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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의사(구원론)

거짓 신자의 대표 브랜드, 가롯 유다

거짓 신자의 대표 브랜드, 가롯 유다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소위 육욕적인 크리스천들의 믿음의 고백들까지도 본질적인 신앙 고백으로 간주하여 구원의 정의를 느슨하게 만들고 있다.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의 남용은 한번 믿음을 고백한 사람이 불순종이나 엄청난 불신의 적대행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진다. 예컨대 한 신자가 타락을 하여 믿지 않는 신자 상태로 떨어지고, 심지어 무신론자, 불가지론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구원을 받았고, 여전히 중생자라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한번 구세주로 받아들였다면 당신이 만약 그 믿음을 부정할지라도 당신은 결코 구원을 잃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거짓된 신학이다. 한번 그리스도를 고백한 믿음 때문에 그가 영원히 구원이 보장된다는 사고는 한갓 속임수에 불과하다. “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 하리라.”(마10:33) “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 하실 것이라.”(딤후2;12)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성도의 견인”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천국을 보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도의 거짓 없는 의지의 믿음이 그리스도로부터 결코 완전히, 최종적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즉 바로 신실(信實)한 성도들은 그 마지막 순간(瞬間)까지 주님의 은혜(恩惠) 안에 견디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만약 일시적으로 한동안 견디기 어려운 죄에 떨어 진다해도 결코 완전히 그 믿음을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
A.W.Pink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전혀 책임을 모르는 자동 기계(robot)들처럼 관계하지 않고 도덕적 가능인으로서 인간 본연의 삶이 어떤 삶의 방편을 수단으로 적의나 위험한 상황을 회피, 보수, 인내, 정비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한 때 입술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주님을 대항(對抗)하는 쪽으로 돌아선 자들은 결코 진실로 구원받지 못하였음을 성경이 자증한다. 사도 요한은 기록하기를 “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함이니라.(1요2;19)

어떤 위인이 일단 배교자(背敎者)가 된 이상 그 사람의 신앙 고백(간증)이 아무리 확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는 아무런 문제가 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 신앙의 질(質)이 위선적(僞善的)이었고, 위조(僞造)라는 것을 확실히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은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가운데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유다24)라고 하였다.
 

예수는 그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유다는 절대 배도자의 길에 떨어진 고백하는 신자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3년 동안이나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주님을 따랐다. 그는 어떤 불순한 동기를 가진 자처럼 암시하는 “열둘 중의 하나” 로 늘 등장한다. 최소한 처음부터 그럴듯하게도 그 자신을 “믿는 자”로서 생각을 하였다. 제자들도 역시 그렇게 간주하였음이 틀림없다. 주님께 대항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들 무리에 조인한 것이 의심스럽다. 비록 그가 어딘가 탐욕에 혈안 되었다할지라도 처음에 그의 동기를 표출 한다는 것이 어려웠을 수 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결코 물질적 가치의 어떤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였다.(마8:20) 언뜻 보기에 유다는 초기에 그리스도의 왕국의 희망을 나누었다. 그는 예수가 이 지상 왕국의 메시아라고 믿은 듯하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 현대 용어로 그는 예수를 영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3년 동안 날이면 날마다 예수그리스도와 동거동락 하였다. 그는 주님의 기적을 똑똑히 보았고, 그의 말씀을 곁에서 들었고, 그의 사역에 조차 참여하였다. 그러는 동안 제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의 믿음을 의심하여 묻지 않았다. 그는 다른 제자들이나 마찬가지로 똑 같은 지위를 가졌다. 유다 마음의 생각을 다 알고 계시는 주님 자신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이 사람이 주님을 배반하리라고 전혀 혐의를 품지 않았다.
 
줄곧 다른 제자들이 점점 사도로 성장하는 동안 유다는 말없이 무시무시한 사탄의 타산적인 도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의 성격이 어떠하든 초기 단계에 그의 믿음이 진실치 못하도록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요13:10-11) 그는 중생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점점 매우 굳어져 한 움큼의 은을 위해 구세주를 필아 넘겨버리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종국에 그는 사탄의 준엄한 명령 대로하는 수종하는 데 까지 준비됨으로 사탄은 유다를 소유하거야 말았다.(요13:27)
 
유다는 위선(僞善)에 매우 능수능란(能手能爛)하였음으로 그는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피해 제자들의 내부 세계에서 정당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가 주님의 영광을 배반하던 그 날 밤 그도 역시 2층 다락방 예수님 옆에 앉아 있었다. 구세주는 그를 발을 씻김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후에 은 삼십에 예수를 배반하기 위한 거래조건으로 삼았다. 예수는 항상 그것을 알고 있었다. 요13장 18절에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왜 주님이 유다를 선택하였는가?
 
예수님은 시편 41:9을 인용하여 “성경을 응하기 위해”고 답하고 있다. 유다에 대한 또 다른 예언은 시편 55:12-14 이다.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유다에 관한 완벽한 그림이다. 그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구세주에게 도달할 수 있는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할 수 있는 한 가능한 만큼 구원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유다, 그의 변절(變節)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별 생각 없이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엄숙한 경고(警告)로써 우뚝 서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지 가까이 접촉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분명한 한 사실을 배우게 된다. 누군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는데 여전히 부족하다. 신앙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한 개인이라 할 지라도 전적으로 그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영원히 저주받는 존재로 떨어 질 수 있다.

"너희중 하나가 나를 배신하리라"

그가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은 유다 자신의 선택과 하나님의 의지는 별개(別個)이다. 모든 기회에 예수님은 유다를 경고하였고, 그를 회개하여 구원을 얻도록 강청(强請)하였다. 그러나 모든 점에서 유다는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였다. 유다는 예수님에 의해 직접 복음을 들었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죄와 이기심에서 돌이키는 것을 거절(拒絶)하였다. 요한복음 13장의 예수님 말씀은 이 사람에게 사랑으로 호소한 마지막 묘사이다. 그렇지만 끝부분에서 구세주의 자비로운 간절한 부탁이 그의 경직성 속에 있는 유다의 중심을 향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 13:21에 주님의 마지막 만찬 동안 그 밤을 드라마틱한 한 순간으로 묘사한다. “ 예수님은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라고 하신다. 이 말씀에 유다를 제외한 그 제자들 그룹의 모두가 얼마나 어리둥절하였을까, 그 충격을 한번 상상해보라.

예수님이 번민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는 유다를 향한 이루어지지 않는 그의 사랑 때문에 번민하였었을 것이다. 또는 유다의 마음속에 배은망덕 때문에, 또는 바로 자신의 옆에 앉은 유다의 죄 된 모습, 구체화 과정 속에 진행되고 있는 죄에 대한 미움 때문이었으리라. 확실히 그는 유다의 냉담한 외식과 닥쳐올 배신에 의한 번민이었다. 이것은 그가 사탄이 유다 속에 계속 역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가 짊어지고 갈 죄가 얼마나 비참한지 가룟 유다가 전형적인 그 실례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 유달리 우리 주님은 유다가 스스로 의도적(意圖的)으로 이미 결정한 영원한 고통의 정죄됨이 그의 전지(全知)하심에 의해 번민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한 제자인 유다는 결코 실제로 구원 얻지 못했고(10-11절) 영원히 잃게 될 마지막 순간이 왔다. 그를 “자기들 중의 하나가 팔리라”고 했을 때 제자들의 마음들은 저마다 부글거리고 있었다. 마태 26:22에 그들은 모두 묻기를 “주여 내니이까?” 유다 역시도 항상 그 부분에 장난치기를 “랍비여, 확실히 저는 아니겠죠? 랍비여 내니이까?(25절)라고 하였다. 그의 중심을 알고 있는 주님은 직설적으로 말하기를 “내가 말 하였도다.”라고 선언 하였다.

"주여, 내니이까?"
 
제자들이 당혹(마26:22) 한 장면은 상당히 흥미 있는 부분이다. 명백하게 예수님은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대우 하셨다. 3년간 정확히 그가 다른 열 한 제자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주님은 언제나 유다에게 온화하고, 사랑스럽고, 친절하셨다. 유다의 불신에 대한 예수님의 꾸지람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는 공적으로 유다를 그 그룹의 한 멤버로서 대우하셨다. 만약 예수님이 유다를 어떤 색다른 취급을 하였더라면 틀림없이 모든 제자들은 금방 알아차렸었을 것이다. 만약 유다가 다소 어떤 점에서 그 그룹의 검은 양처럼 생각 되었더라면 누군가가 확실히 배신자로서 그의 이름을 넌지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실로 유다는 제자들 그룹의 재정을 담당한 회계였다. 제자들은 그를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구세주를 위한 요한의 사랑과 함께 예수를 위해 잠복한 유다의 미움과 대조를 해보라. 요한은 예수님 곁 테이블에 기대고 있었다. 이것은 잔치의 보통 포즈이다. 테이블은 낮은 상이었다. 모든 손님들은 마루에 기대어 있다. 그들의 왼쪽 팔꿈치를 포개고, 그들의 오른쪽 손으로 먹을 것을 집는다. 예수님의 오른 쪽에 기대어 있는 요한은 예수님의 가슴레벨에 그의 머리를 대고 있다. 그가 예수님께 말하려고 돌이킬 때 그리스도의 머리는 바로 그의 위에 있을 것이다. 주님을 향한 그의 극도의 사랑 때문에 요한은 거기에, 주님의 마음 가까이에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베드로는 그를 배신할 자가 누구인지 예수님에게 물어 보라고 요한에게 머릿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 오니까?”(요13:24-25) 베드로와 요한은 그 대답을 들었던 자들임이 틀림없다. 26절에 말하기를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 다가 가롯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라고 기록하였다.
 
손님에 대한 예법
 
이것은 다만 요한의 질문에 대한 응답일 뿐 만 아니라, 아직도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또 다른 사랑의 호소였다. 그 조각은 식사를 위해 준비된 케잌을 부순 무교병의 한 조각이었다. 유월절 잔치 동안 테이블위에는 쓴 허브, 식초, 소금, 야자, 무화과, 건포도가 가득 찬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이들 재료들은 물로 반죽하여 짓이겨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찍어먹는 초장 같은 것이다. 주인은 이 초장에 무교병 조각을 놓고 손님에게 예의로 그것을 찍어다 준다. 예수님은 유다를 향한 사랑의 제스처로 그 조각을 찍어서 그의 왼쪽에 있는 유다를 향해 마치 한 영예로운 손님인 양 건네주었다.
 
예수님은 이미 유다의 발도 씻어 주셨다. 이제 그는 유다를 한 존귀한 친구로 대우하셨다. 그것은 유다의 마음을 쳐서 깨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그러하지 않았다. 요한 13장 27절에 유다의 사악한 본성의 마지막 결정을 묘사한다. “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그 구절에 한 영원성이 담겨 있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척 하는 동시에 악과 함께 시시덕거리는 사탄에 의해 미혹되고 말았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예수님은 유다와 쭉 함께 하였다. 이제 유다는 자신이 원하는 뭔가를 위해 그 방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27절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라고 하였다. 유다는 그의 불신(不信)이 확인(確認) 되었다. 그리고 예수는 더 이상 그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홀로 예수님의 시간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합류한 한 내부 침입자(內部 侵入者)였다. 성경은 말하기를 28-29절에, “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음으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니라.”라고 기록한다. 아마도 베드로와 요한을 제외하고 그들 중에 아직도 아무도 유다가 배신자가 될 것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신앙고백은 매우 확신에 찼었고, 그의 위선은 매우 교묘하여 그들 중 아무도 그가 그런 변절을 할 능력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는 사탄에 의해 그 자신이 사로잡혀 있었다. 인간이 이렇게 사악할 수 있을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게 속일 수 있는가? 육욕적인 사람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가증한가 보라!
 
 
"밤일러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일러라.”(30절)
그것은 역시 그 영혼에 있어서 영원한 밤의 시작이었다. 가장 위대한 영적 장점들이 내재한 유다는 엄청난 기회를 바로 부정한 정욕을 채우는데 낭비하고 말았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의 신앙(信仰)이 결코 진실(眞實)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는 그리스도께 긍정적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결코 신실하고 순종적인 믿음으로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삶은 예수님의 면전인 구름 한 점 없는 생명의 빛 아래서 살고 있었지만 절망의 밤에 인생의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죽음의 키스
 
유다가 예수님과 키스함으로 마지막을 접촉 한 것은 아주 씁쓰레한 아이러니이다. 그것은 죽음의 키스였다. 예수님을 위란 키스가 아니라 유다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구세주가 기도하러 간 동산에서 똑 같은 밤늦은 시각에 일어났다. 그 키스는 유다가 예수의 정체를 확인시키려고 협상(dealing) 시에 미리 타합한 신호였다.

예수시대의 사람들 사이의 키스는 문화의 한 부분이었다. 노예들은 그들의 주인의 발에 키스를 하곤 했다. 성난 군주에게 자비를 구하는 사람들은 용서를 구하면서 그의 발에 키스하곤 하였다. 존경하는 높은 분의 옷 가장자리에 키스함으로 경외함을 표현하였다. 학생들은 존경의 표시로서 그들 선생님의 손에 키스하였다. 그러나 볼에 포옹과 키스는 가까운 애정, 따스한 사랑, 그리고 친밀감의 표시였다. 이러한 제스쳐는 가장 가까운 사친구들 사이에 친밀감을 표현하였다.
그런 면에서 유다의 키스는 모든 행동의 가장 비열한 모습이다. 그는 예수님의 손이나 옷 가장자리에 키스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위장된 애정을 대신 선택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그의 음모자들에게 신호를 주었을 뿐 만 아니라 역시 노골적으로 더욱 반항하는 그의 행동을 표현하였다. 아마도 유다는 아직도 그가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누가복음 22;48절은 기록하기를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내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이런 서글픈 말씀조차 이 미친 사나이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마가복음 14:45에 말하기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라고 하였다.
주 예수님은 유다의 비열한 키스를 견디어야만 하였다. 그의 마지막 응답은 마태복음 26:50에 기록되었다. ”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그리스말 ”hetairos (친구)는 문자적 의미는 “동무, 추종자”를 의미한다. 예수는 이 지점에서 따스한 친구로서 말하지 않는다. “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친구란 그가 그를 순종하는 자들을 일컬을 때 썼다.(요15:14) 그것은 지옥의 자식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유다는 여전히 그의 귓전을 울리는 이 말들을 들어야만 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 22:48)“ ”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26:50)
 
그들은 모두 그를 포기하고 도망하였다
 
이 시점에서 나머지 제자들의 행동이 유다와 얼마만큼 다른지 질문이 생긴다. 이미 예수님이 31절, “...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라고 예언한 대로 마태복음 26:56에서 ”...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들은 모두 예수를 외면하였다. 베드로조차 그리스도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였다. 유다의 배신과 얼마나 다른 행동인가?
다만 한 가지는 배신의 동기유발이 다르다. 제자들은 그 순간 외부의 압력이 무서워서 도망쳤다. 유다의 배신은 반역(反逆)을 저울질하는 행동이었다. 제자들은 큰 위험의 직면에 실패하였다. 유다의 배신 행위는 그가 탐욕스러운 마음을 채우기 위해 꾸미고, 수행하기 위해 고의적(故意的)으로 게획한 것이었다. 제자들은 후에 그들의 죄를 돌이키고 겸손하게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였다. 유다는 불신(不信)과 미움 속에 자신의 결의(決意)를 확고(確固)히 하였다. 그는 自殺이라는 죄된 행위로서 그것을 확인(確認)시켰다. (마27:5) 제자들의 부정은 보통 신실한 행실의 한 착오(錯誤)이다. 유다의 죄는 아주 완전히 부패한 영혼을 증명(證明)하였다.

진실한 제자들의 표지는 결코 죄(자범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범죄 할 때 불가피하게 용서와 깨끗함을 받기 위해 주님께 돌아온다. 거짓 제자들처럼 진실한 제자들은 결코 완전히 돌아서버리지 않는다. 그는 때때로 그의 옛 직업인 고기잡이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는 다시 그 주인에게 끌리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그를 마주 대할 때 그는 구세주를 위한 봉사의 삶으로 돌이킬 것이다.
 
거짓 제자들의 표지들
 
유다는 거짓 제자의 브랜드가 된다. 주의 깊게 그의 외식적 특성에 주목해보라.
 
첫째로 그는 영원한 부(富)보다도 일시적인 이익을 사랑했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원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원했다. 그는 이 땅의 보화를 원했다. 아마도 그는 그리스도가 메시아를 위한 그의 정치적 기대를 채우지 못하는데 실망했는지 모른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한 이 땅의 왕국에 높은 지위를 염두에 두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거짓 제자들이 저들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승선하는 것은 전형적인 한 거짓 행태이다. 그러나 주님이 저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순종하고 수행하는 대신에 저들은 반역하고 떠나버린다. 그런 사람들은 일을 착수함에 결코 진실한 믿음을 갖지 못함을 드러낸다. 그들은 자갈밭에 심겨진 씨와 같다. 그것은 잠시 아주 잘 자란다. 그러나 태양이 쬐일 때, 시들고 죽어버린다.(마13:20-21) 그들은 그리스도를 한 철 동안 잘 따른다. 그러나 마침내 이기적인 욕망, 돈, 명성, 권력을 위해 그리스도를 팔아버린다.
 
둘째로 유다는 속임에 의해 표시되어졌다.
 
그의 믿음의 쇼는 다만 거짓 꾸밈(허구)일 뿐이었다. 거짓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미혹함에 숙달된 달인들이고, 명민하고 교활한 속임수의 대가들이다.
 
끝으로 유다와 모든 거짓 제자들은 그들이 받을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제자들 그룹 속에 거한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 좋은 평판, 영적 자기만족, 알랑방귀 같은 의식에 아주 만족한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비즈니스를 위해 유익하기 때문에 또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은 건강, 부, 번영을 증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그러나 그들은 에서와 같이 그의 장자 권을 바로 팥죽 한 그릇을 위해 구세주를 팔 것이다. 유다와 같이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그들은 어둠을 사랑한다. 그들의 마지못한 상태의 믿음은 불가피하게 딱딱하게 굳어버린 불신으로 돌변할 것이다.
 
나는 오늘 날 교회 안에 유다와 같이 많은 무리들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예수님께 친근하다. 그들은 마치 제자들 같고, 제자들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주님께 진실로 헌신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배신의 최악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진실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평가에 낙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주님을 대항하여 돌아서지 않는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위해 똑바로 서려고 하다가 일시적으로 두려워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기꺼이 그를 내다 팔지 않는다. 불가피하게 진실한 제자들은 발에 걸려 넘어질 수 있지만 그들이 죄에 빠질 때 그들은 깨끗함을 찾는다.
 
* 이 글은 John F. MacArthur, Jr “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He Condemns a Hardened Heart“ PP 104-112를 발췌 번역하였다. (http://blog.naver.com/greatimpact/10013194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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