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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의사(구원론)

구원의 서정 문제 - 싱클레어 퍼거슨

구원의 서정 문제 - 싱클레어 퍼거슨  책속에서 본 글들  
 http://juwana.blog.me/110003655103

 
구원의 서정 문제
신학의 역사를 보면,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신학과 기독론이 어느 정도 정립된 후에야 구원론의 문제에 대한 자세하고도 비평적인 탐구가 이루어졌다. 교부 시대에는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본성에 관한 질문들이 압도적이었다. 성령의 신성에 관한 주제조차도 거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련된 이차적인 문제로 정립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련된 질문들은 소위 속죄에 관한 고전적 이론들, 즉 안셀름과 아벨라르를 따르는 이론들에 관하여 토론하는 것과 함께 전면에 부상되었다.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구원론에 대한 결정적인 선언들이 추구되고 제시되었다. 칭의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고전적 해설은 트렌트 종교회의(1545-1563) 말기에야 공포되었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어떤 대표들은 믿음에 의한 칭의에 대하여 복음주의적인(루터파) 선언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어떻게 구원이 성취되었는가에 대한 해석은, 불가피하게 그 구원의 개인적인 적용에 관한 질문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세 신학의 주된 관심은 구원의 은혜를 성례에 연계시키는 것이었고, 따라서 의롭게 되는 과정(processus justificationis)에서 교회의 제사장적인 사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성령의 사역은 일곱 가지 성례의 시행에 한정되어 버렸다. 그러한 성례주의는 하나의 메카니즘을 생산하였는데, 이는 종교개혁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 의식의 시행에 의존하지 않는 성령의 주권적 사역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였다.
 
중세 신학은 주로 칭의의 과정에 집중하였으므로, 은총을 받기 위해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비중을 두었다. 선행적 은총을 받아 의지가 죄를 미워하고 의와 칭의를 사모하는 쪽으로 움직이게끔 하다 보면 그에게는 상습적으로 은총을 받는 성향이 굳어지게 된다. 죄에 대한 완전한 비탄이 결여된 불완전한 애통은 고해성사라는 수단으로 보충된다. 평생토록 충분한 세례의 은총을 단번에 받을 수 있는 의식이란 없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칭의를 향한 지속적인 과정에서 정규적인 행사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에는 어거스틴의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칭의는 의롭게 만들어져야 됨을 뜻하는 것이지(justum facere), 하나님의 안목에서 의롭다고 선포되고, 간주되고, 구성된다고 하는(종교개혁의 성경신학에 있는) 개념이란 없었다. 칭의가 내적인 의로움과 혼동되고, 법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면 개인이 완전한 성결에는 못 미치기 때문에 의로움은 결코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드물게 개인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계시 없이는 누구도 칭의의 복을 결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트렌트 종교회의는 구원의 확신을 부인하였고, 무시무시한 예수회 신학자 로버트 벨라르민(Bellarmine, 1542-1621)은 구원의 확신이란 개신교의 모든 이단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이라고 확언했다.
 
결국 칭의에 대한 논의들은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와 종교개혁을 향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투쟁은 많은 부분에서 중세적인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의 전환(그리고 중요한 여러 측면에서 역전) 여하에 달려 있었으며, 로마서 1:16-17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서 분출되었다. 이제야 루터는, 바울이 의로움을 획득하기 위한 자신의 업적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말미암는다고 설명한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이해에 강력한 지각 변동이 일어났고, 로마 교회에서 가르친 구원의 서정으로 인해 잘 못 해석되었던 분문이 이제는 천국을 향한 열린 문이 되었다.

우리가 주목한 바와 같이, 프랑스 태생의 제2세대 종교개혁자로서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약한 칼빈이 ‘성령의 신학자’로 불린 것은 결코 우연이나 과장이 아니다. 물론 칭의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로움은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전가되며, 스스로 취득한 것이 아니라 양도된 것임)가 새로운 가르침의 핵심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적용과 관련하여 비성례화와 이에 상응하는 성령의 역할의 회복을 수반한다. 성례가 그 능력을 벗기움 받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성례가 말씀과 성령의 연대 활동에 종속되었던 것이다.
 
중세 교회에서 성례는 칭의를 향한 노정에서 이정표로서 시행되었다. 후에 트렌트 종교회의의 가톨릭 신학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든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는 모든 복은 성례 제도, 특별히 미사와 성찬 등의 수단을 통해서 전달되고 그것들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성령이 각 개인으로 하여금 직접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며, 성례는 이 교제의 상징이요 증표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성령은 어떻게 성부와 성자에게 연관되는가?’하는 질문이 원인이 되어서 기독교 세계의 첫 번째 큰 분열이 있었다면, ‘어떻게 성령이 개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을 적용하는가?’하는 문제가 두 번째 큰 분열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식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라는 라틴어 표제 아래서 논의되어 왔다.
 
이 용어는 적어도 일반적으로 볼 때 자명하다. ‘서정’이라는 단어는 일련의, 한 묶음의, 한 가지 계열로 된 연속된 구조를 의미한다. 키케로(Cicero)는 극장에서 좌석의 일련번호를 매길 때, 그리고 배의 노 젓는 배열을 말할 때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구속의 적용에 관해서 사용될 때, 구원의 서정이란 각 개인에게 구원을 부여해 주실 때 구원의 다양한 측면이 질서 있게 배열됨을 의미한다. 특히 ‘어떤 방법으로 그 다양한 구속 적용의 측면들(칭의, 중생, 회심, 성화와 같은)이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는 면에서의 내적인 일관성과 논리성을 밝혀 보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것은 사실 중세적인 논의라기보다는 훨씬 고대의 질문이요, 이미 성경에 표면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예컨대 은혜와 율법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들 수 있다. 바울은 분명히 이 구원론적 문제가 성령론의 주제임을 명백히 지적하면서, “너희가 성령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라고 썼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토론 가운데 어떤 부분은 쉽게 참을성을 읽게 만든다. 자신이 종교개혁의 전통에 속해 있다고 느끼는 신학자들 사이에서조차도 서정에 관한 문제는 일치하지 않으며, 점차적으로 이 개념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이 되어 가고 있다. 더욱이 신학자들이 복음은 선포하지 않고 그 대신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구원의 서정에 대해 말하느라 낭비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반응에 내포된 반명제[복음의 선포 대(對) 구원의 서정]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는 구원의 서정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은연중에 반드시 표출되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의 복음이 선포되는 방식을 좌우하는 사고틀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이런 논의들은 성령이 개인에게 역사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내재된 논리를 분명히 인식하는 데 중요하다. p.108-111

성령 - 싱클레어 퍼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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