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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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의사(구원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라_김홍전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라_김홍전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라_김홍전




믿음이란 위로부터 성도에게 단번에 내려오는 것이지 조금씩 자꾸 더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서 1장 3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우리가 다 같이 받은 것 너도 받고 나도 받은 구원을 제목 삼아서 너희한테 편지를 하고 싶었다.’ 그런 말입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해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우리가 함께 나눈 구원에 관해 내가 너희에게 편지를 좀 하려고 하던 참에 ‘아, 이것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어떤 강력한 동기가 생겼는데, 뭐냐 하면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서 너희가 힘써 싸워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표면상으로는 아무 박해도 없지만 내부적으로 이사상(異思想), 괴상한 종교 현상이 침해해 참 신앙인 체하고 차츰차츰 창궐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간곡한 편지를 쓸 필요를 더욱 느끼고 ‘아, 안되겠구나. 성도에게 단번에 내리신바 믿음의 도를 위해서 너희들은 일어나서 싸워야겠다.’ 하고 편지를 했습니다. 이것이 유다서를 보내는 목적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것이지 자기가 믿어 보려고 애를 써가지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집이 날아서 공중으로 올라갈 필요가 있다고 할 때 “날아서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갑니다.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천 번을 외워 봐도 집이 날아서 공중으로 안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저 내 심리 여하에 따라서 일이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자기 혼자만의 문제라고 해도 “아, 그러면 내 몸뚱이 하나가 날아서 공중으로 올라가야겠다. 올라가야겠다. 예. 믿습니다. 믿습니다.” 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과 같이, 명백한 과학적인 현실을 부인하고 동정녀가 아들을 낳으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데는 사람의 보통 이론과 보통 정신으로는 결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주시는 믿음’으로 비로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믿었다 안 믿었다 하고, ‘과연 그럴까, 아닐까?’ 한다면 그것은 안 믿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바다 물결이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것과 같으니 이런 사람은 아무것도 주께 받을 생각을 말아라. 두 마음을 품어서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믿음 쪽으로 기울어졌다 부인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는 이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참 믿음이란 그것을 단번에 주시면 그것으로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마음 가운데 회의가 있어 방황하고 괴로워하다가 어느 때는 조금 안심하고 안정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색의 과정에서 인식이 얼마나 명료한가, 또는 재료가 얼마나 풍부한가에 따라서 자꾸 왔다 갔다 하는 것뿐이지 믿음이 새로 생겨서 조금 믿다가 믿음이 금방 또 희박해져서 안 믿다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불신 상태의 또 한 가지입니다. 정면에서 반대하는 것만이 불신 상태가 아닙니다. 때로는 회의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럴 듯하게 여겨서 따라오더라도 ‘절대로 그렇다.’고 확정하고 요지부동하게 되지 않는 상태라면 다 불신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을 기독교의 신앙인 것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를 믿는 식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철학적 사색이 믿음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믿음과 동시에 새로운 생명이 그곳에서 역사해 생명으로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 생명은 하나님의 자식의 생명인 까닭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자식다운 격을 구전(俱全)하게 드러냅니다. 마치 식물의 생명은 식물인 것을 나타내고 동물의 생명은 동물인 것을 나타내고 사람의 생명은 사람다운 것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의 생명과는 구별되는 영혼의 활동이 없다면 사람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식은 하나님의 자식다운 품격을 충분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자식다운 생명의 특권과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식다운 영혼의 활동 속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복하고 의지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생하게 하시면 그 속에 있는 영혼의 성향(disposition)은 늘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지 사람이 조작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리해 하나님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필연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부분까지를 중생이라 하는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성신을 의지해서 구별된 하나님의 자식다운 생활의 행보를 하는 성화聖化의 생활입니다.


믿음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자식다운 마음 상태의 구체적인 표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이므로 말씀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나에게 요구하고 규제하고 명령하는 것을 따르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목표를 세우고 노력해 가는 도덕적인 노력과는 동질의 것이 아닙니다. 신자라고 할지라도 과거의 악습에 젖어서 나태해 정당하게 장성하지 못하거나, 성경을 밤낮 읽고 분해하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자기 욕심에 집착해서 믿음이나 능력이 그 속에서 지배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순종의 생활은 희박해지는 것이고 결국 옛사람이 자기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사욕에 속한 신자의 상태입니다.


바울 선생은 고린도전서 3장 1절에 댓바람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대할 때 신령한 자를 대함과 같이 할 수 없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 곧 젖으로나 먹고 밥으로 먹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대함과 같이 대하노라.”고 썼습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 혹은 옛날 번역대로 하면 ‘사욕에 속한 자’로서 자기 욕망에 속해서 사는 자들이라고 평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개혁 교회가 강력하게 강조하는 바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들어갔다고 해서 처음부터 아주 위대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고 그 사람 장성의 그릇에 따라 차츰 족적을 나타내고 열매를 내게 됩니다. 이것은 물론 중생한 사람이 어떻게 정상적으로 자라느냐 하는 거룩한 도리 안에 포함돼 있는 내용입니다. 갈수록 좀 더 어려운 듯하고 좀 더 괄목한 만한 일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면서 일을 이루고 열매를 맺어서 장성의 자태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개혁자들은 믿음이 처음에 들어갔을 때의 상태를 “‘믿음의 씨(semen fidei)’가 그 속에 떨어져 싹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믿음이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자꾸 맺어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 여하에 따라 불신(不信)과 신(信)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신앙이라는 위치에 안착하는 것이 믿음이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일반 종교에 있는 현상이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계시와 거룩한 도리에 의한 참된 신앙은 아닙니다. 만약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에서 그러한 현상이 발생했다면 사이비적인 것이요, 한마디로 불신의 한 증상인 것입니다. 신이든지 불신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명확한 점을 모호하게 할 때에 개혁교회는 이상하게 변질되고 맙니다.


개혁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말씀과 더불어(cum verbo)’라는 말을 써서 “성신님께서 함께 일하시는 가운데서만 말씀은 말씀으로서 권위를 확실히 실증한다.”고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어떤 사람의 속에는 성신님께서 함께 일하시는 것이 없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그것 자체가 신통력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개혁교회의 강렬한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편언척구가 들어가도 금방 무슨 희한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말씀은 마치 양날 선 칼과 같아서 어떤 사람에게 들어가더라도 효과를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받고 믿지 않았을 때에는 무서운 심판의 조건이 됩니다. 사망에 이르는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향기가 되는 것이고, 생명에 이르는 사람에게는 생명에서 다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고후 2:16]


이런 것들은 역사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믿고 내려오던 개혁 교회들이 언제든지 정신 차려서 믿고 나오던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로서 대접할지라도 이 부분에서 서로 의견을 달리할 때 “혹시 그런 설(設)도 있을 수 있나 보다.” 하지 않고 “아니다.” 하고 나가는 분명한 문제들입니다. 어떤 것은 우리가 다 부족하니까 뭐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단언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교리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는 신통력 같은 것이 있어서 성신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도 있겠지.” 그렇게 안 믿습니다. 그러므로 잘 알지 못하고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다.” 하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 김홍전 {구원의 신앙} (서울: 성약출판사, 1999) 33쪽~38쪽.

http://blog.daum.net/7gnak/15721142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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