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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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의사(구원론)

존 머레이 <중생> (2)

존 머레이 <중생> (2)


존 머레이 <중생> (2) 
 
    자, 그러면 “물‘이란 말을 사용해 니고데모의 마음속에 전달하실 것으로 기대되는 종교적 개념은 무엇일까? 물론 그 개념은 ”물“이 종교적으로 사용된 종교적 전통과 또 한편으로는 니고데모의 생활과 직업 등 바로 그 배경을 이루고 있는 실상황과 관련돼 있다. 그리고 물의 종교적 의미는 구약에서, 또 유대주의의 의식에서, 그리고 현실 상황 하에서 말해진 바로 그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의 해답이 나온다. 물의 종교적 사용, 즉 물이 상징하는 종교적 의미는 일관된 하나의 방향을 지시하는데 그것은 곧 정화(purification)이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전하시고자 했던 내용이 바로 이 정화 개념이라고 보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은 니고데모의 주요 관심사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정화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주님의 가르치심은 독특한 죄와 또 그가 고침받지 않으면 안될 필요를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한 데 특색이 있다. 바리새인의 독특한 죄는 자만과 자칭 의였다. 그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부패를 철저히 깨닫고, 근본적인 정화가 필요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물로 남”(born of water)이란 말이 힘 있게 전해 주고자 하는 교훈의 요지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오직 죄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됨으로써만 된다. 정화의 물은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또 그 나라의 회원 되기에 적합한 새 생명을 낳게 하는 산실이다. 이것이 중생에서 정화의 국면이다. 중생은 미래를 향한 새 건설일 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한 부정이다. 중생은 의로 재창조될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순결케 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영으로 남”(born of the Spirit)이란 말이 성령으로 난다는 뜻인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참조. 요 3:8, 1:13, 요일 2:29, 3:9, 4:7, 5:1, 4:18)  그러므로 이 출생은 신적이며 초자연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는 성령께서 중생의 근원자시며 수행자시기 때문이다. “영으로 남”이라는 친숙한 이 표현 속에 담긴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남”(born)이란 말의 정확한 의미가 부성적 출생(begetting)인지 모성적 출산(bearing)인지는 확실치 않다. 신약에서 사용된 예를 보면 양쪽을 다 의미할 수 있다. 만일 전자라면 그 의미는 인간의 생식生殖에 있어서 부성적 활동에서 유추類推한 남성의 낳게 하는 행위다. 만일 후자라면 그 의미는 어머니의 활동을 모방한 것으로 여자의 춘산 행위, 곧 어린아이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뜻 가운데 어느 것이 이 경우에 더 적합한지 확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표현된 진리에 대해 본질적 차이를 가져 오지는 않는다. 우리가 성령의 부성적 출산을 생각하든 모성적 출산을 생각하든,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즉 우리는 주님께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성령의 활동, 다시 말해서 우리 부모 중 어느 한편에 의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중생은 성령의 활동에 저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출생 관계에서 부모의 활동에 의존하는 것처럼 중생에서 성령의 활동에 의존한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 의해 출산된 것은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결정했기 때문이 아니다. 또 우리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것은 우리가 결정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만들어지고 출생됐을 뿐이다. 우리는 출생될 것을 결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여기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단순한 진리이면서도, 우리가 너무나 자주 지나쳐 버리는 진리이다.
    우리가 원했거나 결정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영적 지식을 갖거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 특전이 우리 것이 됐다면 그것은 성령이 의도하셨기 때문이며 그 모든 것은 성령의 결정과 활동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그분이 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부성적, 그리고 모성적 출산을 이루신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복음 3장 8절과 관계상 어려움이 있을 듯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람이 “불매”ㅡ이것은 성령 활동의 사실성, 확실성, 유효성을 말해 준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ㅡ이것은 성령 활동의 주권성을 강조한다. 바람은 우리 지시나 요청에 따라서 불지 않는다.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ㅡ성령의 사역은 신비로운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중생의 일에서 성령의 역사는 주권적이며 유효적이며 불가항력적임을 알려 준다. 이 변화를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중생의 근원자이시기 때문에 중생을 일으키신다. 그리고 그 중생을 출생의 양식으로 일으키신다. 이러한 양식으로 일으키시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중생의 유일한 창조자이시며 능동적 동작자이시다.
 
    중생의 일에서 우리는 피동적이라고 흔히 말한다. 이것은 참되고 적절한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여기에서 가르쳐 주신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것이 우리에게 달갑지 않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것이 우리 사고방식에 맞지 않고, 우리 복음주의에서 떨어져 나간, 시대에 유행하던 표현들과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달갑지 않게 느낀다면 우리는 이 불만이 곧 주님께 대한 불만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 설 때에, 그분의 진리를 거절하고 그분의 복음을 왜곡한 우리로서 무슨 대답을 할 것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권적이며 유효적이며 불가항력적인 중생을 말하고 있음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만일 중생의 일에서 우리가 수동적이 아니며 하나님의 단독 사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할 경우, 거기에는 전혀 복음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능동적 은혜를 가지고, 우리의 증악憎惡을 사랑으로, 우리의 불신앙을 신앙으로 돌려 놓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결코 이 사랑과 신앙에 應從응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5절은 중생에서 주목돼야 할 두 가지 점을 말해 주고 있다. ㅡ우리 심령이 오염에서 깨끗해지는 것과 그것을 새 생명으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이 성구의 두 가지 요소, 즉 “물로 남” (born of water)과 “성령으로 남”(born of the Spirit)은 이것과 짝을 이루고 있는 구약의 두 가지 요소와 일치한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5,26). 이 성구는 요한복음 3장 5절에 대한 구약의 병행구로 보는 것이 당연하고 “물로 남”에 대해 에스겔 36장 25절의 해석,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라는 말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어떤 까닭이나 근거도 없다.
    정화와 혁신, 이 두 가지 요소는 분리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사단의 세계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는 전체 변화를 구성하는 양면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과거 상태에 필요한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는 변화이며, 죄로 인한 반항을 제거하고 성자와 교제를 적합하게 하는 변화이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우리 주님의 교훈을 우리를 위해 기록한 사람은 사도 요한이다. 요한은 그 교훈을, 특히 중생은 하나님의 사역, 그것도 단독 사역이라는 교훈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말한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그는 이 교훈을 요한일서에서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중생에 관한 분명한 설명은 요한일서 중 여러 곳에 나타난다.(요일 2:29, 3:9, 4:7, 5:1,4,18) 이 성구들이 강조하는 것은 중생과 은혜의 다른 열매 사이에는 항상 병행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일서 2장 29절에서는 신적 출생과 의를 행함의 병행을 말하고, 3장 9절에서는 신적 출생과 범죄하지 아니함, 또는 못함 사이의 병행을, 4장 7절에서는 신적 출생과 사랑의 병행을, 5장 1절에서는 신적 출생과 범죄치 아니함 및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것의 병행을 말한다. 뒤에 논하겠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구속적용의 다른 요소들로부터 그것을 이끌어 내려는 중생에 대한 어떤 다른 견해도 용납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말씀들이다.
 
    위의 성경구절 대부분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중생과 다른 은혜의 축복들의 병행이라는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일서 3장 9절에서 예외적인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중생이 그 성구에 언급된 다른 특별한 은혜들을 유지해 주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니라.” 우리는 여기서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왜 그가 죄를 짓지 아니하는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아니한다. 그런데 이 거하는 씨는 신적 출생시에 하나님께서 뿌리신 것임을 분명히 암시한다. 죄를 짓지 않는 “원인”은 그 씨가 거하게 만든 신적 출생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논리적으로나 인과론적으로나 죄를 짓지 아니하는 것보다 앞선다. 또 다시 요한은 우리에게 말한다.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 말은 그 사람이 범죄치 못하는 원인이 바로 중생임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왜 그 사람이 범죄치 못하는가 하는 까닭은 그 사람이 중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순서는 바뀔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구에서 중생은 모든 거듭난 사람들의 특성인 죄와의 절교가 생기게 된 근본 원인이요 설명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요한일서 3장 9절에서 알게 된 그 원리가 비록 다른 성구들에서 뚜렷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이 서신 가운데서 인용된 다른 성구에도 적용돼야만 한다. 이 추론은 3장 9절과 5장 18절을 비교할 때 확실해진다.
    요한일서 5장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 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산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 성구가 뜻하는 바른 요한일서 3장 9절이 뜻하는 바와 거의 동일하다. 사실 두 말씀은 차이점이 거의 없는 부분적으로 같은 말씀이다.
    만일 요한일서 3장 9절에서 알게 된 진리를 그 3장 9절에 적용한다면, 그 진리는 역시 5장 18절에도 적용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진리는, 사람이 범죄치 아니하는 까닭이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이다. 중생은 죄로부터 단절되고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된 윤리적 원인적 설명이다.
    물론 지금 여기서는 죄로부터의 자유, 범죄치 못함, 약한 자가 만지지도 못함 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우리 목적이 아니다. 지금 우리 관심사는 단지 중생이 중생한 사람에게 이와 같은 특성들을 유지하게 하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일서 3장 9절과 5장 18절에 기초해, 이 두 성구에서 성립된 관계는 모든 다른 성구들에도 역시 적용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요일 2장 29절에서, 우리는 그 사람이 의를 행하게 된 까닭은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다른 성구들도 마찬가지이다.
    4장 7절에서 중생은 사랑의 원인으로 봐야만 하고, 5장 1절에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믿음, 세상을 이김, 죄와의 단절, 자제, 범죄치 못함,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함, 의를 행함,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같은, 그 원인이 중생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이들은 모두가 중생의 열매이다. 우리는 이 선행들이 얼마나 전형적이며 포괄적인가를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열거된 선행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부르심을 따라 요구되는 선행전반에 걸친 것이다. 위에서 말한 선행들 순서에 대해서는 벵겔(Bengel)이 다른 것과 관련해 말한 대로 신앙은 제일 앞에 오고 사랑은 가장 뒤에 온다.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까지도 중생의 결과라는 사실은 특별한 고찰을 요한다. 이 사실은 물론 요한복음 3장 3절부터 8절에서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여기서 그 사실을 명백히 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중생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구속적 은혜의 시작이며 인간 편에 이뤄지는 모든 구원적 은혜는 중생이라는 원천에서 흘러나온다.
    우리는 신앙이나 회개나 회심에 의해 거듭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중생했기 때문에 회개하고 믿는다. 우리는 중생에 의하지 않고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중생한 첫 번째 증거이며, 이런 것으로만 우리는 우리가 중생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jesuname/BsLS/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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