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그리스도와의 연합
1. “육체의 정욕을 죽이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금식을 비롯한 온갖 금욕의 수단을 이용해 몸을 괴롭히는 일은 열정만 있고 지식은 없는 데서 비롯된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혹독한 금욕을 실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체의 정욕을 다스리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 양심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발견한 성결의 방법을 사람들로 알게 하셔서 아무쪼록 그들 가운데 다만 몇이라도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넓게 하여 큰 기쁨으로 그분의 명령을 즐거이 감사하며 행할 수 있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월터 마샬)
2. 거룩한 삶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경건한 삶을 살다 간 신앙의 위인에 관한 이야기 등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용기를 얻기 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더욱더 죄에 속박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생생해지면서 “나는 아무리 해도 결코 저렇게 위대한 삶을 살 수 없어” 라고 절망하게 된다. 경건한 삶을 독려하려는 가르침이 오히려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다.
3.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마샬 목사가 지적한 거룩한 기쁨이다. 거룩한 기쁨을 알지 못하는 한 아무리 노력해도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
4. 부모가 정한 규칙 자체가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의 행복을 위해 제정된 성경의 계명 자체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해 주는 것은 아니다.
5.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합은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믿는 믿음에 근거한다. 심지어 이 믿음조차도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물이다.
6.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이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없다.
7. 마음과 행위가 점차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 한다. 성화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를 통해 심령을 옭아매는 악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성화라 한다.
8. 바울은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행위를 하도록 주어진 것임과 동시에,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를 보여 주는 기능을 한다고 강조했다.
9. 이신칭의의 교리는 오늘날 신자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진리이다. 하지만 이신칭의 교리를 설명하는 바울의 방법은 매우 참신하고 명확하다. 내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면, 즉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면, 내가 율법을 행함으로써 주장할 수 있는 모든 것들도 죽은 것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의 힘, 노력, 업적 및 내게 있는 그 무엇이라도 영적 구원을 얻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나 자신의 노력의 공로가 되든지 약점이 되든지 그것 자체는 구원 문제와 전혀 상관이 없다. 이는 곧 행위를 비롯해 내 존재와 관련된 모든 것이 죽었다는 말이 된다. 이 말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함축한다. 내 모든 행위와 내 모든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나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다.
10.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일정한 수준의 도덕적 성취와 삶의 의미를 일구어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연합한 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저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자를 마음으로 가까이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내용이다.
11. 우리는 외적 행위를 근거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영적교만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외적 행위란 단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의 영적 교만이 죽게 된다.
12. 영적 교만이 죽을 때,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고, 험담을 하고, 누가 더 신령하고 누가 덜 하고 하는 등의 모든 다툼과 비교가 사라진다. 이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들 사이에 당연히 일어나야만 하는 결과이다.
13. 이미 죽은 자의 행위가 아무런 가치나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듯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의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14.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했다고 해서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이 점을 깨닫게 되면 결코 영적인 절망에 빠지지 않게 된다. 율법의 행위가 죽었다는 것은 율법의 기준으로 나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일도 없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15. 하나님은 이미 죽었다고 판단된 것을 근거로 우리와 관계를 맺지 않으신다. 이 진리를 확신하며,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절망하지 않게 되며, 현재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복종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게 된다.
16. “신자가 죄를 지었다고 해도, 율법이 더 이상 그를 정죄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가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 아래 있지 않는 이상 그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다. 이미 율법은 빈 껍데기로 변했고 권위도 없어졌으며, 그 모든 기록이 다 지워져 취소되었을 뿐 아니라 완전히 조각조각 파괴되었기 때문에 신자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신자의 경우, 하나님은 이미 그를 고소하고 정죄하며 저주하는 율법의 힘을 제해 버리셨다.” (사무엘 볼턴)
17.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수치를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다. 18. 우리의 전 존재와 모든 행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고 한다.
19.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는 바울의 말에 담긴 큰 의미를 온전히 깨달은 기독교인들은 아마 거의 없을 듯싶다. 이 말은 종교적인 행위로 확립된 자아가 죽었다는 말과 같은 문맥에 놓여 있다. 내 노력에 의해 확립된 자아가 죽어버린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존재한다. 따라서 바울의 말은 우리의 전 존재, 즉 하나님 앞에서 갖는 우리의 신분과 상태를 비롯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날마다 계속해서 내 생명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20.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확립하고자 했던 나의 정체성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율법을 성취하신 예수님의 삶이 곧 나의 것이 된다.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 나는 그분과 연합했다. 따라서 나는 그리스도의 신분과 명예와 의를 지닐 뿐 아니라 그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곧 나의 관계가 된다.
21. “성화는 단회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로 나누어 이해해야 한다. 단회적이란 의미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죄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점진적 성화란 성령의 사역을 통해 계속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며,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거룩함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앤소니 후크마)
22. 단회적 성화 때문에 세운 공로나 노력 없이, 나를 대신해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신 분과의 연합을 통해 이 모든 축복이 내 것이 된다. 주님은 우리가 자신의 신분을 공유하기를 원하신다.
23. 우리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람이 될 수 없어” 라고 절망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상, 비록 도덕적인 실패를 거듭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와 업적이 아니라, 그분의 아들과 우리의 연합에 근거해 우리를 평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고백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그 죄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얻은 새로운 신분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24.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아들을 바라보신다는 진리를 깨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25.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될 때, 올바른 태도로 자아를 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비록 수치스러운 죄를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는 태도나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26.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다 보면 죄를 지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다시 말해 행위야 어떻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유지된다고 가르치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그와 같이 염려한다. 물론 구세주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자신들이 아무렇게나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연합한 이들은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소원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신분과 특권을 깨닫게 되면, 오히려 더욱더 죄를 멀리하게 된다.
27.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확신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신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자신들이 연합해 있다는 자신감으로 담대하게 주님을 섬기지 못하고, 어려움과 유혹이 닥치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28.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거룩하다고 여김을 받고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다. 앞서 말한대로 이것이 바로 단회적 성화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새로운 신분을 지닌 자답게 성결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로 주어지는 능력을 얻는다.
29. 우리는 믿음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
30.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속적이고 현재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한다. 믿음은 칭의의 수단임과 동시에 계속해서 성결한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역시 ‘믿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현재의 삶을 산다.
31. 신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면 믿음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해 살아가는 성결한 삶을 가리킨다. 이 개념을 분명히 이해해야만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32. “칭의 교리를 그저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신자들이 많다. 이들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스스로의 노력과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서 옳게 여김을 받으려고 한다. 즉 이들은 과거에 회심을 했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고 있으며, 비교적 신실한 삶을 살아왔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의도적으로 완고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일이 적다는 사실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고 한다. 루터가 제창한 이신칭의 교리를 철두철미하게 신봉하는 자세로, 즉 믿음으로 앞을 향하며,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사랑과 감사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매일매일 성화의 삶을 이루고자 하는 신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리처드 러브레이스)
33. 누구나 “하나님이 믿음을 보고 나를 의롭다 여기실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와같은 은혜의 상태를 유지하려면 나는 고도로 선한 삶을 살아야만 할거야”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다. 하지만 우리의 선함이라는 것은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에, 결국은 죄를 무시하게 되거나 구원을 의심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화 역시 의롭다 함을 받은 믿음에 근거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생각을 뒤집는다.
34.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능케 했던 그 믿음으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성화는 믿음으로 얻은 칭의로부터 연유한다는 것이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핵심이다.
35.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경건한 삶을 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에게 두가지 확신을 심어준다. 이 두가지 확신이야말로 성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첫째는 우리의 새로운 신분이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이며, 둘째는 삶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확신이다.
36.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 행하신 구원 사역은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나의 행위는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물론 내가 죄 짓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도 않으시고, 또 멸망의 길을 가거나 파멸을 불러 올 습관에 빠지지 않도록 징계도 하시지만,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37. 우리는 과거와 현재에 지은 죄를 근거로 자신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성취하신 구원 사역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분은 곧 나의 것이다. 행위에 의해 확립된 자아는 이미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죽어버렸다(롬6:8-11).
38. 행위로 확립된 자아는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새로운 자아는 항상 살아 있다. 나의 옛자아가 죽었고, 새로운 자아가 항상 살아 있다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을 잃게 되고 실패와 자책에 사로잡혀 낙심케 될 수밖에 없다.
39.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에, 육체의 행위가 새로 얻은 나의 신분을 바꾸지 못한다.
40.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무를 이행할 때도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사역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행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자 힘써 노력하는 그릇된 태도를 버리게 된다.
41. 행위에 의존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항상 의문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라는 진리를 확신한다면, 비록 나의 죄가 껍데기처럼 내게 들러붙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의심할 필요가 없다.
42. 은혜의 수단(즉, 기도, 성경읽기와 듣기와 묵상하기, 성도의 교제, 예배, 말씀의 권고, 성례 참여)을 충실히 이행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는 한 올바른 영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더 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스러운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훌륭한 신앙생활을 한다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43. 아무리 철저한 신앙생활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행위에 의존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 한다면 결론은 더 나은 행위를 하려는 집착에 사로잡히든지, 아니면 깊은 절망에 빠지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44. 은혜의 수단이란 이미 온전히 베풀어진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경험하는 수단일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산소’ 처럼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단지 은혜의 수단을 통해 이미 제공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면 된다.
45. 숨을 더 쉬거나 덜 쉰다고 해서 주변의 공기가 변동되는 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은혜의 수단을 더 열심히 활용하거나 덜 활용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획득한 새로운 신분이 바뀌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항상 나와 함께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가 원하는 경건한 삶을 더욱 힘써 살아 갈 수 있다.
46. “우리가 경건 생활에 힘쓴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많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하루 저녁 가정 예배를 빠뜨렸다고 해서, 혹은 곧 시작될 특별한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가정 예배를 속히 끝마쳤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가정 예배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경건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자녀에게 분명히 깨우쳐주는 한편 가족간의 유대감을 증진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가정 예배를 드린다면, 자녀에게 하나님은 관대하지 못한 분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결국 이것은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한다.” (에디스 쉐퍼)
47.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은 좋지만, 빼먹었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도 없고, 한번도 빼먹지 않고 드렸다고 해서 스스로 우쭐한 마음을 가질 필요도 없다.
48. 새로운 본성을 지니게 된 신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non posse non pecarre) 상태에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posse non pecarre) 상태로 바뀌었으며, 장차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광 중에 거하게 될 때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한 상태에 이른다.
49. 하늘나라에서 영화롭게 되기 전까지, 우리는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 존재이며 얼마든지 성령의 뜻을 거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지닌 존재로서 점차 악을 분별하여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성화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의 삶은 더욱 더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된다.
50.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에는 칭의의 은혜는 물론 성화의 은혜가 포함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에 더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말해야 한다. 우리를 속박하려는 뿌리 깊은 죄의 영향력을 물리치려면, 칭의뿐 아니라 성화도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신자의 삶을 지배하는 죄의 능력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파괴되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와 싸워 온 과거의 경험만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을 한정지으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그 분의 부활의 능력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신자는 이미 그분의 능력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다. 옛자아는 이미 죽었고, 신자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신자는 자신의 의지력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이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리처드 러브레이스)
51.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는 신앙을 통해 우리는 ‘이중적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죄책’과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 곧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인내와 능력과 자신감을 가지고 신앙의 경주를 달려갈 수 있다.
52. 죄의 습관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모든 죄의 영향력을 지워 없앨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결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죄의 공격 아래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53. “죄란 내전에서 패배한 군대에 비유할 수 있다. 완전히 항복한 상태에서 무기를 내려놓은 상태라기보다는…계속해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양상을 띤다…. 신자는 죄의 지배 아래서 이미 벗어났지만, 죄는 여전히 최후의 항복을 거부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죄는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도록 한다.” (제리 브릿지스)
54.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한, 죄의 공격에 항복해 버릴 가능성이 많다. 우리의 심령은 죄의 통치에서 해방되었다. 이러한 해방을 믿는 믿음이 죄의 유혹과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55. 새로 얻은 신분은 변함이 없지만, 선을 행하고자 하는 능력은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고, 또한 향상 될 수 있다.
56.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바꾸신다. 이는 자신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성령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사랑하고 복종하게 만드실 때,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있는 능력과 성향을 지니게 된다. 아무리 영적 훈련을 행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답게 살겠다고 굳게 결심한다고 하더라도 마음까지 변화시킬 수는 없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으시다. 겸손히 우리의 뜻과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성령을 의지해야만 그분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대로 성화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다.
57.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곧 새로운 본성을 갖게 되었다는 내적 증거이다. 이러한 마음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생겨난다.
58.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은 기도와 성경공부와 같은 은혜의 수단과는 상관없는 초자연적인 차원에 속하는 일이다. 은혜의 수단은 영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지만, 그런 활동을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정도 영적 훈련을 쌓으면 이 정도 신령해지고, 또 그 이상의 훈련을 쌓으면 그 이상으로 신령해진다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오히려 하나님만이 마음을 변화시켜 새로운 열정과 신앙으로 거룩한 삶을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며 겸손히 회개하는 심령 위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58. 성령에 의하여 변화된 심령으로 은혜의 수단을 통해 영적 생활을 이끌어 나갈 때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성장에도 개인적인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59. “비록 자신의 결함을 깊이 의식하고 있다 해도, ‘나는 여전히 죄인이야. 나는 새로운 피조물로 생각할 수 없어’ 라고 탄식하기보다는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야. 하지만 나는 아직도 많이 자라야 해’ 라고 생각해야 한다.” (안소니 후크마)
60.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언제나 살아있고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의 관계’를 갖는다.
61.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믿지 못하는 마음을 버리고 담대히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분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되었음을 확신해야 한다. 즉 성령과 영광과 그분의 모든 은사가 우리의 것이 되었으며,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 믿음의 능력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고, 사탄과 죄에 대해 단호히 맞서 싸울 수 있으며,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마샬)
62. 우리의 신분은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성화의 삶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할 때,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고 성결한 삶이 가져다주는 축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63. 우리는 늘 죄를 짓고, 발전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과 우리를 비교하며 낙심에 빠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영적인 바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실 것이라고 단정짓는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참된 신분과 능력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상,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미워하지 않으신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다. 우리는 늘 죄와 실패를 경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얻은 우리의 신분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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