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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의사(구원론)

sinclair ferguson 중생, 재창조_이주태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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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lair ferguson 중생, 재창조_이주태선교사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묶는 일에 다양한 차원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는 죄와 사망의 질서 즉 육체와 마귀에 의하여 지배당하다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새로운 질서에 지배를 당한다는 뜻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이 이루는 상호결합은 새로운 인성을 창조하는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간다.

이것이 회개요 성화다.

그리스도와 연합 안에 있는 생명은 다양한 차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안에서 그분과 동일시되는 것을 포함하며 또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와의 관계를 포함한다.

중생은 오로지 하나님이 창시자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믿음과 양극단을 이루는 양면적인 것이다.

실타래처럼 중생과 믿음은 분리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단독적인 사역이 끝나고 어디에서 인간의 행동이 시작되는지를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중생과 회심은 다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종말에 완성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영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백성에게 새로운 마음과 정신을 주시는 일이다.

또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의 양식을 낳는다(겔36:24-27).

이 변화는 세례의식과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오직 성례전적인 관점에서이지 기계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다.

상징이 지시하는 의미인 것이다.

칼빈은 중생과 회개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중생은 구원은혜가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마19:28에서의 중생은 만물의 새로워짐,우주의 재탄생이라는 의미로 기록되었다.

즉 중생의 마지막은 부활과 양자됨이 실현되는 것이다.

중생은 모든 피조물의 구원의 시작이며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의 설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딛3:5에서 중생은 내적인 변화를 포함한 종말론적인 새로운 질서를 의미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하여 시작된 새로운 질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역사로 새로운 탄생을 통해서 시작된다는 것이 요한신학의 근본주제이다.요1:12-13은 요3:5-8의 의미이다.

요한의 하나님으로부터 난 이라는 표현은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이삭과 같은 존재로 곧 성령의 권능으로 인하여 난 자로 보았다(갈4:29).

중생의 원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벧전1:3).

이치상 어떤 존재이든 그와 같은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열매이다.

그의 부활로 인하여 중생이 이루어졌으며 그의 재림으로 인하여 중생한 생명이 완전함에 이를 것이다.

즉 중생의 열매는 성도의 부활인 것이다.

곧 중생은 부활의 본질인 것이다(롬8:23).

즉 오순절에 오신 성령은 부활에 이르게 하시는 미래의 성령이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기적들이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것을 확증한 것인 것처럼 중생은 성령이 믿는자들에게 가져 올 도래할 시대의 표징으로 준 것이다(히6:4-5).


중생은 성령의 주권적이고 단독적인 사역이다.

태어났다는 비유는 그 자체에 급격하고 새로운 시작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이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있다.

곧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

중생은 오직 위로부터 영으로 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나는 것이다(약1:18).

그 어떠한 종류의 인간의 영향력도 개입되지 아니한 것이다.

인간은 결코 영적인 것을 낳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했을 때 육은 죄성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성을 의미한다.

육체는 하나님과 격리되어 있는 무능한 존재이다.

육체란 인간의 근원적인 부패성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떨어진 새로운 탄생이 요구되는 인간을 의미한다.

육체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고 예배할 수 없는 존재이다(고전2:14, 요4:23-24).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은 중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중생의 본질은 지적인 조명을 포함한다.

고로 중생한 사람은 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된다.

요한은 이것을 기름부음이라고 하였다(요일2:20,27).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직접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를 알게 된다(렘31:33).


중생의 본질에는 죄에 의해 지배되던 인간의 의지가 해방된다는 측면이 있다.

의지가 하나님 나라 쪽으로 향하도록 빛을 행하도록 성령이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요3:20).


또한 중생의 본질에는 깨끗히 씻어 낸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이 물로 난다는 말의 의미이다.

물은 겔36:25-27처럼 성령의 이중적 사역 곧 성령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면서 심령을 정결케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딛3:5과 고전6:11에서 중생은 씻음이요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중생과 더불어 인간의 욕망들은 새로운 감흥의 폭발적인 힘에 의하여 갱신되고 깨끗하게 씻겨 진다.

곧 중생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원하는 것을 하게 하는 새 성품이 생기는 것이다(겔36:27).


고로 중생에 있어서 성령이 변화시키는 것은 전 인격적이고 전 본성적이다.

총체적인 변혁이다.

개인의 삶과 근본적인 욕구까지 영향을 미치며 그의 존재에 손대지 않는 부분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인격은 전적으로 부패해 있다(렘17:9).

곧 인간의 존재에는 더럽혀지지 아니한 부분이 없다.

중생은 이 부패성을 역전시키는 것이다.

즉 중생이 인격을 완전하게 거룩하게는 하지 않지만 보편적으로 포괄적으로 영향을 준다.

중생은 정신적, 도덕적, 육체적인 새로움을 준다(빌3:21, 고전15:42-44,골3:10).

중생의 마지막 골은 부활과 영화이다.


성령이 새롭게 탄생하게 하는 일은 신비의 영역이다.

예수님은 이 성령사역을 바람에 비유하셨다(요3:10, 전11:5).

성령의 임재는 바람처럼 그 결과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우리는 다만 중생한 사람들이 표현하는 믿음과 회개와 변화의 소리만을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중생의 두 가지 특징은 인격적으로 변화된다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만이 단독으로 이 일을 수행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해서 사람이 강요를 받지 아니하고 자원해서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달려오게 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인간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동하게 하는 동기와 원천이 되시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과 의지와 감정과 인격을 가진 존재이다.

그런데 성령은 개인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의 영역에서 활동하신다.

고로 중생은 진공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속에서 일어난다.

곧 마음은 복음을 통해서 설득되고 감성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을 받으면서 믿음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인격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고로 중생에서 성령의 주권이 구원에서 믿음과 충돌되는 개념이 아니다.

왜냐 하면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기기 때문이다(롬10:14).

성령은 말씀을 수단으로 거듭나게 하신다(벧전1:23, 약1:18 요15:3).

하나님의 말씀은 의식할 수 있는 수준에서 반응하고 행동하도록 작용하신다.

워필드는, 모든 것의 뿌리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보시는 행동이 자리하고 있다. 새로운 탄생은 오직 성령님의 직접적인 창조의 행동이다. 이 새로운 탄생은 말씀의 부르심을 통해서 사람을 의식을 자극하여 성령을 순종하게 한다.

즉 중생의 잠재적인 측면은 성령님이 의식적인 측면은 말씀이 행하신다. 고 하였다.

에크는 신적인 원인을 의미하는 전치사이며 통하여 디아는 도구적인 원인을 의미한다.


중생사역은 인지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을 포함한 전 인격을 변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말씀의 외적 계시와 성령의 내적 조명이 동시에 필요하다.

믿음은 지식을 포함하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믿음이 언제나 복음의 가르침과 함께 등장한다.

중생과 그것이 가져다 주는 믿음은 말씀선포를 모체로 일어나는 것이다(롬10:1-15).

말씀과 성령은 서로 협력하신다.


개인의 중생은 만물의 마지막 중생과 비견된다.

종말론적인 중생과 부활은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일어날 것이다(롬8:11).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초래될 것이다(살전4:16).


믿음은 성령사역의 열매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기에 성령의 활동과 인간의 반응 사이에 긴장이 있다.

마치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고난도 믿음처럼 선물이듯이 말이다(빌1:29).

고난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 고난의 선물처럼 믿음도 양손에 들려진 포장상품은 아니다.

믿음은 성령에 의해 지도를 받는 전인격의 행동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는 것처럼 말이다.

고로 믿음은 선물이요 동시에 행동이다.


엡2:8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보이시기 위해 우리를 들어올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능동적인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믿음도 선물이다.

즉 우리가 믿음의 행위로 구원받았지만 믿음은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다.

오직 믿음은 선물이다(엡6:23, 벧후1;1).

회개도 선물이다(행5:31, 11:18, 딤후2ㅣ25).

그러므로 믿음의 능동적인 행사는 성령의 은총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믿음이 본질은 그리스도를 능동적으로 받아드리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믿음의 본질이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자기 공로와 자기 의존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믿음은 구원을 인간의 공로로 들리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것이다.


믿음의 구원하는 능력은 그 믿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의존하는 전능자 안에 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믿음이 하등의 구원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구원하는 권능이 믿음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한 순간도 건설적이거나 창조적인 것이 아니다.

오로지 약속 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이 전인격적으로 믿음에 참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침범하지 않는다.

은혜에 의한 구원의 진수는 구원의 은혜를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동참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옆으로 제쳐진 것이 아니라 최대한 개입하는 것이다.


중생에 있어서 그의 증거인 믿음과 회개는 동일한 하나이다.

우리는 성령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우리는 중생의 체험을 통해서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부활을 공유한다.

우리는 중생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죽었고 의에 대하여 살아났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옛 사람을 못박아 죽인다.

성령께서 새로운 의지를 주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빌2:12-13).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 것을 결단한다.

땅의 것을 포기하고 위엣 것을 바라보며 산다.


요일3:9과 5:18에 성령으로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선포가 있다.

많은 종들은 이 죄를 압도적인 습관을 가지고 짓는 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말미암은 죄의 통치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한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죄가 아닌 의와 은혜가 압도한다는 것이다.

은혜가 죄를 압도하면서 왕 노릇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회개는 중생사역에서 성령의 사역이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들이다.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초래되었는가?

개인적으로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구주요 주로 믿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인식이 없이는 믿음을 통한 칭의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카토릭은 세례를 받음으로 중생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생을 통하여 죄에 대한 죄책과 형벌이 제거되지만 죄의 불씨는 남아 있기 때문에 마지막 칭의를 위해서는 자아를 사랑하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개인은 하나님의 마지막 은총을 받도록 죄를 미워하고 회개하여야 한다고 한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후회(atrito)와 참회(contrito)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칭의와 성화의 차이를 구별하였고 법정적인 칭의는 신자의 삶의 마지막에 주어지는 은총이 아니라 처음에 주어지는 은총으로 보았다.

고로 고해성사는 필요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순절에 요16:8-11에 있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

현제에도 그러한 깨달음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깨달음은 회개와 믿음과는 다른 것이다.

깨달음이 개인으로 하여금 칭의로 나갈 마음을 갖도록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죄에 대한 회개는 그리스도에게 굴복한다는 믿음에 앞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믿음과 회개는 분리할 수 없는 성령의 선물이다.

신약성경은 회개하고 믿으라! 회개하라! 믿으라! 라는 형태로 전도하였다.

즉 회개와 믿음을 동시에 표현하였다.

즉 회개의 반응이 믿음으로 나타났다.

곧 믿음과 회개는 성령사역의 본질이기 때문에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고로 믿음과 회개의 순서를 말씀한 것이 아니라 또 둘 중 하나가 언급된 것이 아니라 하나만 말했어도 실제로는 둘을 말한 것이다.

믿음은 항상 회개하는 것이다.

고로 참된 회개는 언제나 믿음을 동반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과 회개로 표현되지 아니하는 중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의식의 수준에서 볼 때 깊은 죄의식에 초점을 맞춘다면 회개가 더 우세한 감정으로 나타날 것이고 죄에 대한 용서와 용납하심에 촛점을 맞춘다면 믿음이 우세하게 되면 개인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에 압도될 것이다.

성령의 신비하고 다양한 사역으로 인하여 회심에서의 심리학적 감정적 상태가 다양하게 다르더라도 믿음과 회개의 요소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고로 죄에 대한 후회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열정이 없거나 기쁨으로 복음을 받지만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일시적인 믿음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죄에 대한 미움이 이르지 아니하고 후회수준에서 그치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소멸되어버릴 것이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siervodecristo/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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