 나의 연약한 믿음이나 외부적인 조건 같은 것 때문에 잃어버릴 수도 있나요?”하는 류의 물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이 받은 구원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생각 없이 있다가는 어느 순간 잃어버릴 수 있는 돈 지갑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이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영적 피로와 번민과 고통을 호소한다. 이런 사람들의 관심은 늘 “어떻게 구원을 얻나요?” 혹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잃지 않을 수 있나요?”라는 구원을 얻는 방법에 집중되어 있다. 구원을 얻었다고 해도 확신이 부족하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구원을 잃지 않기 위해 인간적인 노력과 헌신과 물질을 강요한다. 이러한 것들은 구원의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각성제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세례를 수 십 번 받거나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듣게 되는가?
오늘날 시중에 떠도는 구원을 설명하는 많은 참고서들이 이러한 방식의 구원이 정석(定石)인 양 소개하고 있다.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과서인 성경을 보지 않고, 구원을 잘못 설명하는 참고서에 의존하고 있다. 성도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과 발에 족쇄를 채우고 있으면서도 구원을 쟁취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왜 우두커니 서 있느냐고 윽박을 지르고 있다. 구원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 메시지라는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정작 구원이 어떻게 주어지고,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대해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발상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열악한 영적 수준의 현실이며, 따라서 성경과 교리를 통해 바른 구원 교리를 배워야 할 시급한 이유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 같이 성경은 ‘성도에게 주어진 구원은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하고 있다. 반면에 성경은 ‘성도의 구원의 확신은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사람이 신앙을 고백하고서도, 심지어 중생의 경험을 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이 얼마나 엄청나고 무서운 죄를 범하고 또 범할 수 있는지를 실제의 삶에서 자주 목격하게 된다. 게중에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도 있지만, 실제로 중생한 은혜를 경험한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구약의 다윗의 경우이다. 다윗은 구원을 받은 대표적이 인물이지만, 엄청난 죄를 범했다. 간음죄뿐만 아니라 일급 살인자를 저질렀다. 신약에 나오는 베드로 역시 그리스도를 상대로 범해서는 안 될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 삼년 동안 예수의 제자 신분으로 많은 영적 혜택을 누렸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바로 전 날, 예수님을 배반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범죄를 지적하면서도 그것들로 인해 그들의 구원이 상실하지 않았음을 증거한다.
이 경우에 대해 대개의 알미니안들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다윗과 베드로가 구원을 받지 못할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이들이 구원을 놓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회개를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한다. 즉 이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았다면 결코 구원은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회개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지 않는다. 회개는 구원 얻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열매에 해당한다.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믿음을 가졌기에) 때문에 참 회개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에서는 구원의 서정을 설명할 때, 회개를 소명과 칭의와 양자됨과 믿음 뒤에 배치한다.
생각해 보라. 만약 다윗에게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의 죄를 지적하지 않았다면 그가 돌이켰겠는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고 예언하신 말씀 없이도 베드로가 스스로 자신의 죄로부터 회복될 수 있었겠는가? 다윗이나 베드로의 경우는 아무리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도 밀까부르듯 하는 사탄의 시험과 속임에 넘어갈 수 있음을 말해 준다. 회개하였더니 구원을 얻었다는 도식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자는 결국에는 참된 회개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회개를 해야 할 이유는 중생이후에도 사탄과 죄의 유혹과 도전을 받고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죄를 짓고, 방황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부분에 관해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고백을 들어보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18-23)
그러나 성도는 이런 현실에 대해 완전히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과 무지와 게으름과 나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확신케 하시며, 다시 회복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고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지만, 구원의 확신의 장애물이 되는 사탄과 죄들이 종국적으로 성도의 구원을 소멸시키거나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게 만들지는 못한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1, 12)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견인(혹은 보존) 교리는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고백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개혁주의(칼빈주의) 신앙 고백의 결정판이라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3)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 안에서 용납하셨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효과적으로 부르시며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로부터 결단코 완전하게 혹은 최종적으로 타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히 마지막까지 견딜 것이며, 영원히 구원받게 될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장 1절)
참된 성도의 구원이 결코 상실되지 않을 근거가 하나님께 있음을 감사하자.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지까지 견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보존하심의 은혜 덕분임을 감사하자. 따라서 주께서 주신 구원의 확신을 더 깊이 각성하며, 주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와 긍휼을 따라 구원에 확신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가도록 최선을 경주하는 신앙인의 삶을 힘있게 살아가자! 이 일이야말로 구원 얻는 성도가 취할 가장 마땅한 본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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