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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의사(구원론)

바빙크와 제2의 축복-차영배교수의 바빙크해석을 중심으로-

바빙크와 제2의 축복-차영배교수의 바빙크해석을 중심으로-
유 해무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http://christianity.pe.kr/iezn/index.php?g_num=19&gs_num=27&idx=5&mode=view&num=94
 
1. 바빙크의 신학 구도와 차교수의 바빙크 사용의 문제점
화란의 개혁신학자 Herman Bavinck (1854-1921)는 한국교회에 잘 알려져 있으나, 그의 신학은 아직도 잘 소개되지 않은 상태이다. 여기엔 여러 이유들이 있겠으나, 그가 우리 당대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외에도 그의 저작들이 영어로 많이 번역되지 않았고, 화란어를 구사하는 우리 신학자들도 제한되어 있다는 점도 들 수 있겠다. 그런데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의 차영배교수는 바빙크의 작품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고, 바빙크에 관하여 여러 논문들을 발표했다. 그 논문들에서 다루어진 주제들은 그렇게 다양하지는 않고, 대개 구원론의 범주에 속하며, 가령 중생과 성령세례,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영속성 등과 같은 주제들이 중심을 이룬다.
 
차교수는 성령 사역, 특히 성령세례에 관하여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 견해를 그는 대부분 다른 신학자와의 논쟁을 통하여 밝히거나 (A. Kuyper, R.B. Gaffin, J. Stott, K. Barth, N.H. Gootjes 등), 때로는 상이한 입장들을 비판하는 식으로 개진해왔다. (오순절 성령 운동, 고려신학대학원교수회 연구보고서 등) 만약 그가 자신의 입장을 긍정적 어조로 개진한다면, 이는 대체로 바빙크의 신학사상을 소개하거나 자신을 그의 신학과 일치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실 그의 논쟁이나 비판의 기준도 바빙크의 신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지금까지 그의 바빙크 인용은 한치도 부정적인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영속성에 관한 그의 신중한 태도, 가령 고전 12,13에 대한 포괄적인 주석, 또는 1907의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에 대한 평가에서도 나타나지만, 그의 바빙크신학 이용이 결코 맹종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동시대를 살면서 동일한 신학적, 신앙적 투쟁을 한 A. Kuyper (1837-1920)와 바빙크가 신학적으로 차교수가 소개한 만큼 하늘과 땅의 차이를 지닌다고 여기기에는 많은 의문들을 가지고 이다. 실 로 바빙크의 교의학을 보면, 카이퍼에 대한 비판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있을 경우 이는 대개 차교수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성령론, 그것도 구원론에 편중되어 있긴하다. 만  두 신학자의 신학이 전반적으로 소개되지도 않은 형편에서, 특정 주제들에 관한 그들의 신학적 차이만이 지적되었다면, 이는 공평하지 못하다 할 것이다. 이 경우 특히 카이퍼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고, 이는 동시에 바빙크 해석에도 유익하지 못할 것이며, 나아가 차교수의 자기 입장 논증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교수의 바빙크 해석을 평가하기 전에 그의 바빙크 사용의 특성과 문젯점을 일차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차교수의 바빙크 사용의 특성은 그가 자신의 입장을 논증하기 위하여 Magnalia Dei보다는 교의학 을  호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이 선호는 원칙적 선택이다. 그는 1907년에 나온 전기서는 평신도를 위한 저작이고, 그의 교의학은 바빙크신학의 핵심이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음을 고려에 넣을 때, ... 보다 명백한 교의학을 가지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고 평가한다. 그 데 우리는 이 평가에 근거하여 차교수의 바빙크 사용의 문젯점을 몇가지로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로, 차교수는 바빙크의 교의학 에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은 표제로 나오지만, 성령의 인격과 사역 에 관한 독립된 장이 들어있지 않는 것을 고려해 보았는가 알고 싶다. 차교수의 관심이 성령론임을 고려할 때, 바빙크가 성령의 인격과 사역 을 구원의 서정 으로 축소시켜 놓은 것은 바의 교의학의 전체 구도가 안고 있는 결함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말은 바빙크가 성령론의 주요 요소들을 구원의 서정 항에서 다루고 있지 않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다만 우리는 바빙크가 Magnalia Dei에서 소명, 칭의, 성화 등의 구원의 서정을 다루기 전에, 구원의 서정 항 자체를 성령의 은사 로 칭한 것을 선호하면서, 그보다 4년 뒤에 나온 교의학 2판이 이 구도를 따르지 않고 교의학 1판 (1895-1901)의 순서를 그대로 채택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그  경우 교의학의 삼위일체론적 구도가 훨씬 선명하게 나타나게 되고, 차교수의 말대로 삼위일체론적 구원서정 이 제대로 부각될 수 있었을 터이다. 바 크의 교의학이 지향하며, 이 저서의 초반부터 아주 유리하게 전개되어진 삼위일체론적 구도가 그의 원칙적인 자세와는 관계없이 구원의 서정 항에서 단절된 것은 바빙크가 개혁신학의 계속적 발전에 끼칠 수 있었던 아주 중요한 기회를 놓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둘째로, 위와 관련하여 바빙크가 Magnalia Dei에서와는 달리 교의학 에서는 성령의 은사 항을 구원의 서정 으로 칭했기 때문에, 구원론 만이 성령론인 것과 같은 인상을 날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인상은 차교수로 하여금 오순절 성령강림을 오직 구원서정의 첫사역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는 확신을 갖도록 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 만약 바빙크가 Magnalia Dei의 배열을 일관성 있게 고수할 수 있었다면, 1907년에 이미 구원론과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까지 포함되는 포괄적인 성령론의 정초가 잡혔을 것이요, 1911의 교의학 에는 이 구도를 보다 신학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첫사역이 오순절 성령강림이 아니고서는 교회론의 정립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아쉬움을 차교수가 인지하지는 못했으나, 감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는 바빙크를 따라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교회의 생일 로  는데, 이로써 그가 오순절사건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도록 하신 첫 시작임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 않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오직 구원서정의 첫사역으로만 볼 경우, 성령론의 한 부분인 교회론의 정초 자체가 문제시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우리의 구원과 교회 (그리고 종말)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성령론을 가능하게 하는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첫사역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구원서정의 첫사역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준 바빙크 교의학 성령론 구도, 특히 구원의 서정 항의 고수를 크게 아쉬워한다. 동시에 차교수 역시 이 제약을 넘을 수 있으면서도, 구원의 서정을 고수함으로 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는 오순절 성령강림은 눞아지신 그리스도께서 가장 큰 선물인 영광의 성령을 보내신 첫 사역이다 고 포괄적으로 말한 뒤, 곧 이어 바빙크는 이것을 구원서정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 한정함으로 그의 입장을 게속 고수한다.
 
게다가 차교수가 성령론을 구원의 서정으로 제한함으로, 바빙크의 교회에 관한 다양한 사상이 논외로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구원의 서정 항이 속한 교의학 제 3권 제8장이 언약의 은덕들 인데, 바빙크는 이 (은혜)언약을 성도 개인들 보다는 전체로서의 교회, 나아가 그리스도의 대표성의 관점에서 이미 다루었다. 차 수가 언약을 언급은 하지만, 논쟁의 핵심에서는 이 중요한 주제가 침묵을 지킨다. 이 경우처럼 차교수의 인용에는 바빙크신학의 전체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차교수의 바빙크 사용에 대한 평가에서는 그의 바빙크 인용의 정당성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아울러 그가 바빙크의 어떤 사상이나 전체를 인용하지 않음으로 수반되는, 그의 바빙크 사용의 신뢰성에 대한 파악이 때로는 전반적 평가를 좌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차교수가 바빙크의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평신도를 신학자와 대비시키며 사실상 비하시키는 것은 개혁신학의 근본의도에 배치되는 것이다. 이 말은 마치 평신도를 위한 책에는 어떤 신학자의 신학핵심이 담겨있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들려질 위험이 있다. 종교개혁이 평신도와 신학자의 구분을 성경이라는 잣대를 사용하여 없애버린 것은 중세교회와 신학의 폐단을 정리한 불멸의 공적이다. 우리는 어떤 신학적 논의나 신학자들의 고유작업 영역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신학자의 작업 자체가 더 신비하다거나 또는 신학자가 평신도보다 하나님을 가령 질적으로 더 안다는 오해를 불러일어켜서는 안 될 것이다. 도리어 신학자의 가장 중요한 직분적 기여는 일반 성도를 위한 작품에서 기대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에는 특별히 신학적인 논쟁의 긴장이 없이 아주 평이하게 성경적 가르침을 전개할 수 있다. 이 점에서 Magnalia Dei는 우리의 신학적 작업에 좋은 귀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빙크의 교의학 1판과 Magnalia Dei간에는 구원론도 포함된 내용적 개정을 볼 수 있으나, Magnalia Dei와 교의학 2판 간에는 내용적 계속성을 확인함과 동시에, 위의 지적들을 고려하면서 양 작품을 동등하게 취급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논의의 주제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의 의미일 것이다. 차교수가 양 작품의 단절성을 주장할 경우, 논의의 핵은 그 사건의 단회성과 영속성에 관해서이다. 이 논의의 목표는 차교수의 지론처럼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제2축복으로서 반복되어야 하는 성령세례며, 이것을 바빙크의 영광의 상태 에 대한 해석으로 지지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차교수의 논의의 범위가 구원의 서정에 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그 범위를 교회론(그리고 종말론)까지 넓혔는고로, 이 각론들에서도 구원서정에서와 같이 어떤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영속성이 주장될 수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차교수의 바빙크 사용의 정당성 여부를 평가해 보려고 한다.
 
2. 오순절 성령강림: 단회적인가, 영속적인가?
차교수의 논의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 다시 풀 수 있다. 즉, 오순절 성령은 그리스도의 대속 과 같이 단회적인가, 아니면 그 대속의 은혜를 적용한다는 의미의 구속 으로서 영속적인가?
차교수가 요약한 바에 의하면, 미국 Westminster신하교 교수인Gaffin은 오순절사건을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로 보면서, 이 사건을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과 본질적으로 연결한다. 그 므로 오순절 성령세례는 오늘날도 계속 적용되는 사건의 일부가 아니라, 단회적으로 성취된 구속역사의 한 사건이며, 따라서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차교수는 이를 반대한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은 대표의 원리 가 적용되는고로 절대적 단회성이라 할 수 있으나 (시혜 주체), 성령강림은 120명이나 사도들이 대표로 받았다는 대표의 원리가 적용될 수 없다 (수혜 주체). 누구도 성령을 대표로 받지도, 받을 수도 없으므로, 이 말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곧 성령세례는 구원의 역사가 아니라 구원의 서정에 속한다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차교수는 Gaffin과의 논쟁에서 Magnalia Dei의 한 본문 해석에 집중한다. 묘하게도 Gaffin이 성령강림의 단회성이라 인용한 그 부분이 교의학 2판에서는 그야말로 감쪽같이 삭제되었고, 이것을 두고서 차교수는 바빙크가 단회성을 주장한 적이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Gaffin의 잘못된 해석에 대하여 바빙크를 보호한다. 그는 Gootjes(고재수)와의 논쟁에서도 바빙크가 단회성 주장을 포기했든지, 아니면 교의학 에서는 단회성도 영속성에 대하여 확신이 없었을 수 있다는 두 가능성을 개진하면서, 삭제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이었겠다 고 단언한다.
 
삭제된 문제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오순절날에 일어난 이 성령을 부어심은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상 유일한 사건이다. 창조와 성육신이 그러한 것처럼 이 일은 단 한 번만 일어났다. 중요성에 있어서 이 사건과 동등하게 성령을 주신 일이 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결코 반복되어질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잉태시에 인간성을 취하시고 그것을 다시 벗어 놓을 수 없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도 오순절날에 교회를 그의 거처와 성전으로 택하였고 결코 다시 그것과 분리되지 못한다. 성경은 오순절에 일어난 이 사건들의 특유한 의미를 명백하게 지적하기 위하여 그 사건을 성령의 부으심이라고 말한다 (행 2,17,18,33, 10,45, 딛 3,6)
 
고재수는 유일한과 단 한 번만은 창조와 성육신의 반복될 수 없음과 연결시켜 이해해야 한다면서, 오순절 사건의 단회성을 주장하지만, 특유한은 단번에 가 아니고 오순절 이후로부터 성령은 넘치게 부어졌다는 그 사건의 특유성을 증거 한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위에 유일한, 특유한으로 번역된 화란어는 동일한 단어인데, 이것을 차교수는 공히 독특한으로 번역함으로, 단회성의 의미를 배재했다. 그렇지만 그는 단 한 번만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두 사람은 오순절 사건이 지닌 어떤 특유성을 인정하지만, 위에 유일한의 의미가 단 한 번만 과 반복될 수 없음과 연결되어 단회성을 지지하든지(고재수), 아니면 그 말을 독특한으로 번역하여 특유성만을 옹호하는가이다(차교수).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두 사람 공히 단회성과 특유성의 주장에서 결코 배타적일 수 없으며, 실제에서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지적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문헌적 분석을 계속하려고 한다. 교의학 (계속 제2판)에서는 차교수의 지적대로, 단회성에 관한 어휘가 거의 없고 , 단회성을 위하여 인용된 성경장절이 전혀 보이질 아니한다 . 이 점에 있어서 차교수의 바빙크 독법은 다른 두 신학자보다 정확하다. 차교수는 바로 이 문맥에서 이러한 수혜의 단회성의 주창자로서 카이퍼를 들면서, 카이퍼가 스스로에게 한 질문을 언급한다: 만약 오순절에 단번에,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단번에 성령의 부으심이 머리로부터 몸된 교회에 일어났다면, 성령의 보통 역사와 어떻게 서로 구별될 수 있는가? 그 고 카이퍼는 지금도 성령의 흐름이 게속하여 교회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과 오순절의 단회적 사건을 서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성경적 증거는 전무 한 저수지 비유를 들었다. 우리는 차교수가 바빙크를 변호할 의향으로 두 신학자를 대비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딛 3,6이 교의학에서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단회성을 지적하는 단어나 표현들의 부재가 곧장 영속성만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이 사건의 독특성은 바빙크에 의해서도 계속 언급된다. 바빙크는 교의학 에서 성령부어주심은 창조와 성육신 이후에 하나님이 행하신 제3의 큰 사역이다 고 한다. 이 말에서는 단회성과 특유성이 동시에 함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오순절 방언 사건을 창조시의 새벽별들이 노래한 것과 성탄시 천군천사들이 찬양한 것과 비교했다. 여 에 나타난 대로, 바빙크의 창조, 성육신, 오순절의 비교는 단회성과 특유성을 잘 들어낸다. 이 부분은 Magnalia Dei에서 그대로 재수록되었다. 그리고 바빙크는 이 비교의 부분에서 20세기 초의 방언의 역사에 관한 12권 가량의 저서를 소개한다. 차교수가 잘 지적했듯이 바빙크는 오순절의 방언이 고린도교회나 오늘날의 방언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오순절의 특유성은 그 사건이 지닌 창조 및 성육신과 비교되는 단회성 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차교수 역시 이 양면성을 항상 지적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특유성이 차교수의 선호대로 영속성 이라 할 수 있는냐는 것이다. 고재수는 반복 가능성의 배제로 성령강림은 구원의 순서에 속하지 않으나, 그리스도가 지속적으로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로, 강림으로 성령은 회중에 지속적으로 거하심으로 구원의 적용에 큰 영향 을 준다고 한다. 차교수는 큰 영향 을 주는 방식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이 강림을 구원의 서정 의 첫 사건으로 볼때, 해결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차교수는 고재수가 이 사실이 신약의 구원 순서에 있어서는 기본적 사실 이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구원의 서정 중 가장 중요한 은덕 자체라 했어야 한다고 논박한다.
 
우리는 3 신학자의 논쟁에서 언어의 혼란을 본다. 오순절 성령부어주심은 창조와 성육신에 상응하는 유일한 사건이다. 차교수 역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주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성령이 처음으로 강림하셨다는 의미에서, 유일독특한 사건이었다 . 그  이 말에서 특히 유일성, 또는 단일성의 두가지를 계속 구분하면서 기억했었어야 했다. 즉, 먼저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직후의 사건으로서의 오순절 강림의 유일성이요, 둘째로는 이 측면에서 나타나는 수혜가 아닌 시혜로서의 유일성이다. 차교수도 전자를 유념하고 있지만, 후자를 쉽게 놓지므로, 법정적인 대표의 원리 가 만약 오순절 성령강림에도 적용된다면, 결국 오순절에 120명 쯤되는 성도들이 우리를 대표하여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되고 만다 는 우려를 거듭 반복하고 있다. 차 수는 이 시혜와 수혜의 유일성을 일관성있게 구별해야 할 것이다.
 
고재수도 우리가 위에 지적한 양면성을 지닌 유일성 또는 단일성만 강조할 뿐, 성령강림이 어떻게 구원의 적용에 큰 영향을 주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는 차교수보다는 더 정확하게 바빙크를 해석할 수 있었음에도, 차교수의 바빙크 사용의 부당성을 논하는 그의 책의 방법론적 요점 항에서, 그 기회를 이용하지 못했다. 그는 차교수가 영속성 또는 반복성으로 표현하는 수혜 주체의 성령받음을, 성령이 회중 속에 지속적으로 거하심으로 큰 영향을 준다고 본다. 여기에서 개인과 회중의 관계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문제의 삭제된 부분 중 차교수에 의하여 계속 진지하게 고려되지 못한 측면이 바빙크로 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잉태시에 인간성을 취하시고 그것을 다시 벗어 놓을 수 없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도 오순절날에 교회를 그의 거처와 성전으로 택하였고 결코 다시 그것과 분리되지 못한다. 성령이 교회 또는 회중을 거처로 택하셨다는 사실의 유일성과 단회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한번 정하신 그 성전을 결코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는 바빙크의 사상은 Magnalia Dei의 삭제된 부분에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교의학에서도 계속 고수된다. 물론 성령이 강림하신 후 교회에 내주하심을 너무 쉽게 120명이 대표로 성령을 받았다는 식으로 단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개 성도들과 전체인 교회를 혼동해서도 안되지만, 양자를 면밀하게 잘 구별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바빙크를 살펴보자. 먼저 바빙크의 언어 사용은 아주 자유스럽다. 그는 그리스도는 성령을 주실 수 있었다는 과거형도 쓰고 ( 교의학 III, 493), 때로는 그리스도가 성령을 오순절에 보낸다, 주신다는 현재형도 쓴다 (493, 576). 오순절에 성령이 파송되었다, 부어졌다라는 과거형도 쓰고 (593 등), 때로는 성령이 오순절에 회중을 성전으로 삼으신다는 현재형도 쓴다 (495). 이런 점에서 바빙크가 오순절의 단회성과 영속성이라는 주제를 과연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는 의문시된다. 이는 바빙크가 성령 수혜의 주체를 교차하여 지목하는데서도 나타난다. 그는 과거형으로 회중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다거나 (494), 그리스도는 오순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회중에 당신 자신을 주셨다 (IV, 217) 또는 예수님은 회중에 성령을 부어주셨다 (IV, 234)고 함으로, 회중이 성령을 받은 주체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오순절에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성령을 받게 될 것이고, 120명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III, 495). 이와같이 바빙크는 교중과 개 성도들을 교체(交替)하며 쓰고 있다. 신자 각자는 교중의 태에서 태어난다 (IV, 357). 게다가 그는 성령이 이제는 회중의 모든 지체들 위에 내려 오셨고 영속적으로 그들 모두 안에 거하시며 사역하신다 (동)고 할 정도로, 그의 언어 사은 자유롭다. 그리고 바로 뒤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실 때 인성을 거처로 삼으셨듯이, 성령도 오순절에 회중을 성전으로 삼고, 그 회중을 지속적으로 거룩하게 하시며, 세우시고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 고 함으로, Magnalia Dei에서 삭제된 문제의 부분 중 이 한 측면을 그는 교의학에서 계속 고수한다.
 
바빙크는 왜 이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가? 회중과 성도들의 교체(交替)는 어떻게 가능한가? 차교수는 이것도 알고 있으나, 그의 논쟁에서는 이 중요한 주제가 제 역활을 못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대로, 오순절의 성령 수혜의 주체를 바빙크의 신학에서 밝히려면, 이는 차교수가 확신하듯이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게다가 차교수는 바빙크 신학을 받히고 있는 기반인 예정론 을 논쟁에서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다. 예정론 자체는 별도의 큰 주제인고로, 우리는 교회론의 배경이 되는 한도 내에서만 이를 취급하고자 한다.
 
바빙크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이미 영원 전 구원언약 (Pactum salutis)에서 당신의 백성들과 연관되며, 중보자로서 그들을 대신하셨다. 성도들이 인격적으로 이 언약에 등재되기 전에, 훨씬 앞서 은혜언약, 그리스도와 그의 회중 간의 신비적 연합 이 이루어졌다 (IV, 197). 회중은 유기체이며, 유기체에는 전체가 부분에 선행한다. 또 이 은혜언약은 구원의 서정에 의하여 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서정에 선행한다 (III, 521). 은혜언약은 영원 전부터 삼위 하나님의 구원언약 에 예정되어 있다. 전자는 후자에서 원형을 갖지만, 때로는 동의어로 쓰일 경우도 있다. 창조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듯이 재창조 역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인 것은 구원언약이 삼위 하나님의 협의로 성사되었기 때문이다. 따 서 최초의 은덕(weldaad)도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교제를 전제하며, 그리스도를 회중에 귀속하고 그 분을 주심이 모든 것에 선행한다. 하나님의 작정에서 중보자와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간에 신비적 연합이 체결되었고, 이로써 인격적 교체(交替) 가 발생했다.  와같이 그리스도, 회중, 성도들의 자리 바꿈(교체)은 바빙크에겐 아무 무리없이 진행될 수 있다. 전 회중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이미 포섭된고로, 객관적으로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죽었고, 부활했고 영화롭게 되었다. (III, 520) 칭의, 성화, 영화 등 모든 은덕들은 믿음 후 믿음을 통하여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객관적으로 현존한다. 그리스도의 귀속이 성령 주심에 선행하며, 중생, 신앙과 회개가 비로소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않고, (이 은덕들은)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서 취하여져서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에게 시혜된다 (III, 522) 물론 이 인용들은 교의학 구원의 서정 항에서 취했으나, 바빙크의 예정론과 교회론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를 부분적으로나 아니면 거의 이해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차교수는 교회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 이라고 정의하면서, 전체에 치중할 수 있으나, 개체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고 한다. 그 면서 그는 유기체로서의 전체를 중시하는 입장으로 카이퍼를 드는데, 이 점에 있어서 바빙크도 동시대인 으로서 한치의 차이가 없음을 우리는 안다.  약 오순절에 단번에,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단번에 성령의 부으심이 머리로부터 몸된 교회에 일어났다면 하는 카이퍼의 입장도 영원에서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회중 또는 그에게 속한 자들과의 교체(交替),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이 회중과 믿는 성도들에게 오셨다고 자유롭게 말하는 바빙크와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지는 않다. 찰스 핫지나 아브라함 카이퍼처럼 유기체 전체 에 강조점을 두지 말고, 클라스 스킬더처럼 교회의 개체적 성격을 중요시해야 한다면, 도매금으로 교회는 성령을 받았다 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이 비난을 바빙크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로써 우리는 Gaffin, 고재수 그리고 차교수 사이에 있었던 오순절의 단회성 또는 영속성의 논쟁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바빙크에 호소할 수는 없는 문제로 본다. 왜냐하면 바빙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런 식의 dilemma를 몰랐다. 나아가 우리의 판단으로는 이 문제는 구원의 서정에 제한되지 않고, 교회론을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 그 취하신 인성을 다시 벗어 놓을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도 오순절날에 교회를 그의 거처와 성전으로 택하였고 결코 다시 그것과 분리되지 못한다는 바빙크에게 교회론의 문맥에서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영속성을 질문할 수 있을까? 그런고로 바빙크가 고려하지 않았던 이문제를 풀기 원한다면, 교회론의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그를 심문하는 방식을 취할 때, 그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재수든 차교수든 오순절성령을 말하면서도, 논쟁 중에서는 그 성령이 취하신 방편인 말씀 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놀라우리 만큼 이상한 일이다. 은혜의 방편인 말씀을 도입시키지 않고는 이 논쟁은 주변만 배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3. 바빙크와 두 상태, 곧 은혜의 상태와 영과의 상태 ( 2 status)
차교수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을 즐겨 영광의 영 으로 표현한다. 그가 오순절 성령강림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오순절에 오신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하시는 신비적 연합을 이루시는데, 이는 예수를 먼저 믿는 은혜를 입게 하신 후 영광의 영을 부어주심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 영광의 영을 받는 것을 성령세례라 부르며, 이 성령세례의 시혜자는 높아지신 그리스도이시다. 이로써 모든 이방인들조차도 동질동등한 같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 . 우 는 차교수의 이 입장을 긍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가 도입한 도식은 심한 맹점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할 수 밖에 없다.
 
도입된 도식이란 신자의 신분 또는 상태를 이분하는 그의 배경이다. 차교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되고, 또 같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다고 볼 때,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제2축복 운운을 말할 수 있다 고 본다. 믿 이 전제된 뒤에 성령세례 또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영광의 영을 받을 수 있고, 이렇게 하여 받는 제2축복을 그는 상태로는 영광 또는 영화의 상태라 한다: 이 영광 또는 영화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 (롬 8,30, 고후 3,18)을 둘째 경험 또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식으로 차교수를 지원하는 신학적 배경으로 바빙크가 다시 등장한다.
 
차교수는 여기에 인용된 주장을 하면서, 그 주장을 바빙크를 인용하는 식으로 마지막 권위를 부여한다. 차교수는 이 두번째 축복 의 예를 청교도신학자 Th. Boston (1676-1732), 마지막 청교도인 J. Wesley , 한국 교회의 1907 부흥운동, 그리고 바빙크의 두 상태 구분에서 찿는다. 그  Wesley의 전인성화와 바빙크의 영광의 상태를 동일시한다. 또 다른 곳에서 차교수는 바빙크가 은혜의 상태와 성화의 상태를 구별했고, Wesley도 칭의와 성화를 구별했다고 함으로, 양자의 간격을 좁힌다. 우리의 관심은 이런 식으로 바빙크를 해석하는 것이 그를 부당하게 만들지는 않는가 함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바빙크가 말하는 은혜와 영광의 상태에 관한 고재수의 해석의 정당성이다. 그는 칭의와 성화는 한 순간도 분리되지 않는다는 바빙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칭의와 성화의 단계 가 곧 은혜의 단계로, 그리고 영광의 상태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의 성도의 상태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는 칭의와 성화를, 믿음과 인침을 분리한 감리교 이론을 바빙크가 비판함을 덧붙인다.
 
그런데 차교수는 성화와 영화(영광)의 상태에 관계를 잘 모른다면, 바빙크신학의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는 셈이라고 단정한다. 이 말과 고재수의 해석의 정당성을 가리기 위하여 먼저 바빙크를 문헌적으로 조사해보자. 차교수가 바빙크의 교의학 의 3곳을 인용하면서, 영 와 성화를 바빙크가 같은 상태로 보았다고 단언하자, 고재수는 그 중 한곳만을 언급한 뒤, 또 다른 2곳을 인용하면서 차교수의 주장을 반박했다. 즉  위에 요약된대로, 그는 영광의 상태를 그리스도의 재림 후의 성도의 상태로 해석한다. 여기에 대하여 차교수는 다시 또 다른 한곳(III, 596-604)을 장황하게 인용하는 방식으로, 고재수를 논박한다. 바빙크는 구원의 서정을 1. 부르심, 2. 칭의, 3. 성화, 4. 영화의 상태로 나누었는데, 차교수는 그 근거 제시를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한다: 이 네 그룹은 고전 1,30의 말씀 곧 지혜와 의와 거룩 및 구속에 상응한다. 롬 8,30에서 사도는 세 은덕을 열거하였다. 이 모든 은덕들은 시간 세계에서 일어난다. 또한 에독사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은 신자들이 사후 또는 주 재림 후에 기다리는 엉광을 먼저 지적하는 말씀이 아니고, 과거시제임을 보아 신자들이 이미 땅 위에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영광은 신자들이 부활할 때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는 성화와 영광을 다 선포한다.
 
우리가 바빙크의 식으로 고전 1,30과 롬 8,30을 비교해보면, 칭의와 영화는 공히 나타나지만, 롬 8,30에는 성화 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바빙크는 고재수가 해석한대로 성화를 칭의 와 연결하지 않고, 도리어 차교수가 정리한대로 영화 와 연결시킨다. 문헌적으로 볼때, 바빙크가 영광의 상태에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의 성도의 상태 외에 또 한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는 차교수의 논박은 바빙크를 더 정확하게 본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관건은 바빙크가 고재수의 말대로 칭의와 성화의 단계 를 은혜의 단계로, 아니면 차교수의 말대로 성화가 곧 영화이며 ( 거룩하게 하심=영화롭게 하심 ), 이는 다시 땅 위에서도 얻어지는 영광의 상태 를 도식화하고 있는가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차교수는 이런 식으로 성화를 영화와 연관시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한 뒤, 애써 전자는 은혜의 상태 로, 후자는 영광의 상태 로 보려하며, 그리고 이 두 상태 구분으로 바빙크와 Wesley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바빙크를 바로 해석하고 있는가이다.
 
두 신분에 대한 논의는 일단 난외에 붙이고, 바빙크가 이 관계에 대하여 교의학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를 살펴보자. 다시 문헌적으로 보자면, 바빙크는 전 회중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이미 포섭된고로, 객관적으로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죽었고, 부활했고 영화롭게 되었다 고 한다 (III, 520). 또 그는 회중의 영화는 중생과 더불어 시작되는데, 칭의처럼 신앙의 대상이며, 회중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원리상으로 거룩해졌고, 영화로워졌고, 성자의 형상을 본받았다 (IV, 247)고도 했다. 바빙크는 그의 신학의 전제를 따라, 영화를 일단은 양면에서 본다. 한면은 영화의 원리적 완성인데, 그는 이를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미 성취되었고, 성령에 의하여 이미 적용되었다. 다른 면은 영화의 실제적 적용은 중생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전자가 개혁신학의 특징에서 유래한다는 것외에, 누구라도 후자는 지극히 평범하게 수용할 수 있다. 그리고 양자는 종말론적 시각에서 통합되어야 한다.
 
그런데 바빙크가 루터와 칼빈의 칭의 이해를 취급하는 부분에 우리는 이 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에 의하면,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예정의 관점에서도 칭의를 접근하는데, 그때에 그리스도의 의를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주심이 (믿음에 의한) 주관적 취득에 선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칼빈은 예정을 전제함으로써 의와 성화를 면밀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칭의는 한편으로는 선택과 그리스도를 주심, 또 한편으로는 성화와 영화의 사이에 자리잡는다. (IV, 183) 우리는 바빙크의 이러한 칼빈해석에서, 차교수가 주장하는 식의 칭의와 성화(영화 포함)의 구별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바빙크는 칼빈이 이와 같이 칭의를 선택과 대속, 그리고 성화와 영화 사이에 둠 으로, 칭의론에 연관된 문제들을 완결하지는 못했음을 덧붙인다. 칭의의 객관적, 법정적 성격을 고집하면, 칭의가 선택과 대속에 직결되고, 나아가 믿음에 의한 취득보다는 복음이나 그리스도의 부활, 또는 영원 전에 완성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일 따름이다. 그러면 믿음은 단지 도구일 뿐, 믿음에서 성화의 새 삶을 도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바빙크는 反新율법주의에서 이 위험을 본다. 반면에 실천적으로 접근할 경우, 칭의와 믿음을 연관시키게 되고, 결국 칭의는 믿음에 의한 사죄와 동일시되고,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시작된다. 바빙크는 여기서 항변파, Saumur학파, 경건주의 및 감리교를 지적한다.
 
바빙크는 자신의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칭의와 성화의 구별을 고수하는데, 이는 칭의가 지닌 법정적 의미와 성화가 지닌 윤리적 의미를 칼빈이 루터나 Wesley보다 더 잘 간파했기 때문이다. 루터와 루터파신학은 칭의를 강조하면서도 양 은덕을 잘 구별하지 않는다. 때로는 복음 설교에 내포된 사죄와 칭의와 영생의 약속이 믿음에 의해 취득된다고 했다가, 때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알고서 사죄를 갈망하고 의로워진다고도 한다. 이것은 예정론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또 Wesley도 양 은덕을 구멸하다 못해 분리한다. 칭의 후에도 전에와 마찬가지로 선행을 할 수 없고, 완전한 거룩을 누리게 하는 두번째 축복을 받아야 한다. 이 완전한 거룩은 칭의 후 믿음을 통해 즉각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IV, 229) 여기에 대한 우리의 바빙크 평가는 뒤로 미루고, 차교수의 평가를 보자.
 
차교수는 Wesley가 양 은덕을 분리시켰기 때문이지, 구별한 것까지 바빙크가 비평한 것은 아니라고 평가한다. 그렇지만 그에게 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바빙크신학이 결코 제2축복과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고 한 뒤, 조금 밑에서 바빙크를 요약하는 중에 그러나 제2축복 운운는 있을 수 없으나 로 말한 만큼, 전개에 어려움을 노출한다. 이 어려움을 통해서야 그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제1이든, 제2이든, 제3이든 축복의 사건 자체를 중요시하려는 필요때문에, 그는 신분이나 지위 혹은 상태를 둘로 나누는 것이 좋다고 보면서, 이를 위하여 바빙크를 인용하고 해석한다.(64) 차교수가 바빙크를 인용하는 데는 그가 은혜의 상태와 성화의 상태를 구별한 뒤, 전자는 칭의 상태와 동일시하고, 후자에다 영화를 포함시키는데 있다고 여겨진다. 그는 여기서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고 구별하는 개혁신학의 전통이 계승됨을 본다. 이로써 바빙크와 Wesley는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같은 입장을 취하며, 여기에 R.A. Torrey도 합류한다. 이 세사람이 개혁신학 노선에 서 있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차교수의 주장을 계속 들어보자. 그는 성령의 충만한 역사, 곧 영광의 영이 없이 말씀만으로는 성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바빙크)의 지론이다 고 말하면서, 바빙크는 영화와 성화를 같은 상태로 보았다고 해석한다.
 
차교수의 이런 바빙크 해석이 정당하다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차교수는 성령의 사역 자체를 양분할 수 밖에 업는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칭의시의 믿음은 성령의 사역이 아닌가? 마치 칭의 자체는 성령사역 없는 말씀만으로도 가능하다는 암시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빙크에게서 이런 사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바빙크는 비록 마지막 서정 곧 영화는 보통 교의학 말미에 종말론에서 다루어지곤 하지만, 아무래도 이것은 구원의 서정에 속하여 그 앞의 서정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다 고 말한다. (III, 603) 그는 이와 같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구원서정에 포함시켰듯이, 영화를 구원서정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바빙크는 교의학 제4권에서 성화 를 취급하면서 성화를 영화 와 관련하여 크게 다루지는 않는다. 차교수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우리는 고재수가 지적했던, 그리스도의 재림 후의 성도의 상태로서의 영광의 상태를 약화시킨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성화는 성도들이 성자의 형상에 닮아지는데에서 풍성하게 나타난다, 롬 8,29, 갈 4,19. 이 경우에 한해서 성화는 영화와 일치한다. 이는 이생 뒤에 처음으로 시작되지 않고, 소명과 더불어 즉시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던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셨던 자들을 동시에 영화롭게 하셨다, 롬 8,30. 이 영화는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완성될 때까지, 고전 15,49,51이하, 골 3,4, 빌 3,21, 전생애를 통하여 계속된다, 고후 3,18. (IV, 237-238) 이 처럼 바는 이생 뒤에 오는 영화와 아울러 이 영광의 상태가 땅위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II, 503) 그런데 우리는 윗 인용의 이 경우에 한해서에 주의해야 한다. 아무런 제약 없이 성화와 영화가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가 지닌 양면성을 존중해야 한다. 차교수는 이를 동의하긴 한다: 여기서 영광의 상태 는 확실히 부활 후에 누릴 영광의 지위를 가리킨다. 그 에도 그는 논쟁에서 이 한 측면에 대하여 침묵할 뿐만 아니라, 바빙크가 은덕들을 삼분하면서 성화와 영화를 제2부류와 제3부류로 나눈 것을 거의 묵과한다.
 
어쨌든 차교수의 바빙크 해석에서는 칭의와 성화의 구별보다는 칭의와 영화의 구별이 더 부각되는 감을 받는데, 그의 이 의도는 지지받기 힘든다. 그럴 경우 그에겐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는 Wesley만 남게 된다. 이것은 전인 성화와 영화의 상태를 일치시키는 그의 입장에서 잘 들어난다.
 
차교수가 성화에다 영화를 기필코 연결시키려는 배후에는 그럴 때에만 이런 논의에서 영광의 영 (벧전 4,14)에 관심이 집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광의 영이 바로 오순절 성령이시다. 주 예수를 믿은 베드로를 위시하여 120명은 모두 오순절 전에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고, 오순절 그날에는 영광의 주께서 보내신 영광의 영을 받음으로써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영화롭게 되었다. 즉 제자들은 먼저 믿고, 두번째 체험을 했다는 도식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 영광의 영, 오순절 성령이 연결됨으로써,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성령세례로 중요한 주제가 된다. 차교수의 주장을 종합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한 성령세례 그 자체가 바로 영화 이다. 또 한편으로 성령세례는 큰 회개 이다. 여기엔 성화의 측면이 부각된다. 즉 이 점에서 영화는 성화이다. 바빙크도 이 영화가 중생 또는 소명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함으로 영화를 아주 포괄적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바빙크가 차교수의 주장대로, 영광의 영은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이 받아 성령 충만하며, 영화롭게 된다고 보고 있는가? 바빙크가 칭의를 중생 또는 소명 뒤에 다루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차교수가 칭의와 성화를 2상태로 나누고, 그 성화를 영화와 동일시하는 해석은 바빙크의 포괄적인 영화 이해와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 나아가 영광의 영을 받는 성령세례 그 자체가 바로 영화라면, 큰 회개 인 성화 과정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만약 칭의와 영화를 2상태로 규정하려는 차교수의 의도가 이런 식으로 제2의 체험으로서의 오순절성령강림에 귀착된다면, 이  귀결로 보기보다는 도리어 그의 출발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빙크에게는 이런 식의 도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바빙크는 영화를 성화에 포함시키든 않든, 차교수식의 제2의 체험에는 관심이 없다. 차교수는 성령의 충만한 역사, 곧 영광의 영이 없이 말씀만으로는 성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바빙크)의 지론이다 고 했으나, 바빙크는 Wesley가 성화 없는 칭의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단일성과 불가분리의 진리를 망각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IV, 250). 바빙크의 이 비판을 차교수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차교수는 믿음과 동시에 다 예외없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없다 거나, 예수를 믿게 하는 성령의 사역은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만 일으켜도 족하다 하고서는 믿음의 수단적 성격때문에 믿음자체 와 성령을 받는 일 은 동일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고 말한다. 이  칭의를 오직 법적으로만 이해함이요, 성화와의 분리는 불가피하다. 이런 식으로 과연 동질동등한 성령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는 바빙크보다는 Wesley에 가깝다. 아울러서 바빙크의 2 상태가 어떤식으로 이해되든 차교수가 해석하는 2상태론은 부당한 해석이다.

4. 맺는 말
차교수는 바빙크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고려하면서 그의 지지를 청해야 할 것이다. 가령 오순절사건의 성격을 바빙크의 신학에서 밝히기를 원한다면, 바빙크의 교회론과 평화언약에 관한 논의를 연관시켜야 한다. 구원의 획득은 구원의 적용을 포함한다는 바빙크의 사상은 예정론의 배경에서만 이해되어질 수 있다. 칭의가 법적이긴 하나 그 수단인 믿음이 공허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의 분리는 철저하게 배제된다. 믿음과 동시에 다 예외없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없다 는 주장은 구별 이상의 분리이며, 결국 차교수로 하여금 믿음을 수단 이상의 조건 이라  선언토록 만든다. 이런 분리의 근거를 바빙크의 2상태론에서 찾을 수 있다는 차교수의 생각은 바빙크의 지지를 결코 받을 수 없다. 바빙크의 영광의 상태는 제2축복이 아니다. 고전 1,30과 롬 8,30을 근거한 바빙크의 구원서정 논의에는 중생 또는 소명부터 칭의, 성화와 영화까지의 모든 은덕들이 획득(그리스도의 사역)과 적용(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나타난다. 이 사역의 주체되심이 우리의 구원체험에 선행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 사역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이 바빙크의 성경 이해이다.
 
차교수는 성령세례를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직접사역으로 본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을 받느냐에 대해서 그는 Filioque교의와 보좌 앞의 일곱 영 을 언급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직접 부어주시는 것을 성령세례로 이해한다. 그가 성령세례에는 대표의 원리를 적용할 수 없는고로, 오순절성령의 직접적인 강림을 말하는 반면에, 고재수는 성령이 회중 속에 지속적으로 거하심으로 큰 영향을 준다고 함으로, 그 역시 어떻게 성령이 지속적으로 거하시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두 신학자는 바빙크의 성령론의 중요한 한 부분 즉 은혜의 방편을 거론하지 않은 상태에서 논쟁을 진행한다. 그들이 이 주제를 다른 곳에서도 전혀 논의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이 논쟁에서 적절하게 거론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특히 차교수가 바빙크의 어떤 사상을 인용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바빙크 사용의 신뢰성이 문제시되는 경우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께 접착되어 모든 사역을 하시며, 중생까지 이루시고, 그리스도는 땅 위 당신의 말씀이 있는 곳에 계신다 (IV, 312) 성령은 그리스도와 당신의 말씀 없이 사역하지 않으며, 말씀 없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도 없다. 그리스도는 당신께 속한 자들을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모우신다. 교회는 하나님의 작정, 은혜언약, 그리스도의 인격에 기초와 단일성을 가지며, 인간들로 구성된고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회집되고 집합된다. (IV, 356) 하나님은 말씀에 임재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과 분리되지 않는다. (IV, 439) 바빙크에게 있어서 성령 하나님께서 사역하시는 방법은 분명하며, 성령이 오시는 방식도 확실하다.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말씀이 논쟁에서 고려되었어야만 했다. 그렇지 못한 이유를 찾는다면, 논쟁이 성령론 전체가 아니라 구원론의 테두리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말씀과 연관되지 않은 논쟁은 위험하며, 한국교회의 다양한 소위 성령론 논쟁들의 해결에 바빙크의 신학이 기여할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에 관한 그의 교훈이 절실하게 가르쳐져야 할 것이다.

만약 차교수가 강림 이라는 구체적 역사적 사실 대신, 오순절 성 령 만을 쓰면, 그의 주장은 정당하다. 그러면 제2의 축복이라는 도식도 제거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는 120명이나 오백여 형제들 (고전 15,6)처럼, 오순절 전과 그 이후를 동시에 살 당위성이나 가능성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 편이나 참여하는 인간에게도 (구원)역사의 진전은 중요하다. 차교수도 이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오순절 성령과 똑 같은 성령이 아무리 풍성하게 임재하여, 큰 역사가 나타나도, 사도시대는 아니다. 사도직이 단회적이기 때문이다. ... 사도들이 가르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 동질동등한 성령의 은혜로 불일듯 살아나도록 힘써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곧 신약시대에 알맞는 구원역사 또는 구원사에 어울리는 성령의 사역이다. 신 의 성도들과 교회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 차교수는 동의하길 원치 않겠지만, 이 점에서 우리는 그 동질동등한 성령의 은혜를 모두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바빙크의 가르침을 따라, 회중과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심을 믿는다 (cf. P. Althaus, Die Christiliche Wahrheit, 497).
 
우리는 차교수가 대속사역이라는 구원사와 오순절성령 사역이라는 구원사를 구별함을 동의한다. 그럼에도 이를 포함한 그의 좋은 의도가 잘못된 도식에 기초됨으로 인하여, 그가 즐겨 인용하는 바빙크를 정당하게 취급하지 못하고 바빙크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차교수의 바빙크신학 인용이 이미 해석이듯이, 누구라도 바빙크를 인용한다 하여 그의 권위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므로, 그의 신학에 관한 심도있는 연구로 그를 해석할 때, 개혁신학의 새로운 발전도 가능하여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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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의견 1

  • 중부 · 2011-07-18 07:54
    신학 대학원 시절 우리는 그를 차빙크라 불렀습니다......바른 인용의의 결여???? 감사합니다~~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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