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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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의사(구원론)

당신이 거듭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당신이 거듭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당신이 거듭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구원을 받은 존재가 된다는 것, 그리고 구원을 받을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거듭난 사람이 된다는 것으로도 표현할 수가 있다. 어려운 말로 중생이라고도 하고, 믿고 회개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내가 거듭났는가를 말하기 이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과연 거듭남(중생)이란 무엇이며 또 인간은 어떻게 거듭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 '거듭남'이라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도 직결되어 있고, '구원'이나 '영생', '하나님의 나라'와도 직결되어 있다.


일찌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에서 자신을 찾아온 유대 관원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거듭난다'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던 니고데모의 인간적인 한계는 오늘날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적용된다. 그런 면에서 '거듭남'은 하나님의 신비이기도 하다.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다. 다시 말하면, 거듭나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거듭나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거듭남'은 곧 구원과 직결되어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구원의 확신'을 짚고 넘어가자.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더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신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7,8).


바람이 임의로 불기에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듯이,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이와 같이 알기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거듭남이 개인적으로 체험되어질 수는 있고, 개인적으로 확신되어질 수는 있을지라도, 그의 거듭남의 실체는 여전히 신비에 속한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구원의 문제를 너무 쉽게 확신의 차원으로 접근하려는 것은 마치 '세상 사람들은 날 몰라줘도 나는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확신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도 같다.

미국의 중부에는 종종 '토네이도'라고 하는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순식간에 사람들이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을 초토화 시키고는 한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은 이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를 연구하기 위해서 막대한 예산을 집행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 바람의 정체는 여전히 신비가운데 있다.


이쯤되면 이 목사가 성도들의 구원의 확신을 송두리째 흔드는 이단적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속에서 의분이 끓어 오르시는 분들이 계실법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구원의 확신을 갖지 말자거나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구원을 확신하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고,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개념이 결코 현재적인 칭의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성화의 차원으로의 연장선 상에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설명되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구원을 확신의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믿음으로 살 것을 주장할 따름이다. 그런 면에서 구원을 너무 단순한 논리나 성경 구절 몇 구절을 근거로 해서 구원의 확신의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은 현명한 생각이 못 된다. 왜냐하면 무수한 성경 구절들이 구원에 대하여 아직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야 할 '의의 소망'이자 종말론적 사건으로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우리의 한계된 지식은 하늘의 일은 커녕, 땅의 일들 조차도 다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인간들이 하늘의 일을 아는 해안을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은혜(헤세드)'가 필요하다. 우리의 눈에서 무지함의 비늘이 벗겨지는 것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우리의 한계된 지식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건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사건을 바라보며, 마음에 믿고, 우리의 구원이 온전히 완성될 때까지,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 뿐, 거기에는 내 자신의 확신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더구나 그 확신은 지금 현재적으로는 의심이 들지 않을지라도, 시간의 검증 속에서 어떻게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될지 아무도 모르며, 우리가 시험에 들 때마다 의심의 구름 속에서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연약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토대가 내 감정이나 마음의 확신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인 열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분명한 토대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진리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진리의 토대위에 내가 올바로 서 있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의 거듭남과 회개의 증거는 그에 합당한 삶과 성령의 열매들로 검증되어 질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가 깨달은 은혜에 대한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는 삶으로 이끌기도 한다.

우리의 토대는 불안정할지라도, 우리는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확신을 추구하는 쪽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늘 성령을 의지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삶을 살수록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구원을 의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확신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반면에 육신에 속하여, 죄의 종이 된 체, 여전히 세속적인 욕망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종교적인 열심을 내어도, 그 마음 가운데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 의심과 불안의 구름이 걷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역동적이다. 그리고 그 역동적인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 놓여져 있다.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으면 구원을 누리게 된다. 반면에 그 관계로부터 멀어지면 구원은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된다.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의 충고는 농담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보이겠단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서 무엇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일 것이냐고 묻고 있다. 그리고 죽은 믿음은 결코 그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내가 거듭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무는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행함 있는 믿음, 주님 안에 거하는 삶, 열매 맺는 신앙생활이야말로 우리의 거듭남을 확인해 주는 가장 두드러진 증거들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연약한 인간들인지라 때로 범죄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신앙은 어느 한 순간만 보면서 그 사람을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삶 전체를 놓고서야 알 수 있는 구원의 문제나 신앙의 문제를 너무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교만이다. 우리는 거듭남도 구원도 확신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다만 이 사실 하나만은 확실한 것 같다. 우리가 지금 구원의 여정에 들어 섰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삶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누리고 확인해 갈 수 있다는 사실, 그러기에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도 알 수 있다는 사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18520)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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