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신학의 등장
오순절 신학의 등장
근본주의의 한 종파로서의 오순절 신학
입력 : 2010년 07월 14일 (수) 23:11:31 [조회수 : 842] 김백형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출처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692
근본주의 신학은 오순절주의자들도 내포함을 앞서 필자는 언급하였다. 이유인즉 이들 역시도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설을 그대로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오순절 신학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필자는 오순절 신학의 특징을 이렇게 본다.
"오순절 신학은 중생 이후에 나타나는 성령 세례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죄인을 중생케 하는 성령의 사역 이후에 또 한 번의 성령 세례를 받아야 진정한 성도로의 인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중생 이후에 나타나는 성령 세례의 가시적인 역사는 바로 방언과 신유임을 강조한다."
물론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특징이 있지만 필자는 이것이 오순절 신학에서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라고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오순절 신학의 출발은 미국 캔사스 주 토피카에 소재한 벧엘 성서대학의 교장이었던 찰스 팔함 목사에게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1901년 1월 1일에 팔함 목사는 자신의 학교에서 방언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팔함 목사의 제자인 윌리암 씨모올 목사는 1906년에 '아주사'가에서 오순절 부흥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아주사가의 부흥 운동을 통하여 오순절 신학은 미국의 남부와 타 지방으로 확산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교회들은 계속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ies of God),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God), 완전복음 국제교회(the International Church of the Foursquare Gospel), 연합오순절 교회(the United Pentecostal Church), 갈보리 오순절 교회(Calvary Pentecostal Churcu), 세계 오순절 성회(the Pentecostal Assemblies of the World) 등의 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앞서 오순절 신학의 특징에 대해 필자는 짤막하게 언급하였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오순절 신학의 특징을 크게 3가지로 구분 짓는다면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1.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의미
2. 성령세례의 2차적인 가시적 역사로서의 방언
3. 성령세례의 2차적인 가시적 역사로서의 신유
무엇보다 먼저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의미에 대한 오순절 신학의 이해는 성령 충만과 성령 세례를 동일하게 본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죄인이었던 한 사람이 중생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1차적으로 전적인 성령의 사역임을 오순절 신학에서는 인정한다.
그러나 한 사람을 중생케 하시는 1차적인 성령의 사역만으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에 성도는 제2차적인 성령 세례 곧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오순절 신학에서는 강조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한 사람의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1차적인 사역 자체를 성령 세례와 동일하게 여기나, 오순절 신학에서는 그것은 1차적인 성령의 사역일 뿐이며 성도는 2차적으로 '성령 충만' 혹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다시 말해 오순절 신학에서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을 동일하게 여기며, 이는 곧 구원받은 성도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경험해야 할 2차적인 성령의 역사로 간주한다.
뿐만 아니라 오순절 신학에서는 성령 세례의 2차적인 역사로서의 방언을 강조하는데, 특히 고린도전서 12장은 오순절 신학에서의 방언을 언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성경 구절로 인용된다. 그런데 오순절 주의자들 가운데서도 방언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듯 보인다.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 2장에 언급된 것처럼 방언은 자신이 배우지 아니한 인간의 언어(타국어)로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방언은 인간의 언어로만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는 천상의 언어로 행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교회사적으로 볼 때에 방언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면 그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는 이들이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사도 시대를 거쳐 속사도 시대나 중세 시대 때에는 방언이 성행했다는 언급을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종교 개혁가들 가운데 마틴 루터는 방언이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성도들의 신앙을 위한 촉매재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요한 칼뱅의 경우에는 방언을 긍정적인 차원에서보다는 부정적 차원에서 언급하였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작금의 한국교회에 성행하고 있는 방언 문제에 대해서 은사 중지론의 입장과 은사 지속론의 입장 사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식의 관점은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만들 수 있다고 여겨 진다.
때문에 필자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다. 현재에도 방언은 존재하나 성도는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으로부터 기인한 방언이지, 아니면 다른 영으로부터 기인한 방언인지에 대한 분별력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된다.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성도는 방언 문제 및 이제 언급하게 될 신유의 문제에 있어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라 판단된다.
오순절 신학에서는 또한 신유의 사역을 중요시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도의 방언은 성령 세례의 증거요, 신유는 성령 세례의 계속적인 역사로 본다. 이와 같은 오순절 신학은 작금의 한국교회 안에도 깊게 뿌리 박혀 있다. 이는 모든 교파를 초월하여 존재한다. 특히 1960년대 이후에는 순복음교회뿐만 아니라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을 포함하는 개신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된다.
필자가 오순절주의자들을 바라볼 때에 매우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면 이들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었으며, 이론적이고 딱딱한 신학을 체험적인 신앙으로까지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 점에 있어서는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오순절 신학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 말씀보다는 성도들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경험을 더욱 더 신뢰하게 만들 수 있는 요지를 제공했다. 나아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는 목회자 자신이 마치 오늘날의 신사도가 되어서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신격화하도록 직간접적으로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 되었다.
근본주의의 한 종파로서의 오순절 신학
입력 : 2010년 07월 14일 (수) 23:11:31 [조회수 : 842] 김백형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출처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692
근본주의 신학은 오순절주의자들도 내포함을 앞서 필자는 언급하였다. 이유인즉 이들 역시도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설을 그대로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오순절 신학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필자는 오순절 신학의 특징을 이렇게 본다.
"오순절 신학은 중생 이후에 나타나는 성령 세례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죄인을 중생케 하는 성령의 사역 이후에 또 한 번의 성령 세례를 받아야 진정한 성도로의 인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중생 이후에 나타나는 성령 세례의 가시적인 역사는 바로 방언과 신유임을 강조한다."
물론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특징이 있지만 필자는 이것이 오순절 신학에서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라고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오순절 신학의 출발은 미국 캔사스 주 토피카에 소재한 벧엘 성서대학의 교장이었던 찰스 팔함 목사에게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1901년 1월 1일에 팔함 목사는 자신의 학교에서 방언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팔함 목사의 제자인 윌리암 씨모올 목사는 1906년에 '아주사'가에서 오순절 부흥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아주사가의 부흥 운동을 통하여 오순절 신학은 미국의 남부와 타 지방으로 확산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교회들은 계속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ies of God),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God), 완전복음 국제교회(the International Church of the Foursquare Gospel), 연합오순절 교회(the United Pentecostal Church), 갈보리 오순절 교회(Calvary Pentecostal Churcu), 세계 오순절 성회(the Pentecostal Assemblies of the World) 등의 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앞서 오순절 신학의 특징에 대해 필자는 짤막하게 언급하였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오순절 신학의 특징을 크게 3가지로 구분 짓는다면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1.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의미
2. 성령세례의 2차적인 가시적 역사로서의 방언
3. 성령세례의 2차적인 가시적 역사로서의 신유
무엇보다 먼저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의미에 대한 오순절 신학의 이해는 성령 충만과 성령 세례를 동일하게 본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죄인이었던 한 사람이 중생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1차적으로 전적인 성령의 사역임을 오순절 신학에서는 인정한다.
그러나 한 사람을 중생케 하시는 1차적인 성령의 사역만으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에 성도는 제2차적인 성령 세례 곧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오순절 신학에서는 강조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한 사람의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1차적인 사역 자체를 성령 세례와 동일하게 여기나, 오순절 신학에서는 그것은 1차적인 성령의 사역일 뿐이며 성도는 2차적으로 '성령 충만' 혹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다시 말해 오순절 신학에서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을 동일하게 여기며, 이는 곧 구원받은 성도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경험해야 할 2차적인 성령의 역사로 간주한다.
뿐만 아니라 오순절 신학에서는 성령 세례의 2차적인 역사로서의 방언을 강조하는데, 특히 고린도전서 12장은 오순절 신학에서의 방언을 언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성경 구절로 인용된다. 그런데 오순절 주의자들 가운데서도 방언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듯 보인다.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 2장에 언급된 것처럼 방언은 자신이 배우지 아니한 인간의 언어(타국어)로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방언은 인간의 언어로만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는 천상의 언어로 행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교회사적으로 볼 때에 방언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면 그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는 이들이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사도 시대를 거쳐 속사도 시대나 중세 시대 때에는 방언이 성행했다는 언급을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종교 개혁가들 가운데 마틴 루터는 방언이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성도들의 신앙을 위한 촉매재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요한 칼뱅의 경우에는 방언을 긍정적인 차원에서보다는 부정적 차원에서 언급하였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작금의 한국교회에 성행하고 있는 방언 문제에 대해서 은사 중지론의 입장과 은사 지속론의 입장 사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식의 관점은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만들 수 있다고 여겨 진다.
때문에 필자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다. 현재에도 방언은 존재하나 성도는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으로부터 기인한 방언이지, 아니면 다른 영으로부터 기인한 방언인지에 대한 분별력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된다.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성도는 방언 문제 및 이제 언급하게 될 신유의 문제에 있어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라 판단된다.
오순절 신학에서는 또한 신유의 사역을 중요시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도의 방언은 성령 세례의 증거요, 신유는 성령 세례의 계속적인 역사로 본다. 이와 같은 오순절 신학은 작금의 한국교회 안에도 깊게 뿌리 박혀 있다. 이는 모든 교파를 초월하여 존재한다. 특히 1960년대 이후에는 순복음교회뿐만 아니라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을 포함하는 개신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된다.
필자가 오순절주의자들을 바라볼 때에 매우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면 이들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었으며, 이론적이고 딱딱한 신학을 체험적인 신앙으로까지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 점에 있어서는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오순절 신학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 말씀보다는 성도들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경험을 더욱 더 신뢰하게 만들 수 있는 요지를 제공했다. 나아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는 목회자 자신이 마치 오늘날의 신사도가 되어서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신격화하도록 직간접적으로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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