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자료출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77
은혜의 본질 VS 은혜에 대한 왜곡된 시선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란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영어식 이니셜 TULIP 중에서 네 번째 두문자 I자(字)에 해당되는 교리이다. 이 교리 역시 앞서 언급했던 T(전적 타락), U(무조건적 은혜), L(제한 속죄) 교리 뿐만 아니라, 다음 주에 언급하게 될 P(성도의 견인) 교리와도 전적으로 일치한다. T와 U가 사실이라면 L, I, P 역시 사실이다. 하나가 옳으면 다같이 옳은 것이지 일부만 옳거나 틀리거나 할 수 없다. 성경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일부 성경 구절만 천착하거나 또는 일부 구절을 의도적으로 거부 혹은 은폐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부분(적) 복음 혹은 부분(적) 진리가 아니다. 66권 성경 전체의 각 구절 말씀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구원의 계시이며, 완전한 진리이다. 따라서 부분 복음이나 부분 진리란 있을 수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부분 복음이나 부분 진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경고를 두려운 마음으로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7-9)
지금까지 언급해 온 칼빈주의 교리가 성경 전체의 국면을 거짓됨 없이 진술한 내용이라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이 교리들이 성경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복음으로 취급하는 불경(不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이라면 은혜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은혜라는 말만큼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단어는 교회의 보편적인 용어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 역사를 돌아볼 때, 이 용어만큼 잘못 이해되고 있는 단어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은혜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조건없이 베풀어주는 호의(好意)와 긍휼을 가리킨다.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구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믿음이전에 은혜가 선행되어야 한다. 즉 은혜는 믿음을 가능케 하는 선(先) 조건이며 믿음은 은혜를 증명하는 후(後) 결과인 셈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그의 은혜로서만 가능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을 전제로 한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자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증언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위의 성경 구절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첫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둘째, 사람은 구원에 관한 한 철저하게 무능력하다. 그런데 이 명백한 진술을 반대하거나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는 사실에 회의적이다. 오직 은혜라는 말이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과 배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은혜의 상호 관계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은혜라는 말에다 전적 혹은 오직이라는 단어보다는 부분 혹은 일반적이라는 단어를 붙이기를 좋아했다. 이로써 이들은 사람은 타락을 했으나 구원에 있어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을만큼 부패한 것은 아니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중요한 측면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의지나 선택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으신다는 소위 협력적 구원설을 주장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에 사람이 얼마나 적절하며, 충실하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편에서의 행위에 있다. 인간의 의지와 선택의 결과로서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본 것이다. 만약 이들의 주장이 맞다만 방금 언급한 성경 구절들은 거짓된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주장을 저주받아 마땅한 다른 복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구원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조건적, 협력적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성경의 진정성과 진실성을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결단코 이들의 주장을 성경적인 것 인 양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선물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
흔히 구원에 있어서 오직 은혜 교리를 반대하거나 불신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두 종류의 예화가 있다. 첫 번째는 중병에 고통당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죄인은 심각한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있다는 것이다. 죄인의 병을 고쳐 줄 의사도 없고, 자연적으로 나을 희망도 없다.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치려고 하셔도 입을 열어 약을 받아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낫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알약을 받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을 주시는데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사람은 결코 살아날 수 없다고 한다.
두 번째 예화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 비유이다. 죄로 인해 타락한 사람을 수영을 못하는 물에 빠진 사람으로 묘사한다. 죽어가는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누군가 그에게 구명대를 던져 주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 구명대를 준비하셔서 그것을 그에게 던지셨다고 한다. 이제 죽고 사는 문제는 그에게 달린 것이다. 그가 비록 죽어가는 처지지만 구명대를 붙잡으면 살 것이고, 끝내 제 손으로 구명대를 잡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종류의 예화들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에 관한 모든 준비를 다 하셨다고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과의 협력적 관계를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식의 예화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중대한 책임과 직각적인 결단을 촉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디에도 이러한 식의 유추와 교훈을 증거하지 않는다. 성경은 타락한 사람에 관해 죽을 병에 걸린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더구나 천국 문턱에서 자기 구원을 확정지을만한 능력을 소유한 존재로 절대 보지 않는다. 성경은 타락한 사람에 관해 이미 영적으로 죽었다고 선포한다. 사탄의 영에 속해 육체를 의지하여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지적하고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주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성경은 타락한 사람은 죄 가운데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자로 묘사한다. 죽은 자는 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입을 벌리지 못하며 구명대를 잡을 수 없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이처럼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는 죄인의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죽은 자에게 어떤 사실에 대해 명확한 판단과 선택을 기대하는 것은 지렁이에게서 인생 철학을 전해듣는 일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생, 즉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자유의지는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가? 이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타락한 자라 할지라도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죄인들도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타락과 함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과 지식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지를 움직이는 원인으로서의 마음이 스스로의 행위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절대적인 선을 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도르트 신조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은 했지만 이성과 의지를 부여받은 피조물임에도 변함이 없으며, 또한 인류에게 번진 죄악이 인간의 본성조차 빼앗아간 것은 아니고 파멸과 영적인 죽음을 초래한 것뿐이다. 이처럼 이 중생의 은혜는 인간을 무감각한 사물로 여기거나 인간의 의지나 그 본성조차 모두 무시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적으로 소생시키고 바르게 해주고, 동시에 그 은혜에 힘있게 따르도록 해주며, 전에는 영적인 반역과 저항이 가득 찬 곳에 기꺼이 신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참되고 영적인 의지로는 이 타락에서 재생할 아무런 소망도 얻지 못하고 죄에 빠져들어갈 뿐이다.”(도르트 신조 Ⅲ & Ⅳ, 16절)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오직 악한 욕망을 품을 뿐이다(창 6:5). 타락으로 인한 도덕적 본성의 변질은 결국 의지의 부패를 가져왔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를 영적인 죽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완전한 죽음의 상태로부터 다시 살리시는 일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은 여전히 죽어 있다. 죽은 자는 구원의 필요성을 자각할 수도 없거니 구원을 성취할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죽은 자를 살리셔야했던 이유이다.
흔히 거듭남 혹은 중생이라는 말은 ‘다시 낳는다’(generating again)는 의미를 가진다. 즉 중생은 영적 생명의 시작 동시에 생명의 새로운 시작이다. 그런데 성경은 영적 죽음으로부터 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고 못 박고 있다. 죄인은 스스로 자신들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죽은 자의 영을 살리시며, 거듭나게 하신다. 성도는 이 거듭남(중생)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성향과 성품을 가지게 된다. 거듭남(중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에 관한 바르고 정당한 신앙과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monergism)이라고 부를 수 있다. 'monergism'이라는 말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역할을 압축적으로 소개하는 신학적인 용어이다. 이 말은 ‘하나’라는 의미의 ‘mono'와 ‘독점’이라는 뜻을 가진 ‘monopoly'의 합성어로서 구원은 하나님의 독점적 사역임을 나타낸다. 곧 구원은 한 분 하나님 편에서의 독점적인 일인 것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거들거나 방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절대적 주권가운데 이루어진다.
불가항력이란 의미와 유효적 부르심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라는 표현앞에 불가항력적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이 표현 역시 칼빈주의자들에게는 구원의 본의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지만, 오직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부담스러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자들 중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왜냐하면 불가항력적이란 말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들은 이 단어 속에서 힘센 사람의 강요에 의해 어린 아이가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키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은혜라는 말에다 이 표현을 덧붙인 진정한 이유를 잘못 파악한 데서 오는 오해이다. 불가항력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심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적할 대상이 아무도 없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와 의미를 모르는 이방인들은 복음을 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설령 현상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택한 자를 향해 구원의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며 확실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그가 원하시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남(중생)을 경험한 사람은 불가항력적 은혜로서 반드시 구원함을 얻는다. 택함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효과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가항력적 은혜를 가리켜, ‘유효적 은혜’(effectual grace)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은혜는 택함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이 어떻게 구원(복음)에 대해 반응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조건이나 상황가운데 복음을 들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자연스럽게 복음에 받아들이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복음을 냉대하며 저주하기까지 할 때, 우리는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묻게 된다. 다시 말해, 타락한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복음)에 대해 각기 상반된 반응을 보이게 되었는가에 대해 궁금해 한다. 복음의 메시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다. 복음은 그 메시지를 듣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로 초대한다.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약속되어 있음을 알린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부르심으로서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정상적으로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자들은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합당하신 부르심에 응하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복음의 외적인 부르심에 더하여 특별한 내적 부르심(interanl calling)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이 특별한 소명을 통하여 죄인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영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신다. 새롭게 살아난 생명은 하나님에 대해 거부할 수 없는 흠모와 갈망하게 된다. 이렇게 성령안에서 새로워진 의지는 자발적인 선택으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가며, 그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렇듯 중생과 신앙과 회개에 이르는 구원의 과정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혹은 유효적 은혜로서 성취된다. 이 점에 관해 장로교회 표준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이 생명에 대해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은(오직 그들만을) 그가 약속하시고 정하신 시간에,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죄인들이 본질적으로 처해 있는 죄와 죽음의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지는 은혜와 구원을 향해 효과적으로 부르시기를 기쁘게 여기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지성을 영적으로 밝히시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이해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돌과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 그리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선한 것을 결정하게 하시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인도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자유롭게 나아오는 것이지만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1절)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과 설교
효과적 부르심이란 죄인의 마음속에서 저항할 수 없는 성령의 은혜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내적 부르심(또는 내적 소명)을 가리킨다. 내적 소명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복음은 차별없이 모든 자들에게 들려지지만 복음에 대해 누구나 똑같이 반응하지는 않는다. 택함 받지 않은 자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아도 알지 못한다(마 13:13,14; 사6: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을 증거하신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말씀(설교)을 하나님의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서 구원의 은혜를 성도들에게 적용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이 바르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이 은혜의 수단(media gratiae, means of grace)으로서 작용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말씀이 구속의 은혜의 수단으로서 역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 말씀 증거하도록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고 공급되고 또 바르게 적용되는 일이 없이는 구원의 은혜가 바르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계획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8-17)
택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은 반드시 그의 말씀을 통하여 증거되고 역사한다. 주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가운데 머무르셨을 때, 그에게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부르셨다(요 11:43). 이 말씀을 들은 후에야 나사로는 무덤밖으로 걸어나왔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사로를 살리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주님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서 각성시키시며, 살리신다.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이 증거되는 역사를 통해 그의 백성을 불러모으신다. 이 귀한 사명을 교회에 위임하셨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땅 끝까지 이르러 말씀을 증거하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8)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을 이루시는 은혜의 수단으로 바르게 활용될 때에 그곳에서는 반드시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는 곳에는 반드시 구원을 효과적으로 이루시는 성령의 역사가 동반되어진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물음 155 말씀이 어떻게 구원을 효력있게 합니까?
답 : 하나님의 영이 말씀을 읽는 것, 특히 말씀의 전파를 효력있는 방편으로 삼아 죄인들을 깨닫게 하시고, 확신시키고, 겸손하게 하시며, 그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몰아내어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이끄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며, 그의 뜻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들을 강건하게 하시므로 시험과 부패에 대항하게 하시며, 그들을 은혜로 양육하시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을 거룩함과 위로로 굳게 세우시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이처럼 구원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는 매체가 바로 설교(preaching)이다. 하나님은 이 설교라는 방식을 통해 택한 자들을 내적으로 유효하게 부르시며, 그들을 향한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을 불가항력적 은혜로서 철저하게 이루신다. 이처럼 설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적용되는데 가장 유효적절한 방도이다. 이 사안의 중요성을 자각한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는 교회의 표지로서 ‘참된 말씀 증거’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말씀의 바른 증거야말로 교회와 신앙이 세워져 가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며, 또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반드시 지켜져야 할 교회의 대원칙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신앙 정신에 따라서 개혁교회는 다음과 같은 신앙의 원리를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은 정신이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말씀 안에서 친히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하여, 말씀 안에 계시되어 있는 것을 기독교인은 참된 것으로 믿으며, 그 말씀의 각 구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에 따라 행동하되, 명령의 말씀에는 순종하고, 경고의 말씀에 대하여서는 떨고, 금세와 내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기꺼이 받아들인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장 2절)
이러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겠는가! 그러함에도 여전히 성경이 부분 복음이요, 부분 진리라고 우길 것인가? 성령과 말씀 외에 다른 것들(특히 인간의 전통과 행위들)을 은혜의 수단으로 삼겠는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히브리 기자의 경고를 다시 한 번 마음에 되새기자.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 2:1-3)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자료출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77
은혜의 본질 VS 은혜에 대한 왜곡된 시선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란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영어식 이니셜 TULIP 중에서 네 번째 두문자 I자(字)에 해당되는 교리이다. 이 교리 역시 앞서 언급했던 T(전적 타락), U(무조건적 은혜), L(제한 속죄) 교리 뿐만 아니라, 다음 주에 언급하게 될 P(성도의 견인) 교리와도 전적으로 일치한다. T와 U가 사실이라면 L, I, P 역시 사실이다. 하나가 옳으면 다같이 옳은 것이지 일부만 옳거나 틀리거나 할 수 없다. 성경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일부 성경 구절만 천착하거나 또는 일부 구절을 의도적으로 거부 혹은 은폐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부분(적) 복음 혹은 부분(적) 진리가 아니다. 66권 성경 전체의 각 구절 말씀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구원의 계시이며, 완전한 진리이다. 따라서 부분 복음이나 부분 진리란 있을 수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부분 복음이나 부분 진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경고를 두려운 마음으로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7-9)
지금까지 언급해 온 칼빈주의 교리가 성경 전체의 국면을 거짓됨 없이 진술한 내용이라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이 교리들이 성경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복음으로 취급하는 불경(不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이라면 은혜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은혜라는 말만큼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단어는 교회의 보편적인 용어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 역사를 돌아볼 때, 이 용어만큼 잘못 이해되고 있는 단어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은혜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조건없이 베풀어주는 호의(好意)와 긍휼을 가리킨다.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구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믿음이전에 은혜가 선행되어야 한다. 즉 은혜는 믿음을 가능케 하는 선(先) 조건이며 믿음은 은혜를 증명하는 후(後) 결과인 셈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그의 은혜로서만 가능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을 전제로 한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자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증언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위의 성경 구절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첫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둘째, 사람은 구원에 관한 한 철저하게 무능력하다. 그런데 이 명백한 진술을 반대하거나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는 사실에 회의적이다. 오직 은혜라는 말이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과 배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은혜의 상호 관계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은혜라는 말에다 전적 혹은 오직이라는 단어보다는 부분 혹은 일반적이라는 단어를 붙이기를 좋아했다. 이로써 이들은 사람은 타락을 했으나 구원에 있어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을만큼 부패한 것은 아니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중요한 측면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의지나 선택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으신다는 소위 협력적 구원설을 주장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에 사람이 얼마나 적절하며, 충실하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편에서의 행위에 있다. 인간의 의지와 선택의 결과로서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본 것이다. 만약 이들의 주장이 맞다만 방금 언급한 성경 구절들은 거짓된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주장을 저주받아 마땅한 다른 복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구원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조건적, 협력적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성경의 진정성과 진실성을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결단코 이들의 주장을 성경적인 것 인 양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선물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
흔히 구원에 있어서 오직 은혜 교리를 반대하거나 불신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두 종류의 예화가 있다. 첫 번째는 중병에 고통당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죄인은 심각한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있다는 것이다. 죄인의 병을 고쳐 줄 의사도 없고, 자연적으로 나을 희망도 없다.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치려고 하셔도 입을 열어 약을 받아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낫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알약을 받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을 주시는데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사람은 결코 살아날 수 없다고 한다.
두 번째 예화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 비유이다. 죄로 인해 타락한 사람을 수영을 못하는 물에 빠진 사람으로 묘사한다. 죽어가는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누군가 그에게 구명대를 던져 주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 구명대를 준비하셔서 그것을 그에게 던지셨다고 한다. 이제 죽고 사는 문제는 그에게 달린 것이다. 그가 비록 죽어가는 처지지만 구명대를 붙잡으면 살 것이고, 끝내 제 손으로 구명대를 잡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종류의 예화들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에 관한 모든 준비를 다 하셨다고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과의 협력적 관계를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식의 예화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중대한 책임과 직각적인 결단을 촉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디에도 이러한 식의 유추와 교훈을 증거하지 않는다. 성경은 타락한 사람에 관해 죽을 병에 걸린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더구나 천국 문턱에서 자기 구원을 확정지을만한 능력을 소유한 존재로 절대 보지 않는다. 성경은 타락한 사람에 관해 이미 영적으로 죽었다고 선포한다. 사탄의 영에 속해 육체를 의지하여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지적하고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주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성경은 타락한 사람은 죄 가운데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자로 묘사한다. 죽은 자는 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입을 벌리지 못하며 구명대를 잡을 수 없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이처럼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는 죄인의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죽은 자에게 어떤 사실에 대해 명확한 판단과 선택을 기대하는 것은 지렁이에게서 인생 철학을 전해듣는 일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생, 즉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자유의지는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가? 이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타락한 자라 할지라도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죄인들도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타락과 함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과 지식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지를 움직이는 원인으로서의 마음이 스스로의 행위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절대적인 선을 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도르트 신조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은 했지만 이성과 의지를 부여받은 피조물임에도 변함이 없으며, 또한 인류에게 번진 죄악이 인간의 본성조차 빼앗아간 것은 아니고 파멸과 영적인 죽음을 초래한 것뿐이다. 이처럼 이 중생의 은혜는 인간을 무감각한 사물로 여기거나 인간의 의지나 그 본성조차 모두 무시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적으로 소생시키고 바르게 해주고, 동시에 그 은혜에 힘있게 따르도록 해주며, 전에는 영적인 반역과 저항이 가득 찬 곳에 기꺼이 신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참되고 영적인 의지로는 이 타락에서 재생할 아무런 소망도 얻지 못하고 죄에 빠져들어갈 뿐이다.”(도르트 신조 Ⅲ & Ⅳ, 16절)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오직 악한 욕망을 품을 뿐이다(창 6:5). 타락으로 인한 도덕적 본성의 변질은 결국 의지의 부패를 가져왔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를 영적인 죽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완전한 죽음의 상태로부터 다시 살리시는 일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은 여전히 죽어 있다. 죽은 자는 구원의 필요성을 자각할 수도 없거니 구원을 성취할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죽은 자를 살리셔야했던 이유이다.
흔히 거듭남 혹은 중생이라는 말은 ‘다시 낳는다’(generating again)는 의미를 가진다. 즉 중생은 영적 생명의 시작 동시에 생명의 새로운 시작이다. 그런데 성경은 영적 죽음으로부터 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고 못 박고 있다. 죄인은 스스로 자신들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죽은 자의 영을 살리시며, 거듭나게 하신다. 성도는 이 거듭남(중생)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성향과 성품을 가지게 된다. 거듭남(중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에 관한 바르고 정당한 신앙과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monergism)이라고 부를 수 있다. 'monergism'이라는 말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역할을 압축적으로 소개하는 신학적인 용어이다. 이 말은 ‘하나’라는 의미의 ‘mono'와 ‘독점’이라는 뜻을 가진 ‘monopoly'의 합성어로서 구원은 하나님의 독점적 사역임을 나타낸다. 곧 구원은 한 분 하나님 편에서의 독점적인 일인 것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거들거나 방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절대적 주권가운데 이루어진다.
불가항력이란 의미와 유효적 부르심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라는 표현앞에 불가항력적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이 표현 역시 칼빈주의자들에게는 구원의 본의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지만, 오직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부담스러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자들 중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왜냐하면 불가항력적이란 말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들은 이 단어 속에서 힘센 사람의 강요에 의해 어린 아이가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키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은혜라는 말에다 이 표현을 덧붙인 진정한 이유를 잘못 파악한 데서 오는 오해이다. 불가항력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심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적할 대상이 아무도 없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와 의미를 모르는 이방인들은 복음을 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설령 현상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택한 자를 향해 구원의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며 확실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그가 원하시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남(중생)을 경험한 사람은 불가항력적 은혜로서 반드시 구원함을 얻는다. 택함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효과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가항력적 은혜를 가리켜, ‘유효적 은혜’(effectual grace)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은혜는 택함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이 어떻게 구원(복음)에 대해 반응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조건이나 상황가운데 복음을 들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자연스럽게 복음에 받아들이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복음을 냉대하며 저주하기까지 할 때, 우리는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묻게 된다. 다시 말해, 타락한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복음)에 대해 각기 상반된 반응을 보이게 되었는가에 대해 궁금해 한다. 복음의 메시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다. 복음은 그 메시지를 듣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로 초대한다.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약속되어 있음을 알린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부르심으로서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정상적으로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자들은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합당하신 부르심에 응하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복음의 외적인 부르심에 더하여 특별한 내적 부르심(interanl calling)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이 특별한 소명을 통하여 죄인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영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신다. 새롭게 살아난 생명은 하나님에 대해 거부할 수 없는 흠모와 갈망하게 된다. 이렇게 성령안에서 새로워진 의지는 자발적인 선택으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가며, 그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렇듯 중생과 신앙과 회개에 이르는 구원의 과정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혹은 유효적 은혜로서 성취된다. 이 점에 관해 장로교회 표준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이 생명에 대해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은(오직 그들만을) 그가 약속하시고 정하신 시간에,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죄인들이 본질적으로 처해 있는 죄와 죽음의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지는 은혜와 구원을 향해 효과적으로 부르시기를 기쁘게 여기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지성을 영적으로 밝히시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이해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돌과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 그리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선한 것을 결정하게 하시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인도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자유롭게 나아오는 것이지만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1절)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과 설교
효과적 부르심이란 죄인의 마음속에서 저항할 수 없는 성령의 은혜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내적 부르심(또는 내적 소명)을 가리킨다. 내적 소명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복음은 차별없이 모든 자들에게 들려지지만 복음에 대해 누구나 똑같이 반응하지는 않는다. 택함 받지 않은 자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아도 알지 못한다(마 13:13,14; 사6: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을 증거하신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말씀(설교)을 하나님의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서 구원의 은혜를 성도들에게 적용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이 바르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이 은혜의 수단(media gratiae, means of grace)으로서 작용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말씀이 구속의 은혜의 수단으로서 역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 말씀 증거하도록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고 공급되고 또 바르게 적용되는 일이 없이는 구원의 은혜가 바르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계획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8-17)
택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은 반드시 그의 말씀을 통하여 증거되고 역사한다. 주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가운데 머무르셨을 때, 그에게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부르셨다(요 11:43). 이 말씀을 들은 후에야 나사로는 무덤밖으로 걸어나왔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사로를 살리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주님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서 각성시키시며, 살리신다.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이 증거되는 역사를 통해 그의 백성을 불러모으신다. 이 귀한 사명을 교회에 위임하셨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땅 끝까지 이르러 말씀을 증거하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8)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을 이루시는 은혜의 수단으로 바르게 활용될 때에 그곳에서는 반드시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는 곳에는 반드시 구원을 효과적으로 이루시는 성령의 역사가 동반되어진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물음 155 말씀이 어떻게 구원을 효력있게 합니까?
답 : 하나님의 영이 말씀을 읽는 것, 특히 말씀의 전파를 효력있는 방편으로 삼아 죄인들을 깨닫게 하시고, 확신시키고, 겸손하게 하시며, 그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몰아내어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이끄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며, 그의 뜻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들을 강건하게 하시므로 시험과 부패에 대항하게 하시며, 그들을 은혜로 양육하시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을 거룩함과 위로로 굳게 세우시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이처럼 구원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는 매체가 바로 설교(preaching)이다. 하나님은 이 설교라는 방식을 통해 택한 자들을 내적으로 유효하게 부르시며, 그들을 향한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을 불가항력적 은혜로서 철저하게 이루신다. 이처럼 설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적용되는데 가장 유효적절한 방도이다. 이 사안의 중요성을 자각한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는 교회의 표지로서 ‘참된 말씀 증거’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말씀의 바른 증거야말로 교회와 신앙이 세워져 가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며, 또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반드시 지켜져야 할 교회의 대원칙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신앙 정신에 따라서 개혁교회는 다음과 같은 신앙의 원리를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은 정신이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말씀 안에서 친히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하여, 말씀 안에 계시되어 있는 것을 기독교인은 참된 것으로 믿으며, 그 말씀의 각 구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에 따라 행동하되, 명령의 말씀에는 순종하고, 경고의 말씀에 대하여서는 떨고, 금세와 내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기꺼이 받아들인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장 2절)
이러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겠는가! 그러함에도 여전히 성경이 부분 복음이요, 부분 진리라고 우길 것인가? 성령과 말씀 외에 다른 것들(특히 인간의 전통과 행위들)을 은혜의 수단으로 삼겠는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히브리 기자의 경고를 다시 한 번 마음에 되새기자.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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