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가의 원리(칼빈대학교 박혜근교수)
전가의 원리(칼빈대학교 박혜근교수)
자료출처 <리폼드뉴스 제공 - http://www.reformednews.co.kr>
박혜근 교수 / 구원(성령)론(7) - 전가의 원리
전가의 원리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언약을 맺게 하기 위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자체가 언약적 개념이다. 사람들을 언약의 대상으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셨다. 아담언약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전가의 원리는 무엇인가?
성경은 아담이 모든 언약의 머리(head of covenant)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담의 행동과 결과는 아담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그 행동의 결과가 아담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전가된다. 그 뒤에 나오는 모든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준다. 그들의 행동과 모든 책임이 아담과 관계된다. 그들이 아담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어도 아담과 행동의 결정은 모든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는 의미에서 아담은 언약의 대표자 이다.
아담이 타락할 때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타락하고 하나님께 반역했다. 그 타락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음과 수고와 해산의 고통을 한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다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은 모든 언약의 머리가 된다.
전가의 원리가 언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언약의 대표자의 행동의 결과를 복이든 저주이든 그 언약의 행동과 행동의 결과를 언약에 속한 사람들이 가장 실제적인 차원에서 물려받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있다. 부모로부터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유전적인 특징을 물려받는 것처럼 말이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있는데 유전적 요소만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만 물려받는 것을 의미한다. 좋든 싫든 부모로부터 물러 받는 이치이다. 예를들면, 부모로부터 유전적 특징을 물려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에서 롬5장 18절에서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행위언약에 속한 사람)이 원하던 원치 않던 아담의 후손인데, 즉 행위언약에 속한 사람이 되었는데 한 사람 범죄로 인해 정죄에 이른 것과 같이, 아담이 지은 범죄가 그 뒤를 이어서 나온 모든 사람들이(후손들이) 전가되었다.
그래서 의에 한 행동으로(예수그리스도) 말미암아 또다시 많은 사람(은혜언약에 속한사람)이 그들이 비록 의로운 생활을 행하지 않았지만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이것은 복음중의 복음이며, 가장 중심적 원리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아담의 죄의 본성을 물려받는다.
고린도전서 2장 13절~14절에서 보면, 여기서 누구의 죄가 전가되는가 살펴보면, 하와의 죄가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은 언약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아담은 그 가정에 언약적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따먹지 말라 하신 그 명령을 받은 사람이 바로 아담이고 그 모든 책임을 질 사람도 일차적으로 질 사람도 아담이기 때문이다. 그 명령에 따른 아담이 그 책임의 결과를 일차적으로 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속임을 당한 것은 사실 하와이다. 그 속임을 당한 것은 이와(하와)가 먼저이다. 꾀임을 받은 하와가 먼저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지만 아담은 속임을 받지 않했다. 그러나 휠씬 더 심각한 죄를 진다. 아담은 먼저 꾀임을 받지 않았지만, 아담은 자신이 죄 짓기를 원해서 의도적으로 죄를 지었다. 그래서 아담의 죄가 휠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의지적으로 죄 짓기를 작정할 때부터 벌서 아담은 그 본성에 타락이 왔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그 완전한 본성이 머무르지 않고 이미 그 타락한 본성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 타락한 본성이, 즉 의지적으로 죄를 짓고자 한 아담의 타락한 본성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태어나면서 아담이 지었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이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가한다.
사람이 태어날 때 부모가 반기는 소리를 듣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의 소리를 듣고 태어난다. 사람이 태어날 때 사람이 육체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영적으로 사망에 이른 자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나는 순간에 아담이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고 어머니의 뱃속에 10개월을 지나다가 태어나는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아담의 타락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의 소리를 듣고 태어난다. 우리의 본성이 타락 했을 뿐 아니라, 아담의 타락의 본성위에 하나님의 진노와 죄의 저주가 같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
엡2장 1절~4절까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
마음도 부패하고 정신도 비뚤어지고 이성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죄인의 특성을 사람들은 모두 가지게 된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하나님 뒤에 숨었다.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나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식을 간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개입시키지 않고 모든 사물을 설명하고 싶어 하는 적 그리스도적 성향을 가졌다. 이것이 죄인의 특징이다.
엡2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인간은 이렇게 아담으로부터 죄와 허물을 그대로 태어나는 죄의 종으로 태어난다.
자기의 선한 의지도 없는 것이다.
루터의 말대로 선한 의지도 없고 선한 것을 의지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선하다고 한 것을 선하다 느끼지 못하고 악하다고 해도 악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내가 소원하지 못하고 산다.
사람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높은 경지이다. 사람 안에 있는 의지는 노예의 의지다. 롬6장 17절에서는 너희는 본래 죄의 종이다. 내 마음대로 못한다. 내속에 있는 죄의 충동에 따라 산다. 그래서 아무도 자유인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사람을 두부류로 나누면 성령의 행동하심을 받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죄의 지배를 받는 자가 있다.
사람은 자연적으로 태어나면서 벌써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갖고 나오고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의 소리를 머리에 안고 태어난다.
그가 제일 먼저 듣고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소리를 듣고 태어난다.
그래서 그 마음에 절망과 그 마음에 두려움이 있다.
그 마음에 어두움이 있다.
만약에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일이 없었다면,
두 번째 아담으로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사람으로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일이 없었더라면,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의 새 언약의 대표로 오시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믿음으로 구원받을 일도 없다. 예수그리스도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전가의 원리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만약에 누구의 죄나 누구의 공로가 우리에게 언약적으로 전가되는 것이 하나의 질서로 원리 가운데 없었더라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이 결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으로 인해서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하나님의 질서로 있었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도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전가되는 일이 없다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이 없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언약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공로가 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전가된다는 것이다. 죄를 전가 받았듯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그의 공로가 믿음으로 나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혹자는 내가 짓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정죄 받는 다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항의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언약의 속성상 이 언약은 우리에게 물어보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권적으로 선포하는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모든 사람들은 언약아래 태어난다. 누구나 언약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의 특징은 언약적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언약적 관계를 맺고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언약 안에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 언약의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짓고자 하실 때 우리를 자기의 사람으로 예정하실 때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려고 하는 의지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을 한순간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다시한번 강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어놓은 그의 공로와 의로움을 우리에게 전가하시겠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를 생각하신 것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는 존재로 하나님의 뜻 속에서 작정된 것이다. 전가가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이다.
언약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복되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고자 하실 때 언제나 언약을 근거해서 복을 주셨다. 언약을 떠나서 사람을 복되게 하신적은 없다. 언제나 언약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는 통로가 언약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언약을 파괴했기 때문에 너희가 먼 나라로 쫓김 당하고 도망당하고 살육 당하고 기근이 찾아오고 그리고 회개할 때 다시 언약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언약의 회복을 외친다.
왜냐하면 언약이 회복될 때 하나님의 복도 회복되는 것이다. 언제나 언약안의 삶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언약을 존재로 만드신 것은 아담을 복주기 위하신 방편이다. 그러나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언약의 파괴자가 되어서 그 죄의 형벌을 다 같이 받는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을 죄인 되게 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안에서 보면, 아담언약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 언약 안에서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자 하는 언약을 예고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으로 죄인 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계획안에서 보면 아담의 언약 자체도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예고였다.
아담이 죄가 사람에게 전가 되고 사람이 죄인되었다. 이것이 아담언약이다. 이것이 아담에게 전가되는 일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성도가 되는 믿음의 전가, 의의 전가가 없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전가란 말은 언약을 애초부터 생각하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목표하셨던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방편으로 전가의 원리에 따라서 아담의 죄가 전가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전가되는 일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 아담의 행위언약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언약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롬5장 13절를 보면,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에게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이 오실자의 표상이 되었느니라. 아담이 죄를 지어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게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의가 사람에게 전가되고 사람을 성도로 만드는 일에 표상(같은 양식)이다.
장차있을 그일에 대해 장차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를 원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동일한 양식(pattern)인 것이다. 아담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이 행위언약은 장차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의를 전가 받는 은혜언약을 미리 보여주는 패턴이다. 사람이 어떻게 죄인 되었는가를 설명할 때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미 죄인으로 정죄할 때에 사람이 또한 어떻게 의롭게 되는 가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실제로 창세기에서 죄인을 심판하실 때에 보여 준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은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한다. 중요한 것은 구원은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행위로 죄인 된 사람은 역사의 아담 한 사람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난다. 다 언약적 죄인이다. 역사에서 자기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밖에 없다. 나머지는 그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언약의 속함으로 그가 그리스도의 물려받고 의롭게 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에게는 애초부터 사람이 행위로부터 구원받는 길이 없었다.
영원전부터 창세전에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예정 하실 때부터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속에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새 언약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의를 전가받고 참여하는 의롭게 되는 구원의 길 외에는 다른 어떠한 길에는 제시하거나, 계획하거나 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허락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만 오로지 영광이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다. 아무도 구원의 저자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의 의와 공로를 덧 입지 않고는 의인되게 하시지 않기 원했기 때문이다.
갈 3장 11절에서 의인이 믿음으로부터 살리라 하신 것은, 영원전부터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을 작정하실 때부터 자기의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 외에는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허락해 주시지 않았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하여 자기의 무능력 때문에 사람을 율법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이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방울의 가르침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구원 얻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가슴을 치며 호소한 것이다. 율법은 애초에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가르침이다. 율법이 이론적으로는 지키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 율법은 이론적 구원의 길이지만 실천적으로는 구원의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도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는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 한번도 없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율법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을 한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다.
자기 행위로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끌어 내리는 행위와도 같은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스스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전가의 원리를 주신 것이다. 그러닌까 자랑할려는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자기에게 화가 미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는 것이다. 전가의 원리를 통해서만이다.
히 8장 7절에서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율법은 원래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선하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이 구원의 길이 처음부터 완전한 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구원의 길로서 새 언약의 대표자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가 반드시 세상에 오셔서 그가 자기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시고 자기의 백성을 불러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의 의로움을 전가 받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 앞에 갈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의롭다고 인정받는 자가 없다. 이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를 고백하고 언약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구원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구원의 배타적인 위치를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배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을 떠나서 죄인이 될 수 없듯이 예수를 떠나서 아무도 의인 될 수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으로 합한 자가 아니면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 전가의 원리와 연합의 원리는 같다. 우리가 죄인이 아담과 언약의 관계로 한 덩어리가 되었다. 연합이란 개념은 언약의 개념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아담과 우리는 전가라는 원리로 묶여있다. 그의 죄가 우리에게 선포되고 그의 죄의 결과로 저주와 죽음으로 해산의 고통으로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이것이 연합이다. 같은 원리로 아담과 하나가 되었듯이 예수님과 언약적 관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 안에 머무는 것이다.
연합이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가 이런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부활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그가 부활할 때 부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붙은 자가 부활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중생이란 연합한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깨끗한 성품을 물려받는 것이다. 중생은 연합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화는 내가 그리스도안에 연합하고 있는 한 그의 성품을 전가 받았기 때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성화되는 것이다.
지난주에 구원의 서정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야 가능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연합을 떠나서 구원의 어떤 경험도 없다. 구원이란 예수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의미한다. 존재론적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언약적 관계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것이다. 새 언약에 참여하고 새 언약의 모든 은사를 내가 모두 받는다. 오로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새 언약의 백성이 되므로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놀라운 복음이다. 다른 것에는 구원이 없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새 언약에 들어갈 때 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그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것은 내가 새 언약에 속하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내가 새 언약에 참여하는 복된 백성이 되었음을 내가 믿고 내 양심의 힘을 회복하고 신앙의 소망을 새롭게 하며 믿음이 강해지는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내가 새 언약에 참여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놀라운 감격스러운 자세로 참여해야 한다.
끊임없이 그리스도안에서 붙어 있어야 한다. 행11장 23절에서 주께 붙어있으라는 것은, 언약적 개념이다. 말하자면, 주님과 연합한 상태에 머물라는 것이다. 새 언약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말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끊임없이 구주를 믿는 믿음 가운데 머물라는 것이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믿음이란? 믿음은 정지가 아니다.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본 받고, 붙잡고 그리스도의 의에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새롭게 하는 방법은? 우리의 구원을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고 그것의 의에 호소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의의 공로를 찬양하고 그럴 때 마다 우리 구원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의 소망을 얻을 때 구원 얻는다.
반면에 날마다 회개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만 계속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 받는 것은 내가 행한 착한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붙자는 것이다. 구원받는 것은 나의 착한 행실로 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받는 것이다.
나의 구원을 결정짓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만을 굳게 붙잡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소망이다. 오직 예수 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오 바위시오 나의 도움이시다. 구원의 방편으로 언약의 전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전가의 원리는 예수그리스도와 우리를 믿음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신학을 할 때는 신학은 창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본받아 하는 것이다. 무엇을 본받는가? 하면,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것을 본받아 하는 것이다. 이미 신학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신학을 우리가 본받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최초의 신학자이시다. 이미 있는 신학을 다시 우리가 본받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본받아 하는 것이다. 그런닌까 우리에게는 신학함에 있어서 창의성이 없는 것이다. 특히 구원론에 있어서 자기 상상의 세게에 빠지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신학은 일정한 한계가 있고 정해진 룰(rule)이 있다.
칼빈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고 그리스도밖에 머물고 있는 한 그리스도가 행하신 모든 일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가 없다.”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전가가 언약의 연합이라고 하는 개념을 구원의 원리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다면,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언약적 관계에서 하나로 묶여져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그의 사역의 가치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가 알 수 있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들이 향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구원의 다양한 경험은 연합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다.
연합으로부터 말미암고 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연합으로 구원의 경험이 완성된다. 구원은 그래서 이 연합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될 때, 비로소 구원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연합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구원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엡1장 4절 11절~12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갖고 있는 세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다.
그 첫 번째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가능한 영원한 관점, 영원한 의미(1장 4절)가 드러난다. 세상에 창조가 있기 전부터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선택하셨다. 말하자면, 전가의 원리 언약 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으시겠다고 하는 것은 창세전에 이미 있었다. 우리가 새 언약 안에서 들어가 있으므로 사영리에 말하는 영접할 때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발견되었는가 하면 우리는 창세전부터 그리스도안에 있었다.
그리스도안에 있었던 우리가 언약 안에서 의식적으로 의지적으로 그리스도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 안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창세전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지식가운데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양자의 영을 선물로 받아 아바 아버지라 부르고 부활의 소망이 가지고 영생을 꿈꾸고 바라본 자가 된 것은 역사 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했다. 어떻게 연합했는가? “우리를 예정하시고(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지식)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생각 속에 우리가 처음 떠오를 때 그 때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 지금도 그리스도안에 있고 영원까지 그리스도안에 있다.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인 우리가 육신이 쇠하면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흙 속에 굴복하는 존재가 절대 아니다. 우리는 영원 전에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부터 왔고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영광 가운데 있고 장차도 영광 가운데 있을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족속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겁내지 맙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므로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믿는 사람의 인생은 위대한 인생이다.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가는 그 사람 안에 있지 않고 그 사람이 누구를 의지하고 있느냐에 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같이 위대한 자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언약 가운데 하나 될 자로 생각되고 있었다. 한번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의식 속에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연합하는 것이다. 요17장 2절에서“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영생하시기로 작정한 자들을 창세전에 그리스도에 붙은바 되었다.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 것이다.
두 번째 연합의 특징은 성육신적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특징이다. 우리가 연합하는 것은 머릿속에 관념으로만 연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 안에 인간에 몸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를 연합하게 하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그리스도가 실제로 오셨다. 구원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왜 안되는가?
하나님께서 명령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언약이라는 질서 때문이다.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구원할 수 없다. 아담이 사람으로서 언약의 대표자이다.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실 두 번째 아담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가 아담과는 달리 하나님의 집에 충성된 종이 되어서 그의 율법을 다 이루고 자기에 속한 모든 사람의 죄를 속하고 그래서 언약의 머리가 되셔야만 그에게 붙은 모든 자가 다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그가 몸을 입고 오지 않고는 그가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아담이 없다. 그가 마지막 아담이다. 두 번째 아담이다. 그리고 그가 우리 언약의 대표자요 우리 언약의 머리요 우리 구원의 저자이다.
따라서 우리가 연합하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 머릿속에 추상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위에 오셨다. 그리고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과 자기를 연합하게 하셨다. 실제로 성경에 보면 그는 우리의 어려움을 체휼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느끼는 것이 그에게 전달된다. 우리가 아파하는 것이 얼마나 그가 아파하는지 그가 아픔을 아신다. 우리가 좌절할 때 우리의 좌절이 그에게 어떤 행위를 갖는지 그가 아신다.
그렇게 육체로 오셨다.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셨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한 구원을 이루지 못 이루신다. 그가 친히 고난을 당하는 자로 오셨고 사람이 내려 갈 수 있는 최저의 자리까지 내려가시고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셔서 우리 아픔도 함께 하시고 우리가 누릴 영광도 그와 함께 하시고 그가 우리와 철저히 우리와 함께 하나가 되셨다. 지금은 그가 높이 들려 올려져서 장차 우리와 함께 영광의 있을 일을 준비하고 계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히2장 17절에서 “... 충성된 대 제사장이 되어서 그 백성의 죄를 구속.”그가 왜 사람이 되는 것이 마땅한가? 그가 하나님의 일을 충성되이 감당해서 그가 대제사장 되어서 자기의 백성의 죄를 구속해야 하니까, 그 구속의 공로로 백성들의 연합하게 하시고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철저히 그들과 같아져야만 된다. 그러나 그들과 살아왔던 삶과는 다르게 살아왔다. 그들에게 자기의 공로를 전가하기 위해서 그가 사람이 되심이 마땅하다.
세 번째 특성은 실존적인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은 천사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나타나 “네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고 했을 때이다. 이 처녀가 얼마나 놀라웠을까 하는 것이다. 이 때,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 우리 인류는 절망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 하늘과 세상과 모든 천사와 사람이 마리아의 입을 주목한 것이다. 마리아가 계집종의 뜻대로 되리이다 라고 하는 “예” 라고 순종했기 때문에 소망없는 인생이 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과 순종은 같은 것이다. 성육신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 하여튼 동정녀의 몸속에서 10개월간 아이가 자라고 그가 인간의 모든 과정을 직접 체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은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반드시 그가 우리들 가운데 사람이 되어 오셨어여만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속사역 일으키실 때 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예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남편 요셉도 예스, 제사장도 예수님 자신도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께 굴복하고 복종하셔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순종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우리의 구원속에..사람들은 믿음과 순종을 반명제의 개념으로 본다.
반명제로 같이 못 구한다로 본다.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왜 사도바울이 인간의 행위 곧 순종을 믿음의 수단으로서 믿음을 강조하는 중에 행위를 대립적인 개념으로 가르친다. 행위나 순종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종은 언약과는 관계 상관없이 자기의 순종과 행위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자기의의 방편으로서의 순종은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반명제(anti these)다.
그러나 믿고 난 다음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 믿음 안에 있는 믿음의 요구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순종하라 말하지 않아도 우리 믿음이 가르치는 요구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자가 순종하는 것은 믿음과 반 형제가 아니라 믿음과 같은 것이다. 성령 받음이 회개와 동일하고 믿음과 순종은 동일 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일서 형제를 사랑한다 하면서 행위로는 그를 미워하고 정죄하고 돕지 않은 것은 그것은 거짓이다 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은 절대로 아무런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오해이다.
네 번째로 실존론적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나타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관념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상이 있다.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의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그 연합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현상이 관념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상이 있다. 연합의 현상이 무엇인가? 성도의 삶이다. 곧 순종이다. 그런데 이 현상이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나타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느냐 여부를 살펴보는 방법 중의 하나는 점진적인 삶을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판단하는 하나의 현상적 기준이다.
현상적으로 그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지를 판별해 보는 것 조차가 불경스럽다고 오해하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것을 오해하면 안된다. 개혁주의가 한번이라도 이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그 사람 마음속에 믿음을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믿음에 대하여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지를 보는 방법 중 하나는 점진적인 삶의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알아보는 통상적 기준이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한번도 이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본질적으로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참믿음이라면 그 삶의 징후가 있다.
고전 6장 9~20절에서 연합으로 말미암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하는 내용이다. 사도 바울이 애정을 갖었던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았다. 비방하고 고소하고 이방인들의 더러운 죄악들이 교회 안에 가득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편지할 때 그들을 형제들 곧 성도라고 불렀다.
고전 6장 15절 말씀에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줄 알지 못하느냐 ”지적한 것은 언약적 관계속에 있는 성도를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왜 몸을 강조하는가? 그들은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몸과 영혼을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이 성경에 주신 바른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몸은 그 영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의 한부분이다. 몸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나중에 부활할 때 이 몸의 부활을 입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을 각가지 죄를 다 언급한다. 이 죄를 범해서는 안되는 신학적인 이유로 무엇을 제시하는가? 너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자 곧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의 공로가 있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본성을 우리가 물려받았고 우리의 고통과 아픔이 그리스도에게 전달되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이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나의 생각과 나의 숨겨진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다 전달되고 나의 아픔이 그에게 전달되듯이 또한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의로움이 나에게 주어짐이 순환의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죄를 짓는다면 너희 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말할 수 없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삶과 의식 속에서부터 밀접하게 이 현상이 반드시 나타난다. 이 현상은 믿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부터 우리의 의식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의 결과 이 현상이 없을 수가 없다. 반드시 나타난다.
기도할때 이렇게 기도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 아무개 집사님 오늘 여기 오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하게 하시고" 몸으로 안온 것은 결석이다. 몸과 마음을 서로 별개의 것으로 말하면 안된다. 목회 초년생들이 목회를 잘 못할 때 어떻게 잘 못하느냐면,.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십일조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꼭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멋있는 말 같다. 하지만 잘못 가르치는 것이다.
십일조할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바쳐야 한다. 바칠 것이 없으면 주님의 교회에 몸을 바쳐야 한다. 리빙스톤도 헌금을 내는데 돈이 없다보니 헌금 주머니가 돌때 그 헌금 주머니를 밑에 깔고 앉았다. 그리하고는 드릴 헌금 없어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다고 그랬다.
여러분! 내 속에 있는 신앙의 소원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내 신앙의 소원이 없거나 신앙의 소원이 변질 된 것이다.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현명한 목회자는 교인들의 삶에 나타나는 현상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리고 그 현상을 통해서 잘못되어가고 있는 그들의 믿음을 지적할 줄 알아야 한다.
한가지 더 예를들면, 심방할 시에, 따라온 아이가 욕하는 것에 대하여 어린아이 이기 때문에 넓은 포용력으로 이해하는 태도는 적절지 않다. 나쁜 것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나쁜 것이라고 알려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나타난 현상은 때로는 우리의 본질에서부터 말하자면 내 믿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경우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의 결과들은 언제나 거의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그들의 잘못을 질책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나쁜 것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깨닫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하게 된다면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다..이전 것은 지나가고... 말하자면 이전시대 예전시대에 속한 것은 이제는 지나가야 되는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변화가 예전 것이 있던 자리를 채워야하는 것이다. 그 채우는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느냐는 것은. 이전 것에 속한 것은 지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변화가 이전 것에 있었던 곳을 채워야 한다. 채우는 역사는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옛것을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현상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믿어주지 않는다.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내 믿음은 나의 책임이므로 내가 믿어야 한다. 연합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가운데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다고 하여 인간은 수동적인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은 내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런후에 내가 믿고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야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 인간의 소원 이 두 개는 같은 진리이다. 이것은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소원에서 성경에는 또 다른 진리가 있다. 똑같은 진리인데,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심속에 있는 자가 구원받는 자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또 한편으로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면,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 두가지를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냐 하면, 아무도 설명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설명하려고 시도하지만,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무리이다. 만약 이 두가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그 때부터 개혁주의 원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이 개혁주의 표지이다. 이 사람이 개혁주의 신앙원리안에 있느냐 없느냐를 알아볼 때, 이 두가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느냐 아니냐로 알수 있다. 신학자들은 그렇게 판별한다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를 평등하게 놓고 그것을 합리적인 원리 안에서 하나로 통일하려고 하면 그것은 알미니안적 펠라기우스로 떨어져버린다. 아니면 추상적 구원을 가르치거나 극단적 칼빈주의로 떨어져 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소원은 같은 진리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구원받기 원하는 자가 구원받는 것이다.
성경에 자세히 살펴보자.“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사실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이 작정하였으니 작정된 자는 다 믿을찌어다. 이렇게 안하고 그냥 회개하라고 말한다. 하나님 작정을 말하지 않고 인간편에서의 믿음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자가 구원받는 그것이나 같은 진리를 다르게 표현하는 것 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작정하신 자가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을 동일한 진리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믿는 자가 언약에 들어간다. 다시말하지만, 그래서 믿음은 나의 책임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대신 믿어주지 않는다. 내가 그리스도의 언약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 언약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도 내 책임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스스로 내 복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구원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안에는 언제나 순종이 요구된다.
고전 1장 30절을 보면,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에 머물러야 되는 쌍방간적인 책임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오시고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안에 있으므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우리가 나왔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왔고 아버지께서 예수그리스도께 요구하시는 것이 우리들을 위해서 의와 거룩함이 되시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아니하고 성경에 보면 우리 역시 아버지께로 예정 받아 이 땅에 올 때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는 것이다. 무엇을 요구하셨냐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기를 원하셨고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이미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고 우리를 위한 의와 거룩함이 되셨다. 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또한 예수 안에 있으라고 하는 그 아버지의 뜻을 받아 이땅에 온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고 우리가 아버지께로 부터 받은 그 뜻을 다 이룰 때 연합은 완전해지는 것이다. 그냥 되는게 아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 이 땅에 왔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하면,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고 우리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뜻을 다 이룰때 연합은 완전해 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날마다 너희 구원을 힘써 이루라는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실 때 힘써 그리스도안에 머물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만을 강조하지 않으시고 역시 우리도 어버지께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안에 있기를 원하셨던 아버지의 뜻을 동시에 둘 다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뜻을 다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안에 머물라고 하신 뜻을 다 이루어야 한다. 유혹받지 말고 죄 가운데 들지 말고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붙어 있어야 한다. 깨끗하고 정결과 선한 양심으로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창세전에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실 때 그리스도안에 힘써 머물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고전 1장 30절) 이러한 연합은 무엇으로 시작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유효한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시작된다.
<4강 마무리 기도>
할렐루야! 거룩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놀라우신 이름을 찬송 또 찬송합니다. 우리 구원의 반석이 되고 언약의 대표자가 되셔서 우리와 그리스도를 언제나 연합하게 하시고 구원의 참여하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힘써 그리스도안에 머물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사오니 마음으로 믿어 믿음으로 의로움에 이르게 하시고 입으로 시인하여 정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잘 드러낼 수 있도록 하나님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아버지! 오늘 이 공부에 참석하는 모든 종들에게 이 지식이 추상적인 관념으로 머물지 않게 하시고 내 삶을 바꾸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되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자료출처 <리폼드뉴스 제공 - http://www.reformednews.co.kr>
박혜근 교수 / 구원(성령)론(7) - 전가의 원리
전가의 원리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언약을 맺게 하기 위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자체가 언약적 개념이다. 사람들을 언약의 대상으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셨다. 아담언약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전가의 원리는 무엇인가?
성경은 아담이 모든 언약의 머리(head of covenant)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담의 행동과 결과는 아담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그 행동의 결과가 아담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전가된다. 그 뒤에 나오는 모든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준다. 그들의 행동과 모든 책임이 아담과 관계된다. 그들이 아담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어도 아담과 행동의 결정은 모든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는 의미에서 아담은 언약의 대표자 이다.
아담이 타락할 때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타락하고 하나님께 반역했다. 그 타락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음과 수고와 해산의 고통을 한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다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은 모든 언약의 머리가 된다.
전가의 원리가 언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언약의 대표자의 행동의 결과를 복이든 저주이든 그 언약의 행동과 행동의 결과를 언약에 속한 사람들이 가장 실제적인 차원에서 물려받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있다. 부모로부터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유전적인 특징을 물려받는 것처럼 말이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있는데 유전적 요소만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만 물려받는 것을 의미한다. 좋든 싫든 부모로부터 물러 받는 이치이다. 예를들면, 부모로부터 유전적 특징을 물려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에서 롬5장 18절에서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행위언약에 속한 사람)이 원하던 원치 않던 아담의 후손인데, 즉 행위언약에 속한 사람이 되었는데 한 사람 범죄로 인해 정죄에 이른 것과 같이, 아담이 지은 범죄가 그 뒤를 이어서 나온 모든 사람들이(후손들이) 전가되었다.
그래서 의에 한 행동으로(예수그리스도) 말미암아 또다시 많은 사람(은혜언약에 속한사람)이 그들이 비록 의로운 생활을 행하지 않았지만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이것은 복음중의 복음이며, 가장 중심적 원리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아담의 죄의 본성을 물려받는다.
고린도전서 2장 13절~14절에서 보면, 여기서 누구의 죄가 전가되는가 살펴보면, 하와의 죄가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은 언약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아담은 그 가정에 언약적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따먹지 말라 하신 그 명령을 받은 사람이 바로 아담이고 그 모든 책임을 질 사람도 일차적으로 질 사람도 아담이기 때문이다. 그 명령에 따른 아담이 그 책임의 결과를 일차적으로 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속임을 당한 것은 사실 하와이다. 그 속임을 당한 것은 이와(하와)가 먼저이다. 꾀임을 받은 하와가 먼저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지만 아담은 속임을 받지 않했다. 그러나 휠씬 더 심각한 죄를 진다. 아담은 먼저 꾀임을 받지 않았지만, 아담은 자신이 죄 짓기를 원해서 의도적으로 죄를 지었다. 그래서 아담의 죄가 휠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의지적으로 죄 짓기를 작정할 때부터 벌서 아담은 그 본성에 타락이 왔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그 완전한 본성이 머무르지 않고 이미 그 타락한 본성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 타락한 본성이, 즉 의지적으로 죄를 짓고자 한 아담의 타락한 본성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태어나면서 아담이 지었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이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가한다.
사람이 태어날 때 부모가 반기는 소리를 듣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의 소리를 듣고 태어난다. 사람이 태어날 때 사람이 육체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영적으로 사망에 이른 자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나는 순간에 아담이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고 어머니의 뱃속에 10개월을 지나다가 태어나는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아담의 타락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의 소리를 듣고 태어난다. 우리의 본성이 타락 했을 뿐 아니라, 아담의 타락의 본성위에 하나님의 진노와 죄의 저주가 같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
엡2장 1절~4절까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
마음도 부패하고 정신도 비뚤어지고 이성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죄인의 특성을 사람들은 모두 가지게 된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하나님 뒤에 숨었다.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나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식을 간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개입시키지 않고 모든 사물을 설명하고 싶어 하는 적 그리스도적 성향을 가졌다. 이것이 죄인의 특징이다.
엡2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인간은 이렇게 아담으로부터 죄와 허물을 그대로 태어나는 죄의 종으로 태어난다.
자기의 선한 의지도 없는 것이다.
루터의 말대로 선한 의지도 없고 선한 것을 의지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선하다고 한 것을 선하다 느끼지 못하고 악하다고 해도 악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내가 소원하지 못하고 산다.
사람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높은 경지이다. 사람 안에 있는 의지는 노예의 의지다. 롬6장 17절에서는 너희는 본래 죄의 종이다. 내 마음대로 못한다. 내속에 있는 죄의 충동에 따라 산다. 그래서 아무도 자유인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사람을 두부류로 나누면 성령의 행동하심을 받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죄의 지배를 받는 자가 있다.
사람은 자연적으로 태어나면서 벌써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갖고 나오고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의 소리를 머리에 안고 태어난다.
그가 제일 먼저 듣고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소리를 듣고 태어난다.
그래서 그 마음에 절망과 그 마음에 두려움이 있다.
그 마음에 어두움이 있다.
만약에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일이 없었다면,
두 번째 아담으로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사람으로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일이 없었더라면,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의 새 언약의 대표로 오시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믿음으로 구원받을 일도 없다. 예수그리스도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전가의 원리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만약에 누구의 죄나 누구의 공로가 우리에게 언약적으로 전가되는 것이 하나의 질서로 원리 가운데 없었더라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이 결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으로 인해서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하나님의 질서로 있었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도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전가되는 일이 없다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이 없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언약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공로가 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전가된다는 것이다. 죄를 전가 받았듯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그의 공로가 믿음으로 나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혹자는 내가 짓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정죄 받는 다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항의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언약의 속성상 이 언약은 우리에게 물어보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권적으로 선포하는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모든 사람들은 언약아래 태어난다. 누구나 언약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의 특징은 언약적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언약적 관계를 맺고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언약 안에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 언약의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짓고자 하실 때 우리를 자기의 사람으로 예정하실 때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려고 하는 의지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을 한순간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다시한번 강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어놓은 그의 공로와 의로움을 우리에게 전가하시겠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를 생각하신 것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는 존재로 하나님의 뜻 속에서 작정된 것이다. 전가가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이다.
언약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복되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고자 하실 때 언제나 언약을 근거해서 복을 주셨다. 언약을 떠나서 사람을 복되게 하신적은 없다. 언제나 언약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는 통로가 언약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언약을 파괴했기 때문에 너희가 먼 나라로 쫓김 당하고 도망당하고 살육 당하고 기근이 찾아오고 그리고 회개할 때 다시 언약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언약의 회복을 외친다.
왜냐하면 언약이 회복될 때 하나님의 복도 회복되는 것이다. 언제나 언약안의 삶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언약을 존재로 만드신 것은 아담을 복주기 위하신 방편이다. 그러나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언약의 파괴자가 되어서 그 죄의 형벌을 다 같이 받는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을 죄인 되게 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안에서 보면, 아담언약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 언약 안에서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자 하는 언약을 예고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으로 죄인 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계획안에서 보면 아담의 언약 자체도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예고였다.
아담이 죄가 사람에게 전가 되고 사람이 죄인되었다. 이것이 아담언약이다. 이것이 아담에게 전가되는 일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성도가 되는 믿음의 전가, 의의 전가가 없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전가란 말은 언약을 애초부터 생각하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목표하셨던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방편으로 전가의 원리에 따라서 아담의 죄가 전가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전가되는 일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 아담의 행위언약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언약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롬5장 13절를 보면,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에게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이 오실자의 표상이 되었느니라. 아담이 죄를 지어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게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의가 사람에게 전가되고 사람을 성도로 만드는 일에 표상(같은 양식)이다.
장차있을 그일에 대해 장차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를 원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동일한 양식(pattern)인 것이다. 아담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이 행위언약은 장차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의를 전가 받는 은혜언약을 미리 보여주는 패턴이다. 사람이 어떻게 죄인 되었는가를 설명할 때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미 죄인으로 정죄할 때에 사람이 또한 어떻게 의롭게 되는 가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실제로 창세기에서 죄인을 심판하실 때에 보여 준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은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한다. 중요한 것은 구원은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행위로 죄인 된 사람은 역사의 아담 한 사람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난다. 다 언약적 죄인이다. 역사에서 자기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밖에 없다. 나머지는 그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언약의 속함으로 그가 그리스도의 물려받고 의롭게 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에게는 애초부터 사람이 행위로부터 구원받는 길이 없었다.
영원전부터 창세전에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예정 하실 때부터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속에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새 언약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의를 전가받고 참여하는 의롭게 되는 구원의 길 외에는 다른 어떠한 길에는 제시하거나, 계획하거나 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허락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만 오로지 영광이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다. 아무도 구원의 저자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의 의와 공로를 덧 입지 않고는 의인되게 하시지 않기 원했기 때문이다.
갈 3장 11절에서 의인이 믿음으로부터 살리라 하신 것은, 영원전부터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을 작정하실 때부터 자기의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 외에는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허락해 주시지 않았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하여 자기의 무능력 때문에 사람을 율법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이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방울의 가르침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구원 얻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가슴을 치며 호소한 것이다. 율법은 애초에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가르침이다. 율법이 이론적으로는 지키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 율법은 이론적 구원의 길이지만 실천적으로는 구원의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도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는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 한번도 없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율법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을 한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다.
자기 행위로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끌어 내리는 행위와도 같은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스스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전가의 원리를 주신 것이다. 그러닌까 자랑할려는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자기에게 화가 미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는 것이다. 전가의 원리를 통해서만이다.
히 8장 7절에서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율법은 원래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선하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이 구원의 길이 처음부터 완전한 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구원의 길로서 새 언약의 대표자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가 반드시 세상에 오셔서 그가 자기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시고 자기의 백성을 불러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의 의로움을 전가 받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 앞에 갈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의롭다고 인정받는 자가 없다. 이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를 고백하고 언약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구원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구원의 배타적인 위치를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배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을 떠나서 죄인이 될 수 없듯이 예수를 떠나서 아무도 의인 될 수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으로 합한 자가 아니면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 전가의 원리와 연합의 원리는 같다. 우리가 죄인이 아담과 언약의 관계로 한 덩어리가 되었다. 연합이란 개념은 언약의 개념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아담과 우리는 전가라는 원리로 묶여있다. 그의 죄가 우리에게 선포되고 그의 죄의 결과로 저주와 죽음으로 해산의 고통으로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이것이 연합이다. 같은 원리로 아담과 하나가 되었듯이 예수님과 언약적 관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 안에 머무는 것이다.
연합이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가 이런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부활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그가 부활할 때 부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붙은 자가 부활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중생이란 연합한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깨끗한 성품을 물려받는 것이다. 중생은 연합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화는 내가 그리스도안에 연합하고 있는 한 그의 성품을 전가 받았기 때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성화되는 것이다.
지난주에 구원의 서정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야 가능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연합을 떠나서 구원의 어떤 경험도 없다. 구원이란 예수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의미한다. 존재론적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언약적 관계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것이다. 새 언약에 참여하고 새 언약의 모든 은사를 내가 모두 받는다. 오로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새 언약의 백성이 되므로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놀라운 복음이다. 다른 것에는 구원이 없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새 언약에 들어갈 때 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그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것은 내가 새 언약에 속하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내가 새 언약에 참여하는 복된 백성이 되었음을 내가 믿고 내 양심의 힘을 회복하고 신앙의 소망을 새롭게 하며 믿음이 강해지는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내가 새 언약에 참여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놀라운 감격스러운 자세로 참여해야 한다.
끊임없이 그리스도안에서 붙어 있어야 한다. 행11장 23절에서 주께 붙어있으라는 것은, 언약적 개념이다. 말하자면, 주님과 연합한 상태에 머물라는 것이다. 새 언약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말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끊임없이 구주를 믿는 믿음 가운데 머물라는 것이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믿음이란? 믿음은 정지가 아니다.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본 받고, 붙잡고 그리스도의 의에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새롭게 하는 방법은? 우리의 구원을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고 그것의 의에 호소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의의 공로를 찬양하고 그럴 때 마다 우리 구원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의 소망을 얻을 때 구원 얻는다.
반면에 날마다 회개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만 계속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 받는 것은 내가 행한 착한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붙자는 것이다. 구원받는 것은 나의 착한 행실로 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받는 것이다.
나의 구원을 결정짓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만을 굳게 붙잡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소망이다. 오직 예수 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오 바위시오 나의 도움이시다. 구원의 방편으로 언약의 전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전가의 원리는 예수그리스도와 우리를 믿음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신학을 할 때는 신학은 창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본받아 하는 것이다. 무엇을 본받는가? 하면,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것을 본받아 하는 것이다. 이미 신학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신학을 우리가 본받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최초의 신학자이시다. 이미 있는 신학을 다시 우리가 본받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본받아 하는 것이다. 그런닌까 우리에게는 신학함에 있어서 창의성이 없는 것이다. 특히 구원론에 있어서 자기 상상의 세게에 빠지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신학은 일정한 한계가 있고 정해진 룰(rule)이 있다.
칼빈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고 그리스도밖에 머물고 있는 한 그리스도가 행하신 모든 일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가 없다.”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전가가 언약의 연합이라고 하는 개념을 구원의 원리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다면,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언약적 관계에서 하나로 묶여져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그의 사역의 가치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가 알 수 있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들이 향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구원의 다양한 경험은 연합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다.
연합으로부터 말미암고 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연합으로 구원의 경험이 완성된다. 구원은 그래서 이 연합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될 때, 비로소 구원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연합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구원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엡1장 4절 11절~12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갖고 있는 세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다.
그 첫 번째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가능한 영원한 관점, 영원한 의미(1장 4절)가 드러난다. 세상에 창조가 있기 전부터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선택하셨다. 말하자면, 전가의 원리 언약 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으시겠다고 하는 것은 창세전에 이미 있었다. 우리가 새 언약 안에서 들어가 있으므로 사영리에 말하는 영접할 때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발견되었는가 하면 우리는 창세전부터 그리스도안에 있었다.
그리스도안에 있었던 우리가 언약 안에서 의식적으로 의지적으로 그리스도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 안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창세전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지식가운데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양자의 영을 선물로 받아 아바 아버지라 부르고 부활의 소망이 가지고 영생을 꿈꾸고 바라본 자가 된 것은 역사 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했다. 어떻게 연합했는가? “우리를 예정하시고(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지식)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생각 속에 우리가 처음 떠오를 때 그 때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 지금도 그리스도안에 있고 영원까지 그리스도안에 있다.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인 우리가 육신이 쇠하면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흙 속에 굴복하는 존재가 절대 아니다. 우리는 영원 전에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부터 왔고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영광 가운데 있고 장차도 영광 가운데 있을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족속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겁내지 맙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므로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믿는 사람의 인생은 위대한 인생이다.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가는 그 사람 안에 있지 않고 그 사람이 누구를 의지하고 있느냐에 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같이 위대한 자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언약 가운데 하나 될 자로 생각되고 있었다. 한번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의식 속에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연합하는 것이다. 요17장 2절에서“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영생하시기로 작정한 자들을 창세전에 그리스도에 붙은바 되었다.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 것이다.
두 번째 연합의 특징은 성육신적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특징이다. 우리가 연합하는 것은 머릿속에 관념으로만 연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 안에 인간에 몸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를 연합하게 하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그리스도가 실제로 오셨다. 구원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왜 안되는가?
하나님께서 명령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언약이라는 질서 때문이다.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구원할 수 없다. 아담이 사람으로서 언약의 대표자이다.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실 두 번째 아담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가 아담과는 달리 하나님의 집에 충성된 종이 되어서 그의 율법을 다 이루고 자기에 속한 모든 사람의 죄를 속하고 그래서 언약의 머리가 되셔야만 그에게 붙은 모든 자가 다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그가 몸을 입고 오지 않고는 그가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아담이 없다. 그가 마지막 아담이다. 두 번째 아담이다. 그리고 그가 우리 언약의 대표자요 우리 언약의 머리요 우리 구원의 저자이다.
따라서 우리가 연합하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 머릿속에 추상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위에 오셨다. 그리고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과 자기를 연합하게 하셨다. 실제로 성경에 보면 그는 우리의 어려움을 체휼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느끼는 것이 그에게 전달된다. 우리가 아파하는 것이 얼마나 그가 아파하는지 그가 아픔을 아신다. 우리가 좌절할 때 우리의 좌절이 그에게 어떤 행위를 갖는지 그가 아신다.
그렇게 육체로 오셨다.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셨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한 구원을 이루지 못 이루신다. 그가 친히 고난을 당하는 자로 오셨고 사람이 내려 갈 수 있는 최저의 자리까지 내려가시고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셔서 우리 아픔도 함께 하시고 우리가 누릴 영광도 그와 함께 하시고 그가 우리와 철저히 우리와 함께 하나가 되셨다. 지금은 그가 높이 들려 올려져서 장차 우리와 함께 영광의 있을 일을 준비하고 계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히2장 17절에서 “... 충성된 대 제사장이 되어서 그 백성의 죄를 구속.”그가 왜 사람이 되는 것이 마땅한가? 그가 하나님의 일을 충성되이 감당해서 그가 대제사장 되어서 자기의 백성의 죄를 구속해야 하니까, 그 구속의 공로로 백성들의 연합하게 하시고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철저히 그들과 같아져야만 된다. 그러나 그들과 살아왔던 삶과는 다르게 살아왔다. 그들에게 자기의 공로를 전가하기 위해서 그가 사람이 되심이 마땅하다.
세 번째 특성은 실존적인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은 천사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나타나 “네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고 했을 때이다. 이 처녀가 얼마나 놀라웠을까 하는 것이다. 이 때,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 우리 인류는 절망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 하늘과 세상과 모든 천사와 사람이 마리아의 입을 주목한 것이다. 마리아가 계집종의 뜻대로 되리이다 라고 하는 “예” 라고 순종했기 때문에 소망없는 인생이 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과 순종은 같은 것이다. 성육신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 하여튼 동정녀의 몸속에서 10개월간 아이가 자라고 그가 인간의 모든 과정을 직접 체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은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반드시 그가 우리들 가운데 사람이 되어 오셨어여만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속사역 일으키실 때 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예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남편 요셉도 예스, 제사장도 예수님 자신도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께 굴복하고 복종하셔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순종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우리의 구원속에..사람들은 믿음과 순종을 반명제의 개념으로 본다.
반명제로 같이 못 구한다로 본다.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왜 사도바울이 인간의 행위 곧 순종을 믿음의 수단으로서 믿음을 강조하는 중에 행위를 대립적인 개념으로 가르친다. 행위나 순종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종은 언약과는 관계 상관없이 자기의 순종과 행위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자기의의 방편으로서의 순종은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반명제(anti these)다.
그러나 믿고 난 다음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 믿음 안에 있는 믿음의 요구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순종하라 말하지 않아도 우리 믿음이 가르치는 요구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자가 순종하는 것은 믿음과 반 형제가 아니라 믿음과 같은 것이다. 성령 받음이 회개와 동일하고 믿음과 순종은 동일 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일서 형제를 사랑한다 하면서 행위로는 그를 미워하고 정죄하고 돕지 않은 것은 그것은 거짓이다 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은 절대로 아무런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오해이다.
네 번째로 실존론적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나타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관념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상이 있다.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의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그 연합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현상이 관념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상이 있다. 연합의 현상이 무엇인가? 성도의 삶이다. 곧 순종이다. 그런데 이 현상이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나타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느냐 여부를 살펴보는 방법 중의 하나는 점진적인 삶을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판단하는 하나의 현상적 기준이다.
현상적으로 그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지를 판별해 보는 것 조차가 불경스럽다고 오해하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것을 오해하면 안된다. 개혁주의가 한번이라도 이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그 사람 마음속에 믿음을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믿음에 대하여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지를 보는 방법 중 하나는 점진적인 삶의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알아보는 통상적 기준이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한번도 이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본질적으로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참믿음이라면 그 삶의 징후가 있다.
고전 6장 9~20절에서 연합으로 말미암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하는 내용이다. 사도 바울이 애정을 갖었던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았다. 비방하고 고소하고 이방인들의 더러운 죄악들이 교회 안에 가득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편지할 때 그들을 형제들 곧 성도라고 불렀다.
고전 6장 15절 말씀에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줄 알지 못하느냐 ”지적한 것은 언약적 관계속에 있는 성도를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왜 몸을 강조하는가? 그들은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몸과 영혼을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이 성경에 주신 바른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몸은 그 영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의 한부분이다. 몸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나중에 부활할 때 이 몸의 부활을 입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을 각가지 죄를 다 언급한다. 이 죄를 범해서는 안되는 신학적인 이유로 무엇을 제시하는가? 너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자 곧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의 공로가 있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본성을 우리가 물려받았고 우리의 고통과 아픔이 그리스도에게 전달되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이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나의 생각과 나의 숨겨진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다 전달되고 나의 아픔이 그에게 전달되듯이 또한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의로움이 나에게 주어짐이 순환의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죄를 짓는다면 너희 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말할 수 없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삶과 의식 속에서부터 밀접하게 이 현상이 반드시 나타난다. 이 현상은 믿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부터 우리의 의식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의 결과 이 현상이 없을 수가 없다. 반드시 나타난다.
기도할때 이렇게 기도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 아무개 집사님 오늘 여기 오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하게 하시고" 몸으로 안온 것은 결석이다. 몸과 마음을 서로 별개의 것으로 말하면 안된다. 목회 초년생들이 목회를 잘 못할 때 어떻게 잘 못하느냐면,.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십일조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꼭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멋있는 말 같다. 하지만 잘못 가르치는 것이다.
십일조할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바쳐야 한다. 바칠 것이 없으면 주님의 교회에 몸을 바쳐야 한다. 리빙스톤도 헌금을 내는데 돈이 없다보니 헌금 주머니가 돌때 그 헌금 주머니를 밑에 깔고 앉았다. 그리하고는 드릴 헌금 없어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다고 그랬다.
여러분! 내 속에 있는 신앙의 소원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내 신앙의 소원이 없거나 신앙의 소원이 변질 된 것이다.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현명한 목회자는 교인들의 삶에 나타나는 현상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리고 그 현상을 통해서 잘못되어가고 있는 그들의 믿음을 지적할 줄 알아야 한다.
한가지 더 예를들면, 심방할 시에, 따라온 아이가 욕하는 것에 대하여 어린아이 이기 때문에 넓은 포용력으로 이해하는 태도는 적절지 않다. 나쁜 것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나쁜 것이라고 알려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나타난 현상은 때로는 우리의 본질에서부터 말하자면 내 믿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경우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의 결과들은 언제나 거의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그들의 잘못을 질책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나쁜 것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깨닫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하게 된다면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다..이전 것은 지나가고... 말하자면 이전시대 예전시대에 속한 것은 이제는 지나가야 되는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변화가 예전 것이 있던 자리를 채워야하는 것이다. 그 채우는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느냐는 것은. 이전 것에 속한 것은 지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변화가 이전 것에 있었던 곳을 채워야 한다. 채우는 역사는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옛것을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현상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믿어주지 않는다.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내 믿음은 나의 책임이므로 내가 믿어야 한다. 연합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가운데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다고 하여 인간은 수동적인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은 내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런후에 내가 믿고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야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 인간의 소원 이 두 개는 같은 진리이다. 이것은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소원에서 성경에는 또 다른 진리가 있다. 똑같은 진리인데,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심속에 있는 자가 구원받는 자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또 한편으로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면,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 두가지를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냐 하면, 아무도 설명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설명하려고 시도하지만,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무리이다. 만약 이 두가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그 때부터 개혁주의 원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이 개혁주의 표지이다. 이 사람이 개혁주의 신앙원리안에 있느냐 없느냐를 알아볼 때, 이 두가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느냐 아니냐로 알수 있다. 신학자들은 그렇게 판별한다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를 평등하게 놓고 그것을 합리적인 원리 안에서 하나로 통일하려고 하면 그것은 알미니안적 펠라기우스로 떨어져버린다. 아니면 추상적 구원을 가르치거나 극단적 칼빈주의로 떨어져 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소원은 같은 진리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구원받기 원하는 자가 구원받는 것이다.
성경에 자세히 살펴보자.“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사실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이 작정하였으니 작정된 자는 다 믿을찌어다. 이렇게 안하고 그냥 회개하라고 말한다. 하나님 작정을 말하지 않고 인간편에서의 믿음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자가 구원받는 그것이나 같은 진리를 다르게 표현하는 것 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작정하신 자가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을 동일한 진리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믿는 자가 언약에 들어간다. 다시말하지만, 그래서 믿음은 나의 책임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대신 믿어주지 않는다. 내가 그리스도의 언약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 언약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도 내 책임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스스로 내 복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구원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안에는 언제나 순종이 요구된다.
고전 1장 30절을 보면,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에 머물러야 되는 쌍방간적인 책임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오시고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안에 있으므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우리가 나왔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왔고 아버지께서 예수그리스도께 요구하시는 것이 우리들을 위해서 의와 거룩함이 되시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아니하고 성경에 보면 우리 역시 아버지께로 예정 받아 이 땅에 올 때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는 것이다. 무엇을 요구하셨냐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기를 원하셨고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이미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고 우리를 위한 의와 거룩함이 되셨다. 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또한 예수 안에 있으라고 하는 그 아버지의 뜻을 받아 이땅에 온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고 우리가 아버지께로 부터 받은 그 뜻을 다 이룰 때 연합은 완전해지는 것이다. 그냥 되는게 아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 이 땅에 왔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하면,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고 우리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뜻을 다 이룰때 연합은 완전해 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날마다 너희 구원을 힘써 이루라는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실 때 힘써 그리스도안에 머물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만을 강조하지 않으시고 역시 우리도 어버지께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안에 있기를 원하셨던 아버지의 뜻을 동시에 둘 다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뜻을 다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안에 머물라고 하신 뜻을 다 이루어야 한다. 유혹받지 말고 죄 가운데 들지 말고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붙어 있어야 한다. 깨끗하고 정결과 선한 양심으로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창세전에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실 때 그리스도안에 힘써 머물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고전 1장 30절) 이러한 연합은 무엇으로 시작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유효한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시작된다.
<4강 마무리 기도>
할렐루야! 거룩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놀라우신 이름을 찬송 또 찬송합니다. 우리 구원의 반석이 되고 언약의 대표자가 되셔서 우리와 그리스도를 언제나 연합하게 하시고 구원의 참여하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힘써 그리스도안에 머물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사오니 마음으로 믿어 믿음으로 의로움에 이르게 하시고 입으로 시인하여 정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잘 드러낼 수 있도록 하나님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아버지! 오늘 이 공부에 참석하는 모든 종들에게 이 지식이 추상적인 관념으로 머물지 않게 하시고 내 삶을 바꾸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되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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