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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의사(구원론)

중생(연속적 중생관) 성령세례에 관한 개인적 생각

중생(연속적 중생관) 성령세례에 관한 개인적 생각....
자료출처:http://tesada.egloos.com/2676504
 
1. 소명-수태[중생]-회심[-중생]-칭의-성화
소명-수태[수태로서의 중생=협의]
예수님이 제자12를 불렀을때 그게 바로 연속적 중생관의 소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네요.
그러고 그 소명 이후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여러 이적도 보여주시고 실제 귀신도 쫒을 수 있도록 해주시죠. 이것은 말씀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협의의 중생(그러니까 수태)이 일어나는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을 보면서 구름처럼 사람이 쫒아오거든요. 일종의 청함의 역사가 있죠.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들 12제자조차도 예수님 옆에서 누가 더 높니 하면서 서로 다투는 모습도 보이고 여전히 일반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죠.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기전 빌립의 모습을 보세요. 교회는 다니지만 내면적으로는 세상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시기랄까 그렇습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이들 제자들의 경우에 기도시 기도응답도 이루어지고 귀신도 쫒고(물론 어떤 경우에는 쫒아내지 못하기도 했죠.) 그런 능력이 나타나죠. 베드로 보세요. 예수님이 물을 걸으라는 말을 듣고 실제 걷기까지 했죠.(물론 중간에 빠지기도 하구요.)
결국 이 시절은 믿음은 겨자씨 만한 믿음도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어지고 하지만 수태는 되었기 되었기 때문에 가끔 능력도 나타나고 귀신도 쫒아내고 하지만 그 믿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불변성"이나 "항구성"이 없다는 거에요.(적절한 표현을 찾기가 어렵네요.)
베드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3번부인했고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뿔뿔히 흩어져버리고 믿음에서 떠나버렸죠. 베드로가 적극적으로 부인한 거라고면 베드로외의 제자들은 소극적 부인정도랄까요. 유다도 그렇죠. 즉 소명이 있었고 따라서 수태도 유다의 경우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네요. 구약에서 보면 발람이나 사울의 경우 유다와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죠. 성령도 역사하지만 악령도 역사하는 경우라는 거에요. 베드로에게도 예수님은 대놓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할 정도였죠.
이 과정에서 무화과나무비유나 열처녀비유 혼인잔치비유 등이 나온 것이 아닐런지.
결국 우리 모두가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는 거죠. 사실 제 경험에 비쳐보더라도 처음 교회에 다닐때 분명히 감화가 오는 말씀도 있고 부분적으로 믿어지지만 완전히는 믿어지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어떤 경우는 기도응답도 바로 되기도 해요. 결국 그 당시에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불완전한 믿음이져. 하지만 외형적으로는 믿기는 한다는거죠. 예수님을 입술로는 구주로 언급하기도 하구요. 믿기는 믿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믿음과 별개의 삶을 살기도 하구요.
그리고 이 시점에는 아직 성령이 그들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7장 39절에 보면 예수님이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하고 있거든요.
회심(회개와 믿음)[-출생으로서의 중생=광의]-칭의
그럼 12제자들의 경우 회심은 언제 일어났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다시 나타났을때가 진정한 회심시기가 아닐까 해요. 바로 예수님이 부활에서 예수님을 버린 제자들을 찾아간 그 시점에서 비로서 제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 수반되는 회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서 그들은 전인격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다는 거에요. 이제 삶의 변화가 전인격적으로 일어나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넘어서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므로써 분명한 인격적 만남이 있게 되는거죠.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거든요.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알았고 실제 입술로는 고백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했고 또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한 죄인임에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용서하신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격적으로 체험한것이죠. 사랑만이 그래서 믿음을 완성시킵니다. 따라서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이 나같은 죄인을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의 체험에서 나온다고 봐요. 그 구체적인 체험은 천차만별이겠지만 말이에요. 희미할수도 있고 명백할 수 도 있는거죠. 하지만 분명히 경험적입니다. 누가복음 24장 32절에 보면 엠마오길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죠.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라구요. 바로 엠마오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이 그들에게서는 중생의 경험적인 내용이죠.
요한복음에 보면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3번이나 "너가 이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십니다.(개인적으로 저도 하나님과 만남후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고 동시에 저를 꼭 껴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체험적으로 느낄 수 있었음. 좀더 구체적인 내용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의 간증부분을 참고) 거기에 대해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것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고백이 진정한 회심이며 나아가 출생으로서의 중생이 되는 시점이라고 봅니다. 마치 아이가 낳으면 울음을 터뜨리는 것과 같죠. 그리고 이 중생시에는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이후이므로 드디어 성령(그리스도의 영)님이 우리안에 내주하시게 되죠.
칭의는 회심 또는 출생으로서의 중생에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겠죠. 하나님의 의는 사랑으로 완성되니깐요.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보고 사랑한신다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개인적으로 이러한 음성을 들었음) 마치 아이가 태어났을때 부모가 느끼는 희열과 "사랑하는 내 아들아"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거죠. 중생 이후 당연히 양자 성화 이런 과정이 따라 오겠죠. 주님과 신자간의 사랑관계하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응하며 사는 과정이 당연히 따라오는 거죠.
2. 성령세례[성령충만]
이제 예수님은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죠.(행 1장 5절)
그래서 이들은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이 오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바람같은 소리가 있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보여 그들에게 하나씩 임하면서 성령충만을 받게됩니다. 동시에 방언도 터지게 되져.(물론 이 당시 받은 방언은 외국방언이었습니다.) 성령세례는 그런 의미에서 중생과는 구별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오순절신학에서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합니다. 저는 이것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성령세례는 주로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한 점 나아가 전도할 수 있는 능력과 주로 관련된다는 점에서 중생이후 성화와 관계된 성령사역과도 구별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미 출생한 자가 성도로써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역을 하면서 특별히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한 것이 성령세례라고 봅니다.
바울의 경우를 가자고 추가적인 예로 든다면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나아가 스데반집사의 경우에는 죽이는 현장에 있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바울을 예수님은 다메섹도상에서 만나주십니다. 그 결과 바울은 사흘간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아니하죠. 바울은 그 전에 죄인이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면서 자신이 의인인으로 착각하면 살아왔죠. 그런데 그런 죄인에게 예수님은 다메섹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면서 그를 사랑으로 품어주죠. 그때 사울은 진정한 회심을 경험합니다. 자신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그렇게 핍박했음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꼈을 때 바로 회심의 시점이고 그가 출생으로서의 중생을 하는 시점인 것이져. 즉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죄인임에도 끊임없이 사랑해주시는 주님을 전인격적으로 만났고 그 시점이 바로 중생시점인 것이져. 그리고 그 뒤에 아나니아가 안수해주면서 성령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에서 바로 바울은 전도의 현장을 달려가죠. 이러한 바울의 구체적인 회심과정과 성령세례과정을 보더라도 분명히 구분되는 현상입니다.
이상 제가 생각하는 1. 소명-수태[중생]-회심[-중생]-칭의-성화 그리고 2. 성령세례[성령충만]에 관한 생각이었습니다. 1.은 구원과 그 이후 인격적 변화과 관련되고 2.는 외형적 봉사적 능력과 관련되므로 양자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봅니다. 그러나 서로 영향은 미칩니다.
그리고 [성령세례]와 [수태후 일시적 능력행함]과는 성령내주와 그 영구성 여하에 따라 구분된다고 봅니다.(이것은 성령세례로 성령 즉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출생으로서의 중생시 그 중생의 당연한 결과로서 성령님이 내주하게 되므로 그 이후 우리영혼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성령세례시는 당연히 성령님이 내주해 있고 또 영원이 우리와 함께 있는 상태하의 성령세례라는 의미입니다. 오해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부분 첨가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전체적인 설명은 사실은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에서 비유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9절
3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으로 이르시되
4절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절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절 해가 돋는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절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이 부분은 히브리서 6장 4절-8절을 상기시키죠 특히 8절)
8절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것은 육십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절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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