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자료출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66
예정 교리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모순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일명 TULIP 교리라고 부르는 칼빈주의 5대 가르침(The Five Points of Calvinism) 중에서 U자(字)에 해당하는 두 번째 내용이다. 앞서 진술한 바와 같이 도르트 총회(1618-9)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항변에 대한 칼빈주의자들의 반항변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 회의의 전체적인 논점은 예정교리(론)와 관련되어 있다. 예정 교리는 교회 역사 가운데 정통 교회의 사상적 맥을 이어가는 믿음의 선진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신앙고백이다. 루터뿐 아니라 칼빈 그리고 그 이후에 나타난 무수히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예정교리를 성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며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예정교리는 성도들을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고약한 주장처럼 인식되었다. 예정의 예자만 들어도 골치가 아프고, 예정교리하면 쓸데없는 논쟁이 연상된다. 목회자들은 더 이상 강단에서 예정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성도들은 전혀 예정교리에 대해 관심이 없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예정 교리가 개신 교회에서마저 눈총을 받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예정이라는 말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 때문이다. 예정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정 사상은 숙명론이나 운명론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예정을 이러한 절망적인 생각과 연결짓는 사람들은 예정 교리를 말할수록 인간은 한낱 무의미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고 단정한다. 또한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인생의 결론이 이미 결정되어진 것이라면 생에 대한 어떤 종류의 선한 의욕이나 도전은 의미없는 일이며,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결코 공평하지도 자비롭지 않는 변덕스런 폭군같은 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정 교리를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조차 일치된 견해를 갖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교회 역사 가운데 예정 교리는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이 논쟁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오늘날 기독교 거장이라고 존경받는 인물(예를 들어, 알미니우스, 멜랑크톤, 웨슬레, 찰스 피니, 빌리 그레이함등)이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더구나 근대에 들어서 선교의 세계화와 더불어 교회의 외적 성장과 부흥이 교회의 중심 이슈로 떠오르면서 예정 교리는 더욱 애물단지처럼 취급되고 있다. 예정 교리는 오히려 교회와 선교의 확장에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예정교리를 배척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실을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 교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개인적인 학구열이나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더구나 예정 교리를 칼빈주의자들이 강조했던 신학 사상이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예정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정에 관한 많은 증거 구절들이 있지만, 우선 다음의 세 가지 성경 구절을 살펴보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였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위의 성경 구절은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사색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왜 예정 교리를 피해갈 수 없는지, 아니 왜 예정 교리를 의심해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정 교리는 결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예정 교리는 성경에서 가장 일관되게 강조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진술이다. 그래도 의심이 남는다면 바울 사도가 기록한 서신서들의 앞 부분을 보라. 바울의 거의 모든 서신들은 복음을 위해 선택(택정함)을 입은 고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철저한 예정론자였으며, 이에 따라 그가 쓴 대부분의 서신서들의 문두에는 예정 사상이 드러나 있다. 바울이 쓴 서신서들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역으로 말한다면 예정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곧 바울의 서신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
예정(predestination)이라는 단어는 ‘사전에’(beforehand)라는 의미를 지닌 시간 접두사 ‘pre’라는 말과 ‘목적지'라는 뜻의 ‘destination'라는 말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였다. 즉 예정이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그 목적지에 관한 어떤 일을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성경은 모든 인생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오직 두 곳, 천국과 지옥뿐이라고 증거한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사후에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간 단계로서 연옥이라는 제3의 거처를 말하지만 이것은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아주 기본적인 형태로 볼 때, 예정 교리란 인생의 최종 목적지인 천국과 지옥에 가게 되는 일이 인생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정하심 가운데 놓여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신자의 구원에 관한 예정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가운데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사상은 언제나 해결하기 쉽지 않은 많은 물음들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유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장차 될 일을 미리 정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너무나 필연적인 결과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무언가를 미리 정하실 수 없다는 그는 진정한 주권자가 아니며, 모든 것을 자신의 주권대로 행사할 수 없는 분이라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기 전에 그 사람에 관한 구원 문제를 이미 결정하셨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자이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만약 어떤 사람의 구원 문제가 당사자의 의지와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면 하나님은 결코 모든 피조물에 대해 완전한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을 가장 정직하게 인정하는 신앙고백이다.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의 상관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악(죄)의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답을 얻어야 한다. 과연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나님은 악이나 죄의 그림자조차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될 수 없다. 그러나 악조차 하나님의 주권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악이 들어오는 것을 사전에 완전히 차단하지 않으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다는 사실이다. 사실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한 것이 아니라면 악한 일의 결과에 대해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 즉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타락한 사람이 악한 결과를 맞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일에 대해 하나님은 그 어떤 연대 책임을 지실 필요가 없으시다. 왜냐하면 악의 발생과 참여는 하나님의 뜻을 배제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타락한 사람에게 공의를 적용하실 의무가 있을지언정 긍휼이나 사랑을 베푸셔야 할 도덕적 책임이 전혀 없으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스스로 타락한 결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의 책임인양 생각하는 것은 살인범이 중한 형벌을 선고 받은 것을 두고 마치 재판장이 사랑이 없는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세상에서도 범죄한 사람에게는 마땅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린 중대한 범죄에 대한 타당한 처벌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심판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풀기로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비난받아야 할 내용인가?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타락한 세상과의 관계를 다음의 네 가지 주장을 생각해 보자.
1.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시지 않기로 결정하실 수도 있으셨다.
2.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실 수도 있으셨다.
3.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확보할 수도 있으셨다.
4.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일부 사람들의 구원을 확보할 수도 있으셨다.
일단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주장은 배제되어야 한다. 두 주장은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 이에 반해 사람들이 가장 호감을 갖는 주장은 단연 두 번째이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그 대상이 모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공평성이 잘 접목된 주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대상이 모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만민 구원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주장은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인만큼 구원을 위한 궁극적인 결정권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기회를 주셨다고 언급하지도 않거니와 구원이란 것이 사람편에서 결정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두 번째 주장 역시 성경적이지 않다.
여기서 네 번째 주장은 칼빈주의자들이 받아들이는 내용으로 성경적인 진술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왜 하나님께서 일부의 사람만에게만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하셨는지에 대해 불만을 나타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러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직접적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며, 이 사건에 동참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하나님께서 일부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로 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에서 볼 때, 하등의 문제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에게는 긍휼을 베풀지 않기로 결정하신 일은 부당한 처사인가? 그렇지 않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겪어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댓가이다. 어떠한 죄의 티끌이라고 연루되지 않은 하나님편에서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는 결코 불의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죄값을 묻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에게는 죄를 심판하시는 권리가 있는 동시에 죄를 제거하실 권리도 있다. 하나님에게는 에서의 죄악된 행동을 심판하실 권리도 있지만 야곱의 죄악을 긍휼로써 덮으실 권세가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다. 따라서 예정교리는 피조물(특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행사하심을 전적으로 인정하게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조건적 선택의 의미
종교개혁자들은 예정을 말할 때에, ‘이중예정’(double predestina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즉 하나님의 예정의 범주 안에는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로서의 예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택함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택과 같이 유기 역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기초해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이루어진다. 유기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으로서의 심판에 대한 예정이라면 선택은 죄에 대해 간과하시는 은혜에 관한 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혁교회의 예정 교리의 핵심은 유기의 예정을 강조하고 확인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이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부터 기인된 오직 은혜의 산물임을 강조하는데 있다. 그런 점에서 ‘무조건적’(unconditional)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가장 적절하게 묘사해주는 단어이다.
사실 알미니안주의자들도 창세전 예정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치는 예정이란 조건적(conditional) 예정이다. 즉 하나님께서 미래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지 혹은 믿음을 선택할지를 미리 알고서 그들을 예정하시기로 하셨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선택을 전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서 옳고 그름을 선택할 수 있는 중립적 존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래적으로 의지를 결정하는 마음, 동기, 지향성 자체가 죄로 인해 부패하고 오염되었다. 나쁜 나무에게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듯이 타락한 죄인은 행위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선택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하셨기 때문에 얻게 된 선물이다. 따라서 알미니안적 예정교리는 성경적 구원론과 배치되는 사설(邪說)이다.
한편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오직 은혜에 기초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곧 목적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구원에 관한 한 그 충분한 의미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사역임을 인정하게 된다. 간혹 이 말을 오해하거나 남용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조건이 없으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자신의 불의한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어쩌면 성도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행위면에서 강조되어지는 내용들조차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제대로된 열매를 맺기란 불가능하다. 여기서 무조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데 있어서 우리와 관련된 어떤 것을 조건으로 삼지 않으셨다는 개념이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할만한 그 어떤 조건도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를 조건없이 선택하신다.
예정교리가 주는 실제적 효과
이 교리가 성경의 내용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며, 교육적으로 가르쳐야 할 당위성을 가진 것인가? 하는 점에서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는 몇 가지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적 가르침으로서 교육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런 점에서 먼저 인식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일반 사람들이 이 교리를 이상스럽고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그들의 일반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초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예정교리를 부인하는) 그러한 자들은 선지자, 사도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의 입을 통하여 그 교리를 가르쳐 주신 성령을 통제하는 사람들이다. … (중략) … 이 교리를 침묵케 하기보다는 차리라 온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앞에 무한한 자비의 보화를 펼쳐 놓으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 보화를 발 밑으로 던져 버린다면, 그것이 과연 정상적인 행동이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성경을 대한다면 이 교리는 로레인 베트너(Loraine Boettner)의 표현대로, 바다의 고기처럼, 숲의 나무처럼 진리를 더욱 풍성하게 하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을 추구하는 신앙 교육을 위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엡 1:4-6).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정으로 그 분의 뜻을 찾고 깨달은 사람들은 누구나 예정교리속에서 하나님의 깊고도 부요한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될뿐 아니라 실제적인 신앙의 유익을 얻는다(롬 11:33). 여기서는 이 교리로 인해 얻게 되는 실질적인 세 가지 유익을 생각해보자.
첫째, 예정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앞에서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를 깨닫게 해 준다.
하나님의 선택 사상은 구원의 전 과정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 삼위 하나님의 통일성 있는 역사가 그 원인이라고 설명될 때에,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성(전적타락)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이 교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에 도움을 준다.
이 교리는 성도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인 위로를 준다. 심지어 신앙으로 인해 박해를 받거나 순교의 자리에 있을 때에라도 불만이나 불신을 갖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앙의 책무를 끝까지 감당하게 한다. 이 교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는 모든 일 중에서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는 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셋째, 이 교리는 선교에 바른 확신을 갖게 한다.
예정교리에 대해 확실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설령 자신의 계획대로 선교가 되어 지지 않는다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에 대한 궁극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말씀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시는 은혜를 힘입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을 증거하는 수단으로 삼아주실지라도 그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모든 역사는 전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예정교리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
1. 구약 성경
• 신 7:6,7
• 왕상 3:8
• 시 105:6; 132:13
• 잠 16:4
• 사 41:8; 45:4
2. 신약 성경
• 마 11:25, 26; 22:14; 24:31
• 막 13:20
• 눅 18:7
• 요 1:13; 10:26; 13:18; 15:16; 17:9
• 롬 8:28-30, 33; 9:11-13, 16, 23; 11:5, 7
• 행 5:31; 13:7, 48; 18:27
• 엡 1:3-5, 11; 2:8, 10
• 빌 1:29; 2:12, 13
• 골 3:12
• 고전 1:27-29
• 살전 1:4; 5:9
• 살후 2:13
• 딤후 1:9; 2:10
• 딛 1:1
• 히 5:9
• 벧전 1:2; 2:9; 5:13
• 벧후 1:10
• 유 4
• 계 7:14; 13:8; 17:8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자료출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66
예정 교리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모순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일명 TULIP 교리라고 부르는 칼빈주의 5대 가르침(The Five Points of Calvinism) 중에서 U자(字)에 해당하는 두 번째 내용이다. 앞서 진술한 바와 같이 도르트 총회(1618-9)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항변에 대한 칼빈주의자들의 반항변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 회의의 전체적인 논점은 예정교리(론)와 관련되어 있다. 예정 교리는 교회 역사 가운데 정통 교회의 사상적 맥을 이어가는 믿음의 선진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신앙고백이다. 루터뿐 아니라 칼빈 그리고 그 이후에 나타난 무수히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예정교리를 성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며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예정교리는 성도들을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고약한 주장처럼 인식되었다. 예정의 예자만 들어도 골치가 아프고, 예정교리하면 쓸데없는 논쟁이 연상된다. 목회자들은 더 이상 강단에서 예정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성도들은 전혀 예정교리에 대해 관심이 없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예정 교리가 개신 교회에서마저 눈총을 받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예정이라는 말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 때문이다. 예정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정 사상은 숙명론이나 운명론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예정을 이러한 절망적인 생각과 연결짓는 사람들은 예정 교리를 말할수록 인간은 한낱 무의미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고 단정한다. 또한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인생의 결론이 이미 결정되어진 것이라면 생에 대한 어떤 종류의 선한 의욕이나 도전은 의미없는 일이며,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결코 공평하지도 자비롭지 않는 변덕스런 폭군같은 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정 교리를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조차 일치된 견해를 갖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교회 역사 가운데 예정 교리는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이 논쟁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오늘날 기독교 거장이라고 존경받는 인물(예를 들어, 알미니우스, 멜랑크톤, 웨슬레, 찰스 피니, 빌리 그레이함등)이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더구나 근대에 들어서 선교의 세계화와 더불어 교회의 외적 성장과 부흥이 교회의 중심 이슈로 떠오르면서 예정 교리는 더욱 애물단지처럼 취급되고 있다. 예정 교리는 오히려 교회와 선교의 확장에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예정교리를 배척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실을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 교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개인적인 학구열이나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더구나 예정 교리를 칼빈주의자들이 강조했던 신학 사상이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예정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정에 관한 많은 증거 구절들이 있지만, 우선 다음의 세 가지 성경 구절을 살펴보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였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위의 성경 구절은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사색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왜 예정 교리를 피해갈 수 없는지, 아니 왜 예정 교리를 의심해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정 교리는 결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예정 교리는 성경에서 가장 일관되게 강조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진술이다. 그래도 의심이 남는다면 바울 사도가 기록한 서신서들의 앞 부분을 보라. 바울의 거의 모든 서신들은 복음을 위해 선택(택정함)을 입은 고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철저한 예정론자였으며, 이에 따라 그가 쓴 대부분의 서신서들의 문두에는 예정 사상이 드러나 있다. 바울이 쓴 서신서들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역으로 말한다면 예정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곧 바울의 서신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
예정(predestination)이라는 단어는 ‘사전에’(beforehand)라는 의미를 지닌 시간 접두사 ‘pre’라는 말과 ‘목적지'라는 뜻의 ‘destination'라는 말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였다. 즉 예정이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그 목적지에 관한 어떤 일을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성경은 모든 인생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오직 두 곳, 천국과 지옥뿐이라고 증거한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사후에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간 단계로서 연옥이라는 제3의 거처를 말하지만 이것은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아주 기본적인 형태로 볼 때, 예정 교리란 인생의 최종 목적지인 천국과 지옥에 가게 되는 일이 인생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정하심 가운데 놓여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신자의 구원에 관한 예정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가운데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사상은 언제나 해결하기 쉽지 않은 많은 물음들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유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장차 될 일을 미리 정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너무나 필연적인 결과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무언가를 미리 정하실 수 없다는 그는 진정한 주권자가 아니며, 모든 것을 자신의 주권대로 행사할 수 없는 분이라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기 전에 그 사람에 관한 구원 문제를 이미 결정하셨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자이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만약 어떤 사람의 구원 문제가 당사자의 의지와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면 하나님은 결코 모든 피조물에 대해 완전한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을 가장 정직하게 인정하는 신앙고백이다.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의 상관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악(죄)의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답을 얻어야 한다. 과연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나님은 악이나 죄의 그림자조차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될 수 없다. 그러나 악조차 하나님의 주권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악이 들어오는 것을 사전에 완전히 차단하지 않으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다는 사실이다. 사실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한 것이 아니라면 악한 일의 결과에 대해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 즉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타락한 사람이 악한 결과를 맞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일에 대해 하나님은 그 어떤 연대 책임을 지실 필요가 없으시다. 왜냐하면 악의 발생과 참여는 하나님의 뜻을 배제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타락한 사람에게 공의를 적용하실 의무가 있을지언정 긍휼이나 사랑을 베푸셔야 할 도덕적 책임이 전혀 없으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스스로 타락한 결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의 책임인양 생각하는 것은 살인범이 중한 형벌을 선고 받은 것을 두고 마치 재판장이 사랑이 없는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세상에서도 범죄한 사람에게는 마땅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린 중대한 범죄에 대한 타당한 처벌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심판받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풀기로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비난받아야 할 내용인가?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타락한 세상과의 관계를 다음의 네 가지 주장을 생각해 보자.
1.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시지 않기로 결정하실 수도 있으셨다.
2.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실 수도 있으셨다.
3.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확보할 수도 있으셨다.
4.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일부 사람들의 구원을 확보할 수도 있으셨다.
일단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주장은 배제되어야 한다. 두 주장은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 이에 반해 사람들이 가장 호감을 갖는 주장은 단연 두 번째이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그 대상이 모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공평성이 잘 접목된 주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대상이 모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만민 구원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주장은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인만큼 구원을 위한 궁극적인 결정권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기회를 주셨다고 언급하지도 않거니와 구원이란 것이 사람편에서 결정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두 번째 주장 역시 성경적이지 않다.
여기서 네 번째 주장은 칼빈주의자들이 받아들이는 내용으로 성경적인 진술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왜 하나님께서 일부의 사람만에게만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하셨는지에 대해 불만을 나타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러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직접적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며, 이 사건에 동참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하나님께서 일부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로 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에서 볼 때, 하등의 문제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에게는 긍휼을 베풀지 않기로 결정하신 일은 부당한 처사인가? 그렇지 않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겪어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댓가이다. 어떠한 죄의 티끌이라고 연루되지 않은 하나님편에서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는 결코 불의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죄값을 묻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에게는 죄를 심판하시는 권리가 있는 동시에 죄를 제거하실 권리도 있다. 하나님에게는 에서의 죄악된 행동을 심판하실 권리도 있지만 야곱의 죄악을 긍휼로써 덮으실 권세가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다. 따라서 예정교리는 피조물(특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행사하심을 전적으로 인정하게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조건적 선택의 의미
종교개혁자들은 예정을 말할 때에, ‘이중예정’(double predestina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즉 하나님의 예정의 범주 안에는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로서의 예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택함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택과 같이 유기 역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기초해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이루어진다. 유기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으로서의 심판에 대한 예정이라면 선택은 죄에 대해 간과하시는 은혜에 관한 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혁교회의 예정 교리의 핵심은 유기의 예정을 강조하고 확인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이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부터 기인된 오직 은혜의 산물임을 강조하는데 있다. 그런 점에서 ‘무조건적’(unconditional)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가장 적절하게 묘사해주는 단어이다.
사실 알미니안주의자들도 창세전 예정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치는 예정이란 조건적(conditional) 예정이다. 즉 하나님께서 미래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지 혹은 믿음을 선택할지를 미리 알고서 그들을 예정하시기로 하셨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선택을 전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서 옳고 그름을 선택할 수 있는 중립적 존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래적으로 의지를 결정하는 마음, 동기, 지향성 자체가 죄로 인해 부패하고 오염되었다. 나쁜 나무에게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듯이 타락한 죄인은 행위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선택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하셨기 때문에 얻게 된 선물이다. 따라서 알미니안적 예정교리는 성경적 구원론과 배치되는 사설(邪說)이다.
한편 무조건적 선택 교리는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오직 은혜에 기초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곧 목적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구원에 관한 한 그 충분한 의미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사역임을 인정하게 된다. 간혹 이 말을 오해하거나 남용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조건이 없으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자신의 불의한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어쩌면 성도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행위면에서 강조되어지는 내용들조차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제대로된 열매를 맺기란 불가능하다. 여기서 무조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데 있어서 우리와 관련된 어떤 것을 조건으로 삼지 않으셨다는 개념이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할만한 그 어떤 조건도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를 조건없이 선택하신다.
예정교리가 주는 실제적 효과
이 교리가 성경의 내용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며, 교육적으로 가르쳐야 할 당위성을 가진 것인가? 하는 점에서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는 몇 가지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적 가르침으로서 교육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런 점에서 먼저 인식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일반 사람들이 이 교리를 이상스럽고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그들의 일반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초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예정교리를 부인하는) 그러한 자들은 선지자, 사도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의 입을 통하여 그 교리를 가르쳐 주신 성령을 통제하는 사람들이다. … (중략) … 이 교리를 침묵케 하기보다는 차리라 온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앞에 무한한 자비의 보화를 펼쳐 놓으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 보화를 발 밑으로 던져 버린다면, 그것이 과연 정상적인 행동이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성경을 대한다면 이 교리는 로레인 베트너(Loraine Boettner)의 표현대로, 바다의 고기처럼, 숲의 나무처럼 진리를 더욱 풍성하게 하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을 추구하는 신앙 교육을 위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엡 1:4-6).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정으로 그 분의 뜻을 찾고 깨달은 사람들은 누구나 예정교리속에서 하나님의 깊고도 부요한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될뿐 아니라 실제적인 신앙의 유익을 얻는다(롬 11:33). 여기서는 이 교리로 인해 얻게 되는 실질적인 세 가지 유익을 생각해보자.
첫째, 예정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앞에서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를 깨닫게 해 준다.
하나님의 선택 사상은 구원의 전 과정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 삼위 하나님의 통일성 있는 역사가 그 원인이라고 설명될 때에,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성(전적타락)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이 교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에 도움을 준다.
이 교리는 성도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인 위로를 준다. 심지어 신앙으로 인해 박해를 받거나 순교의 자리에 있을 때에라도 불만이나 불신을 갖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앙의 책무를 끝까지 감당하게 한다. 이 교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는 모든 일 중에서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는 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셋째, 이 교리는 선교에 바른 확신을 갖게 한다.
예정교리에 대해 확실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설령 자신의 계획대로 선교가 되어 지지 않는다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에 대한 궁극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말씀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시는 은혜를 힘입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을 증거하는 수단으로 삼아주실지라도 그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모든 역사는 전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예정교리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
1. 구약 성경
• 신 7:6,7
• 왕상 3:8
• 시 105:6; 132:13
• 잠 16:4
• 사 41:8; 45:4
2. 신약 성경
• 마 11:25, 26; 22:14; 24:31
• 막 13:20
• 눅 18:7
• 요 1:13; 10:26; 13:18; 15:16; 17:9
• 롬 8:28-30, 33; 9:11-13, 16, 23; 11:5, 7
• 행 5:31; 13:7, 48; 18:27
• 엡 1:3-5, 11; 2:8, 10
• 빌 1:29; 2:12, 13
• 골 3:12
• 고전 1:27-29
• 살전 1:4; 5:9
• 살후 2:13
• 딤후 1:9; 2:10
• 딛 1:1
• 히 5:9
• 벧전 1:2; 2:9; 5:13
• 벧후 1:10
• 유 4
• 계 7:14; 13:8;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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