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마스터스 목사 혼란스런 정신상태가 드러나는 {영혼의 의사}
정이철(바른믿음) 2019.05.0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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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존 머레이 목사님은 제가 청년 시절에 ‘존 머레이 {구속론} 하문호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83)’ 마지막 장인 [제2부 구속적용 ㅡ 제10장: 영화]를 읽으며 ‘존 머레이 목사님 명쾌함’에 감탄을 한 뒤로 존경해 왔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존 머레이 {구속론}에 적힌 중생론이 개혁 신학의 “변종”, “미혹”, “원조”라는 말로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에서 이단시 당했다.’는 소식과 존 머레이 목사님 반려자이셨던 발레리 놀턴 머레이 사모님 소식, “오해했다며 다시 한 번 살펴 달라 하신 발레리 놀턴 머레이 사모님 간절한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한 피터 마스터스 목사와 발레리 놀턴 사모님과 말다툼이 있었다. 그리고 피터 마스터스 목사 악의적인 선전이 계속되자 발레리 놀턴 머레이 사모님이 날마다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신원)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하문호 목사님께서 1983년에 우리말로 번역하신 {구속론}이 얼마 전에 장호준 목사님께서 다시 번역하셔서 우리나라에 출판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는 생각과 함께 발레리 놀턴 머레이 사모님께 역지사지 심정을 느꼈습니다.
역지사지 심정은 “소천 받으신 주님의 종이라고 할지라도, 그분 이름이 까닭 없이 더럽혀질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이 더럽히지는 것과 같이 여기시며, 이를 알면서도 이 일을 방관하는 자에게도 죄 없다 하지 아니하십니다.”는 故 최낙재 목사님 가르침이 더욱더 부추긴 감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비평의 은사를 생각하며 ‘텍스트 비평’을 위해 {영혼의 의사}를 구입한 때는 2011년 12월 중순 무렵이었습니다.
{영혼의 의사}를 읽으며 ‘좌충우돌 뒤죽박죽 자중지란 논리전개를 일삼는, 혼란스런 피터 마스터스 정신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텍스트 비평’을 위해 ‘존 머레이 {구속} 장호준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1)’ [제2부: 구속의 적용]을 다시 읽으며 생각한 게 있습니다. ‘손성은, 윤영상, 노승수 목사님께서 {구속}에서 [거듭남]장조차도 읽지 않으신 채 자신들 신앙의 선조 존 머레이 목사님, 그분 중생론을 이단시한 {영혼의 의사}를 중생론 교과서로 삼는, 목사로서 지적知的 불성실을 저지르셨구나. 하나님 말씀을 맡은 목사로서 직무를 다하지 못한 불충을 하나님께 저지르셨구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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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순중 마을}에 쓴 글입니다.
‘부흥과개혁사’에서 ‘독자 정신건강’을 위해 ‘폐기해야 할 소설’로서 {영혼의 의사}
사계四季 (2013.09.13. 18:21)
“중생은 믿음(회심)을 앞선다.”는 개혁 신학 중생론 명제는 ‘믿음(회심)은 중생의 열매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믿음(회심)은 중생을 앞선다.”는 알미니안 신학 중생론 명제는 ‘중생은 믿음(회심)의 열매다.’는 뜻입니다.
2011년 12월,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를 읽기 전이었습니다. {양무리 마을}에서 “순간적인 중생론을 믿게 되면 복음 전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복음 전도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하시는 연중론자 분들 주장을 접하며 저는 “예정론을 믿게 되면 복음 전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복음 전도는 무용지물이 된다.” 하는 알미니안 주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은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 중생론 교과서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 손성은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년 3쇄판)’ 114쪽입니다. 배경색은 제가 칠합니다.
순간적 중생관은 정통 칼빈주의 주류 견해는 아니다.
이번 장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중생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까닭은 이러한 견해가 정통 칼빈주의 주류가 아님에도 이상하게 점점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와 같은 변종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만약 누군가가 순간적 중생 견해에 미혹된다면 그들 복음전도 노력은 모두 무용지물이 돼 버릴 것입니다.
“중생은 순간적으로 단번에 이뤄진다.”는 견해는 ‘회심자가 회심 경험의 초기 단계에서 눈 깜빡할 사이에 전적으로 중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추구하거나 분투하는 것이 필요 없고 어떤 설득도 필요 없게 됩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갑작스럽게, 그리고 전폭적으로 회심을 하게 되면 그 결과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순간적 중생관은 중생을 완전한 쇄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죄인을 완전히 회심한 사람으로 바꿔 주는 변화가 한순간에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되면 회개와 믿음은 의식적인 회심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열매가 됩니다.
“중생은 순간적으로 단번에 이뤄진다.”는 주장은 이른바 “순중론”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 견해를 ‘연중론’ 주장으로 하자면 “수태는 순간적으로 단번에 이뤄진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갑작스럽게, 전폭적으로 회심을 하게 되면 그 결과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 피터 마스터스 목사 이 주장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회심 →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필요를 느끼게 됨> = <회심 → 회개(하고)와 믿음>입니다.
“이렇게 되면 회개와 믿음은 의식적인 회심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열매가 됩니다.” : 이 글 첫머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회개와 믿음, 회심은 중생의 열매다.”는 주장은 당연히 개혁 신학 중생론 견해입니다. 그런데 “회개와 믿음은 의식적인 회심의 전제조건”1)이라는 피터 마스터스 목사 주장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회심의 전제조건은 회개와 믿음’이니까
<회개와 믿음 → 회심>입니다.
‘화살표(→)’는 ‘후後’로 읽으시면 됩니다.
20세기 개혁 신학의 보물 단회 순간중생 시 회심과 확정성화 진리를 해박한 성경 원어 실력으로 밝히신 故 존 머레이 목사님, 존 머레이 목사님 ‘순간중생론’을 “변종”, “미혹”,이라는 말로 정죄 이단시한 뒤, 한 문단 속에서도 피터 마스터스 목사는 <회심 → 회개와 믿음>이라고 했다가 <회개와 믿음 → 회심>이라고 하는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 = 회심>이라는 개혁 신학 중생론을 모르시는 까닭 때문일까요, 아니면 타고난 난독증 때문일까요? ㅡ 이 판단과 의문은 ‘{영혼의 의사} 번역자 손성은(홀리조이) 목사님이 번역을 똑바로 하셨다.’는 가정 아래 하는 판단과 의문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의사}에서 인용한 글에서 마지막 문장에 적힌 “회개와 믿음”이 예정된 자 ‘무’의식 속에 심으신 ‘회개와 믿음(믿음의 씨)’를 뜻한다면2), “증세, 난독증”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미리 사과합니다. 그러함에도 “회심을 하게 되면 그 결과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라는 문장, 좌충우돌 자중지란 서술 때문에 사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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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개와 믿음은 의식적인 회심의 전제조건”이라는 피터 마스터스 목사 주장은 {영혼의 의사} 66쪽 ‘회심 4단계: 출산’에 적힌 “이때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명백하게 새로운 본성 (a new nature)을 받게 되고 상당한 정도로 확신하게 됩니다.”는 주장, 이 주장 연장 선상에 있는 주장입니다. 즉, 똑같은 주장입니다.
2) 물론, 예정된 자 ‘무’의식 속에 심으신 ‘회개와 믿음(믿음의 씨)’, ‘새로운 본성(값진 생명의 씨)’을 뜻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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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15년 삼일절을 앞두고 {페북} 제 담벼락에서
한국 교회 연중론 수장 손성은 목사님과 있었던 토론입니다.
박채동 <손성은 목사님, 답변 감사드리며 질문 하나 드립니다. ②>
손성은 목사님 답변 댓글들을 읽으며 생각한 게 있습니다. ‘임진년 2012년 여름 {연중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부터 2 년 반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개혁 신학 중생 개념을 정리(이해) 못하셨구나.’ 였습니다.
그 예 하나는 오늘날 개혁 신학에서 ‘회심’은 ‘믿음과 회개’를 뜻함에도, ‘여전히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개념을 연중론에 맞춰 이해하려고 애쓰는 나머지 혼동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ㅡ손성은 목사님 답변을 반론하는 제 답변은 뒤로 미루고ㅡ 2012년 여름 {연중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 ≪“중생은 믿음에 선행한다.”는 개혁신학자들 주장은 잘못됐습니다.≫ 하셨던 손성은 목사님께 질문 하나 드립니다.
다음 ‘≪ ≫’ 속 글은 {영혼의 의사} 116쪽에 있는 글입니다. <전통적인 칼빈주의 중생관은 연속적 중생관이다.> 소제목에 있는 글입니다.
≪칼빈은 ‘중생이나 새로운 출생을 다소 넓은 의미로 사용’했고, 그 용어를 ‘사람이 새로워지는 전체 과정을 나타내는 매우 포괄적인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새로운 생명을 출발케 하는 신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회심(즉, 회개와 믿음)과 성화까지도 포함’했습니다.≫
“중생은 순간이다.”, “중생은 전인의 완전한 변화다.” 하셨던 청교도 신학자들께서는 필요하실 때는 ‘하나님만의 단독사역으로서 중생’과 ‘중생에 따른 인간의 반응으로서 회심, 혹은 중생의 발현으로서 회심’을 구별해 쓰실 때도 있으셨지만, ‘중생’과 ‘회심’을 교차(포괄)해 쓰셨습니다. 즉, 청교도 신학자들께 ‘중생’은 곧 ‘회심’을 뜻하는 말이었고 ‘회심’은 곧 ‘중생’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를 최근 개혁 신학은 “넓은 의미의 중생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칼빈 선생님 중생 개념은 청교도 신학자들 ‘넓은 의미의 중생 개념’에 ‘성화’까지 더한 개념, 청교도 신학자들 중생 개념보다 더 ‘넓은(포괄) 의미의 중생 개념’이었습니다. 인용한 {영혼의 의사} 위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새로운 생명을 출발케 하는 신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회심(즉, 회개와 믿음)과 성화까지도 포함’≫한 ‘넓은(포괄) 의미의 중생 개념’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개혁 신학은 청교도 신학자들 ‘넓은 의미의 중생’ 개념에서 ‘좁은 의미의 중생’을 구별해 내어 “중생은 믿음에 선행한다.”는 명제를 세웠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질문 드립니다.
≪‘새로운 생명을 출발케 하는 신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회심(즉, 회개와 믿음)과 성화까지도 포함’≫한 칼빈 선생님 ‘넓은(포괄) 의미의 중생’ 개념에서 최근 개혁 신학이 구별해 낸 ‘좁은 의미의 중생’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2015년 2월 25일 오전 00:09
손성은 <부언>
박채동 님께서 “개혁 신학에서 ‘회심’은 ‘믿음과 회개’를 뜻함”이라고 하면서 제 개혁 신학에 대한 무지를 조롱하셨는데, 어떤 개혁 신학에서 그렇게 회심과 믿음과 회개를 이해하고 있는지 근거를 대보시겠습니까?
2015년 2월 25일 오전 8:50
박채동 <먼저, 손성은 목사님 ‘부언’ 댓글에 답변합니다.>
저에게서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은 개혁신학자가 아닌 ‘짬뽕 신학자’입니다만, 손성은 목사님은 ‘정통 개혁신학자’로 생각하시니,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에 적힌 문장으로 그 근거를 대 드립니다.
다음 ‘≪ ≫’ 속 글은 {영혼의 의사} 116쪽에 있는 글입니다. <전통적인 칼빈주의 중생관은 연속적 중생관이다.> 소제목에 있는 글입니다.
≪칼빈은 ‘중생이나 새로운 출생을 다소 넓은 의미로 사용’했고, 그 용어를 ‘사람이 새로워지는 전체 과정을 나타내는 매우 포괄적인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새로운 생명을 출발케 하는 신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회심(즉, 회개와 믿음)과 성화까지도 포함’했습니다.≫
이 문장에서 손성은 목사님이 저에게 ‘근거를 대라.’ 하신 그 근거는 ≪회심(즉, 회개와 믿음)≫입니다.
2015년 2월 25일 오후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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